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일 1부 소개에 이어 오늘 2부입니다.
미국 ESPN에 대한민국 KBO에서 자주 볼수 있는 빠던(배트플립)에 대한 장문의 기사가 올라왔습니다.
아시는 분들은 잘 아시겠지만 미국 메이저리그에서의 빠던(배트플립)은 가장 강력한 암묵적 금기 사항중에 하나입니다.
상당히 장문의 기사라 3부로 나누어서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美 ESPN, 한국 야구 빠던(배트플립)에 대해 알아보자! 1부>
다음날, 난 다시 경기되기전 몇시간 전 경기장에 갔고
덕아웃에서 대기중인 인디애나 출신 29세 미국인 자이언츠 투수
(해당팀은 로스터에 외국인 3명을 넣을수있다) 조쉬 린드블럼을 발견했다.
그는2008년 다저스에서 세컨드 라운드 드래프트로 기용된후
몇시즌동안 메이저리그를 떠돌다 작년 한국에 왔다.
랜드블럼과 나는 라커룸 바로 밖에있는 계단통에 앉어서,
바깥의 한국여성들의 합창을 들으며 대화했다. 난 배트플립에 대해 질문했다.
"첫해에,난 공을 던지고있다고 생각하지 않았어요--
난 배트플립하는 사람 봤고 난 "저거 대체 뭐야?"라고 생각했죠."
그가 말했다. "누군가 나한테 그런거 뭐 있을수도 있다고 알려주더라구요.
'그거 가지고 열받지마. 그냥 원래 그런거야"
린드블룸은 왜 한국 타자들이 플립을 엄청 자주하는지 모른다고 말했고,
왜 누군가는 하는데 또 누구는 안하는지 모른다고 했다.
" 난 전혀 그거에 대해 이제 별다른 느낌도 없어요"
그가 말했다.
"되게 자주 일어나는 일인데, 뭐 상관없어요 난"
이틀의 돌아보기가 끝난후,
난 자이언츠와 타이거즈의 양측 선수들을 인터뷰했는데
그들중 많은 사람이 외국미디어와 거의 말해본적 없다고 했다.
타이거즈의 벤치 코치, 최규현은 전직 한국리그 투수였는데,
그는 배트플립은 전혀 그를 열받게한 행동이 아니었다고 했다.
왜냐면 선수들이 고의로 그런걸 한다 믿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자연스러운 거에요."
그가 말했다.
"선수들이 배트플립하기전에 생각할시간도 없죠;
그냥 공때릴 생각만 하는데요 뭐"
내가 한국 선수들이 배트플립하기전에 몇초동안 기다린다고 말하자 --
그는 코를 찡그리며 "그냥 습관이에요,
초등학교떄부터 그랬던걸요" 라고 답했다.
몇몇 선수들이 타격 연습을 하는동안(확실히 여기선 배트플립하는 사람이없었다),
난 덕아웃에서 기다렸다. 시간이지나고 타이거즈의 35세 선수인
김주찬이 물병을 갖고 앉았다.
난 그의 유명영상들을 봤다고 말했으며 그는 별 반응없이 어깨를 으쓱했다.
" 그건 그냥 그순간 생각하지 않고 한겁니다"
그가 말했다. "난 내가 플립하고있는지도 생각하지 못했죠"
그는 그의 동료인 이범호를 인터뷰할걸 추천했다.
몇분 후 둥근 얼굴에 따뜻한 웃음을 가진 이범호가 나타났다.
내가 배트플립 얘기를 꺼내자. 웃음은 사라졌다.
"난 내가 하는걸 알고 하는게 아니에요" 그가 말했다.
그는 잠시 멈추더니, 설명할 말을 고른느것 같았다.
"우리 같은 동양선수들은 -- 타격시 온힘을 다 뽑아내요"
그는 격렬한 스윙동작을 보여줬고 그의 손목은 꺾였다.
상상속의 배트를 놓치는걸 보여주면서 말이다.
"이게 왜 배트플립이 나오는지에 대한 답일겁니다"
(한달후 , 쿠르츠는 트위터로 이범호가 실수로 심판이 맞는
배트플립을 한 영상을 올려뒀다)
난 이범호에게 그가 팬들을 위해 배트플립을 하는게 아닌지 물었는데,
그는 고개를 흔들며 의도해서 하는게 아니라 말했다.
