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안스님과 현각스님은 화계사 숭산스님의 제자로 두 스님 모두 외국인 신분으로 스님이 되었습니다. 2009.07.10 첨언)
2008.05.13 08:41
청안스님 법문
오늘은 개인과 업에 대해 말씀 드리겠습니다.
"나"라는 생각을 가진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나는 무엇인가? 나는 실로 무엇인가?
그것이 오늘의 주제입니다.
가르침이라는 것이 늘 그러했듯이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것에서 시작해 봅시다.
우리에겐 이미 자신에 대한 이미지가 있지만
핵심적 질문이며 실은 선의 정수라 할 만한 것은
"나는 무엇인가?" 라고 진실로 묻는 것입니다.
내가 생각하는 "나"에 대하여 집착하지 말고
진정한 나를 발견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분명한 예를 하나 들어보죠.
여기 자신이 용감하다고
생각하는 강한 남자가 하나 있습니다.
강한 그는 큰 차를 몰고 과속으로 갑니다.
그런데 갑자기 경찰이 나타나 차를 세웁니다.
그 순간 강한 남자는 어린아이로 돌변하여
"아이쿠, 죄송합니다." 라고 말합니다.
용감하다고 자처했던 그가 경찰은 무서워합니다.
그래서 경찰을 만난 순간 딴 사람이 됩니다.
만약 계속해서 용감한 척하고 경찰에게
거만하게 굴었다면 딱지 떼고 벌금을 물었겠지요.
간단한 예지만 이것은 우리가 평소 지나던
자아감이 어떤 특별 상황에 부닥쳤을 때
우리의 인간관계와 기능은 그것이 옳다고
확인해주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엄마들은 아기를 낳으며 생각하지요.
"나는 내 자식을 정말 사랑해!"
그런데 이삼년만 지나 보십시요.
아이에게 고함을 지르고 꿈에도 생각지 못한 말까지
자신의 입에서 튀어나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자신이 자비심이 많은 사람이라 여겼는데
한 순간 경계가 다가오고 엄청난 분노가 일어납니다.
언제나 자신과 함께 하고 절대 잃어버리지 않으리라 여겼던
자애로운 모성은 그때 찿을 길이 없어요.
이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이고
잃을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또 우리가 얻을 수 없는 것은 무엇이고
잃을 수 없는 것은 무엇인지 알아봅시다.
먼저 나에 대하여 이미 이해하고 있는 것을 볼까요.
영어로는 나를 "I" 라고 부릅니다.
헝가리어로는 나를 "In"이라 하고
한국어로는 "개인, 제가, 내가, 나는" 이라고 해요.
한국어는 정말 대단해요. 나 자신을 상대나 상황에 따라 크게
4가지로 표현하니까요.
우리에겐 5가지 감각이 있어요. 만약 우리가 눈,귀,코,혀,몸을 잃게
되면 힘들 것입니다.
또한 6번째 감각인 사고가 있어요.
동양에서는 사고가 감각기관과 연결되어 있고
두뇌에서 생성되고 인식된다는 설명을 이해하는데 그다지 어려움이 없습니다.
처음 여섯개의 차원을 이해하는 것은 어렵지 않아요.
밑에서 부터 시작하여 눈,귀,코,혀,몸이 있지요.
우리는 여기에 편안하게 선을 그을 수 있어요.
그리고 여기 마음이 있습니다.
흥미롭지요. 눈은 시각, 귀는 청각, 코는 후각, 혀는 미각, 몸은 촉각과
관련이 있어요.
이와 같은 작용으로 우리는 안식,이식,비식,설식,신식을 갖고 있습니다.
저는 이것을 일일이 쓰진 않고 모두 그냥 "C"로 표시하겠습니다.
현대적 사고를 빌어 인간을 정보의 집합체로 본다면 몸을 돌아다니는
5가지 정보가 있습니다.
이러한 정보를 한데 묶으면 육체적 존재가 됩니다.
따라서 우리에게 눈,귀,코,혀,몸과 6번째 요소인 마음(mind)이 없다면
육체적인 실체가 있다 해도 사람으로 간주될 수 없습니다.
마음은 흥미로운 것으로서 사고가 있고 생각하는 식(識) 즉, 의식이 있어요.
그 작용은 무엇일까요?
이 방에 계신 여러분은 모두 컴퓨터를 사용할 것입니다.
이것은 당신의 처리장치 즉, CPU(중앙처리장치)입니다.
여기에서 당신의 말과 생각이 만들어집니다. 아시겠지요?
