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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5-04-30 22:03
[기타] 단재 신채호의 독사신론(讀史新論) 2/3
 글쓴이 : 청실홍실
조회 : 2,556  

3장 부여족 대 발달시대

 

이 장은 삼부여가 분립했던 시대에서부터 삼국 초기 시대에 이르기까지 우리 부여족이 어떻게 번성하고 쇠퇴하였으며 우리 부여족이 다른 종족과 어떻게 관계되는가를 일일이 상세하게 서술하여 1) 민족주의를 밝히며, 2) 국가정신을 발휘하며, 3) 우리 고대사에 빠져있는 부분을 보충하며, 4) 수천 년 동양의 역사에서 우리 민족이 처한 위치를 논하고자 한다.

아아, 한 민족이 번성하고 쇠퇴하는 것이 과연 아득한 천운에 매여있는 것인가? 아니면 순전히 인간의 만듦에 따라 나옴인가? 부루 이후의 역사를 읽어보면 어찌 그 소침(銷沈)의 운명이 천년의 오랜 기간을 겪어왔으며, 삼국시대 초기에 이르러서 또 어떻게 하여 하루아침에 발달의 힘이 빨리 증가하였는가? 대개 단군 이후 2천여 년 동안 부여족의 발자취가 압록강 이동으로 한치라도 건너온 일이 있는가? 대동강 청천강 유역은 단지 기씨 위씨 유씨(劉氏: 한무제 4군) 등 중국민족의 수라장이 되며 강원도 함경도 지방은 오직 저 말갈족 예맥족 등 각기 야만 민족들의 활동무대를 이루고 “근래 모씨가 대한지지(大韓地志)를 편찬하였는데 고사에서 말한 부여와 해부루가 동해안으로 옮겨 살았다는 구절로 인해 잘못된 단정을 내리어 말하기를 동해안은 곧 강원도요 강원도는 곧 이후의 예맥의 땅이니 그러한즉 예맥이 모두 단군의 후예라 하였으며, 또 말하기를 한나라 무제에게 항복한 예족의 임금 남려가 곧 해부루의 아들 약손(若孫)이라 하였으니 그 망발이 아주 심하다. 만일 이 동해안을 강원도라 할진대 해부루가 옮겨 살았을 때에 그 옮겨왔던 길이 어디를 거쳐 왔겠는가? 평안도를 거쳐왔다면 이때 평안도는 지나 민족이 바야흐로 강성하였으며, 함경도로 거쳐왔다면 이때 함경도는 말갈족이 바야흐로 강대하였으니 그가 전국민을 이끌고 멀리 옮길 때 어찌 적국의 중심을 뚫고 이 지역에 이를 수 있었겠는가? 아 이러한 주장은 논란을 기다릴 것 없이 스스로 없어질 것이다.”

한강 이남에는 토착 야만 종족들이 활개를 치고 있었다. 대개 삼국시대 이전의 우리나라 역사를 읽어보면 이 삼천리 강산에 살았던 민족이 조금도 부여족의 모습을 띠고 있는 자들이 없다.

, 단군이 각 부락을 정복한 이후에 2천여 년간 긴 세월을 지나도록 우리 부여족의 광명이 한쪽 구석에 오래도록 감춰져 있었음은 무슨 까닭인지 이제 그 원인을 고찰하여 볼 데가 없거니와, 삼국시대 초기의 전후 백여 년간에 부여족의 세력이 동서 만여리 사이에 갑자기 나타났으니 이것이 고대 부여족의 제1발달 시대이다.

해부루도 이때 내어나며 해모수도 이때 태어나며 고주몽 유리왕도 이때 태어났으며 대무신왕 비류 온조도 이때에 태어나며 박혁거세 김알지 석탈해 김수로도 이때 태어나며 부분노 부염위도 이때에 태어나며 을음도 이때 태어나며 기타 현명하고 뛰어난 위인이 배출하여 부여족의 세력을 드날릴 때 오소리강 유역에 두 개의 큰 나라를 건설하니 그것이 동부여 북부여요 압록강 유역에 한 개의 큰 나라를 세우니 그것이 고구려요 한강 유역에 한 개의 큰 나라를 세우니 그것이 백제요 낙동강 유역에 두 개의 큰 나라를 세우나 가락 신라이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이상에 열거한 현명한 사람과 뛰어난 위인들이 모두 부여족임은 역사서적을 통하여 고찰할 수 있거니와, 다만 신라 가락 시조들도 부여족에서 나왔다 함은 혹시 억단에 가까운 것이 아닌가 한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이것에 관해 의문점을 가질 것이 혹시 있기는 하나 나의 연구한 바에 의하면 신라도 부여에서 나왔음이 의심할 바 없으니 이제 그 증거를 대면 다음과 같다.

무릇 삼국시대 이전은 우리나라 민족이 아직도 신화시대이다. 그러므로 당시 영웅들은 모두 신화에 의하여 인민을 꾀어 모았는데, 고구려 신라 가락 세 나라의 비슷한 신화가 너무 많다. 고주몽도 알에서 나왔다 하며 박혁거세 김수로도 알에서 나왔다 하며 석탈해도 알에서 나왔다 하고 고주몽이 송양과 기묘한 술책을 겨울 때 매가 되기도 하고 수리가 되기도 하고 까치가 되기도 하였는데, 석탈해가 수로왕과 기묘한 술책을 겨룰 때도 역시 매가 되기도 하고 수리가 되기도 하고 까치가 되기도 하였다. 해모수는 천제의 아들이라 스스로 칭하였는데 가락국의 신정(神政)도 천신이 낳은 것이라 하였으니, 같은 당 같은 종족이 낳은 바가 아니면 어찌 신화가 이와 같이 비슷하겠는가? 이것이 첫째 이유다.

또 신라의 지명이 고구려와 비슷한 것이 많다. 고구려에 태백산이 있는데 신라에도 태백산이 있으며 고구려에 계룡산이 있는데 신라에도 계룡산이 있으며 고구려에 묘원산이 있는데 신라에도 묘원산이 있으며 기타 조그마한 산천의 이름이 같은 것이 대단히 많으니 피차 서로간에 받아 씀이 분명하다. 이것이 둘째의 이유다.

