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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9-10-19 16:45
한국 대학은 난쟁이다
 글쓴이 : 초록바다
조회 : 445  


나는 대학 시절 신채호 선생의 <조선상고사>를 읽고 깜짝 놀랐습니다.
1980년대의 한국사학자들에게서는 좀처럼 찾을 수 없는, 우리 역사에 대한 독창적 시각에 놀랐고
이 책이 1930년대 려순감옥에서 쓰여졌다는 사실에 다시 놀랐습니다.

지금도 교도소 수감자가 책을 집필하는 게 허용되지 않는다는데
일제강점기의 엄혹한 시절 책을 집필했다는 사실도 놀랍지만
방대한 사료를 참고하지 않고서는 도저히 쓸 수 없는 책인데
사료를 참고할 수 없는 감옥에서 저술된 책이라고 믿기지 않았으니까요.
그래서 지식과 학문의 역사에서 거인의 시대는 갔고 나는 난쟁이의 시대에 살고 있음을 실감했지요.

요즘 이른바 명문대 교수와 학생들의 행태를 보면
내가 대학에 다니던 시절보다 더 난쟁이가 되어버렸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교수들이 쓰는 논문도 많아졌고 대학생들의 지식 양도 늘었겠지만
시대 정신에 대한 투철한 고민이 없고 
따라서 문제 의식도 부족하니
지적 스케일과 창조성이 빈약해질 수밖에 없다고 넉넉하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정교수 지위 지키고, 대학 졸업 후 성공과 출세의 길만 찾는 자들만 가득하니
대학은 더 이상 대학이 아니게 된 셈이지요.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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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까기 19-10-19 16:51
   
ㄴ 그런 계몽꼰대 마인드부터 버리세요
통일신라시대 최치원도 현묘지석에서 '요즘애들 졸라 무식하고 싸가지도 없다" 라고했고
메소포타미아 로제타석에도 '요즘애들은 왜 깊이가 없고 하나같이 가볍고 싸가지가 없냐'내용이....

꼰대질은 100만년 인류역사의 전통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그런 계몽꼰대질은 제발 집에서 하세요.
내가 왕년에는...소시적에는....저도 소시적에는 자본론을 펭귄문고 원본으로 10번을 봤소이다...이럼 기분이 어떠세요??

계몽꼰대마인드 꼭 버리셔야 함다. 그래야 세상이 보입니다요
     
초록바다 19-10-19 16:53
   
좋은 충고이긴 한데
자본론 운운은 엉뚱한 헛소리가 아닐 수 없으며
한국 대학이 독창적인 학문의 산실이 되지 못하고
세계적인 수준에 미달한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지요.
          
홍콩까기 19-10-19 16:57
   
ㄴ 예.예. 그렇습죠. 마님...
               
초록바다 19-10-19 16:58
   
불만 있으면 구체적으로 얘기해 보시죠.
     
초록바다 19-10-19 16:56
   
1류 학자는 새로운 학설을 창조하고
2류 학자는 기존 학설을 바탕으로 사례 연구를 통해 풍부화를 도모하며
3류 학자는 기존 학설을 전파하는 역할을 하는데
한국 대학에는 1류 학자를 찾기 어렵고
2류 학자와 3류 학자만 많다는 건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지요.
          
홍콩까기 19-10-19 17:01
   
조선상고사를 읽고 삼한과 탱그리를 넘어 21세기 대한민국 교수수준까지 비판하는 5천년을 넘어서는 그대의 통찰에 놀라움을 금치 않을수 없쏘...ㄷㄷㄷ
               
초록바다 19-10-19 17:04
   
통일신라시대 최치원도 현묘지석에서 '요즘애들 졸라 무식하고 싸가지도 없다" 라고 했다는 출처는 어디요?
     
