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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5-02-18 17:43
[기타] 조선이 조공받던 상국 놀이한건 왜 무시?
 글쓴이 : shrekandy
조회 : 5,909  


제가 여러 사람들을 보면서 느꼇던게...

조선이 명나라한테 조공 좀 한건 대차게 까면서...

왜 조선이 일본, 오키나와, 여진족, 심지어 초창기땐 태국과 인도네시아한테까지 조공받았던건 최대한 낮추려고 하는거죠?

물론 조공이란게 동아시아 특유의 무역의 종류긴 하고 그걸 우리가 타국한테 했다고 막 자학할 필요도 없고 또 타국 한테서 받았다고 막 뽕맞은 우월감 느낄필요도 없긴 하지만

어쨋든 조공을 바치는 나라는 조공 받는 나라를 형식적으로나마 상국으로 인정하는거잖아요?

결국 조선이 전반 거의 150-200년동안을 중국 동부의 국가들에게서 조공을 받아 먹었단건 형식적이든 뭐든 어쨋든 조선은 지역 패자로 "인정"은 받았단거 아닙니까? 

(뭐 동남아에서 오던 조공이야 왜구들이 하도 심해서 걍 태조 이후 없어졌지만...)

물론 조선도 명나라한테 조공 바쳤죠. 그리고 어쨋든 명나라를 상국으로 인정한건 맞죠.

그런데 이게 왜 문제 되나요?

동시대 동아시아에서 명나라한테 조공 안바치고 상국으로 섬기지 않던 나라가 몇개나 될까요?

중국 애들은 자기들이 당시 동아시아 대륙에서 인정 받았다 이거 자랑스러워함 되는거고 

우리는 또 우리 나름대로 조선이 150-200년 가량을 중국 동부의 극동 아시아에서 어쨋든 상국이였단걸 뿌듯해 하면 되잖아요?

조선이 500년이나 가다보니 "고작 200년 조공받은게 머 대수야" 하시는 분들도 계신데...

200년이면 대한민국이 거의 3번은 나올수 있는 시간이죠.

즉 이승만에서 박근혜까지가 3번은 갈수 있는 시간이고

왠만한 다른국가들은 솔까 이미 벌써 망조가 들 수명입니다.  

고로, 절대 짧은 시간이 아니죠


꼭 일본이 조선한테 조공 바쳤던 (여기 분들은 대부분 많이 아실) 기록 들고오면 폄하하시면서 조선은 항상 약소국이였단 투로 말씀하시는 분들이 계셔서...

http://egloos.zum.com/enjoyjap/v/848597 
(일본이 조선한테 꼬박 꼬박 조공 바친 기록들)


 세조실록


야인과 왜인들은 모두 우리의 번리이고 우리의 신민이니 왕된 자는 똑같이 대우하고 차별을 없이 하여 혹은 무력을 사용기도하고내가 즉위한 이후에 남만북적이것은 하늘의 끌어들이는 바이지나의 슬기와 힘이아니다흑룡강속평강건주위올량합이만주 동창등 심처 야인과 삼위 달자가 관문을 두드리고 입조하기를 청하거든 종인을 줄여서 후대하여 올려보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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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조실록


누가 조선을 일컬어 예의를 아는 나라라고 하였는가 일은 태산을 끼고 북해를 건너뛰는 따위가 아닙니다어찌 무례하기가 이와 같습니까


(명나라 사신이 조선한테서 박대받고 한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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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종 10, 2(1454 갑술 /  경태(景泰) 5) 1 6(무오) 5번째기사 
김우을두합 등이 야인들이 세조를 알현하고자 원함을 아뢰다


요동 도사(遼東都司왕상(王祥) 말하기를, ‘요동사람들이모두말하기를


「수양대군(首陽大君) 대장(大將) 의모(儀貌) 있었는데이제과연 발란 


(拔亂反正)2142) 하였다.’ 하고 탄상(嘆賞)하기를 그치지 않았습니다.”


하였다


그때 세조(世祖) 농사에 힘쓰고 학교를 일으키고 군사를 양성하기를

일삼아서궁병(弓兵백만을 길러 오랑캐[夷狄] 제압하려고 결심하고 진법() 익히고 군사를 훈련하니왜인과 야인들이 모두 위덕(威德) 흠모하여 투어 와서 조현(朝見)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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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조 40권, 12년(1466 병술 / 명 성화(成化) 2년) 11월 2일(경오) 3번째기사 


시무8조에 관한 대사헌 양성지의 상소문


 

우리 나라의 인민(人民)은 무려 1백만 호(戶)나 되는데 그 중에서 활을 잘 쏘는

 

졸이 30만 명이고, 정예(精銳)한 병졸이 10만 명이며, 용감한 군사가 3만 명입


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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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위 기록들에 보시듯 조선 세조때 조선 국력이 상당했단걸 알수 있는데...


저게 조선이 딱 지금 대한민국랑 비슷한 나이였을 때입니다. 


한마디로 조선 초창기라고 또 무슨 아주 극-초창기때도 아니란 말이죠. 



적어도 한국으로 비교하면 이승만에서 박근혜가 나올 시간동안 지역 패자로 확실


히 군림했는데...이걸 왜 자꾸 무시하시는 분들이 계신지 궁금합니다...