(칠판의 설명 공간이 모자람을 확인하면서) 아! 벌써 공간이 모자라는군요.
20년 후에는 어떻게 될까요?
우리 의식은 컴퓨터의 CPU에 해당되고 오감은 키보드, 모니터, 프린터
역할을 하지요.
즉, 컴퓨터 작업에서 들고 나는 포트 역할을 합니다.
그곳을 통해 데이터를 받고 세상으로 내 보내기도 합니다.
이렇게 우리 자신을 복합 유기체로 생각하는 것은 냉혹한 일이 아닙니다.
자신을 탄탄한 "나"로 생각하지만 좀 더 깊이 들여다 보면 단지
사고,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만이 있을 뿐이고 이러한
6식(六識) 위에다가 무언가를 붙여 놓았어요.
이것을 "꼬리표(Label)"라 부르는데 우리는 여기에 "나" 또는 "에고" 라는 꼬리표를 붙였지요.
이런 정보 처리 위에 결정권자가 있는데 이를 7식, 즉 분별식이라 합니다.
이것은 개념적 사고 위에 있습니다.
개념적 사고를 여기에 배치하죠.
여기에서 개념과 말을 형성합니다.
예를 들어 당신이 언어 감각이 옳다면
당신의 CPU는 매우 고성능이라 하겠습니다.
여러가지 과제를 동시에 수행할 수 있고
멀티미디어도 가능하지요.
언어 기호를 시각화할 수도 있지요.
이것이 바로 개념적 사고의 마음입니다.
그 다음에 분별실이 있어요.
바로 이곳에서 선악이 탄생합니다.
즉, 여기 이 단계까지는 개념만을 형성하여
"이것은 마이크다"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분별식은 "이것은 좋은 마이크다"라고 하죠.
한 사람은 "그는 중앙아프리카인이다"라고 하지만
다른 사람은 "나는 중앙아프리카에서 온 그가 좋아" 라고
하는데 이것이 분별식입니다.
분별식 뒤에 8식인 장식(藏識)이 있습니다.
이들 식(識)에는 모두 산스크리드어, 팔리어, 중국어 이름이
있지만 일일이 설명하지는 않겠어요. 경전을 읽으면 다 알수가 있습니다.
장식은 당신의 메모리로써 기억을 합니다.
즉, "나는 이 중앙아프리카만을 만난 적이 있고 내가 좋아했다"
이 세가지는 하나로 녹아 있습니다.
의식, 분별식, 장식은 떨어질 수 없는 사이처럼 함께 작용을 합니다.
누군가를 보는 순간 처음 만난 것인지 두번째인지 3번 이상 만났는지 압니다.
좋은 기억, 좋은 인상, 좋은 경험을 기억합니다.
중앙아프리카에 관한 당신의 기억에 무엇이 들어 있느냐에 따라서
즉, 그곳에서의 즐거웠던 시간, 멋진 방문, 수 많은 코끼리를 보았던 일,
사파리에 갔던 경험이 있다면 중앙아프리카 사람을 좋아하게 됩니다.
하지만 나쁜 기억을 가지고 있다면 즉, 사파리를 하는 동안 죽을 뻔
했다던가 하마에게 잡아 먹힐 뻔 했던가 악어에게 다리를 뜯길 뻔 했다면
중앙아프리카는 좋은 기억이 될 수 없죠. 긴 말할 필요 없이 좋다 나쁘다
는 생각 즉, 당신의 이원적 사고를 결정짓는 것은 당신의 기억입니다.
이 분별식에서 정말 재미있는 것은 "나"와 "나 아닌 것"을 구분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우리 의식의 근원적 이분법으로써 컴퓨터에 비유한다면 우리를
조종하는 통제장치죠.
컴퓨터에선 통제장치가 아주 단순합니다.
그저 이쪽, 저쪽으로 가라고 신호만 보냅니다.
이분법적 의식도 이와 같습니다.
"나는 이것을 원하고 저것을 원치 않아"
"이 사람은 가까이 하고 저 사람은 멀리 해야 해"
사람들이 있는 공간에 우리가 들어서는 순간 이 의식은 하도 빨리
작용해서 이 사람에겐 다가가고 저 사람에겐 멀어지길 원하여 우리 몸은
본능적으로 그쪽으로 향합니다.
강의실에 들어서거나 집에 갈 때 즉, 사람들이 있는 공간에 들어설 때는
소위 집단 역학이 작용합니다.
이는 인간이 서로 관계하는 방식으로써 다음 강의에서 충분히 논의할
것이며 여기 이것들에 달려 있습니다.
