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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5-02-21 04:00
[기타] 하고 싶은 얘기가 있어 처음으로 글을 적습니다.
 글쓴이 : zzag
조회 : 2,341  


우리가 이곳에서 세상사의 시비를 논하던 역사의 명암을 따지던 그보다 훨씬 기본적인것이 존재합니다.

다름아닌 이곳 가생이에서는 게시글과 댓글을 달때 존칭과 경대를 하게 정해져 있습니다.

이 것이 지키는 어려움으로 따지자면 너무나 쉽고 간단한 일이고, 

그 중요성으로 보자면 이보다 더 우선적이고 기본적인게 없을정도인데

이렇게 쉽고도 중요한 것을 지키지 않으면서 어떻게 남을.. 

그것도 모든것이 결과로 나와있는 시간을 가지고, 

그 시간들이 예측불허였던.. 모든일에 확신할 수 없었던 과거인을 욕할 수 있을까요?

하지만 역사엔 항상 숙명처럼 비판이 따릅니다. 욕할 수도 있다고 봅니다.

그러나 존칭과 경대는 이곳의 규칙이니 따라야 합니다. 

지키기도 너무 어려운데 쓸모도 없는일이 아닙니다. 그 반대로,

지키기가 너무 쉬운데도 그 중요성이 큰 일입니다. 그러기에, 

그 규칙을 무시하는 사람을 된 사람으로 보지않고 그 말을 귀담아 듣지 않게 됩니다.


혹시라도 여태까지 규칙을 몰라서 존칭과 경대를 하지 않으셨던 분들은 

이제부터라도 지켜주셨으면 합니다.

또 특정인에만 하실 말씀이 있으면 특정인만 볼수 있게 해주셨으면 합니다.

제가 이래라 저래라 하는것 같아 죄송합니다만.. 

제가 사적인 일에 관해서가 아니고 공적인 일에 대해서 말씀드리는것인 만큼 양해를 바랍니다.



아래 글은 기왕에 적은 게시글이다보니 별 내용도 없는 얘기로 마무리하기 뭐해 

몇년전 개인적인 곳에 적었던 글하나 오려 붙였습니다. 어투는 이해 부탁드립니다.













신미양요시 미 상륙부대 작전기록 및 에피소드


The Flag of the Commander in Chief of the Korean Forces, 
Felice Beato, June 1871. The J. Paul Getty MuseumThe Flag of the Commander in Chief of the Korean Forces, Felice Beato, June 1871. The J. Paul Getty Museum

 

 

 

신미양요에 관한 미군기록을 Thomas Duvernay가 정리해 게시한http://www.shinmiyangyo.org에서 예전에 발췌 후 국역했던것에 내용을 약간 추가

(일부 교차비교 포함). 발번역이라 원문 병기.

 

*Thomas Duvernay : 현 영남대 국제학부 한국학 교수, 전투 당시 탈취된 조선군의 장군기(帥旗, Generalissimo)의 반환을 이끌어낸 주인공

 

**********************************************************************************

 

At 10:00 a.m. on June 10, the assault on the forts began. The landing forces consisted of about 650 men (over 500 sailors and 100+ Marines).  In this fight, the US had .50 caliber Remington rolling block carbines, the Marines had muzzleloading Springfield muskets and Navy Plymouths; the Koreans had matchlocks. They landed at Ch’oji Fortress, which the Americans called Marine Redoubt, with no opposition; they camped nearby overnight. The next morning, they finished destroying the fort, dumping or spiking cannons and then moved on, with Marines traveling ahead as skirmishers.

