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현류는 실제로 막부군과의 전투에서 검도 유파중엔 최강이라는걸 증명했기 때문에 마냥 웃을수만은 없습니다.
시현류의 정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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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공격을 의심하지 말고 삼천지옥까지 베어버려라.
온 힘을 다해 상대를 쳐죽여라.
첫 공격에 상대를 베지 못하면 온몸을 바쳐 죽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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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예로 도바(鳥羽) 후시미(伏見) 전투에서는 2만 명의 막부군이 사쓰마의 시현류 무사 4천 명에게 대패했으며, 우에노(上野) 관영사(寛永寺) 전투에서는 시현류 무사들의 '내려베기'에 당한 자들은 모두 배꼽까지 깊이 잘려있어서 어느 소속의 무사에게 베였는지 바로 알 수 있었다.
시현류의 내려베기를 막으려 들면 칼과 함께 몸이 두 동강 나기 때문에 신센구미 조장 곤도 이사미도 "사쓰마의 첫 칼질은 피해야 한다." 라며 그 첫 칼질의 위력을 인정했다. " -나무위키 에서
혹시 위키 내용 중에서 아래 내용에 대한 언급이였다면, 이건 총격전 중심이지 칼싸움 중심이 아닙니다.
"그날 저녁, 시모토바 부근 가도를 봉쇄하는 사쓰마 번 병사와 오메쓰케(大目付)인 다키가와 도모아키의 논쟁으로 인해 군사적충돌이 일어나, 도바에서 총성이 울리면 후시미에서도 충돌, 전쟁의 발단이 되었다. 이 때의 교토 부근의 병력은 신 정부군 5,000명, 구 막부군은 15,000명을 거느리고 있었다. 하지만 구 막부군은 좁은 가도에서 종대(縦隊)돌파를 꾀하였고, 우세한 병력을 활용하지 못하고 신 정부군의 탄막 사격에 의하여 전진이 제지당했다. 도바에서는 총지휘관인 다케나카 시게카타의 부재나 다키가와 도모아키의 도망등으로 인하여 혼란이 계속되었고, 후시미에서는 부교소 근처에 사쿠바 노부히사나 구보타 시게아키등 막부 장군이 이끄는 막부보병대, 아이즈 번 병사, 히지카타 도시조가 이끄는 신센구미의 병사가 신 정부군(사쓰마 소총대)의 대대규모(약 800명)에게 패하였다."
2만 대 4천의 싸움에서 졌다면 그건 시현류건 뭐건의 문제가 아니라,
다른 이유가 있겠죠. (정상적인 결과가 아니니....)
물론 보신전쟁이나 세이난 전쟁 당시 주력무기는 서양으로부터 도입한 전장식/후장식 소총이었죠. 이걸 누가 많이 확보하느냐가 승패에 큰 영향을 주었었고요. 그래서 위에서 '검도유파중 최강'이라고 했습니다. 검을 들고 돌격해서 소총부대를 무찌른...게 아니고요. 후장식이나 전장식 단발 소총이 주무기이던 시절이라 백병전역시 많이 벌어졌었고, 이런 백병전에서 사쓰마군 무사들이 어릴때 부터 기본적으로 배웠던 시현류는 큰 효과를 냈었습니다.
나중에 일본 신정부군이 이런 사쓰마의 시현류에 대항하기 위해 조직한게 그 유명한 '발도대'입니다. 위키백과에도 이런 내용은 나와있습니다.
