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 강단 사학계의 한사군지도>
아래 반인간님께서 올리신 지도를 봤는데.. 저랑 의견이 다른부분이 많습니다.. 그 중 한사군 문제 먼저 토론해보고 싶네요.
일단 삼국사기의 동천왕기의 기록입니다
紐由入魏軍詐降曰 寡君獲罪於大國 逃至海濱 措躬無地 將以請降於陣前 歸死司寇 先遣小臣 致不腆之物 爲從者羞 魏將聞之 將受其降 紐由隱刀食器 進前 拔刀刺魏將胸 與之俱死 魏軍遂亂 王分軍爲三道 急擊之 魏軍擾亂不能陳 遂自樂浪而退
유유가 위군에 들어가 거짓으로 항복하며 말했다. "우리임금이 대국에 죄를 얻어서 도망쳐 바닷가에 이르렀으나 몸 둘 땅이 없습니다. 장차 진 앞에 나와 항복을 청하고 사구께 목숨을 맡기려고 먼저 저를 보내 변변치 못한 음식을 가지고 와서 부하들에게 먹이려 합니다. 위나라 장수가 그 말을 듣고 그 항복을 받으려 하였다.유유는 식기에 칼을 감추어 가지고 앞으로 나아가서 칼을 뽑아 위나라 장수의 가슴을 찌르고 그와 함께 죽었다. 위나라 군사는 마침내 혼란에 빠졌다. 임금은 군사를 세 길로 나누어 그들을 갑자기 공격하니, 위나라 군사는 동요하며 진을 이루지 못하고 마침내 낙랑을 거쳐 물러갔다.
여기서 굵게 표시한 부분이 문제가 되는 부분입니다. 만약 반인간님 지도처럼 낙랑군이 평양에 있었다면 이는 불가능합니다. 아니 말이 안되는 소리죠.. 지도를 한번 보십시오. 위 말대로 위나라 군사들이 유주(북경)을 거쳐 고구려를 치다가 퇴각을 했다면 위나라가 있는 서쪽으로 가야지 뭐하러 한반도 남쪽 깊숙히 평양까지 들어갑니까? 설사 가정을 해서 위나라의 군사들이 한반도 깊숙히 평양까지 가서 배를 타고 위나라로 이동했다고 하더래도 그런 기록은 없으며 퇴각하는 마당에 그 많은 군사들을 태울 배는 또 어디서 구할지...
다음은 삼국사기 중천왕조의 기록입니다
四年 夏四月 王以貫那夫人置革囊 投之西海 貫那夫人 顔色佳麗 髮長九尺 王愛之 將立以爲小后 王后椽氏 恐其專寵 乃言於王曰
4년 여름 4월, 임금이 관나부인(貫那夫人)을 가죽 주머니에 넣어 서해로 던져버렸다. 관나부인은 얼굴이 아름답고 머리카락의 길이가 아홉 자나 되었다. 임금이 그녀를 사랑하여 장차 소후(小后)를 삼으려 하자 왕후 연씨는 그녀가 임금의 사랑을 독차지할 것을 걱정해 임금에게 말하였다
위에 지도나 반인간님의 지도처럼 한사군이 한반도에 있었다면 고구려에는 한사군에 막혀 서해가 있을 수 없습니다. 뭐 위나라 병사들이 관나부인을 던지는 걸 가만히 보고 있을리도 없고;;
그리고 후한서 동이열전 부여국전의 기록입니다
至安帝永初五年, 夫餘王始將步騎七八千人寇鈔樂浪 殺傷吏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