아니...애초에 훨씬 적이 적은 상황에도 불구하고 100년가까이 매우 강한 군사력


을 유지하다 아무래도 돈문제도 있고해서 슬슬 군사력을 풀었던 조선을, 


고작 70살이면서 주변에 적이 바글바글한 주제에 군 가산점 없애자는등, 군사 30


만으로 축소하자는등같은 소리나 하는 대한민국이 조선을 깔 자격이나 있을까


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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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나 15-02-18 18:00
   
보통 일뽕들이 사대 정책보고 조선을 무시하던데, 정작 일본도 조공을 한 역사가 있죠

3세기부터 히미코가 후한에 조공을 했고, 그 뒤로도 남조의 왕조들에게 조공을 받치다가, 14세기부터는 요시미쓰가 명나라에 조공을 받치고 일본국왕으로 책봉받았는데

거기다가, 중국의 속국이라고 그렇게 무시하던 한국에도 9세기 신라 때부터 시작해서 조선까지 성실하게 조공을 받쳤었죠ㅋㅋㅋㅋ
만법귀일 15-02-18 18:10
   
슈랙앤디님 노고가 많으시네요..^^
언제나 좋은 글 감사합니다.

굿잡스님 반만 하면서 글을 쓰셨으면 합니다.
환이 먼지나 아시고나 환뽕, 환빠라고 하는지 심히 걱정이네요.

모르면 잠자코 배우시기나 하시던지..

암튼 새해에는 모두 평안하시길 기원드립니다.
더욱 건강한 동게가 되었으면 합니다.
     
shrekandy 15-02-19 14:01
   
만법귀일님도 항상 좋은 답변 감사드립니다.

부족한 글 항상 잘 읽어주셔서 갑사드리고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ㅎ
국산아몬드 15-02-18 18:20
   
일본은 명에 조공하고 싶어 환장했었죠. 명의 주변민족 모두 명에 조공하고 싶어 했죠.  조선은 1년 3공하고 하겠다고 명과 실랑이 벌이잖아요. 조공이 굴욕이면 주변국가들이 서로 조공하겠다고 경쟁했을까요
꼬꼬동아리 15-02-18 18:21
   
인도네시아 태국 한테서 받은거는 처음 알았네요 좋은 정보 감사합니다 명나라와 조선은 특이한 관계죠 그냥
조선이 여진족 말을 사다가 명나라에 10배로 팔아먹었다죠 명나라는 실제기록에도 불만이 많았구요 그냥 조선과 명나라는 실리외교지 군신관계는 아니랍니다
이쉬타르 15-02-18 18:29
   
근데 작은 소왕국이 중토 정권에다가 조공받치고한건 의미가 약하고  그게 일본이 통일왕조에서 어느 누구에다 조공 사례가 있었던 가요??...사실이 아닌건 인정 합시다
다이묘 급이나  북변 야인이 부족 급에서 무어를 받치고한걸  조공이라고 불러주기도 그렇죠,,일본이 조선이든 고려이든 조공 비슷한거 받쳐본적도 없습니다
     
굿잡스 15-02-18 18:51
   
다이묘 급이나  북변 야인이 부족 급에서 무어를 받치고한걸  조공이라고 불러주기도 그렇죠,,일본이 조선이든 고려이든 조공 비슷한거 받쳐본적도 없습니다 >?? ㅋ

태조 6권, 3년(1394 갑술 / 명 홍무(洪武) 27년) 9월 11일(무신) 1번째기사
왕이 조회를 보다. 일본과 유구 사신들이 행례하다
   
왕이 조회에 나갔다. 일본 및 유구국의 사신들이 수반하여 행례하였다



“한해 쌀 수확량 12% 접대비로 사용”
옥스퍼드大 루이스 교수 논문

“일본이 조선통신사의 한 차례 방문에 쓴 접대비용은 (일본의) 한 해 쌀 수확량의 12%를 넘었다.”
조선시대 일본에 문화를 전파한 조선통신사 일행이 현지에서 받은 융숭한 대접이 어느 정도였는지 구체적으로 비용을 추산한 논문이 나왔다. 영국 옥스퍼드대 동양학연구소 제임스 루이스 교수가 지난달 31일 성균관대 대동문화연구원 주최로 열린 동양학학술회의에서 발표한 ‘문명의 가격? 17∼19세기 조선의 일본사절의 역할과 비용’이다.
루이스 교수는 이날 서울 성균관대 600주년기념관에서 열린 학술회의에서 일본 사료에 기록이 있는 임진왜란 이후의 조선통신사 자료를 분석한 결과를 내놓았다. 이 기간 조선통신사는 1607년부터 1811년까지 모두 11차례 보내졌고 1617년 간사이와 1811년 쓰시마 지역을 빼면 모두 에도(江戶·현 도쿄)로 보내졌다.
그는 1566∼1825년 일본의 공식적인 외국과의 관계를 담은 문서를 엮은 ‘통항일람(通航一覽)’을 인용해 1682년 에도로 가는 중간거점인 긴키(近畿) 지역에서 조선통신사 접대에 쓰인 비용이 쌀 318만7000여 석이었다고 밝혔다. 이는 1697년 일본의 쌀 총생산량(2580만 석)을 기준으로 계산하면 한 해 쌀 생산량의 12%에 이르는 양이다.
그는 또 이 수치가 지나치게 많다는 의견에 대해 “일본 전역에서 조선통신사 접대에 쓰인 총비용을 담은 자료는 발견되지 않았지만 1655년 조선통신사를 접대하는 데 금 100만 냥(쌀 83만3000여 석)이 쓰였다는 언급도 있다”며 “이 기록만 놓고 봐도 17세기 최소한 3%의 국부(國富)가 조선통신사 접대에 사용됐다고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이런 막대한 비용을 감당하기 위해 당시 막부정권은 조선통신사가 지나가는 경로에 있는 마을에 특별세금을 부과하고 노역에 수만 명을 동원했다고 한다. 조선통신사가 온 1764년 20만 명 규모의 민란이 일어난 것도 특별세 추가 부담과 무관치 않다는 것.
루이스 교수는 “막부정권은 문명국인 조선과의 교류를 통해 피지배층에 대한 권위를 강화하고 수준 높은 문화를 받아들이기 위해 조선통신사를 지속하길 원했지만 19세기에 이르러 접대비용이 ‘파괴적인 수준’이 되자 이를 중지할 수밖에 없었다”고 분석했다
          
이쉬타르 15-02-18 18:56
   
통신사 접대 한것은 조공 받치는 거 하고 다르지
               
굿잡스 15-02-18 19:02
   
ㅋㅋ 조선왕조실록 보세요. 일본국 대마주(對馬州) 태수(太守) 어쩌고 하면서

통신사에게 받들어 모시는게 안보임? 조공관계가 무슨 무조건 하국에서

상국으로 오는 것만 있는 줄 아시는지?
     
