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물농장: 인간이 돼지를 착취하고 있다고 선동질
좌파: 부자 기업이 노동자를 착취하고 있다고 선동질
동물농장: 돼지가 직접 농장을 경영하면 모든 돼지들이 평등해진다고 선동질
실제로 권력을 잡은 돼지들은 같은 돼지들을 착취함
좌파: 부자 기업 때려잡고 자기들이 직접 정치 경제하면 모든 인민이 평등해지고 잘 산다고 선동질
실제로 권력을 잡은 좌파독재자들은 같은 인민들을 착취하고 더 가난하게 만듦
동물농장: 권력을 잡고 나서는 돼지들끼리 권력투쟁하고 싸움
좌파: 카스트로와 체게바라의 권력대립
스탈린과 트로츠키의 권력투쟁 (트로츠키가 숙청됨)
김일성도 권력잡고 남로당 박헌영 등 수많은 사람들 숙청
동물농장: 간교한 스퀄러가 대중들 선동
좌파: 유시민같은 선동가들이 대중들 선동
피곤하다. ‘조국’이란 말만 들어도 현기증이 날 정도다. 우리 조국(祖國) 말고 결국 사퇴한 그 전 장관 말이다. 두 달 넘게 ‘굿모닝 조국’으로 날이 밝아 ‘굿나잇 조국’으로 해가 졌다. 까도 까도 비리와 의혹은 쏟아졌고, 그걸 덮고 옹호하려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새로운 이슈가 생겨났다. 그러다 보니 조국이 가련하게 느껴진다는 동정 여론마저 있었다. 영화 ‘살인의 추억’에서 형사역 배우 송강호가 연쇄살인 용의자에게 건네던 대사가 드디어 이해가 된다. “밥은 먹고 다니냐?”
독재자 호위하던 사냥개
힘들다. 작년보다 매출이 올랐다는 자영업자를 찾아보기 힘들다. 올해는 작년보다 좋지 않고, 작년은 전해보다 나빴으며, 내년도 올해보다 나아질 리 없다고 입을 모은다. 모두가 한숨만 푹푹 내쉰다. 그럼에도 정부는 “경제 상황이 나아지고 있다”며 요란한 통계 수치를 꺼내놓는다. 취업률이 어떻고, 소득증가율이 어떻고…. 편의점 한구석에 앉아 그런 뉴스를 들으며 소설 ‘동물농장’의 한 페이지를 펼쳐 읽는다.
“일요일 아침이면 스퀼러가 기다란 통계 숫자 목록을 펴놓고 그간 농장의 각종 식량 생산량이 200퍼센트, 300퍼센트, 혹은 500퍼센트 늘어났다고 발표했다. (…) 그렇지만 동물들은 통계 숫자보다는 먹을 것이나 더 많았으면 좋겠다고 느끼는 때가 자주 있었다.”
아리송하다. 검찰을 개혁해야 한단다. 경찰서 문턱조차 밟아본 적 없는 선량한 민초들로서는 검찰이 바뀌어 우리 삶의 무엇이 달라질지 알 수 없지만, 나라님들이 하시는 일이니 그러려니 할 따름이다. 그럼에도 역시 아리송하다. 무지렁이 백성들이 목격한 바로는, 그간 검찰의 잘못이라면 정권이 바뀔 때마다 권력의 충견이 돼 칼춤을 추는 바로 그런 모습에 눈살을 찌푸렸던 것인데, 새로운 정부가 출범하고 지난 2년간 마르고 닳도록 검찰을 써먹다가 이제야 ‘개혁’을 하겠단다. ‘동물농장’의 독재자 나폴레옹에게는 그를 호위하는 아홉 마리 사냥개가 있다. 그 사냥개를 써먹을 만큼 써먹다 뒤늦게 불태워 찜통에 넣는 모습이랄까. 정권의 핵심을 향해 이빨을 곤두세우니 “이게 어디 사냥개 주제에!” 하면서 만악의 근원처럼 몰아세웠다. 토사구팽(兎死狗烹)의 현실 사례로 이보다 선연한 경우가 어디 있을까.
조지 오웰은 견결한 사회주의자!