초록바다 19-10-19 17:00
   
최치원의 현묘지석이 뭡니까?
손이조 19-10-19 16:58
   
최치원 석각 ?
狂奔疊石吼重巒」
人語難分咫尺間」
常恐是非聲到耳」
故敎流水盡籠山」
초록바다 19-10-19 17:02
   
신라국 고 지리산 쌍계사 교시 진감선사 비명과 서전(前)
중국 도통순관 승무랑 시어사 내공봉이며 자금어대를 하사받은 신 최치원 왕명을 받들어 글을 짓고 아울러 전자(篆字)의 제액을 씀.
무릇 도(道)란 사람에게서 멀리 있지 않으며 사람에게는 나라의 다름이 없다. 이런 까닭에 우리 동방인들이 불교를 배우고 유교를 배우는 것은 필연이다. 서쪽으로 대양을 건너 통역을 거듭하여 학문을 좇아 목숨은 통나무 배에 의지하고 마음은 보배의 고장으로 향하였다. 비어서 갔다가 올차서 돌아오며 어려운 일을 먼저하고 얻는 것을 뒤로 하였으니, 또한 옥을 캐는 자가 곤륜산의 험준함을 꺼리지 않고 진주를 찾는 자가 검은 용이 사는 못의 깊음을 피하지 않는 것과 같았다.드디어 지혜의 횃불을 얻으니 빛이 오승(五乘)을 두루 비추었고 유익한 말[가효]을 얻으니 미각은 육경(六經)에서 배불렀으며, 다투어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선(善)에 들게 하고 능히 한 나라로 하여금 인(仁)을 일으키게 하였다. 그러나 학자들이 간혹 이르기를 “인도의 석가와 궐리의 공자가 교를 설함에 있어 흐름을 나누고 체제를 달리하여 둥근 구멍에 모난 자루를 박는 것과 같아서 서로 모순되어 한 귀퉁이에만 집착한다” 하였다. 시험삼아 논하건대 시(詩)를 해설하는 사람은 글자로써 말을 해쳐서는 안되고 말로써 뜻을 해쳐서도 안된다.예기에 이른바 “말이 어찌 한 갈래뿐이겠는가. 무릇 제각기 타당한 바가 있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여산(廬山)의 혜원(慧遠)이 논(論)을 지어 이르기를 “여래가 주공, 공자와 드러낸 이치는 비록 다르지만 돌아가는 바는 한 길이다. 극치를 체득함에 있어 아울러 응하지 못하는 것은 만물을 능히 함께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이다”고 하였다.
심약(沈約)은 말하기를 “공자는 그 실마리를 일으켰고 석가는 그 이치를 밝혔다”고 하였으니, 참으로 그 대요를 안다고 이를 만한 사람이라야 비로소 더불어 지선(至善)의 도(道)를 말할 수 있다.부처님께서 심법(心法)을 말씀하신 데 이르면 현묘하고 또 현묘하여 이름하려 해도 이름할 수 없고 설명하려 해도 설명할 수 없다. 비록 달을 얻었다고 하더라도 그 달을 가리킨 손가락을 잊기란 끝내 바람을 잡아매는 것 같고 그림자처럼 가서 붙잡기 어렵다. 그러나 먼 데 이르는 것도 가까운 데서부터 시작되는 것이니 비유를 취한들 무엇이 해로우랴. 공자가 문하 제자에게 일러 말하기를 “내 말하지 않으련다. 하늘이 무슨 말을 하더냐”고 하였으니 저 유마거사가 침묵으로 문수보살을 대한 것이나 부처님이 가섭존자에게 은밀히 전한 것은 혀를 움직이지도 않고 능히 마음을 전하는 데 들어맞은 것이다. ‘하늘이 말하지 않음’을 말하였으니 이를 버리고 어디 가서 얻을 것인가. 멀리서 현묘한 도를 전해와서 우리 나라에 널리 빛내었으니 어찌 다른 사람이랴. 선사(禪師)가 바로 그 사람이다.
