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해 상경용천부 제2궁전과 인도의 타지마할 크기 비교!
실제 크기로 편집해서 비교한 것입니다.
인도의 타지마할의 기단 크기 94m, 건물 크기 57m
발해의 상경용천부 제2궁전 기단 크기 120m, 건물 크기 93.5m
Koryeo (Silla) is parents of Kim and Cheong(金 and 淸 / Jin and Qing) empires (1/3)
남북국 시대 발해가 요에게 멸망했지만 발해는 이름만 동란국으로 바뀐채
요나라에 의해 여전히 군사적으로 활용되었고(수만의 군사 유지) 거센 저항에 의해 거의 반독립적 상태로 관리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가운데 발해 고구려 후예를 자처하는 세력들이 요동부터 여러
곳에서 계속해서 국호가 생겨 났고 이후 이런 가운데 남쪽의 신라는 고려로
바뀌면서 왕조가 교체되는 시기 신라인들이 말갈족 세력으로 들어가서 성문
법을 만들면서 중심 세력화를 이루어 나온게 여진족이죠.
이에 마침내 신라인 황제 아골타는 반요사상의 고구려인과 연합하여 요나라
를 멸망시키게 됩니다. 이런 가운데 여전히 요나라에 주요 관직과 영향력을
보여줬던 고구려인들을 포섭하지 않을 수 없었던 아골타는
여진과 발해는 일가라는 말로서 적극적으로 포용하게 됩니다.
이때문에 10대의 금황제 기간에 무려 4명이나 발해인 황후가 황실의 외척으
로 군림했고 국무총리부터 도시개발 행정 병권등에 고구려인들이 중축역할
을 하면서 심지어 금황제의 즉위와 폐위까지 좌지하게 되는 등 실로 금나라
의 내부는 신라황제계의 본국 성씨를 국호로 했지만 여전히 고구려인들이
지배적으로 활동하는 등 남북국 시대의 발해 신라의 연장선의 금 고려와 다
르지 않는 내용물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북방의 민족이 흥할 때에 요나라 부터 금나라의 도시 문명의
설계와 주도적 역할을 담당한게 다름 아닌 발해인 즉 고구려의 후예들입니
다. 즉 유구한 우리의 고구려 도시 문명권의 힘이 여전히 요 금시기에도
지대한 영향력을 발휘하면서 이어져 왔다는 것이죠.>
특히나 금나라가 북경에 중도를 건립하면서 본격적으로 북경은 북방 민족의
중심 도시로 성장하기 시작했고 이후 몽골의 원 그리고 명에서 다
시 일어난 후금 정복왕조 청에 의해 대륙을 주무르는 핵심
정치 도시화 되면서 지금의 짱궈의 수도가 됩니다.
금나라시기 이 중도 설계와 주도를 한 인물이 다름 아닌 고구려의 후예인
장호라는 인물로 이 역시 금나라의 국무총리까지 역임할 정도로 행정과 도
시문명에 중축적 역할을 담당한 인물입니다.
(금사(金史)’ 장호(張浩)열전은 ‘장호의 자(字)는 호연(浩然)으로서 요양발
해인(遼陽渤海人)이다’라며 ‘본래 성은 고씨로 동명왕의 후예(東明王之
後)’라고 기록하고 있으며 금나라 해릉왕(海陵王)과 세종(世宗) 2대에 걸쳐
상서우승(尙書右丞) 등 최고위 관직에 있던 사람임)
중도 건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