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미국인들을 부르는 명칭 중에 대표적인게 양키입니다.
남북전쟁 때에도, 남부인들은 북부인들을 주로 양키라 불렀죠,.
자, 그럼 양키는 유럽인과 구별되던
아메리카 대륙에 존재하던 다른 혈통을 가진 새로운 민족일까요? 아닙니다.
이들은 유럽에서 건너온 이주자들이었습니다.
한마디로 유럽에서 건너온 도래인들이었죠.
대부분 영국, 프랑스, 독일, 아일랜드 같은
서유럽, 혹은 북유럽과 동유럽, 남유럽에서 온 사람들로써..
상당수가 게르만 혈통입니다.
그런데, 영국인들이나 유럽인들은 미국인을 가리켜 양키라 부르죠.
유럽 귀족문화에 젖어있던 남부의 농장주들도 북부인들을 양키라 불렀죠.
그렇다고 해서 그 피가 어디가겠습니까?
그냥 별칭이고 비하적인 표현일 뿐..그들은 유럽계 백인 혈통입니다.
왜는 뭐였을까요?
분명한 사실은 왜인들은 한반도에 있다가, 일본으로 건너간 사람들이라는 점입니다.
그들은 한강-전라도-경남 등에 분포해 있었고, (북한쪽은 아직 잘 모름)
이들이 한반도에서 전방후원분을 만들던 세력이었고, 일본에 건너가서도 전방후원분을 만들죠.
(고고학적 증거로 밝혀졌습니다. 반박 불가..)
아마, 왜인들은 삼한 중에서도 가장 토박이인 '마한'세력일 가능성이 높다고 봅니다.
(예맥족의 예족이 변형되어 왜족으로 불렸을 가능성도 있다고 봅니다.)
옛날에 유럽에도 이와 비슷한 민족이 있었죠. 바이킹이라는 해양 민족.
얘네들은 북유럽 스칸디나비아 반도가 고향이지만, 조선-항해기술과 약탈문화를 갖고..
당시 유럽 모든 지역에 출몰했고, 일부는 저 아메리카 대륙에도 발을 디딘것으로 알려지죠.
위 지도를 보시면 알겠지만..
민족 대이동.. 민족의 이동 현상은 유럽에서 역사적으로 많이 일어났습니다.
동양에서도 이런 일이 비일비재했겠지만, 잘 다뤄지지 않고 있죠.
하지만 중국사서에도 역사적으로도 xx족이 패배해 서쪽으로 밀려났다~같은 이런 내용은 꽤 많습니다.
노르만족, 바이킹.. 이들이 세운 나라 중에는 이탈리아 반도의 나폴리 왕국이나..
러시아의 기원이 되는 루스족이라던가.. 프랑스 북부에 정착한 노르망디 공국이라던가..
그런 아주 넓은 활동범위를 자랑합니다만..
그들 노르만족이 나폴리왕국을 세웠다고해서..
"노르만족은 나폴리 출신이야!"라고 말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왜? 노르만족 고향이 북유럽인데,
그걸 선후관계 바꿔서 그들이 배타고 개척한 식민지가 고향이라고 말하진 않거든요.
왜인은.. 앞서도 말했지만.. 삼한쪽의 마한과 영역이 겹칩니다.
본래, 진한, 변한은 마한이 땅을 갈라준 것에 가깝습니다.
특히 신라가 있던 진한은 진나라에서 흘러든 유민들에 땅을 떼준것에 가까웠죠.
대신 왕은 마한인으로 하다가, 나중에 박혁거세가 신라왕이 되면서 진한을 통합시킵니다.
신라는 건국초기부터 동네북마냥 많은 침공을 당한 나라였습니다.
