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 출토 왜계갑주의 분포와 의미'-부산박물관 '김혁중' 中
필자는 다음과 같은 점에서 대금계 '갑주의 제작지'를 '일본열도'로 보고자 한다.
우선 기술적 문제로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송계현이 지적한 '기술적 요소의 다양함'은 '일본열도의 제작품'에서도 확인된다. 또한 대금계 판갑이 제작되기 전 시기인 4세기대 종장판갑에 보이는 궐수문이라든지 조장을 상기시킬 수 있었던 장식적 요소가 일본열도뿐만 아니라 한반도 출토 대금계 판갑에서도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일본열도의 대금계 판갑'은 종장판갑에는 보이지 않는 어깨부위를 크게 과장한다던가 마름모꼴 형태로 지판을 만드는 등 '장식적 요소가 5세기 중엽에 이르러 최고조에 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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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금계 갑주가 '한반도산이라 가정'하였을 때 발생하는 '세 가지 의문'을 제시하였다. 첫째, '열도에 들어온 갑주가 모두 대금계 갑주뿐'인 점. 둘째, '한반도 내에서 대금계 갑주가 소수'인 점, 셋째, 종장판갑과 대금계 판갑과 같은 '다른 계보의 갑주'가 '왜 한반도에 존재'하는가라는 점이다. 그는 이러한 문제점 때문에 대금계 갑주를 '한반도제로 이해하기 곤란'하며 '일본열도에서 한반도로의 이입을 상정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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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외에도 제작지 문제에 대한 주목할 만한 견해가 있다. 우선 幅尾正彦(2003) 기술적으로 한반도 출토 종장판갑과 비교하면서 '일본열도 최초의 철제 판갑'인 수신판혁철단갑과 '제작 기술이 서로 다름'을 주장하였으며 송계현이 지적한 '다양한 대금계 판갑의 속성은 일본열도에서도 확인'된다고 하였다.
이는 앞에서 언급한 '대금계 판갑의 형식적인 변천이 일본열도에 있음'을 보강하는 근거가 될 수 있다.한국에서는 이현주(2009) 역시 기술적 문제를 언급한 바 있는데, '연결기법과 복륜기법에 주목'하였다. '한반도 고유의' 철제 판갑인 종장판갑의 연결방법이 혁철에서 병유로 가죽을 이용한 '혁뉴복륜이 철판을 접거나 덧대는 절판,철판 복륜으로 변화하는 것과 달리' 그 이후 시기인 '대금계 판갑에 혁철기법과 혁뉴복륜이 적용된 것은' 두 판갑 모두를 '한반도제로 볼 경우 기술 퇴보'라고 볼 수 밖에 없게 되므로 '대금계 갑주의 제작지를 일본열도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하였다.
'가야사정책연구회위원, 한일역사공동연구회위원 박천수의 새로쓰는 고대한일교섭사' 中
"필자는 종장판계 갑주에서 '대금식 갑주로 변화하는 과도기적 형식'이 현재 '한반도 내에서 확인되지 않고' '대금식 갑주가 시기에 따라 일본열도와 교류한 지역으로 이동'하는 것으로 보아 '일본열도에서 제작되어 반입된 것'으로 본다."
이곳에 옮긴 야스나가 曰 "이 발언들은 도대체 어떻게 설명할 것입니까? 동게 여러분. 한일양국 학자들이
근거를 들며 가야의 왜계갑주는 일본의 갑주가 가야로 넘어온 것이라고 입을 모으고 있잖아요."
이건 한국인이 그림으로 재현한 왜계갑주를 입은 가야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