(1871년) 6월10일(이하 양력) 오전10시 초지진에 대한 상륙돌격이 개시되었고 상륙군은 650여명으로 (500명이상의 해군보병 및 100명 이상의 해병대) 구성. 미군 주력은 0.50구경 레밍턴 카빈으로 무장했고 해병대는 전장식(前裝式)들인 스프링필드와 네이비 플리머스 보총을 사용(시대와 국가를 초월한 해병대 천시..?)하였으며 조선군은 화승총을 사용. 별다른 저항없이 초지진에 상륙한 미군은 '해병대 보루'(Marine Redoubt)라고 명명한 후 주변에서 숙영. 다음날인 6월11일 아침, 상륙부대는 전날부터 실시한 초지진에 대한 사용거부(진지파괴 및 장약소각)와 화포 폐기를 끝내고 나서 해병대를 척후로 내세우고 이동을 개시.

 

The Korean forces banded together as guerilla units but, armed with only matchlocks, and being kept in check by US artillery (12-pdr. howitzers on field carriages), they could not get within effective firing range. The US troops moved on toward the next objective, Dǒkjin Fortress (Fort Monocacy). 

조선군은 소부대(불명)별로 연계된 유격전을 시도하였으나 미군의 12파운드 야전 견인곡사포 포대(7문 양륙 -원정 미 아시아함대 사령관 John rodgers’s report)에 포착되어 조선군의 유격대가 휴대한 화승총의 유효사거리까지 접근하지 못함. 미 상륙군은 다음 목표인 덕진진(포트 모노케시라고 명명)까지 북쪽을 향해 전진.

 

The Korean forces had, likewise, abandoned the second fortress, choosing to mass together farther north. The Marines quickly dismantled this fortress, too.  Like the past fortress, they dumped and spiked cannon, burned stores, etc.  Next, they went onward toward their main objective, a small fortress attached to Kwangsungbo (광성보), called Sondolmok Dondae (손돌목돈대). The Americans originally referred to it as the citadel, but later renamed it Fort McKee, in honor of the Navy lieutenant killed in the fighting there. The Korean forces had regrouped there, en masse.  Along the way, some Korean units tried to flank the US forces; they were checked, again, by strategic placement of artillery on two hills nearby the Citadel.

조선군은 이 두번째 진지를 포기하고 더 북쪽에서 밀집방어를 선택한 것으로 여겨짐. 미군은 초지진에서와 마찬가지로 진지 사용거부 및 화포 폐기와 비축품 소각 등을 실시한 후, 주요목표인 광성보의 부속돈대(손돌목돈대)를 향해 이동. 미군은 초기에 광성보를 ‘요새’로 호칭했으나 뒤에 이곳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전사한 미 해군 대위의 이름을 따서 포트 ‘맥키’라고 명명. 조선군은 광성보에 집결하여 부대를 재편하였고 일부 부대 [광성보 편제의 어영군(御營軍, 어영청소속 보군1초(步軍1哨: 보병 1개중대))과 별무사(別武士: 기병)들을 지칭 -고종실록] 는 미군의 접근로를 따라 매복하여 접근하는 미 상륙군의 측면공격을 시도하였으나 광성보 인근 야산 언덕 두 군데에 배치한 미군 야전포병대에 또다시 포착되어 공격이 무위로 돌아감.

 

Artillery, both from the ground forces and also from the USS Monocacy, offshore, pounded the citadel and the hill directly west of it, in preparation for an assault by US forces. The US forces, made up of nine companies of sailors and one company of Marines, grouped on the facing hill, keeping cover and firing at any defender who showed himself.

미군의 돌격을 지원하기 위해서, 상륙군에 지원된 야포들(12파운드 야전곡사포 7문)과 해안쪽 모노케시함의 함포들의 이중십자포격이 광성보와 고지 서측면에 공격준비사격으로 실시됨. [*원정함대 5척의 전함 중 Monocacy함(60파운드포 2문, 8인치포 4문) 외에도 Palos함( 24파운드 곡사포 4문, 24파운드 강선곡사포 2문)과 원정함대에 동반했던 화력미상의 소형증기선 19척중 4척이 참가]. 해군보병 9개중대 및 해병 1개 중대로 구성된 미군은 광성보 전면의 고지 위에 공격진형을 구성하고 엄폐한 상태에서 조선군 수비대 [어재연장군의 직할대, 당시 조선군 병력배치 형태는 병인양요때와 마찬가지로 전 병력을 집결하여 결전을 벌이기보다 문수,정족산성과 각 진,보 등에 분산 배치되어 거점방어 형태로 지연전을 펼치며 기회를 틈타 수시로 유격전을 벌이는 전통적인 방식을 따른것으로 추정되며 광성보 내 실제 방어병력은 미군 병력에 비해 1/2 ~ 1/3 수준이었던 것으로 판단됨] 를 향해 사격을 실시.