一年夏四月十五日 혁거세가 거서간에 오르다
四年夏四月一日 일식이 일어나다
五年春一月 알영이 왕비가 되다
八年 왜인이 침범하려다 물러가다
九年春三月 살별이 왕량에 나타나다
十四年夏四月 살별이 삼에 나타나다
十七年 혁거세와 왕비 알영이 농사를 권하다
十九年春一月 변한이 항복하다
二十一年 금성을 쌓다
二十四年夏六月 일식이 일어나다
二十六年春一月 궁실을 조성하다
三十年夏四月三十日 낙랑 사람들이 침입했다가 돌아가다
三十二年秋八月 일식이 일어나다
三十八年春二月 호공이 마한에 사신으로 다녀오다
三十九年 왕이 마한 왕의 죽음에 조문하다
四十年 백제의 온조가 즉위하다
四十三年春二月 일식이 일어나다
五十三年 동옥저가 말을 바치다
五十四年春二月 살별이 견우성에 나타나다
五十六年春一月一日 일식이 일어나다
五十九年秋九月 일식이 일어나다
六十年秋九月 용이 금성 우물에 나타나다
六十一年春三月 거서간이 세상을 떠나다
무려 박혁거세 즉위 시기인.. 기원전 57년부터 쭉 이어지는 기록 중에..
마한, 낙랑, 왜, 동옥저, 변한 등 꽤나 스케일도 만만찮고 버라이어티한 일들이 벌어집니다.
삼국 중에서도 가장 빠른 건국연대를 가진 신라보다 먼저 왜가 성립되어있었다?? 희한한 일이죠.
하지만, 삼국 이전에도 부여나 옥저, 동예, 삼한, 그리고 고조선 등등 먼저 세워진 나라는 많습니다.
하지만, 일본 열도에서 왜라는 나라가 탄생하고, 그 유적이 발견된건 훨씬 뒤죠.
그러니 그 말은.. 삼국시대 이전
삼한지역에 수많은 소국이 난립한 시대에 이미.. 삼한인들의 왜 열도 진출이 있었고,
이미 신라, 가야 건국시기엔 왜와 교류가 있을 수 있다는 점이지요.
동이열전 -왜
왜(倭)는 한(韓)의 동남쪽 큰 바다 가운데 있고, [이들은] 산이 많은 섬에 의지하여 살아가고 있는데, 무릇 100여 나라[國]이다. 무제(武帝)가 조선(朝鮮)을 멸망시킨 후에 사역(使驛)을 이용하여 한(漢)과 통한 것이 30여 개 나라[國]이다. [이] 나라들의 [수장(首長)]은 모두 왕(王)을 칭하였는데, 대대로 왕통(王統)이 이어졌다. 그 대왜왕(大倭王)은 야마대국(邪馬臺國)에 있다. 낙랑군(樂浪郡)의 변경에서 그 나라는 만 2천 리 떨어져 있고, 그 나라의 서북방에 있는 구야한국(拘邪韓國)에서는 7천여 리 떨어져 있다. 그 땅은 대략 회계[군](會稽) 동야[현](東冶縣)의 동쪽에 있고, 주애[군](朱崖郡) 및 담이[군](儋耳郡)과 서로 가깝다. 따라서 그들의 법속(法俗)은 같은 것이 많다.
땅은 벼, 모시[麻紵] 그리고 양잠에 적합하며 [왜인들은] 천을 짜는 법과 실 잣는 법을 알아서 좋은 비단[縑]과 베를 만들었으며, 백주(白珠)와 푸른 옥이 산출되고 산에는 붉은 흙[丹土]이 난다. 기후가 온난하여 겨울과 여름에 채소[菜茹]가 생산된다. [그러나] 소, 말, 호랑이, 표범, 양 그리고 까치는 없다. 무기로는 창, 방패, 나무로 된 활, 대나무로 된 화살이 있고, 뼈로 화살촉[鏃]을 만들기도 한다.
