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와 박태준은
육군사관학교에서 사제지간으로 첫 인연을 맺었다,
그리고 다시 제2군수기지 사령관과 참모장의 사이로 지내면서
두 사람 사이는 강력한 신뢰의 끈으로 연결된다,
5.16 혁명 당시에는 박정희가 박태준에게 거사가 실패했을 경우
'내 식구들이나 좀 돌봐 줘'라며 혁명에 참여 하지 말 것을 권유했다,
박태준은 박정희에게 부하 보다는 동생이었다.
포항제철의 건립은 단군 이래 가장 큰 규모의 공사였다,
이 공사의 책임자는 박정희가 가장 신뢰 하는 박태준이었다,
1967년 9월 박태준은 박정희의 호출로 영국에서 달려 왔다,
박태준은 고사 했으나 박정희는 호통을 쳤다,
"나는 임자를 잘 알아, 이건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야,
어떤 고통을 당해도 국가와 민족을 위해
자기 한 몸 희생할 수 있는 인물만이 이 일을 맡을 수 있어,
아무 소리 말고 맡아!"
박태준은 공사를 독려 하면서 이렇게 말하곤 했다,
"포항제철은 선조들의 피의 대가이다,
제철소 건설에 실패하면 우리는 죽어 마땅하다,
우향우하여 영일만 바다에 빠져죽자"
박정희의 전폭적인 지원도 빠지지 않았다,
박정희는 3년여 공사 기간에 13번이나 현장을 방문했다,
박태준이 정치인과 관료들의 압력에 시 달리자
박정희는 박태준에게 종이 마패를 건네줬다,
마패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박태준을 건드리면 누구든지 가만 안 둔다'
100만톤을 목표량으로 건설 되었던 포항제철은
가동된지 단 일년 만에 매출액 1억 달러를 기록하며
빚을 다 갚고 흑자를 기록 했다,
세계철강 역사의 기록적인 사건이었다,
고로 건설은 계속되면서 2기가 완공되는 1976년에
조강능력은 북한을 추월 했다,
1992년 10월, 박태준은
동작동 국립묘지를 찾아가 박정희에게 보고를 했다,
"각하! 불초 박태준, 각하의 명을 받은 지 25년 만에
포항제철의 건설 대역사를 성공적으로 완성하고
삼가 각하의 영전에 보고 드립니다,
포항제철은 빈곤 타파와 경제 부흥을 위해
일관제철소 건설이 필수라는 각하의 의지에 탄생되었습니다,
그 포항제철이
바로 어제 조강 생산 2,100만 톤 체제의 완공을 끝으로
4반세기에 걸친 대장정을 마무리 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