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와 자율의 차이는 이런게 있습니다
자유는 자신의 욕구를 투영하는 감정이
어떤 규제에도 제한되지 않는 상태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자유엔 방종이 포함됩니다
이 방종을 스스로 규제하는 주관적 준칙이 자율입니다
그렇다면 스스로 무슨 개념에 의해서 이 주관적 준칙을 형성할 것인가?
라는 의문에 이르게 됩니다
이때 가장 보편적이고 최선이라고 추정되는 개념을 하나 떠올릴 수 있습니다
이 개념의 이름이 '덕' 입니다
이 길을 간다는 의미로 '도덕'이라 칭하는 것일 겁니다
따라서 자율은 도덕의 법칙들에 의해 주관적 준칙을 형성하는 부분이 많습니다
그런데 자율은 자신의 욕구가 투영된 감정을 저항하는 것이기에
이에 따른 '불쾌'의 감정이 발생하게 됩니다
따라서 덕을 실천하는 것은 불쾌의 감정에 대한 저항을 요구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것이 스트레스를 발생시키는 근원이 됩니다
기억의 감정영역에서 불쾌감만 존재해서 그것이
전체를 형성해버리면 그건 그냥 불쾌한 일로 규정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잠깐 다른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우리는 이순신 장군이나 세종대왕 독립투사분들을 퉁쳐서 '존경한다'고 표현합니다
그러나 존경의 대상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우리는 이순신 장군이 똥싸는 모습이나 세종대왕의 여성관계,
독립투사분들의 알려지지 않은 안좋을 수 있는 모습을 존경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분들이 자신의 욕구가 투영된 감정을 자신의 도덕법칙에 의한
주관적 자율로서 저항해내고 이를 실천한 모습들을 존경하는 것이지,
결코 그분들이 가진 알려지지 않은 모습들을 존경하는 것이 아니겠습니다
결국 존경의 대상은 그분들이 실천한 덕이 되는 것일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 자신이 자신의 욕구가 투영된 감정에 저항하고
덕을 실천할 때 스스로에 대한 '존경심'을 갖진 않습니다
예시한 선조들처럼 격렬한 감정의 저항은 아니었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그렇더라도 '존경심'까지는 아닌 '대견함'은 가지는 것이 마땅한 일이 됩니다
스스로 덕을 실천했으면 그 실천에 최소한의 '대견함'이라도 부여하는게
형평성의 원리에 의한 본인들의 마땅한 권리행사고 꽤나 괜찮은 근거인데도 말입니다
덕의 실천에 이 대견함을 스스로에게 부여한다면 이것은 흡족의 감정을
느끼게하는 것이고 이것은 '유쾌'의 감정에 속합니다
이 감정은 이성이 원천이 되는 감정이라해서 이성감정이라고 하죠
이제 위에서 설명했던 욕구감정에 저항해서 발생하는 불쾌의 감정에
스스로의 이성이 부여한 유쾌의 감정, 즉 대견함을 부여하면 두 감정이 상충해서
불쾌의 감정을 희석시켜 버립니다. 따라서 스트레스를 축소시키는 결과를 내게 됩니다
쉽게 말해 별일 아닌 일이 되어버리게 됩니다
이게 능숙해지면 구태여 스트레스 풀겠다고 다른 일을 할 필요도 적어집니다
보편적으로 스트레스를 푸는 일들이 모두 '유쾌의 감정'을 느끼게 하는
다른 일을 하는 것인데 이것이 간접적으로 '불쾌한 감정'을
상충시키는 원리를 따른다고 보면 이해에 도움이 될겁니다
다만 본인의 욕구감정에 저항하는 것은 본인만이 알 수 있는 것이고,
타인이 봤을땐 무엇에 저항하는지 보이지 않으니 알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남이 알아봐주길 기대해서는 안되는 일이겠습니다
그저 같은 원리를 사용하는 사람들끼리만 알아 보기 쉬운 것이고,
그런 사람을 만나면 그저 고맙다고 표현해주는 정도가 적합할 것입니다
이 적당한 표현이 자연스럽게 인간을 근거있는 겸손으로 인도하는 것이겠습니다
그리고 무리하게 덕을 실천하려 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런건 언제나 가장 사소한 실천부터 차근차근 해보면서
본인에게 적합한 수준의 덕의 실천을 쌓아가며 그 성과를 확인하고
조금씩 확대해가면 되는 것이죠
자연스럽게 습관이 되도록 말입니다
결국 이 글은 스트레스 받기 싫으니 사용하는
일종의 마인드컨트롤이
덕의 실천으로 이어지는 원리가 됩니다
이 원리를 확장시키면 현실적인 의미의 행복에 다가서는 길과 연결되고
이것이 보편화되었을때 만인이 덕의 실천과 행복에 다가서는 논리적 추론이 가능해지는데
이쯤되면 만약 신이 있다면 이야말로 신의 뜻이 아닐까 싶은 내용이 되어버리고
이에 비하면 기독교리들은 상대적으로 존재가치가 떨어지게 됩니다
생활세계에서 만인이 스트래스를 해소하고 덕의 실천과 행복을 찾아가는 원리를 인식하며
이야말로 최고선의 능력을 가진 존재의 뜻이 아닐까 싶은 합당한 의심이 되는
이야기를 알고 있는데 기독교리가 인간의 생활에 무슨 필요가 있겠습니까?
이야기가 길어졌습니다
대략 원리의 이해만으로도 유익함을 느낄 분들이 계시길 기대하며 글을 매듭짓습니다
요새 공적/사적 일이 다시 바빠져서 댓글을 못챙기기 쉬우니 이점은 양해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