 

When a signal was given, firing stopped and the US forces charged toward the Citadel, with Lieutenant Hugh McKee in the lead. The Koreans fired as fast as they could, but the US forces gained ground before they could reload; the Koreans ended up throwing rocks at the attackers.  Lieutenant McKee was the first in the citadel, with a sword in one hand and a revolver in the other. He was shot in the groin and speared in the side by Koreans inside.  After him came Commander Schley, who shot and killed the Korean who speared Lieutenant McKee.  An interesting anecdote about Lieutenant McKee was a story that might shed a little light on why he raced ahead of everyone in the charge on the citadel. 

돌격명령이 떨어지자 포격이 중지되었고 미군은 휴 맥키 대위를 선두로 요새를 향해 돌격을 개시. 조선군은 재빨리 사격을 실시하였으나 화승총의 재장전이 이루어지기 전 미군의 선두가 요새에 도달.(화승총의 특성상의 단점으로 재장전에 시간이 오래 걸림). 조선군은 결국 요새위에서 바위 등을 던지며 저지. 맥키 대위는 한손에 검을 다른 한손엔 연발권총을 든 채로 가장 먼저 요새에 도달하였으나 내부의 조선군에 의해 하체에 총상을 입고 옆구리를 창에 찔림. [*백제군 소수 결사대에게 고전하던 신라군 화랑 관창의 역할처럼 전투촉발의 매개체가 된듯함] 상륙군 지휘관 쉴리가 그 뒤를 따라서 맥키 대위를 창으로 찌른 조선군을 사살함. 맥키 대위가 왜 요새를 향한 공격에서 누구보다도 가장 앞서서 질주해 들어갔는지에 대한 작은 실마리가 되는 일화가 있다.

 

For a long time, I wondered why he did something that was seemingly suicidal.  Then, one day I received e-mail from a distant descendant of his, William C. McKee.  He transcribed a newspaper clipping from that time.  In it, was the story of how word got back to his ship, the USS Colorado, the day before it left for Korea that his fiancee, a socialite, ran away with a career diplomat.  Lieutenant McKee overheard crewmembers talking about it and, when someone noticed him standing there, he had a clenched fist, like he wanted to strike someone.  He spent the entire night pacing the deck, according to the story.  It might explain his feelings on June 11, where he was probably still very emotionally distressed over losing his fiancee.

오랫동안 나는(토마스 듀버네이 교수) 왜 그가 xx에 가깝게 보이는 행동을 했는지 궁금했었다. 그러던 어느날 윌리엄 맥키라는 그의 먼 친척으로부터 그 당시의 신문기사를 옮겨적은 이메일을 받았다. 그 내용에 따르면, 한국을 향해 출항하기 바로 전날 밤 자신의 소속함인 기함 콜로라도 함상에서 맥키 대위는 승무원들끼리 하는 이야기를 우연히 지나다 듣게 되었는데 그것은 바로 사교계에도 이름이 알려진 그의 약혼녀가 어느 중견 외교관과 눈이 맞아 달아나 버렸다는 내용이었다. 누군가가 거기에 서있던 그를 보게 되었을 때, 그의 주먹은 꽉 쥐어진 채 마치 누구라도 때릴듯한 모습이었다고 하며 그 밤 내내 그는 갑판을 반복해서 왔다갔다 했다고 한다. 이런 사실은 6월11일의 그의 감정이 약혼녀를 잃게 되어 매우 정서적으로 격앙된 상태가 지속되었다는 것을 잘 설명해준다.

