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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5-04-30 21:59
[기타] 단재 신채호의 독사신론(讀史新論) 1/3
 글쓴이 : 청실홍실
조회 : 2,571  



독사신론(讀史新論)


                독사신론은 1908년 8월 27일부터 9월 15일까지, 10월 29일부터 12월 13일까지 총 50회에 걸쳐 대한매일신보에 연재되었다. 12월 13일자 연재 끝에는 未完이라고 되어있다. 이 독사신론은 1910년 이전의 저술이므로 번역하여 게재하였다.

 敍論

 

국가의 역사는 민족의 消長盛衰의 상태를 가려서 기록한 것이다. 민족을 버리면 역사가 없을 것이며, 역사를 버리면 민족의 그 국가에 대한 관념이 크지 않을 것이니, 아아, 역사가의 책임이 그 또한 무거운 것이다.

비록 그러나, 고대의 역사는 동서를 물론하고 일반적으로 유치하여, 중국의 사마천 반고의 저술이 모두 한 姓의 전가보(傳家譜)요, 서구의 로마 이집트의 기록된 책들이 한편의 재앙과 이변에 관한 기록이 아닌 것이 없다. 그런즉 우리나라 고대사도 어찌 오늘날 새로운 안목으로 까다롭게 논의하는 것이 옳겠는가마는, 다만 현재 한편의 새로운 역사를 편찬해냄이 지지부진하니, 내가 두려워함을 깨닫지 못하겠구나. 국가는 벌써 민족정신으로 구성된 유기체이다. 단순한 혈족으로 전해 내려온 국가는 말할 것도 없고, 혼잡한 각 종족으로 결집된 국가일지라도 반드시 그 가운데 항상 주동력을 가진 특별한 종족이 있어야만 이에 그 국가가 국가답게 될 것이다. 만일 한 소반 위에 모래를 흩어놓듯이 여기에 우연히 모이며, 남쪽이나 북쪽으로 온 한 종족도 여기에 우연히 모여 서로 잘났다고 하며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다면, 이렇다면 하나의 酋長政治도 공고하게 실행하기가 어려울 것이며, 한 부락 단체도 완전히 세우기 어려울 것이니, 하물며 국가건설에 문제야 어찌 더불어 논의할 수 있으리요.

내가 현재 각 학교의 교과용 역사책을 살펴보니 가치가 있는 역사책은 거의 없다. 제1장을 읽어보면 우리 민족이 중국 민족의 한 부분인 듯하며, 제2장을 읽어보면 우리 민족이 선비족의 한 부분인 듯하며, 전편을 모두 읽어보면 때로는 말갈족의 한 부분인 듯하다가 때로는 몽고족의 한 부분인 듯하며, 때로는 여진족의 한 부분인듯하다가 때로는 일본족의 한 부분인 듯하다. 아아, 정말 이와 같다면 우리의 사방 몇 만리 토지가 남만북적의 수라장이며, 우리 4천여 년의 산업이 아침에는 양(梁) 나라 것이 되었다가 저녁에는 楚나라 물건이 될 것이니, 과연 그런가. 어찌 그럴 수 있으리요.

곧 고대의 완전하지 못한 역사라도 그것을 자세히 연구해 보면 우리나라의 중심 종족인 단군 후예로 발달된 참된 자취가 명백하거늘 무슨 까닭으로 우리 조상을 그릇 기록함이 이에 이르렀는가. 오늘날에 있어서 민족주의로써 전국민의 어리석음을 깨우치며, 국가관념으로써 청년들의 머리를 도야(陶冶)하여 우세한 자는 살아남고 열등한 자는 멸망한다는 기로에 처하여 한 가닥 아직 남아 있는 나라의 명백을 지키고자 하려면 역사를 버리고는 다른 방책이 없다고 할 것이나, 이런 역사를 역사라고 할진대 역사가 없는 것만 같지 못하다.

역사를 쓰는 자는 반드시 그 나라의 주인되는 한 종족을 먼저 드러내어, 이것을 주제로 삼은 후에 그 정치는 어떻게 흥하고 쇠하였으며, 그 산업은 어떻게 번창하고 몰락하였으며, 그 武功은 어떻게 나아가고 물러났으며, 그 생활관습과 풍속은 어떻게 변하여 왔으며, 그 밖으로부터 들어온 각각의 종족을 어떻게 받아들였으며, 그 다른 지역의 나라들과 어떻게 교섭하였는가를 서술하여야 이것을 역사라고 말할 수 있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이것은 정신이 없는 역사이다. 정신이 없는 역사는 정신이 없는 민족을 낳을 것이며, 정신이 없는 나라를 만드니 어찌 두려워하지 않겠는가?

무릇 우리나라의 옛 역사들이 대부분 없어지고 대부분이 황당하고 망령되게 되었으니 이것을 모두 깎아 없애고 새로운 역사를 지어내려면, 첫째로 우리나라 문헌에 속하는 정사와 야사를 다 모아 조각조각의 재료를 가려 뽑아야 할 것이며, 둘째로 횃불 같은 눈빛으로 고금의 정치 풍속의 각 분야를 정밀하고 자세하게 관찰한 다음에야 붓을 잡아 쓸 수가 있을 것이니, 이것은 역사학을 전공한 재주가 많고 널리 배운 사람이라도 10여 년 긴 세월이 필요할 것이다. 아아, 진실로 어려운 일이다.

나는 우리나라 역사책이 어리석고 거친 것을 슬퍼하여 재주와 학식이 없음을 돌아보지 아니하고 역사편찬 서술에 연연하였으나 세상일에 골몰하여 한가한 겨를이 전혀 없었을 뿐더러 고적이나 유문을 수집하는 일이 매우 어려워 한 자루의 짧은 붓으로 감회를 일으켜 쓰기를 망설일 뿐이더니, 날마다 변하는 시국의 변천에 따라 나의 머리에 자극됨이 심하였다. 그런즉 내가 효효(曉曉)의 道를 즐기는 것은 아니나, 또한 어찌 曉曉의 名分을 피하겠는가?

