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BRD보다 국가기간고속도로건설계획조사단에서 먼저 경부고속도로 타당성에 대한 검토가 있었고..
그후 IBRD에 의뢰 하여나온것이 다들 아시는 결과입니다.
당연히 국가에서 일을추진하는데 조사가 없었을리는 없고..
그조사 결과를 찾아오라고 하는것은 억지스럽기까지 하네요..
「고속도로」라는, 당시 대부분의 국민들에게는 생소했던 낱말이 처음 전해진 것은 1967년 4월 18일이었다. 그해 5월 3일에 있을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현직의 박정희(朴正熙)대통령과 야당의 윤보선(尹潽善)후보가 치열한 선거전을 전개하고 있었던 때였다. 대전에서의 첫번째 합동유세(合同遊說)에 박대통령을 수행했던 한 정부 고위관리가 박후보의 공약사업의 하나로 가속적인 경제발전에 따른 수송량 증대에 대응하기 위해 서울∼인천, 서울∼동해안, 서울∼목포, 서울∼부산 사이에 폭 50m 이상의 고속도로를 건설키로 하고 현재 건설부에서 기초조사 중이며 호남선 철도의 복선공사는 1968년 초에 착수할 계획임을 밝혔다.
이어 대통령 선거를 하루 앞둔 5월 2일 오전 10시, 청와대에서 가진 출입기자단 회견에서 박대통령은 공약사업으로 제2차 경제개발계획 기간의 중간부터 시작하여 제3차 경제개발계획 기간에 걸쳐 40억달러를 투자, 대국토(大國土) 건설사업을 전개하겠다고 밝혔다.
그 내용으로는 ①한강 · 낙동강 · 금강 · 영산강 등 4대 강 개발, ②동해안 · 서해안을 잇는 환상철도 건설, ③부산 · 인천 · 군산 등 10대 항만의 보수 등과 더불어 서울을 중심으로 인천 · 강릉 · 부산 · 목포를 잇는 고속도로 건설을 펴 나가겠다고 밝혔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비중이 크고 국민들의 관심을 끈 것이 고속도로 건설계획이었다.
당시 제1차 경제개발계획의 성공적인 달성, 제2차 경제개발계획의 추진으로 수송 수요는 급격히 증가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당시의 주된 수송수단은 철도였고 도로사정은 형편이 없었다. 국도의 포장률은 극히 낮았으며 그 노폭도 좁아 도저히 대량수송을 감당할 처지가 못되었다. 이리하여 정부는 제2차 경제개발계획의 착수에 앞선 1966년 중에 세계은행(IBRD)에 의뢰하여「한국 경제의 현황 · 장래와 수송문제」를 연구시켰으며, 행정개혁조사위원회는 한국산업능률본부에「우리나라 공로(公路) 및 운수행정에 관한 조사연구」를 위촉 · 의뢰하고 있었다. 그러나 서울∼인천간, 서울∼부산간 등에 고속도로를 건설해야 한다는 것은 박대통령의 단독구상이었을 것 같으며, 결코 이들 보고서의 내용에 영향을 받았거나 경제기획원장관이나 건설부장관의 건의에 의한 것이 아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박대통령이 이와 같은 구상을 하게 된 동기는 1964년 12월 서독 방문 때에 비롯되었을 것이다. 1964년 12월 6일부터 약 1주일간에 걸친 서독 체류 당시 박대통령은 서독의 여러 산업시설들을 돌아보았는데 그 중에서 독일이 자랑하는 고속도로(Autobahn)에 상당히 깊은 인상을 받은 것 같다. 1932년부터 건설에 착수하여 1933년 히틀러가 총통에 취임한 후에 본격적으로 건설된 총연장 4천㎞가 넘는 독일의 고속도로는 건설 당시에는 세계의 큰 놀라움이었고 오늘날에 와서도 그 뛰어나고 훌륭함에서 전세계 고속도로의 모범이 되고 있다.
1960년대 후반, 서울시장이었던 김현옥(金玄玉)의 예에서 볼 수 있듯이 당시의 군출신 행정가들이 가장 힘을 기울였던 사업이 도로 건설이었다. 가장 뚜렷하게 표가 나고 오랫동안 남기 때문이다.
1967년 5월 3일의 대통령선거에서 박대통령은 재선되었고 이어 6월 8일에는 국회의원 선거도 치뤄졌다. 부정선거 규탄데모가 온 나라 안을 뒤덮다시피 한 가운데서도 고속도로 건설의 타당성 검토는 계속되었고, 건설부 도로관계 직원들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동분서주하였다.
11월 7일에 있었던 정부 · 여당 연석회의에서 서울∼인천간 고속도로와 더불어 서울∼부산간 고속도로를 타노선에 앞서 건설하기로 하였다.
울산공업단지는 이미 제1차 경제개발계획 기간 내에 조성되어 있었고 제2차 경제개발계획 기간 내에는 포항에 종합제철공장을 건설키로 되어 있었을 뿐 아니라 대구 · 울산 · 부산 · 마산 등 이른바 낙동강 경제권은 인구와 산업의 양면에서 수도권에 다음 가는 지역적 비중을 점하고 있었으므로 이 양대권을 우선적으로 연결키로 한 것은 당연한 결정이었다.
