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현대사사학회가 거짓말쟁이는 아니겟지요.
저는 그래서 처음부터 밖에선 주류편승해서 남들처럼 말하라고 그랬구요.
삼례취회 성과를얻어 동학과 일반농민이 결집하는 대오,계기가 마련되며
동학도들은 집회직후 11월부터 서울에 올라가 국왕에게 집단호소를 계획,추진함.
이과정에서 외국인을 배척할것이라는 소문이 퍼지기 시작하여 외국인들이 위기감을 불러일으킴.
[아직까진 밝혀지지 않은 소문 ]
1893년 2월 9일 해를바꿔 동학공인과 ,최제우에대한 교조신원을 3일밤낮 호소함.
이후 14일부터 외국인을 배척하자는 괘서가 외국공사,외국인의 교회 집, 담 등에서 나붙기시작
이른바 복소,괘서사건이라고 하며 이 괘서사건에대한 견해는 여러가지임.
최근자료에선 전봉준을 필두로한 일부 전라도출신 동학교도들의 상경주도했을뿐
타지역 동학도들과 관련해서 사료는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음.
여하튼 북소한인물들은 수배령이 내리고 체포됨.
이후 보은취회에서 척왜양창의 하겠다고 일어나는듯했으나
양호선무사 어윤중의 설득회유+조정 강경책으로 흐지부지되어
표면상으론 와해되어 막을내림.
-이부분까지가 1차 동학농민전쟁 전단계 투쟁으로 이해하면됨.
이시기는 동학농민운동의 사상적결집과 ,이해관계가 확립되는시기라고 볼수있으며
그들 역사적 의의는 이렇게 평가됨.
A.전쟁의 전단계 투쟁으로서 장차 전쟁을 주도할 지도부의 형성
B.대내 대외적 무손심화에 따른 민중 동향이 폭발직전의 혁명정세에 도달
C.교조신원운동단계에서 사상과 교단이 합쳐진 조직화한 민중봉기로 발전할
가능성을 보여줌.
동학과 일반민중의 결합은 황현이 오하기문에서
지적하기도했는데 고부민란단계가 아니라 그이전 1892년 11월 삼례취회 전후부터였음.
그러나 이 민중결합이 이루어지던 시기에도 동학농민운동은
국가에 대항하는 혁명세력으로 결집하지도 못하였으며
교주의 신원복권만 바라는 종교적 행태를 보이기도 했음.
+동학농민전쟁과 관련하여 농민군의 이동루트 , 포교지역 , 활동루트를 지도로 표기해보면
고을별 집강소통치기와 비교했을때 드러나는 역사적 아이러니가 눈에 극명하게 보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