그러나 지금 조그만 견문과 조그만 연구로 깊이 생각지 않고 역사가로 자처함이 불가할 뿐만 아니라 또한 그 옳고 그름을 스스로 단정하기 어려워 역사를 읽는 여가에 느낌이 있음을 따라 기록한 것들을 가지고 국내의 동지들에게 묻고자 하는 것이다. 이것은 논리가 정연한 하나의 학설도 아니며 찬란하게 다듬어 이루어진 하나의 역사도 아니며 단지 감촉되는 바에 의지하여 어지럽게 써낸 것이다. 그 논술한 바의 범위는 우리 민족의 발달한 상태에 불과한데다가 민족의 큰 재난과 행복을 가져온 사실이 아니면 들지 아니하며 민족의 큰 이해에 관련된 인물이 아니면 논하지 않았으니 일정한 조리는 없으나 일관된 정신은 있을 것이다.

아아, 독자 여러분들은 義理에 잘못됨이 있으면 바르게 고치도록 할 것이며, 논단에 잘못됨이 있으면 비평을 가하고, 또 혹시 고증에 적당한 서적을 찾아서 참고에 이바지하게 해주면 이 글의 완성을 쉽게 할 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의 지혜와 힘을 모아서 조국 역사의 파묻혀버렸던 광명을 다시 빛나게 할 것이니, 이것은 저자의 간절히 바라는 일이다.

 

1. 인종

우리나라 인종을 대략 여섯 종류로 나뉘니, 첫째 선비족, 둘째 부여족, 셋째 지나족, 넷째 말갈족, 다섯째 여진족, 여섯째 土族이다.

선비족은 맨 처음에 우리 민족과 요동과 만주에서 병립하여 서로 혈전을 계속하였던 자이다. 그 후 크게 쫓기어서 그 근거지를 잃고 지금 시베리아 등지에서 그 명맥을 보존하고 있다.

부여족은 곧 우리의 신성한 종족인 단군 자손이다. 4천년 동안 이 땅의 주인이 된 종족이다.

지나족은 조선과 중국 두 나라의 경계가 접근한 까닭으로 기자가 우리나라에 오던 대부터 고려시대에 이르기까지 중국에서 한 차례 혁명을 겪으며 전 왕조의 충신 및 난을 피하려는 인민들이 계속 넘어온 까닭에 부여족 이외에 가장 많은 숫자를 차지한 종족이다.

말갈족과 여진족은 보래 고구려에 부속되어 함경도와 황해도 지역에 살았던 종족인데 고구려가 신라에 병합되므로 고구려의 남은 신하들이 이들을 이끌고 요주와 심주 등지에 옮겨 들어가 발해국을 창설하였는데 중국의 금과 청의 두 제국도 이 종족이 건설했다.

토족은 고대에 南北韓 지역에 있었던 종족으로 삼한의 여러 부락과 동쪽의 예와 맥 종족 등이 모두 여기에 속하였는데, 우세한 자는 살아남고 열등한 자는 멸망한다는 원리에 따라 여러세대를 거치면서 도태를 당하여 아메리카의 인디언과 아프리카 토인과 같이 자취를 찾아볼 수 없이 소멸되어 온 종족이다.

그 외에 몽고족과 일본족의 두 종족이 있다. 일본족은 우리 민족 4천 년의 대외 적국 가운데서 교섭과 경쟁이 가장 치열하여 접촉하면 접촉할수록 더욱 사나워짐을 나타내고 있으나 그러한 과거 역사는 풍신수길의 임진왜란 하나 이외에는 단지 변경지역이나 해안가에서 불쑥 나왔다가 불쑥 사라질 뿐이었고, 내륙지역에 섞여 살면서 서로 맞붙어 싸운 일은 없었다. 몽고족은 고려시대의 중엽 말엽에 교섭이 가장 많았으나 단지 정치상 밀접한 관계를 가졌을 뿐이요, 우리 국민들의 경제생활에는 영향이 실제로 없었다. 그러므로 우리나라 역사상에 나타난 민족은 실제로 위의 여섯 종족에 지나지 않는다.

살펴보건대 저 몽고 일본 두 종족이 고려 말엽에 제주도의 목장치기와 세종조 때 삼포에 항복해 온 왜인 등으로 내륙지역에 섞여 살았던 특별한 예가 더러 있기는 하였으나, 그 후에 모두 반란을 일으켜 목을 베었고 瓠公 金忠善(이것은 일본만 홀로 지칭함) 등 귀화한 사람이 가끔 있기는 하였으나 이것은 수백 년 동안에 한두 사람에 지나지 않는다. 또 살피건대 신라 때에 임나부를 설치하였다는 설은 우리나라 역사에 보이지 않는 바이니 그들 역사에서 운운한 바를 눈 어둡게 믿을 만한 기록이라 하여 의거함은 옳지 않는 것이다.

그 여섯 종족 가운데 모습으로나 정신적으로나 다른 다섯 종족을 정복하고 흡수하여 우리 민족의 역대 주인이 된 종족은 실로 부여족 한 종족에 지나지 않으니 대개 4천년 우리 역사는 부여족의 흥망성쇠의 역사다.

이제 교통이 사방으로 터지매 동서양이 크게 교통을 터서, 저 하늘의 뜻이 우리 민족으로 하여금 한 구석에 틀어박혀 오래 잠자도록 허용하지 아니하는 까닭에 마침내 이 20세기의 세계무대에 나와서 6대 주의 여러 민족과 군대로 서로 맞서게 되니, 이 이후 우리 부여족이 눈을 부릅뜨고 큰 걸음으로 힘차게 나아가서 만국의 역사 가운데에 승리의 한 자리를 차지할는지도 알 수 없으며, 혹시 미련하고 어리석으며 움츠러들어서 날마다 퇴보하여 조상들로부터 물려받은 것까지 남에게 빼앗겨버릴지도 알 수 없지만, 과거 우리나라 역사는 곧 우리 부여족의 역사니 이것을 모르고 역사를 얘기하는 자는 진실로 헛소리나 하는 역사가인 것이다.