"난 이유를 모르겠다" 라고 그는 말했으며
그가 리그에서 최고의 배트플립을 하는사람은 아니라고 답했다.
최고는 자이언츠의 강타자 최준석이라 했다.
"최준석이 제일 멀리 던져요. 온몸을 다쓰거든요"
이런고로 난 몇번의 타격연습후 열기로 달아올라 땀을 흘리는
최준석과 얼굴을 마주하게 되었다.그는 한쪽귀에 작은 고리를 하고있었다.
그가 얼굴에 타월을 갖다대는순간 난 몇가지 질문을 던졌다 :
당신의 팬들을 위해 뭔가 특별한 서비스를 하나요?
대답은 "아니요" 였다
배트 던질때 느낌이 어떤가요?
"난 딱히 하려고 하는게 아니에요, 그래서 어떤 느낌도 없습니다"
해외의 사람들이 당신의 플립들을 좋아하는걸 아나요?
"잘 모르겠군요"
몇분이 지난후,
내 통역가가 인터뷰 응해줘서 고맙다고 최준석에게
고마움을 전했고 우리는 서로 인사를 나눴다.
경기시작전에, 난 경기장을 떠나 리안 사도스키와 만났다.
그는 롯데 스카우트로 로스엔젤레스 출신이며
샌 프란시스코 자이언츠를 떠나 한국에서 투수생활을 3년간 했었다.
끓는 닭요리를 앞에두고,
사도스키는 나에게 자신은 한국야구의 재미를 즐긴다고 말했다.
선수들은 타격성공시에만 환호할뿐만 아니라 좋은 수비도 축하한다고 말했다.
"그건 그냥 완전 다른 문화차이에요,"
그는 말했다.
"난 나 스스로에게 야구경기기때문에
나의 멋진플레이를 즐기지 말아야 한다고 제한을 걸어둔걸 깨달았어요.
내 생각에 그건 내가 여기서 배운거에서 기인한것 같아요,
미국의 어린 야구팬들에게도 이런걸 가르쳐주고싶어요"
나는 그에게 나의 인터뷰들에 대해 말해줬다.
선수들이 겉으로 보이는 정황과는 반대로 플립을 재미를 위해
의도로 하는게 아니라고 했다고 설명해줬다.
사도스키는 놀란것 같지 않았다.
"만약 그들이 인정했다 하더라도..
미국 리포터들에게 인정하지는 않았을걸요." 그가 말했다.
한강
강동 리틀리그 팀은 천만명의 도시를 반으로 나누며
서울을 가로지르는 한강 옆에서 연습한다. 정말 더운 오후,
선수들은 티끌하나없는 흰색 유니폼을 입고 훈련중이었고
어머니팬들이 근처 한 텐트에 모여있었다.
한국전체가 엄청난 더위를 겪었지만,
소년들은 여전히 하루 세시간씩 연습했으며 주당 6회씩 참석했다.
그들 모두는 서울의 명문고등학교중 하나에서 경기하는것을 꿈꿨다.
2년 전,댄 쿠르츠는 윌리엄스포츠에서 열린 리틀리그 월드시리즈에서
한국의 탑 유스팀이 배트플립을 하는것을 모아둔걸 올렸습니다.
강동선수들이 휴식을 취하면서,
난 와이어 프레임 안경을 쓴 키크고 휘펫처럼 날씬한 오현석이란 소년을 불렀다.
그는 배트플립을 잘하는,
서울 두산 베어즈 인필더 오재원이란 선수를 가장좋아한다고 했다.
나는 그에게 그의 우상을 따라해본적 있냐 물었는데,
그는 열정적으로 고개를 끄덕였고, 한국리그 스타의 플립을 흉내냈다--
그는 배트를 어깨 위로 올리더니 몇초후,
그것을 마치 원하지않는 편지 조각인것처럼 내던졌다.
"완전 좋아요," 그가 뒤에서 웃는 동료들을 무시하려고 노력하며 말했다.
아이들이 다시 루가 있는곳으로 잽싸게 돌아간후,
난 그들의 코치를 만났다. 그는 김근우라는 사람이었는데,
전직 한국리그 투수였으며 한국리그 폴로셔츠를
카키반바지 입고 검은양말을 올려신었다.