참고로 시현류는 태평양전쟁후 일본 경시청에 의해 검도가 재구될때 여러가지가 받아들여져서 현재 국내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즐기는 '검도'에도 그 영향을 볼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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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1일부터 3월 31일까지, 현재의 구마모토 현 가모토 군 우에기 마을에서 다바루 언덕, 기치지 고개의 격전이 전개되었다. 이른 봄이라 매우 쌀쌀했고, 비도 내리는 힘겨운 상황 속에서 전투는 시작되었다. 신정부군은 다바루 언덕 방위선 돌파를 위해, 3월 11일, 군을 주력과 별동대로 나누었다. 주력은 다바루 언덕과 기치지 고개 돌파를, 별동대는 야마가의 기리노 부대의 움직임을 봉쇄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주력군은 현지 지형에 밝은 사이고군의 거센 총격과 발도(拔刀) 백병전에 손도 제대로 못 쓰고[14] 다바루 언덕의 정면 돌파를 단념하고 서쪽에서 공격하여 요코히라 산 (나치那智 산)을 빼앗으려 했다. 사쓰마 군의 가공할 백병 발도 공격에 맞서기 위해 신정부군은 사족 출신의 병졸을 뽑아 발도대(拔刀隊)를 조직하지만 토벌당하자 3월 13일, 새로운 경시(警視)발도대를 조직하였다.
3월 14일의 다바루 언덕의 공격 시도에서 결국 요코히라 산을 점령하지는 못했지만, 경시(警視)발도대가 사쓰마 군과 대등하게 싸울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이때의 발도대의 공을 칭찬하여 유명한 발도대의 노래가 만들어지기도 했다. 다음날인 15일, 사쓰마 군의 수비를 깨고 신정부군은 드디어 요코히라 산을 점령, 사쓰마 군의 방위선을 뚫고 들어가는데 성공하였다. 전선 정리를 위한 하루 동안의 휴전을 거쳐 3월 17일, 신정부군은 서쪽에서 정면으로의 공격을 개시했지만, 지형을 이점을 살려 배치한 사쓰마 군의 다바루 언덕 방위선을 깨는 데는 실패했다. 3월 4일부터 신정부군과 사쓰마 군 사이에 벌어진 전투에서 신정부군 전사자는 약 2,000명, 부상자도 2,000명에 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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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84%B8%EC%9D%B4%EB%82%9C_%EC%A0%84%EC%9F%81
"전통 사무라이들의 무력을 우습게 여기던 정부군은 의외의 결과에 매우 당황했다.
지난 보신전쟁 때 종대돌격을 고집하던 막부군의 무사들을 소총 일제사격으로 격퇴시켰던 그들이었기에 더욱 그랬다.
그들이 간과한 것은 보신전쟁 때는 막부군이나 삿쵸군이나 무사들이 중심으로 전선을 누볐으나 다수의 무사들을 실직자로 만들어버린 지금의
정부군의 인적자원은 대부분이 총을 잡아본 지 2년이 넘지 않는 징집병들이란 것.
그들은 필살의 일격만을 수련하고 돌격 때는 기괴한 괴성을 지르며 달려드는 사족들에게 맞서지 못했다.
단 한번의 격돌로 공포심이 전염되어 오합지졸 마냥 흩어져 버렸다."
결국 훈련이 부족한 정부군의 자멸인 것이고,
같은 방식 방벽을 쌓은 후에는 정부군이 유리해졌습니다.
"후방에서 육군의 후방지원을 맡고 있던 경찰 경시대 警視隊 에서
검술에 능한 구 사족 출신 경찰들을 뽑아 발도대 抜刀隊 로 편성, 사쓰마군의 근접 돌격에 대응하게 했다.
이들은 대부분 보신전쟁 당시 구 막부군에서 싸운 번사들로 구성되었으며 사쓰마 출신 향사鄕士 들도 다수 참전했다.
발도대는 잇따른 격전에서 용맹히 싸웠으며 사쓰마 군의 발도 돌격에 한치도 밀리지 않고 격돌했다."
특수한 사례로 일반화를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저 전투에서 검술로 무장한 시민군이 이겼던 것은 '시현류'라는 최강무술이 원인이 아니라,
그런 구시대의 단병접전을 제대로 경험 못한 정부군의 훈련 문제인 거죠.