또 삼국간의 관제를 고찰해 보건대 여기에는 태대형이 있는데 저기에는 태대각간이 있으며, 여기에는 서불한(舒弗邯)이 있는데 저기에는 서발한(舒發邯)이 있으며 여기에는 구사자(九使者)가 있는데 저기에는 구간(九干)이 있으며 여기에는 주주(州主) 군주(郡主)가 있는데 저기에는 군주(軍主) 동주(洞主)가 있는 것이 셋째 이유다.

또 그 외 성곽 가옥 음식 풍속이 서로 같은 점을 낱낱이 들어 말하기 어렵다. 이와 같은 몇 가지로 미루어 볼 때 고구려 백제만 부여에서 나온 종족이 아니라 신라도 부여에서 나왔음이 분명하다.

혹은 신라가 지나족의 일부라고 하나 그러나 실제로 미루어 볼 때 신라가 어찌 일찍이 털끝만한 것도 지나족의 취미를 가진 것이 없다. 그러므로 진한 육부가 진(秦) 나라나 한(漢) 나라의 유민이라 하는 것은 고사의 억단일 뿐이다. 설혹 몇몇 진나라와 한나라의 유민이 흘러 들어왔다 하더라도 그 주권을 행사했던 종족은 부여족이었음은 의심할 것이 없다.

혹은 전쟁으로 혹은 덕을 사모하여 혹은 계책으로 좌우로 거느리고 맺어서 이 땅에 머물러 살 때 지나족을 물리치고 선비족을 정복하며 숙신국 예맥국을 쳐서 멸망시켜 북방에서 웅비한 나라가 고구려요 마한 진한의 각 부락을 병합하여 남방에 우뚝 솟은 나라가 신라와 백제이다. 불과 백여 년 사이에 우리 부여족의 세력을 뿌리박아 다른 민족이 분수에 넘치는 바람을 끊어버렸으니 기운이 떠오르고 왕성하였던 것이다. 이 때의 우리 선조의 영광이여, 이후에도 다른 주변 종족들이 항복하기도 하고 투항하기도 하였으나 우리 민족의 우세와 다른 민족의 열세는 무릇 이때에 승패가 판가름 났던 것 같다. 그러므로 내가 일찍이 말하기를 우리나라가 부여족의 나라가 되는 것은 정신적으로 볼 때는 단군시대에 이미 시작되었고 실질적으로 얘기한다면 삼국 초기에 비로소 명백히 되었다고 할 수 있다.

 

4장 동명성왕의 공덕

 

대개 이 때에 해부루 해모수 온조 박혁거세 등 여러 성인과 철인들이 그 누가 우리나라의 오랜 번영의 기초를 연 자가 아니리요마는 다만 그 중에서도 공적이 풍부하고 덕업이 왕성함이 가장 우렁차고 가장 뛰어난 이는 오직 동명성왕 고주몽일 것이다.

왕은 해모수의 측실의 아들로 동부여에 얹혀 살다가 금와왕의 여러 아들의 시기를 받아 홀몸으로 멀리 도망함이 그 길이 험하여 나아가지 못할 때 부분노 부위염 오이 마리 협보 극재사 중실무골 소실묵거 등 여러 영웅 호걸과 결탁하여 험한 길을 열고 풀을 헤치고 구려산에 도읍을 세워서 말갈을 물리치며 송양을 항복시키며 행인 숙신 등의 나라를 없애고 부분노를 보내어 선비족을 내쫓고 부위염을 써서 옥저를 복속하여 동쪽으로는 삼한을 위협하고 서쪽으로는 중국에 대항하니, 이에 단군의 옛 영토가 다시 다물(多勿: 고구려 말에 강토 회복을 가리킨다)의 영광을 드러내었으니 부여 민족의 깨뜨릴 수 없는 터전을 정한 것이다.

당시 수많은 주변 종족의 사이에서 고단한 근본으로 우뚝 선 부여족이 하루 아침에 비약함은 모두 동명성왕의 공덕이다. 온조와 박혁거세가 비록 남한을 평정한 공이 있으나 그들이 다스린 지역이 모두 작은 토착 추장의 부락에 지나지 않으니 그 후 역대 조정이 모두 동명성왕의 사당을 세워 존중하고 추모하는 뜻을 나타냄이 진실로 마땅한 것이다.

살펴보건대 고주몽을 혹 성왕이라 부르다가 다시 성제로 부름은 무슨 까닭인가? 그것은 고대 우리나라 군주 및 관위(官位)의 이름을 단지 국어로 부르고 국문으로 쓰더니 후에 한자로 번역하매 제왕의 두 자를 통용함에 이르렀던 까닭으로 단군이 단왕 단제의 칭호가 있게 되고(고려인의 시에 “檀帝보다 먼저 戊辰歲에 태어났다”와 같은 종류) 알영에게 제부인(帝夫人) 왕비의 칭호가 함께 있으니 동명왕이 가끔 혹은 제로 혹은 왕으로 불리는 것도 곧 이 예와 같은 것이다.

그러나 하늘이 그 수명을 더 빌려주지 아니하므로(동명의 수명은 40년이었다) 그 공덕이 겨우 여기에서 머물렀다. 그 후에 아들 유리왕이 왕망의 군사를 물리치고 한나라 땅을 잠식하고 동명의 손자 대무신왕이 낙랑을 멸하여 중국세력을 없애버렸으니 유리왕 대무신왕이 그 또한 영명한 군주이다.

또 살펴보건대 고구려의 강대함이 대무신왕 이후로 비롯되었다. 대무신왕 이전에는 비록 동명성왕의 빛나는 공적이 멀리 미치어 많은 부락을 통일하였으나 그 토지나 병력이 동부여에 비하면 아직 손색이 있기 때문에 유리왕 27년에 동부여왕 대소가 사자를 보내어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섬겨야 하는 의리로써 꾸짖었을 때 왕이 두려워 주저하면서 답변할 바를 알지 못하였으니 이것이 그 증거이다. 대무신왕에 이르러 동부여를 병합했을 때 고구려의 위대한 이름이 동서에 비로소 떨치었다.

