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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월 27일 (토)

임진왜란에 대한 과거 역사 교육자들의 친일 사관...

북창 조회 : 1,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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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댓글 보다가 깨달았는데요...
저 학교 다닐때였는지...아니면 티비였는지 기억은 잘 안나지만...
임진왜란을 평가하면서 하는 말이 항상...
전국시대를 평정한 일본이 증가한 군인들로 인한 불만을 외부로 돌려
나라를 안정시키고자 한 방책이었다...
뭐 이런식으로 평가를 하곤 했었던 거 같은데...

댓글 중에 어떤 사람이...말도 안되는 소리다라며...
임진왜란으로 결국...일본 정부가 망했다...수나라가 망하고 당나라가 들어섰듯이...
일본도 전 정권이 망하고 다른 정권이 들어선 케이스와 같다라는데...
설득력이 있네요? ㅎㅎ

히데요시가 자기 정권 공고히 하려고 내부 불만을 외부로 돌리려 했으면...
자기 수족은 놔두고 이에야스쪽 수하들로 하여금 공격하게 했어야 하는데...
자기 수족 자르면서 공격했죠.
한마디로...내부 불만 어쩌고는 애초에 말이 안된다는 거...

왠지 전쟁 패배의 의미를 축소하고 싶은 친일 사관의 연장선이 아니었을지? 란 생각이 불연듯 들었네요.


가로수길 21-01-30 12:26
역사에 정답은 없겠지만 대체적으로 주류쪽 이론은 있다고 봅니다. 그런측면에서 기존의 해석이 옳다고 보는데 그예로 풍신수길이 내건 명분자체가 정명가도였다는것이죠, 일본의 주류쪽 해석은 소서행장이 조선과 왜 사이에서 농간을 부리다 발생했다는게 그 주된 이유지만 학교에서 배운것이 과히 틀리다고는 할수 없다고 봅니다.

또 하나 역사를 관찰하려면 그 이름에서 알수 있듯이 임진왜란, 7년전쟁, 도자기전쟁이라고 하는데 저는 도자기전쟁에 큰 의미가 있다고 봅니다.
일본이 도자기를 통해 큰 부를 축적했고 이로인해 메이지유신으로 발전했다고 보는 입장입니다.
mymiky 21-01-30 12:31
사실 정명가도는 도요토미의 명분이 아니라

대마도 영주가 돌려서 말한 것임

곧이곧대로 ㅡ 조선왕은 일본와서 입조하고 명나라 공격하는데 협조하라 하면

조선왕한테 대마도 영주 자기목이 잘릴테니ㅡ 좀더 윤색해서 돌려 말한게

정명가도ㅡ 중국치는데 조선이 길좀 빌려달라고 한거
가로수길 21-01-30 12:33
그게 제가 언급한 소서행장의 농간이란 말임
칼까마귀 21-01-30 12:26
전국 통일 그리고 침략 전쟁
긴 전쟁 그리고는 히데요시 사망
이후 기회를 노리던 이에야스 정권 찬탈
이러한 것이 맞죠.

그리고 조선과 우호적인 관계 노선
mymiky 21-01-30 12:28
그렇진 않음

도요토미는 조선을 쉽게 먹을줄 알았고

일부로 자기 측근들에게 군공을 쌓을 기회를 주려고 보낸것임

결과적으로 쪽박찼지만ㅡ 그건 나중의 일이고

당시는 자기부하들에게 힘을 실어줄 목적이였죠

조선에 가서 영지도 더 확보하구요
하얀그림… 21-01-30 12:30
조선만  정권이  유지되고
명과 히데요시 둘다 망함
선조 대단한 ㅅ끼
진빠 21-01-30 12:49
듣고보니 그게 그러네요.

정권은 조선만 유지...

백성은 조선만 희생...
ultrakiki 21-01-30 12:31
이에야스 측근 부하들을 무슨수로 움직입니까 ?

실질적으로 이에야스는 히데요시의 부하도 아니였으며

조선을 쉽게 보고 먹어서 세를 불리려는 여러모로 계산된 정치적 노림수 전쟁이였습니다.