선사의 법휘는 혜소(慧昭)이며 속성은 최씨(崔氏)이다. 그 선조는 한족(漢族)으로 산동(山東)의 고관이었다. 수나라가 군사를 일으켜 요동을 정벌하다가 고구려에서 많이 죽자 항복하여 변방(우리나라)의 백성이 되려는 자가 있었는데 성스러운 당나라가 4군을 차지함에 이르러 지금 전주의 금마사람이 되었다. 그 아버지는 창원(昌原)인데 재가자임에도 출가승의 수행이 있었다. 어머니 고씨(顧氏)가 일찍이 낮에 잠깐 잠이 들었는데 꿈에 한 서역 승려가 나타나 말하기를 “나는 아미(阿(방언으로 어머니를 이른다)의 아들이 되기를 원합니다” 하고 유리 항아리를 주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선사를 임신하였다.태어나면서도 울지 아니하여 곧 일찍부터 소리가 작고 말이 없어 빼어난 인물이 될 싹을 보였다. 이를 갈 나이에 아이들과 놀 때는 반드시 나뭇잎을 사르어 향이라 하고 꽃을 따서 공양으로 하였으며 때로는 서쪽을 향하여 무릎 꿇고 앉아 해가 기울도록 움직이지 않았다. 이렇듯 착한 근본이 진실로 백 천겁 전에 심어진 것임을 알지니 발돋움하여도 따라갈 일이 아니었다. 어려서부터 성인이 되기까지 부모의 은혜를 갚는데 뜻이 간절하여 잠시도 잊지 않았다.그러나 집에 한 말의 여유 곡식도 없고 또 한 자의 땅도 없었으니 천시(天時)를 이용하는 것으로 음식을 봉양함에 있어 오직 힘 닿는 대로 노력하였다. 이에 소규모의 생선 장사를 벌여 봉양하는 좋은 음식을 넉넉하게 하는 업으로 삼았다. 손으로 그물을 맺는데 힘쓰지 않았으나 마음은 이미 통발을 잊은 데 부합하였다. 능히 부모에게 콩죽을 드려도 그 마음을 기쁘게 하기에 넉넉하였고 진실로 양친(養親)의 노래[采蘭之詠]에 들어 맞았다. 부모의 상을 당하자 흙을 져다 무덤을 만들고는 이내 “길러주신 은혜는 애오라지 힘으로써 보답하였으나 심오한 道에 둔 뜻은 어찌 마음으로써 구하지 않으랴. 내 어찌 덩굴에 매달린 조롱박처럼 한창 나이에 지나온 자취에만 머무를 것인가”라고 말하였다.
드디어 정원 20년(804), 세공사(歲貢使)에게 나아가 뱃사공이 되기를 청하여 배를 얻어 타고 서쪽으로 건너가게 되었는데 속된 일에도 재능이 많아 험한 풍파를 평지와 같이 여기고는 자비의 배를 노저어 고난의 바다를 건넜다. 중국에 도달하자 나라의 사신에게 고하기를 “사람마다 각기 뜻이 있으니 여기서 작별을 고할까 합니다” 하였다. 드디어 길을 떠나 창주(滄州)에 이르러 신감대사(神鑑大師)를 뵈었다. 오체투지하여 바야흐로 절을 마치기도 전에 대사가 기꺼워하면서 “슬프게 이별한 지가 오래지 않은데 기쁘게 서로 다시 만나는구나!” 하였다.급히 머리를 깎고 잿빛 옷을 입도록 하여 갑자기 인계(印契)를 받게 하니 마치 마른 쑥에 불을 대는 듯 물이 낮은 들판으로 흐르는 듯 하였다. 문도들이 서로 이르기를 “동방의 성인을 여기서 다시 뵙는구나!”라고 하였다. 선사는 얼굴 빛이 검어서 모두들 이름을 부르지 않고 지목하여 흑두타(黑頭陀)라고 했다. 이는 곧 현묘함을 탐구하고 말 없는데 처함이 참으로 칠도인(漆道人)의 후신이었으니 어찌 저 읍중의 얼굴 검은 자한(子罕)이 백성의 마음을 위로해 준 것에 비할 뿐이랴. 길이 붉은 수염의 불타야사(佛陀耶舍) 및 푸른 눈의 달마(達磨)와 함께 색상(色相)으로써 나타내 보인 것이다.원화 5년(810년) 숭산 소림사의 유리단에서 구족계를 받았으니 어머니의 옛 꿈과 완연히 부합하였다. 이미 계율에 밝았으매 다시 학림(學林)으로 돌아왔는데 하나를 들으면 열을 아니 홍색이 꼭두서니보다 더 붉고 청색이 남초보다 더 푸른 것과 같았다. 비록 마음은 고요한 물처럼 맑았지만 자취는 조각 구름같이 떠돌아 다녔다. 그 때 마침 우리나라 스님 도의(道義)가 먼저 중국에 와서 도를 구하였는데 우연히 서로 만나 바라는 바가 일치하였으니 서남쪽에서 벗을 얻은 것이다. 사방으로 멀리 찾아다니며 부처님의 지견(知見)을 증득하였다.
