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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1-07-24 04:09
집중탐구 이회창...스크롤 압박 주의
 글쓴이 : 무명씨9
조회 : 3,883  

[집중 탐구 이회창] 上. 잦은 전학과 전쟁속의 학창시절


작지만 야무지고 장난기 많은 소년


중1때 수학시험 망치고 가출 소동

한나라당 대통령 후보 이회창(李會昌)은 1935년 6월 2일 황해도 서흥에서 태어났다. 지금은 갈 수 없는 북한 땅이다. 언진산맥과 멸악산맥이 닿은 곳이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는 '숭덕산(별칭 고덕산)일대는 소금강이라 불렸고, 서흥객관인 용천관, 차유령에 있던 용천역, 가마소 옆의 용사(龍祠)가 있다'고 적혀 있다.

아버지는 서흥법원지청 검사분국 서기였던 이홍규(李弘圭), 어머니는 김사순(金四純)이다.

4남1녀의 둘째 아들인 이회창은 그러나 서흥에 관한 기억이 거의 없다. 아버지가 38년 전남 장흥지청 검사분국으로 발령났기 때문이다.

이회창은 조숙했다. 여섯살 때 시장에서 쌀 한두되 사는 심부름을 다녔다.

그는 쌀을 한알 한알 깨물어 본 뒤 단단하고 단맛이 나는 것을 골랐고, 값을 치르고는 한 움큼 보태는 일도 잊지 않았다고 한다.

"시장 아주머니들이 나를 보고 야무지다고 혀를 내둘렀다."(자전 에세이 '아름다운 원칙',1997년)

호남에 간 이회창은 장흥을 거쳐 외가인 담양 창평에서 3,4년을 보내고 창평초등학교에 입학한다.

광주에 사는 김사순의 친척 김승기(金承基.71)는 "검사서기 월급만으론 생활이 어려워 김사순씨가 창평초등학교에서 선생님을 했다"고 전한다.

일제시대 검사서기 월급은 40원에서 70원. 쌀 한섬에서 한섬반 값이다.

*** 外家서 쌀 얻어 먹어

반면 이회창의 외조부로 창평면장을 지낸 김재희(金在晞)는 만석꾼 소리를 들었다.

해방 뒤 아들, 즉 이회창의 외삼촌들인 김홍용(金洪鏞.2대 민의원).문용(汶鏞.2대 민의원 보궐선거 당선).성용(星鏞.6,7,9대 전국구 의원)이 담양에서 국회의원을 지냈다.

3형제 국회의원은 우리나라에서 이들뿐이다. 6.25 발발 직후인 50년 7월 김홍용은 "백두산 상공에 태극기가 휘날릴 것"이라고 연설했다가 8월 15일 공비에게 총살당했다.

이회창의 큰 이모 삼순(三純)은 균(菌)학자로 한국균학회가 그의 아호를 딴 '성지(聲至)학술상'을 제정, 해마다 시상하는 권위자다.

김재희는 창평공립보통학교에 최초로 여자반을 만들어 딸들을 입학시키는 열성을 보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홍규와 그의 가족은 박봉과 다투어야 했다. 때문에 김사순은 친정에서 쌀 한두되씩을 얻어왔고, 길눈이 밝은 이회창이 심부름을 했다.

이회창은 이홍규가 광주로 전근해 서석국민학교로 전학간다. 이후에도 자주 전학다녀야 했던 이회창의 술회다.

"전학이 싫었다. 새로운 땅에서 가까스로 뿌리를 내리면 다시 미지의 땅으로 떠나야 했다. 짐을 꾸리면서 나는 늘 '또 낯선 동네로 가는구나. 이번에는 어떻게 친구들을 사귀고 놀림받지 않는 아이가 될까'하며 한숨을 내쉬곤 했다."('아름다운 원칙')

해방 후 이홍규는 순천지청 검사로 발령났다. 이회창은 4학년 때 6개월간 순천남초등학교로 전학간다.

서기에서 검사가 됐지만 해방 직후의 혼란과 박봉으로 형편은 나아지지 않았다.

어머니 김사순은 직접 닭을 길러 달걀을 내다 팔았다. 이 무렵 이회창의 일기는 "오늘 닭이 달걀을 하나 낳았다" "두개 낳았다"고 '중계방송'을 하고 있다.

5학년 때 이회창의 짝궁으로 광주에 사는 장봉섭(張鳳燮)은 "회창이네는 어려웠다. 가끔 굶기도 했다. 내가 감자를 싸와 함께 먹었다"고 전했다.

이 닭장은 청주를 거쳐 서울까지 따라온다. 김사순은 "수익성이 높다"는 말만 믿고 메추리를 길러 알을 팔려다 판로를 찾지 못해 실패하기도 한다.

