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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월 27일 (토)

임진왜란 때 조선이 가난했다고??

Assa 조회 : 1,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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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XjBq_QMzQck

임진왜란때 조선이 가난하여 왜군이 현지 조달을 못했다는 이야기가 통설 처럼 받아들여졌는데 우연히  이 영상을 보니 그 관념이 깨지는것 같아요 한번 보시길 권합니다

별명11 21-01-19 00:33
선조 개객끼..
선조 먹여살리려
전쟁하면서 농사지은 이순신  장군..염병.
채리우스 21-01-19 00:43
선조랑 원균 부관참시하고 싶음...
쌈바클럽 21-01-19 00:43
가난하다 자체가 추상적인 표현인지라 해당 영상에서도 나왔듯이 일본군이 털어먹었어도 충분치 않아 군량공급에 애를 먹었다고 표현되어 있는데요. '가난하다' 는 말이 중요한게 아니라 사실은 일본군이 군량보급에 애를 먹었던 점이 더 중요하겠죠.

이 부분은 조선을 가난했다고 표현하는 분이나 그렇지 않은 분이나 결론이 마찬가지니까요. 그리고 설민석 같은 경우는 워낙 감정에 호소하는 스타일이라 '가난했다'는 말을 어떤식으로 표현했을지 대강은 그려집니다.

그리고 세금을 걷는다는 것은 행정력이 있어야 가능한데요. 단순히 성만 차지하고 땅만 차지했다고 해서 군대가 이러한 일을 해나가기는 어렵죠. 많은 관리와 조직체계가 필요하고 시간이 많이 걸리니까요. 속전속결로 처들어온 일본군의 훗날의 포부는 어떨지 몰라도 현실적으로 군량수급은 약탈일 수 밖에 없죠.

나중에는 농사를 지어서 확보하기도 하지만요.

물론 한양을 빠르게 정복해서 왕을 사로잡으면 처음의 꿈꾸던 그런 일들을 할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고, 그걸 하기위해 상당히 빠른 진군을 했죠. 군량보급은 신경쓰지 못하고요.
그러니까 애초에 이상과 현실이 달랐는데 군량 현지 조달이라는 목표가 약탈이 아닌 징세였다고 하더라도 현실은 약탈이었을 뿐이죠.

일본군은 정복을 목표로 침략한 군대이니 당연히 현지조달이라는게 행정적으로 완벽한 점령을 생각하고 들어왔겠지만 보통의 군대가 하는 현지조달 방식은 약탈이죠. 자국 군대도 보급을 위해 자국 백성을 약탈하는 경우도 흔했는데요.
뱃살마왕 21-01-19 00:45
그래도 지켜냈다능거
ultrakiki 21-01-19 00:46
현지 조달에 문제가 많았다로 여기면 됩니다.
하늘나비… 21-01-19 00:47
조선이 못살았다는건 어불성설이라고 알고 있어요  천재지변 일 때 빼고요
booms 21-01-19 00:56
간단하게 생각해보면 자급자족이 안되어 매번 부족함에 시달린다면 쇄국정책을 할수가 없죠.
booms 21-01-19 00:54
조선인들이 가난해서 약탈할게 없었다. 이건 비약이 어느정도 있었다고해도 수십만이 밀고들어와 사회망을 망가뜨리며 털어먹는데 가난하지 않고 자원이 고갈되지 않는다면 그게더 이상한거 아닌가...

어떠한 전쟁이던간에 몽골식 섬멸, 약탈전이 아닌 통치를 원한다면 민간인들은 잘 안건드리는게 맞았음. 그래야 그들을 나중에 노예로 팔던, 노동력으로 쓰던 자원이니까...그런데 임진땐 약탈, 정유땐 학살을 저질러서 국가역량을 수십년간 일어나기 힘들게 상처를 준건 분명하지

쪽바리들은 지들이 못먹겠다하면 똥을 싸놓고 가는 만행은 일제강점기때도 똑같아.....그러면서 모르쇠하며 한적업사고 발뺌하는 역겨운 태도로 일관하는건 종특인것같음
쌈바클럽 21-01-19 01:08
맞아요. 사실 수십만 대군을 오랫동안 가만히 먹여살릴 수 있는 도시가 있기가 힘들죠. 원래 대부분의 전쟁도 보급이 승패를 좌우할 정도로 중요하고 현지 조달은 임시방편이거나 북방 오랑캐인 여진족 같은 소규모 기마부대가 쳐들어왔을때나 의미가 있지 대규묘 병력은 어딜가나 장기간 주둔하려면 후방에서 오랜기간동안 차곡차곡 준비해온 군량을 보급 받는게 중요하죠.