만약 조선이란 나라를 꺽으면 그 여세를 몰아서 이에야스까지 억눌렀을것은 자명한것이구요.


조선의 힘은 히데요시 망상속 계산보다 월등히 강했습니다.
북창 21-01-30 12:44
보통 전쟁을 하게 되면...호족에게 병사 내놓으라고 하듯이...이에야스쪽에도 병사 내놓으라고 하는 게  당연한 게 아닌가요?
뭐 조선을 쉽게 봤다는 건...그냥 우물안 개구리여서 그렇더라도...일단 이순신에게 막혀서 뜻대로 안되겠다 싶었으면...그 때라도 이에야스에게 병력을 요청해야 하는데...그런게 없었잖아요...
불과 반 년도 안되서 조선을 쉽게 볼 수 없는 상황이 연출되었는데도...자기 군사만 꼴아박고...정적 군사는 손실이 없으니...내부 불만을 외부로 돌렸다기 보다는...그냥 자기의 정복욕이 표출된 거다라고 평가해야 더 타당하지 않을까요?
ultrakiki 21-01-30 13:03
아뇨 내놓으란다고 내놓는것이 더 말이 안되죠.

걔들 국가 개념을 다른 나라의 개념하고 달라요

고대 이전의 세력개념과 비슷합니다. 그것을 이해를 못하시니까 그런 말슴을 하시는거에요


예를 들면 한나라 말기 3국지로 예를 들면

위나라가 고구려를 쳤을때 촉나라와 오나라에 병력을 요청 하던가요 ?

그거랑 비슷한 상황입니다.
북창 21-01-30 13:59
일본사따위 잘 모르지만....
말씀하신대로면...통일이 아니지 않나요?
일뽕감별… 21-01-30 14:57
애초 풍신이 덕천을 전쟁으로 이긴게 아닌
외교(여동생 혼인,엄마 인질)로 들인거라....
물론 덕천도 대세를 알았기에...
뭐~병력 차출 요청은 했는데 덕천이 당시 영지 변경으로 인한
반란 진압,영지 개간 등 이유,핑계로 직접적인 조선에 병력은 안보냄
sunnylee 21-01-30 12:32
내부 불만보단.... 통일후에도 ..100년간의 내전으로 다져진..
지방제후의 무력을 조절하기위한 정치적 권력유지  요소가  더 큰이유...(반란방지)
물론.. 무력을 바탕으로 전국 통일한. 토요코미의  내륙진출 야심도 컸고..
진실게임 21-01-30 12:32
원래는 중국까지 먹으려고 했으니까... 불만 처리보다는 싸우면 이긴다고 생각했던 거겠죠.

오랜 전란으로 단련된 수십만의 군대가 조총까지 무장하고 있으니까...

기마민족의 무서움이나 대포, 큰 배와 같은 기술적 차이는 생각을 못하고...
ultrakiki 21-01-30 12:34
솔직히 말해서 끝자락에 있는 우물안 원숭이 놈들이