굿잡스 15-02-18 18:58
   
왜국은 일본국이다.
본래 이름인 왜를 부끄러워 했는데, 극동에 있어서 스스로 일본이라 부른다.
지금 고려에 신하로서 속하고 있다.

-도화견문지(1080년경에 송나라의 곽약허가 지은 책)


남북국 시대 해동성국 발해와 더불어 대신라


성덕왕(聖德王) 30년,
일본국 병선 300척이 바다를 건너 우리의 동쪽 변경을 습격하였는데, 왕이 장수를 시켜 군사를 내어 이를 크게 깨뜨렸다. (日本國兵船三百?, 越海襲我東邊, 王命將出兵, 大破之.)


경덕왕(景德王) 원년,
겨울 10월에 일본국(日本國) 사신이 이르렀으나 받아 들이지 않았다. (元年冬十月, 日本國使至, 不納. )

애장왕(哀莊王)
5년 여름 5월에 일본국이 사신을 보내와 황금 300량을 바쳤다. (五年夏五月, 日本國遣使, 進黃金三百兩.)

애장왕(哀莊王) 7년,
봄 3월에 일본국 사신이 왔으므로 조원전(朝元殿)에 불러 접견하였다. 교서를 내려 말하였다. 『절을 새로 짓는 것을 금하되, 다만 수리하는 것은 허락한다. 또 수놓은 비단을 불교 행사에 사용하는 것과 금과 은으로 만든 그릇의 사용을 금한다. 마땅히 담당 관청으로 하여금 이를 널리 알려 시행하도록 하라.』(七年春三月, 日本國使至, 引見朝元殿. 下敎禁新創佛寺, 唯許修葺. 又禁以錦繡爲佛事, 金銀爲器用, 宜令所司, 普告施行.)

헌강왕(憲康王) 8년,
여름 4월에 일본국 왕이 사신을 보내 황금 300량과 야광주[明珠] 10개를 바쳤다. (八年夏四月, 日本國王遣使, 進黃金三百兩·明珠一十箇.)

애장왕 시기 글을 보면 알겠지만 아예 왜국에 대해 절이고 행사까지도 함부로 하지

말라 어쩌고 조서까지 내리구만 ㅋ
이쉬타르 15-02-18 18:34
   
무력에서 제일 문제가 많았던것이 조선이라 조선이 지역 패자로 군림 해본적도 없었죠 ,,만주의 여진 하나 건사도 못한 실력 이라 ,,압록강 건너 출병도 두려워 하던 것이 조선의 군사력 였습니다
조선이 그래도 당시 세계적으로도 앞서고 자랑 할만한 부분이 과학기술이나  정치나 행정적,문화적인 부분이죠
     
나와나 15-02-18 18:36
   
건국 초부터 왜란 직전까지 심심할때마다 여진족 쓸어버리고 다니던 게 조선인데요...?
          
이쉬타르 15-02-18 18:42
   
조선초에도 두만강 까지도  조선이 영토로서  통치하지도 못했죠,,조선군이 대체로 고전을 했었고 윤관장군 시절에서나 함북도 지역의 여진족을 격파 했었을뿐이죠,,그래봐야 여전히 한반도에서 밖으로  진출을 못했었지요
               
굿잡스 15-02-18 19:10
   
경종 4권, 1년(1721 신축 / 청 강희(康熙) 60년) 6월 16일(병오) 5번째기사
의주 부윤 이명언이 상소하여 성을 옮길 방략을 아뢰다
   
 
여기에서 30리쯤 되는 거리에 고성(古城)이 하나 있는데 이른바 국내성(國內城)으로 곧 고구려(高句麗)에서 5백 년간이나 도읍을 하였던 곳입니다. 형세의 편리함이 본주(本州)의 주성(州城)보다 백 배나 나을 뿐 아니라 바로 하나의 천작(天作)의 금탕(金湯)488) 입니다. 몇겹으로 둘러쌓인 속에 저절로 일국(一局)을 이루고 있는데 옛 성터가 지금도 완연하고 밖은 험준하고 안은 평탄하여 토곽(土郭)이 천연적으로 이루어졌으며, 주위[周回]는 3천 6백여 보(步)나 되는데 그 안에는 옛 우물이 더욱 많고 겹쳐서 간수(澗水)의 여러 줄기가 마름이 없이 도도히 흐르고 있습니다. 성의 동남쪽에는 따로 산기슭 하나가 있어 옆으로 뻗어서 빙 둘러막고 있으니 하나의 외곽(外郭)을 이루어 놓았으며, 또 10여 리를 지나서 압록강의 여러 줄기가 하나로 합수된 곳이 있는데, 바로 대총강(大摠江)입니다. 또 고진강(古津江)이 있는데 대총강의 하류와 해구(海口)에서 합쳐지니, 이곳이 바로 양하진(楊下津)입니다.
구성(舊城)에서 수구(水口)에 이를려면 양쪽 골짜기가 묶어놓은 듯한데 그 가운데로 한가닥 길이 통해져서 바로 10리 장곡(長谷)을 이루고 있으니, 설사 오랑캐의 기병(騎兵)이 압록강을 건너가도 한 걸음에 곡구(谷口)에 도착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만약 성을 버리고 산으로 올라 백마 산성으로 물러나 지키더라도 적들이 또한 우리의 퇴로(退路)를 차단하지는 못할 것이니, 그 주성(州城)에 비교하여 같이 논할 수는 없습니다. 이제 만일 국내성(國內城)으로 고을을 옮기고 백마 산성과 서로 성원(聲援)을 의뢰한다면 비단 험준함을 믿어 스스로 견고하게 수비할 뿐만 아니라, 황주(黃州)와 철산(鐵山)의 통로가 두 성 사이에 있게 되니 비록 지키지 않는다 해도 걱정될 것이 없습니다. 본부를 이설(移設)한 뒤에는 저쪽과 우리의 사신이 곧바로 저들의 마전참(馬轉站)에서 권두(權豆)의 북쪽을 경유하여 대총강을 건너서 국내성(國內城)에 이르게 될 것이니, 아홉 개 참에서 하나의 참(站)으로 비용이 줄어들고 세 강을 따로 건너는 폐단이 일거(一擧)에 모두 없어지게 될 것입니다. 또 국내성에서 곧바로 용천(龍川)으로 가게 되니 소관참(所串站) 하나가 없어지게 될 것이니, 비용 절감도 적지는 않습니다. 주성(州城)은 새로이 첨사(僉使)를 두어 지키게 하고 본부(本府)에는 장교들도 또한 많이 있으니 서로 협력하여 엄중히 지키는 곳으로 삼아야겠습니다
     
