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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5-07-09 15:32
[기타] 위화도 회군
 글쓴이 : 젤나가나가
조회 : 3,662  

고려시대 이성계가 명나라 전쟁때 위화도 회군과 쿠데타를 일으킨건 결과적으로 좋은 선택이었을까요?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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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문 15-07-09 17:00
   
그놈의 욕심이 과해서 민족의 기개를 높일수 있던 시기를 놓진 만고의 역적이죠.
mmoo 15-07-09 17:11
   
어차피 요동점령에 대해서는 회의적인 시각이 많아서... 당시 왜구 침략만으로도 국운이 위태로울 지경이었는데 요동점령을 한다는건 무리수였죠.
mmoo 15-07-09 17:16
   
군사를 일으켜서 상대 군대를 때려부수는 것과 땅을 점령하고 영토로 만드는건 완전히 다른 문제입니다. 전자는 장수의 재능에 의지해 할 수 있지만 후자는 국력이 뒷받침 되지 않으면 불가능해요.
플라이어 15-07-09 17:54
   
이성계가 회군을 하지 않았다면 지금 우리가 한글을 쓰지 못하고 있었겠죠. 저는 조선 개국에 대해서 좋게 보는 입장입니다.
고려 말기 시대가 얼마나 병크였습니까.
외적의 침입. 중앙집권의 약화 친원파와 친명파간의 갈등.

조선 개국의 의의는

한반도 내 사회 안정 및 문화적 경제적 정치적 진보.

한글 창제

조선이라는 국호를 사용함으로써 얼핏 잊혀질뻔했던
고조선이라는 한민족의 오래된 국가가 다시 부활할수 있었음

등등.. 여러가지가 많죠

문제는.

조선이라는 나라의 수명은 임진왜란 쯤까지였다고 생각합니다.

1600년대 초반. 임진왜란 전후를 시발점으로

중국 대륙은 명에서 청으로 국가가 교체되었으며
청나라는 만주족 국가이긴 하나 명나라 시대 때보다 많이 발전하였습니다.

일본은 전국시대가 마감되고 도쿠가와 막부가 들어서면서 에도시대의 막을 열었습니다. 에도시대는 말 그대로 메이지유신까지 일본의 근대화 근간을 만들어준 시대죠.


그런데 한반도는?

그냥 조선이 계속 해먹었습니다.

그렇게 되면서

왕조는 오래되어 늙어갔고

해묵은 사림 선비님들의 정파 갈등 등으로

발전하지 못하죠.

영정조 시대 동시대 청과 일본을 보면

정말로 매우 많은 발전을 하게 되는데

조선은 이제서야 민간 문화가 발전하는 수준에 그쳤습니다.

그리고 세도정치로 끝점을 제대로 찍었죠.

그래서 많이 아쉽습니다.

어떤 역사학자가 말하길

모든 나라의 전통문화는 200년 이전에 생긴 문화다 라고 할 정도로 근대시기의 국가 수준이 현재까지 영향을 끼칩니다.

한반도는 세도정치 구한말 일제 강점기 남북 분단이라는 200년이 넘는 암흑기를 보내면서 많이 쇠퇴해버렸죠...

전통문화라는게 이미 동양에선 서양문화의 유입으로 명맥을 이어나갈뿐 새로운것을 창조해나가는게 어려워진 상태인데

앞으로도 우리 전통문화가 이대로 어떻게 될지 암담합니다.
     
두근두근 15-07-10 08:38
   
잘생각해보시죠 고려말기가 더 막장이었는지 조선말기가 막장이었는지 전 후자라고 말하고싶지만요....
          
힘이곧정의 15-07-10 12:31
   
확실한건 고려말기보다는 조선초기가 좋았단거죠.
          
Windrider 15-07-12 18:04
   
조선후기가 더 막장이라는데 한표.
mymiky 15-07-09 18:25
   
당시, 요동땅이 비워있어 먼저 먹는 자가 임자인데, 이성계 쌍+놈이 뒷통수 때리고, 돌아온 반역자라니;;
말하는 사람들이 종종 있는데 ㅋㅋㅋㅋㅋ

희안한 사람들이죠;;
당시 요동땅이 비워있다? 누가 그럼?-.-
당장, 요동으로 출병할수 있는 명군만 13만 정도 되었던가? 알고 있습니다.

어차피, 공민왕의 1차 요동정벌때 드러났던거처럼,
당장 발자국 찍기엔 성공하더라도 계속 수성할수 있느냐?는 또 다른 문제죠.