세상밖을 본적이 없었으니까요.
mymiky 21-01-30 12:34
중국까지가 아니라 인도까지임 ㅋㅋㅋ

그 당시 일본은 포르투칼 상인들한테 총을 들여와서

서양에 대해 알고 있긴함
mymiky 21-01-30 12:38
도요토미가 편지를 보내

자기는 태양의 아들이다 한 나라가 조선만이 아님

멀리 필리핀부터 인도까지ㅡ  국서가 갔음

포르투칼 식민지  상인들이 가져왔죠 ㅡ 일본에 항복하란 망상의 편지로 보아

도요토미는 자기가 할수 있는한 세계정복을 꿈꾸었는지도 몰라요;;;
그냥해봐 21-01-30 12:34
토요토미가 전국통일은 했지만 명분과 기반이 약했던건 사실
가만있으면 숙청 당할께 뻔하기도 했기에
조선으로 그 칼을 돌린건 충분히 신빙성있음
북창 21-01-30 12:45
상식적으로 그런 상황이면...자기 병력을 보내지는 않겠죠. 정적들의 병력을 보내야 하는 게 아닐까요?
그냥해봐 21-01-30 13:03
일단 실직적인 통일 기반은 오다 노부나가가 닦아논 것이고
중간에 쿠테타로 살해당한후 그 휘하에 있던 도요토미가
통일이라는 업적을 반 어부지리 형태로 이룬것
통일 시키는 과정에서 이미 정적은 다 제거된 상황이였고
100년간 전쟁만 하던 쇼군들이 자신만 바라보고있는데
이걸 가만 두면 알아서 흩어져 농사짓고 살 분위기가 아니였던 것이였죠
어부지리 통일이라는 설과 신분도 귀족출신이 아니였던 도요토미 입장에선
확실히 쇼군들의 눈을 돌릴 뭔가가 있어야만 했음
 
실제 명나라를 칠 생각이 있었는가 하는 의구심도 듬
명나라 사신과 강화협정 논의도 있었던걸 보면
실제적으로 권력기반 안정을 위한 침략 전쟁에 무게가 충분히 실림
ultrakiki 21-01-30 13:05
정적이 왜 병력을 내놔요 ??? 걔들 목숨줄인데....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히데요시가 내놔 하면 내놓는 그런 위치가 아니였어요.

다른나라 집권세력이 통일한것과는 달라요.
굿잡스 21-01-30 13:01
임진왜란 시기에 토왜사관  중

무슨 왜는 부유 조선은 가난 어쩌고가 제일 대표적

뻘소리군요.

전국시대 쨉에서 미화 덕질 쳐하는  대표적

자치 상업 최대 도시 어쩌고가 오사카 일대 사카이인데( 세계 최대 전방후원분인 인덕왕릉이 있는 곳 고구려 일대에 원형이 이미 발견등에 우리쪽 유물도 나옴)

이게 환호로 둘러싸여 도시규모를 비교적 정확히 알 수 있는 유적지로 끽해야 1만 정도군요(당시 중세 유럽도시와 비교하면 작지 않은 규모지만)  그리고 수도인 교토 조차

시가지가 동아시아 기준에선 협소한 규모.


여기에 비해 당시 근세 조선시대

조선에서는 벽지같은 먼 국경 일대 의주도

1만 이상의 도시 규모에 (후기 만상의 주근거지)

한양 개성 평양등 아래  8번째에 위치

(이것도 조선시대에 오면 이전의 도시 과밀 집중에서 향촌 자치분산형 정치 도시 성격으로 바뀐 상황에서)

조선은 군현에서 일부  남은 흔적과 기록에서 확인되는 읍성(행정 타운 중소도시)만

해도 전국적으로 190여개에 이르군요(괜히 근세 조선을  선진 중앙집권 체재로 말하는게 아님)


왜는 본인들 미화하는 그나마 일부 중요 도시 빼고는

지방 향촌으로 가면 더 열악 문명의 혜택을 거의 못받던 개돼지급이 수두둑.
굿잡스 21-01-30 13:04
그리고 세계사적으로 보면 조선의 조세나 부역등은 동시대 주변국이나 서구등과 비교해도 나쁘지는(가혹) 않았군요.

(무엇보다 백성들이 기근등 힘든 시기에 지원하는 환곡제도는 세계적 수준)


조선왕조는 세계 최대 곡물저장 국가


건국 초기부터 쌀을 비롯한 각종 곡물을 저장해 전쟁과 기근에 대비하였는데, 평상시에도 봄마다 민간에 대여한 후에 가을에 이자를 더하여 환수하였다. 다름 아닌 환곡(還穀)제도다. 대략 30%는 창고에 남겨두고 70%를 민간에 대여하였으며 10%의 이자를 수취하였다. 본래는 이자 수입을 위한 것은 아니었으며 곡물을 오래 저장하면 변질되고 쥐가 먹거나 하여 축이 나기 때문이었다.

