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대만의 '소년포청천' 이라는 사극입니다. 비록 드라마일지라도, 황제국 고려의 위상과 그런 고려와 송의 관계를 잘 나타내주고
있습니다.
위 동영상은 '소년포청천'의 한 장면인데 내용을 요약하여 정리하자면 이렇습니다.
'송나라를 방문한 고려의 황태자(皇太子)가 무례한 발언을 서슴지 않고 행패를 부리지만, 송나라 대신들은 이 발언에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한다.
또한 고려 황태자의 암살기도가 있자 고려의 태자는 그것을 눈치체어 사흘 내에 범인을 잡지 못한다면 송 황제를 찾아가 한소리 하겠다고
으름장을 놓는다.
또한 고려 태자를 환영하는 연회에서 고려 태자는 '송은 여러모로 고려보다 못하다' 라는 발언까지 하게 된다.
고려 태자가 송에서 암살당하여 죽게 되자, 송 조정은 고려가 쳐들어 올것을 두려워하여 두 파로 갈라져 싸움을 벌이고 송 황제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게 된다.'
또한 이 사극에서는 고려의 임금을 '고려 황제' 라고 칭하고 있습니다. 결국 이 드라마는 고려와 송나라가 동등하다는 것을 확실하게 고증한
셈입니다.
또한 당시의 기록들에도 고려가 얼마나 강했는지 엿볼 수 있습니다. 또한 이는 당시의 기록에서도 고증됩니다.
희녕(熙寧) 3년(1070), 군(郡)·현(縣)에서 고려(高麗)의 사신을 접대하는 옛 준례가 없어 백성들이 퍽 괴로웠는데, 규정을 만들어 반포(頒布)하고, 비용은 모두 관(官)에서 지급하도록 조칙(詔勅)하였다. 또 고려(高麗) 사신이 중국말에 익숙하지 못한 까닭으로 재리(財利)를 엿보는 자들이 사사로이 왕래할까 염려하여 고려(高麗) 사신이 이르는 곳 마다 왕래를 금지시켰다.
희녕(熙寧) 9년(1076) 에 또 최사훈(崔思訓)을 보내 오자, 중귀인(中貴人)에게 명하여 도정(都亭)· 서역(西驛)의 예(例)에 따라 객관(客館)을 수리하여[註167] 고려(高麗) 사신들을 더욱 후하게 대우하도록 하니,사신으로 오는 자가 더욱 많아졌다.
정화(政和) 연간(1111~1117) 에 고려(高麗)의 사신을 국신사(國信使)로 승격시켜[註203] 예우(禮遇)가 서하국(西夏國)보다 위에 있었고, 요(遼)나라 사신과 함께 추밀원(樞密院)에 예속시켰으며, 인반관(引伴官)· 압반관(押伴官) 등도 고쳐 접관반(接館伴)· 송관반(送館伴)이라 하였다
흠종(欽宗)이 즉위하자 축하 사신이 명주(明州)에 도착하였다.어사(御事) 호순척(胡舜陟)이 “고려(高麗)가 50년 동안이나 국가(國家)를 미폐(靡敝)케 하였으니 정화(政和) 이후로는 사신이 해마다 와 회(淮)· 절(浙) 등지에서는 이를 괴롭게 여기고 있습니다.
선화(宣和) 4년(A.D.1122; 高麗 睿宗 17), 고려의
가렴구주는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건염(建炎)] 3년(A.D.1129), 고려(高麗) 사신이 우리의 허실(虛實)을 정탐하여 금(金)나라에게 보고하지 않았다는 것을
어떻게 알겠습니까?” 하니,
마침내 조서(詔書)를 내려 고려(高麗) 사신이 오지 못하도록
중지시켰다.
그 조서(詔書)는 대략 다음과
같다.
'짐(朕)의 만년에 실로 변고가 많아 온 중국의 백성들이
강적인 [금(金)나라의] 침입을 받았소.
그들은 이미 국경을 깊숙이 짓밟고서도 병사를 일으켜 침입을
중지하지 않고 있어 장위(仗衛)를 잠시 강호(江湖)로 이주(移駐)시켰소.