남자는 모두 얼굴과 몸에 문신(文身)을 하는데, 왼쪽과 오른쪽, 크고 작음에 따라서 존비(尊卑)의 차이를 구별한다. 그들 남자의 옷은 모두 가로의 폭이 넓은 천을 묶어서 서로 이었다. 여인은 머리카락을 풀어헤치거나 말아서 뒤로 묶었는데, 옷은 홑이불과 같고 머리를 넣어서 입는다. 붉은 가루를 몸에 바르는데, 중국에서 분(粉)을 쓰는 것과 같다. [이 나라에는] 성책(城柵)과 옥실(屋室)이 있다. 부모와 형제는 거처하는 곳을 달리 하지만, 단 한 곳에 모일 때에는 남녀의 차별은 없다. 마시고 먹을 때 맨손으로 하지만, [음식을 담는 것은] 대나무와 나무로 만든 그릇을 이용한다. 풍속은 모두 맨발로 다니고, 양 무릎은 꿇고 허리를 낮추는 것[蹲踞]으로 공경을 나타낸다. [이] 사람들은 천성적으로 술을 즐긴다. 대부분이 장수(壽考)하여, 1백여 세가 된 자도 대단히 많다. [이] 나라에는 여자가 많아서, 대인(大人)은 모두 4~5명의 처를 두고 있고, 그 나머지 남자들도 [처를] 2명 혹은 3명 두고 있다. [그러나] 여인들은 간음(姦淫)을 하지 않고 투기(妬忌)도 하지 않는다. 또 풍속이 도둑질을 하지 않으며, 다투고 소송(訴訟)하는 일이 적다. 범법자는 그 처와 자식들을 몰수하고, [좌가] 무거운 자는 그 가문의 사람들이나 일족을 족멸(族滅)한다. 사람이 죽으면 10여 일 동안 매장하지 않고, 그 집안사람[家人]들은 곡을 하며 울고, [죽은 사람에게] 술과 음식을 바치지 않으며, [그들의] ‘등류(等類)’는 노래하고 춤추면서 즐겁게 논다. 뼈를 불로 지져서 점복(占卜)을 치는데, 그것으로써 길흉(吉凶)을 결정한다.
사행[行]이 바다를 건너서 [중국으로] 올 때에는 한 사람에게 머리를 빗거나 목욕하지 못하도록 하고, 고기[肉]를 먹거나 여자와 가까이 하지 못하도록 하는데, [그를] ‘지최(持衰)’라고 하였다. 만약 [여행] 도중에 좋은 일과 이로운 일이 있으면, 재물을 가지고 그에게 보답한다. 만약 질병이 생기거나 재해를 만나면, 지최(持衰)가 삼가하지 않았다고 여겨서 곧 함께 그를 죽였다.
[광무제(光武帝)] 중원(中元) 2년(57)에 왜(倭)의 노국(奴國)이 공물(貢物)을 바치고 조하(朝賀)하였는데, 사인(使人)은 대부(大夫)를 자칭하였다. [노국은] 왜국(倭國)에서 가장 남쪽에 있는 나라이다. 광무제는 [노국(奴國) 사자에게] 인수(印綬)를 하사하였다. 안제(安帝) 영초(永初) 원년(107)에 왜(倭)의 국왕(國王) 수승(帥升) 등이 생구(生口) 160인을 바치고 황제에게 알현하기를 원하였다.
환제(桓帝)와 영제(靈帝)의 치세에 왜국(倭國)에서 대란(大亂)이 일어나서 서로 공격하고 치니 오랫동안 군주(君主)가 없었다. 이름이 비미호(卑彌呼)라는 한 여자가 있었는데, 나이가 들었지만 시집을 가지 않고 귀신의 도[鬼神道]를 섬기면서 괴이한 술수[妖]로 사람들을 미혹하였다. 이에 [사람들이 그녀를] 공동으로 세워[共立] 왕으로 삼았다. [그녀의] 시비(侍婢)는 천여 인이었지만, [그녀를] 볼 수 있는 사람은 적었다. 단, [그녀에게] 음식을 공급하는 한 남자가 있어서 [그녀의] 말을 전하였다. [그녀의] 거처(居處)인 궁실(宮室), 누관(樓觀)69) 그리고 성책(城柵)을 [병사들이] 병기(兵器)를 가지고 수위(守衛)하였다. 법속(法俗)이 엄준(嚴峻)하였다.
여왕국(女王國)에서 동쪽으로 바다를 건너 천여 리를 나아가면 구노국(拘奴國)에 이르는데, (이 나라의 사람들은) 비록 모두 왜종(倭種)이지만, 여왕에게 신속(臣屬)되지 않았다. 여왕국에서 남쪽으로 4천여 리를 가면 주유국(朱儒國)에 이르는데, [이 나라] 사람들의 키는 3~4척(尺)이다. 주유[국]에서 동남쪽으로 배를 타고 1년을 가면 나국(裸國)과 흑치국(黑齒國)에 이르는데, 사역(使驛)이 전하는 곳은 여기에서 끝이 난다.