 

Also, in an event related to Lieutenant McKee, I got to know his great-great nephew, James Wardrop quite well. I arranged for him to visit Kanghwa Island for the chesa (제사) for General 어재연 back in 2000.  Jamie was a focal point of the ceremony that year and became quite close to 어윤원, the elderly grandson of the general. A rift between two families had been healed.

또 한가지 맥키 대위와 관련한 일로서, 나는 제임스 워드롭이란 그의 증조카를 알게 되었는데 지난 2000년도에 강화도에서 올린 어제연장군의 제사에 그를 초청하도록 주선하였다. 제임스는 그해 제사에서 부각되는 인물이 되었고 어재연장군의 장손인 어윤원씨와 친해지게 되었다. 두 가문간의 역사상에 이루어진 균열이 메워지는 순간이었다.

 

I was very glad to have been part of a chapter in Korean history that was finally closed.  The fighting went on for only fifteen minutes or so and all the defenders were killed, wounded and captured or escaped. When the fighting was over, about 350 Koreans and three Americans, Lieutenant McKee, landsman Seth Allen and Marine Denis Hanrahan, were dead.  Lieutenant McKee’s body was shipped back to his hometown of Lexington, Kentucky, in the United States, for burial.  The other two KIA, plus one sailor, Thomas Driver, who died from a fever, were buried on Chakyak Island.

나는 마침내 종결된 한국역사의 한 페이지 중에 일부로나마 참여하게 되어 기뻤다. 그 15분간의 전투에서 모든 방어자들은 죽거나, 부상당하거나, 포로로 잡히거나, 탈출했다.

[*고종실록엔 전사 53명 부상 24명 포로(부상) 14명이며, 광성보 함락직후 주 거점을 염하(鹽河, salt river, 강화해협) 건너편 덕포진(德浦鎭)에 이전설치.

애너폴리스 미 해사박물관에 있는 당시 상륙군지휘관의 일기에, 백병전 시 조선군은 숫적 열세에도 전혀 굴하지 않고 용감하게 최후까지 싸웠고 창검이 부러지면 돌, 흙을 들고 싸웠으며 중상을 당했어도 항복을 하지 않고 죽여달라고 손짓으로 표현하는 모습 등 조선군의 용맹함에 놀란 마음을 기록했고 또 미군이 총검을 사용했으나 조선군이 착용한 13겹의 목면갑에 총검이 효과가 적어 개머리판으로 백병전을 벌였다고 하는데 디지타이즈된 원본이 없는듯하여 미확인. 그러나 용맹함에 대한 부분은 다른 지휘관들의 자료에서도 간간이 언급됨. 그리고 미군이 광성보를 함락한 당일 오후 초지진으로 후퇴하여 숙영하는 그 밤에도 조선군{첨사(僉使:종3품, 중앙파견부대가 아닌 해당지방 진영지휘관) 이렴(李濂)}의 야간기습이 있었고 그 다음날 아침 미군은 함선으로 철수한 뒤 작약도 근방으로 물러남]

전투가 끝났을때 350여명의 한국인(실록기록과 상이)과 3명의 미국인 맥키 대위, 수병 세스 앨런, 해병 데니스 핸러한이 죽었다. 맥키 대위의 시신은 배로 옮겨져 장례를 위해 고향인 미국 켄터키주의 렉싱턴으로 보내졌다. 나머지 두 전사자와 열병으로 사망한 토마스 드라이버의 시신은 작약도에 매장되었다.

 

 

136년만에 귀환한 장군기. 2007.136년만에 귀환한 장군기. 2007.

