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 5월) 갑자일에 거란에서 오윤판관 야율골타를 파견하여 동북 여진으로 가는 길을 빌려달라 하였으나 이를 승인하지 않았다.
-고려사 5권, 현종 17년
(원풍 5년) '선조 시기에는 여진이 등주에 와서 항상 말을 팔았는데, 뒤에 마행도가 고려에 속하게 되어 막혀서 끊겨 오래도록 오지 않았다고 들었다.
지금 조정이 고려와 왕래를 하는 데, (고려)왕에게 조서를 내려 여진이 만일 중국에 말을 팔고자 하는 자가 있으면, 마땅히 길을 허락하도록 하겠다.'라는 조서를 내렸다. 그러나 끝내 여진의 사신은 오지 않았다.
-속자치통감장편
-------------------------------
요나라와 송나라가 고려에 막혀 여진과 교류를 하지 못한 기록들입니다
요, 송이 여진과 교류를 하려면 고려가 길을 내줘야만 가능했다는 거죠
만일, 위 게시글에 올려진 이미지대로 고려가 한반도도 다 장악하지 못했다면, 어떻게 이게 가능했을 까요?
동북면병마사가 다음과 같이 건의했다.
“삼산·대란·지즐 등 9개 촌락 및 소을포촌의 번장 염한과 소지즐의 전리 번장 아반이와 대지즐의 여나기나오, 안무이주의 골아이 번장 소은두 등 1238호가 와서 호적에 편입시켜 달라고 요청해 왔습니다. 대지즐로부터 소지즐 요응포 해변까지는 700 리에 걸쳐 장성이 수축되어 있으며 지금 오랑캐들이 줄을 이어 귀부해오고 있는 마당에 관방을 설치하여 그들을 막아서는 안 됩니다. 해당 관리로 하여금 주(州)의 명칭을 정해 보고하게 한 후 밀봉한 공문을 내려 주십시오.”
왕이 이를 허락했다.
-《고려사》, 문종 27년 6월
한림원에서,
“동여진의 대란 등 11개 촌락에서 귀부해온 자들이 자기들의 거주 지역을 빈주·이주·복주·항주·서주·습주·민주·대주·경주·부주·완주 등 11개 주로 정해줄 것을 요청해 왔으니 그들에게 각각 밀봉된 공문을 내려 귀주와 순주에 소속시켜 주십시오.”
라고 건의하자 왕이 이를 허락했다.
-《고려사》, 문종 27년 9월
서북면 병마사가 아뢰기를,
"서여진의 추장 만두불 등이 동번(동여진)의 예에 의하여 주•군을 나누어 설치해 달라고 청하며
평로진 근처의 유원 장군 골어부 및 멱해촌의 요결 등 역시 부적하여 영원히 번병이 되겠다고 원하므로 호수가 35호이고 인구가 252명입니다. 청컨대 판도에 등재하소서."
-《동국통감》, 문종 27년 5월
동북면 병마사가 아뢰기를,
"삼산, 대란, 지즐 등의 마을 번장이 1238호를 가지고 와서 부적해주기를 청하니, 청컨대 유사로 하여금 주호를 아뢰어 정하게 하고 또 주기를 내리소서."
-《동국통감》, 문종 27년 6월
서북면 병마사가 아뢰기를,
"장성 밖에 개간한 전답 11494 경은 청컨대 가을 수확을 기다려 군량에 보태게 하소서."
하니, 제가하였다.