아마? 우왕의 2차 요동정벌이나 // 정도전의 3차 요동정벌도 그닥 차이는 없었을 겁니다.

사실, 3개의 요동정벌 중에, 그나마 명분이나 실력이나 타이밍이 좋았던
공민왕의 1차 요동정벌이 실패한 마당에, 그것보다 더 상황이 안 좋았던 2,3차는,,
걍.. 우리 역사의 떡밥일뿐...

민족의 자존심은 좋은데, 현실을 호도하면 곤란하죠;;

글고, 당시 고려의 상황을 보면,
패권전쟁을 지속 하기에도 무리수가 많았던건 분명한 사실이고,
외부보다 당장 제코가 석자라고,  내정에 힘써야 할 상황이였기 때문에,
차라리 재건축 하는 식으로, 새나라를 개국하는 편이 좋았다고 생각합니다.
멍게 15-07-09 23:57
   
어떻게 됬을지는 모를 일이죠
역사에 만약을 가정하는 순간 온갖 상황이 다 바뀌기 때문에 알 수 없습니다.
중용이형 15-07-10 07:35
   
누구에게나 좋았다고 말하기는 어렵겠지만 당시 고려는 개혁이 필요했던거 같은데 이성계를 필두로한 개혁파들이 권력을 틀어쥐게 되는 결정적인 사건이 바로 이성계의 회군이었으니까요.

결과도 좋았다고 봐야하지 않나 싶어요.
굿잡스 15-07-10 13:41
   
근자에 고려가 표문을 상주하는데 언사가 많이 부실하여 짐이 이미 담당 관청에 이를 규명하도록 명했다. 듣자하니 그들은 수도 개경으로부터 압록강에 이르기까지 요충지에 비축하는 군량이 매 역마다 1, 2만서 혹은 7, 8만석 혹은 십수만 석에 이르며 사람을 보내 동녕부의 여진을 유인하여 국경을 넘어오게 하고 있으니, 이는 그 뜻에 반드시 깊은 음모가 있는 것이다...(중략)...지금 요동은 군량이 모자라 군사들이 굶주리고 고단한데, 만약 즉시 사령창의 식량을 내어 그들을 구휼하지 않는다면 반드시 고려로 하여금 도망병을 꾀어 드이려는 마음을 일으키게 할 것이니 좋은 계책이 아니다. 만일 고려가 20만 군대를 내어 쳐들어오면 여러 부대는 어떻게 막겠는가. 이제 건축과 보수를 잠시 정지하고 임시 막사를 지어 10년 간 거주한 후에 다시 공사를 시작하라. 옛 사람의 말에 사람이 수고로우면 화란의 근원을 막을 수 있다고 했으니 깊이 생각해 볼 일이다.

-태조고황제실록 1395년(위화도 회군 7년후) 4월.
비좀와라 15-07-10 13:52
   
위화도 회군에 논의에 앞서 위화도 위치를 규명해야 될 것 같습니다. 흔히 위화도를 압록강 부근이라 하고 만주는 공지라 하는데 동북면과 서북면이 만주의 행정기구 라는 것은 아시는 지요.  면은 여진족의 행정기구 명칭입니다. 식민 사관 매식자가 억지로 고려의 영토를 한반도 축소 시키다 보니 이상한 결과나 나온 것이지 면(面)은 여진족의 행정기구 명지자 지금도 우리가 쓰는 명칭입니다. 쌍성의 위치는 지금도 모르지만 내몽고로 추정하기도 합니다. 결론은 최소한 공민왕 때에는 이미 만주을 완전히 장악하고 있었고 명과 일전을 할 수 있는 국력 이었다는 것 입니다.

명나라의 철령에 관한 영토 주장은 고려에 대한 직접적인 침략의 의사를 밝힌 선전포고 입니다.  그래서 방어를 위한 선제공격으로 출병 한거고요 이미 최영이나 이성계등은 몽고군과의 연합으로 주원장 등의 홍건군과 한번 맞 붙어본 경헙이 있기에 최영이 섣부른 결정을 내렸다 보기는 어렵습니다.

결론: 요동 출병은 단지 정치적 위세를 보이기 위한 무모한 결정으로 보이지 않고 나름 세밀한 분석에 의해서 출병한 거로 위화도 회군을 주도한 이성계나 정도전은 개xx 라는 겁니다.
굿잡스 15-07-10 13:56
   
위에 보니 무슨 요동정벌을 민족적 자부심 어쩌고 식으로 말하는데 당시의 시대상이나 고려 입장을

제대로 이해하지 않는 소리같군요.