생각해보니까 한편으론 일본애들이 급히 진군하느라 보급선 확보를 제대로 못하고, 이순신 장군에게 바닷길이 끊긴 탓도 있겠지만 얘네들도 가만보니 병력만 넘쳐나지 군량을 넉넉하게 준비하진 못했나보네요. 현지 조달만 생각하고 온거 보면...
booms 21-01-19 01:40
반대로 말하면 우리가 너무 쉽게 뚤렸기때문에 보급선이 길어진것도 한목했을겁니다. 단기결전으로 끝내려 욕심낸거죠.

토전사에도 나왔지만 일본군들의 전투식량과 체계는 조선보다 발달한 부분이 있었습니다. 오랫동안 처 싸워대서 특화된게 있었지만 그건 일본내였던거고 한국과는 안맞았다는게 맞을겁니다.

거기다 한반도는 일본보다 춥고 기마민족들과는 다르게 보병위주니 단기간 강행돌파해도 휴식을 취해 체력을 보충하지 않으면 급격하게 기동력이 저하가 되는데 때마침 의병과 수군이 견재한게 일본으로썬 적응할수가 없었을 겁니다.
푸른마나 21-01-19 01:02
가난하다는 개념이 일반백성을 얘기하는거라고 봅니다.. 즉 양반지주들은 미곡이 넘쳐났을테고 그에 반해 일반 백성은 미곡이 없어서 굶어죽는 상황이었을테죠...

당연히 일본군이 점령하면 양반지주의 미곡도 전부 자신들이 약탈했을테니 남아돌았다고 할테고... 조선군 입장에서는 양반지주의 미곡은 제외되었을테니 군량미가 적다고 했을겁니다..

임진왜란 당시가 소작농이 절반정도였으며 소작세 1/4 에 각종 조세를 부담하다보면 산출량의 절반이상을 세금으로 냈을겁니다...그러니 일반농민들은 가난했다라고 적었을거라고 봅니다...

또 그당시 조선인과 일본인이 먹는양도 차이가 심했던이유도 있을거구요...
그당시 조선인은 지금의 한국인의 5배-10배 이상을 먹었으닌까요...
굿잡스 21-01-19 01:47
세계사적으로 보면 조선의 조세나 부역등은 동시대 주변국이나 서구등과 비교해도 나쁘지는(가혹) 않았군요.

(무엇보다 백성들이 기근등 힘든 시기에 지원하는 환곡제도는 세계적 수준)

조선왕조는 세계 최대 곡물저장 국가


건국 초기부터 쌀을 비롯한 각종 곡물을 저장해 전쟁과 기근에 대비하였는데, 평상시에도 봄마다 민간에 대여한 후에 가을에 이자를 더하여 환수하였다. 다름 아닌 환곡(還穀)제도다. 대략 30%는 창고에 남겨두고 70%를 민간에 대여하였으며 10%의 이자를 수취하였다. 본래는 이자 수입을 위한 것은 아니었으며 곡물을 오래 저장하면 변질되고 쥐가 먹거나 하여 축이 나기 때문이었다.