왕년에 ‘동물농장’이 반공 교재로 종종 활용되는 바람에 조지 오웰을 투철한 반공주의자로 알고 있는 사람이 더러 있다. 반공주의자는커녕 오웰은 죽을 때까지 견결한 사회주의자였다. 영국인이지만 스페인 내전에 참전해 직접 총을 들고 파시스트와 맞설 정도로 행동주의자였다. 스페인 내전 때의 경험을 ‘카탈로니아 찬가’라는 책으로 기록했는데, 내용을 살펴보면 전쟁 내내 단결하지 못한 좌파와 공산당을 비판하는 내용이 주를 이룬다. 조지 오웰이 죽기 전해에 쓴 또 하나의 명저가 있다. ‘빅 브라더’라는 용어로 유명한 ‘1984’. 독재국가를 비판할 때 주로 인용되는 책이다. 소련 비판, 공산당 비판, 통제사회 비판…. 언뜻 보면 조지 오웰은 좌파 내에서 소위 ‘내부 총질’을 일삼은 사람 같은데, 바로 거기서 작가이자 사상가, 운동가로서 오웰의 위대함이 빛난다. 말과 행동의 일치를 실천하고, 내부의 고름조차 가감 없이 드러내 비판했으며, 공평과 정의의 잣대가 진영에 따라 달라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자신의 삶을 통해 몸소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1984’도 그렇지만 ‘동물농장’을 읽다 보면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조지 오웰은 반세기 뒤에 펼쳐질 세상을 미리 내다보고 소설을 쓴 것만 같다. 마치 엊그제 여기서 쓴 것 같은 대목도 있다. ‘동물농장’은 그야말로 냉소적인 디스토피아다. 인간에 맞서 동물들이 반란을 일으켜 자신들만의 ‘동물농장’을 선언한다는 우화적인 이야기를 기둥으로, 혁명의 일원이 점차 새로운 지배계급으로 변질되는 과정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지극히 정치적이고 철학적, 역사적인 소설이다. “이거 우리 이야기하는 거 아니야?” 싶은 대목이 한둘이 아니다.
책에서 인상적인 대목은 혁명에서 승리한 후 동물들이 ‘일곱 계명’을 벽에 기록하는 장면이다. “무엇이건 두 발로 걷는 것은 적이다”로 시작되는 동물들의 새로운 다짐은 △어떤 동물도 옷을 입어서는 안 된다 △어떤 동물도 침대에서 자서는 안 된다 △어떤 동물도 술을 마시면 안 된다 등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마지막 계명은 “모든 동물은 평등하다”다.
책은 일곱 계명이 무너지는 과정을 보여주는데, 흥미로운 점은 그런 계명이 무작정 한꺼번에 부정되는 것이 아니라 ‘예외’를 두면서 하나씩 서서히 무너진다는 사실이다. 예컨대 “어떤 동물도 침대에서 자서는 안 된다”는 계명은 “어떤 동물도 ‘시트를 깔고’ 침대에서 자면 안 된다”로 바뀌는데, 새로운 지배계급이 된 돼지들이 침대를 이용하기 시작하며 그런 행위를 합리화한 것이다. 그리고 “어떤 동물도 술을 마시면 안 된다”는 계명도, 돼지들이 술을 즐기기 시작하면서 “어떤 동물도 ‘너무 지나치게’ 술을 마시면 안 된다”로 슬그머니 바뀐다. 이런 ‘내로남불’ 억지 논리, “그래도 옛날 그놈들보단 낫잖아” 하는 목소리 큰 자기 합리화, 요즘 어디서 많이 듣는 소리 아닌가?
책은 결국 모든 계명이 사라지고 오직 하나의 계명만 남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모든 동물은 평등하다”는 마지막 계명에는 “그러나 어떤 동물은 다른 동물들보다 더 평등하다”가 덧붙여진다. 이런 선민의식, 이것도 요즘 어디서 많이 목격하는 풍경 아니던가!
돼지들의 앞잡이 양떼들
돼지, 말, 당나귀, 염소, 까마귀, 닭, 쥐, 고양이…. ‘동물농장’에는 여러 동물이 등장한다. 그중 흥미로운 족속은 양 떼인데, 이들은 동물농장의 운영 방식에 다른 동물이 이견을 제시할 때마다 “네 발은 좋고 두 발은 나쁘다”라는 말만 지겹도록 반복해 외쳐대면서 정상적인 토론을 불가능하게 만들어 버린다. 그런 방식으로 그들은 돼지들의 앞잡이 노릇을 한다. 그런데 책의 끝에 흥미로운 반전이 등장한다. 세월이 흘러 돼지들이 토착 지배계급으로 굳건히 자리를 지키고, 결국 돼지들이 두 발로 일어나 걸어 다니며 인간 행세를 하게 되자 양들은 과감히 구호를 바꾼다. “네 발은 좋고 두 발은 더 좋다!” 이 또한 어디서 많이 보던 사람들의 모습 아닌가!