연아는전설 15-02-18 20:50
   
압록강 건너 출병도 두려워 하던 것이 조선의 군사력 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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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참 아무리 역사책이 잘못되어 그대로 배웠다고 해도 아직도 이런 말을 아무렇게나 할수 있나요

우리 태조는 천운을 받아 개국하면서부터 국내를 정돈하고 외적을 물리치니 당시의 야인들이 위엄을 두려워하고 덕을 사모하였다. 태종의 위엄과 덕은 섬오랑캐들에게 널리 입혀졌고 산융(山戎)도 모두 신하가 되어 복종하였다

국조보감 제6권 > 세종조 2

동북면 1도(道)는 원래 왕업(王業)을 처음으로 일으킨 땅으로서 위엄을 두려워하고 은덕을 생각한 지 오래 되어, 야인(野人)의 추장(酋長)이 먼 데서 오고, 이란두만(移闌豆漫)도 모두 와서 태조를 섬기었으되, 언제나 활과 칼을 차고 잠저(潛邸)에 들어와서 좌우에서 가까이 모시었고, 동정(東征)·서벌(西伐)할 때에도 따라가지 않은 적이 없었다. 여진(女眞)은 알타리 두만(斡朶里豆漫) 협온 맹가첩목아(夾溫猛哥帖木兒)·화아아 두만(火兒阿豆漫) 고론 아합출(古論阿哈出)·탁온 두만(托溫豆漫) 고복아알(高卜兒閼)·합란도 다루가치(哈闌都達魯花赤) 해탄가랑합(奚灘訶郞哈)·삼산 맹안(參散猛安) 고론두란첩목아(古論豆闌帖木兒)·이란두만 맹안(移闌豆漫猛安) 보역막올아주(甫亦莫兀兒住)·해양 맹안(海洋猛安) 괄아아화실첩목아(括兒牙火失帖木兒)·아도가 맹안(阿都哥猛安) 오둔완자(奧屯完者)·실안춘 맹안(實眼春猛安) 해탄탑사(奚灘塔斯)·갑주 맹안(甲州猛安) 운강괄(雲剛括)·홍긍 맹안(洪肯猛安) 괄아아올난(括兒牙兀難)·해통 맹안(海通猛安) 주호귀동(朱胡貴洞)·독로올 맹안(禿魯兀猛安) 협온불화(夾溫不花)·간합 맹안(幹合猛安) 해탄설렬(奚灘薛列)·올아홀리 맹안(兀兒忽里猛安) 협온적올리(夾溫赤兀里)·아사 맹안(阿沙猛安) 주호인답홀(朱胡引答忽)·인출활실 맹안(紉出闊失猛安) 주호완자(朱胡完者), 오롱소 맹안(吾籠所猛安) 난독고로(暖禿古魯)·해탄발아(奚灘孛牙), 토문 맹안(土門猛安) 고론발리(古論孛里)·아목라 당괄(阿木刺唐括) 해탄고옥노(奚灘古玉奴)이며, 올랑합(兀郞哈)은 토문(土門)의 괄아아팔아속(括兒牙八兒速)이며, 혐진 올적합(嫌眞兀狄哈)은 고주(古州)의 괄아아걸목나(括兒牙乞木那)·답비나(答比那)·가아답가(可兒答哥)이며, 남돌 올적합(南突兀狄哈)은 속평강(速平江)·남돌아라합백안(南突阿刺哈伯顔)이며, 활아간 올적합(闊兒看兀狄哈)은 안춘(眼春)·괄아아독성개(括兒牙禿成改) 등이 이것이다.
임금이 즉위한 뒤에 적당히 만호(萬戶)와 천호(千戶)의 벼슬을 주고, 이두란(李豆闌)을 시켜서 여진을 초안(招安)하여 피발(被髮)하는 풍속을 모두 관대(冠帶)를 띠게 하고, 금수(禽獸)와 같은 행동을 고쳐 예의의 교화를 익히게 하여 우리 나라 사람과 서로 혼인을 하도록 하고, 복역(服役)과 납부(納賦)를 편호(編戶)와 다름이 없게 하였다

국역조선왕조실록 > 태조 4년 을해(1395,홍무 28) > 12월14일 (계묘) >

국조보감은 조선왕조실록과 별도로 일종의 왕실기록의 요약문이라고 보면 된다.  태조이성계가 나라를 건국할때 태조실록에는 충성서약을 한 약 50개의 여진과 몽골계 부족이름이 등장한다.대부분 옛 금나라의 후예인데 태조이성계역시 실록에는 합란부여진출신이라고 나온다. 같은 여진족출신이기에 수많은 여진족이 앞다투어 충성서약을 한 것이다. 실록에는 이들이 태조의 사병이 되어 태조를 지켰고 조선의 변경을 지키며 고려인과 혼인하여 섞였으며 세금을냈다고 분명히 적고 있다.

