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서론
이 글은 미니티님의 글에 반론을 하는 리플 작성과정에서 글이 길어져 제 편의상 새로이 글을 쓰게 되었음을 밝혀둡니다. 또한 이글의 목적은 미니티님의 관점을 일방적으로 비난하는 것이 아닌 아래의 글과 다른 새로운 주제로 확장이 되어 그를 포함하기 위함임을 밝힙니다.
제기된 반론에 대한 반박과 그를 위한 논리를 설한 후 현 상황에서 우리가 지향해야하는 교육에 대한 제 생각을 후술합니다.
Ⅱ. 교육의 본질에 대한 효율성의 전복양상
- 제 학문의 근본 목적을 살펴봄으로 접근
우선 미니티님이 말씀하신 효율의 관점은 제가 말한 효율과는 다르다는 것을 이미 알고 계시리라 생각합니다. 제가 효율을 부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효율을 과두화 시키고 본질로 이해하는 현상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교육을 근본적인 목적이 아닌 우선 효율로 재단하여 교정한다는 것이 문제라는것이지요.
즉, 1차 필터와 2차 필터의 문제란겁니다. 미니티님을 비롯 많은 사람들이 교육경제학적인 면을 지적하는 모습을 쉽게 찾아볼수 있습니다. 본디 교육경제학은 교육서비스를 개인 소비자의 교육수요와 사회필요노동수요에 의한 인적물적자원에 대한 투자공급으로 이루어 지는 학문으로 교육경제학은 운영과정을 세부적으로 검토하여 적정한 균형을 도출하는 학문이죠. 하지만 이 균형은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교육경제학이라는 것 자체가 시어도어 슐츠(Theodore.W.Schultz)가 고안한 슐츠방식으로 교육을 투자라는 관점으로 접근해서 학교단계별 졸업자의 소득의 차액을 산정해서 그 차액과 학교의 단계별 교육비간의 비율에 의한 수익률을 계산하도록 고안된 구조입니다. 즉 소위 말하는 비용,효과 접근법 (cost-benefit approach)로 교육의 효과와 투입된 경비간의 산출효과를 보고 교육운영의 효율성을 재고한다는 것이죠.
즉 이것은 본질적으로 변수선정 자체가 지극히 ‘고려가능한 변수’만을 들어 그럴싸한 모형을 제시해야만 하는 경제학의 한계에 그대로 노출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즉 ‘계산 불가’인 변수인 ‘교육의 경제적인 계산이 불가능한 나머지 변수’는 고려되지 않는단 것입니다. 그 근본적인 이유는 교육서비스는 공공재에 가깝지만 공공재는 아닌 한계를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이런 한계를 지닌 교육경제학적인 접근이 결국 공교육의 몰락을 가져오게 됩니다.
경제학의 유명한 말이 있지요 “시장은 효율적이다. 즉 시장의 향기는 자유롭다.” 과연 그럴까요. 이 말은 후생경제학 1정리인데 시장이 완전경쟁적이고 균형을 이룰수 있다는 전제하에 파레토 효율만을 이룰 수 있다는 겁니다. 즉, 변수가 가정인 이상 우리가 이룩한 균형과 효율은 반드시 잘못된 효율이란 걸 반증하는 셈입니다.
차라리 교육서비스를 공공재에 보다 가깝게 접근하고 있는 교육재정학적 측면을 말씀하셨다면 어느정도 이해가 가겠습니다. 하지만 교육재정학적인 측면에서도 그 근본은 교육‘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교육활동에 필요한 재화를 확보하는 것을 그 취지로 하고 있습니다. 이는 ‘신중식-현대교육행정학’을 보시면 잘 설명이 되어있습니다.