도의가 먼저 고국으로 돌아가자 선사는 곧바로 종남산(終南山)에 들어갔는데 높은 봉우리에 올라 소나무 열매를 따먹고 지관(止觀)하며 적적하게 지낸 것이 삼년이요, 뒤에 자각(紫閣)으로 나와 사방으로 통하는 큰 길에서 짚신을 삼아가며 널리 보시하며 바쁘게 다닌 것이 또 삼년이었다. 이에 고행도 이미 닦았고 타국도 다 유람하였으나 비록 공(空)을 관(觀)하였다 하더라도 어찌 근본을 잊을 수 있겠는가.이에 태화 4년(830년) 귀국하여 대각(大覺)의 상승(上乘) 도리로 우리 나라 어진 강토를 비추었다. 흥덕대왕이 칙서를 급히 보내고 맞아 위로하기를 “도의(道義) 선사가 지난 번에 돌아오더니 상인(上人)이 잇달아 이르러 두 보살이 되었도다. 옛날에 흑의를 입은 호걸이 있었다고 들었는데 지금은 누더기를 걸친 영웅을 보겠도다. 하늘까지 가득한 자비의 위력에 온 나라가 기쁘게 의지하리니 과인은 장차 동방 계림의 땅을 길상(吉祥)의 집으로 만들리라” 하였다.처음에 상주(尙州) 노악산(露岳山) 장백사(長栢寺)에 석장을 멈추었다. 의원의 문전에 병자가 많듯이 찾아오는 이가 구름같아 방장(方丈)은 비록 넓으나 물정이 자연 군색하였다. 드디어 걸어서 강주의 지리산에 이르니 몇 마리의 호랑이가 포효하며 앞에서 인도하여 위험한 곳을 피해 평탄한 길로 가게 하니 산을 오르는 신과 다르지 않았고 따라가는 사람도 두려워하는 바가 없이 마치 집에서 기르는 개처럼 여겼다. 곧 선무외(善無畏) 삼장이 영산에서 여름 결제를 할 때 맹수가 길을 인도하여 깊은 산속의 굴에 들어가 모니(牟尼)의 입상을 본 것과 완연히 같은 사적이며, 저 축담유(竺曇猷)가 조는 범의 머리를 두드려 경(經)을 듣게 한 것 또한 그것 만이 승사(僧史)에 미담이 될 수 없다. 이리하여 화개곡의 고(故) 삼법화상(三法和尙)이 세운 절의 남은 터에 당우(堂宇)를 꾸려내니 엄연히 절의 모습을 갖추었다.
개성 3년(838)에 이르러 민애대왕이 갑자기 보위에 올라 불교에 깊이 의탁하고자 국서를 내리고 재비(齋費)를 보내 특별히 친견하기를 청하였는데, 선사가 말하기를 “부지런히 선정(善政)을 닦는 데 있을 뿐, 어찌 만나려 하십니까?”라고 하였다. 사자(使者)가 왕에게 복명하니 그 말을 듣고 부끄러워 하면서도 깨달은 바가 있었다. 선사가 색과 공을 다 초월하고 선정과 지혜를 함께 원만히 갖추었다 하여 사자를 보내 호를 내려 혜소(慧昭)라 하였는데 소(昭)자는 성조(聖祖)의 묘휘(廟諱)를 피하여 바꾼 것이다.그리고 대황룡사에 적을 올리고 서울로 나오도록 부르시어 사자가 왕래하는 것이 말고삐가 길에서 엉길 정도였으나 큰 산처럼 꿋꿋하게 그 뜻을 바꾸지 않았다. 옛날 승조(僧稠)가 후위(後魏)의 세 번 부름을 거절하면서 말하기를 “산에 있으면서 도를 행하여 크게 통하는데 어긋나지 않으려 합니다”라고 하였으니 깊은 곳에 살면서 고매함을 기르는 것이 시대는 다르나 뜻은 같다고 하겠다.몇 해를 머물자 법익(法益)을 청하는 사람이 벼와 삼대처럼 줄지어 송곳을 꽂을 데도 없었다. 드디어 빼어난 경계를 두루 가리어 남령의 기슭을 얻으니 앞이 탁 트여 시원하고 거처하기에 으뜸이었다. 이에 선려(禪廬)를 지으니 뒤로는 안개 낀 봉우리에 의지하고 앞으로는 구름이 비치는 골짜기 물을 내려다 보았다. 시야를 맑게 하는 것은 강 건너 먼 산이요, 귓부리를 시원하게 하는 것은 돌에서 솟구쳐 흐르는 여울물 소리였다. 더욱이 봄 시냇가의 꽃, 여름 길가의 소나무, 가을 골짜기의 달, 겨울 산마루의 흰 눈처럼 철마다 모습을 달리하고 만상이 빛을 바꾸니 온갖 소리가 어울려 울리고 수많은 바위들이 다투어 빼어났다.일찍이 중국에 다녀온 사람들이 이곳에 와서 머물게 되면 모두 깜짝 놀라 살펴보며 이르기를, “혜원공(慧遠公)의 동림사(東林寺)가 바다 건너로 옮겨 왔도다. 연화장 세계는 범부의 생각으로 헤아릴 수 없지만 항아리 속에 별천지가 있다 한 것은 정말이구나” 하였다. 대나무통을 가로질러 시냇물을 끌어다가 축대를 돌아가며 사방으로 물을 대고는 비로소 옥천(玉泉)이라는 이름으로 현판을 하였다. 손꼽아 법통을 헤아려 보니 선사는 곧 조계의 현손이었다. 이에 육조영당(六祖靈堂)을 세우고 채색 단청하여 널리 중생을 이끌고 가르치는데 이바지하였으니 경(經)에 이른바 “중생을 기쁘게 하기 위하여 화려하게 빛깔을 섞어 여러 상(像)을 그린 것”이었다.