조선전기에는 태종 후반기부터 저장한 곡물의 규모가 증가하기 시작해 세종대부터 세조 전반기까지 가장 큰 규모를 유지하였다. 세종 5년(1423)에는 매년 대부하고 환수할 수 있는 의창(義倉)의 곡물이 100만석이 넘었으며 세종 27년(1445)에는 270만여석이 분배됐다. 세조 후반기부터 16세기에는 환곡이 감소해 임진왜란으로 바닥에 이르렀지만 17세기 후반인 숙종 대부터 다시 늘어나기 시작하여 18세기 초에는 500만석, 18세기 후반에는 최고 수준인 1000만석에 이르게 되었다.


https://www.google.co.kr/amp/s/www.hankyung.com/news/amp/2014071128611
굿잡스 21-01-30 13:07
이 나라는 풍요하여 많은 쌀과 보리가 나고, 과일로는 배, 호두, 무화과, 밤, 사과, 잣, 
그리고 무진장한 꿀, 약간의 비단, 다량의 면화와 베를 생산하고 있다. 지하자원으로는 금과 은 광산은 적다고 한다. 하지만 많은 말과 소, 양질의 노새, 당나귀, 게다가 전 국토에 걸쳐 수많은 호랑이가 서식하고, 그 밖에 갖가지 다양한 동물이 있다. 그들이 만든 공작품은 정교하고 아름다워서 그들이 솜씨가 좋다는 사실을 말해 주고 있다. 사람들은 피부색이 하얗고 건강하고 대식가들이며 힘이 세다. 그들은 터키 인의 활과 같은 작은 활을 매우 잘 다루고, 독을 바른 화살을 사용한다고 한다. 


역대의 조선 국왕들은 가장 훌륭하고 중요한 도시에 큰 궁전을 지었는데, 그곳에 수많은 가신을 거느린 관청이 있었다. 서민들의 집은 대부분 기와지붕이며, 

그 밖에는 초가지붕으로 그다지 청결하지는 않다. 그렇지만 귀인과 부호들은 결이 고운 식물로 짠, 정교한 장식이 있는 극히 질 좋고 광택이 나는 돗자리를 

집안에 깔고 있는데, 일본인이나 일본에 오는 포르투갈 인들은 그것을 매우 진귀하게 여겼다. 


우리는 나가사키에서 조선으로부터 들여온 몇 벌의 백의를 보았는데, 그 옷에는 더할 나위 없이 섬세하게 공을 들인 자수를 해 놓았다. 그것은 어떤 부분은 짠 것인지 

아니면 실과 바늘로 꿰맨 것인지 여간한 시력이 아니고서는 구별이 불가능 할 정도였다. 

이상의 내용들이 조선을 여러 차례 방문했던 사람들을 통해 관백의 궁정이 조선에 대해 입수했던 정보의 요약이다.

ㅡ 루이스 프로이스(Luis Frois, 1532~1597년)의 일본사(Historia de Japam)-

[개성은] 봄바람에 술집 깃발이 나부끼고, 달밤에 음악소리 들린다.그 민물(民物)은 풍성하여 실로 다른 고을에 비길 것이 아니고, 풍기(風氣)는 밀집하니 또한 서경(평양)에 견줄 바가 아니다.


[서울은] 트인 길과 통한 거리는 바르고 곧아서 구부러짐이 없고, 잘라낸 듯한 처마에 우뚝 빛나는 집이다.

모든 집은 높은 담이 있어서 바람과 불을 막고,

방마다 북쪽 창을 뚫어 더위를 피한다.


[서울에는] 종고라는 다락이 있다. 성 안의 네거리에 있는데 매우 높고 크다.

서울 안에 우뚝 솟았고, 길가에 높고 높도다.
시끌벅적 수레와 말 소리가 울리고,  끝없이 어룡 유희가 나온다.

식기는 금, 은, 동, 자를 섞어서 쓰고, 품물(品物)은 바다와 육지의 진기한 것이 고루 많다.

경기 안의 경치로는 한강이 제일이다.
누대는 높아 구름을 막고, 물은 푸르러 거울처럼 비춘다.

나루로는 양화도가 있는데, 물산(物産)이 또한 번성하다.

