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자의 사단은 시비지심 수오지심 측은지심 사양지심을 말하는데 이를 동양에서는 양심이라 할 것입니다.
소시오패스가 그리 행한다면 시비지심은 있으되 나머지가 극단적으로 부족한 것이겠지요.
느낌으로 알 수 있지 않을까요?
사람은 대부분 주의하면 가식을 구분할 수 있는 힘이 있는데 이것도 시비지심의 영역이군요.
주의하면 느낌으로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기저는 합의에 의한 교육과 사회적 강압이겠지만
본문의 억지와는 상관 없이 이성에 의한 것 맞을 겁니다.
입으론 처떠들고 안보면 안지키는 이유도 그것이고, 안봐도 지키는 이유 역시 일종의 자기 만족.
생존 전략이고 사회성이 없는 동물이면 애초 가능하지 않은 것들 태반이 양심으로 치부되는 문제.
양심을 사단의 논리에 따라 시비지심 측은지심 사양지심 수오지심으로 나누어 보고 이를 다시 지적 영역과 감성적 영역으로 나누어 보자면 시비지심은 지적 영역으로 나머지는 감성적 영역으로 나누어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사단은 부여받는 것이므로 그 정도의 차이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양심 자체는 본유관념의 영역이고 이를 다시 분류하면 지적영역과 감성적영역으로 나누어 볼 수 있겠다 라고 생각되어 집니다.
전 착하고 이성적인 사람이 좋다고 말을 하곤 하는데 사람이 옳은 일을 하려면 착하고 이성적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착해야 한다는 말은 옳은 일을 할 의도가 있어야 한다는 의미에서 하는 말이고 이성적이어야 한다는 이유는 이성적이지 않으면 무엇이 옳은지 알 수 없기 때문이죠. 간단하게 생각하면 도둑놈의 경우에는 전자가 문제라 할 것이고 광신도의 경우에는 후자가 문제라 할 것입니다. 이는 둘 다 중요한 것이지 어느 한 쪽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할 수 있는게 아니라 봅니다.
발제자님이 답 안나오는 문제라고 생각하시는 것은 둘 중 하나일 거라고만 생각하시기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사람은 진화론적으론 동물계에 포함되면서도 모든 동식물과 구분되는 특징을 가지죠. 외형적으로 특이한건 직립보행하는 유일한 동물이다라는 몇가지 구분되는 점이 있지만 가장 큰 차이는 추상적이지만 실제하는 개념 즉 이성(사고), 마음(감정)의 작용에의해 생겨나는 것들이겠지요.
그중 대표적인게 양심이겠지요. 그러니 이 양심은 다른 동물에는 없는 것이니 진화과정에서 인간에게만 생겨났다고 볼 수 밖엔 없죠.
그런데 여기서 새로운 제언을 하자면, 이 인간에게만 있는 양심같은 관념적 개념은 과연 인간이 진화하며 스스로 자연적으로 얻게 된 것일까요, 아님 누군가(꼭 신적 존재라곤 말하진 않겠습니다만)에의해 부여받은 능력(혹은 누군가엔 족쇄도 될 수도)일까요?
유무신론으로 구분하면 전자는 무신론에 입각해서, 후자는 유신론에 입각해서 생각하면 갼단하지만, 신론을 차치하고 단순 함 고민해볼 필요는 있다구 봅니다. ㅋ
철학적으론 이런 인간에게만 존재하는 관념철학적 개념을 본유관념이라 볼 텐데, 특히 엠마누엘 칸트 같은 경우도 대부분 마음에서 일어나는 개념 조차 머리속 대뇌의 이성작용에의한 관념으로 설명하려하죠. 대표적으로 이 양심의 경우도 순수이성으로 바라보았죠. 왜냐면 선의지는 결국 이 양심의 발로거든요.
그러나 갠적으론 구분되어야한다는 생각입니다만.
암튼 양심을 누군가에의해 부여받았든 아님 인간 스스로 자연발생으로 얻게 되었든 어쨌든 둘다 본유관념으로 본다면, 양심은 이성과 마음 모두로 부터 연관되어 있는 감정일겁니다.
