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0年といえば、日本統治の真っ只中で、日本も学制を整え、私立学校も作られ、朝鮮人社会でも「文盲退治運動」だ、文字を教える「夜学運動」だ、という社会運動(文字を知ると同時に抗日運動の細胞組織でもあった)が活発に行なわれていた頃ですが、それでもこの数字です。これより40~50年以上前の李朝末期はもっとだったでしょ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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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本海側の港町である元山(げんざん、ウォンサン)の統計を研究者の本で見たことがありますが、元山の開港時(李朝末期)識字率が男は13~15%ぐらい。女は7%ぐらいでした。
1930년은 일본 통치의 한복판이고 일본도 학제를 갖추고 사립 학교도 만들어져 조선인 사회에서도 "문맹 퇴치 운동"이다, 글을 가르쳐"야학 운동"이라는 사회 운동(문자를 알면 동시에 항일 운동의 세포 조직이었다)이활발히 진행되던 시절이지만, 그래도 이 숫자입니다. 이보다 40~50년 전의 이조 말기는 더 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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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해 측의 항구 도시인 원산(주먹은 응, 원산)의 통계를 연구자의 책에서 본 적이 있는데 원산의 개항시(이조 말기)문맹률이 남자는 13~15%정도. 여자는 7%정도였습니다.
・ 女性と教育
李朝末まで女性の教育機関はありませんでした。
「書堂」という漢籍(漢文)を教える寺子屋みたいな所も、実は女子は排除されていて入れませんでした。例外的に通った子もいましたが、総督府の統計では書堂に通う人数の0.3%程度に過ぎなかったそうです。
李朝末、あとわずかで李朝が終わるという頃に、欧米宣教師たちが女子学校を作り始め、高宗という王様がかわいがってた側室も貴族の子女のための女子学校を作ります。が、大多数の平民の女性には教育機関がありませんでした。
여성과 교육
이조 말까지 여성 교육 기관은 없었습니다.
"서당"라는 한서(한문)을 가르치는 서당 같은 곳도 실은 여자는 배제되어 있어 들이지 않았습니다. 예외적으로 다닌 아이도 있었지만, 총독부 통계에서는 서당에 다니는 인원의 0.3%정도에 불과했대요.
이조 말, 그리고 짧은 조선을 끝내는 때에 서양 선교사들이 여학교를 만들기 시작해 고종이라는 왕이 좋아하던 후궁도 귀족 자녀를 위한 여자 학교를 만듭니다. 그러나 대다수의 평민 여성에는 교육 기관이 없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