또한 지적하신 부분은 학교운영상의 문제를 지적한 부분이 많습니다. 제가 지적한 방향과는 다르다고 보입니만, 이 또한 교육이 경제학과 경영학의 영향을 받아 파생된 교육경영학이란 부분에서 문제가 야기된 것입니다. 이는 아직 정립된 바가 없어 학문적 근본이 없는 파생학론으로 현행을 보면 학교경영을 영조물 권력으로 파악하여 특별권력관계가 성립한다는 것을 지지하는 저급한 행태를 보이고 있습니다. 이러한 주객이 전도된 양상에 의해 교육이 몰락하는 것입니다.
Ⅲ. 전통적인 교육관을 기준으로 한 현 교육관의 점검
-교육관의 과거를 살펴봄으로서 우리가 결국 지향해야 하는 곳을 살펴봄
그렇다면 교육과 효율의 바람직한 양태를 위해서는 어떠한 기준으로 현 교육관을 점검해보아야 하는가를 논의하는것은 의미가 상당할 것입니다. 교육의 경제학적 경영학적인 접근은 제 학문들이 보여주듯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그 수행을 논하는 것만이 허락되어야 합니다. 즉, 학업의 성과만을 위한 효율이 아닌 전 글에서 언급했던 한국 교육의 목표인미성숙한 학생들이 지식·덕성 및 체력의 함양과 향상을 통하여 그가 속한 시대와 사회의 건전한 인격체로서 독립·발전할 수 있도록 가르치고 보살피는 숭고한 교육을 위한 효율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현재의 모습은 양날이 모두 중요한 검(劍)이 아닌 한쪽만 발달한 도(刀)의 형상인 것입니다. 물론 검(劍)과 도(刀)는 각각의 장점이 있겠지요. 하지만 우리의 교육이 지향하는 바가 검(劍)인데 도(刀)법을 발전시키는 것에만 혈안이 되어 있다면 무슨 가치가 있겠습니까.
작금 우리나라 한국의 근본적인 교육이념의 출처는 선조들의 대대로 내려오는 교육이념입니다. 가장 근본이 되는 이념은 개개인의 도덕적 인격의 완성을 통해 마음을 밝히고 세상을 밝혀내는 재세이화(在世理化), 널리 모든 사람을 이익되게 하는 것으로 전 인류사회의 평화와 행복이라는 이상인 홍익인간(弘益人間)입니다. 인간의 존엄성에 기초하여 인간을 본위로하며 인민을 근본으로 하는 인본(人本)과 위민(爲民)인 것이지요.
이는 이후의 여러 나라의 건립과 몰락을 겪으면서도 이어져 왔으며 심지어 일제강점기의 교육관에서도 뚜렷하게 드러납니다. 한말에 교육진흥을 위한 논의가 오가며 학회가 구성된 이유도 이런 이유였지요. 국민교육회, 서우학회, 홍사단, 여자교육회 등 학회들은 지식수용과정에서 주체가 되기 위해서는 조국정신, 진취정신을 강하게 주장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장지연, 박은식이 주장한 '상무교육'은 작금에 큰 시사점을 제공합니다. 이들은 한국이 국권을 상실한 이유는 '문'만을 숭상하고 '무'를 천시한 결과라며 '문약의 폐해'라고 지적하였습니다.
현재 한국의 상황과 비슷하다고 보이지 않습니까? 저는 장지연, 박은식을 따라 '성과를 내보이는 교과'를 지나치게 숭상하여 '기타등등'을 천시하는 '성과의 폐해'라 지적하고자 합니다. 현재의 상황은 일제강점기와 비교하여 그 변수만 다를 뿐이지 식민사관에 의한 국민성몰락과 우민양성처럼 결국 현대의 신자유주의적 성과주의라는 패러다임에 의해 같은 양상으로 수렴할 것입니다.
Ⅳ. 결론
현행 한국의 교육관은 위에서 살펴본 바에 의하면 역사에 역행하는 교육과정이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신자유주의적 관점에 매몰된 교육과정의 수립으로 인하여 교육의 본질을 잃고 있는거도 현실입니다. 이러한 한국적 상황에서 우리는 과거를 답습하여 바람직한 교육관을 정립하는 것이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을것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