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1편 )
광복군과 전략외사실의 합동작전회의
1896년 3월 29일 류인석 의병장이 지휘하는 항일의병 3,500명이 일본군이 관군과 함께 주둔하는 충주 관찰부를 공격하고 충주성을 점령한 것이 항일전쟁의 시작이다.
의병운동이라는 말이 쓰이지만, 조선을 침략한 일본군과 치열한 교전을 벌인 의병부대들의 무장투쟁은 의병운동이 아니라 항일전쟁이다. 이런 사실을 보면, 항일전쟁은 1896년 3월 29일부터 1945년 8월 15일까지 49년 동안 지속되었다는 사실이 자명해진다.
일왕 히로히또가 라디오방송을 통해 항복을 선언하였던 1945년 8월 15일 이후에도 일본군은 무장해제를 거부하였고 일부 지역에서는 교전이 벌어지는 바람에 제2차 세계대전은 일제가 항복문서에 조인한 1945년 9월 2일에 종전되었지만, 조선민족의 항일전쟁은 히로히또가 항복선언을 발표한 1945년 8월 15일에 사실상 종전되었다.
49년 동안 지속된 항일전쟁은 항일의병전쟁 → 항일독립전쟁 → 항일혁명전쟁으로 발전하였다.
1896년부터 1910년까지 항일전쟁 제1단계에서는 항일의병전쟁이 전개되었고,
1911년부터 1931년까지 항일전쟁 제2단계에서는 항일독립전쟁이 전개되었고,
1932~1945년까지 항일전쟁 제3단계에서는 항일혁명전쟁이 전개되었다.
1896년부터 근 반세기에 걸쳐 간고한 혈전이 계속된 항일전쟁은 1945년 8월 15일 마침내 조선민족의 승리로 끝났다.
항일전쟁 종전 74주년을 맞은 오늘 그 전쟁이 어떻게 종전되었는지 정확하게 인식할 필요가 있다. 위대한 항일전쟁 종전의 역사는 74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45년 8월 7일 중국 산시성 시안(西安)에서 매우 특이한 작전회의가 진행되었다. 김구 임정(임시정부의줄임말) 주석을 비롯한 임정 및 광복군 고위지휘관들과 윌리엄 도노반 미국 육군 소장을 비롯한 전략외사실(Office of Strategic Services, OSS) 고위지휘관들의 합동작전회의였다.
전략외사실은 1942년 6월 13일 미국 대통령 프랭클린 로저벌트의 특명으로 조직되어 제2차 세계대전 중에 활동하다가 1945년 9월 20일에 해체된 전시군사정보기관이다. 전략외사실을 모체로 하여 1947년 9월 18일에 중앙정보국(CIA)이 조직되었다.
그런데 미국의 전시군사정보기관 지휘관들이 왜 중국 시안에서 광복군 지휘관들을 만나 합동작전회의를 했을까? 거기에 얽힌 사연은 다음과 같다.
프랭클린 로저벌트 대통령은 자기의 특명으로 창설된 전략외사실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큰 몫을 하리라고 기대했지만, 전략외사실은 전공을 세우지 못했다. 그래서 당시 워싱턴 정가에서 전략외사실 무용론이 나돌게 되었다.
존폐위기에 내몰린 전략외사실은 제2차 세계대전의 마지막 격전지로 떠오른 아시아전선에서 반드시 전과를 거두어야 하였다. 다급해진 전략외사실은 일제가 강점한 한반도에 공수특전대를 침투시키는 작전계획을 1945년 1월에 수립했다.
이상.. 02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