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보수도 1989년에는 비전, 전략, 리더십의 ‘담대함’이 있었다. 1989년 9월 노태우는 과도적 통일체제로 ‘남북연합’을 상정하는 ‘한민족공동체통일방안’을 제시했다. 1991년 9월에는 남북한 유엔 동시가입이 이루어졌다. 1990년 9월부터 시작된 남북고위급회담은 1991년 12월 5차 고위급회담에서 ‘남북기본합의서’로 결실을 맺었다.
노태우 정부는 냉전이 끝나고 사회주의가 무너지는 틈을 타 ‘북방정책’이라는 전략적 기조로 사회주의국가들과 과감하게 수교했다. 1989년 헝가리·폴란드, 1990년 소련, 1992년 중국·베트남과 수교했다. 그런 보수 진영이 1994년 김일성 사후 25년간 ‘북한 붕괴’라는 감이 떨어지기만 기다리다 2019년 한반도 신질서의 ‘주’도 ‘객’도 아닌 구경꾼으로 전락했다.
‘북한은 비핵화 의지가 없다’ ‘완전한 비핵화가 아니면 어떤 합의도 의미가 없다’ ‘단계적 비핵화는 문재인과 김정은의 바람일 뿐 미국이 동의할 리가 없다’는 확신과 신념 때문에 지난 25년간 ‘북한 붕괴론’에 사로잡혀 한반도 평화체제 전환의 주도권을 진보 진영에 내준 역사적 실패를 반복할 가능성이 있다. 마치 25년 전에 일본이 메모리 반도체를 한국에 내준 뒤 세계 정보산업에서 존재감이 거의 없는 지경까지 추락한 상황과 흡사하다.
1989년에 보수 진영은 비전·전략·리더십이 있었다. 한반도 평화체제를 위한 담대한 구상도 있었고, 거대한 사회주의시장을 잡으려는 과감한 결단도 있었고, 추진을 안정적으로 뒷받침하려고 ‘보수 통합’을 위한 3당 합당을 결의할 정도의 리더십도 있었다. 지금 한국 보수는 꿈도 잃고, 힘도 잃고, 길도 잃었다. 이제는 낡아서 쓸모없게 된 1970~1980년대식 ‘빨갱이’ ‘좌파 독재’ ‘자유 우파’의 세상에 갇혀 고립을 자초하고 있다.
자유한국당은 여전히 국정농단과 탄핵에 대한 반성이 없다. 자유한국당은 탄핵을 적극적으로 부정하는 사람, 소극적으로 부정하는 사람, 소극적으로 인정하는 사람이 ‘주’를 이루는 당이다. 탄핵을 적극적으로 인정하는 사람은 ‘객’의 신세일 뿐이다. 그런 신념을 비판할 생각은 없다. 다만 그런 식의 인식, 태도, 인물, 정책, 메시지로 이길 수 있다고 믿는 무모함에 놀랄 뿐이다.
1989년에서 한 세대가 흐른 2019년 사이에 많은 변화가 있었다. 중국의 부상과 일본의 위상 추락도 놀랍지만 내 눈에는 한국 보수의 몰락이 가장 놀랍다. 경제·외교·안보에서 정면 승부를 해야 할 시간에 청년·여성을 잡겠다면서 엉덩이춤이나 추고 젊은 사람 당직에 임명만 하면 되는 줄 알고 있으니 자유한국당의 시계는 도대체 몇 시인가. 지금은 한국 보수의 어둠의 시간(Darkest Hour)이다.
-박성민의 정치 인사이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