45년 이회창에게 동생(會晟)이 생겼다. 이 때 일기엔 "동생이 태어났다" "아기는 잘 자고 있다" "아기와 놀았다"고 적혀 있다.

일기는 김사순이 이회창의 상장 등과 함께 서울 명륜동 자택 뒷광에 간직했다가 상자째 이회창의 부인 한인옥(韓仁玉)에게 건넸다고 한다.

이회창은 야구.축구를 즐기는 장난꾸러기였다. 형 이회정(李會正)은 "동생이 돌을 던져서 내 친구 함의근(咸毅根.뒤에 서울대 의대 병리학교수가 됨)의 머리를 깬 적이 있다.

그 친구는 착해서 아프다는 얘기를 못하고 눈물만 뚝뚝 흘렸다"고 말했다.

또 "학예회 때 연극을 했다. 큰 복숭아에서 아이가 나와 나쁜 귀신을 정복한다는 것인데 회창이는 복숭아를 건지는 할머니역을 했다. 유머러스하게 잘해서 박수갈채가 요란했다"고 했다.

이회창 스스로는 최근 서석초등학교에 들러 "나는 짓궂었다. 장난치다 거름통에 빠진 적도 있다"고 말했다. 지금의 차가운 이미지와는 다른 일화들이다.

학업 성적은 좋았다. 장봉섭은 "5학년 때 담임(장봉출)이 내 형님이었는데 '공부 잘하라'며 나를 회창이 옆에 앉혔다.

나는 힘이 셌고 회창이는 작았지만 야물어 씨름을 많이 했다. 회창이는 공부를 잘했지만 노래를 못해 전교 수석을 놓쳤던 게 기억난다"고 말했다.

5학년 때는 성적이 가장 좋아 급장(5학년 1반)을 맡기도 했다. 부급장을 한 문종택(文鍾澤)은 "회창이는 5학년 2학기 때 6학년 전교회장의 '직무대리'로 3천여명의 전교생 앞에 섰다"고 전했다.

이회창은 5학년 말 형 이회정의 권유로 월반시험을 봐 광주서중에 합격했다.

그러나 부친이 한민당 전남지부장을 구속했다가 검찰 고위층의 질책을 받고 청주지청으로 쫓겨가 입학식도 치르지 못한 채 청주중으로 전학간다.

이회창의 청주중 시절은 1년에 불과했다. 이홍규가 다시 이승만(李承晩)대통령과 가까운 '족청계' 충북지사 尹모씨를 미국 구호물자 유용 혐의로 지검장이 출장간 틈을 타 구속했다가 미운털이 박혀 서울로 옮겨야 했기 때문이다.

청주중 동기 지헌정(池憲晶.임광토건 대표)은 "이회창은 키가 작아 청중(淸中)이라고 쓴 누런 가방이 땅에 닿을 듯 애처로웠다. 그러나 축구.야구.농구 시합엔 꼭 끼었다.

농구를 많이 하면 키가 커진다고 시도 때도 없이 자기 얼굴보다 큰 농구공을 들고 슛을 쏘아댔다"고 말한 적이 있다. 이회창은 형 이회정이 써준 원고로 웅변대회에서 1등도 했다.

이러다 이회창은 학기말 시험 대수에서 20점(60점 만점)에 그치는 실수를 한다.

형 이회정은 "시험공부에 애썼다고 어머니가 콩가루로 된 간식을 만들어 주셨다. 어머니가 동생에게 '시험 잘 봤니'하자 우물쭈물하더니 일어나서 나갔다. 그리곤 안돌아왔다. 가출한 것이다"고 기억했다.

당시 이회창은 "내 능력으론 부모님의 기대를 따라갈 수 없다. 화물기차라도 타고 서울로 가 돈을 벌어 고학을 하자"고 마음먹었다고 한다.

이회창은 집에서 삼십리나 떨어져있는 조치원역까지 걸어갔다가 한밤에 수배에 나선 이홍규와 조치원역 역무원이 연락이 닿는 바람에 집으로 돌아왔다.

이회창이 성적에 압박감을 가진 것은 집안의 교육열 때문인 것 같다. 이홍규는 경성제일고보와 경성법학전문학교를 나왔다.

그의 형 이태규(李泰圭)는 경성법전을 거쳐 교토(京都)대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한국인 최초로 교토대 교수를 지냈다. 이태규는 69년 노벨화학상 후보에 오른 양자화학자다.

이런 부모의 집안 배경은 후에 이회창이 '귀족'이라고 공격을 받는 원인의 하나가 된다.

