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갈은 한민족 건국사의 당당한 한축이며 한민족 문화사!
옥저문화 관련 '연해주 불로치까유적' 본격 발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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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은 불로치까 유적 1호 주거지) 고대 옥저문화와 관련된 연해주 문화유적에 대한 최초의 보고서가 발간되었다.
3개 년 계획의 불로치까 발굴조사를 통해 연구팀은 수혈주거지 6기를 비롯하여 10,000여점의 유물을 소개하며, 이는 한반도 두만강유역의 초기철기문화와 동일한 것으로 밝혔다.
이번 연구를 통해 불로치까유적의 1호 주거지는 두만강유역의 호곡동, 호동유적과 동일한 문화라는 것이 밝혀졌으며 이는 북옥저(北沃沮)문화와 깊은 관련이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가 되었다.
문화재청 관계자는 "6일부터 불로치까유적의 동남편 일대를 대상으로 2차 조사를 실시할 예정"이라며 "보다 정밀한 조사를 실시하여 우리문화와 관련 깊은 자료를 지속적으로 확보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 |
북옥저(연해주 일대)는 B.C 28년 고구려에게 복속-삼국사기한. 러 공동 고고학 탐사로 본 발해 유적들
698년 대조영은 고구려 군사와 말갈을 이끌고
천문령 전투에서 당나라 군대를 대파하고는
발해를 건국 .
732년 9월 발해 장군 장문휴가 이끄는 발해 원정군은 당나라 등주를 공격하여 초토화 시키고 육지에서도 요서로 밀어 버림.(마도산 전투(마도산은 요서 지방에 있는 산)이다. 이는 장문휴 선단의 수군기동작전과는 별도로, 발해 무왕의 친정이라 할 수 있다.
『발해사연구론문집』을 보면 "발해의 무왕은 직접 많은 군사들을 거느리고 요하, 대릉하를 건너 당나라의 영주, 평주지역의 성읍을 점령하고 장성계선으로 진출"했다고 못박고 있다)
흑수의 땅은 모두 발해에 복속되었다.
-발해고 무왕-
발해가 점차 강성함에 따라 흑수 역시 그 소속이 되었다.
-당회요 말갈-
태종이 고려(고구려)를 토벌할 때에그 북부가 반기를 들고 고려(고구려)와 합세하였다. 고혜진 등이 군사를 이끌고 안시(성)을 구원할 때에 싸움마다 늘 말갈병을 앞에 내세웠다. 태종은 안시(성)을함락하고 (고)혜진을 사로잡은 뒤 말갈병 3,000여명을 모두 묻어죽였다.
-신당서 흑수말갈-
신당서에 흑수말갈전은 흑수말갈뿐만 아니라 말갈 전체에 관한 기록이지만
위의 기록은 그 중에서도 흑수말갈에 관한 내용입니다. 고구려와 말갈의 관계에서 자주 인용되는 주필산전투에서의 말갈은 흑수말갈인 것이죠.
발해의 경우는 기록에서도 나오지만 고고학에서는 더 확실하게 나옵니다.
고고학 발굴로 보면 8세기 초반에 실위지역에 흑수말갈이 이동한 뒤에 8세기 중엽에는 발해가 지배하게 됩니다.
그 지역은 만주보다도 더 북쪽에 있으며 스타노보이산맥까지 이르는 지역인데..오호츠크해 근처입니다.이 곳에서는 10여개의 발해 성터가 보고되고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