제가 제시한 전근대시대 일본의 미친 세율에 대한 반박으로
그리고 니가 개간한 토지로 지배층이 수탈했다고 했는데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검지 이후로 일본의 토지는 항상 실제 토지 생산량과 괴리가 있는 수준으로 낮게 측정됐다. 이유야 간단하지. 전통적인 동양 농경사회에서는 완벽에 가까운 토지 조사를 폭정의 일부로 인식했거든. 그래서 실제 세수는 실제 토지에 비해 적게 걷혔고, 상품작물의 재배와 도로의 정비 등 기타 여러가지 상황에 힘 입어 일본의 봉건제는 서서히 붕괴되고 죠닌과 대지주들이 두각을 나타낸다. 이걸 서양의 학파에서 산업혁명에 본따 Industrious 혁명(근면)이라 칭한 것이고. 가령 당시 에도의 인구는 100만을 상회했는데 이는 동시대 세계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도시였다. 베이징보다도 많았거든. 직후 청나라의 미친 인구증가로 다시 베이징에 빼앗기지만 여기서 알 수 있는 점은 일본은 당시의 농경 기술력으로 도달할 수 있는 생산 한계점에 도달했고, 그 결과 마비키 같은 풍습이 생긴거다. 일본이 조선이나 중국의 쌀에 관심을 쏟은 건 일본이 가난하고 세금을 존나 뜯어가서가 아니라 조선의 쌀이 값이 싸서 그렇다.
존나 돌려 말했는데 직설적으로 말하자면 조선의 시장경제나 국가적인 발전이 더뎌서 물가가 일본에 비해 쌌다는 소리임. 폴란드 리투아니아 연방이 프로이센에게 역전당하듯이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가격의 상승에는 임금이나 생산력의 상승을 반증하는 요소도 있기 때문에.
솔직히 손도 아프고 내가 남의 나라 일을 이렇게까지 쉴드쳐줘야 하나 현타오고 그렇다. 예전에 네덜란드 학자가 쓴 日本近代史라는 책이 있으니 관심 있으면 한번 읽어봐라. 초반 3장정도 에도막부 시기 일본의 경제적 성장에 대해 기술하고 있다. 지금은 모르겠는데, 내가 본 판은 한자가 상당히 섞여있어 한자에 문외한이라면 읽기 어려울 수도 있다. 그럴땐 최근 한국에 출판된 이안 부루마의 근대 일본이라는 책도 추천.
이라고 답이 나왓습니다.
저보다 더 잘알고있는 듯 하여 데꿀멍당했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