 

5장 신라

 

삼국이 처음 일어날 때에 진실로 모두 작은 것을 모아 큰 것을 이루고 약한 것으로부터 강함을 이루게 된 것은 모두 같은 일이거니와, 그 중에서도 성립이 가장 힘들었고 발달이 가장 더딘 나라는 오로지 신라였다. 그 강토는 가락과 서로 적대될 만하였으며 그 병력은 포상팔국(浦上八國)과 서로 다툴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한즉 고구려에 속해 있던 말갈이 쳐들어오매 주저하고 두려워하여 임금과 신하가 대책을 세우지 못하다가 백제 군사의 도움을 받아 겨우 스스로를 지킬 수 있었으니(신라 祇摩王 14년의 일) 그 약소함을 알 수 있다.

내가 그 원인을 미루어 생각해 보건대 대개 삼한과 삼국이 처음 일어날 때에 경상좌도 일대는 황량하고 개척되지 않았던 땅이었다. 이에 마한이 바야흐로 강할 때에 본래 그 땅에 살고 있던 백성과 진나라와 한나라 유민들이 난을 피하여 온 사람들을 이곳에 살게 하여 여러 부로 나누고 그 주권은 마한이 장악하였는데 진한 변한의 크고 작은 12 나라의 호수(戶數)를 모아도 4, 5만에 지나지 않으니 신라가 여기에 머물러 살고 있었으므로 그 힘을 의지할 만한 바가 이미 약한 것이 그 첫째이다.

고주몽 온조 박혁거세 세 왕이 모두 나그네의 발길로 타방(他方)에서 유리하다가 기업을 열었음은 같다. 주몽은 활을 잘 쏜다는 명성 때문에 원근(遠近)이 두려워 복종하였으므로 동부여에서 도망쳐 나올 때에 부여의 영웅 호걸들로서 따르는 자들이 많아서 한번 일어나 송양을 없애며 두 번째 일어나 유리를 항복시켰으며 세 번째 일어나 읍루 옥저를 평정하여 대업을 이룸이 손바닥에 침을 뱉는 것과 같이 쉬웠다. 온조는 마한에 들어와 분할하여 받은 바 백여리 땅을 사용하여 백성들을 끌어 모으며 군사를 양성하여 동서 정벌의 밑천으로 삼은 까닭에 그 강성하여 일어남이 역시 조금 쉬웠던 것이다. 혁거세는 주몽과 같이 활을 잘 쏘는 재주도 없으며 온조와 같이 근거할 만한 백리의 왕도 없고 단지 구구한 신화에 의해 고허부(高墟部)만 차지하였으나 토지와 군사력이 각 부를 정복하기 어려웠음이 그 둘째이다.

요동 만주 등지에는 동부여가 수천 리의 땅을 차지한 큰 나라요 한강 이남에는 마한이 오십 부를 통일한 큰 나라인데 주몽 온조 두 왕은 모두 이 땅에서 일어났으니, 동부여와 마한만 넘어뜨리면 나머지 작은 부락들은 모두 그 세력 범위 안에 스스로 복속해 들어올 것이거니와 저 경상좌도 일대는 그렇지 못하여 많은 부락들이 서로 엇비슷하여 능히 서로 받들 수 없는 처지에 있었던 까닭에, 혹 한두 부를 빼앗으면 그 다음의 각 부락들이 서로 연합하여 반항하기에 족하니(오가야 포상팔국이 결합하는 예) 이것이 셋째이다.

때문에 신라가 그 미약한 힘으로 열강들의 사이에 처하였으니 시종 단련하여 얻은 것은 외교다. 때문에 신라가 발전한 원인은 반 이상이 외교에 있었으니 이에 관해서는 다음의 각 장에서 자세히 논의하겠다. 그런즉 신라가 강대하게 된 때가 언제냐 하면 아달라왕 벌휴왕 시기이다. 이 때는 혁거세왕 원년에서 259년 이후니 그 일어남의 어려움이 과연 심하였다. 이 까닭에 백제의 침략이 벌휴왕 6년(189)에야 비롯하였으니 이 때 신라와 백제의 영토가 바야흐로 서로 가까워진 까닭이요 고구려의 침략이 조분왕 15년(244)에 비롯하였으니 이 때에 신라 고구려 백제의 영토가 바야흐로 서로 갈마들었기 때문이다.

 

6장 신라 백제와 일본의 관계

 

신라가 발흥하던 시대부터 곧 동해 바깥에 한 사나운 종족이 나타났으니, 일본이 바로 그것이다. 일본이 바다 가운데 외딴 섬에 고립하여 큰 바다가 천연의 요새를 만든 까닭에 다른 나라가 일본에 침입할 일도 없었으며 일본이 다른 나라를 쳐들어간 일도 없었다. 그러나 오직 우리나라와는 지세가 조금 가까운 까닭에 고대부터 서로 왕래하기도 하고 침략하기도 한 일이 자주 있었는데, 그 가장 심했던 시대가 신라 백제 시대이다.

그러나 백제는 일본과 동맹한 나라요 신라는 일본의 원수의 나라이다. 그러므로 고대사를 읽어보면 신라는 일 년에 거의 한 번씩 왜구의 침입이 있었고 백제는 일본과 통신이 빈번하였으니 이것은 무슨 까닭인가? 그것은 고대 일본은 또한 추장들이 분립하여 자웅을 결정하지 못한 시대인데 그런 가운데 바다에 연해있는 부락들이 바다를 건너 우리나라와 접촉할 때 백제를 보니 크나큰 나라라 감히 야심을 품을 여지가 없었고 시나를 엿본즉 동쪽에서 가장 약한 나라이므로 이에 그 무기를 자주 시험한 것이다.

그런데 신라가 이미 커진 후에도 항상 쳐들어온 것은 무슨 까닭인가? 그것은 이 때에 일본도 이미 여러 부락들을 통합하여 하나의 큰 나라를 이룩한 때문이다.