활은 중국의 제도에 비하면 조금 짧다. 그러나 화살은 매우 잘 나간다.

 -명(明)의 동월(董越)이 1488년의 조선을 보고 1490년에 쓴 조선부[朝鮮賦]-

http://www.gasengi.com/main/board.php?bo_table=EastAsia&wr_id=136980����

※운산금광등 세계적 금광등이 있었지만 당시는 무분별한 채광을 자제시킴.
굿잡스 21-01-30 13:10
황태연 교수     
동국대학교 정치외교학과     

1800년까지 중국 또는 동아시아의 1인당 국민 소득은 영국과 유럽을 앞질렀다. 그렇다면 조선은?     

◇ 숙련노동자의 실질임금 비교     


- 조선(1780~1809): 쌀 8.2kg     
- 밀라노(1750~1759): 빵 6.3kg     
- 런던(1750~1959): 빵 8.13kg     

◇ 경작면적기준 총요소생산성 비교(1800년)     


잉글랜드 100, 조선 134, 중국(강소성, 절강성) 191.     
중국전체의 평균 총요소생산성은 191 이하일 것이나 이 역시 잉글랜드보다 高.     

◇ 1인당 GDP 비교(조선 vs. 중국)     


1820년 1인당 GDP - 중국: 600달러, 조선: 600달러     
┃중국의 1인당 GDP 추이     
- 인구의 비약적 증가로 인해 1500년부터 320년간 600달러 수준.     
- 1870년 530달러로 추락.     
- 1920~30년대 550달러대에서 등락을 반복.     
┃조선의 1인당 GDP 추이     
- 1870년 604달러로 반등     
- 1911년 777달러(아시아 2위)     
  
조선의 생활수준은 16세기말부터 상승하여 18세기 영·정조시대(1724~1800)에 정점을 기록한 후 하락.     
- 16~17세기에는 중국보다 낮을 수 있으나 18세기 중국을 추월.     
- 19세기(1820년)에는 다시 중국과 비슷한 수준.     

◇ 조선의 교육복지     


┃세종치세(재위 1418~50) 이후 18세기까지 지방향교, 사학(四學), 성균관 등 모든 유생들에게 무상교육, 무상숙식, 학비지급, 학전(學田)지급, 면세 및 요역면제.     
 - "가르침에는 차별이 없다"는 「논어」의 유교무류(有敎無類)의 원칙에 따른 것.
굿잡스 21-01-30 13:14
도시문명과 규모 인프라 선진 사회제도등 역사를 훈도시 차고 칼질이나 쳐하던 인간백정 동아시아의 알카에다급의 섬나라 왜를 우리와 비교하는게 뻘소리급이군요.

조선시대에 와서 이전의 삼국 남북 중세 고려의 황도 집중 과밀 도시화보다

향촌 자치 분산형으로 조선의 정치 도시 구조가 바뀌었다고 해도 이런 기존의 유구한 도시문명과 인프라를 이어 받은 근세 조선을 무슨 무식한 쨉빠들이  툭하며 과장되게 헛소리질 하면서 비교 어쩌고는 한심할 지경.


이미 삼국시대 우리는 유럽 최대 로마에 비견되는 고구려 3경에 백제 사비성 신라 서라벌의 5개 이상의 대도시문명을 구축.

남북국시대에는 서라벌을 중심으로 9주 5소경에

발해는 5경 체재로


중세 고려(KOREA)는 5,60만의 수도인 거대 대도시인 개경을 중심으로 동격의 서경(평양)과 전통적 100만의 거대 서라벌을 동경으로 서울인 남경의 유럽 최대도시라는 로마 이상의 대도시들을 거닐고 있었고

이건 당시 중세 영국이나 프랑스 Jap같은 나라는 꿈도 못꾸던 도시규모였군요.(도시규모가 크다는 말은 그만큼 소비지향적 도시의 특성상 도시내 상업 규모나 활동 부동산 가격(GDP)등도 고대나 현대나 높다는 의미)


영국 론디니움(런던 고대도시명)과 신라 서라벌의 도시규모

http://www.gasengi.com/main/board.php?bo_table=commu05&wr_id=833564

유럽 최대 도시라는 로마보다 더 컸던 세계 4대 대도시 중 하나였던 100만의 거대 신라 서라벌.

