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름 알아 본건데요...
동학 농민군의 1차 봉기격문
= " 우리가 의를 들어 이에 이름은 그 본의가 다른데 있지 아니하고 창생을 도탄에서 건지고 국가를 반석위
에 두고자 함이라 . 안으로는 탐학한 관리의 머리를 베고, 밖으로는 횡포하는 강적의 머리를 구축하고자 함
이라 . 양반과 토호 앞에서 고통을 받는 민중들과 방백과 수령의 밑에서 굴욕을 받는 소리들은 우리와 같이
원한이 깊은 자라 , 조금도 주저하지말고 이시각으로 일어서라 !. 만일 기회를 잃으면 후회해도 미치지 못하리라 "
- 호남 창의 대장소 백산에서 -
교조신원운동
= 동학의 창시자 최제우가 처형당한뒤 , 그 억울함을 풀고 포교의 자유를 얻기 위해서 교도들이 벌인운동
삼례집회( 1892) , 서울에서의 복합상소 ( !893) , 보은집회 ( 1893) 가 이에 해당된다
전봉준의 공초 ( 재판 기록문 )
문 = 작년 ( 1894) 3개월 동안 고부 등지에서 민중을 크게 모았다고 하니, 무슨 사연으로 그리하였는가?
답 = 고부 군수가 정액외에 가혹하게 수만 냥의 부가세를 징수하므로 , 민심이 억울하고 원통하여 이 의거가
있었던 것이다
문 = 고부에서 봉기할때에 동학교도들이 많았느냐?, 원민이 많았느냐?
답= 동학교도들은 적었고 , 원민들은 많았다
문 = 다시 난을 일으킨 것은 무슨 이유인가?
답 = 그후에 일본이 개화라 칭하고, 처음부터 민간에 일언반구의 말도 없이 군대를 거느리고 우리 서울에
들어와 밤중에 왕궁을 놀라게 하렸다 하기로 , 초야의 사민들이 충군애국의 마음으로 분개함을 억누르지
못하여 의병을 규합하여 일본이과 접전하여 이 사실을 따지고자 함이였다
- 규장각 문서 -
동학 농문운동의 성격과 의의
= 이 운동은 안으로는 봉건적 지배체제에 반대하여 신분제 폐지 ,삼정개혁 등 봉건체제의 개혁을 요구하고
밖으로는 외세의 침략을 물리치려고 한 반봉건적 ,반침략적 민족운동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 , 이 때문에
당시의 집권세력인 양반지배층과 일본의 탄압을 받아 실패하고 말았으나 .그 영향은 매우컷다 실제로
그들의 요구 상황중에 신분제도의 폐지 등등은 갑오개혁에 반영되었다 ,또한 이들 잔여세력들은
1890년대 의병투쟁에 참가하여 반외세적 민족운동을 전개하였고 1900년대 이루호는 활빈당에 가담하는등
반봉건 - 반외세 운동을 이어 나갔다 , 그러나 근대사회를 건설하기위한 구체적인 방안을 제시하지 못하였
다는게 이들 운동의 한계성을 보여주었다
- 네** 지식인 ㅋㅋ -
개혁 12개조
1. 동학도는 정부와의 원한을 씻고 시정에 협력한다
2. 탐관오리는 그 좌상을 조사하여 엄징한다
3. 횡포한 부호들은 엄징한다
4. 불량한 유림들과 양반의 무리를 징벙한다
5. 노비문서를 소각한다
6. 7종의 천인차별을 개선하고 ,백정이 쓰는 평량갓은 없앤다
7. 청상과부의 개가를 허용한다
8. 무명의 잡세는 일절 폐지한다
9. 관리채용에는 지벌을 타파하고 인재를 등용한다
10. 왜와 통하는 자는 엄징한다
11. 공사채를 막론하고 기왕의 것을 무효로 한다
12. 토지는 균등하게 나누어 경착한다
- 오지영 , 역사소설 " 동학사 " -
혹시 빠진게 있나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