조선전기에는 태종 후반기부터 저장한 곡물의 규모가 증가하기 시작해 세종대부터 세조 전반기까지 가장 큰 규모를 유지하였다. 세종 5년(1423)에는 매년 대부하고 환수할 수 있는 의창(義倉)의 곡물이 100만석이 넘었으며 세종 27년(1445)에는 270만여석이 분배됐다. 세조 후반기부터 16세기에는 환곡이 감소해 임진왜란으로 바닥에 이르렀지만 17세기 후반인 숙종 대부터 다시 늘어나기 시작하여 18세기 초에는 500만석, 18세기 후반에는 최고 수준인 1000만석에 이르게 되었다.


https://www.google.co.kr/amp/s/www.hankyung.com/news/amp/2014071128611
없습니다 21-01-19 01:02
군량 구하는거 하고 가난한거하곤 핀트가 좀 틀린것같은데..
당시 조선이 부유할 수는 없는게, 아직 화폐가 사용되지 않을 정도 였거든요. 그래서 부가 축적될수가 없었죠.
명나라군이 급히 파병되느라 군량을 수송못하고 사먹을려고 은을 잔뜩 갖고왔는데 화폐가 통용안되니 사먹을수없어서 황당했었다라는 이야기가 나오죠. 그래서 명나라군 군량을 긁어 모으느라 백성들이 고생한 이야기는 다 아실테고..

나중에 명나라군이 본국으로 돌아가면서 조선조정에 강력하게 충고한것이 있는데 그게 화폐 만들어 쓰라는 이야기였죠.(근데 선조가 반대해서 무산됨)
굿잡스 21-01-19 01:24
??ㅋ

화폐 경제가 아니라 가난했다? ㅋ

에도 시대가 중후기로 가면 왜 막장이 되는 줄은 아는지?

고리대금과 화폐의 질저하로 자작농 붕괴와 고인플레이션 등으로 인해 영유아 살해등 끔찍한 마비키 풍습이 만연 여기에 가혹한 세금등.

근현대에 오면서 국제무역에 금,은 본위에서 신용 종이 화폐인 달러를 결제 수단으로 국제무역거래와 금융이 점차 발달하면서 화폐가 구실을 제대로 한거지(  이것도 허접한 나라는 초인플레이션을 수시로 겪고 있고)

근대 이전의 화폐 경제라는건 제한적.  도리어 면포나 쌀같은 실물 화폐들이 인플레이션 유발이 극 적고 실질적 가치에 부합 유용(괜히 쨉도 영주마다 몇만석 어쩌고로 각세력을 이야기 한게 아님)
굿잡스 21-01-19 01:25
이 나라는 풍요하여 많은 쌀과 보리가 나고, 과일로는 배, 호두, 무화과, 밤, 사과, 잣, 
그리고 무진장한 꿀, 약간의 비단, 다량의 면화와 베를 생산하고 있다. 지하자원으로는 금과 은 광산은 적다고 한다. 하지만 많은 말과 소, 양질의 노새, 당나귀, 게다가 전 국토에 걸쳐 수많은 호랑이가 서식하고, 그 밖에 갖가지 다양한 동물이 있다. 그들이 만든 공작품은 정교하고 아름다워서 그들이 솜씨가 좋다는 사실을 말해 주고 있다. 사람들은 피부색이 하얗고 건강하고 대식가들이며 힘이 세다. 그들은 터키 인의 활과 같은 작은 활을 매우 잘 다루고, 독을 바른 화살을 사용한다고 한다. 


역대의 조선 국왕들은 가장 훌륭하고 중요한 도시에 큰 궁전을 지었는데, 그곳에 수많은 가신을 거느린 관청이 있었다. 서민들의 집은 대부분 기와지붕이며, 

그 밖에는 초가지붕으로 그다지 청결하지는 않다. 그렇지만 귀인과 부호들은 결이 고운 식물로 짠, 정교한 장식이 있는 극히 질 좋고 광택이 나는 돗자리를 

집안에 깔고 있는데, 일본인이나 일본에 오는 포르투갈 인들은 그것을 매우 진귀하게 여겼다. 


우리는 나가사키에서 조선으로부터 들여온 몇 벌의 백의를 보았는데, 그 옷에는 더할 나위 없이 섬세하게 공을 들인 자수를 해 놓았다. 그것은 어떤 부분은 짠 것인지 

아니면 실과 바늘로 꿰맨 것인지 여간한 시력이 아니고서는 구별이 불가능 할 정도였다. 

이상의 내용들이 조선을 여러 차례 방문했던 사람들을 통해 관백의 궁정이 조선에 대해 입수했던 정보의 요약이다.