대중 4년(850) 정월 9일 새벽 문인에게 고하기를 “만법이 다 공(空)이니 나도 장차 갈 것이다. 일심(一心)을 근본으로 삼아 너희들은 힘써 노력하라. 탑을 세워 형해를 갈무리하지 말고 명(銘)으로 자취를 기록하지도 말라” 하였다. 말을 마치고는 앉아서 입적하니 금생의 나이 77세요, 법랍이 41년이었다. 이 때 하늘에는 실구름도 없더니 바람과 우뢰가 홀연히 일어나고 호랑이와 이리가 울부짖으며 삼나무 향나무가 시들어졌다. 얼마 뒤 자주색 구름이 하늘을 가리우더니 공중에서 손가락 퉁기는 소리가 나서 장례에 모인 사람이 듣지 못한 이가 없었다.곧 『양사(梁史)』에 “시중 저상(褚翔)이 일찌기 사문을 청하여 앓고 계신 어머니를 위해 기도하다가 공중에서 손가락 퉁기는 소리를 들었다”고 실려 있으니 성스러운 감응이 보이지 않게 나타난 것이 어찌 꾸밈이겠는가. 무릇 도에 뜻을 둔 사람은 기별을 듣고 서로 조상하고 정을 잊지 못한 이들은 슬픔을 머금고 우니 하늘과 사람이 비통하게 애도함을 단연코 알 수 있었다. 널과 무덤길을 미리 갖추어 준비하게 하였으니 제자 법량(法諒) 등이 울부짖으며 시신을 모시고는 날을 넘기지 않고 동쪽 봉우리의 언덕에 장사지내어 유명을 따랐다.선사의 성품은 질박함을 흐트리지 않았고 말에 꾸밈이 없었으며, 입는 것은 헌 솜이나 삼베도 따뜻하게 여겼고 먹는 것은 겨나 싸라기도 달게 여겼다. 도토리와 콩을 섞은 범벅에 나물 반찬도 두 가지가 아니었는데 귀인들이 가끔 찾아와도 일찍이 다른 반찬이 없었다. 문인들이 거친 음식이라 하여 올리기를 어려워하며 말하기를 “마음이 있어 여기에 왔을 것이니 비록 거친 밥인들 무엇이 해로우랴” 하였으며, 지위가 높은 이나 낮은 이, 그리고 늙은이와 젊은이를 대접함이 한결같았다.매양 왕의 사자가 역마를 타고 와서 명을 전하여 멀리서 법력(法力)을 구하면 이르기를, “무릇 왕토(王土)에 살면서 불일(佛日)을 머리에 인 사람으로서 누구인들 마음을 기울이고 생각을 다하여 임금을 위하여 복을 빌지 않겠습니까? 또한 하필 멀리 마른 나무 썩은 등걸같은 저에게 윤언(綸言)을 더럽히려 하십니까? 왕명을 전하러 온 사람과 말이 허기져도 먹지 못하고 목이 말라도 마시지 못하는 것이 마음에 걸립니다” 하였다. 어쩌다 호향(胡香)을 선물하는 이가 있으면 질그릇에 잿불을 담아 환을 짓지 않고 사르면서 말하기를, “나는 냄새가 어떠한지 알지 못한다. 마음만 경건히 할 뿐이다”가고 하였고, 또 한다(漢茶)를 공양하는 사람이 있으면 돌솥에 섶으로 불을 지피고 가루로 만들지 않고 끓이면서 말하기를 “나는 맛이 어떤지 알지 못하겠다. 뱃속을 적실 따름이다”라고 하였다. 참된 것을 지키고 속된 것을 꺼림이 모두 이러한 것들이었다.평소 범패(梵唄)를 잘하여 그 목소리가 금옥같았다. 구슬픈 곡조에 날리는 소리는 상쾌하면서도 슬프고 우아하여 능히 천상계의 신불(神佛)을 환희하게 하였다. 길이 먼 데까지 흘러 전해지니 배우려는 사람이 당(堂)에 가득찼는데 가르치기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어산(魚山)의 묘음을 익히려는 사람들이 다투어 콧소리를 내었던 일처럼 지금 우리나라에서 옥천(玉泉)의 여향(餘響)을 본뜨려 하니 어찌 소리로써 제도하는 교화가 아니겠는가.
선사가 열반에 든 것은 문성대왕 때였는데 임금이 마음으로 슬퍼하여 청정한 시호를 내리려다 선사가 남긴 훈계를 듣고서는 부끄러워하여 그만두었다. 3기(紀)를 지난 뒤 문인들이 세상 일의 변천이 심한 것을 염려하여 법을 사모하는 제자에게 영원토록 썪지 않고 전할 방법을 구하였더니 내공봉 일길간인 양진방(楊晉方)과 숭문대의 정순일(鄭詢一)이 굳게 마음을 합쳐 돌에 새길 것을 청하였다. 헌강대왕께서 지극한 덕화를 넓히고 불교를 흠앙하시어 시호를 진감선사(眞鑑禪師), 탑명을 대공영탑(大空靈塔)이라 추증하고 이에 전각(篆刻)을 허락하여 길이 영예를 다하도록 하였다.거룩하도다! 해가 양곡(暘谷)에서 솟아 어두운 데까지 비추지 않음이 없고, 바닷가에 향나무를 심어 오래될수록 향기가 가득하다. 