현재 만약 독도에 잽이 침탈해오면 그냥 넋놓고 보실랍니까???

남북국시대의 발해 멸망 이후에도 후발해는 여전히 건재해서 요나라를 3차에서 궤멸시킨

동쪽의 고려와 서쪽의 송이 주축이 되고 발해 왕계나 귀족에 의해 후발해국도 연합

전선을 펴고 있었고 이후 이런 바탕에서 신라계황제와 발해인연합의 금나라가 패권을 잡고 이후

몽골에 깨지면서 요동이 일시 공백기를 가지지만 이후 요동일대는 다시 고려의 자치권아래 고려인

들이 생활하면서 고려의 내지격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말입니다. 이후 1375년 몽골을 몰아낸

명은 요동에 정요전위를 설치하고 2만 이상의 병력을 주둔시키면서 명 태조는 고려에 철령 이북, 이

동, 이성의 땅은 개원에 속하며 이 지역의 토착민, 고려인, 몽골인, 여진인은 요동도사의 관활하에 둔

다는 통보를 일방적으로 하게 됨. 과연 그 시대 우리 고려인들이, 조정에서 그대로 네하고 받아

들이는게 정상 같은지???????

요동정벌이 무슨 마냥 자부심 고취?? 당시 1차 요동 정벌 역시 단순히 새로운 지역의 개척이

전혀 아니라 그곳의 우리 고려백성들을 안녕케 하기 위한 중앙정부의 출정식으로 고려사 역시

기록하고 있고 2차 요동정벌 역시 고려입장에서는 도저히 묵과할 수 없는 당연한 시대적 조치였군요.

그리고 제가 보기는 3차 정도전의 요동정벌은 훈련이나 무엇보다 매우 중요한

군수 보급에서도 상당히 체계적 구체적으로 준비되고 있어 이전 2차때보다는 내부적으로나

상당히 성공확률이 높았다고 보여지는.(그리고 요동은 고려보다 초기 명이

연고도 지리적으로 상당히 낯설고 제대로 체계도 잡히지 않던 시절에 북원과의

긴장관계는 이후 가장 강성했다는 영락제 기간에도 계속되었음.괜히 명기간동안

북로남왜 어쩌고 이야기가 나온게 아닌.)
굿잡스 15-07-10 14:04
   
그리고 요동이 왜 중요한가 하면

결국 조선이 요동을 제대로 먹지 못했기에 이후 만주일대 여진족의 발호가 거세지고 후금이

들어선 배경이 된 것임.

이게 무슨 말인가 하면 삼국시대 부여고 그를 흡수한 고구려는 요동을 강력히 틀어 지고 있다보니

그 안쪽 여진족(말갈)은 전투력은 뛰어났지만 이들도 수렵생활을 해도 일정한 안정적 문화, 상업 교류가

필요하다 보니 이런 서쪽 교통로를 확실히 우리가 잡고 있었기에 특히나 흑수말갈이 고구려에

철저히 복속되어 휘하 부용세력으로 전투력을 발휘했고 이후 발해시대에 잠시 당과 이런 조짐이

나오자 발해 무왕이 다시 틀어지면서 아래에 두게 되죠. 그런데 이런 발해가 망하고

흑수말갈일대가 서쪽으로 서토와 직접적 교류가 이루어지게 되면서 통제권을 점차 벗어나게

됩니다. 이런 가운데 이런 흑수말갈 지역에 신라계가 통합하고 이들은 동만주의 후발해와 요나라

사이에서 알력을 이용해 성장해서 이후 후발해까지 먹고 요를 멸망시켜 버리는데 이런

형태가 조선시대에도 조선이 여진족을 세력권에 두고 일정하게 복속을 시켜 놓지만 이들은

명과 조선을 오가면서 그들 세력을 계속해서 키우게 되면서 독자성이 부각된 것이죠.