 

2. 지리

역사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은 지리이다. 지리를 버리고 역사를 얘기하는 것은 골격과 혈맥에 어두우면서 기혈을 논하는 것과 다를 바 없으니 어찌 옳겠는가? 그러므로 地志라 하는 것은 역사를 짓는 사람이나 역사를 읽는 사람이나 일반적으로 착안할 바이거늘, 아 우리나라는 조상들의 발상지가 다른 나라의 영토에 귀속하여 연혁이 전함이 없고 이견이 분분하니, 실로 역사를 좇아서 쓸 만한 전거가 없어 안타까운 실정이다. 그러나 그 대세를 살펴서 간단하게 평하겠다.

대개 부여족 시조는 장백산 高原에서 일어나 압록강 줄기를 따라 내려와서 부근의 넓은 지역에 흩어져 살았는데 강의 서쪽은 요동이요 강의 동쪽은 조선(이 조선은 평안 황해도만 가리킴)이 이것이다. 사람들이 처음 살았던 대의 문명은 압록강 유역에서 일어났던 것이다. 자손들이 점차 번창하여 한 갈래는 요동 및 만주의 각 지역에 분포하고 한 갈래는 조선 및 삼한의 각 지역에 분포하여 각기 그 종족을 결집하여 토착의 다른 종족들을 정복 혹은 흡수하여 들이니, 이것이 우리 민족 발달의 제1기이다.

그 후에 많은 야만 종족이 모두 부여족의 세력 밑에 꿇어 엎드려 혹은 멸망 당하기도 하고 혹은 동화되기도 하매, 이에 또 부여족 내부에서 경쟁이 일어나 삼국이 대립하여 싸움이 그치지 않으니 이것이 우리 민족 발달의 제2기이다.

이미 북쪽에 있었던 민족은 안으로 동족의 침입을 만나며 밖으로 각 민족의 핍박을 받아서 앞뒤로 적을 만난 고통을 이기지 못하여 고구려가 앞서 전복 당하고 발해가 뒤에 망하였다. 안으로 이미 경쟁이 없어지고 밖으로 이민족의 침략이 없어지매 사납고 날쌘 도적이 이 기회를 틈타서 여러 강자들을 없애고 한 자리의 왕위를 차지하며 백성의 기운을 꺾어서 조정의 권능을 펼새 이 삼천리 강산을 하나의 큰 쇠항아리로 만들어 한 나라의 인민들을 그 속에 가두고 한 발자국도 밖으로 나아가지 못하게 하였으니 대개 고려시대 이후의 역사를 읽어보면 영웅의 옷깃을 적시는 눈물을 금할 수가 없다. 이것이 제3기 발달시대를 당하여 저지하는 힘이 너무 오래되었으므로 도리어 침체를 불러들인 것이다.

이 세 시기로 나누어서 우리 민족의 활동무대를 살펴보건대, 그 흥망성쇠의 정세가 칼날을 맞이하여 스스로 나타나니 대체로 전국의 문명이 압록강 바깥 지역에서 발생한 것은 무슨 까닭인가? 내가 듣기로는 사람이 처음 살았던 때의 문명은 항상 넓은 들 큰 강 바닷가에서 일어나는 것인데 이제 본국의 내륙지방은 비록 삼면이 큰 바다로 둘러져 있으나 곳곳에 산령이 겹겹이 싸여서 통상과 행군에 큰 장애를 만들고 요동이나 심양과 같은 넓은 들이 없으며, 또 내륙의 하천의 크기는 요하나 압록강에 비교할 만한 것이 적은 까닭이다.

우리 민족이 서북쪽으로부터 동남으로 옮겨 들어온 것은 무슨 까닭인가? 그것은 서쪽지방이 몹시 추워서 사람이 처음 살았던 때의 백성들이 살기에 적합하지 않기 때문이다.

단군 이래 고려 초기에 이르기까지 서쪽과 남쪽이 항상 분립하여 무릇 수천 년을 지난 것은 무슨 까닭인가? 그 지방 기후의 춥고 따뜻함이 이미 다르고 민족의 특성이 또한 달라서 조화하고 합하는 것이 항상 어려울 뿐만 아니라 또한 높은 봉우리와 산악이 도처에 험준하여 교통이 불편하기 때문이다.

서쪽과 남쪽이 분립해 있던 시대에 서쪽편이 항상 강하고 남쪽편이 항상 약한 것은 무슨 까닭인가? 그것은 남쪽이 따뜻하여 사람들의 성격이 문약하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고구려와 발해가 강하면서도 멸망을 면하지 못함을 무슨 까닭인가? 그것은 저 대륙의 강대한 나라들과 북쪽지방의 오랑캐들이 우리 민족이 주변에서 핍박하는 것을 싫어하여서 참담한 피의 싸움이 그칠 날이 없었는데, 남쪽의 민족이 언제나 이 때를 이용하여 동서에서 협공을 시도하였기 때문이다.

우리 민족의 실력이 압록강 바깥의 지역을 넘어 들어가 조상의 발상지를 되돌려 받지 못한 것은 무슨 까닭인가? 그것은 내륙지방 천연의 산물들이 풍부하여 사용하는 것이 자족하여서 隴西 지방을 얻어 蜀 나라를 넘보는 큰 생각이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당의 모양이 그리스 이태리 등과 비슷한 반도이나 그 인민이 쇄국정책에 스스로 안주하여 航海와 遠征의 사상이 일어나지 않은 것은 무슨 까닭인가? 그것은 이 또한 천연의 산물이 풍부하여 바깥과 통하지 않더라도 생업이 자족하기 때문이다.