어떤 사람은 “선사께서 명(銘)도 짓지 말고 탑도 세우지 말라는 훈계를 내리셨거늘 후대로 내려와 문도들에 이르러 확고하게 스승의 뜻을 받들지 못했으니 ‘그대들이 스스로 구했던가, 아니면 임금께서 주셨던가’ 바로 흰 구슬의 티라고 할 만하다”고 하였다. 아! 그르다고 하는 사람 또한 그르다. 명예를 가까이 하지 않아도 이름이 드러난 것은 선정을 닦은 법력의 나머지 보응이니 저 재처럼 사라지고 번개같이 끊어지기 보다는 할만한 일을 할 수 있을 때 해서 명성이 대천세계(大千世界)에 떨치도록 하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그러나 귀부가 비석을 이기도 전에 임금이 갑자기 승하하고 금상이 이어 즉위하시니 질나발과 저가 서로 화답하듯 뜻이 부촉에 잘 맞아 좋은 것은 그대로 따르시었다. 이웃 산의 절도 옥천이라고 불렀는데 이름이 서로 같아 여러 사람의 혼동을 일으켰다. 장차 같은 이름을 버리고 다르게 하려면 마땅히 옛 이름을 버리고 새 이름을 지어야 했는데 절이 자리잡은 곳을 살펴보게 하니 절 문이 두 줄기 시냇물이 마주하는데 있었으므로 이에 제호를 하사하여 쌍계(雙溪)라고 하였다.
신에게 명을 내려 말씀하시기를 “선사는 수행으로 이름이 드러났고 그대는 문장으로 이름을 떨쳤으니 마땅히 명(銘)을 짓도록 하라”고 하시어 치원(致遠)이 두 손을 마주대고 절하면서 “예! 예!”하고 대답하였다. 물러나와 생각하니 지난번 중국에서 이름을 얻었고 장구(章句) 속에서 살지고 기름진 것을 맛보았으나 아직 성인의 도에 흠뻑 취하지 못하여 번드르르하게 꾸민 것에 깊이 감복했던 것이 오직 부끄러울 뿐이다.하물며 법(法)은 문자(文字)를 떠난지라 말을 붙일 데가 없으니 혹 굳이 그를 말한다면 수레를 북쪽으로 향하면서 남쪽의 영(郢)땅에 가려는 것이 되리라. 다만 임금의 보살핌과 문인(門人)들의 큰 바램으로 문자(文字)가 아니면 많은 사람의 눈에 밝게 보여줄 수 없기에 드디어 감히 몸은 한꺼번에 두 가지 일을 맡고 힘은 오능(五能)을 본받으려 하니 비록 돌에 의탁한다 해도 부끄럽고 두렵다. 그러나 ‘도(道)란 억지로 이름붙인 것’이니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가. 재주가 없다 하여 필봉을 드러내지 않는 것을 신이 어찌 감히 할 것인가. 거듭 앞의 뜻을 말하고 삼가 명(銘)을 지어 이른다.입을 다물고 선정(禪定)을 닦아 마음으로 부처에 귀의했네.근기가 익은 보살이라 그것을 넓힘이 다른 것이 아니었네.용감하게 범의 굴을 찾고 멀리 험한 파도를 넘어,가서는 비인(秘印)을 전해받고 돌아와 신라를 교화했네.그윽한 곳을 찾고 좋은 데를 가려 바위 비탈에 절을 지었네.물에 비친 달이 심회를 맑게 하고 구름과 시냇물에 흥을 기울였네.산은 성(性)과 더불어 고요하고 골짜기는 범패와 더불어 응하였네.닿는 대상마다 걸림이 없으니 간교한 마음을 끊음이 이것으로 증명되도다.도는 다섯 임금의 찬양을 받았고 위엄은 뭇 요사함을 꺾었도다.말없이 자비의 그늘을 드리우고 분명히 아름다운 부름을 거절했네.바닷물이야 저대로 떠돌더라도 산이야 어찌 흔들리랴.생각도 없고 걱정도 없으며 깎음도 없고 새김도 없었네.음식은 맛을 겸하지 아니하였고 옷은 갖추어 입지 않으셨네.바람과 비가 그믐밤 같아도 처음과 끝이 한결같았네.지혜의 가지가 바야흐로 뻗어나는데 법의 기둥이 갑자기 무너지니,깊은 골짜기가 처량하고 뻗어나는 등라가 초췌하구나!사람은 갔어도 도(道)는 남았으니 끝내 잊지 못하리라.상사(上士)가 소원을 말하니 임금이 은혜를 베푸셨네.법등이 바다 건너로 전하여 탑이 산 속에 우뚝하도다.천의(天衣)가 스쳐 반석이 다 닳도록 길이 송문(松門)에 빛나리라.
광계(光啓) 3년 7월 어느 날 세우고 승려 환영(奐榮)이 글자를 새김.
초록바다 19-10-19 17:08
   