1967년 11월 7일, 정부 · 여당 연석회의에서 경부고속도로의 건설이 결정되자 바로 국무총리를 위원장으로, 경제기획원장관을 부위원장, 건설부장관을 간사장, 내무 · 법무 · 국방 · 재무 · 농림 · 건설 · 교통 · 무임소 등 각부 장관과 국세청장, 서울 · 부산 각 시장 및 한국은행 총재 등을 위원으로 하는「국가기간고속도로건설추진위원회(國家基幹高速道路建設推進委員會)」가 구성되었고, 실무자들로 구성된「국가기간고속도로건설계획조사단」도 발족되었다.
계획 및 조사업무 일체를 이 조사단에서 작성하였고, 최종 결정은 박대통령이 직접 지시하고 결정하였다. 고속도로 건설의 관건은 첫째 이 고속도로가 어디에서 출발하여 어디를 거쳐 어느 지점에 이르도록 하느냐였다. 네 가지 방안을 놓고 숙의한 끝에 현재의 노선인 서울의 제3한강교 남단을 기점으로 하여 수원∼오산∼천안∼대전∼영동∼황간∼김천∼구미∼왜관∼대구∼영천∼경주∼언양∼양산을 거쳐 부산시 동래구 구단동에 이르는 428㎞의 노선으로 확정되었다.
둘째는 얼마나 많은 건설비가 소요되며 그 재원은 어디서 염출하는가 하는 문제였다. 여러 기관에서 건설에 소요되는 비용을 산출하였는데, 건설부는 650억원, 재무부는 330억원, 서울시는 180억원, 육군 공병감실은 490억원, 현대건설은 280억원이 소요된다고 추정하였다. 당황한 것은 건설부였다.
서울시가 180억원, 현대건설이 280억원이 소요된다고 했으니 650억원을 제시한 건설부의 입장이 말이 아니었다.
건설부는 결국 추정액을 다시 산정하여 450억원이면 가능하다고 당초의 제안을 수정하였다. 박대통령은 서울시가 제안한 180억원과 건설부의 450억원의 중간치인 315억원과 현대건설이 제안한 공사비 280억원을 검토하여 일단 300억원으로 추정하기로 최종 결단을 내렸다.
재원 염출 또한 큰 문제였다. 여러 가지 연구 끝에 1968년 2월 5일에 열렸던 경제장관회의에서 일반회계에 계상된 석유류(石油類) 세법(稅法) 중 휘발유에 대한 세율을 2배로 인상하기로 하고 그밖에 95억원의 도로국채(道路國債)를 발행하여 상환기간을 1년 거치 3년 분할 상환키로 하였으며, 또 대일청구권자금(對日請求權資金) 27억원, 통행료 수입 15억원 등으로 300억원의 재원을 충당키로 결정하였다.
재원 염출과 관련, 정부는 고속도로 건설용 용지 매수에서 과천 · 성남 갈림길까지의 고속도로 용지를 무상으로 확보하기 위해 당시에 시설결정이 내려져 실시설계 중에 있던 영동 제1구획정리지구 내의 공공용지로써 고속도로 부지를 확보하는 등의 편법을 썼다. 이 구간 고속도로의 조성공사도 토지구획정리사업으로 이루어졌던 것이다. 경부고속도로 건설공사의 정확한 착공 날짜는 알 수가 없다.
공식적인 착공일자는 1968년 2월 1일이었지만 서울∼오산간의 공사는 그 보다 훨씬 앞선 1967년 11월부터 착공되어지고 있었으며 그것도 예산이 없는 사전공사였다는 점, 둘째 이 도로의 초기공사는 설계도 제대로 끝나기 전, 즉 설계와 공사가 병행되었기 때문이다.
특이한 것은 고속도로의 노선 결정이나 건설 공정계획도 박대통령이 직접 독단적으로 결정하였다는 점이다.
서울∼수원간이 개통된 것은 1968년 12월 21일이었고, 수원∼오산간은 10일 후인 12월 30일에, 오산∼천안간은 1969년 9월 29일, 천안∼대전간은 그해 12월 10일에, 대구∼부산간은 그보다 20일이 늦은 12월 29일에야 개통되었다.
당시 군사정부에 의한「하면 된다」라는 우직함에 의하여 마침내 총연장 428㎞에 걸친 대역사가 완공되었다.
토공량이 6천만m3, 장대교(長大橋) 32개소, 중소 교량 273개소, 횡단통로 465개소, 터널 12개소, 동원된 연인원 900만명, 사망자 77명 등 「단군 이래 최대의 토목공사」인 이 도로가 완전 개통된 1970년 7월 7일, 대구공설운동장에서 개최된 준공식에서 박대통령은「이 공사는 민족의 피와 땀과 의지의 결정이며 민족적인 대예술작품」이라고 자찬하였다.
경부고속도로의 개통이 가져다 준 영향과 그 효과는 큰 것이었다. 우선 자동차시대의 개막, 그리고 전국토 1일 생활권시대를 열어 놓았다는 것, 전국토의 지역개발 효과와 경제개발 촉진, 방대한 양의 사람과 물자의 지역간 이동, 대도시 집중의 가속화, 국민 의식수준의 급격한 향상 등이 바로 고속도로의 건설 · 개통이 가져다 준 효과들이었다. [註29]
그런데 이 경부고속도로 개통이 수도 서울과 서울시민에게 가져다 준 효과는 또 다른 것이었다. 바로 「시민 전체의 강남지향(江南指向)」이었고 영동지구 구획정리사업에 대한 깊은 인식이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