인민들의 가족관념이 두텁고 국가관이 박약하고 단결력이 흩어지고 고립을 즐기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그것은 두메가 깊은 곳에 치우쳐 각 지역이 떨어져 중앙정부의 간섭이 두루 미치기가 어려워 인민이 정부의 휴척(休戚)을 자기의 아픔과는 관계되지 않는 것으로 생각하여 오직 저 청학동(靑鶴洞) 우복동(愚伏洞)과 같은 싶은 산골에 은거하면서 家長政治만 발달하였기 때문이다.

대개 지리라는 것은 그 민족의 특질과 습관을 형성하면서 무릇 인심 풍속 정치 산업과 일일이 밀접한 관계를 가지는 것이니, 국민된 자는 이를 연구하여 자기의 특성을 발휘하고 결점을 보충하는 일이 역시 천직일 것이다.

 

1편 상세(上世)

 

1장 단군시대

 

아아, 우리나라를 개창하신 시조가 단군이 아닌가? 그러나 우리들이 오늘날에 있으면서 단군시대를 우러러 생각할 대, 그 너무 멀고 아득하기 때문에 반신반의하는 것이 곧 구약성경의 창세기를 읽는 것과 다름이 없으니, 아아, 우리 단군시대가 과연 태고시대의 까마득한 불가사의한 시대인가? 당시에 건축한 평양성 삼랑성(三郞城)의 옛 터를 살펴보면 그 공예가 발달하였음을 알 수 있고, 이웃 나라 역사책에서 찬미한 단군궁(檀君弓) 숙신노(肅愼弩)에 관한 짧은 평을 읽어보면 그들의 전투 장비가 정교하고 아름다움을 알 수 있다. 또한 그 영토가 북으로는 흑룡강, 남으로는 조령(鳥嶺), 동으로 대해(大海), 서쪽으로 요동이라 한즉, 그 문화와 무공이 멀리 미쳤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후대에 역사를 편찬한 자들이 그 유적을 다룰 때 너무 아득하여 고증할 수 없다고 탄식하였음은 무엇 때문인가?

아아, 내가 우리나라 역사를 읽다가 고구려가 멸망한 때에 이르러서는 우리 역사의 일대 액운을 슬퍼하였다. 대개 단군이 나라를 세워 내려온 지 2천여 년에 그 왕조가 두 갈래로 나뉘어졌으니, 그 첫째는 동부여요 둘째는 북부여이니, 북부여가 곧 고구려이다. 동부여가 미약하여 그 영토와 문물을 모두 들어 고구려에 투항하였다. 단군이 즉위한 해부터 고구려 말년까지 햇수가 3천 년에 거의 가까우나 단군이 또한 고구려 왕조의 직계 혈통의 조상인 까닭에 고구려의 남은 글과 역사에 단군에 관한 사실들이 상세하게 실려 있었을 것이다. 또한 단군의 사실뿐만 아니라 그 이전의 아득한 대의 역사까지도 혹 실려 있었을 것이다. 아아, 그러나 문서창고와 전고(典故)들이 적의 병화에 모두 타 없어져버려 우리 역사의 제1장이 이와 같이 크게 황폐해진 탄신을 남겼다.

그러나 고구려가 멸망한 이후에도 아직 발해가 있었으니 발해는 고구려 유신 대조영이 종주국의 전복을 비분하여 부하들을 이끌고 읍루산 동편 기슭에 옮겨가 있다가 후에 말갈의 무리를 이끌고 이 나라를 세웠는데 우리나라 문헌이 발해에서 거두어들여졌을 거시거늘, 안타깝다, 저 고려시대의 역사편찬의 사관들이 어리석고 미련하기가 태심하여 우리나라 문헌들이 발해와 함께 망하도록 내버려두었다. 이 때문에 순암 안정복은 이것을 탄식하여서 “김부식이 역사를 지을 때 요나라와 교빙(交聘)하는 길에 유적들을 찾아 살펴볼 길이 어찌 없었으리요마는 아깝다 그가 그렇게 하지 못하였음이여”라고 말하였다.

또한 고구려사 발해사뿐만 아니라 신라 백제의 역사책도 모두 병화를 겪었으니 곧 문명이 이미 오래된 부여 중엽과 삼국시대의 일도 오히려 아득하다는 느낌이 드는데 하물며 연대가 까마득한 단군의 역사야 어찌 논할 수 있으리요.

비록 그러나 내가 역사기록에서 나름대로 관찰한 바에 따라 단군시대를 총총히 논하고자 한다.

무릇 단군시대는 추장정치가 가장 성하였던 시대라고 할 것이니 무엇 때문인가? 삼국 초기에는 추장정치가 끝날 운수에 기울고 군현제도가 시작하려는 식기이나, 아직도 수많은 소국들이 존재하여서 고구려가 거느린 속국이 17개 국이며 신라가 거느린 것이 32국, 백제가 거느린 것이 45국(3국이 거느린 소국들이 이 숫자에 그치지 않을 것이나 역사상에 남아 있는 나라 이름들을 열거하니 그 숫자가 이와 같음)이었으니 이것으로 단군시대를 미루어 생각할 때 바로 10리에 열 나라, 100리에 백 나라가 있던 시대였다. 허다한 추장들이 서로 자웅을 다투며 지체와 덕망을 서로 겨루어 서로 완강하게 다투더니 때가 이름에 성인(聖人)이 일어나 뛰어난 공덕으로써 많은 소국들을 통일하여 이들을 복속시키니 그 처음 일어났던 지역은 장백산 아래이고 그 정치의 중심지역은 졸본부여이다. (제2장에서 자세히 논한다)