그런데 태종때는 섬오랑캐 즉 대마도를 정복했고 산융을 정복했다고 한다. 산융이란 당시 고지도를 보면 장성북쪽에 있던 부족이다.

 즉 만리장성동북쪽일대가 이미 조선의 영역이었던 것이다.

옛 장성[古長城]【세속에서 전하기를, ‘만리장성(萬里長城)’이라 하는데, 인산군(麟山郡) 서쪽 진병곶강(鎭兵串江)으로부터 쌓기 시작하여 의주(義州) 남쪽을 지나서 삭주(朔州)·창성(昌城)·운산(雲山)·영변(寧邊)에 연하여 뻗치고, 희천(熙川) 동쪽의 옛 맹주(孟州) 지경에 이르며, 함길도 정평(定平) 지경에 닿았다.】


  국역조선왕조실록 세종 지리지 / 평안도

 실제로 조선의 지리지 평안도 편에 만리장성 동쪽줄기가 있다고 했다. 즉 지금 만리장성일대가 조선에서는 평안도관할이었던 것이다.

요나라와 원나라는 모두 북연(北燕)에 도읍했으니, 산을 넘어 요주(遼州)ㆍ계주(薊州)에 도달했음을 또한 가히 상정할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북쪽으로 험난한 거용산(居庸山)이 가로막혀 있고, 남쪽으로는 깊은 창해가 경계하고 있습니다

율곡선생전서습유 제4권

 조선중기때 율곡이이가 쓴 글을 봐도 명나라 북경위의 요새인 거용관이 있는 거용산이 조선땅 북쪽에 있다고 했다. 매국노시끼들이 가르쳐준 국사책에는 조선땅 북쪽에는 요동반도와 백두산이 있다. 그 놈들이 얼마나 우리 역사를 조작해서 가르쳤는지 등신도 이제 알수 있을 것이다.

또다른 결정적인 증거가 있다. 4군을 처음 설치한 최윤덕 장군의 진격로를 알면 4군위치를 알수 있지 않겠는가?

하경복(河敬復)·황형(黃衡)·최윤덕(崔潤德)·어유소(魚有沼) 같은 사람들을 보면 제사드린 고기를 받고서 길을 떠나 멀리 사막 지방에 출전하여 한해(瀚海)를 건너기도 하면서 중국으로부터 상을 받기까지 하였다.

국역조선왕조실록 > 정조 19년 을묘(1795,건륭 60) > 8월18일(병/신)

조선왕조실록에 최윤덕 장군의 진격로가 설명되어 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조선 평안도옆에 사막이 있다고 했다. 지금 지리라면 바다가 있거나 요동반도의 숲이 있다고 해야할 것이다.  위의 글은 베이징북쪽의 사막을 지나 몽골로 깊숙이 진격한 것을 설명하는 글이다. 매국노시끼들 제아무리 연구해봐야 한반도옆에는 사막도 없고 고대에 한해라고 부른 지역도 없다.

출처 http://blog.daum.net/manjumongol/1244

이전에는 일부러 출처를 안밝혔습니다 어중이 떠중이 가서 분탕질칠까봐 그런거였죠 그런데 그걸이유로 시비거는이가 있어서 밝힙니다
꼬꼬동아리 15-02-18 18:45
   
이쉬타르님 이해못하겠네요 그리 따지면 조선 북방에 있던 족속이 여진 이였는데 여진하나 건사 못했다면 고려때 영토가 세종때 넓어진거는 여진족 토벌로 이뤄진겁니다 고려때 영토에서 어째보면 윗쪽 영토는 중국꺼인데 우리민족이 거기서 전쟁하고 활개쳤다는건 조선을 만만하게 보지못했다는거죠 어느나라 국가가 자신의 영토 쳐서 영토 확장하는데 가만히 있는답니까? 그시대다른나라가 함부로 할수 없었던 나라임에는 틀림없습니다
     
이쉬타르 15-02-18 18:54
   
조선은 명하고 연합으로서 건주여진족을 협격 하는 시절도 있었으나(세조임금 시절이라고).지도에서 보면 이게 한반도 언저리이고 두만강  건너가 원정이 고려 조선시기 ,,,다 매우 드물었엇고  윤관장군 시절 개척한 6진도 아측의 군사력 부족이라  점령 유지를 못해서 그냥 포기하고 철수하기 까지 했었죠
이게 어쩔수가 없는 것이,,, 그 정도로 여진이 통일왕조 수립 이전의 부족 단위에서도 무력이 강했습니다..명도 여진에단 유화책으로 여진을 달래서 돈으로 해결하는 기미정책으로 일관했죠
          
굿잡스 15-02-18 19:15
   
예종 6년에는 공험진에 산성까지 쌓는 기록이 나오면서 여진족에 돌려준 뒤에도 공험진

은 빠져 여전히 관리되고 있는 기록이 나오군요.

그리고 몽고(蒙古)의 산길보지(散吉普只) 등 관원이 여진(女眞)을 거두어 부속시킬 때에,

고려의 반민(叛民) 조휘(趙暉)와 탁청(卓靑) 등이 그 땅을 가지고 항복하면서 조휘로 총관

(摠管)을 삼고, 탁청으로 천호(千戶)를 삼아 군민(軍民)을 관할. 이후 공민왕이 재수복

관리 임명.



