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반에 금나라가 병사가 적어 발해인에게 한 집안이라고 주장했는데
발해인은 오히려 자존심이 상했다고 합니다.
그러다 금나라가 힘이 세지니까 어쩔 수 없이 같이 싸웠는데
금나라가 송나라를 밀어내고선 토사구팽을 했다고 하죠.
그리고 힘을 모으지 못하게 흩어놨다고 합니다.
니들은 여진족이 아니니까 같은 대접을 받을 수 없다는거였죠.
천추태후라는 맛탱이가 간 드라마에서 발해인을 홀대했다고 헛소리를 했는데
실제로는 태조 왕건은 유민들을 데리고 망명온 발해왕자 대광현에게 왕씨 성을 하사하고
우대를 했고 통일전쟁에 발해유민도 힘도 보탰죠.
대광현의 할아버지가 마지막 발해왕 대인선인데 태조 왕건은 대인선을 구출하려고
후진의 석경당에게 같이 거란적을 치자고 제안을 하기도 합니다.
근데 후진이 대답을 미루니 성사가 안됐는데 나중에 후진에서 제안할 때는
왕건이 세상을 떠난 후라서 성사가 안됩니다.
그만큼 발해를 형제라고 생각했다는 말이죠.
금, 청을 우리 역사라고 볼 수는 없습니다.
만주원류고에 나온 김함보라는 것을 너무 확대해석하면
고려는 중국 당나라에서 갈라진 왕국이 됩니다.
중국에서도 그런 낌새를 보이는데
결국 그런 주장을 돕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냥 배경이 없다가 창업자가 된 집안에서 권위를 빌려썼다는게
정확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청나라의 경우는 여진족은 소수고 대부분 잡탕민족으로 이뤄졌는데
그래서 만주족이라고 개칭했는지도 모릅니다.
산해관을 넘어 북경을 점령하기 전에도 청나라의 구성원은
만주에 살던 모든 찌끄러기 민족과 조선, 몽골, 명나라 사람으로 구성됐죠.
초반에 금나라가 병사가 적어 발해인에게 한 집안이라고 주장했는데
발해인은 오히려 자존심이 상했다고 합니다.
ㄴ 발해인이 자존심 상했다는 말에 대한 근거가 뭡니까?
그러다 금나라가 힘이 세지니까 어쩔 수 없이 같이 싸웠는데
금나라가 송나라를 밀어내고선 토사구팽을 했다고 하죠.
ㄴ 금 나라가 발해인(발해인 후손)을 토사구팽 했다는 것에 대한 근거가 뭡니까?
그리고, 금 나라가 발해인들을 토사구팽 했다면, 그 발해인들이 토사구팽 당한 자리에는 어떤 사람들이 새로 들어가 차지했습니까?
발해인은 여진족이 자신들에 밑에 속했던 종족이라는 생각에 아골타가
여진과 발해인은 한가족이니 자신의 밑으로 들어오라는 말에
발해인은 당연히 분노를 했습니다.
발해인이 차별를 받았다는 것은 '송막기문'에 나왔다고 하더군요.
국가의 형세가 점차 성대해짐에 미쳐서는 황통(皇統 금나라 희종(煕宗)의 연호) 5년(1145)에 요동의 발해인과 한인(漢人)이 맹안과 모극을 승습하는 제도를 혁파하여 점차 병권(兵權)을 내족(內族)에게로 옮겼다. 《금사》 식화지(食貨志)에, “모든 한인과 발해인은 맹안과 모극에 충임하지 못하게 하였다.” 하였다. 9년 8월에는 재신(宰臣)들의 의논에 따라 요양(遼陽)에 있는 발해의 백성들을 연(燕) 지방 남쪽으로 옮기고, 그 뒤에는 또 자주 산동(山東) 지방에서 수자리를 살게 하였다. 신유년에 이르러서 모두 내몰았는데, 옛 땅에 살고 있던 자들은 혹 거란 지역으로 들어갔다. 이에 발해의 종족이 드디어 끊어져 전해지는 바가 없게 되었다
맹안모극이 뭔지는 아실테니 이게 토사구팽이 아닙니까?