일본이 대국을 이룬 뒤에도 백제를 침략하지 않은 것은 무슨 까닭인가? 그것은 일본의 온갖 것이 백제로부터 받아들여졌기 때문이다. 문자도 백제에서 수입했으며 미술도 백제에서 수입하였을 뿐더러 또한 그 인종이 백제인으로 많이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백제와 일본은 틈새가 없었던 것이다. 곧 백제와 일본 사이에 통혼한 사실이라는가 무령왕 이후에 여러 박사들이 빈번히 파견되는 것이 그 증거다. 이 까닭에 옛날 임진년에 수은(睡隱) 강항(姜沆)이 일본에 잡혀 있을 때 그곳 토착 주민들이 백제의 후예라고 스스로 말했던 사람들이 많았으니 그들이 어찌 헛되이 그들의 보계(譜系)를 속였겠는가? 이 때문에 신라 태종대왕이 백제를 쳐들어가기 위해 먼저 경병(輕兵)으로 대판(大阪)에 바로 들어가 그들의 소굴을 뒤엎고 항복의 강화를 맺은 뒤에 남방(곧 백제)에 이르렀으니 아아 영웅의 소견이 마땅히 여기까지 미쳤던 것이다.

고사에 의하여 연구하여 볼 때 당시 신라 백제와 일본의 관계가 이와 같을 뿐인데 근래에 이르러 어찌하여 다른 설들이 수없이 나오는지 모르겠다. 이제 그것의 대략만을 들어서 이를 비판하려 한다.

(1)     일본의 여황(女皇) 비미호(卑彌乎: 즉 그들 역사의 소위 신공황후(神功皇后))가 신라를 침범한 일은 우리 역사에는 실려 있지 않을뿐더러 곡 그들의 역사를 보아도 “콘 고기가 배를 끼고서 조수에 밀려 나라에 이르렀다”는 사실이 또한 하나의 황당한 얘기에 지나지 않거늘 근래 역사가들이 신공황후가 쳐들어왔다고 하는 구절을 허둥지둥 받아들이며

(2)     더욱 가소로운 것은 미사흔(未斯欣)이 일본에 인질로 갔다는 것은 곧 실성왕이 형제 사이의 오래 묵은 원한을 품어서 그를 다른 나라에 쫓아 보낸 것이거늘 이제 비미호가 쳐들어왔다는 것과 신라의 굴복을 억지로 증명하고자 하여 신공왕후가 신라를 쳐들어왔을 때 신라왕이 그의 동생 미사흔을 일본에 인질로 보냈다고 하였으며

(3)     고대에는 일본이 우리나라의 한치의 땅도 점거한 일이 없는데 말하기를 일본이 대가야를 없애고 임나부를 두었다 하여 일본이 우리나라 국토를 점거하는 일이 역사상에 항상 있는 관례인 것처럼 보이었다.

, 그 망령된 주장의 대략은 위와 같고 그 밖의 잗다란 착오는 낱낱이 들기 어렵다.

어떤 자는 이러한 말들을 교과서에 엮어 넣으니 청년들의 머리를 어지럽고 혼란되게 함이 어찌 끝이 있으리요? 우리나라 중세 무렵에 역사가들이 중국을 숭배할 때, 중국인들의 자존심과 오만한 특성으로 자기를 높이고 남을 깎아 내린 역사서술을 우리나라 역사에 맹목적으로 받아들여 일반의 비열한 역사를 지었던 까닭에 민족의 정기를 떨어뜨려 수백 년간이나 나라의 수치를 배양하더니 요즈음의 역사가들은 일본을 숭배하는 노예 근성이 또 자라나 우리의 신성한 역사를 무함하고 업신여기니, 아아 이 나라가 장차 어느 땅에서 탈가(脫駕)할 것인지. 여러분 여러분들이여 역사를 편찬하는 여러분들이여 여러분들은 이것을 들으면 반드시 “일본사람들이 비록 망령되나 어찌 역사의 기록을 날조하겠는가? 이러한 사실들이 반드시 있는 것이므로 우리역사에 수입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하여 일본인들의 말을 망령되이 믿으며 우리 자신을 스스로 기만하는 것이다.

여러분들은 생각해 보라. 옛날에도 우리나라 학사들이 일본에 건너가 그들의 풍속과 역사를 탐구한 사람들이 없지 않다. 수은 강항이 10년 동안 일본에 있으면서 모리휘원(毛利輝元)이 백제의 후손임만 들었고 신공황후가 신라를 정복한 일을 듣지 못하였으며, 김세렴이 8월에 뗏목을 타고 일본에 들어갔을 때 신라 태종이 대판을 정복한 것만 기록하였고(金世濂의 乘槎錄에 말하기를, 이 사실은 일본 년대기에 의거하고 있다고 한다) 저 신공왕후 운운한 일은 애초에 없었으니, 무슨 까닭으로 옛날 우리나라 사람들 중 일본 역사를 읽는 사람들이 전자만 들을 수 있었고 후자는 듣지 못하였는가? 하물며 일본역사에 나타난 것을 맹목적으로 믿을진대 즉 그들의 요즘 글들은 나오면 나올수록 더 괴이하여 단군이 소잔명존(素戔鳴尊)의 동생이라 하며, 고래는 원래 일본의 속국이라 하여 마귀의 씨부림과 여우의 주장이 어지러우니, 그들의 얘기를 모두 믿으면 곧 우리의 4천년 역사는 일본역사의 부속품 밖에 되지 않을 것이다. 슬프다, 저 맹신자여 내가 헛되이 기우를 하는 것이 아니다. 요즘 글을 쓰는 사람들의 추세를 볼 때 실로 꿈속에서도 혼이 자주 놀라는 것이다. 비록 그러나 이에 말이 미치매 나의 머리 끝에 강렬히 자극되는 또 하나의 감정이 있다.