서라벌은 바둑판 형태의 정렬된 계획도시 아래

일정 블럭의 방이라는 각구역내 공간에는 각 집안내 우물 옆에 배수로가 집밖 담장의 소배수로를 통해 다시 대배수로 연결되어 있는게 확인되군요(길도 마차가 단니는 도로와 사람이 단니는 인도가 구분)

천년의 신라 수도였던 서라벌은 남북국시대 전성기를 맞으며 지금의 수도 서울 광역시(거대 메트로 폴리탄)처럼 지속적으로 팽창.

https://m.blog.naver.com/PostView.nhn?blogId=eunayoon715&logNo=220882810189&proxyReferer=https:%2F%2F


서라벌 디지털 복원

http://www.gasengi.com/main/board.php?bo_table=commu07&wr_id=2096873
ashuie 21-01-30 13:54
한국드라마에서처럼 이에야스를 턱으로 부리는 히데요시, 뭐 그런건 없었어요.
무엇보다 전쟁을해서 지고 산하로 들어간 관계도 아니었으며
이에야스가 한거라곤 전날밤 먼저만난 히데요시의 간곡한 요청에 의해
다음날 모두가 보는 앞에서 고개를 숙여 히데요시를 존중해준 정도고.
히데요시의 가신, 이에야스? 이렇게 표현하기에는 당시의 정황은 많이 달랐어요.
당연히 자신의 수족이 아닌 이에야스를 타국전쟁에 동원시킬수도 없었구요.
다음세대에 전해지는 그런말이 아니라 히데요시 집권당대에서조차
농삿꾼 천민출신인 히데요시는 명문귀족인 이에야스에 비해 온갖 멸시를 받았던게 현실입니다.
더구나 이에야스의 힘을 줄인다고 몇대에 걸쳐 통치하던 미카와땅을 빼앗고
더 넓지만 개발이 전혀안되 빈땅으로 남아있던 간토(도쿄)로 봉지를 전봉한 직후라
미친듯이 땅개간하고 성쌓고 해야하는 그때 이에야스에게 병력을 차출했다면
그건 대놓고 반란하라고 부추기는 꼴이었을 겁니다. 안그래도 이에야스측의 불만이 폭발하던 시기였으니까요.

다시 정리해서 히데요시의 일본통일은 한국이나 중국처럼 절대왕정에 의한 통일 같은게 아니었다.
가장 비슷한 사례를 꼽자면 신성로마제국의 선출황제자리랑 히데요시의 위치가 그나마 가장 비슷.
전란이 끝나고 각 영주들을 분봉했지만 당시 히데요시에 불만을 품은 세력은 전국에 퍼짐.
일방적 부하관계가 아닌 2인자인 이에야스를 간토로 전봉시킨 직후라
다시 병마를 부탁하기에는 히데요시 입장이 난처했음.
병을 차출할수 없자 이에야스에게 부탁해 병량과 무기를 대게함.
그리고 임진왜란기간동안 간토를 잘 개발한 이에야스측은 250만석 이상의 전국최대세력으로 발돋음함.
북창 21-01-30 16:37
이해하기가 좀 힘드네요.
봉토를 후진 지역으로 정해줄 정도면...절대 권력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은지...
그리고...전쟁 기간 내내...히데요시는 거의 절대 권력이었던 거 같은데...
그러니...죽자마자 바로 전쟁이 끝나죠...

절대 권력이 아니라 선출직 비스무리한 거라면...어찌 그리 무모한 전쟁을 지속할 수 있었을까요?
참...왜구들은 이러니 이해안되는 갈라파고스 인간들이라고 하지...
운드르 21-01-30 13:55
히데요시가 이에야스한테 너도 병력 내라고 하긴 했습니다.
근데 이에야스가 이 핑계 저 핑계 대면서 미적거렸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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