회계(會稽)의 바다 바깥에 동제인(東鯷人)이 있는데, [이들은] 나뉘어져서 20여 나라를 이루었다. 또 이주(夷洲) 및 단주(澶洲)가 있다. 전해 내려온 말에 “진시황(秦始皇)이 방사(方士) 서복(徐福)을 시켜서 남녀 아이들[童] 수천 명을 데리고 바다로 들어가서 봉래(蓬萊)의 신선(神仙)을 찾게 하였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자, 서복은 [뜻을 이루지 못한 죄를 물어서] 죽임을 당할까 두려워하여 감히 돌아오지 못하고, 마침내 이 주(洲)들에 머무르게 되었으며, 그들은 대대로 이어져서 수만 가(家)를 이루었다.”고 한다. [그] 인민이 때로는 회계(會稽)에 와서 교역하기도 하였다. 회계 동야현(東冶縣) 사람 중에 바다에 들어가서 항해하다가 풍랑을 만나 표류하여 단주(澶洲)에 도착한 자가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있는 곳이 대단히 멀어서, 왕래할 수가 없다
동이열전 -한
한(韓)은 세 종족이 있으니, 하나는 마한(馬韓), 둘째는 진한(辰韓), 셋째는 변진(弁辰)이다.
마한(馬韓)은 서쪽에 있는데, 54국(國)이 있으며, 그 북쪽은 낙랑(樂浪), 남쪽은 왜(倭)와 접(接)하여 있다. 진한은 동쪽에 있는데, 12국(國)이 있으며, 그 북쪽은 예맥(濊貊)과 접(接)하여 있다. 변진(弁辰)은 진한(辰韓)의 남쪽에 있는데, 역시 12국(國)이 있으며, 그 남쪽은 왜(倭)와 접(接)해 있다.
모두 78개 나라 백제(伯濟)는 그 중의 한 나라이다. 큰 나라는 만여호(萬餘戶), 작은 나라는 수천가(數千家)인데, 각기 산과 바다 사이에 있어서 전체 국토의 넓이가 사방 4천여리나 된다. 동쪽과 서쪽은 바다를 경계로 하니 모두 옛 진국(辰國)이다. 마한이 [한족(韓族) 중에서] 가장 강대하여 그 종족들이 함께 왕(王)을 세워 진왕(辰王)으로 삼아 목지국(目支國)에 도읍하여 전체 삼한(三韓) 지역의 왕(王)으로 군림하는데, [삼한(三韓)의] 제국왕(諸國王)의 선대는 모두 마한 종족의 사람이다.
마한 사람들은 농사와 양잠을 할 줄을 알며, 길쌈하여 베를 짠다. 큰 밤이 산출되는데 그 크기가 배만큼 크며, 꼬리가 긴 닭이 있는데 꼬리의 길이는 5척(尺)이나 된다.
읍락(邑落)에 잡거(雜居)하며 역시 성곽(城郭)이 없다. 땅을 파서 움집을 만드니 그 모양이 마치 무덤같으며, 출입하는 문은 윗 부분에 있다. 궤배(跪拜)할 줄을 알지 못하며, 장유(長幼)의 차례와 남녀(男女)의 분별 따위의 예가 없다.
금(金)· 보화· 비단· 모직물 등을 귀하게 여기지 않으며 우(牛)·마(馬)를 탈 줄을 모르고, 오직 구슬을 귀중히 여겨서 옷에 꿰메어 장식하기도 하고 목이나 귀에 달기도 한다. 그들은 대체로 머리를 틀어 묶고 상투를 드러내 놓으며, 베로 만든 도포를 입고 짚신을 신는다.
그 나라 사람들은 씩씩하고 용감(勇敢)하여 젊은이들 중 축실(築室)하는 데서 일하는 사람은 매번 밧줄로 등의 가죽을 꿰어 큰 나무를 매어 달고 소리를 지르는데 [이것을] 건장하다고 한다.
해마다 5월에는 농사일을 마치고 귀신에게 제사를 지내는데, 낮이나 밤이나 술자리를 베풀고 떼지어 노래부르며 춤춘다. 춤출 때에는 수십명이 서로 줄을 서서 땅을 밟으며 장단을 맞춘다. 10월에 농사의 추수를 끝내고는 또 다시 이와 같이 한다.