살펴보건대, 우리나라 역사가들이 단군이 처음 일어난 지역을 영변 묘향산이라 하며, 국호를 정하고 정치를 베푼 곳을 평양 왕검성이라 하나 이것은 후대의 역사가들이 단지 고기(古記)에서 말하는 “신인(神人)이 태백산(太白山) 박달나무 아래에 내려왔다”라는 한 구절에 근거하여서, 태백산을 서북 일대에서 널리 구하다가 묘향산에 이르러 향단나무가 울창함을 보고서 이것을 태백산으로 억지로 단정하고 장백산의 옛 이름이 태백산인 줄을 몰랐다. 이제 내가 역사적으로나 지리적으로 추측하여 단정컨대, 대개 단군이 졸본부여에 도읍을 세워 자손들이 개인 영지를 만들고 압록강 동쪽 여러 나라는 단지 은혜와 덕으로써 회유하며 무력으로 위협하여 강제로 복속시켰을 뿐이요, 평양성 삼랑성 등의 건축은 반드시 강하고 사나운 오랑캐들 중에서 항복하지 않은 것을 원정하다가 당시 임금이 잠시 머물렀던 지역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성과 궁궐일 것이다. (자세한 것은 제2장에 보인다)

또 살펴보건대, 강동현(江東縣) 대박산(大朴山)에 단군릉이 있다 하니 이것은 또 무슨 말인가? 순 임금이 묘족을 정벌하다가 창오(蒼梧)에서 죽었으며 알렉산더가 페르시아를 토벌하다가 중도에서 죽었다. 옛날 처음 나타난 성인들은 각 종족들을 정복하여 자기 집안의 자손만세의 기초를 닦고자 하는 자는 하루라도 편안히 있으려 하면 그 공덕이 모두 땅에 떨어져버리니, 생각하건대 강동에 있는 단군릉은 원정하던 수레가 이곳에 이르러 죽었기 때문에 여기에 장사 지냈는가 한다.

어떤 사람은 단군이 단지 말없이 남쪽으로만 향하여 팔짱을 끼고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편안히 앉아서 저 숙신족 조선족 예맥족 삼한족들만을 다스린 줄로 믿고 있으니 어찌 그렇겠는가? 종교가가 한 교문을 창립하려 해도 무수한 마귀들의 유혹을 당하며, 철학자가 하나의 학설의 깃발을 굳게 세우려 하여도 수많은 장애를 거치는데 하물며 한 국가를 창립하여 한 민족을 편안히 거주시키려 하는 성인이 어찌 가만히 앉아서 문득 나라를 얻을 수 있겠는가? 사막의 방황(彷徨)과 탁록의 살벌(殺伐)이 어찌 모세와 황제에게만 있었던 것이겠는가?

단군이 정복한 성스런 자취들이 있을 것인데 어느 지역부터 시작하였겠는가? 그 토대를 연 곳이 꼭 졸본부여인데 그 최초는 심양(瀋陽: 지금 길림성)이고, 다음이 요동(지금의 봉천성), 그 다음이 조선본부(朝鮮本部)다.

무공을 이미 떨치고 문덕이 이미 흡족하매, 이에 사방의 오랑캐들이 발꿈치를 이어 항복하여 오며, 멀리 있는 다른 나라들이 명망을 우러러 귀화하였다. 비록 그렇다고 하나 어찌 단군 제1세뿐이겠는가? 곧 그 자손들이 단군의 뜻을 이으며 그 일들을 물려받아 그 할아버지와 매우 닮은 자가 대대로 이어받은 까닭에 우리 부여족이 이 삼천리 낙토(樂土)를 지키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이 무수한 종족 및 나라들과 싸우고 다투어 어찌 생존경쟁에 이길 수 있었겠는가? 추강(秋江) 남효온(南孝溫)은 “단군이 우리나라 사람들을 낳았으며, 패수 강가에서 우리들에게 인간의 떳떳한 도리를 가르치셨다(檀君生我靑邱衆 敎我彛倫浿水邊)”라는 시를 지었으니 아득하고 멀도다, 성인의 덕이여. 태자 부루가 그 덕을 받들고 어진 신하 팽오가 그 치적을 더욱 힘써서 인민들에게 농사를 가르치고 배와 수레를 만들어 교통을 발달시켰다.

살펴보건대, 단군이 팽오에게 명하여 국내의 산천에 제사를 지냈다 하는 것이 옛 역사에 서로 전하고 있는데도 근대의 역사가들이 말하기를 팽오는 한나라 무제의 신하로 조선에 온 자이니 어찌 단군시대에 이 사람이 있겠는가 하여 한 붓으로 팽오 두 자를 없애버렸으니, 아아 그 오활하고 고루함이 어찌 이에 이르렀는가? 만일 한 무제의 신하 팽오 때문에 단군의 신하 팽오가 없다고 할진대, 한 나라 조양(趙襄)의 아들 무휼로 말미암아 고구려의 태자 무휼을 없다고 하는 것이 옳겠는가? 한 시대 한 지방에 성명이 서로 같은 사람도 있거든 하물며 수천 리가 떨어져 있고 수천 년의 간격이 있는 시대에 전후 같은 성명을 가진 두 사람이 존재할 수 있음을 어찌 의심하겠는가? 단군 후예에 두 명의 부루가 있다는 데에는 역사를 읽는 자들이 다른 얘기가 없으면서도 어찌 오직 팽오만을 의심하는가? 또 어떤 사람은 고대에 선인왕검이 있기 때문에 단군의 이름인 왕검을 의심하는 사람도 있으니 이것은 모두 일소에 붙일 바이다.

 

2장 부여 왕조와 기자

 

심하구나 우리나라 역사가들의 무식함이여. 우리나라 문헌이 결딴난 것이 비록 심하기는 하지만 단군의 적통으로 이어지는 종족은 부여왕조가 명백하다. 설혹 당시 우리나라에 열 나라가 있다고 하더라도 중심 종족은 부여이며, 백 나라가 있다 하더라도 중심 종족은 부여이며, 천 나라 억 나라가 있더라도 역시 중심 종족은 부여다. 부여는 당당하게 단군의 정통을 물려받는 것이거늘, 부여에 대해서는 한 자 한 구절도 언급하지 않고 기자만 칭찬하니, 아아 그 무식함이 어찌 이에 이르렀는가?

