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NN 한국 최고의 여행지 50선에 선정되었던 순천 낙안읍성의 서민 주거 풍경
찬란한 에도시대 어쩌고 하지만 에도시대고 잽 대다수 서민들의 실제 삶
에 대해서 이야기를 꺼내는 잽극우나 빠돌이들은 없죠. 그러면서 일부 소수의
위정자나 대상인의 저택이나 지배 무사들의 특정 생활상을 가지고 찬란
한 에도시대 어쩌고 쳐하면서 조선의 서민은 어쩌고 까기 바쁜 ㅋ
(잽은 에도 막부시기에 조선통신사가 지나가는 곳에 한해 쌀생산량의 12퍼센
트를 쏟아부으면서 도로정비니 건물이고 단장한다고 일찍이 그리
부산하고 정신이 없었다고 전해지면서 막부 재정이 휘청했던. 이에 따른 강
제 노역도 상상불허입니다. 누구 블로그 보니 잽은 강제 노역 없는데 어쩌
고 웃긴 소리하면서 조선을 까더만 ㅋ)
근데 이 잽극우나 빠돌이들은 정작 우리의 서민주거에 해당하는 그것도 쿄
토, 오사카나 에도등 중요 대도시의 실제 서민 주거 동네인
시타마치(下町) 전경과 주거 양식에 대해서는 거의 소개를 하지 않고 있는데
함 제대로 살펴 보면 정말 기가 찹니다. ㅋ
에도시대란 도요토미의 임진왜란 패배 이후 도쿠가와가 정권을 잡고
에도 막부시대를 연 1603년 3월 24일부터 1868년 간 즉 265년간을 가리키
는데 주변 영주들의 반란을 막기 위해 180여명의 영주들의 가족들을 볼모씩
으로 해마다 불러 들이다 보니 저택 건설이고 사람들이 몰려 들게 되면서
100만의 대도시 어쩌고 잽극우들 신나게 연설하죠.
근데 정작 이 100만이 골때리는 100만입니다.
삼국시대도 고구려 3경에 백제 위례성이나 사비성 신라 서라벌이고
로마 이상의 대도시급에 고려도 4경체재(개경(개성),서경(평양)
남경(서울),동경(경주)의 위용을 보이지만 경주 서라벌이
과장 없이 100만 어쩌고는 천년의 오랜 시간동안 수도로 점차 그리고 계
획적 설비에 따라(실제 경주일대 도시유적을 발굴하다 보면 이미 이때
수레나 마차가 지나단니는 도로와 인도구분 그리고 수로 시설이고 개인집 마
다 우물 그리고 전성기에는 서라벌 전체가 기와로 도배되고 금기와니 개인집
마다 슟으로 밥해먹는 기록들이 나올 만큼 번성하고 선진적 도시설계 모습과
주거생활을 보이는) 만들어졌지만 에도나 오사카등이고 대도시로 몰려든
대다수 서민들은 밀집 닭장에 내부적으로 개인 공간이 거의 없이 외부적으로
이웃과도 사적인 구분도 없이 부실한 목재 가옥에서 살다보니 밀려든 인구
밀도에 다닥 붙은 가옥으로 인해 대화재가 빈번하게
일어났고 당연히 대소변같은 초과과잉 처리 문제들이 대두될 수 밖에 없으
니 오물로 인해 주변 환경도 불결하고 전염병이 만연하게 살았다는 사실이
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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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7년의 메이레키(明歷) 화재를 상세히 기록한 ‘무사시아부미’에 실린 그림. 현재 도판은 도쿄 도립중앙도서관에 있다. 출처:소방방재박물관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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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사카 역사박물관에 전시된 에도시대의 시타마치(下町) 전경. 지진에 대비하기 위해 내진구조를 적용하다 보니 지붕에서부터 바닥은 물론 벽까지 온통 목재를 사용한 것이 일본의 가옥들이었다. 게다가 한정된 땅에 한데 모여 살다 보니 한 곳에서 화재가 발생하면 금세 마을 전체로 불이 번질 수밖에 없었다.
당시 지배계층이 사무라이였기에 도시계획이 철저하게 사무라이 위주로 이뤄졌던 까닭에서다. 예를 들어, 수도의 노른자위에 해당했던 에도성과 ‘조카마치’(城下町)로 불리는 에도성 주변에는 봉건영주와 사무라이 및 그 가족들만 거주할 수 있었다. 무려 6할에 해당하는 에도의 광활한 지역이 이들 몫이었다. 이와 함께 나머지 4할 가운데 절반은 다시 절과 신사가 차지해 갔다. 결국 나머지 2할 땅에 에도 인구의 절반에 해당하는 60만명 이상이 몰려 살았다고 ‘일본재이사’(日本災異史)의 저자, 고시카 시마하테(小鹿島果)는 증언하고 있다.
21세기의 서울로 빗대 말하자면, 총 25개 구 가운데 5개 구에만 서울 인구의 절반인 600만명이 산 셈이라고나 할까? 한 개 구당 평균 인구 수가 120만여명에 달하는 초과밀 지역, 바로 아랫마을이란 의미의 ‘시타마치’(下町)가 콩나물 시루마냥 빽빽하게 들어서 있던 에도의 실상이었다. http://www.segye.com/content/html/2011/01/05/20110105003410.html
자세한 내용은 링크 글을 참조 하시고 에도시대 찬란한 에도 어쩌
고 쳐하지만 실제 대다수 서민들의 삶은 저런 닭장주거에서 화재
가 빈번한 일상속에 자신의 주거지가 언제 불타 없어질지 모르는
주거환경과 불결한 생활속에 살았다는 사실이죠.
(왜 에도시대 이런 대화재가 빈번했는지는 이런 후진적 주거환경
과 목재재료, 후진적 정치,사회제도상(빈부차 극심)이 총체적으로
한몫 제대로 차지하고 있다는 말임.)
그기에 비해 우리의 지방 읍성이라도 서민 주거의 구조를 보면 알
겠지만 각 이웃간에 흙이나 돌담장으로 구분이 명확하고 그기에
주거내에서도 안채와 사랑방이고 각 개인간의 프라이버시를
침해하지 않게 따로 건물이 설정되어 있는데다 온돌의 깔쌈한 선
진 난방방식에
(잽은 당연히 이런 난방도 서구식 벽난로형의 공기순환방식도 없
었음) 황토 흙과 짚을 이용한 통풍,보온등 매우 친환경 웰빙 주거
방식으로 실제는 훨씬 앞서 있었다는 말이죠.
그기에 이 왜국은 그리 빈번한 화재에도 불구하고 에도시대에 가
서야 대화재를 기점으로 겨우 생겨나지만 울 나라는 이미 15세기
초 세종대왕이 소방관청으로 금화도감을 두고(고려시대에도 금화
제도가 있었던) 백성들도 화재 계몽과 방재시스템을 마련하고
(물을 뿜는 급수비차까지 만들어 사용)
이후에는 성종시기에는 오늘날 현대 소방개념인 24시간 항시 대
기조의 멸화군을 만들어 이미 운영하고 있었다는 말이죠.
그리고 이건 잽의 시대별 성장점입니다.
그 찬란한 에도시대가 143센티로 평균키가 최저점인 시대임 ㅋㅋ
이전에도 몇번 올렸지만 이 고고학적 내용이 정확히 뭘 말하는지
이해할 필요가 있다는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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