여러 국읍(國邑)에는 각각 한 사람이 천신(天神)의 제사를 주재하는데[그 사람을]‘천군(天君)’이라 부른다. 또 소도(蘇塗)를 만들어 거기다가 큰 나무를 세우고서 방울과 북을 매달아 놓고 귀신을 섬긴다.
[마한(馬韓)의] 남쪽 경계는 왜(倭)에 가까우므로 문신(文身)한 사람도 있다.
진한(辰韓)은 그 노인들이 스스로 말하되, 진(秦)나라에서 망명(亡命)한 사람들로서 고역(苦役)을 피하여 한국(韓國)에 오자, 마한이 그들의 동쪽 지역을 분할하여 주었다 한다. 그들은 나라(국,國)를 방(邦)이라 부르며, 궁(弓)은 고(孤)라 하고, 적(賊)은 구(寇)라 하며, 행주(行酒)를 행상(行觴)이라 하고, 서로 부르는 것을 도(徒)라 하여, 진(秦)나라 말과 흡사하기 때문에 혹 진한(秦韓)이라고도 부른다.
성책(城栅)과 가옥(家屋)이 있다. 모든 작은 읍(邑)에는 각각 거수(渠帥)가 있으니, 강대한 자를 신지(臣智)라 하고, 그 다음은 검측(儉側), 그 다음은 번지(樊秖), 그 다음은 살해(殺奚), 그 다음은 읍차(邑借)가 있다. 토질이 비옥하여 5곡이 잘 자라며 누에치기와 뽕나무 가꿀 줄을 알고 비단과 베를 짠다. 소나 말을 타고 다니며 혼인은 예의에 맞게 하며 길에 다니는 사람들은 길을 양보한다.
그 나라에는 철(鐵)이 생산되는데 예(濊)·왜(倭)·마한(馬韓)이 모두 와서 사 간다. 모든 무역에 있어서 철(鐵)을 화폐로 사용한다.
그들의 풍속은 노래하고 춤추며 술마시고 비파뜯기를 좋아한다. 아이를 낳으면 머리가 납작하게 되도록 하려고 모두 돌로 눌러 놓는다.
변진(弁辰) 사람들은 진한(辰韓) 사람들과 뒤섞여 사는데, 성곽과 의복은 모두 [진한(辰韓)과] 같으나 언어와 풍속은 다른 점이 있다. 변진(弁辰) 사람들의 모습은 모두 신체가 장대하고 머리칼이 아름다우며, 의복은 깨끗하고 형법은 엄격하다. 변진은 왜국(倭國)과의 거리가 가깝기 때문에 문신(文身)한 사람이 상당히 있다.
과거에 조선왕(朝鮮王) 준(準)이 위만(衛滿)에게 패하여, 자신의 남은 무리 수천명을 거느리고 바다로 도망, 마한을 공격하여 쳐부수고 스스로 한왕(韓王)이 되었다. 준(準)의 후손(後孫)이 절멸(絶滅)되자, 마한 사람이 다시 자립(自立)하여 진왕(辰王)이 되었다.
건무(建武) 20년(A.D.44; 百濟 多婁王 17) 에 한(韓)의 염사(廉斯) 사람인 소마시(蘇馬諟) 등이 낙랑(樂浪)에 와서 공물을 바쳤다. [후한(後漢)]의 광무제(光武帝)는 소마시(蘇馬諟)를 봉(封)하여 한(漢)의 염사읍군(廉斯邑君)으로 삼아 낙랑군(樂浪郡)에 소속시키고 철마다 조알(朝謁)하도록 하였다. 영제(靈帝) 말년에 한(韓)과 예(濊)가 모두 강성해져 [한(漢)나라의] 군현(郡縣)이 제대로 제압하지 못하자, 난리에 고통스러운 백성들이 한(韓)으로 도망하여 유입(流入)하는 경우가 많았다.
마한의 서쪽 바다의 섬 위에 주호국(州胡國)이 있다. 그 나라 사람은 키가 작고 머리를 깎으며, 가죽 옷을 입는데 상의(上衣)만 입고 하의(下衣)는 입지 않는다. 소나 돼지 기르기를 좋아하며, 배를 타고 왕래하면서 한(韓)의 국중(國中)에서 물건을 사고 판다.