곧 소위 민족주의는 논하지 않고 저들 옛 선비들의 춘추, 자치동감강목의 의리를 가지고 말한다 할지라도 부여 왕조는 동쪽으로 난을 피하여 옮긴 주(周) 나라나, 남쪽으로 도강한 진(晉) 나라가 되겠거늘, 옛 왕의 왕족이 되는 희(姬)씨, 사마씨의 자손을 버리고 위(魏)씨, 한(韓)씨, 척발(拓跋)씨, 모용(慕容)씨에게 정통을 부여함이 옳겠는가? 저들이 반드시 말하기를 “기자는 성인이므로 칠웅(七雄)과 오호(五胡)에 비교할 수 없다”고 주장하나, 나는 또한 한 마디로 반대로 묻겠다. “걸(桀)이 죽지 않으면 성탕(成湯)이 비록 성인이라 하나 하(夏) 나라의 정통을 대신하지 못할 것이며 주(紂)가 망하지 않았으면 무왕(武王)이 비록 어질다고 하나 은(殷)나라의 정통을 대신하지 못할 것이니, 걸(桀) 주(紂)에도 오히려 그러하거늘 하물며 덕을 잃은 적이 없는 부여 왕조의 정통을 어찌 기자로 갑자기 대신하겠는가?

비록 그러나 나의 학설이 또한 장황하다. 왕통이 정통이다 비정통이다 하여 다투는 일은 오활한 선비들의 미련한 꿈이며 조정이 진짜다 가짜다 하고 밝히는 것도 종놈들의 헛소리일 따름이다. 오늘날에는 학문이 크게 명백하여 국가라는 것은 일 개인의 사유물도 아니요 모든 인민의 공공재산임을 밝혀낸 까닭에 역사를 저술하는 사람들이 신라기 고려기와 같은 좁은 시각을 버리고 국가 발달의 정도를 살펴 상 중 근의 세 시기로 구별하며, 용삭원년 개요원년과 같은 복잡한 칭호를 없애고 국민의 사상을 지배했던 교주나 나라의 시조를 기원으로 하여 이러한 어리석고 비루한 다툼이 없거늘 이제 내가 갑자기 붓을 잡고서 누가 정통이며 누가 정통이 아니다라고 하여 춘추의 의리(義理)다 강목의 의리다 하여 분변하고 논쟁하니 나 또한 호사가가 되겠구나.

그러나 주권상 주인 종족과 객인 종족의 한계는 역사가가 부득불 엄격하게 구별을 하여야 할 일이다. 그러므로 부득이 고문과 금문의 대의(大義)를 아울러 들어서 제일 먼저 환히 밝히기를 아끼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잠시 멈춰두고 부여왕조의 성쇠와 기자가 동쪽으로 온 상황을 또한 얘기하겠다.

단군이 졸본부여에 도읍을 세우고 동쪽으로 옮긴 사실이 없었다는 것은 제1장에서 이미 논했거니와 고기(古記)에서 말하기를 “단군의 아들 해부루가 기자를 피하여 부여에 나라를 세웠다”고 하매 후세의 역사가들이 이것을 맹신하여 말하기를 “단군이 과연 평양에 도읍을 세웠다”고 하며 “ 그 후손이 과연 북쪽으로 옮겼다”하니 이 설을 깨뜨리지 않으면 우리나라 역사에서 의심의 구름을 쓸어 없앨 날이 없다.

대개 기자는 백마를 타고 망한 은나라의 나그네로 동쪽으로 올 때 가슴에 품은 바는 강태공이 매를 하늘에 날려보내는 것과 같은 병법이 아니라 하나라 임금 우(禹)가 전했던 홍범구주(洪範九疇)이다. 그에게 따르던 무리는 왕조의 군사가 아니라 점을 치는 무당들이다. 백이(伯夷) 숙제(叔齊)의 곧음 마음으로 주나라 하늘의 해와 달을 함께 받드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여 간단한 행장으로 동방 군자의 나라로 향하였던 것이다. 이 때 기자의 심정을 헤아려볼 때, 부귀도 원하는 바 아니요 가난하고 천함도 사양하지 않고 단지 주나라의 신하는 되지 않겠다는 처음의 뜻만 변하지 않고자 했을 뿐이다. 만약에 한 뙈기의 터를 주어 조선인의 농부가 되어라 해도 대단히 고마워할 것이며, 동굴에 집을 넣어 해동의 은사(隱士)가 되어라 해도 대단히 고마워할 것이며, 머리를 풀어헤치고 미치광이처럼 행동하던 옛날의 자태로 돌려 문전걸식을 하라고 해도 대단히 고마워 할 것이니, 나라를 잃고 도망하는 신하로서 한번 죽음이 오히려 더디어 맥수(麥秀)의 슬픈 노래에 눈물이 그칠 날이 없는데 어느 겨를에 한 나라의 임금이 될 꿈이 있었겠는가? 그러한 꿈도 없을 뿐만 아니라 또한 역시 능력도 없는 것이다. 이와 같은데 이에 기자의 자손들이 천년 동안 평양을 근거지로 하여 후(侯)라 칭하고 왕(王)이라 칭하였다고 하니, 이것은 과연 무슨 까닭인가? 이것은 천년 후의 역사가들이 그 설을 구하다가 얻지 못하므로 억지로 한 구절을 꾸며 “단군의 후예들이 기자를 피하여 북부여로 옮겨가 살매 나라 사람들이 기자를 받들어 왕을 삼았다”고 하니 이 말이 무슨 말인가?