좋아하고 싶어하는 마음은 버스 안에서도 공간 점유방식을 지배합니다.
(유전 주: Safety zone 의 확대 공간)
여자친구를 찾는 젊은 남자는 본능적으로 늙은 사람보다는 젊은 여자에게
가까이 가고 안정된 친구를 찾는 늙은 사람은 동년배에게로 가죠.
이것이 인간의 기본 심리입니다.
산스크리트어로 이것은 알라야(alaya) 이것은 마나스(manas).
이것은 비지나나(vijnana)라고 해요.
우리 기억은 컴퓨터의 하드 디스크와 같습니다.
내가 이렇게 컴퓨터 비유법을 쓰는 것은 여러분이 다른 생각, 다른 그림,
다른 비유법을 생각 해 보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하지만 우리 인간은 컴퓨터가 아닙니다. 하지만 물리학자나 생명공학자조차도
인간과 기계의 주요 차이점이 무엇인지 묻고 있습니다.
차이점은 무엇일까요? 네?
(청중: 사고 능력이요)
사고라! 기계가 생각이란 것을 하도록 프로그램할 수 있잖아요.
(청중: 감정인가요?)
아니오!
(청중: 갈등인가요? 지성인가요? 열정?)
아니오!
(청중: 자비심?)
실은 로봇에게 자비심을 가르칠 수 있습니다.
공상과학소설 이야기가 아니라 감정상태를 감지하도록
프로그래밍하는 것입니다.
(의식?)
이런 의식을 생각하면 아닙니다. 실은 체스게임에서는 때로
기계가 사람을 이기기도 합니다.
IBM 컴퓨터가 세계 최고의 체스 고수 3명과 대결하여 2명을 이겼습니다.
1명에겐 졌죠.
인간에게는 실로 매우 흥미로운 무언가가 있어요.
그것을 찾지 못하면 다음 생에 우린 기계가 될 것입니다.
(청중: 기계는 아이를 낳을 수 없지요)
아니 낳을 수 있어요. 생식이 가능해요.
기계가 기계를 만들어내는 것을 생각하면 아기를 낳는거죠.
로봇이 우리 자동차를 만듭니다.
현대자동차, 기아, 대우, 삼성 중 어느 공장에 가 보아도 기계가
기계를 만들고 있습니다.
(청중: 기계는 메모리가 한정되어 있지요)
아니요. 한정된 메모리와 기억은 기계와 인간이 공유합니다.
(청중: 감정은요?)
아니요. 기계가 감정을 갖도록 프로그램할 수 있습니다.
실은 부모님은 우리가 어떤 감정을 가져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십니다.
안 그래요?
아이가 잘못을 저지른 후 모른 척 하면 부모가 아이한테
"너는 미안해 해야 하는거야"라고 가르쳐 줍니다.
위대한 사람도 잘못을 했으면 머리를 숙이라고 배웁니다.
아시아에서 저는 본 적이 있어요.
지위가 높은 사람이 넥타이에 정장을 하고 나와 국민에게
고개를 숙이고 용서를 구하더군요.
서양에서는 불행히도 그런 전통이 사라졌습니다.
(청중: 인간 내의 의식이 변하잖아요)
아니요. 명확하지 않아요.
이제 사람과 기계의 근본적인 차이점과 불성(佛性)이라는 것에 대해
설명 하겠습니다.
컴퓨터는 사람과 똑같은 의식으로 "나"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컴퓨터는 프로그램을 요하고 내적 성찰이 불가능하죠.
스스로를 변화 시키지도 못합니다.
인간은 존재의 근원적 핵심을 안으로 성찰함으로써 해탈을 얻을 수
있습니다.
컴퓨터에게 "나는 무엇인가?"를 말하라고 아무리 가르쳐도 깨달음을
얻진 못할 것입니다.
단지 이 질문을 끝없이 반복하겠지요. 하지만 사람은 생각을 넘어설 수
있고 모든 것을 초월할 수 있습니다. 우린 자유로워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기계는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 욕구도 지식도 없습니다.
우리가 불성이라 부르는 이것은 맑은 거울과 같은 의식으로서
지금 당신 안에서 당신 말을 듣고 있고 이것을 이해하고, 처리하여
사용하기를 원합니다.
이를 근거로 우리도 똑같은 본질을 가지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그 밖에는 모든 것이 다 다릅니다.
개개의 경우마다 하드디스크의 내용은 다릅니다.
통제장치와 통제하는 프로그램도 다릅니다. CPU 작동법도 다릅니다.