ㅡ 루이스 프로이스(Luis Frois, 1532~1597년)의 일본사(Historia de Japam)-

[개성은] 봄바람에 술집 깃발이 나부끼고, 달밤에 음악소리 들린다.그 민물(民物)은 풍성하여 실로 다른 고을에 비길 것이 아니고, 풍기(風氣)는 밀집하니 또한 서경(평양)에 견줄 바가 아니다.


[서울은] 트인 길과 통한 거리는 바르고 곧아서 구부러짐이 없고, 잘라낸 듯한 처마에 우뚝 빛나는 집이다.

모든 집은 높은 담이 있어서 바람과 불을 막고,

방마다 북쪽 창을 뚫어 더위를 피한다.


[서울에는] 종고라는 다락이 있다. 성 안의 네거리에 있는데 매우 높고 크다.

서울 안에 우뚝 솟았고, 길가에 높고 높도다.
시끌벅적 수레와 말 소리가 울리고,  끝없이 어룡 유희가 나온다.

식기는 금, 은, 동, 자를 섞어서 쓰고, 품물(品物)은 바다와 육지의 진기한 것이 고루 많다.

경기 안의 경치로는 한강이 제일이다.
누대는 높아 구름을 막고, 물은 푸르러 거울처럼 비춘다.

나루로는 양화도가 있는데, 물산(物産)이 또한 번성하다.

활은 중국의 제도에 비하면 조금 짧다. 그러나 화살은 매우 잘 나간다.

 -명(明)의 동월(董越)이 1488년의 조선을 보고 1490년에 쓴 조선부[朝鮮賦]-

http://www.gasengi.com/main/board.php?bo_table=EastAsia&wr_id=136980����

※운산금광등 세계적 금광등이 있었지만 당시는 무분별한 채광을 자제시킴.
성당턴스… 21-01-19 08:16
머저리같은 소리..화폐가 사용되지 않다니요? 위안화 지폐 가지고 와서 동네 슈퍼에서 계산하면 '아이구 중국 돈이네? 계산해줘야지' 이럽니까? 하물며 짱개가 은전을 쓰든 말든 입국했으면 환전해서 썼어야죠..그때나 지금이나 떼놈들 무식하게 우겨대는 건 여전한 가 봄..돈 받을 사람이 설사 은의 가치를 알았어도, 메이드인 짱개라 의심해서 안받는게 당연한 상식 아니겠소?
명나라 군이 본국 돌아가면서 뭐라고요? 스와핑 하자는 소리겠지..뭔 화폐가 없다는 타령이래?
사극 어디를 봐도 은전을 쓰는 걸 본 적 있소? 그 무거운 걸 뭐하러? 은전,금전이야 말로 자체가 그만한 가치이니 화폐라기 보다 현물거래 아니요?
우리가 5만원 가치도 없는 인쇄된 종이를 가지고 다니면서 통용하는 것은, 화폐가 아니겠네요?
틋두둥둥 21-01-19 01:09
여튼간 일본놈들 어떻게든 한국을 폄하할라고 말도 안되는 억측이지..국내에 식민사과 반도사관 다 걷어내버려야 나라정기가 바로선다.
알파카 21-01-19 01:14
여기서 가난하다는건
일반 백성들이 굶으며 울부짖고, 거리에 빈민들이 넘친다 X
상업의 발전이 늦어서 나라의 부가 축적되지 않고, 그에 따르는 예술, 향락등이 발달하지 못했다. O
이름귀찮… 21-01-19 01:18
가난한게 아니라 경제 시스템이 다른거조
ashuie 21-01-19 01:31
애초에 왜인보다 2~3배를 먹는 민족인데 가난하다는 전제부터가 틀림.
굿잡스 21-01-19 01:37
황태연 교수     
동국대학교 정치외교학과     

1800년까지 중국 또는 동아시아의 1인당 국민 소득은 영국과 유럽을 앞질렀다. 그렇다면 조선은?     

◇ 숙련노동자의 실질임금 비교     


- 조선(1780~1809): 쌀 8.2kg     
- 밀라노(1750~1759): 빵 6.3kg     
- 런던(1750~1959): 빵 8.13kg     

◇ 경작면적기준 총요소생산성 비교(1800년)     


잉글랜드 100, 조선 134, 중국(강소성, 절강성) 191.     
중국전체의 평균 총요소생산성은 191 이하일 것이나 이 역시 잉글랜드보다 高.     