태종 7권, 4년(1404 갑신 / 명 영락(永樂) 2년) 5월 19일(기미) 4번째기사
계품사 김첨이 여진 지역을 조선에서 관할하기를 청하는 주본과 지도를 가지고 명에 가다
 
 
계품사(計稟使) 예문관 제학(藝文館提學) 김첨(金瞻)을 보내어 경사(京師)에 가게 하였는데, 첨(瞻)이 왕가인(王可仁)과 함께 갔다. 주본(奏本)은 이러하였다.
“조사해 보건대, 본국의 동북 지방(東北地方)은 공험진(公嶮鎭)으로부터 공주(孔州)·길주(吉州)·단주(端州)·영주(英州)·웅주(雄州)·함주(咸州) 등 고을이 모두 본국의 땅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요(遼)나라 건통(乾統) 7년(1107년)에 동여진(東女眞)이 난(亂)을 일으켜서 함주(咸州) 이북의 땅을 빼앗아 웅거하고 있었는데, 고려(高麗)의 예왕(睿王) 왕우(王俁)가 요(遼)에 고(告)하여 토벌할 것을 청하고 군사를 보내어 회복하였고, 원(元)나라 초년(初年) 무오년(戊午年)에 이르러 몽고(蒙古)의 산길보지(散吉普只) 등 관원이 여진(女眞)을 거두어 부속시킬 때에, 본국(本國)의 반민(叛民) 조휘(趙暉)와 탁청(卓靑) 등이 그 땅을 가지고 항복하였으므로, 조휘로 총관(摠管)을 삼고, 탁청으로 천호(千戶)를 삼아 군민(軍民)을 관할하였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여진(女眞)의 인민(人民)이 그 사이에 섞여 살아서, 각각 방언(方言)으로 그들이 사는 곳을 이름지어 길주(吉州)를 ‘해양(海陽)’이라 칭하고, 단주(端州)를 ‘독로올(禿魯兀)’이라 칭하고, 영주(英州)를 ‘삼산(參散)’이라 칭하고, 웅주(雄州)를 ‘홍긍(洪肯)’이라 칭하고, 함주(咸州)를 ‘합란(哈蘭)’이라 칭하였습니다. 지정(至正) 16년(1356년)에 이르러 공민왕(恭愍王) 왕전(王顓)이 원나라 조정에 신달(申達)하여 모두 혁파(革罷)하고, 인하여 공험진(公嶮鎭) 이남을 본국(本國)에 환속(還屬)시키고 관리를 정하여 관할하여 다스렸습니다.
     
굿잡스 15-02-18 19:22
   
그리고 아쉬타르>님 글을 보니 고대 국경선은 뭔 지금같은 위,경도에 따른 자로 잰

선마냥 현대식 영토관으로 보는 시각인데 고대에는 이런 개념이 아니군요.

특정한 선의 개념이 아니라 성이나 진같은 일정 핵을 거점으로 하는 사방 수리에서 최대

수백리를 아우르는 일종의 세력권역임.(압록,두만강이 단순히 절대적 선의 개념도

아닐 뿐더러 일종의 내하(內河)와 다를게 없이 봤음. 단지 방어상에서 용이한 부분에서

이런 압록, 두망강이 나름 일정한 역할을 했던 것일 뿐. 그리고 영토란 시대에 따라

얼마든지 유동적 변천하고 변화해왔고.)
꼬꼬동아리 15-02-18 18:48
   
아무리 반도를 못벗어 났어도 자기영토를 치는데 가만히 있을 나라가 어디있을까요?영토확장이란게 가만히 있는다고 되는건 아니죠
꼬꼬동아리 15-02-18 19:09
   
조선초기 북쪽 영토가 전부 여진족이 살던 땅은 아니였구요 그외 영토를 많이 수복 하였죠 명나라와 조선이 합심해서 여진족을 쳤다고해도 그외 영토는 중국 영토였는데 조선이 마음데로 영토지역 확장 시키고 경계선 못박았다는건 명나라가 함부로 할수없을 정도로 (자신들 영토로 되어있는곳에 경계선 긋고 영토 확장 했는데)  국력이 강했다는걸 의미하죠
아비요 15-02-18 21:57
   
조선 영토확장 제대로 못한건 저도 답답하긴한데 한편으로 여진족들이 말썽을 일으켜도 이 놈들도 전부 명과 조선에 사대해서 관직을 받은 애들이었습니다. 명나라때 영토 같은데에 만주등을 다 칠해놓은 지도들이 있는데 그게 이걸 근거로 해서 구라를 치는거죠. 그런식이라 조선이 이 여진족을 공격하면 여진족이 명나라에게 일러바칩니다. 일종의 견제가 이루어진겁니다. 결국 그 명나라는 요동도 뺏고 조선 견제하다가 오히려 여진족에게 역관광당하죠. 차라리 조선에게 요동이고 만주고 다 양보했다면 조선이 명나라 공격할 일은 없으니 여진족은 함경도처럼 조선에 속해서 지냈을꺼고 청나라가 세워질 일은 없었을껀데 말입니다.
전략설계 15-02-19 20:01
   
조공은 그렇다치고..

나라 이름 택해달라고 바쳐올린 적이 우리역사에 있었든가..
러시아에 중동까지 몽골 땅이었던 원나라시대 빼고..
원나라 망조들자마자 바로 고려는 본 모습을 찾았고..
명나라가 철령위 요구하자 요동정벌을 감행한 나라입니다.

우리역사에 세자책봉한다고 중국에 보고하고.. 그리 살던 시절은 없었던 듯 합니다.
중국 연호를 갖다 쓰긴 했지만..
통일신라, 고려때.. 중국하고 관계는 조선만큼은 아니었던듯 합니다.
조선만큼 정신까지 대국(중국)에 훅 빠졌던 때는 없었던 듯 합니다.
최소한 고려때까지는 명나라에 대항하는 것을 보더라도 자주적 기상이 남아있었다고 봅니다.

