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이 중국을 완전히 이길거라고 생각은 무리가 있죠. 청이 중국을 지배한건 우연도 많이 겹쳤기에 가능한겁니다. 첩을 빼앗긴 오삼계가 산해관을 열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사실 청도 점령을 하면서 계획한 것보다 남쪽으로 많이 내려가서 본인들도 당황했을 겁니다. 야심보다 더 큰 영토를 얻었달까. 명은 광해군이 조선군을 파병해줬어도 반 이상은 조선을 의심하고 있었습니다. 직접 오겠다는 대신도 있었는데 무서웠는지 오지는 않았죠. 명나라 자체가 최의 요동정벌, 정도전 요동정벌로 늘 의심하는 관계였으니 당시 사람들이 보기엔 줄타기가 위태로워 보이기도 했겠죠. 물론 지들 이득이 먼저였겠지만.
직접적인 멸망은 이자성의 난 때문이지만 이자성이 난이 일어나게된 원인부터 잦아야죠
가장 큰 원인은 착취와 부패였죠 전형적인 왕조말기 현상이었죠 부패=>착취=>농민반란
왕조말에 가면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그리고 당시 청은 산해관을 넘어올 생각을
못하고 있던 때입니다. 이자성군이 북경을 점령하고 보인 행태를 보면 새로운 왕조를 이룩하기
위한 준비가 전혀 안된 상태에서 북경을 점령하고 명을 멸망시켰는데 가장 커다란 실책은 오삼계를
끌어안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오삼계는 대세가 이자성에게 기울었다는걸 인정하고 투항할
생각을 가지고 있었지만 이자성측의 뻘짓으로 청에 투항하고 산해관을 열어줘 버렸죠 그리고 숭정제는
명왕조를 더 유지하고 싶었다면 북경을 떠나 남송처럼 이자성군의 영향이 미치지 않는 지역으로 이동해서
방어라인을 유지했다면 명왕조는 무너지지 않고 오히려 북경을 점령한 이자성이 먼저 무너졌을 수도 있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그만큼 이자성은 새로운 왕조에 대한 준비가 돼 있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사르후 전투는 명나라가 요동에서 기세를 올리고 있던
누르하치를 꺽으려고 원정나가 실패한 전투입니다.
명나라의 멸망은 아니고, 명나라가 요동을 잃고,
만리장성 산해관 이남으로 쳐박히게 된 계기라고 볼 수 있습니다.
누르하치는 그 뒤로도 활약하다가,
만리장성의 산해관을 넘으려다가,
산해관 앞에 있던 요새인 영원성을 공격하다..
홍이포라는 서양식 대포에 맞아 부상당해 죽습니다.
이걸 지휘한게 원숭환이라는 장군인데..
명나라판 이순신 장군이랄까 그런 인물입니다.
그런데 숭정제의 경우,
전대 황제들보단 좀 낫긴 낫지만.. 돈을 좋아하고 자기 돈 나가는 건 싫어하는 타입이었죠.
만력제부터 재정상태가 개판이 되었는데.
그걸 물려받은 숭정제도 나라에 돈이 없으니 미래의 세금을 미리 거두는 둥 수탈을 해야했고,
그렇게 모은 돈으로 병사들에게 봉급을 줘야 되는데, 이것도 엄청 밀리고 잘 주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니 백성들은 못살겠다고 반란을 일으키고, 병사들은 사기가 떨어질 수 밖에 없죠.
원숭환의 경우도 명장이었지만, 돈 문제로 골치를 썩이다
당시 조선 의주 근처의 가도에 주둔해 조선의 고혈을 빨아먹던 명나라 장수 모문룡을 죽이고,
그 군자금을 회수했는데, 이 중 일부가 조정에 뇌물로 들어가고 있던터라,
황제와 조정대신의 미움을 사서 능지처참을 당합니다.
이 후 오삼계가 북방의 핵심인 산해관을 방어하게 되는데..
이자성의 반란군이 북경을 점령하고, 숭정제는 도망치다 산에서 목매달고 죽습니다.
이게 명나라 멸망 과정이구요.
그 다음에 이자성의 반란군이 북경 점령 후에 오삼계보고 투항하라고 권했는데..
이 때 이자성 부하 중 한 사람이 오삼계의 애첩인 진원원을 건드렸기 때문에..
빡친 오삼계가 이자성 대신 청나라에 투항하게 됩니다.
그래서 청나라 군대가 산해관을 넘어 오삼계군과 합세해 내려와 이자성의 반란군을 박살내고,
청나라를 세우게 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