 

 

 

* 식민지에서 갓 벗어난 신흥국으로서 구미 열강의 식민지 선점 경쟁을 바라만보던 미국은 그 경쟁에 하루빨리 동참하려는 욕심에 멕시코와 전쟁을 벌여 광대한 영토를 확보하고 또한 흑선효과라는 말까지 일본에 생길 정도로 성공적이었던 포함(砲艦)외교 데뷔를 통해 이젠 구미의 선진국 못지않은 자신감이 생겨 조선에 대한 다음 수순을 밟던 차에 남북전쟁으로 인해 4년간을 사관학교 동기끼리, 멕시코전쟁 등에서 같이 싸웠던 전우끼리, 총칼을 맞대고 내전을 겪는다. 내전종료 후 이전에 벌이던 조선 원정사업에 다시 재 착수하려는 때와 맞춰 적절하게도 미국 무장상선 제네럴 셔먼호가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가며 약탈과 살인을 일삼다 평양군민에게 응징을 당해 전소당하는 일이 생기자 이를 핑계로 조선정부를 압박해 조선과 협약을 맺으려 했으나 기존의 서양세력과의 잦은 접촉 등을 통해 그 탐욕적이고 침략적인 실체를 파악한 조선정부는 일절의 외교관계를 거부한다. 그러나 일본 개항시와는 다르게 더 새롭고 강력한 아시아함대와 내전을 통해 업그레이드된 무기와 전술을 보유하고 있었음에도 내전을 겪는 동안 생긴 전쟁에 대한 염증과 후유증으로 일본의 경우와는 또 다르게 무력보다 외교적인 노력위주로 공을 들인다.

수 차례의 직접 접촉시도도 무위로 돌아가자 조선 원정의 최고 책임자였던 주청(駐淸) 미국 공사 프레드릭 로우가 청 정부에 조선과 사대관계인 점을 들어 대신 압력을 넣어 달라고 수차례 요청해도 돌아오는 것은 조중간의 사대는 외교의 형식일 뿐 조선의 내치에 간섭할 수 없다는 답변 뿐이었다. 이쯤되자 미국은 과거에 효과만점이었던 무력시위를 다시 기획하게 되는데 몇 년 먼저 천주교박해사건을 빌미로 강화도에 침입했던 경력이 있는 프랑스에게 공동참여를 요청하나 프랑스는 이미 전투에서 패퇴당한 경험이 있는 부담에 그 때 사용했던 지도 등의 정보를 넘겨주는 정도의 협조를 끝으로 동참을 거부한다. 미 아시아함대 사령관 존 로저스가 이끄는 함대는 5월 14일 나가사키를 출발하여 5월21일 수원부 풍도 근방에서 조선에 포착되고 곧 파견된 조선정부 문정관(問情官, immigration officer)의 입국목적을 묻는 질문에 해치러 온 것이 아니며 볼일만 보면 가겠으니 정부 고위관료와 대면시켜달라는 요구로 일관하며 근방의 수심을 재며 조선정부의 응답을 기다렸으나 조선정부의 반응은, 외교를 맺자면서 군대를 끌고와 문정에도 제대로 응하지 않는 당신들의 처사는 우리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으며, 우리는 수 천년간 외부와 교류하지 않고도 잘 살아왔으며 앞으로도 그럴것이란 대답뿐 다른 요구에는 응하지 않았다.