단군이 과연 이 땅을 근거로 하여 그 자손이 천여 년을 서로 전해내려 왔을진대 비록 미약해지고 또 미약해졌다고 하더라도 일개 도망 온 신하의 행차에 겁을 집어먹고 먼 곳으로 도망쳤을 리 없을 것이며, 또 혹시 임금의 덕이 어질지 못하여 나라 사람들이 함께 쫓아내었다고 할진대, 그가 신하와 인민이 이반(離叛)한 후에 홀로 북방으로 가서 나라를 세울 능력은 없었을 것이며, 또 혹은 기자의 어질고 성스러움을 감복하여 그 왕의 자리를 양보하였다 할 것이나 이 또한 그렇지 않으니, 단군의 후손들이 현명할진대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서로 전하던 천년 사직과 나라와 백성들을 들어 다른 종족에게 양도할 리 없으며, 불초하다 하더라도 역시 그 만승(萬乘)의 부귀를 버려서 다른 사람에게 주었을 리가 없다. 또 혹시 나라 사람들의 칭송과 송사가 기자에게 돌아가므로 단군의 후예들이 할 수 없이 피해서 달아났다 할 수 있으나 이것 또한 그렇지 않으니, 저 순임금의 성스러움도 기자에 못하지 않으나 오히려 사문(四門)에 납(納)하며 그들의 백규(百揆)를 주인삼아 수년간 성의를 다한 후에야 그 인민들이 비로소 믿기 시작하였거늘, 하물며 조산사람이 기자를 갑자기 만나매 그 언어가 서로 통하지 않으며 풍속이 같지 않거늘, 어찌 한번 보고 감복하여 천여 년이나 받들어오던 우리 임금의 자손을 버리고 알지도 못하는 외국인에게로 돌아가겠는가? 그러므로 단군 후예들이 기자를 피하여 북쪽으로 옮겼다는 것은 성립할 수 없는 얘기다.

또 혹 기자가 동쪽에 온 것이 아니라 주나라 무왕의 힘을 빌린 것인가 하나, 이것 역시 그렇지 않으니, 무릇 주나라의 영토와 토지가 한나라 무제 때에 미치지 못할 것이며, 주나라의 국력이 한나라 무제 때를 미치지 못할 것이며, 기타 병기와 병력도 모두 한나라 무제 때에 미치지 못할 것이다. 한나라 무제는 큰 위엄이 사방 이웃 나라들이 두려워하는 적국의 뛰어난 임금이요, 위만조선의 우거는 나라를 세운지 오래지 않은 객 종족(客 種族)의 끼친 자손이지만 민심이 따르지 않고 나라의 기초가 튼튼하지 않은 가운데 한나라의 사신을 목 베고 거만한 말로 하고 수년 동안 피나는 싸움을 하였는데, 하물며 천년 왕조의 후예로 비록 그 쇠약함이 극도에 이르렀다 할지라도 강하고 굳센 기력이 어찌 저 위만의 조그만 도적보다 못하겠는가?

그 임금이 혹 어질지 못하더라도 그 신하가 있으며, 신하가 모두 어질지 못하더라도 그 백성이 있을 것이니, 한 나라 안의 위 아래 신하와 인민들이 함께 모여 선왕의 종묘를 차마 허물며 선왕의 능묘를 차마 버리며 선왕이 천년이나 머물러 살던 나라의 서울을 차마 이별하고 망국의 행장으로 멀리 떠나는 때에 비록 지극히 수치를 모르는 국민이라도 한번 쯤은 분발할 것을 생각할 것이니, 만일 수없이 싸워서 힘을 다하여 온 나라가 북쪽으로 도망한다 할진대 오히려 옳거니와 어찌 악공(樂工)과 무당 5천명이 오는 것을 보고 도망치는 것이 상책이라는 것을 찾았겠는가?

설사 단군 왕조 말엽에 쇠약함이 과연 이에 이르렀다 하더라도, 이 당시 북쪽에 있는 숙신족도 그 무예에 능한 민족이었으며, 서쪽에 있는 선비족도 전투에 능한 민족이었으며, 기타 여러 곳에 있었던 옥저 예맥 등의 종족도 물과 풀을 따라 목축을 하면서 생존 경쟁을 하는 민족이었으니, 단군왕조가 이와 같이 쇠약함을 보고서도 가만히 앉아서 취하지 않을 이치가 어찌 있었으리요.

그런즉 기자가 동쪽으로 오기 전에 단군 후예는 멸망한 지 벌써 오래 되었을 것이고 조선의 한 구석은 다른 종족들이 이미 차지하였을 것이다. 그러므로 기자가 무왕의 힘을 빌려 단군 왕조를 대신하였다는 것은 시골 농부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설화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기자가 단군의 후예를 대신하였던 것도 아니며, 기자를 나라 사람들이 받들어 세웠다는 것도 아니며 기자가 주나라 무왕의 힘을 빌린 것도 아니라 하면 기자가 동쪽으로 왔다는 문제는 장차 어떻게 단정을 내려야 하겠는가?

이에 대해 나는 기자가 동쪽으로 왔던 때는 부여왕조의 빛나는 영광이 아직 조선의 각 지역에 비추고 있었던 때이다. 기자가 와서 그 작위를 받고 조선(평양의 옛 이름)에 살면서 정치와 교화를 베푸니 부여왕은 임금이고 기자는 신하이며 부여 본부는 왕도이며 평양은 속읍이었다. 기자가 처음에 왔을 때 받은 봉토는 100리에 지나지 않으며 직위는 일개 군수나 도위에 지나지 않으니 기씨보(奇氏譜)에 실려 있는 태조문성왕 다섯 자는 후세 사람들이 잘못 기록한 것이며, 동사강목에 요동 당의 태반이 모두 기자의 영지다(遼地太半皆箕子提封)의 아홉 자는 억측으로 쓴 것이다.

부여의 역사는 부루 대소(帶素)의 양대만 잠깐 나타나 있고 기자의 실제 자취도 지극히 수개 조에 지나지 않거늘, 이제 어떠한 책에 근거하여 이런 단정을 내리는가? 위만이 투항하여 오니 기준이 그에게 서북쪽 100리의 땅에 봉하였고 진(秦) 나라 유민들이 처음 항복할 때 마한이 진한의 6부를 세웠으며, 온조가 남쪽으로 강을 건너오니 한왕(韓王)이 땅을 떼어 주었다. 중국인 혹은 다른 부족들 가운데 재주와 덕망이 있는 자들이 귀화해 오면 땅과 벼슬을 주어 변경을 지키게 하는 것이 우리나라 역사상에 여러 번 나타나는 예들이니 또 어찌 홀로 기자가 땅을 받았다는 것을 의심하겠는가 한다. 증험하여 생각해 보라.