흔히들 큰나라와 어떻게 대적하냐고 하는데..
중국 입장에서 조그만 한반도 먹을라고 대군을 보내다 망한 나라가 있고.. (수나라)
당나라도 결코 쉽지가 않았고..
요나라는 고려 치다가 전성기가 가버렸는데..
몽골도 몇십년이 걸려 지들 힘이 아니라 고려가 권력다툼으로 귀의한 형식이라..

근데 명이 고려나 조선을 친다??
요나라 맞서 싸우던 고려는 슈퍼울트라급이든가??
못한다는 것은 머여.. 생각의 차이지..
먹어봐야 간에 기별도 안가는 한반도땅..
정권초라 중원도 도저에서 적들인데.. 그거 먹는다고 수십만 보내고.. 그거 지친다고 한 10만 상주하다간..
명 시작도 하기전에 기웁니다.

되려.. 고려가 불발이었지만 요동정벌을 감행하니까.. 철령위 요구가 없어졌습니다.
역사는 이런겁니다.
조공이란 소리는 누가 머랬는지 모르나.. 논리를 변질시키는 소리고..

조선은 이성계집구석이 원나라에 빝붙어먹던 집구석이어서 그런지 모르나..
그 시작부터 큰 것에 대놓고 엎드려서..
후손은 소중화라고 아예 중국에 흠뻑 취해서 산 사람들이라..
전쟁이 나도 중국 불러.. 좀 불리하면 중국으로 망명신청해..
나라가 멀쩡한데.. 백성이 도처에서 의병을 일으키고 수군이 건재한데..
우리나라 역사에 멀쩡한 나라 놔두고 중국으로 망명신청 하는 왕이 있었든가??
요즘시대 아프리카 대통령도 아니고..

이런걸 비판하는거여.. 고딩아..
누가 조공가지고 머라든?/
     
굿잡스 15-02-23 18:24
   
?? ㅋㅋ 유치 찬란에 어느 고등학생보다 못한 수준하군. 쯧.

사대(事大)의 예와 사대주의를 구분도 못하고 그기에 사대를 무슨 조선의 국호 시비부터 고

려는 요동정벌 어쩌고 했는데 조선은 그런 것도 없니부터 왕위계승까지 드립을 치면서 어쩌

고ㅋ 참. 가지가지 하는.

조선이 명과 국가간의 정식 왕래를 하기에 앞서 화령(和寧),조선의 두개의 국호를 보낸 이 화령이 얼마나

고도의 정치 외교적 기만술에 어찌보면 명의 입장에서 희롱에 가까운 명칭인지도(명이 일시 몰아냈다고

하나 북원의 수도인 동시에 송나라를 점령했던 쿠빌라이 이전 수도 이름임) 제대로 모르는 뻘소리의

단편적 소리부터 정도전의 요동정벌론이나 표전문 사건같은 기본도 모르는 쉰소리나 하고 있으니.쯧

(그러면서 이런 걸 또 지적해주면 지나서는 혼자 자위 뻘글이나 다시 양산)

그리고 이런 조명간의 정식 왕래를 위한 앞선 전후 흐름은 전혀 공부도 안하고 인지할 수준도 없이

어디서 단편적 잽극우들이 만들어 논 쳐까는 2,3차 가공에 다시 본인들 입맛따라 안전인수격으로 쳐하는.

어디 황악전(黃幄殿) 안 용정(龍亭)에 놓인 조서를 향한 오배 삼고두(五拜三叩頭)식 예식

도 모른채 무슨 조선 왕은 일개 명나라 신하에게 절했니 하는 뻘소리식이나 양산하니.

좀 더 구체적으로 올리겠지만 윗 내용과도 관련된 국호 명칭이라 전후 흐름을 잠시 살펴보면 이미

조선이라는 국호는 태조가 정식 왕으로 오르긴 전인 잠저(潛邸)에서 구상한 명칭임이 조선왕조실록에

분명히 남아있고 이런 가운데 조임을 시켜 명 조정에 가서 명의 상황을 보면서 조명간에 정식 왕래에 대해

서 이야기가 오고 감. 그리고 그 내용이 아래 기록.


태조 2권, 1년(1392 임신 / 명 홍무(洪武) 25년) 11월 27일(갑진) 1번째기사
국호를 정하는 문제에 대한 예부의 자문을 계품사 조임이 가져오다

