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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남헌 독립유공자이며 김규식 박사의 비서실장을 했던 송남헌은 그의 저서 ‘해방 30년사’(1990. 까치사, 26쪽)에서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전했다.
동기생 이섭준은 이렇게 회상했다. “그 때 나는 일본인이 다 되어 있었는데 박정희는 달랐다. 한문선생님은 박정희의 글 속에 무엇이 있기는 한데 그게 뭔지 잘 모르겠다고 했다. 박정희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일본으로부터 배울 것은 군사학이다. 우리는 독립을 해야 한다'. 독립이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남의 간섭 안 받고 우리 스스로 사는 것이라고 대답했다.
동기생 이한림 장관은 이렇게 회상한다. "그는 물끄러미 창밖을 내다보며 깊은 생각에 잠기곤 했다. 무슨 생각을 하느냐고 물어본 적이 있었다. 왜놈을 배워야 왜놈을 이긴다고 하더라"
1.정순옥(鄭順玉)의 말
언젠가 우리는 박 선생님과 일본인 선생님 두 분과 함께 놀게 되었다. 그때 일본이 선생 한 분이 조선 여성은 예의가 없다느니, 젖가슴을 다 드러내고 물동이를 이고 다니느니 하며 우리 나라 여자의 흉을 보았다. 이에 박 선생님은 우리들에게"너희들 저 말 잘 새겨 들어라. 가난하고 무지하면 남에게 멸시를 당하는 것이다. 우리들끼리 있을 때는 절대로 일본말을 쓰지 말고 조선말을 쓰자"고 했을 때 우리는 철없이"조선말 쓰면 퇴학 당하는데 왜 그러세요"하고 반박한 기억이난다.
2. 주영배(周永培)의 말
1939년, 내가 보통학교 5학년일 때 조선어 과목을 가르치며 박 선생님께서는 "이 글을 잘 배워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박 선생님은 빈부귀천을 가리지 않는 분이었다. 가정실습 때는 문경에서 12킬로미터나 떨어져 있는 산골까지 자전거를 타고 오셨다.선생님이 돌아가시는 그 뒷모습이 산록으로 숨어들 때는 울고 싶도록 감사했다.
3.이영태(李永泰)의 말
조선어 시간에는 우리 나라의 태극기와 역사를 가르쳐 주셨다. 음악시간에는 <황성옛터><심청의 노래> 등을 가르쳐 주시고 기타도 쳐주셨다. 지금 생각하면 조국이 없는 서러움 때문인지 일본인 교사들과는 자주 싸우는 광경을 보았다. 하루는 수석교사였던 일본이 야나자와(柳澤)와 말다툼 끝에 그가 <조선놈>이라고 하자 의자를 집어던진 일도 있었다. 그 당시 일본인 순사 중에 오가와(小川)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와 자주 논쟁을 벌였다. 박 선생님이 만주군관학교에서 군도를 차고 문경에 왔을 때 오가와(小川)가 무어라 했다가 혼이 난 적도 있다.
4.황실광의 말
박 선생님이 우리 학교에 오셨을 때 나는 6학년 반장을 했다. 선생님은 우리들에게 조선어를 가르쳤다. 역사, 시조도 가르치고 학생들의 사기를 돋우기 위하여 위인전을 많이 읽도록 하셨다. 박 선생님이 일제치하에서 우리글을 가르치기 위해 애쓰신 것은 분명하다. 학생 한 사람을 복도에 세워놓고 일본인 교장이나 교사가 오지 않나 망을 보게 했다. 그때 한 남학생이 천황의 사진에다 장난을 하고 교무실에 불려가 혼이 난 일이 있다. 천황의 눈을 연필로 까맣게 지우는 따위의 행동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인데 우리들에게 그런 생각을 갖도록 한 것은 박 선생님의 영향이 컸을 것이다.
대한민국 건국 이전 해방 2년째 되던 1946년 가을, 장차 건국 때 국군장교 양성을 위해 미 군정청이 창설한 태능 육군사관학교에서는 육사 2기생이 교육 중이었다. 사관학교장은 이치업 육군 대위.
일본군 육군 소위 출신인 이교장은 명색이 국군의 간성을 교육하는 육사교장이면서도 자신은 물론 주변의 누구도 애국가를 알지 못해 답답한 끝에 아이디어를 냈다. 생도들에 애국가 가사를 쓰라고 시험을 치렀다. 전원이 백지였는데 딱 한 생도가 4절 가사를 정확하게 써냈다.
박정희 생도였다.
만주군관학교에 입학 하려던 박정희대통령은 김정균을 통해 백범 김구 선생을 만났습니다. 김정균은 상해임정에서 비밀첩보원을 하던 김구 선생님의 수족과도 같은 분이었습니다. 남의사 소속의 왕정국, 산서성 총사령관 염석산과 더불어 독립 운동을 하던 분이었습니다.
그 김정균의 일기에서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습니다.
김구 선생은 1939년 3월 어느날 청년 박정희를 만났다. 그때 박정희는 20대 초반으로 아주 적극적인 사고를 지닌 청년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그때 처음 박정희 청년을 김구 선생에게 소개해준 사람이 김정균의 친한 친구인 신영학 이라는 친구다. 그것이 인연이 되어 김구 선생은 박정희를 예의 주시 하고 있었다.
아마 1945년에 광복이 못되었더라면 ´박정희는 김구 선생을 도와 일을 했을것이다´ 라고 김정균은기록하고 있다.
박정희가 일본군 사관학교에 다니면서도 일본군의 무기정보 일본군의 전술공부등 많은 정보를 김정균에게 알려 주었다.
김정균과 박정희 소좌는 수시로 연락을 하면서 일본군의 동태 작전능력 병력이동 계획 일본군의 동태를 알려 주었다고 김정균은 기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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