이회창 측은 "시험에 붙거나 노력해 성공한 경우는 있어도 지위나 재산을 물려받지 않았다"며 반박하고 있다.

이홍규가 기억하는 이회창의 청주중 시절엔 이런 일도 있다. "집으로 누군가 분재를 보내온 모양이야. 그랬더니 애들이 아버님이 돌아오셔서 선물을 받았다는 것을 알면 큰일난다며 즉각 돌려보냈다고 하더구먼."

이회정도 "들고 온 것을 다시 돌려보내는 것이 우리의 임무였다"고 말했다.

중2 때(48년) 이회창은 경기중으로 전학한다. 중.고시절 친구인 서병국(가꾸다상사 대표)은 "공무원 자녀에겐 부친 전근으로 인한 전학이 허용됐다"고 말했다.

쟁쟁한 수재들이 모인 경기중에서 이회창의 적응은 쉽지 않았던 모양이다.

첫해 4백20명 중 3백5등을 했다. 수학.음악 과목이 처졌다. 학적부엔 건강이 창백(蒼白), 흥미 '별무(別無)', 통솔력.적극성 모두 '무(無)'로 적혀 있다. 평범한 학생이었던 셈이다.

*** 검사 부친 한때 구속돼

누구나 마찬가지였지만 50년 한국전쟁이 벌어진 해는 이회창에게 특별히 어려운 시기였다. 3월 26일엔 아버지 이홍규가 이회창 눈앞에서 수갑을 차고 끌려간다.

남로당원 혐의자를 풀어줬다고 구속돼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된다. 해방후 검사 구속 1호다. 충북지사를 구속했기 때문에 '괘씸죄'에 걸렸다고 한다.

이홍규는 조사를 받는 동안 구타.물고문.전기고문.잠 안재우기 고문을 당했다고 한다.

이회정은 "변호사 30여명이 무료 변론에 나서겠다고 했다. 나는 어머니를 모시고 변호사들을 찾아다니며 도와달라고 했다.

그 중 한명인 김달호 변호사는 변론에 참여했다고 끌려가 고문을 받고나서는 '부인, 저는 도저히 못하겠습니다'고 말하더라"고 했다.

이홍규는 직권 남용으로 기소됐다 보석으로 나왔다.

이 사이 6.25가 터진다. 이홍규 문제로 제때 피란가지 못한터에 이회정마저 징용 걱정에 바깥 출입을 못해 이회창이 먹을 것을 구하러 다닌다.

예산에 사는 종친 이회운(李會云)은 "이회창이 3박4일을 걸어서 예산 종가에 와 쌀 한말을 얻어 짊어지고 서울로 걸어올라간 게 몇차례"라고 기억한다.

이홍규 가족은 결국 예산으로 피란가 삽교의 작은 아버지 이선규(李善圭)집에 머물렀다.

30호 가량의 마을로 주민들이 '누구 온다'고 알려주면 이홍규 가족들이 숨었고, 이회창은 추수를 돕다 볏짚이 가득 실린 지게를 지고 뒤로 넘어지는 바람에 허리를 다쳤다고 한다. 이회창은 가끔 그 때 다친 곳이 아프다고 말한다.

이회창은 9.28 수복으로 상경했다가 51년 1.4후퇴 때 부산으로 내려간다. 이홍규와 이회정은 바로 합류하지 못해 이회창은 소년 가장이 된다.

당시 이홍규의 친구인 김봉렬 부산체신청장이 관사에 다다미 석장짜리 방 한칸을 내줬다.

서병국은 "대문 옆 자그마한 툇마루와 방 한칸이었다. 다섯식구였는데 힘들었다"고 했다.

경기중이 구덕산 근처에 천막학사를 차렸으나 그는 갈 수 없었다. 대신 김봉렬 청장의 도움으로 부산체신청 5급 20호봉 말단 노무직 공무원으로 취직한다. 월급을 깡통에 담아놓고 하루 하루 썼다고 한다.

"봉급과 반말의 쌀로 우리 식구는 한달을 버텼다. 도시락을 싸가지 못해 점심시간엔 부산역 광장으로 나가곤 했다. 모두들 도시락을 꺼내먹는데 우두커니 앉아 있기가 민망했기 때문이다. 찬바람이 이는 겨울 광장을 서성거리다가 찬물로 배를 채우기도 했다."

그는 특히 동생들의 굶주림에 마음아파했다. 일기엔 "동생이 다른 아이들의 과자를 지켜보는 모습을 보노라면 가슴이 아팠다. 동생에게 '너 저것 먹고 싶으냐'고 하면, 그 애는 '아냐, 나 저런 것 먹고 싶지 않아'라고 말했다. 고개를 가로젓는 기백과 바라보는 눈빛이 너무 달랐기에 나는 슬펐다"고 적었다고 한다.