◇ 1인당 GDP 비교(조선 vs. 중국)     


1820년 1인당 GDP - 중국: 600달러, 조선: 600달러     
┃중국의 1인당 GDP 추이     
- 인구의 비약적 증가로 인해 1500년부터 320년간 600달러 수준.     
- 1870년 530달러로 추락.     
- 1920~30년대 550달러대에서 등락을 반복.     
┃조선의 1인당 GDP 추이     
- 1870년 604달러로 반등     
- 1911년 777달러(아시아 2위)     
  
조선의 생활수준은 16세기말부터 상승하여 18세기 영·정조시대(1724~1800)에 정점을 기록한 후 하락.     
- 16~17세기에는 중국보다 낮을 수 있으나 18세기 중국을 추월.     
- 19세기(1820년)에는 다시 중국과 비슷한 수준.     

◇ 조선의 교육복지     


┃세종치세(재위 1418~50) 이후 18세기까지 지방향교, 사학(四學), 성균관 등 모든 유생들에게 무상교육, 무상숙식, 학비지급, 학전(學田)지급, 면세 및 요역면제.     
 - "가르침에는 차별이 없다"는 「논어」의 유교무류(有敎無類)의 원칙에 따른 것.
굿잡스 21-01-19 02:05
저 동영상에도 왜의 도시 규모등이 대해 언급하지만

도시문명과 규모 인프라 선진 사회제도등 역사를 훈도시 차고 칼질이나 쳐하던 인간백정 동아시아의 알카에다급의 섬나라 왜를 우리와 비교하는건 솔직히 우습군요.

조선시대에 와서 이전의 삼국 남북 중세 고려의 황도 집중 과밀 도시화보다

향촌 자치 분산형으로 조선의 정치 도시 구조가 바뀌었다고 해도 이런 기존의 유구한 도시문명과 인프라를 이어 받은 근세 조선을 무슨 무식한 쨉빠들이  과장되게 헛소리질 하면서 매번 쨉과 비교 어쩌고는 한심할 지경.

이미 삼국시대 우리는 유럽 최대 로마에 비견되는 고구려 3경에 백제 사비성 신라 서라벌의 5개 이상의 대도시문명을 구축.

남북국시대에는 서라벌을 중심으로 9주 5소경에

발해는 5경 체재로


중세 고려(KOREA)는 5,60만의 수도인 거대 대도시인 개경을 중심으로 동격의 서경(평양)과 전통적 100만의 거대 서라벌을 동경으로 서울인 남경의 유럽 최대도시라는 로마 이상의 대도시들을 거닐고 있었고

이건 당시 중세 영국이나 프랑스 Jap같은 나라는 꿈도 못꾸던 도시규모였군요.(도시규모가 크다는 말은 그만큼 소비지향적 도시의 특성상 도시내 상업 규모나 활동 부동산 가격(GDP)등도 고대나 현대나 높다는 의미)


영국 론디니움(런던 고대도시명)과 신라 서라벌의 도시규모

http://www.gasengi.com/main/board.php?bo_table=commu05&wr_id=833564

유럽 최대 도시라는 로마보다 더 컸던 세계 4대 대도시 중 하나였던 100만의 거대 신라 서라벌.

서라벌은 바둑판 형태의 정렬된 계획도시 아래

일정 블럭의 방이라는 각구역내 공간에는 각 집안내 우물 옆에 배수로가 집밖 담장의 소배수로를 통해 다시 대배수로 연결되어 있는게 확인되군요(길도 마차가 단니는 도로와 사람이 단니는 인도가 구분)

천년의 신라 수도였던 서라벌은 남북국시대 전성기를 맞으며 지금의 수도 서울 광역시(거대 메트로 폴리탄)처럼 지속적으로 팽창.

https://m.blog.naver.com/PostView.nhn?blogId=eunayoon715&logNo=220882810189&proxyReferer=https:%2F%2F


서라벌 디지털 복원

http://www.gasengi.com/main/board.php?bo_table=commu07&wr_id=20968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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