우리가 세상을 보는 방법은 대체로 같지만 개별적으로는 각자의 눈,
시각, 안식(眼識)에 따라 사물을 다르게 봅니다. 우리가 업이나 인과라고
묘사하는 모든 것이 다 다르지만 오직 불성 즉 인간의 본성만이 동일합니다.
무엇이 이것을 증명해 줄까요?
첫째. 어떤 사람이 깨달은 사람이라 일컬어지고 우리가 그들을 현자로
받아들이고 그들이 더 지혜롭기에 우리를 가르친다는 사실이 있지요.
또한 자비심이라 불리는 소박한 녀석이 있지요. 즉 우리가 다른 사람과
어떻게 연대하는가?
이는 우리 모두가 지닌 본질을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그렇지 않고 차이점에 매어 있다면 우리는 절대 다른 사람의 입장이
될 수도 없고 그의 감정을 느낄 수도 없습니다.
때로는 자신의 사고가 너무나 강렬하여 코 앞에 있는 사람도 보지
못하는 경우가 있지요.
생각이 끊어지면 마음은 허공처럼 비어있고 거울처럼 맑아져서
다른 사람을 비출 수 있어요.
그때 우리는 다른 사람과 하나가 되고 다른 사람이 느끼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가끔은 다른 사람이 생각하는 것을 지각할 수도 있어요.
우리 모두가 그런 불성을 지녔어요. 그런데 왜 그것을 사용하지 않을까요?
우리가 대부분의 경우 불성을 사용하지 않는 이유는 이 모든 것에
자신을 동일화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것들을 "나"라고 "나 자신" 이라고 이름 붙여 놓았지만
이것은 그저 우리의 기계일 뿐입니다.
만일 "나는 무엇인가?"라고 진정으로 묻는다면 곧바로 무념상태에
들어가게 됩니다.
이 질문이 우리의 이분법적 사고, 모든 기억과 모든 인지를 다 흡수해
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때 우리의 눈,귀,코,혀,몸은 맑아지고 종국에는 사고 역시 명료해집니다.
기계는 반야심경을 이해할 수 없지만 사람은 반야심경을 수행할 수 있습니다.
비록 속뜻을 이해하지 못한다 해도 말이죠.
반야심경이 설하는 것은 무엇인가요?
우리에겐 본래 눈도 없고, 귀도 없고, 코도 없고, 혀도 없고, 몸도 없고,
마음도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불자로서 매일 염송하는 반야심경을 잘 기억하십시요.
반야심경은 인간이 무엇인지에 대한 답을 기능적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반야심경의 시작부분을 기억하세요?
관세음보살이 초월적 지혜에 든 상태에서 인간을 구성하는 다섯가지
덩어리, 즉 오온이 본래 공함을 지각했다고 설하고 있습니다.
즉 우리는 평소 우리가 생각하는 방식대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인습적 사고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존재하죠.
인습적 사고에 대한 집착이 우리가 겪는 온갖 고통을 만들어 냅니다.
실은 이곳 즉 우리의 통제장치 안에서 무지, 즉 온갖 잘못된 견해를
만들어 내고 이러한 무지에 근원하여 성냄과 욕망이 일어납니다.
그리하여 선과 악, 긍정과 부정을 가름하고 그에 따라 매력을 느끼거나
멀어지지요.
실은 멀어진다기 보다는 비난을 하지요. 대상을 멀리 밀어내거나
가까이 하려 합니다.
이런 의식에는 욕망형과 분노형이 있어요. 좋아하지 않는 것은
파괴하려 하고 욕망의 대상으로 원하는 것은 증식하려 합니다.
이 모든 것이 미혹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흥미롭게도 깨달은 이들이 지혜는 우리에게 이것의 존재와 기능을
알려주고 이는 단지 우리의 두뇌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의 온 존재
온 삶을 위한 것입니다.
왜냐?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이 실은 다음 생의 조건들을 만들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죽으면 어떻게 될까요? 죽음의 순간 우리의 눈, 귀, 코, 혀, 몸,
사고는 즉, 6식은 그 위의 분별식, 장식과 분리됩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것들은 두뇌와 감각기관 등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죽음과 함께 이 6식의 활동은 완전히 지워집니다.
(유전 주: 넋 백(魄)
그리고 남은 이 두 가지가 다음 생으로 이전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명료한 기억과 분별이 중요한 것입니다.
다음 생에 제대로 태어나기 위해서 말입니다.