무릇 허무한 일도 날마다 말하면 확실한 일인 것처럼 된다. 곧 삼국지 수호지 등을 누가 소설로 모르리요마는 한 번 읽고 두 번 읽으면 한 번 전하고 두 번 전하는 사이에 많은 어리석은 사람들이 꿈꾸며 말하기를 제갈공명의 금낭삼계가 이러저러하다 하며 무송이 경양강에서 호랑이를 때려 죽인 일이 이러이러하다 하여 매우 빨리 사실로 서로 인정하게 되거늘 하물며 저 일본인은 모든 역사책에 이러한 말들(즉 고려가 원래 일본의 속국이었다 하는 따위)을 실어서 대대로 전하고 암송할새 학교 강의에도 어린 학생들이 기뻐 뛰며 한가로이 책을 읽던 장부가 기세가 솟구쳐서 옛날부터 한국이 자기들의 소유물인 것 같이 인정하여 일반 국민들의 대외 경쟁사상을 고취하니 그러한 사실이 있었던지 없었던지 간에 국민의 정신을 진작시킴에는 이것도 혹 하나의 방법이 될는지 모르겠으나 비록 그러나 역사를 날조하는 것이 어찌 이에 이르렀는가? 저들은 날마다 속이고 우리는 날마다 어리석어지니 아아 이것도 또한 작은 일로 볼 수 없는 것이다.

대개 삼국이 모두 하나의 동맹을 맺은 나라를 가졌었다. 고구려에는 말갈이 있었고 백제에는 일본이 있었고 신라에는 중국이 있었는데 말갈은 오로지 속국이 될 속성을 가졌을 뿐이고 중국은 최초부터 신라와 동맹을 맺은 나라가 아니라 다만 뒤에 와서 김춘추 김유신 등이 한때 외교적 수단에 의해 고구려 백제를 병합하려고 할 때 비굴한 말과 후한 폐백으로 그들과 결합한 것이다.

그런즉 백제와 일본의 관계는 고구려와 말갈의 그것과 같은가, 신라와 중국의 그것과 같은가? 나는 생각하여 보건대 백제가 일본을 대우하는 것은 비록 고구려가 말갈을 부리는 것과는 조금 다르나, 일본이 백제를 우러러봄은 말갈이 고구려를 숭배하는 것과 흡사하다 하겠다. 그렇지 않다면 백제가 어찌 그들을 항상 이끌고 수백 년 동안 신라를 침략하였으며 그렇지 않다면 백제가 어찌 그들을 써서 수자리를 지키는 병졸로 삼았으리요. (광개토왕이 백제를 정벌하였을 때 성안에 일본병들이 가득차 있었던 따위) 대개 일본이 문화 병법 상공업 등의 기술을 모두 백제로부터 배웠으니 자연히 백제의 부림을 받은 고대 미개인에게는 항상 있었던 예인 것이다.

뒤에 와서 백제가 장차 망하려 할 때에 왕자 복신이 일본에 인질로 들어가 구원병을 요청함에 이르러 어떤 사람은 일본의 문화와 무력이 이미 왕성한 이후라고 생각하지만, 다만 그 당시 우리나라 사람의 인질이라고 한 것은 곧 저 중국 고대에 약한 나라가 강한 나라에 인질을 보낸 예와는 같지 않고 단지 이웃나라에 여행을 하거나 혹은 방문하러 가는 일들을 “모두 인질로 보낸다”라고 말하였다. 그런즉 황룡국은 고구려의 속국이나 왕자 해명을 ‘인질로 보내었다’고 하였으며 낙랑은 고구려보다 약한 나라이나 왕자 호동을 ‘인질로 삼았다’고 하였으니 이것으로 미루어 보건대 당시 우리나라 사람들이 인질이라고 일컬은 것은 중국 전국시대의 이른바 질자(質子)와는 같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즉 왕자 복신이 인질이 됨도 또한 약한 나라가 강한 나라에 구원을 청하고자 하여 왕자를 인질로 삼았다는 것과 같은 예로 볼 수 없다. 그러므로 백제와 일본간의 처음부터 끝까지의 관계는 고구려 말갈의 관계와 비슷하다고 할 것이다.

 

7장 선비족 지나족과 고구려

 

우리 부여족이 삼국초기부터 한반도에 분포하였으나 경상좌도에 향하여 신라로 된 것과 한강 이남에 향하여 백제로 된 것은 그 위치한 한쪽 구석에 치우쳐 있으므로 이방의 강대국과 관계됨이 많지 않고 그들이 서로 다투어 싸운 것은 반도내의 작은 부락과 말갈 일본 등 작은 도적들에 지나지 않는 까닭에 당시 남방 민족은 능히 우리나라 역사에 영광을 드리운 것이 없다. 오직 고구려는 열강의 사이에 있으면서 곡용(曲踊)과 거용(距踊)의 기개로 동서를 정벌하는 무력을 휘둘렀으니, 우리 고대사를 엮을 때 부여족의 주인공은 부득불 고구려로 인정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이 장에서 특히 고구려의 대외역사를 연구하고자 하는 바이다.

고구려가 대항하던 나라 가운데 저 읍루족 말갈족 예맥족 양맥족(梁貊族)들은 불과 한두 번 공격에 곧 모여들어 우리의 지배를 받아 우리가 왼쪽으로 가면 그들도 따라서 왼쪽으로 가며, 우리가 오른쪽으로 가면 그들도 따라서 오른쪽으로 가며, 우리가 동쪽으로 또는 서쪽으로 가기로 하면, 그들도 따라서 동쪽으로 또는 서쪽으로 가기도 하니, 즉 고구려가 신라를 치며 백제를 치며 한나라를 치는 전역에 항상 예맥군사와 말갈 군사를 이용했음이 바로 이것이다.

그러나 선비족 지나족은 모두 고구려의 국경 건너 가까지 있으면서 갑자기 항복하기도 하고 갑자기 반란을 일으키기도 하며, 갑자기 멀리 달아났다가 갑자기 가까이 나타나기도 하여 수백 년 동안이나 피나는 싸움을 계속하였던 종족들이다. 우리나라 역사가 없어져서 당시의 상황을 도저히 자세히 기록하기는 어려우나, 이제 이것을 대략 미루어 생각해 보건대 그 파란의 장려함이 족히 우리나라 역사의 광채를 더욱 빛나게 할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이 장에서 특히 고구려가 선비족 지나족과 관계한 역사를 연구하고자 한다.