강화보진도강화보진도 그러자 미군은 함대를 이끌고 서울까지 진입할 요량으로 강화해협(염하)에서 한강에 이르는 수심을 조사하기 위해  포함(砲艦) 2척(Monocacy & Palos)과 소형증기선들을 염하로 진입시켰다가 해협 초입인 손돌목에서 조선군 포대들의 포격을 받고 후퇴하게 된다. 강화해협은 남북으로 길게 뻗은 좁은 수로로 사실상 강이 아니고 바다인데 해협의 북쪽 끝이 한강하구와 잇닿아 있어서 지금의 DMZ에 못지않은 국가전략지역이라 수로 양측으로 많은 포대와 진지들이 열을 지어 포진해 있었고 조선의 선박이라도 통행허가증이 없으면 진입이 불가했었다. 그런 곳을 조선정부의 양해도 받지않고 군함을 투입하여 진입했기에 해당 포대들에선 따로 정부의 명령없이 즉각 발포하였고 이를 통해 수상을 통한 진입이 어렵다고 판단한 미군은 상륙전을 실시하게 된다. 미군이 초기에 조선의 군사력을 얕본 부분도 없지 않아 보이는데, 함대사령관 로저스가 지상전을 앞두고 병사들의 사기고취를 위해 구두로 한 훈시에서 “한양까지 진격하여 저 야만인들에게 교훈을 가르쳐주라”고 했던 대목이 광성보에서의 첫 전투에서 조선군의 결사항전을 겪은 바로 당일 오후 최초 상륙지로 후퇴해 숙영하다 야습당한뒤 다음날 아침 함정으로 후퇴하여 배를 멀리 물린 후 본국에 무력을 통한 임무수행은 어렵다고 보고하는 수순으로 바뀌게 된다(초지-광성 구간은 강화해협의 대략1/5길이). 그러고도 미련을 못버린 미군은 광성보전투 당시 부상을 입고 포로가 된 조선군 14명의 교환을 빌미로 교섭을 요청하는데 조선정부의 답은 그들은 목숨을 다해 충성스럽게 싸웠어야 할 군인이 수치스럽게 살아서 포로로 잡혔으니 알바 아니라는 것이었고 이에 맥풀린 미군은 조선관리에 포로를 인계하고 조선을 떠난다. 그러나 말과는 달리 조선정부는 이 풀려난 부상군인들에게 처벌은 고사하고 치료와 구휼을 베푼듯하다.

이 조선원정에 대한 미국의 자체평가는 전투에 이겼으나 임무는 실패한 것으로 여겼고, 조선은 이 사건에 난(亂) 대신 요(擾)라고 기록하는 것으로 그 평가를 대신했다.

40여일간의 조-미 대치 기간 중 국왕 및 고위관리들이 걱정한 것은 미군이 서울까지 난입하는 상황보다, 명령을 받고 출동하여 중요 거점에 배치되어 장기간 풍찬노숙하고 있는 장병들의 건강과 지방에서 서울로 오는 미곡선 수송로가 미 함대 때문에 막혀 서울의 식량사정이 나빠지고 물가가 올라가고 있던 상황에서 대치가 장기화 되는 경우였다. 에너지와 물자 식량 등 소요자원의 대부분을 해상항로를 통한 수입에 의존하는 현재의 우리의 현실을 상기하면 역사에서 교훈을 얻어 반복되는 실수를 피해야 함에도 역사가 단지 시험점수를 얻기 위한 과목.. 그나마도 때에 따라 툭하면 선택과목으로 지정되어 몰라도 되는 현실이 안타깝다.

당시 식민사업계의 선진국 프랑스도 물리치고 그 초보 아류 미국도 물리친 조선이 불과 4년뒤 그 아류의 얼치기 짝퉁 카피캣인 왜국 병사 22명에게 무릎꿇고 개항을 당하게 되는 것은 왜국이 강해서가 아니라 조선이 내부에서 이미 와해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작고 가는 나무라도 뿌리가 깊고 물이 올라 있으면 쉽게 부러지지 않지만, 그 내부가 썩어 있으면 크기와 상관없이 어린아이라도 쉽게 꺾을 수 있다.

 

 

 

 

*신미양요 미국측 기록

 

"조선군은 근대적인 무기를 한 자루도 보유하지 못한 채

노후한 전근대적인 무기를 가지고서

근대적인 화기로 무장한 미군에 대항하여 용감히 싸웠다.

조선군은 그들의 진지를 사수하기 위하여

용맹스럽게 싸우다가 전사했다.

아마도 우리는 가족과 국가를 위해 그토록 강력하게 싸우다가

죽은 국민을 다시는 볼수없을 것이다."

- 슐레이 대령

 

"남북전쟁 때도 그렇게 짧은 시간에

그렇게 많은 포화와 총알이 쏟아진 적은 없었다."

- 블레이크 중령

 

"조선군은 용감했다.

그들은 항복 같은 건 아예 몰랐다.