그리고 제가 쓴 다른 글에 어떤 의문이 있죠?
저도 취미로 역사책을 읽지만 제가 쓴 내용들은 왠만하면 사람들도 다 아는 내용이죠.
기초적인 수준에서 쓴 것들인데 뭐가 다른 것도 많다는건지 웃기지도 않습니다.
고려왕실에서 당나라 황실의 이름을 빌린 사실에 원나라 학자가 앞뒤가 맞지 않음을
따지니 충선왕이 망신을 당할 뻔 한 사실도 있죠.
(이게 '고려사절요'에서 봤는지 다른 책에서 봤는지 모르지만 찾는게 귀찮으니
직접 찾아보세요.)
자꾸 금, 청이 우리 역사라고 떠드니 중국에서도 요즘은 이런 것을 빌미로 우기는데
이것에 항의할 자신이 있습니까?
우리 나라 사람도 타민족을 가지고 이렇게 우기는데.
정말 답답합니다.
그런거 없어도 우리 민족은 충분히 자부심이 넘치는 민족이예요.
이러니까 기황후같은 요상한 드라마가 판을 치죠.
이게 사대주의가 아니고 뭡니까?
조선시대는 나름 얻을 것을 위해 그랬다고 생각하고 지킬건 또 지켰죠.
요즘 사람들은 요상한 만족감을 위해 큰 땅덩어리 콤플렉스가 있는 것 같습니다.
예의가 아닌 줄은 알지만 정말 심각하시군요.
왜 사람들이 관심을 끊으라고 하는지 알겠습니다.
님같은 분과 대화를 나눈 적이 있는데 어린 친구도 아니고
제가 어떻게 생각을 돌리겠습니까만
한가지 묻자면 그렇게 자신감이 없으십니까?
이것도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잃어버린 자신감일까요?
일본인들이 칭기스칸이 요시츠네라고 하는 것과
칭기스칸을 중국역사라고 말하는 것과
무슨 차이가 있는지 모르겠네요.
제가 예전에 가생이에서 조선족이신 분과 대화를 한 적이 있죠.
이분이 그래도 다른 조선족과 달리 한국에 자부심이 있는 분이더군요.
그 분이 말하길 만주족들이 한국을 비웃는데 할 말이 없다는거였죠.
이유를 물으니 금, 청을 자신의 역사로 생각한다고 비웃는다더군요.
자신들이 버젓이 있는데 그런다고 자존심도 없는 놈들이라고 했다던가 그랬습니다.
제가 그랬죠.
그건 중국이 고구려의 역사를 동북공정으로 자국역사로 편입하려는
술수에 대항하려는 의도이지 우리는 우리만의 역사가 있다고 당당하게 말했는데
제가 그분에게 실수를 했군요.
한국, 중국, 일본 모두 서로 비방할 수준이 아니라는 것을 확실히 알았습니다.
일본사신이 바다건너 오늘날의 연해주에 도착하여 연해주의 한촌락을 보고 그곳의 주민구성을 지배층은 고구려계 피지배층은 말갈족이라고 기록했는데..그게 확대해석되서 발해의 인구구성전체가 소수의 고구려계가 다수의 말갈족을 지배하는 사회라고 우리가 현재 잘못배우고 있는 겁니다..
뭐 친일사학의 영향이죠..일제시대 조선총독부산하의 조선사편수회의 일본사학자와 거기에 동조하는 친일매국사학자 이병도의 후예들인 강단사학의 폐해고..
고구려인 69만호 물론 호구에 기록되지 않는 인구도 상당히 많겠죠..만주는 가축을 방목하면서 유목하기엔 최적의 장소가 많죠..당연히 기마민족인 고구려인중에는 정착한 기마민족과 유목생활을 하면서 가축을 기르는 유목민이 모두 공존할겁니다..
고려나 조선시대에도 호구에 기록되지 않는 수가 어마어마했으니..비교도 안되게 광할한 영토를 가진 고구려라면 호구에 기록되지 않는 인구도 당연히 많을 겁니다..