(서해 섬의 주호국 사람들은 왜구들처럼 키가 작고 하의실종 패션? 게다가 배를 타고 무역까지..)
동이열전 -예
예(濊)는 북쪽으로는 고구려(高句驪)· 옥저(沃沮)와, 남쪽으로는 진한(辰韓)과 접해 있고, 동쪽은 대해(大海)에 닿으며, 서쪽은 낙랑(樂浪)에 이른다. 예 및 옥저·고구려는 본디 모두가 [옛] 조선(朝鮮)의 지역이다.
일찍이 [주(周)] 무왕(武王)이 기자(箕子)를 조선에 봉하니, 기자는 [조선(朝鮮) 백성에게] 예의와 농사짓는 법과 양잠하는 법을 가르쳤다. 또 팔조(八條)의 교(敎)를 제정하니, 그 나라 사람들이 마침내 서로 도둑질을 하지 않아 [밤에도] 문을 닫지 아니하고, 부인(婦人)들은 정절(貞節)을 지키며 음식은 변두(籩豆)를 사용하여 먹었다.
그 뒤 40여世를 지나 조선후(朝鮮侯) 준(準)에 이르러 스스로 왕(王)이라 칭하였다. 한초(漢初)의 대혼란기에 연(燕)·제(齊)·조(趙)나라 사람으로서 그 지역으로 피난간 사람이 수만명이나 되었는데, 연나라 사람 위만(衛滿)은 준(準)을 공격하여 깨뜨리고, 스스로 조선(朝鮮)의 왕이 되어 나라가 손자 우거(右渠)에게까지 전하여졌다.
원삭(元朔) 원년(B.C.128)에 예군(濊君) 남여(南閭) 등이 우거(右渠)를 배반하고 28만구(萬口)를 이끌고 요동(遼東)에 귀속하였으므로, 무제(武帝)는 그 지역으로 창해군(蒼海郡)을 만들었으나, 수년 후에 곧 폐지 하였다. 원봉(元封) 3년(B.C.108)에 이르러서는 조선을 멸망시키고, 그 땅을 나누어 낙랑(樂浪)·임둔(臨屯)·현도(玄菟)·진번(眞番)의 사군(四郡)을 두었다. 소제(昭帝) 원시(始元) 5년(B.C.82)에는 임둔과 진번을 폐지하여 낙랑과 현도에 합병하였다. 현도는 다시 [고(高)]구려(句驪)로 옮겼으며 단단대령(單單大領)의 동쪽의 옥저(沃沮)와 예맥(濊貊)은 모두 낙랑에 예속되었다. 뒤에 그 지역이 넓고 멀리 떨어져 있어서, 다시 [대(大)]령(領)의 동쪽 7현(縣)을 떼어 낙랑군에 속한 동부도위(東部都尉)를 두었다. [예(濊)가 한(漢)에] 복속된 후부터 풍속이 점점 나빠짐에 따라, 법령도 점차 늘어나 60여조(條)나 되었다. [후한(後漢)] 건무(建武) 6년(B.C.30; 高句麗 大武神王 13)에 [동부(東部)]도위(都尉)의 관직을 폐지하고, [대(大)]령(領) 동쪽의 지역을 포기한 뒤, 그 지방의 우두머리(거수,渠帥)들을 봉해 현후(縣侯)로 삼으니, 세시(歲時)마다 모두 와서 조하(朝賀)하였다.
[예(濊)에는] 대군장(大君長)이 없고, 그들의 관직으로는 후(侯)와 읍군(邑君)과 삼로(三老)가 있다. [예(濊)의] 노인들은 자신들이 [고]구려와 같은 종족이라 말하는데, 언어와 법령과 풍속이 대체로 비슷하다.
그 사람들의 성품은 우직하고 건실하며 욕심이 적어 남에게 구걸하지 않는다. 남녀 모두 곡령(曲領)을 입는다. 그 풍속은 산천(山川)을 중요시하여 산천마다 각 읍락(邑落)의 경계가 있어서 함부로 서로 침범하지 않는다. 동성(同姓)간에는 혼인하지 않는다. 꺼리고 금하는 것이 많아서 병을 앓거나 사람이 죽으면 곧 옛 집을 버리고 다시 새 집을 지어 산다. 삼(마,麻)을 심고 누에를 기르며 길쌈을 할 줄 안다. 새벽에 별자리의 움직임을 관찰하여 그 해의 흉풍을 미리 안다.