"실제로는 일본군에게 조총(뎃포)은 보병의 주무기가 아니라 활이나 대포과 같은 원거리 지원화기이며 임진왜란 중에도 전투병력의 10%를 넘기지 못했습니다. 도검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사츠마(지금의 큐슈 남부 가고시마현) 군이 발도대라 하여 적진으로 돌격하여 근접전을 벌이는 전문 칼부림 부대를 운영한 예도 있지만 이는 매우 드문 케이스이고 사무라이와 보병대(아시가루)는 2~3미터에 달하는 긴 창을 사용했습니다. 도검은 단지 보조무기나 호신용에 불과했습니다. 이는 어느 나라와 다를 바 없습니다. "
일본은 우리나라를 포함하여 아시아에서는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원거리무기인
복합궁이나 연노(일병 쇠뇌)를 별로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일본의 활은 장궁 형태이나 영국의 장궁과는 비교가 안될 정도로 낮은 수준이라서 위협적인 투사 무기가 아니였습니다.
그래서, 투사 무기에 대한 군종 비중이나 그 반대인 대응 군종이 약합니다.
일본은 기병 자체의 수준이 대부분의 아시아 군종에 비하여 떨어집니다. 기병의 충격력을 이용한 돌파 작전으로 사용하는 중장기병 방식도 아니고, 치고 빠지기에 좋은 궁기병 형태도 아니였습니다. 일본의 전국시대에도 의미있는 기병전은 별로 없다고 들었습니다.
일본이 전국시대를 거치면서 충분히 전쟁경험을 쌓은 우수한 군대를 길러낸 것은 맞고,
부족했던 여러가지 문제(원거리 투사 무기 중에서 '활'을 대신할 '총포'의 발견)의 해결이 있었지만
그걸 인정하는 것과 과대평가하는 것은 구분해야 합니다.
일본의 창술(군사적으로 말하면 창 중심의 병진/방진)도 훈련이 되어서 잘 굴러간 것이지
그 다지 의미있는 발전을 했다고는 보여지지 않고요. 일본 창진은 서양 창진 형태보다 느슨하고
방진의 효과보다는 개인의 능력에 많이 의존했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물론 느슷한 방진이 딴딴한 방진 보다 못한 놈이라는 의미는 아님. 체계적인 발전이라는 의미에서 비판한 것임)
창술은 잘 모르겠는데 검술을 기반으로 한 사무라이라는 지배계급이 있을 정도 였고 실제로 임진왜란때 기록을 봐도 포로로 잡은 일본군졸이 우리나라 부장급인가? (분대장 이상급) 랑 대련을 시켜도 압도적으로 이겼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검술은 그래도 일본이 많이 발달 된걸로 알고 있는데 혹시 그게 아니라면 관련 자료 링크 보여주심 참고 하겠습니다 궁술이나 활은 일본이 확실히 약한건 알지만요 제가 말씀 드린건 검술이나 유도 합기도 가라데등의 무술을 이야기 한거죠 그리고 세계 무술계에 일본 무술의 영향이 큰것도 사실이고요 세계 3대 무술 중 1개는 극진 가라데이고 (물론 한국의 최영의가 만든거긴 하지만 기본적으로 일본 무술이죠) 1개는 주짓수 인데 주짓수는 유술의 일본어 발음으로 일본 무술가가 전수해준 유술을 바탕으로 브라질에서 발전시킨 일본계 무술이죠.. (현대 종합 격투가가 필수적으로 배우는 무술이고요..)