불교의 가르침에서 말하는 제대로 태어나는 일은 가르침에 가까이
태어나는 것, 인간의 몸으로 태어나는 것입니다.
절간의 개나 고양이로는 부족합니다.
절간의 개나 고양이를 보면 예불을 들을 수 있어도 몸은 짐승의
몸입니다.
그들을 보면 우린 말하죠. 이 생에 잘해서 다음 생엔 인간의 몸을 받아라.
절간의 동물도 불자의 업이 있긴 하지만 수행이 명료하지 못하고
음식이나 안락함에 집착하여 개나 고양이로 태어나는 것입니다.
중국에 유명한 선사가 있었는데 동안거가 끝나자 학생들 즉 비구들에게
질문을 했습니다.
"자네들이 죽으면 어떻게 다시 태어날까?" 아무도 대답하지 못하자
선사는 말했습니다.
"내가 죽으면 나는 재가 신도의 집에서 일하는 소로 태어날 것이다"
문제는 선사가 왜 그런 말을 했는가입니다.
우리는 절간의 개와 고양이에 대해 말했습니다.
그 소와 재가자의 집 사이에는 무슨 관계가 있나요?
스님들이 시주를 받는 것은 법을 수행하기 위해서입니다.
따라서 법을 제대로 수행하지 않거나 열심히 정진하지 않거나
수행 방향이 올바르지 못하면 이미 받은 시주를 되돌려 주어야 합니다.
그런 다음 재가자를 잘 섬기기만 하는 동물로 다시 태어나 시주를 갚는
것입니다.
소는 무엇을 할까요?
그저 외양간에 서 있거나, 걷거나, 사료를 먹고는 우리에게 우유를 주고
종국에는 고기, 가죽, 뼈까지 모든 것을 줍니다.
만약 사람들이 잘못된 결정을 내리면 그와 같은 업보를 받을 수도 있습니다.
과거의 기억이나 분별식과 동일화하는 한 우리는 다시 태어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다 놓아버리고 이 두가지와 더 이상 동일화하지 않는 순간
우리는 자유인이 됩니다. 간단한 일입니다.
그 다음엔 "모른다"로 돌아갑니다.
니르바나나 천국 등의 개념을 생각하지 마세요.
이들은 다 우리 CPU가 만들어 낸 것으로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옛 선사가 말씀하셨어요. "깨달음에 대한 생각조차 큰 잘못이다"
왜냐하면 생각하면 얻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생각 이전의 상태로 돌아갈 때 즉시 하나가 되어 얻을 수 있으며
그것은 사고에 근거를 둔 것이 아닙니다.
식(識)이 어떻게 작용하는지 아는 것은 중요하며 참선 중에 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다행히도 여러분은 저를 믿으실 필요가 없습니다.
여러분이 직접 점검하고 관찰할 수 있습니다.
저는 여러분께 잘 관찰하고 재검, 삼검하시기를 권해 드리고 싶습니다.
정말 이 설명대로 그리 되고 있는가?
만약 제 설명이 맞는다면 그를 사용하여 수련은 스스로 하는 것입니다.
만약 제 설명이 맞지 않으면 그냥 버리세요. 믿지도 말고 따르지도 마세요.
하지만 제 설명이 맞는다면 그를 사용하여 의식을 더 맑고 자비롭게 하시고
제대로 수련된 사람이 되십시요. 수련은 스스로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인간의 엄청난 가능성입니다.
지구상의 다른 존재들은 가지고 있지 않은 것.
오직 인간만이 불성을 즉, 깨달음의 가능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고를 넘어서서 말이죠. 반야심경의 만트라인
"카테 가테 빠라까테 빠라상가테 보디 스바하"는 문을 통과하여
부처가 되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는 할 수 있어요.
그것은 인간의 위대한 가능성이며 저는 한 사람도 시간을 낭비하지 말고
그것을 이루기를 원합니다.
솔직히 말해서 이 세상엔 "나"라는 아상으로 부터 오는 문제가 너무나
많기 때문에 진정한 자신을 증득하지 못한다면 외적인 해결책은 없습니다.
올바른 대안도 없어요. 지난 이천여년 동안 인류는 수도 없이 많은
대안들을 실행했지만 결과는 대동소이하게 나쁜 상황을, 심각하고
극적인 상황을 초래했습니다.
지금 이 순간 우리에겐 단 하나만이 존재하고 여기 있는 모든 사람이
그것을 알고 있어요.
의식이 변화하지 않는 한, 세상의 진정한 모습을 깨닫지 못하는 한,
외적 해결책은 효과가 없을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