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은 1919년, 1월 6일 호놀룰루를 출발하여 15일 샌프란시스코에 도착, 열차편으로 로스앤젤레스에 들러 1월 22일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장 안창호를 만나고, 뉴욕을 거쳐 2월 3일 필라델피아에서 서재필을 만났다. 이승만은 서재필, 정한경, 장택상, 민규식과 회동하고, 필라델피아를 떠나 워싱턴 D.C.로 달려가 파리행 여권을 준비하였다.
이승만은 미국 국적이 아니기 때문에 해외여행이 자유롭지 못했다. 여권 취득을 위해 윌슨 대통령을 면담하고자 했으나 윌슨은 하버드대 제자이기도 하는 이승만을 만나주지 않았다.
이승만은 필라델피아를 떠나 워싱턴 D.C.로 달려가 파리행 여권취득 노력에 박차를 가함과 동시에 일시 귀국 중인 윌슨 대통령을 면담하려고 애썼다. 2월 27일에 그는 미국 내무부 장관 레인의 소개로 국무장관 대리 폴크를 만나 그에게 파리행 여권을 시급히 발급해 줄 것을 요청했다. 폴크는 윌슨 대통령에게 품신한 후에 대답해 주겠노라고 대답했다. 그 후 폴크는 대통령으로부터 “이박사가(파리에) 오는 것은 유감”이라는 내용의 회답을 받고 3월 5일 이승만에게 여권발급 불가를 통고했다. 그런데 이승만은 이틀 전에 (3월 3일) 백악관 비서실장 투멀티로부터 윌슨 대통령의 면담 사절통보를 받고 이에 유감을 표하는 서한을 발송(3월 4일)한 바 있었다. 이 무렵 백악관과 국무부 측이 이승만에게 보여준 일련의 냉대는 이박사가 윌슨과의 절친한 친구로서 윌슨 대통령의 신임이 두텁다는 신화를 여지없이 깨뜨리고 말았다. (주석 20)
이승만과 그 일행의 파리 강화회의 참석이 불가능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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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일제가 이승만이 파리가기위해 여권내줄리도 만무하고, 이승만이나 안창호같은 신분의 처지의 사람들은 미국정부가 내주는 무여행권 'without passport'받아야만 해외여행이 가능했다.
이런탓에 안창호는 상해임정때 중국국적 취득해서 활동했었다 (ancestry보면 그뒤 미국들어올땐 중국인으로 들어왔슴)
하와이서 이승만과 문제가있던 박용만경우도 중국건너가서 중국국적취득했었지 (이거때매 중국여자랑 결혼해서 이중살림얘기나왔던거고)
이승만경우는 끝까지 외국국적 취득하지않고 버틴경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