國有玄妙之道 曰風流 設敎之源 備詳神史
實內包含三敎 接化群生 且如入則孝於家
出則忠於國 魯司寇之旨也 處無爲之事
行不言之敎 周柱史之宗也 諸惡莫作
諸善奉行 竺乾太子之化也

우리나라에 현묘한 도가 있는데 이를 ‘풍류(風流)’라고 한다. 교(敎)를 설(設)한 근원은 『선사(仙史)』에 자세히 실려 있다. 실제의 내용은 삼교를 포함(包含)하고, 군생(群生)을 접촉하여 감화시킨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집에 들어와서 부모에게 효도하고 밖에 나아가서 나라에 충성하는 것은 노사구(老司寇: 孔子)의 주지(主旨)와 같고, 무위(無爲)로써 세상일을 처하고 말없는 가르침을 행하는 것은 주주사(周柱史 : 老子)의 종지와 같으며, 모든 악한 일은 행하지 않고 모든 착한 일만 받들어 행하는 것은 축건태자(竺乾太子 : 釋迦)의 교화와 같다.
팔상인 19-10-19 17:32
   
한국의 대학이 난쟁이라는 결론에는 동의합니다

초록바다님과 서로의 관심분야는 다르지만
과거의 현자들이 보인 성취를 헤아리면
"아니~ 이 시대에 이게 어떻게 가능했지?"란 생각이 절로 들게되고
현실의 우리와 아무래도 비교가 될 수 밖에 없죠

