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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당시 민중이 지녔던 민주화에 대한 갈망이었는지.. 시위성격에 따라 다른거지요.
폭동 사태 민주화 운동으로 구분짓는거는 전국적인 시대상황를 보면 쉽죠.
광주만 그런것도 아니고 전국 대소도시에서 릴레이 시위였으니..
광주 민주화 운동이 폭동이면 부산 마산 서울 대전 뭐 할거 없이 다 폭동이죠.
최규하 정부 하에서 개헌과정을 밟는 와중에 광주사태라는 비극이 터졌고,,
그건 결국 과도정부 리더쉽에 큰 타격을 준 것이 되버렸습니다.
박정희 사망후 권력공백 혹은 권력진공 상태를 개헌을 통해 안정적으로 차기로 넘기는 와중에 리더쉽 타격을 받았고, 권력공백,진공은 자의반 타의반 전두환에게 자연히 넘어가게 되는 것이 되버린 겁니다.
광주사태 전 사회분위기는 개헌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광주사태 이후엔 그렇지 않게 됩니다.
왜곡이 장난아니네
[전두환은 최규하(崔圭夏) 과도정부를 유명무실하게 하고 국민들이 민주주의 요구를 거부하면서 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1980년 5월 15일 서울역을 비롯하여 전국적으로 격렬한 시위가 확산되자 신군부세력은 1980년 5월 17일 '비상계엄 전국확대조치’를 발표하고 자기의 의견에 반대하는 모든 사람들을 탄압하고 투옥시키자 광주시민들은 5월 18일 거세게 항쟁한다]
[12월 12일 신군부 세력이 이른바 12·12사태를 일으켜 권력을 장악하고 1980년 5월 광주민주화운동을 무력으로 진압하는 과정에서 대통령으로서의 통치권을 행사하지 못하였다]
[출처] 최규하 | 두산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