가라데 같은건 류쿠왕국 무술이지 일본무술이 아닙니다 왜 착각 하시는지 오키나와 독립 투표도 했었습니다 영국 역사를 보면 이해 하실겁니다 켈트족과 색슨족은 같은 민족이 아니죠
에도시대 니뽕이 검술이 뛰어났던게 아니라 칼이 길어서 대처 하기 어려워서 였다는군요 명나라 창기술 원앙진에 의해서 일본 검술은 참패를 당하기도 햇고요 임란이후 왜검술 받아들인 이유가 적의 기술을 알려고 했던것일뿐입니다 그래야 다시 전쟁이 일어나도 대처가 가능하기 때문이죠 그리고 대마도와도 다른민족입니다 대마도검술과 왜검 다 다르죠 그모든것들을 지금 일본이 자기들 역사라 우기는것 들이고요 대마도인들은 왜구보다 덩치도 컸고 키도 컸다고 되어있습니다 우리나라는 일본처럼 유파를 만들어 체계적으로 검술 양성을 하지않아서 그렇지 개개인은 뛰어났다고 압니다 예로
김명순은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으로, 큰 활약에도 불구하고 그에 대한 기록은 별로 남아 있지 않다. 조선 시대라는 특성과, 전란의 시대라는 악재가 겹친 결과이다. 김명순의 본관은 절치(絶値), 자는 염계(染界), 호는 천호(泉湖)이다. 기록에 따르면 김명순은 키가 5척 정도에, 자기 키만한 장검을 주로 썼다고 전해진다. 무관 집안의 맏아들이었던 김명순은 선조 때에 무과에 응시하였으나, 낙마하여 과거에 급제하지 못하였다. 이후 그는 과거를 포기하고 은거하다가,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 왕이 피난하자, 5월경 금강산 언저리에서 자기 마을의 장정들을 규합하여 의병을 일으켰다.
김명순은 주로 지리를 활용한 기습 공격을 하였는데, 전승에 따르면 '3일 밤낮을 말을 타고 주위를 둘러본 끝에야 비로소 그는 전략을 세우고 병사들을 배치하였다' 라고 적혀 있다. 신중한 성격의 소유자인 그는 대부분의 기습 공격을 승리로 이끌었다. 서술에 있어 놀랄 만한 부분은 그의 신기(神技) 라고까지 칭해지던 검술이다. 작전에 있어서의 신중함과는 달리 그는 대부분의 전투에서 검을 들고 선두에 서서 돌격하는 역할을 맡았으며, 여주에서의 패배 이외에는 단 한 번의 패배도 없었다고 전해진다. 일본군의 신무기였던 조총의 사정거리나, 상대적으로 일본에 비해 낙후되어 있었던 한국의 검술을 생각해 볼 때 김명순은 조선 검객의 자존심이었던 셈이다. 서술에 따르면, '그의 검은 유려한 나비처럼 지나가며, 초생달 같은 호를 그리며 적을 베었다... 적은 신기와 같은 그 검술에 속수무책으로 떨어져 나갔고, 마치 표범 같은 그의 움직임에 적은 총을 맞추지 못했다...' 라고 쓰여 있다.
그의 의병대는 이후 응단(鷹團)이라 불리며 각지에서 소규모 기습 전투만을 감행했고, 그로 인해 커다란 전투에는 김명순의 이름은 올라 가지 않게 된다. 병사들에게서 불패의 명장, 구국의 영웅이라 불리던 김명순은 이후 그 공적을 인정받지만, 전쟁 동안에 겪은 아들의 죽음 때문에 관직에는 나아가지 않고 홀로 산 속에 들어가 은거하게 된다. 그리고 김명순의 이름은 그의 은둔과 함께 역사 속으로 묻히게 된다.
가라데는 님말씀대로 그렇다 치더라도 가라데의발전은 무를 중요시 여기는 일본의 문화가 있었기 때문에 더욱 발전할 수있었고 실질적으로 본토에서도 확실히 뿌리가 내렸고요 그리고 조선에도 뛰어난 개인들이 물론 존재했겠지만 일본이 검술에 뛰어난 이들이 전반적으로 많았던 건 여러 역사자료에도 많이 나와있습니다
님의 말은 임란 가까이 시기 일본에도 시대에 한정되어있습니다 이 한정된 기간동안만 일본 검술이 전체적으로 강했던거고 님이 강력하게 주장하시는거는 딱 이기간의 주장들 입니다 고려초기 중기때 요 금나라 몇십만 대군을 막아낸 시절이나 삼국시대 고구려가 신라에 쳐들어온 왜구 나부랭이들 혼내 준 시절이라던가 망한 백제와 일본연합으로 통일신라 쳐들어 왔다가 찌그레기 왜구 몇명 살아 남아 도망간 일이라던가 그이전 시절 이야기는 하나도 없습니다 오로지 그시절 그때만 주장하시네요
그리고 님이 펼치신 그 가라데 논리라면 현재는 극진가라데 배우는 사람들이 많은데 일제시대 우리나라도 무를 중시했기에 뿌리가 내려진거 겠네요 앞뒤가 안맞아요
조선시대 무예 보통지에 왜검 포함되어 있습니다 ... 그리고 검술은 일본이 훨씬 뛰어났던건 사실입니다 예전에 임진왜란 당시 역사 소설 봐도 '왜놈들은 검술에 뛰어나니 배 위에 올라오기 전에 모두 사살하라'라는 식의 내용도 있기도 하고요.. 우리나라가 궁술에 능했듯 일본은 검술에 뛰어났던건 사실입니다
필요는 발명의 어머니라는 말처럼...