(1)         선비족

선비는 고대의 한 오랑캐 족이다. 그러나 그들의 강력한 무력과 용감하고 사나움은 다른 종족보다 매우 뛰어났다. 그러므로 우리 동명성왕이 나라의 기초를 열던 처음에는 곧 저 선비족을 어려운 적으로 걱정하여 여러 신하들을 모아 선비족 제어할 방법을 물은 것이다. 그러나 다행히 우리의 뛰어난 명장 부분노가 기묘한 계책을 내어 그들의 소굴을 뒤엎고 그들을 정복하여 우리 속국으로 만들었는데 다시 그 남은 무리들이 일어나 우리 민족에게 큰 근심을 끼쳤다.

1차: 그들 종족 가운데 모용이라는 자가 일어나 우선 고구려의 형제나라인 북부여를 쳐부수니 이에 그들이 강하기 시작하여 우리의 속박을 벗어났다.

2차: 고구려 미천왕 11년(310)에 우리 군사가 요동 서안평을 습격하여 취하매 그들 종족과 영토가 비로소 서로 가까이 되었다.

3차: 낙랑(이 때에는 낙랑이 진(晉) 나라에 속함) 도독 장통(張統)이 고구려와 싸워서 패하고, 두 군의 사람들을 데리고 모용씨에게 돌아가니 이에 우리가 그 인민을 얻더니 또 얼마 가지 않아 진(晉) 나라 평주(平州) 자사 최비(崔毖)가 모용씨를 미워하여 고구려에 도망쳐 오매 그들이 또한 토지와 인민을 모조리 차지한지라 이에 그들과 우리의 틈새가 비로소 벌어지기 시작하였다.

4차: 모용황이 속임수를 부려 환도를 습격하매 대군이 패하고 나라 임금이 피난을 떠나서 비록 우리 북방 인민과 군사들이 충성과 용기로 그들의 예봉을 꺾어 물리치기는 하였으나 도읍이 모두 부서지고 왕릉이 파헤쳐짐을 당하여 우리 역사상에 하나의 큰 오점을 남기었다. 또 그 3년 후에 모용황이 중국 동부의 땅을 모두 차지하고 연나라 황제에 즉위하고 그 국상 모용각을 보내 우리의 남소성(南蘇城)을 빼앗으니 선비족의 세력이 하늘을 범할 기세였으며 얼마 있다가 그들이 부진(苻秦) 씨족에게 멸망 당하여 기세가 침체하였다.

5차: 모용수가 일어나 부진족을 도리어 없애고 옛 영토를 모두 회복하고 불꽃 같은 기세로 요동을 넘보매 우리 부여족의 명이 한 가닥 실 끝에 매달렸더니 다행이 우리의 절세의 무력을 갖춘 고국양왕이 일어나 이들을 물리치고 요동의 모든 영토를 회복하였으니 이것은 우리 민족이 다시 깨어남을 알리는 소식이다.

6차: 광개토왕이 계승하여 그 선왕의 뜻을 이어받아 연나라 평주를 둘러 빼고 현도를 수복하여 선비족의 세력을 크게 없앴으니 이후로부터 선비족은 우환이 끊어진 지 수백 년이 되었다.

7차: 선비족의 별종이 우문씨가 서위(西魏)의 왕위를 찬탈하여 북제(北齊)를 병합하고 양자강 이북 수만 리를 장악하여 일시에 세력이 크게 떨치었으니 저 소위 무제(武帝:宇文覺)는 또한 영명한 군주라, 모용씨의 기업을 회복하고자 하여 대군을 스스로 거느리고 우리 요동지역을 쳐들어오다가 고구려 대형(大兄)인 바보 온달의 용맹한 무력을 만나 결국 크게 위축되었다.

8차: 수양씨(隨楊氏: 본래 성은 普六茹氏다)가 후주(後周)의 왕위를 빼앗고 양자강 남북을 모두 통합하매 그 강성한 세력을 가지고 고구려와 자웅을 결단할 대, 저 소위 문제(文帝: 楊堅) 양제(煬帝: 陽廣)가 그의 모든 정신을 바쳐 우리나라를 도모하다가 한왕(漢王) 양(諒)의 삼십만 무리들이 칼끝에서 애곡하였으며, 우문술의 2백만 군사는 고기밥이 되었고 오리지 우리나라 위인 을지문덕의 명예만을 역사 속에 드러내었다.

살펴보건대 수나라 양씨는 중국의 땅을 점거하여 중국인을 이용하여 우리와 싸웠으므로 단순한 선비족으로 보기는 어려우나 그러나 그 주권자가 어쨌든 선비족이고 그들 장군에 우문술 맥철장(麥鐵杖) 등 반 이상이 선비의 종족이다. 그러므로 고구려와 수나라와의 전쟁을 우리가 선비족에 대한 전쟁으로 보는 것이 옳다.

대개 이 때에 이르러 우리 민족과 선비족과의 투쟁은 수천 년이 이미 지난지라 그 사이에 비록 이기고 진 일들이 있으나 마침내 우세한 자는 살아남고 열등한 자는 망한다는 공식을 피하지 못하여 이후로 선비족의 영광이 동양의 역사상에 보이지 않고 있다.

(2)         지나족

고대 지나족은 고대 우리민족과 대치하여 끊임없이 싸웠던 나라다. 혹자는 말하기를 지나족은 본래 우리민족과 기원이 같다고 한다. 그러나 이미 각각 나라를 창립한 경우에는 그들이 비록 같은 종족이라도 부득불 갈라 보려고 하거든, 하물며 그 언어가 이미 다르고 풍속과 취향이 이미 달라 같은 민족이라는 관념이 이미 까마득해졌으니 어찌 교전국 사이에 이와 같은 이상이 용납되겠는가? 아 내가 우리 역사를 살펴보건대 4천년 동안에 저 지나족과 경쟁이 가장 치열했던 시대는 오직 고구려 시대였다. 우리 후인들은 춤과 노래에 기록된 고구려와 지나의 성패의 유적을 볼 것이다.

