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러에 보복 대신 정상회담 제의한 전두환
1983년 10월 북한은 버마 아웅산 테러를 자행했지만 전두환 대통령은 그 끔찍한 사건에도 아랑곳없이 1년 2개월만인 1985년 연 초 국정연설을 통해 남북한 최고 책임자 회담을 제의했다. 전 대통령은 회담 장소가 평양, 서울, 모스크바, 베이징 어디든 상관없다며 그 해 후반기 정상회담 달성을 원칙으로 제시했다. 박철언 회고록 <바른 역사를 위한 증언>을 통해 전쟁 위기를 촉발하는 북한의 대형 도발에 전 대통령이 어떻게 대응했는지 구체적으로 알아보자.
1985년 5월 27일 남북은 12년 만에 서울에서 적십자 회담을 개최하고, 대표단 일원이었던 림춘길 노동당 부부장을 박철언이 만나 고향방문 및 예술단의 교환 방문에 합의했다. 분단 40년만의 상호 방문이었다. 7월 11일에는 판문점 남측 평화의 집에서 한시해 당부부장과 박철언간 첫 비밀 접촉을 가졌다. 박철언은 한반도의 평화 정착과 조국의 평화적 통일을 위해서는 정상회담이 필수불가결한 전제 조건이라고 강조했고. 북측 한 대표도 공감을 표했다. 이후 두차례 더 접촉을 갖고 북한의 허담 노동당 비서가 김일성 주석 특사로 서울을 방문하기로 합의했다.
왜 아웅산 테러 사과 받기를 포기했나
그 때 장세동 국가안전기획부장이 전대통령의 지시라며 박철언에게 이런 말을 전했다. “버마 참사(아웅산 테러)에 대한 유감 표시가 없으면 정상회담을 할 필요가 없다. 박 특보가 한시해 대표를 만나서 허담 특사가 유감의 뜻을 표시해야 접촉이 가능하다고 서전에 설명하도록 하라, 북의 특사가 유감을 표명하지 않을 때에는 김일성 주석을 만날 때라도 짚고 넘어가야 한다. 이것이 없으면 특사를 만날 필요도 없고, 내(전대통령)가 평양에 갈 필요도 없다.”
그러자 박철언은 “제3자가 사과한 사실을 안다는 것이 북한에서는 문제다, 또 아웅산 테러 사건의 공식 사과는 공개적으로 많은 사람이 알게 될수록 정상회담의 실현이 곤란해질 것”이라고 주장했다. 박철언은 전대통령을 만나서도 자신의 생각을 이렇게 밝혔다. “허담 북한 특사의 대통령 각하 면담 전에 정세동 부장이 허담 특사에게 아웅산 사건에 대한 사과를 종용하고, 대통령 접견 시에도 (허담의)사과 언급이 없으면 그 때 (대통령이) 아웅산 사건을 언급하되, 우리가 북측으로부터 사과 받을 수 있는 최대치는 과거를 잊고 새 출발을 하자는 정도일 것입니다. 아웅산 문제의 공식적 시인은 자칫 북한에 치명적 굴복을 요구하는 것이기 때문에 극도로 민감한 문제입니다.”
드디어 1985년 9월 4일 허담 특사가 서울에 왔다. 그는 전 대통령 접견 전 장세동 부장을 만난 자리에서 이런 말을 했다. “우리가 그 문제(아웅산 테러)를 시인할 수도 없고 사과할 수도 없는 게고 또 남측에서 그러 우리보고 시인하고 사과하라든가 이렇게 되면 결국은 우리가 큰 일을 망칠 수 있습니다. 그에 대해서는 역사가 밝힐 것이니 과거를 불문하고 앞으로 그러한 불행한 일이 다시 일어나지 않도록 서로 노력합시다.”
김일성 찬양한 전두환
다음 날 허담 특사 일행이 전대통령을 청와대에서 만났다. 전대통령은 사과를 요구하지 않았다. 그는 대신 “1983년도에 내가 버마에서 그 일을 당하고 왔을 때”의 이야기를 들려줬다. 군이 전쟁 계획을 갖고 왔지만 “지금 전쟁할 시기 아니다, 내가 명령할 때 하라”고 말해두었다며 특사일행에게 간접 경고하는 것으로 끝냈다. 이어 허담은 김주석의 친서내용을 낭독하자 전대통령은 “(김주석이)40년 전에는 민족해방 운동으로, 그리고 평생을 조국과 민족을 위해 애써 오신 충정이 넘치는 그런 말씀을 하셨다”고 추어올렸다.
전대통령은 또 “김주석께서도 서울에 오시고 하여야 할 터인데, 그 어른은 평생을 통해 아마 이쪽에 한 번도 안 와보신 걸로 알 고 있습니다만”하고는 허담에게 김주석 건강관리에도 신경 써 줄 것을 당부했다. 김주석이 서울을 방문하여 여행도 한번 해보기를 기대한다며 신변에 대해서는 전혀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점을 강조했다. 아웅산 사건은 전혀 염두에 두지 않겠다는 암시였다. 허담 일행은 저녁에 요정인 삼청각에서 ‘엄선된 몇 병의 여성 봉사원, 밴드가 동원된 술자리를 했다. 아웅산 테러를 저지른 주범의 부하들을 전두환 정권은 극진히 대접했다.
무장 간첩선 도발에도 남북 회담
1985년 10월 16일 박철언은 장세동부장과 함께 첫 방북을 해서 김일성 주석을 면담했다. 그런데 김일성 면담 나흘 뒤인 10월 20일 북한이 다시 도발을 했다. 북한 무장 간첩선 한 척이 부산 청사포 앞 바다에서 남측 군에 의해 격침당한 것이다. 이 문제로 전 대통령이 정상회담 조기 성사는 철회했지만 남북 왕래와 비밀접촉은 계속하며 ‘남북평화 공존’과 ‘통일 방안’을 협의했다. 이렇게 제5 공화국 기간에 33차례의 남북한 비밀 접촉을 했고 이중 16차례가 군사분계선을 넘어 북한에서 이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