일반적으로 슬픔, 기쁨 같은 감정이라함은 이성과 구분된 마음의 작용으로만 생각하지만 사실은 정신작용없인 독립적으로 나타날 순 없다구 봅니다.
사실 기독교적으론 정신작용이 멈춘 의식없는 상태라고하더라도 마음의 작용으로 모든 감정을 느낄 수 있다라곤하지만 그건 과학적으론 증명하기 힘들죠.
그러니 정신작용이 정지된 무의식 상태를 생각해보면 결코 양심의 가책을 느끼거나 슬픔, 기쁨과 같은 감정작용도 없다는걸 알 수 있죠.
따라서 자신의 어떤 언행(예로 누군가를 죽이겠다고 말하거나 또는 실제 행동으로 옮기기) 혹은 상념(누군가를 죽이는 상상을 한다든지)에 의해 일어난 현상을 이성 및 오감과 같은 감각기관을 거쳐 대뇌로 입력된 정보가 연합, 처리되는 정신 작용의 과정이 반드시 동반하여 마음의 양심을 불러일으킨다구 보는게 합리적이죠.
본문에 보면 강사뒤에 문양이 하나 있는데 저 문양이 "주재주 아"입니다.
우리 민족이 입버릇처럼 하나님을 찾을 때 그 하나님은 여호아가 아닌 저 "주재주 아"를 의미합니다.
하나여서 크신 주재주 아님이 한아님의 본 뜻 입니다.
우리민족을 한민족이라 부르는 것도 저 "주재주 아"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천부경과 더불어 민족의 2대 경전인 삼일신고에서는 "주재주 아"를 일신(一神)이라 표현 하고 있습니다.
옛날 할머니들이 생명을 점지 받을 때에는 삼신할매에게 빌었는데 그 삼신 할매를 삼일 신고에서는 삼신(三神)이라 표현합니다.
그러므로 삼일신고의 뜻은 삼신과 일신에 대하여 너희에게 알려주겠노라 라는 뜻입니다.
이 삼신은 일신인 "주재주 아"가 자신을 스스로 삼극으로 나눔으로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삼신을 우리말로 표현하면 "치화주 알"이라 합니다.
이 두 신을 이치요소상으로 표현하면 "주재주 아"는 허극이요 "치화주 알"은 삼태극이 되는 것입니다.
노자가 도덕경에서 말한 천지지시와 만물지모 입니다.
진시황시대에 전해져 오는 기왓장에는 "구왕의아"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습니다.
"아"자는 저 문양 그대로 새겨져 있습니다.
"구왕의아"에서 "구"자는 구천할 때의 "구"자로 온누리 즉 우주전체를 의미합니다.
"구왕의아"에서 "의"자는 마땅할 의자 입니다.
그러므로 "구왕의아"를 풀어보면 "온 우주의 왕은 마땅히 "주재주 아"이시니라"로 풀이됩니다.
이러한 이유로 진시황이 분서갱유를 행한 것입니다.
이집트의 태양신은 "라"입니다.
그런데 이집트는 두음법칙을 사용합니다.
그러므로 "라"에서 두음법칙을 제거하면 태양신 "아"가 되는 것입니다.
이슬람교의 "알라신" 역시 마찮가지입니다.
삼일신을 우리말로 풀면 "알아신"이 되는 것이고 이것이 이슬람교의 "알라신"이 되는 것입니다.
이 모든것은 환웅의 무리가 "재세이화 홍익인간"의 이념으로 서쪽으로 전한 것입니다.
피라미드는 오행의 원리를 상징물로 만든 것입니다.
피라미드가 이집트에서만 발견된다면 그 지역만의 독창물로 볼수 있겠지만 피라미드는 전 세계에서 발견되고 있습니다.
고대인들은 이 오행의 의미를 이해하고 있었다는 것이 됩니다.
저 "주재주 아"를 기억해 두시기 바랍니다.
단군의 후손이요 한민족이라면 저 "주재주 아"를 반드시 알고 있어야 할 것입니다.
댓글로 쓴 내용들을 자세히 설명할 기회가 있을 것이니 그 때 자세히 설명해보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