역사에 만약이 없고 여러 변수들이 나올 수 있지만 여전히 명 이후에도 북원 세력은 건재했고

고려 말이나 조선이 요동을 먹으면서 이런 여진족에 일정한 물자 지원 아래 고구려처럼 복속시켜

휘하 전투력으로 제대로 재편하고 넓어진 요동 일대의 곡창지대까지 먹으면서 북방의 북원등과

연계했다면 명나라도 쉽게 조선을 넘보기는 힘들었을 겁니다.(물론 한반도 일대 단독의 조선도

15세기 전후는 명이 제대로 공략하기 쉽지 않았던 대군과 정예를 운용했던 시기였고)
비좀와라 15-07-10 16:12
   
만주 내몽골과 발해만의 중요성은 이 지역의 정치적 변동이 일어나면 한반도나 중국만이 아니고 유라시아 전대륙으로 파급이 된다는 것을 지난 역사를 통해 일 수 가 있습니다. 일찍이 독일과 러시아는 이 정치적 변동의 늘 피해를 입었기에 히틀러나 스탈린은 이 지역을 굉장히 중시 여겼다고 합니다. 중국의 동북공정은 정치적인 면을 봤을 때 단순히 고구려의 역사나 북한 땅의 욕심이 아니라 이 지역의 영구적 정치적인 안정을 꾀한 그들의 자구책입니다.

중국은 이 지역의 변동이 자국의 재앙으로 변함을 최근 일본의 만주국 성립과 더불어 중일전쟁으로 확인 하였기에 이 지역의 정치적인 안정이 그들의 사활적 이익으로 동북공정은 더욱 가속화 되면 되었지 중단하진 않을 것으로 보이네요.
mmoo 15-07-10 23:53
   
위에 착각하시는 분들 많으신데... 요동이라는 지역의 중요성이 문제가 아닙니다. 그곳이 동북아의 요충지라는거 모르는 사람 없습니다. 실제로 그곳을 경락할 역량이 고려에게 있었느냐가 중요한거죠. 실제 그럴 역량이 있었다면 그곳을 취함이 마땅합니다. 근데 그럴 역량이 안됐으니 문제인거죠.
mmoo 15-07-10 23:56
   
그 땅에 고려인이 얼마나 살았던지간에 중앙정부의 행정력이 미치지 못하면 그냥 남의 땅인겁니다.
     
굿잡스 15-07-11 15:46
   
mmoo >??

ㅋ 이 사람은 뭔 정말 알고 어쩌고 하시남? 역사 토론을 할려면

최소한 기본 사료나 뭔 근거를 가져와서 어쩌고 떠들길. (본인 조차 제대로 아는 것

없는 수준에서 그냥 몇자 적으면 그게 역사고 토론의 기본인가?)

애초에 심양등 요동은 우리 고구려인들이 오랜시간 도시문명을 개척하고 상주하면서

중대형 밀집 성곽을 축조한 지역이였고(최근에는 이쪽 봉황성(일명 오골성으로도

불리면서 15.955㎞에 이르는 10만 상주의 대규모 성곽으로 이곳이 황해도의 한성을

(남)평양이라고 하듯 (북)평양지역으로 보는 곳으로 평양이라는게 특수 고유 명사가 아

니라 여러개를 지칭하는 일반명사라는 연구들이 나오고 있는 실정에 고구려는

다중 수도체재를 실제 운용.)

이건 이후 발해시대에도 다르지 않았고 요금시대에 가서 이주정책에 의해 공백기가

있었지만 이 지역의 본격적 개발도 대몽항쟁시기에 이미 고려인 홍복원(洪福源)에 의해 다시

본격 개발되기 시작한 곳임. 들어는 보셨음? 그래서 이 일대를 홍복원 일가가 다스리다

고려왕족인 영녕공이 몽골에 들어가면서 투몽민도 늘어나자 홍복원 아들인 홍다구를

관령귀부고려군민총관(管領歸附高麗軍民總管)으로 왕을 안무고려군민총관(按撫高麗軍民

總管)으로 심주(瀋州)일대를 다스려 상호 견제하도록 하다

이후 몽골 원이 서토를 완전장악하고 행성체재를 정비하게 되는데 심양행성을 설치

하는 과정에서 우리가 아는 심양왕 제도가 나오면서 고려왕이 심양왕을 겸직,

이 요동일대의 고려민들의 효율적 관리 통제책이 나온 일련의 배경들임. 이후

이 이 홍씨 집안에서 자신의 권력이 축소되자 원조정에 끊임없는

견제소리를 내면서 고려왕이 심양왕을 겸직하는 대신에

고려심왕식으로 이 일대는 계속해서 고려왕계하에서 70여년간 자문등 행정관리의

영향력이 계속되고 있었고. 학계 연구에서도 요동일대에 최소 못해도 3~4만명에서 최

대 8~9만명으로 거의 10만의 상당한 고려 인구가 흘러들어간 것으로 추정함. 이런

배경때문에 이후 원의 세력이 약화되고 원명교체시기에 고려 공민왕은 이 요동 일대가

고려의 당당한 자국내 영토임을 재확인 과정에서 요동출정등이 나온 것임.(무슨

새로운 개척이니 무슨 뜬금없이 고려가 새로 관리 어쩌고가 아니였다는 말)