계품사(計稟使)인 전 밀직사(密直使) 조임(趙琳)이 중국 남경(南京)으로부터 돌아오니, 임금이 백관(百官)을 거느리고 서교(西郊)에 나가서 맞이하였다. 조임이 예부(禮部)의 자문(咨文)을 받들어 전달하였다. 그 자문은 이러하였다.
“예부(禮部)에서 고려(高麗) 권지 국사(權知國事)에게 자문(咨文)을 보내, 홍무(洪武) 25년 10월 11일에 본부(本部) 353) 우시랑(右侍郞) 장지(張智) 등의 관원이 서각문(西角門)에서 이른 아침에 온 서사(書辭)를 가져와서 주문(奏聞)하고 삼가 황제의 칙지(勅旨)를 받았는데, 칙지에 ‘고려에서는 그전에 사람을 보내어 와서 본국(本國)의 실정과 사유를 아뢰었는데, 지금 온 서사(書辭)를 보니 전일의 일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 중국은 강상(綱常)이 있어 역대의 천자가 서로 전하여 지키고 변경하지 않는다. 고려는 산이 경계를 이루고 바다가 가로막아 하늘이 동이(東夷)를 만들었으므로, 우리 중국이 통치할 바는 아니다. 너희 예부(禮部)에서는 회답하는 문서에 「성교(聲敎)는 자유로이 할 것이며, 과연 하늘의 뜻이 따르고 사람의 마음에 합하여 동이(東夷)의 백성을 편안하게 하고, 변방의 흔단(釁端)을 발생시키지 않는다면, 사절(使節)이 왕래할 것이니 실로 그 나라의 복일 것이다. 문서가 도착하는 날에 나라에서 어떤 칭호로 고칠 것인가를 빨리 달려와서 보고할 것이다.」라고 하라.’ 하였소. 삼가 본부에서는 지금 황제의 칙지를 받들어 사의를 갖추었소.”
전에 갔던 조임이 또 선유(宣諭)를 전달하였다. 그 내용은 이러하였다.
“이번에 내가 예부로 하여금 문서를 주어 그대에게 상세히 회보(回報)하게 하오. 그전의 한(漢)나라·당(唐)나라·송(宋)나라 때에 관원을 보내어 그대 나라의 수어(守禦)하는 데 이르면, 임명해 간 사람이 술을 좋아하고 여색(女色)을 사랑하여 백성을 해쳤으므로, 그대 나라 사람들이 문득 살해하였으니, 일에 무슨 이익이 있었겠는가? 이 때문에 짐(朕)이 사람을 시켜 가지 못하게 한 것이오. 공민왕(恭愍王)이 죽으매 그 아들이 있다고 칭하고 이를 세우기를 청하였으나, 나중에 와서 또 그렇지 않다고 말하였고, 또 왕요(王瑤) 354) 를 왕손(王孫)의 정파(正派)라 하여 세우기를 청하였다가 지금 또 제거해 버렸소. 두세 번 사람을 시켜 왔으나 대개는 자기 스스로 왕이 되기를 요구한 것이므로 나는 묻지 않았소. 자기 스스로 왕이 되어 스스로 할 것이오. 백성들을 편안하게 하고 서로 통하여 왕래하게 하오.”
곧 그 날에 백관이 반열(班列)로 서서 하례하였다.



이 내용을 보면 알겠지만 조선이 명을 탐색하고 정식 소통의 의사를 비추니 명 역시도 조선이라는 동이

의 나라를 통치할 바가 아니다 어쩌고 분명히 못박는 소리 모르겠음??? 이런 기록은 안보이시남? 애초에

명은 그런 능력도 못되었고. 요즘은 이런 걸 속국이라고 가르치남?? ㅋㅋ 울 나라 학계에선 어느 누가

무식한 이런 소릴 떠듦??
     
굿잡스 15-02-23 18:25
   
태종 9권, 5년(1405 을유 / 명 영락(永樂) 3년) 6월 27일(신묘) 1번째기사
영의정부사 평양 부원군 조준의 졸기


정축년에 고황제(高皇帝)가 본국(本國)의 표사(表辭)500) 안에 희모(戲侮)501) 하는 〈내용의〉 글자[字樣]가 들어있다 하여, 사신(使臣)을 보내 그 글을 지은 사람 정도전(鄭道傳)을 잡아서 경사(京師)로 보내게 하였는데, 태상왕이 준(浚)을 불러 비밀히 의논하니, 대답하기를 보내지 아니할 수 없다고 하였다. 도전(道傳)이 그때 판삼군부사(判三軍府事)로 있었는데, 병(病)을 핑계하여 가지 아니하고 음모하기를, 국교(國交)를 끊으면 자기가 화(禍)를 면할 것이라 하고, 마침내 건언(建言)하기를,
“장병(將兵)을 훈련하는 것은 군국(軍國)의 급무(急務)이니 진도 훈도관(陣圖訓導官)을 더 두고, 대소(大小) 중외(中外) 관리로서 무직(武職)을 띈 자와 아래로 군졸(軍卒)에 이르기까지 모두 연습하게 하여 고찰(考察)을 엄중히 할 것입니다.”
하였다. 그리고 남은(南誾)과 깊이 결탁하여 은(誾)으로 하여금 상서(上書)하게 하기를,
“사졸(士卒)이 이미 훈련되었고 군량(軍糧)이 이미 갖추어졌으니, 동명왕(東明王)의 옛 강토를 회복할 만합니다.”
하니, 태상왕이 자못 그렇지 않다고 하였다. 은(誾)이 여러 번 말하므로, 태상왕이 도전(道傳)에게 물으니, 도전이 지나간 옛일에 외이(外夷)가 중원(中原)에서 임금이 된 것을 차례로 들어 논(論)하여 은(誾)의 말을 믿을 만하다고 말하고, 또 도참(圖讖)을 인용하여 그 말에 붙여서 맞추었다


그리고 고대 동아시아에서 구사한 책봉이니 조공이 뭔 개념인지 본인 낮은 수준으로 자폭질은

그만하고 최소한 학계 전문가들의 논문 몇편이라고 읽거나 찾아보고 나서 어쩌고 하길 바람.


박향숙, 신채숙 <한중 외교관계와 조공책봉>,노태돈, 박한제 <한국고대국가와 중국왕조의 조공․책봉관계>

박대재 <고대동아시아 세계론과 고구려의 정체성>, 르우안웨이 , 최형록․김혜준 옮김, <지연문명(地緣

文明)>등

무슨 고구려 최전성기인 장수태왕 시절 북위와 외교 관계를 서토사서에서 책봉이니 조공 어쩌고 43회로

최다로 적어 놓았다고 고구려가 북위의 속국드립 치는 뻘소리식 무식한 소리하군.

제발 시간나면 똥인지 된장인지 구분도 못하는 눈으로 어쩌고 내내 어그로 드립칠게

아니라 좀 학계 전문가들이 연구한 전문 서적이나 최소한의 한,두편 논문이라도 보고와서 어

쩌고 하든지 어디 만쭈뭐식 같은 어디서 잡다한 2,3차 가공된 뻘글 보고 혼자 아전인수식

망글 양산은 그만하길.
꼬꼬동아리 17-11-14 09:53
   
조선이 조공받은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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