메이저는 마르크스, 나폴레옹은 스탈린, 돼지는 볼셰비키와 노멘클라투라(공산 귀족), 사냥개는 비밀경찰…. 이렇게 ‘동물농장’을 옛 소련에만 대입할 필요는 없다. 혁명이 배반당한 모든 곳, “뭔가 나아지는가 했더니 결국 그놈이 그놈”이라는 쓴웃음 가득한 현장 어디든 동물농장은 살아 있다.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나라를 만들겠다더니 그런 게 이런 거였나” 하는 한숨이 넘치는 오늘날 지구의 어떤 나라에도 동물농장은 살아 있다. ‘동물농장’에서 조지 오웰은 누구보다 혁명을 지지하며 앞장섰던 암말 클로버의 독백을 빌려 이렇게 말한다. “그런데 그 사회 대신 찾아온 것은, 아무도 자기 생각을 감히 꺼내놓지 못하고 사나운 개들이 으르렁거리며 돌아다니고 동물들이 무서운 죄를 자백한 다음 갈가리 찢겨 죽는 꼴을 보아야 하는 사회였다. 왜 그렇게 된 건지 그녀로선 알 수 없었다.”
동물들이 불만을 토로할 때마다, 반항하려 할 때마다 돼지들은 이런 식으로 날카롭게 대꾸한다. “그럼 존스(옛 농장주) 시절로 다시 돌아가자는 말인가?” 무슨 말만 하면 ‘이명박근혜 시대’를 운운하는 현자들을 볼 때마다 ‘동물농장’의 돼지와 양들이 떠오른다. 조지 오웰은 거기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동물들은 그 말을 그대로 믿었다. 사실대로 말하면, 존스라든지 존스라는 이름이 의미하는 모든 것은 이미 동물들의 기억에서는 거의 대부분 잊히고 없었다. 그들은 지금의 삶이 고단하고 힘들다는 것, 자주 춥고 배고프다는 것, 잠자는 시간을 빼면 하루 종일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지난날 존스 시절에는 사정이 훨씬 더 나빴던 것임에 틀림없다고 동물들은 생각했다. 그들은 즐거이 그렇게 믿었다.” 우리도 그렇게 믿어가는 중이다.
속이 메슥거린다. 탈원전한다고 편성된 수조 원의 예산을 따먹겠다며 과학의 기역 자도 모르던 사람들이 ‘태양광’ 명함을 만들어 장관 누구는 옛 동지이고 국회의원 누구는 같이 화염병 던지던 후배라고 거들먹거리며 돌아다닌다. 1960~70년대 돼지들은 각종 인허가로 짭짤한 자금을 만들고, 1980~90년대 돼지들은 토지 형질 변경을 해주는 뒷거래로 자금을 만들었다면, 지금의 테크노 돼지들은 국가 재정에 빨대를 꽂는 것으로 더불어 먹고사는 자금을 형성한다. 그러곤 말한다. “합법인데 뭐가 어때?” 이윽고 돼지들은 말한다. 이런 모든 경제 상황에 대해 “체질 개선에 따른 고통”이라고, “개혁에는 원래 몸살이 따르는 법”이라고, “큰 방향에서는 옳게 가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취업률이 올라가고 소득 격차가 줄어들었다는 낯선 통계를 거론하는데, 평소 10등 정도 하던 녀석이 30등으로 떨어졌다가 20등을 해놓고는 “10등이나 올랐어요!” 자랑하는 이런 넉살은 기특하다고 칭찬해줘야 하는 걸까? ‘동물농장’에 이런 표현이 등장한다. “그(돼지)는 ‘감축’이란 말은 절대로 쓰는 법이 없고 언제나 ‘재조정’이라 말했다.” 그래, 지금 우리 경제는 추락하는 것이 아니라 거대하게 ‘재조정’되고 있다고 생각해버리자. 이쯤 되면 어디가 대한민국이고 어디가 동물농장인지, 누가 돼지이고 누가 집권세력인지 어지럽게 헷갈린다. ‘동물농장’의 마지막 문장은 이렇다. “창밖의 동물들은 돼지에게서 인간으로, 인간에게서 돼지로, 다시 돼지에게서 인간으로 번갈아 시선을 옮겼다. 그러나 누가 돼지고 누가 인간인지, 어느 것이 어느 것인지 이미 분간할 수 없었다.”
한때는 유토피아를 믿었고 ‘사람이 꽃보다 아름답다’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미래는 그저 디스토피아일 뿐이며 사람만큼 위선적인 동물도 없다고 생각한다. 작금의 시국이 그것을 가르쳐주었다. 조지 오웰 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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