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 박통이 아니라 좌빨들이 장준하를 타살시켰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장준하는 호림산악회 회원 약 40여명과 함께 경기도 포천 이동면의 약사계곡 입구에 도착하여 약사봉에
올랐다. 그리고 이날 오후 약사봉에서 약사계곡 방향으로 뻗은 절벽 아래에서 김용환 및 호림산악회 회원
들에 의해 사체로 발견되었다. 2012년 8월1일 유골을 장준하공원으로 이장하던중, 유골 검시를 통해 뒷머리에 망치로 가격된 상흔이 발견되었다.
자 그럼 시간을 되돌려보자,
5,16 혁명때 장준하가 발행인으로 있었던 사상계에 권두언은 1955년부터 50년대 말까지 장준하의
이름으로 쓰여졌고, 그 이후 장준하 외의 사람이 대필했을 경우에는 필자를 무기명으로 하여 밝히지
않았지만 문제의 1961년 6월호 권두언과 편집후기는 무기명으로 되어 있어, 이것이 장준하의 글인지
확실하지는 않지만 발행인이 장준하의 책임을 면죄할 수는 없다.
《사상계》 1961년 6월호는 권두언 뿐 아니라 박정희와 장도영의 사진 화보를 싣기까지 했다. 장준하
평전을 쓴 김삼웅은 《사상계》 1961년 6월호는 사상계 정신을 가장 크게 훼손했다고 비판했다.
이후 7월호에서 함석헌의 〈5·16을 어떻게 볼까〉라는 군사혁명을 우회적으로 비판하는 글을 실었지만
《사상계》는 그 이후에도 상당기간 동안 쿠데타의 불가피성을 인정했다.
장준하가 이같이 5·16 군사 정변을 "민족주의적 군사혁명"이라며 극찬을 아끼지 않은 이유는 5·16으로
등장한 군사정권이 친미(親美) 노선을 걸을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었다. 사실 장준하는 적극적인
친미주의자였다. 후에 그가 모든 통일은 다 좋다고 말한 것과는 달리 장준하는 이 당시만 해도 반공을
최우선에 두고 있었으며, '친미'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다.[39] 때문에 장준하는 극도의 혼란으로 치닫던
장면 정권을 일거에 무너뜨리고 반공논리로 무장한 채 등장한 군사정권에 지지를 보내게 된 것이다.
또 여기에 미국이 군사정권을 지지한 것이 장준하가 군정을 지지한 주요한 동기로 작용했다. 장준하는
군정 초기에 군정 세력과 미국 세력간의 만남을 주선하기도 했다. 이는 장준하는 쿠데타의 주역들과
미국과의 관계 개선을 도모하기 위한 파티[41]였었다. 당시 군정 세력은 군 내에서 비주류 세력이었기
때문에 미국과의 관계가 좋지 않았는데 장준하는 이들의 관계를 개선하기 위해 파티를 열었다. 1961년
7월 초 창경원에서 열린 이 파티에는 미국 측에서는 버거 대사와 하비브 정치참사관이 참석하고 군정
세력에서는 장도영 일파만이 참석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파티에 박정희 계열 인사들은 참석
하지 않았고, 이는 나중에 장도영과의 관련설이 나오는 원인이 되었다.
이와 같은 일련의 일들이 다른 좌파들이 좋게 볼 리가 만무했고 급기야 그들의 특기인 암살로 이어진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놈현이 그렇게 당한 거처럼 야권인사가 수십 명이 있는데 박통이 무슨 재주로
죽이나? 산악인들이 그냥 보고만 있었을까? 장준하는 알려진 거와 다르게 군부와 미국의 관계개선을
위해서 노력했던 사람이다. 그러니 같은 야당 인사들과의 관계도 별로 좋지 않았다고 한다.
그렇다면 답이 나온 게 아닌가, 장준하가 사망하면 가장 의심받는 게 박통인데 미치지 않고서야 그런 짓을
할까? 놈현의 사망으로 MB가 골로가고 가장 큰 수해자는 김대중 패거리들 아니였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