내가 먼저 지나족이 우리나라에 불어났던 역사를 말하려고 하는데 세 시기로 나누어 관찰하겠다.

단군왕조 중엽에 기자가 그의무리 5천명을 거느리고 우리나라에 와서 우리의 봉토와 벼슬을 받아서 평양 일부를 다스렸는데 이것이 지나족이 동쪽으로 옮겨온 제1기다.

그 후예들이 점차 불어나서 요동을 병합하고 각 종족들을 넘겨다보니 그 기세가 우리 부여왕조를 능가하였다. 이것이 지나족이 강성했던 제2기다. 이미 위만이 기씨를 몰아내고 기씨는 남한으로 도망쳐 들어갔는데 한 무제 유철(劉徹)이 또한 위씨를 몰아내어 북한 일대에 사군을 건설하였다. 이것이 지나족이 널리 분포했던 제3기이다.

이와 같은 세 시기 안에 우리와 중국 두 종족의 관계는 이상 각 장에서 이미 언급한 바 있다. 이에 대해 구차하게 설명할 바는 없겠거니와 이제 다시 우리 부여족의 발흥하고 지나족이 쇠퇴한 역사를 다섯 시기로 나누어 관찰하겠다.

위만과 유철이 악함을 주고 받은 뒤 백여 년이 지나면서 우리 부여족의 성세가 점차 커져서 동명성왕이 사군을 정복하고 대무신왕이 한의 고구려현을 쳐서 빼앗으매 한나라 광무제 유수(劉秀)가 쳐들어와 싸우다가 끝내 패배를 당하여 살수 이남을 우리에게 넘겨주었다. 이것이 제1기다.

이후로 우리 민족과 지나족이 수백 년을 싸워 왔으나 어떤 큰 승패가 없었다. 조위(曹魏) 말년에 이르러서는 그들이 장군 관구검을 보내어 우리 환도성을 습격하여 격파하더니, 이미 뉴유(紐由) 밀우(密友)가 충의를 일으켜 옛 도읍을 회복하고 우리 민족의 무력을 떨치었다. 이것이 제2기다.

이후로 지나족의 세력이 갑자기 약화되어 중국의 대륙 전체를 흉노 말갈 저(氐) 강(羌) 선비 등의 여러 종족에 물려주고 단지 강남의 한쪽 구석에 엎드려 있었던 까닭에 우리 민족이 그들과 3백여 년 동안 대치한 때가 없더니, 그 후 당 태종 이세민이 일어나 저 오호(五胡: 흉노 말갈 저 강 선비족을 말함)을 몰아내며 중국을 통일하고 곧 그 야심이 홀연히 생겨 우리나라를 넘보게 되어 제1차는 그 자신이 쳐들어왔으며, 제2 제3차는 장수를 보내 쳐들어왔으나 모두 우리의 막리지 연개소문에게 패배하여 물러갔고 또 때때로 우리를 침범하여 핍박해서 놀라기도 하였다. 이것이 제3기이다.

살펴보건대 연개소문은 우리나라 4천년 역사에서 첫째로 꼽을 수 있는 영우이다. 소년시절에 중국을 유람하면서 이세민의 사람됨을 엿보며 영웅들을 결탁하였고 장애와 고단을 두루 겪으며 외국의 문물과 풍토를 관찰한 것은 피터 대제와 같다. 각 귀족들이 태자가 어린 것을 보고 부왕이 죽은 후에 왕위에 오르는 것을 허락하지 않거늘 동련히 번개 같은 솜씨로 여러 귀족들의 권한을 깎아버리며 그 병권을 독차지하고 하늘을 울리고 땅을 녹이는 군사의 위세로 동서를 정벌하매 그가 가는 곳에 당할 적이 없는 것은 나폴레옹과 같다. 왕이 적국의 위세를 두려워하여 비열한 정책으로 한때를 구차히 지내고자 하는 자였다. 비록 연개소문이 간하기도 하고 협박하기도 하여 중지하게 하였으나 끝내 신의가 없이 몇몇 간신들과 같이 모의하고 비천한 말과 후한 폐백으로써 적국과 내통한 후에 그를 오히려 해치고자 하니, 이에 국가가 중요하고 임금은 가벼운 것이라 곧 한때 위풍 있고 당당히 분한 기세를 일으켜 흰 장검을 뽑아 왕의 머리를 베어 장대에 높이 메달고 온 나라에 호령함은 크롬웰과 같다. 아아, 연개소문은 곧 우리 광개토왕을 본받은 손자이며 을지문덕의 어진 동생이요 우리 만세의 후손들에게 모범이 되거늘 이제 삼국사기를 읽으매 첫째는 흉악한 사람이라 하며, 둘째는 역적이라 하여 구절구절마다 오직 우리 연개소문을 저주하고 욕하는 말뿐이다.

이것은 무슨 까닭인가? 아아, 나는 이것으로써 후세 역사가들의 어리석고 어두움을 꾸짖는 바이다. 당시 이세민이 우리 영토를 침범할 때 연개소문이 그의 원수이기 대문에 그가 선전(宣戰)의 글을 쓰는데 연개소문을 어지러이 욕하는 것은 반드시 있을 수 있는 일이다. 어지럽게 욕하기 위해서는 없는 사실을 있는 것처럼 꾸미는 일도 반드시 있을 것이다. 이에 고려의 역사가들은 고구려의 사료가 이지러져 없어짐을 인하여 거의 당사(唐史)에서 그 자료를 뽑았던 까닭에 연개소문전은 일체 이세민의 선전서(宣戰書) 중의 말을 추려낸 것이다. 이 때문에 이세민이 연개소문은 흉악한 사람이라고 말하면 머리를 끄덕이면서 예예하고, 이세민이 연개소문은 역적이라고 하면 손바닥을 비비며 그렇다고 했다. 곧 저 이세민의 원수가 되는 연개소문의 역사를 쓸 때 오직 저 이세민의 뱉어 내놓은 것을 모아놓았으니 연개소문이 흉악한 사람이 되고 역적이 됨을 어찌 면할 수 있겠는가?