기자 당시에 은나라 유민 5천 명을 이끌고 눈물을 뿌리면서 동쪽으로 오니 산천이 비록 아름다우나 고국의 땅이 아니며 풍속과 문물이 비록 좋기는 하나 고국의 경치가 아니며 좌우에 둘러 있는 것은 토착 추장들의 부락이며 눈앞에 접촉되는 것은 다른 나라의 민속들 뿐이니 고상한 홍범의 도로서 그 백성들을 교화하려고 한들 가능하겠으며 지리멸렬한 예악(禮樂)의 가르침으로써 그 백성들을 복속케 하려고 하나 가능하겠는가? 그러나 이렇게 어울리기가 아주 어려운 땅에 와서 뭇 인민을 관리하고 8조의 정치를 베풀었으니 천여 년 조선을 통치했던 단군 후손인 부여 왕조의 명령을 받들었음은 의심할 것 없다. 비록 그러나, 제후가 받은 땅이 100리를 넘지 않는 것은 고대 우리나라의 통례이다. 그런 까닭에 정전(井田)의 구획과 8조의 시설이 평양 이외에는 나타나지 않는 것이다.

기자가 죽으매 자손들이 이를 계승하여 평양 일부만 다스렸을 뿐이더니 그 후세에 이르러서는 부여 왕조는 형제들이 서로 다투어(동부여와 북부여가 나뉘어지는 것이 그 예이다) 명예의 빛이 쇠퇴하여 미약하고 선비 말갈족 등이 각기 일어나매 이에 기자 자손들이 이 때를 틈타서 주위의 소국들을 병합하여 왕위에 올라서 전국을 호령하고 싸울 때마다 이기고 공격을 할 때마다 취해서 영토를 크게 개척하니 서쪽으로는 요하에 이르고 남쪽으로는 한수에 이르러 단군의 옛 영토의 3분의 2를 차지했다.

이때 부여왕조는 북방 한 구석에 치우쳐 세력이 크게 떨어졌으나 단지 집안 형제 사이의 정치적이 다툼이 결렬하여, 단군이 손수 정한 조선을 외국인 경쟁에 맡겨둘 뿐이요, 그 민족의 정신은 더욱더욱 팽창적인 방면으로 나아가게 되었다.(본론 제1장 제2장을 읽어본즉 주권상의 주된 민족, 주변 민족에 관한 구별은 엄격히 다루었으나 오히려 미진한 남은 생각이 있는 까닭에 이 장의 부론(附論) 수십 줄을 덧붙임)

 

부론(附論)

 

우리나라 사람들 가운데 역사를 읽는 사람들은 하나의 큰 미혹이 있으니, 미혹은 무엇인가? 토지역사가 있는 것만 알고 민족역사가 있음을 알지 못하는 것이 그것이다. 우리나라의 땅을 차지했던 종족이면 그들이 어떤 종족인 것도 묻지 않고 모두 우리의 조상으로 인정하여 우리나라의 토지를 관할했던 종족이면 그들이 어느 나라 사람인가를 생각하지 않고 이를 모두 우리나라의 역사에 놓고 있으니 그 어리석음이 어찌 이에 이르렀는가?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저 선비족 몽고족 등은 우리 조상으로 인정하지 않을지라도 최초의 남한과 북한의 토착 종족과 뒤에 와서 많이 혼합된 지나족은 부득불 우리나라 조상으로 인정할 것이며 기타 위만 최리(崔理) 등은 우리나라의 역대에 들어오지 않는다 하더라도 기씨의 천년 왕조는 부득불 우리나라 역사에 넣어야 할 것이다” 하였는데 나는 말하겠다. “아니다 그렇지 않다. 저 토착 종족과 지나족 등을 우리의 조상으로 인정하다가는 곧바로 선비족 몽고족도 우리 조상으로 인정하게 될 것이며 저 기씨 왕조를 우리 역대에 두었다가는 곧바로 위만 최리 등도 우리나라 역대에 들어갈 것이니, 아아 이들이 모두 다른 종족과 민족인데 어느 것은 우리 역사에 올리고 누구는 내쫓아버리겠는가?”

만일 최초로 이 땅에 근거지를 삼은 토착 종족이라 하여 이를 우리의 조상으로 인정할진대 미국인이 인디언을 조상으로 제사 지내는 것이 옳을 것이며 많이 혼입한 종족이라 하여 이들을 우리 조상으로 같이 인정할진대 러시아 사람들이 몽고사람을 숭배하는 것이 옳겠는가? 이것은 동서양의 역사에 전혀 없는 일이니 두 번 다시 얘기할 것이 없다. 그리고 기자가 우리나라에서 주권을 행사한 것은 비록 갑족이 을족을 정복하고 더불어 그 토지를 통치한 예와는 다르다 할지라도 이후에 위만 최리 장통(張統) 등 주변 종족의 번식과 4군 2부 등의 건설은 이 때로부터 시작되었으니, 우리나라 역대사의 한 부분으로 편입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우리 부여족이 발달한 실제 자취로 우리나라 역사의 일부분으로 편입됨이 옳지 않다고 하겠다. 그러므로 나는 우리 부여족이 발달한 실제 자취로 우리나라 역사의 주요 골자로 삼고 기타 각 민족은 비록 우리나라 당을 차지하고 주권을 다툰 일이 있다고 하더라도 모두적국의 외침의 한 예로서 보겠다.

우리 부여족의 역사와 왕통이 소멸되었다 하더라도 다른 민족을 우리 역사에 포함시키는 것이 옳지 않거든 하물며 이 부여의 역사와 왕통이 있었던 시대이겠는가?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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