네 맞습니다. 당나라에 유학하던 일본 승려가 건국 초 발해의 소규모 촌락보고 서술한 걸 순진하게 믿고 그대로 가르치는 게 현 한국사의 실정이죠...
이 블로그에서 발해인의 구성원 대다수가 말갈인이라는 주장이 얼마나 헛소리인지 잘 나옵니다 ㅋㅋ
http://m.blog.naver.com/peelip/80004835786
고당전쟁기간에 많은 인구가 전란으로 죽었고 특히 고구려가 패망하면서 아마도 엄청나게 죽었을 겁니다..
적에게 죽은 사람도 많을테지만 패망후 무정부상태의 혼란기에서 수년간 굶어죽은 사람이 더 많을 겁니다..
거기에 고구려 패망후 공식적으로 평양성주위의 인구 20만이 당으로 끌려갔고 신라로도 10만명이 끌려갑니다..
이때 신라로 끌려간 10만명이 후에 신라에서 반란을 일으키기도 합니다..익산으로 대규모 이주됐는데..거기서 거병했죠..
그리고 수를 알수없는 고구려인들이 돌궐등으로 탈출합니다..그 외에도 기록되지 않는 고구려인들이 당나라에 더 끌려갔을 거라고 생각됩니다..영주등에 거주하던 고구려인들은 초기에 끌려간 20만의 고구려인은 아니라고 보입니다..초기에 끌려간 이들은 노예로 고구려멸망에 공을 세운 자들에게 노예로 일부는 하사되고 민간에도 많이 팔려갑니다..
수나라 당나라시대에는 인육시장이 장안이나 낙양같은 수도를 포함하여 중국전역에서 합법적으로 거래됐는데 고구려멸망후 들어온 포로들의 노예화로 인육값이 폭락했다고 기록이 전해집니다..
나머지 포로들도 중국 변방 전역으로 흩어져서 농노화 됩니다..죽을때까지 강제노역과 농사에 전념하거나 병사로 당나라 국경을 지키고 전쟁에 나가고..여자들은 더 비참ㅠ_ㅠ..
그래서 발해가 세워진지 수십년이 지난후에도 발해는 고구려멸망전의 인구를 회복하지 못합니다..
인구가 적으니 당연히 군사력도 고구려보다 약했을 테고..물산의 생산도 적었겠죠..
팩트는 고구려멸망과 망국의 혼란기속에서 발해가 세워질떄까지 30년간 고구려인구는 엄청나게 줄었을겁니다..임진왜란 직전과 진후의 인구에 대해서 오늘날의 학자들은 임란전 조선인구를 최소 800만에서 최대 1200만사이로 보고 있습니다..그리고 임란후의 조선인구를 최소 200만에서 최대 400만으로 보고 있죠..
그만큼 근대이전의 전쟁은 인구에 치명적인 영향을 미칩니다..적에게 죽거나 노예로 끌려가는 사람보다 전란기에 굶어죽는 사람이 더 많다는 거죠..전쟁에 장기전이 될수록 더하구요..
뭐 고구려도 비슷했을 겁니다..고구려 패망후 발해가 세워질때까지 30년간 최소한 절반이상은 죽었을 겁니다..아니 3분의 1정도만 살아남았어도 많이 살아남지 않았을까 생각해 봅니다..
수나라가 고구려 원정실패로 패망하고 당나라가 세워지고 수십년이 지난 뒤에 당고종때 당나라 인구를 조사하니 수나라 양제때 890만호 였던 인구가 당나라 고종때 인구가 380만호 밖에 되지 않았죠..
그땐 이미 당나라가 세워진지 수십년으로 안정이 되서 호구조사가 제대로 됐을텐데..그정도로 전란은 근대이전의 인구감소에 심각한 영향을 미칩니다..
당나라는 개원28년 즉 서기 740년에 당나라 인구가 841만호로 불어나는데 얼마나 전란이 무서운지 알수있죠..그때가 되서도 수양제때의 인구를 회복 못했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