-《동국통감》, 문종 27년 2월
-----------------------------
문종 27년 기록만 국한해도 자료가 넘쳐나는 군요
고려는 앞서 요나라와 3번에 걸친 대전에모두 승리하고 위상이 높아지자,
이렇게 기록에서 보이듯 여진이 서로 앞다투어 고려의 행정구역에 들어갑니다
즉, 당시 여진의 영토에 고려가 주, 군, 현을 설치한 것으로 영토가 확장된 것이죠
또 현 사학계 주장하는 고려 영토가 틀렸다는 걸 입증하는 증거가 바로, 문종 27년 2월의 기록이죠
여기서 장성은 천리장성을 의미하고, 사학계는 이 당시 고려 영토는 천리 장성 이남으로 가르치는데
정작 기록에서는 천리장성 밖에 이미 논과 밭을 개간하여 농사를 짓고 있었습니다
개간을 하여 농사를 짓고 경제활동을 할 정도라면 이미 오래전에 영토화한 것인데 현 사학계의 주장으로는 전혀 설명할 수가 없죠
왕건은 옛날 진(秦 BC.221∼207년)나라 때 무군(武軍)의 권력을 가진 종가집 자손이다. 왕건의 조상은 진(秦)나라 때부터 군인 집안으로서 선조들은 채주(蔡州)에서 살았다고 되어있다. 지금의 채주는 중국고금지명대사전(中國古今地名大辭典) 본문 1195쪽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한(漢 BC.206∼AD.220년)나라 때 여남군(汝南郡) 땅이다. 남조(南趙 AD.420∼589년)시 송(宋 AD.420∼479년)나라가 여주라 했다. 그러나 수(隋 AD.589∼618년)나라는 채주라 했으며 당(唐 AD.618∼907년)나라가 다시 찾아 여주라 했다가 다시 고쳐 채주라 했다. 금(金 AD.1115∼1234년)나라 때는 채주를 진남군이라 했는데, 원(元 AD.1206∼1368년)나라는 채주라 하다가 승격시켜서 여령부라고 했다. 이곳은 지금 하남성 여남현이다. 서위(西魏 AD.535∼556년) 때는 남옹주(南雍州)라 하여 두었으나 수나라가 폐지시켰다. 그곳은 옛날 호북성(湖北省) 조양현(棗陽縣) 서북이라고 적고 있다.
왕건(王建)의 출생지는 구오대사(舊五代史)에서 밝힌 것을 보면 진주(陳州) 항성(項城)이다. 여기서 진주 항성이란 땅 이름 자체가 한국땅이 아니다. 그럼 진주 항성이 어디인지 살펴보기로 한다. 진주는 춘추전국시대 때 진(陳)나라이다. 특히 북주(北周 AD.557∼581년) 나라가 있었던 곳이다.
진주는 현재 중국 대륙에 있는 하남성 항성현 동북이다. 정확하게 말하면 양현(陽縣)이다. 양현은 희양군이자 진주부(陳州府)라고 한다. 진주는 하남성 낙양에서 동쪽으로 산동성 접경지대에 있는 개봉(開封)시 남쪽에 자리하고 있다.
왕건이 자랄 때 이름은 우충(于忠)이다. 왕건의 자는 약천(若天)이라고, 고려사(高麗史) 열전(列傳)에 기록돼 있다. 왕건은 송악군 사람이라고 되어있다. 왕건(王建)이 태어난 고향이 진주 항성현이고, 도읍한 곳은 송악군이다. 송악군은 오늘날 중국의 성도(成都)이다.
(원풍 5년) '선조 시기에는 여진이 등주에 와서 항상 말을 팔았는데, 뒤에 마행도가 고려에 속하게 되어 막혀서 끊겨 오래도록 오지 않았다고 들었다. 지금 조정이 고려와 왕래를 하는 데, (고려)왕에게 조서를 내려 여진이 만일 중국에 말을 팔고자 하는 자가 있으면, 마땅히 길을 허락하도록 하겠다.'라는 조서를 내렸다. 그러나 끝내 여진의 사신은 오지 않았다. -속자치통감-
최영(崔瑩)…1354년(공민왕 3)에 중국 산동(山東) 고우(高郵)에서 반란을 일으킨 장사성(張士誠)을 치기 위하여 원(元)나라에서 원병을 요청하자 그는 대호군(大護軍)으로서…정병(精兵) 2천명을 인솔, 그 선봉이 되어 적을 거의 전멸시켜 그 용명(勇名)을 대륙에 떨쳤다.
고우는 산동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 강소성 고우호(高郵湖)에 면해 있습니다.
장사성(張士誠)의 난(亂)을 통해본 고려의 위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