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가폭등으로 박정희 정권 벼랑 위로
‘수치로만 배부른 고도성장’(79년 4월 9일자 동아일보)이었다.
살인적인 물가고로 서민들의 삶은 갈수록 쪼그라들었다.
경기 과열로 물자가 부족해지자 극심한 인플레이션이 일어났고
부동산 투기도 극성을 부렸다. 신규 아파트 값은 분양 즉시 폭등했다.
‘복부인’ ‘프리미엄’이란 신조어가 이때 등장했다.
“공고 졸업인 M씨 봉급은 세금 등을 빼고 나면 월 15만 원.
이것으로 노모와 어린 두 자녀, 아내 그리고 고교생인 남동생 등 6식구 생계를 꾸려가면서
작년 봄까지만 해도 월 2만 원씩을 저축했으나 올해에는 저축은 커녕
다달이 생계를 잇기조차 어렵다. 경제는 해마다 고도성장을 한다는데
어째서 물가는 엄청나게 오르기만 하는지, 왜 갈수록 살기가 어려워지는지
의문에 잠기게 된다. 고도성장에 회의를 품는 사람은 M씨뿐이 아니다.
작년 이래 엄청난 물가고와 유례없는 투기 붐, 걸핏하면 빚어지는 생필품 파동에 시달려온
저소득 서민들은 누구나 과연 고도성장이 무엇을 가져다주는 것인가라는 의문에 잠겨 있다.”
자고나면 물가가 오르니 사재기도 판을 쳤다.
79년 7월 11일자 동아일보 보도다.
“유류 값 및 전기요금 인상에 이어 관련 제품 값도 최고 48%까지 인상 발표되자
아파트 등 고급 주택가 수퍼마켓 상가 등에서는 비누 화장지 설탕 식용유 등
생필품을 리어카와 용달차로 한 차씩 사들이는 ‘사재기’가 또다시 극성이고
버스요금 인상설에 자극돼 미리 쇠표(토큰)를 사두려는 시민들이 판매소에 줄을 이었다.”
무엇보다 성장의 열매가 골고루 퍼지지 않고 있다는 노동자들의 항변이 갈수록 뜨거워져
기폭점(起爆點)을 향해 올라가고 있었다.
노동삼권이 제한된 엄혹한 환경이었지만 1972년 346건이던 노동쟁의는
1973년 666건, 1975년 1045건, 1976년 754건, 1977년 1864건, 1979년 1697건으로
폭발적으로 늘기 시작했다.
한국노총 산하 조합원 수도 1970년 49만 명에서 1979년 109만 명으로 늘었다.
http://www.donga.com/news/article/all/20130808/56924439/1
소득불평등, 1970년대 후반 가장 컸다…
양극화 뿌리는 개발독재시대 재벌 특혜
소득 분배와 관련한 정부의 공식 통계는 1990년부터 발표되지만
한국개발연구원과 이정우 경북대 교수 등 전문가들의 분석에 따르면
한국의 지니계수는 1965년 0.344, 1970년 0.332, 1976년 0.391,
1982년 0.357, 1990년 0.323 등으로
1970년대 후반 가장 컸다.
지니계수는 1로 갈수록 소득불평등도가 높다는 의미다.
현대사에서 분배가 가장 좋았던 시절은 1987년 민주화 바람을 타고
‘노동자 대투쟁’이 일어난 뒤인 1988~1996년이었다. 노동조합 결성 등으로
노동자들의 힘이 세지면서 임금이 큰 폭으로 올랐고, 소득 격차도 줄었다.
1988년과 1989년에 각각 도입된 국민연금과 전 국민 의료보험도 빈부 격차 해소에 기여했다.
이 시기에는 경제도 활기가 돌았다. 소득 증가가 내수 확대로 이어져
경제가 성장하고, 성장은 다시 소득 증가로 이어지는 선순환이 생겼다.
1988~1996년 연평균 실질 경제성장률은 8.3%에 이르렀다.
2001~2010년 평균 경제성장률 4.2%의 두 배이고,
박정희·전두환 정부 시절인 1970~1986년의 연평균 성장률(7.6%)보다 높다.
http://m.biz.khan.co.kr/view.html?art_id=201406122045271
서민들의 삶은 고통의 나날, 청와대 안가에서는 쾌락의 나날..
보다못한 심복이 심판 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