"그건 전염성이 있죠"
그가말했다.
"내가보기에 그건 일부러 하는거에요. 팬서비스죠"
난 내가 인터뷰해온 선수들이 그걸 그다지 인식하지 않는다고 말하자
그가 킬킬댔다 "나도 아니라했을거요!"
소년들이 공잡기 경기를 하려고 줄을스면서,
53세의 김씨는 아마추어 야구가 항상 한국에서 진지한 사업이었다고 설명했다.
한국리그가 탄생하기전, 고등학교 경기엔 많은 관중이 몰렸었다.
그는 사실, 1904년 미국의 한 선교사가 한 지역 YMCA에 야구를 선교했을때부터
한국은 야구에 미쳤다고 덧붙였다.
"하지만 최고의 영향은,"
코치는 덧붙였다.
"일본인들을 통한거였죠."
일본인들이 한국을 20세기 초 점령했을때,
그들은 그들의 야구에 대한 열정을 가져왔다.
그리고 야구는 빠르게 농구와 축구를 압도하며
국가의 주요 스포츠가 되었다. 조셉 리브즈의 ' 게임을 말하다:
아시아 야구의 역사'에 따르면 식민지 정부는 한국 젊은이들을
일본식으로 바꾸는것을 목표로 삼았으며
학교에서 한국사와 한국어 수업을 누락하고 야구같은 활동들을 밀어줬다 한다.
그결과 조셉 리브즈에 따르면,
야구는 문화적 압제의 도구가 되기도,
젊은 한국인들의 그들의 압제자들에 대한 달래기와
항거라는 두가지 배출구 역할을 하기도 했다고 밝혔다.
야구는 이차대전 이후 계속해서 번영했으나,
한국리그는 1982년까지 존재하지 않았다.
쿠데타로 나타난 신정부는, 리브즈에 따르면
더 친절하고 부드러운 관료의 이미지를 적극적으로 시도했다한다.
같은년도 후반, 한국 국가팀이 잠실에서 일본과의 경기를 했다.
한 한국 선수가 뛰어오르는 번트를 통해 경기를 원점으로 돌렸으며 --
이 상징이 될만한 플레이는"개구리 점프 번트"로 한국에 알려져있다--
나아가 한국팀이 챔피언쉽에서 승리했다.
"그게 터닝포인트였죠." 김씨가 말했다.
하지만 한국 야구는 여전히 일본의 그림자에서 살았었으며,
국가의 전 점령자들의 전통에 만들어졌다.
많은 코치들과 베테랑 선수들이 일본에서 왔으며 ;
그결과, 한국리그는 소통, 재빠름, 그리고 가장중요한 반복을 중요하게 여기는
일본리그에 강하게 영향을 받았다.
김씨는 압제의 유산이 리그에 강한 부담을 줬다 말했다.
"그당시, 일본인들은 한국인들을 낮춰봤어요.
그들은 한국인들한텐 뭘하든 상관없다고 여겼죠.
" 그가 말했다. "초창기 야구 스타일은 거기서 온거에요"
한국 리그 초창기엔, 선수들이 돈도못봐고 과로에 시달렸으며,
입다물고 야구의 암묵적 룰에 복종해야 했으며
코치에게 맞는 리스크도 감수해야했다.
"하이어라키(위계)는 만약 매니저가 뭘하라 하면,
딴거 없이 해야하는겁니다." 그가 말했다.
몇년동안, 독재문화는 여전했으며
심지어 리그가 위상과 사이즈면에서 자라도 마찬가지였다.
그때 1990년 초반에, "녹아들길 거부한" 한 루키가 나타났다.
그는 활력넘치고 용감했으며 잘나갔다 ; 그는 타격기록을 갈아치웠으며,
신이라는 별명도 얻었다. 그가 홈런을 칠때마다,
그는 한국인들이 전에는 보지못했던 뭔가를 했다.
그는 응원하는것처럼 두팔을 들더니 배트를 첫 베이스라인 아래로 던진것이다.
그 선수의 이름은 양준혁이었다.
"그가 껍데기를 부쉈죠" 김씨가 말했다.
번역기자:Kevin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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