다른 나라에서는 그리 주목받지 못한 검술이 왜 일본에서는 유파가 많을 정도로 발전했을까요?
전쟁에서 사용빈도도 거의 없는 검술이니,
전시가 아닌 평시에 많아 사용되었을 것으로 봐도 무리는 없겠죠?
평시에 사용될 검술의 목적은?
- 귀족끼리는 예의를 갖춘 결투
- 테러 용도
- 민간인 상대
- 할복 (칼로 배를 가르는 것이 생각보다 어렵기 때문에 ?)
대충 이렇네요.
전쟁 시의 검은 대부분의 경우에 주무기를 사용하지 못할 경우에 사용되는 권총급으로 사용된 것이 역사적 사실이니까요. (몇 안되는 예외 중에 하나로 로마가 포함된다는 것 때문에 많은 오해와 편견이 있기는 합니다. 이건 검술이 훌륭해서가 아니라 로마가 훌륭해서 이죠)
그리고, 무예보통지에 왜검이 포함된 것은 사실이지만, 그건 여러개의 무술 중에 하나로 포함된 것이지 검법 중에서 왜검 하나 딸랑있는 것이 아닙니다. 중국쪽의 영향이 있는 제독검, 우리나라에서 유례한 본국검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무예보통지의 목적이 우리나라의 취약한 단병접전 능력을 키우기 위해서 적을 알고 우리도 배우자에 가까운 놈이기 때문에 수록된 무예의 상당수가 외국(중국+일본)의 무예이며, 그 무예와 무기에 대한 한중일 비교가 상당부분을 차지 합니다. 목표가 해당 무예의 수련이 아니라 그 무예에 대한 '이해'이기 때문이죠.
고대 로마를 제외하면 전쟁에서 의미있는 수준의 검병을 운용한 예는 찾기 힘듭니다.
그런 로마에서 유례했다는 검술도 지금은 흔적을 찾기 힘든데,
일본에서만 유달리 유파(이건 검술을 제외하고도 다른 많은 '일본' 무술에도 해당)가 많은 것은
일본 '검술'의 특성이 아니라 무리짓기 좋아하고 차별하기 좋아하는 '일본' 검술의 특성으로 보입니다.
무예도보통지 서문에도 나와 있습니다.
왜구들이 중국 동해안지역도 많이 약탈했었는데, 이쪽이 절강성 지역이죠.
서문에 나와 있듯이 절강병들도 초기엔 왜구들의 기세에 밀려서 많은 피해를 봤었다고 분명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특히 위에 언급한대로 '한 장 밖에서 왜구가 뛰어들면 이미 병사들 몸이 두동강 나있었다'...
이 기세에 밀려서 무기를 버리고 도망갔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이런 왜구들을 대적하기 위해 명의 척계광이 기효신서 라는 무예서(라기 보다는 전략서) 를 만들어 왜구에 적절히 대응하게 됩니다. 임란때도 이 절강병들이 많은 공을 세우죠. 이 기효신서를 입수하여 무예도보통지를 만들게 됩니다.
보기엔 볍신 같은 영상이지만 실전성은 있다는 거죠..
무예도보통지 자체도 순수 조선의 무술만 집대성한 것이 아니라 중국, 조선, 일본의 무예를 집대성해서 모두 실었습니다.
중국 제독검, 조선 예도, 본국검, 일본 왜도 이런식으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