이 요동일대는 원이 세계 경영을 하면서 동서로 역참 제도를 두면서 교통과 물류의

교류를 대단히 체계적 활발히 해왔고 요동은 그런 원과 고려간의 정치, 행정

뿐 아니라 경제 교류의 교착지로 상당히 중요했던 곳이였기에 요동일대에서 식량이

부족하면 한반도 일대에서 비축분을 방출하고 한반도일대가 기근이 들면

요동일대의 식량을 지원하는 등 인적, 물적으로 오랜기간 상당한 교류활동들이 나왔

던 상황으로 이미 공민왕 이전에 우리 고려 내지격의 지역이였고 역사의 활동무대.
mmoo 15-07-11 00:29
   
1차 요동정벌때 최대로 잡아도 10만 이하로 예측되는 병력의 보급도 실패해서 함락시킨 요동성을 버려두고 퇴각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게다가 이후 활발해진 왜구의 공격으로 개성이남의 곡창지역이 아예 쑥대밭이 된 상황에서 어떻게 대군을 일으켜 천리길을 진군해 요동을 점령하고 그곳의 주민을 먹여살리고 사방의 적을 막아낸단 말입니까?
     
비좀와라 15-07-11 01:22
   
일단 고려라는 나라의 시스템의 이해가 있어야 겠지요. 고려는 봉건제 국가입니다. 중앙 집권적인 국가 아니고요. 그러기에 동북면 이나 서북면이라는 행정기관을 세우고 책임자를 세웠다는 것은 고려가 완전히 장악 했음을 의미 합니다. 이성계의 고향이 길림이나 장춘으로 추정되고 있지요? 이씨 일가가 고려에 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쌍성 공략 때 부터인데 쌍성의 위치를 식민사관에서는 모른다 하였는데 최근 쌍성유적이라 추정 될만한 유적이 내몽골에서 발견 되었습니다. 이자춘은 고려에 귀속하면서 동북면 만호가 됩니다. 일단 이차춘이나 이성계 쫒겨 났다는 기록이 없으니 만주는 확실히 고려의 영토였음을 알수 있고 고려의 통제하에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요동의 위치에 관해서 식민사관이 고려의 영토를 한반도로 쪼그려 트려 놓고 요동의 위치를 추정해 놓아 엉뚱하게 해석되고 있는데요 동북면과 서북면의 이름만 보면 만주 전역이거든요 그럼 요동의 위치는 어딜 까요?  조선이 만주를 상실한 시기는 많이 잡으면 청의 건국시요 늦게 잡으면 강희제가 봉천성을 설립한 후로 추정이 되고 있습니다. 그전에는 조선의 영토였고 고려의 영토 였습니다. 동북면과 서북면을 양계라 하는데 여기는 양계는 고려장성을 기준으로 나눈 것이라 합니다. 고려장성이 만주 한 가운데를 뚷고 지나가는 것을 표현한 지도 원본이 서울대에 있다는데 공개를 안하고 있습니다. 왜 일까요? 영인본만 나돌아 다니고 있지요. 이제 만주가 확실히 그 당시 고려의 영토였슴을 아시겠죠? 윗글의 서북피아양계만리이란지됴西北彼我兩界萬里一覽之圖를 참조 하세요.

보급은 자국의 영토라 해도 실패 할 수 있죠 언제나 성공해야 하나요? 북관 대첩비를 다룬 역사 스페살에서 본 내용인데 가등청정이 함경도 공략을 위해서 함경도 정보수집에 총력을 기울였고 그것이 일본에 있더군요 그 정보에 따르면 함경도의 생산량이 상당하더라고요 일단 정보의 신뢰성을 고려하더라도 함경도(물론 그 당시의 합경도는 만주와 연해주를 포함 한 것이라 보아야 함)의 생산량이 상당한 것임을 알 수 있고 개경의 곡창지대에 의존하지 않아도 충분히 보급이 될 수 있다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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