해마다 10월이면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데, 주야로 술 마시며 노래 부르고 춤추니, 이를 ‘무천(舞天)’이라 한다. 또 호랑이를 신(神)으로 여겨 제사지낸다. 부락을 함부로 침범하는 사람이 있으면, 벌로 생구(生口)와 소· 말을 부과하는데 이를 ‘책화(責禍)’라고 한다. 사람을 죽인 사람은 죽음으로 그 죄를 갚게 한다. 도둑질하는 사람이 적다.
보전(步戰)에 능숙하며, 길이가 3장(丈)이나 되는 창을 만들어 때로는 여러 사람이 함께 잡고서 사용하기도 한다. 낙랑(樂浪)의 단궁(檀弓)이 그 지방에서 산출(産出)된다. 또한 무늬있는 표범이 있고 과하마(果下馬)가 있으며, 바다에는 반어(班魚)가 나는데 사절(使節)이 올 적에 빠짐없이 헌상(獻上)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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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한지 동이열전을 살펴보면..
삼한... 특히 마한과 왜, 예의 공통점은.. 비단을 생산할 줄 안다는 점..
그 중에서도 마한과 왜는 소, 말을 다룰 줄 모른다는 점, 귀신을 섬겼다는 점이 통하죠.
그외에도 모두 음주가무를 즐겼다는 점..
마한의 경우 땅을 파고 무덤처럼 움집을 만들어 사는데, 이게 전방후원분의 원형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다만, 차이점이라면.. 왜인들은 주로 얼굴에 문신을 했고, 이게 유행인지 모르겠으나..
삼한지역에서도 왜인들처럼 얼굴 문신을 하는 사람이 있었다는 점..
그리고, 가야 지역에서는 철의 무역이 상당했는데.. 당시의 철은 한마디로 "화폐"였죠.
그래서 철정이 돈 역할을 하던 시대였는데..
그 말은 즉슨.. 철이 요즘의 달러와 같은 기축통화 역할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 철로 갑옷과 무기도 만들고, 농기구도 만들고 세력과 생산력을 키우는 등 이 것 저 것 할 수 있었으니까요.
요즘으로 비유하자면 달러 조폐소 연방준비위원회가 가야에 있었다는 말이나 다름없죠.
왕좌의 게임으로 치자면, 브라보스의 강철 은행 정도 위상..?
고로, 철=돈, 이걸로 용병 부려먹기 딱 좋았다 이거지요.
게다가 아래쪽에 언급된 인덕왕릉인가 그것도 보니까..
대략 4~6세기경 무덤들이 대부분이라죠..
검색해보니 재밌는 사진들이 몇개 있던데..
출처: http://dinko00.tistory.com/m/post/806
인덕천황릉인가 그것부터 비롯해 대부분이 가야, 백제 유물이 우르르 쏟아지는 수준..
이건 뭐.. 초기 왜와 별개로 이미 한반도 도래계의 영향이 강하게 묻어나오는 수준이라
별도로 말할 가치도 없는거 같네요.
덧붙여..
서해 바다의 섬에 살던 주호국 사람들이..
하의실종 패션에 키가 작고, 배타고 무역을 하는 걸 보면..
이 쪽이 왜인과 연관이 있는걸수도 있겠습니다.
마한세력 중에서도 왜로 가장 먼저 진출한 해양세력??
그래서, 섬에서 섬으로 이동하면서..
남해안 루트를 따라, 일본 열도까지 진출했을 가능성도 있어보이네요.
다만, 주호국 역시 마한 연맹체의 일부로써,
전방후원분 자체가 마한의 무덤양식이라고 봅니다.
꼭, 가야-백제가 성립된 이후 왜 열도 개척이 일어났다기보다..
이미 그 이전의 삼한시절에 왜 열도로 한반도 도래인들이 진출했다고 봐야될 거 같습니다.
그리고 초기 왜를 이렇게 보는 사람도 있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