만약 이
때에 사신이 정말 온다면 관원이 그 신변을 경호하지 못할까 염려스러우니 변방의 난리가 그침을 기다려 빙문할 시기를
묻겠소.
사신의 수레를 들여 놓기 위하여 진관(晉館)을 무너뜨림을
후회하지 않을 것이며, 한관(漢關)을 닫고서 조공(朝貢)를 거절한 것은 전례(前例)를 따른 것이 아니오.
평소의 고려(高麗)의 마음을 헤아리건대 나의 뜻을 이해하리라
믿소.'
<송사> 『고려열전』中
'하물며 우리나라에는 문물(文物) 예악(禮樂)이 행한지 이미
오래되었으며,
장삿배가 연이어 내왕하여서 값진 보배가 날마다
들어오므로'
『고려사』세가 문종 12년 中
<송사>
의 기록은 고려 사신이 얼마나 대접받고, 송나라가 고려에게 변명하는 처지를 잘 나타내 주고 있으며
<고려사> 의 기록은 고려의 문물이 발달하여 중국과 교류하여도 별 이득이 없었다는 사실을 잘 나타내 주고
있습니다.
고려의 이런 자부심은 고려 중기 사람 진화가
금나라 사신으로 가는 길에 지은 시 '봉사입금(奉使入金)' 에서도 보입니다.
서쪽의 꽃은 이미 쓸쓸히
시들어가고
북쪽의 성도 아직 어둡고
캄캄하네
조용히 앉아서 문명이 밝아오는 아침을
기다리니
하늘 동쪽에 붉은 해가 솟으려
하네.
서쪽의 꽃이란 중국을 뜻하는 말로 송나라의 몰락을 알려주고
있으며, 북쪽의 성이란 거란, 여진 등을 일컫는 말로 아직 앞날이 어둡다는 것을 뜻합니다. 더하여 하늘의 동쪽에 붉은 해가 솟으려 한다는 것은
고려에 해가 뜬다는 말로 고려인들의 자부심을 밝혀주고 있습니다.
또한 당시 고려인들의 기록에도 고려가 황제국임을 증명하는
기록들이 있습니다.
황제폐하(皇帝陛下)께서 조칙을 내려 이르기를..우리 황제폐하(皇帝陛下)께서도
지극하신 정의로..
고달사원종대사혜진탑비(975년)
금상황제(今上皇帝)의 만세를 기원합니다.
태평2년명마애약사불좌상(977년)
광종대왕(光宗大王)이
황(皇)위에 올랐다.
거돈사원공국사승묘탑비(1025년)
엎드려 황제폐하(皇帝陛下)의 덕이 하늘과 땅에 떨치고..
보현사석탑(1044년)
황상(皇上)께서 결(訣) 패일(佩日)..
부석사원융국사비(1053년)
황상(皇上)께서 천조(踐祚)에 오르시던 병술년 봄 정월에
이르러..
칠장사혜소국사비(1060년)
성황(聖皇)께서 국척 원신을 지극하게 기리는 것이다.
이자연묘지명(1061년)
무릇 우리 황(皇)의 아들들은 모두 공의 생질이 되니...태자(儲皇)와 후비, 친왕 등에
이르러서는..
이정묘지명(1077년)
공이 황후(皇后)의 인척이므로 더욱 총애하여..황후(皇后)가 안에서 공을
불러..
최계방묘지명(1117년)
5남 응추는 황자(皇子)인 극세승통에게 의탁하여 머리를 깎고 중이
되었다.
이식묘지명(1156년)
태자(儲皇) 역시 그 아름답고 고움을 슬피 여겨 특별히 제물을 내리고 각별히
총애하는 뜻을 보였다.
왕영녀왕씨묘지명(1186년)
때는 황상(皇上)께서 즉위하신 원년 모월 모일이다.
개천사석탑(1214년)
황태제(皇太弟)가 바로
신종(神宗)이다.
최충헌묘비명(1219년)
이러한 기록들만 보아도 고려인들의
기상을 엿볼 수 있으며, 이 사극은 순수하게 실제 역사의 기록을 토대로 고려의 위상을 밝혀주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