무기를 잃은 자들은 돌과 흙을 집어 던졌다.

전세가 결정적으로 불리하게 되자

살아남은 조선군 백여 명은 포대 언덕을 내려가

강물에 투신 xx했고

일부는 스스로 목을 찔러 자결했다."

- 앨버트 가스텔

 

"조선군은 창,칼로 우리에게 끝까지 대항했다.

그것마저 없는 자들은 우리에게 흙을 뿌렸다.

비록 우리가 이긴 전투지만 그 누구도 이것을

자랑스럽게 여기어 기억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이 싸움은 미해군 역사상 최초의 실패극이다."

- 미군 종군기록

 

 

 

집중된 포격으로 지형은 물론이고 바위성채마저 온전치 못한 진지.  
후예들에게 기껏 해적,산적 소리 듣게 하시려 여기 이리 누우셨습니까..집중된 포격으로 지형은 물론이고 바위성채마저 온전치 못한 진지. 후예들에게 기껏 해적,산적 소리 듣게 하시려 여기 이리 누우셨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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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마러브 15-02-21 09:33
   
좋은글이네요
요동 15-02-21 10:04
   
가슴이 아픕니다.
관성의법칙 15-02-21 10:20
   
지금 군인들은 저렇게 못할듯..
SpearHead 15-02-21 12:11
   
예전에 봤던 관심가지고 찾아봤던 내용보다 훨씬 상세한 내용과 기록이네요.

아침부터 하염없이 눈물이 계속 --; ........

초지진, 광성보 방어 병사들의 숭고한 신념과 희생은 그 어떤 영화보다도 감동적입니다.

훌륭한 글 감사합니다.
beyondtns 15-02-21 13:06
   
좋은글입니다.
눈물이 저절로 나오네요.
무능한 기득권 세력들 만나 억울하게 죽은 불쌍한 영혼들..
저기가면 돌아가신 분들을 위해 조용히 약식이라도 제사라도 지내야 겠습니다.
숨은 기록을 알면 알수록 억울하게 죽은 사람은 불쌍한 군졸입니다. 장군이야 명분이라도 있지만 죽은 군졸은 자신들이 상대도 안되는 무기를 가지고 싸운줄도 모르니...
병자호란 당시 영의정 한사람의 고집땜에 남한산성에서 힘한번 뭇쓰고 청나라 군사들에게 죽은 300명의 결사대.. 이들의 죽음을 헛되이 하지 않기 위해서는 후손들이 잘 기억할 수 있도록 홍보해야 한다고 봅니다.
항상 잘못은 기득권이 하고 그 댓가는 밑엣 사람들이 책임을 지는 이런 반복적인 역사는 되풀이 되지 않도록 국민들이 정신차렸으면 좋겠습니다.
shrekandy 15-02-21 15:56
   
좋은글 감사합니다
꼬꼬동아리 15-02-21 22:02
   
지금 군인들이 왜 못합니까? 굉장히 듣기 거북하네요 지금 군비리 때문에 군에 대한 신뢰도가 굉장히 안좋다는건 압니다만 연평해전때 실제 연평해전 경험담 들었어요? 저는 제2서해교전 참전자 입니다 그때 당시 하사였고 해군ssu로 이직하고 제대했습니다
연평해전때 총알이 빗발치는 그사이에서도 총알 보급 임무 맡으신 중사한분이 총알이 다리에 박혔슴에도 끝까지 임무 완수 하셨고 그외에도 일화도 많고 살아남으신 분들에게 이야기도 많이 들었습니다 실제 국지전이나 전쟁일어나면 우리나라에 목숨걸고 지키실 분이 흐르고 넘칩니다 저역시 전쟁일어나면 삽이라도 들고가서 싸울 수 있습니다 너무한 자국비하는 나라를 지켜주신 저분들의 업적에 누를 끼치는거란걸 알아주셨음 합니다
야차 15-02-22 03:57
   
마지막 사진에 시체가 덩그러니 남겨진걸 보니 마음이 아프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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