특히나 삶에서 반성을 거듭하며 자신의 성장을
기대하는 입장에선 더욱 한탄스럽게 여길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헤아림 만큼이나 비중있게 중요한 건..
"그래서 뭘 어쩔건가?"란 실천에 대한 헤아림도 중요합니다

다음으로 그 실천을 오랫동안 지속시키기 위한
의욕기반의 의지를 세우는 것도 중요하죠
"즉 내가 진정 원하는게 뭔가?"란 질문에 대한 자신만의 해답이요

이 세가지를 찾아서 해답에 다가가는 건 보통 수십년 걸립니다
사람의 역량이란게 적절한 노력이 쌓이면
헤아림의 위치가 달라지고
이 위치가 달라지면 눈앞에 펼쳐지는 풍경도 달라져서
더 나은 목표나 성장된 목표로 수정되기 때문입니다
     
초록바다 19-10-19 17:38
   
적절한 의견입니다.
감사합니다.
지식과 학문, 특히 인문학과 사회과학은 지금의 삶과 현실에 대한 대응에서 나온다는 점에서
실천을 본질로 하고 있는데
우리나라의 많은 교수들은 미국에 유학해
우리 현실과 거리가 있는 지식과 학문을 습득하고
이를 보편적 지식/학문인 양 여기면서
반성 없이 직수입해서 풀어놓으려고 하는 점에서
문제가 생긴다고 봅니다.
          
팔상인 19-10-19 17:54
   
우리가 반성을 하는 이유는
그것이 현실에서 만족스러울만큼
입증되거나 재현 되지 않기 때문일 겁니다

왜냐면 현실이란게 단편적인 분야의 인과로만
이루어져 있지 않기 때문이겠죠

그래서 해외의 단편적인 분야의 학문을 섭렵했으면,
이를 현실에서 실현시키기 위해 다른 분야 학문들의 전문가와
서로 솔직하게 경청하고 타당하게 견해를 제시하는 소통이
원활하고 활발해야 겨우 입증이나 재현적 성과에
도달하는 길이 열릴 수 있는데
한국의 대학은 꽤나 폐쇄적인걸로 압니다
*해외의 대학이나 연구소들은 이게 원활한 경우가 많더군요

조금만 구체적으로 살피자면 제대로된 소통을 하려면
서로 다른 분야의 단어들부터 의미를 명료하게 전달할 수 있어야 하는데,
자기들 분야의 단어들을 너무 무분별하게
사용하는 점에서부터 장애가 발생하죠

세상에 제대로 이해하는 개념 중에 어려운 것은 없다고 봅니다
다만 여러개념이 복합적으로 연결되어 있어서 복잡할 수는 있죠
그러면 그걸 하나하나 끈기있게 풀어내면 이해못할 개념은 없을 겁니다
이걸 안하거나 피하려고 하기 때문에 시작부터 힘든 것이려니 싶습니다
               
초록바다 19-10-19 17:57
   
맞습니다.
폭이 깊이를 낳습니다.
위대한 학자는 전문화된 특수 영역에 갇히지 않고 인간과 사회라는 넓은 시야를 갖고 있습니다.
막스와 베버, 하버마스, 푸코, 부르디외, 보드리야르 등을 철학자나 사회학자 등 특정한 분야로만 재단할 수 없는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대학은 칸막이 구조가 폐쇄화되어 있고
좁은 영역 안에서 자기들만의 언어로 소통하기에
연구자들의 폭을 너무 제한합니다.
그렇기에 인간과 사회라는 넓은 시야를 확보하기 어렵습니다.
                    
팔상인 19-10-19 18:02
   
간만에 이런 이야기를 할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전 다른 용무가 생겨서
이 이야기는 여기서 일단락 해야겠네요
                         
초록바다 19-10-19 18:06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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