아아, 저 눈먼 역사가들이 그 홍몽(鴻濛)한 필법으로 우리의 절세 영웅을 묻어 없애버려 우리 수천 년 후세 사람들로 하여금 진면목을 보지 못하게 하였다.

저 중국인들은 연개소문의 번개와 같은 솜씨에 한번 크게 혼이 난 이후로 수천여 년 동안 울렁거림을 진정하지 못하여 말이나 글로써 연개소문에 관한 역사를 서로 전하여 왔는데, 그 모습은 천인(天人)과 같이 우러러보며 그 군사 전략은 귀신과 같이 놀랍다고 했다. 이 까닭에 석자나 되는 수염을 가친 풍채는 당나라 사람의 태평광기(太平廣記)에 그려냈으며, 비상한 영웅으로서의 공덕은 왕안석(王安石)의 경연강론(經筵講論)에서 찬미하였으며, 깃발과 보루가 40리가 뻗쳐진 기세는 유공권(柳公權)의 잡저(雜著)에 나타나고 있으며, “고구려 대장군 연개소문이 장안을 순식간에 쳐들어가 많은 사람들을 죽이고 갔네. 금년에 만약 공격해 오지 않는다면 명년 8월에는 병사를 일으킬 것이네(句麗大將蓋蘇文 去屠長安一瞬息今年若不來進攻 明年八月就興兵)”라고 한 호쾌한 시가 여련거사(如蓮居士)의 패담(稗談)에 실려 있으니 이러한 말들이 우리 연개소문의 실제 자취인지에 관해서는 단정을 내리지 못하겠으나 이미 그 당시 중국인들이 연개소문을 아주 두려워했다는 한 증거를 미루어 알 수 있다. 저 이세민의 눈앞에서 아첨하던 당나라 역사가들이 비록 한 손으로 만 사람의 눈을 가리어 나라의 부끄러움을 숨기려 하였으나 마침내 그렇게 할 수 없었다.

또 살펴보건대 요사이 역사를 읽는 사람들 중에 가끔 당 태종이 양만춘과 싸우다가 이기지 못하여 물러갔다고 하고 연개소문과 교전한 사실이 없다고 하니, 이것은 단지 당사(唐史)의 거짓된 평가만을 믿었기 때문이다. 그가 10만 대군을 몰아서 야심을 넘쳐 우리나라를 넘보다가 어찌 안시성 하나가 잘 지키는 것을 보고 돌연히 물러갔겠는가? 이때 반드시 하나의 큰 패배가 있었음을 미루어 알 수 있으며 또 그들이 과연 크게 패배하였다면 양만춘이 비록 잘 지키기는 하였으나 탄환이 비 오듯 쏟아지는 외로운 성에서 수백 명의 쇠약한 군사로서 그 공을 세우지는 못하였을 것이니, 이는 반드시 연개소문과의 한바탕 큰 싸움이 있었음을 추측할 수 있는 것이다. 또 조선 정조 때에 이계(耳溪) 홍양호(洪良浩)가 북경에 가다가 안시성을 지나갔다. 거기에서 100리쯤 떨어진 곳에 계관산(鷄冠山) 위에 계명사(鷄鳴寺)가 있는데 거기에 살고 있는 사람이 서로 전하기를 이곳은 당 태종이 고구려 병에게 크게 패하여 홀로 말을 타고 도망치다가 이 산 위의 풀과 바위 사이에 몰래 숨어 묵었던 유허라 하니, 이것 또한 연개소문의 잃어버린 전사를 메워주는 것이다.

이 뒤에 당나라 사람들이 그 묵은 수치를 감당하지 못하여 다시 쳐들어 오려고 하나 고구려의 강성함을 두려워하여 주저하는 중에 우리 남방의 신라가 고구려와 대대의 원수임을 정탐해 알아내고 즉시 사신을 자주 보내어 두텁게 서로 맺었으니 슬프다 저 신라가 만년의 원대한 계책을 생각하지 않고 도리어 도적을 도와 형제를 쳤으니 이것 또한 우리 민족 역사상 하나의 큰 부끄러움을 남겼도다. 이것으로 인하여 고구려가 피폐하고 저들이 쇠퇴하는 가운데 활발하고 강한 기운을 갑자기 발현하니 이것이 제4기다.

얼마 후 연개소문의 못난 아들 남생 형제가 불화하여 내정이 결렬하고 또한 신라 명장 김유신이 그 기회를 틈타 침략하여 오매 남쪽 근심이 바야흐로 커졌는데, 이 때에 당나라 사람들이 신라와 협력하여 백제를 멸망시키고 그 남은 병력이 고구려에 이르러 동명왕조가 마침내 기울어 엎어지게 되고 북방 일대가 거의 저 중국민족에 빼앗긴 바 되었더니 다행이 하늘이 내려준 위인 대중상 부자가 일어나 변변치 못한 종족으로 백두산 동쪽을 점거하고 말갈의 남은 무리를 채찍질하여 고구려의 옛 영토를 모두 수복하며 다시 북진하여 흑룡강 부근을 병합하며 지나의 남은 도적들을 격퇴하고 저 등주(登州) 자사 이해고를 쳐서 목을 베니, 아아 단군 부루의 남긴 혼령이 없어지지 아니하고 을지문덕과 연개소문의 옛 업적이 다시 어어짐은 어찌 대씨 부자의 공덕이 아니겠는가? 이것이 제5기다.

 5기를 경과한 후에는 저 지나족이 우리 민족을 향하여 하나의 화살도 쏜 것이 없었으니 대개 우리민족과 지나 민족의 관계가 이 때에 이르러 일단락을 고하게 된 것이다.

살펴보건대 이후 6백 년을 지나 명나라 주씨가 일어나매 조선이 그들을 대하여 거의 조공을 바치는 관계를 가졌으나 이것은 저들의 정복을 받은 것도 아니요 또한 저들의 위세 앞에 굴복한 것도 아니다. 다만 내용이 복잡한 사정 때문에 이러한 괴상한 모양을 만들었으니 이것에 관해서는 후편에서 자세히 논하겠다.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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