이회창은 배고픔을 못이겨 동네 친구들과 함께 미군부대에서 빵을 훔친 일도 있다고 한다.

그 스스로 "당시 친구들은 소시지도 훔쳐먹었는데 난 그게 뭔지 몰라 바보같이 빵만 훔쳐먹었다"고 주변에 토로한 적이 있다.

이회창은 그러나 어려운 처지를 친구들에겐 내색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서병국과 배도(裵渡.효성물산 고문) 등은 "회창이가 배를 골았다는 얘기나, 아버지가 구속됐었다는 얘기는 듣지 못했다. 다만 공부를 마치고 오는 우리들에게 '요새 공부 많이 했느냐'고 안타까운 듯 물었다"고 했다.

몇달 뒤 검찰은 이홍규에 대한 공소를 취하한다. 이홍규는 검사로 복직하고 형 이회정은 캐나다 부대의 통역원으로 취직한다.

이회창은 학생으로 돌아갔다. 다시 시작한 학교생활에 이회창은 달라진 면모를 보인다. 매사에 적극적이 됐다고 한다.

변론반장을 맡았고, 서울대 주최 웅변대회에서 '실력이 가장 뛰어났던' 후배(鄭根謨 전 과학기술처장관)가 수상하지 못하자 단체 항의에 앞장섰다고 한다.

분함을 못 이겨 송도 앞바다에서 친구들과 술을 마셨고, 당수를 한다고 나무에 짚을 싸서 두들기고 발로 차는 연습도 했다.

이회창은 3학년 때 학도호국단 중대장도 했다. 당시 친구 남정휴(南廷烋.광고자율심의기구 회장)는 "이회창은 우스갯소리를 잘 했다. 특히 사람 흉내를 잘 냈다.

요즘 말로 하면 개인기가 있었던 셈"이라고 말했다. 이회창은 이 무렵 폭격으로 부모를 잃어 어려움에 빠진 동기(이상복 전 서울대 의대 교수)를 위해 "쌀을 모으자"고 나서기도 했다.

이 무렵 괴테의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 방랑시대'에 감명받아 "인생이란 뭔가"라고 고민도 했다.

서병국은 "당시 문학 얘기를 하다가 이회창이 '금세 눈물을 흘릴 것 같은 청순한 여자'를 이상적 여성상으로 꼽았던 기억이 있다"고 했다.

여학생을 짝사랑했지만 말 한마디 건네지 못하고 가슴앓이로 끝내기도 했다고 한다.

이같은 이회창의 감상적인 면은 오랫동안 이어져 사위 최명석(변호사)은 "대법관 시절 장인은 집에 재판기록을 잔뜩 싸들고 와서는 TV 앞에서 드라마를 보며 연신 '재판 기록을 봐야 하는데…'라면서 좀처럼 일어나지 못한 적이 많다"고 소개했다.

고3 때는 싸움하다 코뼈가 부러지는 상처도 입는다. 친구와 보수동에서 세명의 불량배가 남녀 대학생에게 시비를 거는 것을 말리다 대청동 네거리에서 2대 3의 패싸움을 벌였다는 것이다.

그때는 코뼈가 부러진 줄 몰랐다가 국무총리를 물러난 후에야 수술로 고쳤다고 한다.

이회창에 대한 학교의 평가도 바뀐다. 흥미.통솔성.적극성 평가가 '무(無)'에서 '유(有)'로, 동작도 '보통'에서 '민활'로 고쳐졌다.

학업성적도 '양(良)'에서 '우(優)'로 향상됐다. 그러나 뛰어난 성적은 아니었다. 남정휴는 "이회창은 수재는 아니었다"고 말한다.

이 즈음 이홍규 가족은 모두 가톨릭에 귀의했다. 구속 당시 고문을 당한 이홍규의 결정이었다. 이회정의 기억이다.

"아버지가 '감방에 있을 때 앞에 하나밖에 없는 사람(간수)이 나를 해치려 하고 온갖 포악한 고문을 다 당하니 기댈 곳이 필요하더라. 그래서 하느님을 찾았다'며 가족의 종교 입문을 선언했다. 내가 서울대 의대 예과 때였다. 나는 반발했지만 아버지가 '그러면 집에서 나가라'고 해 결국 받아들였다. 동생(회창)도 처음엔 반대하다 나보다 먼저 고집을 접었다."

이회창은 세례명으로 성인 '올라프(olaf)'를 고른다. 노르웨이의 왕으로 국교를 가톨릭으로 정한 사람이라고 한다. 이홍규의 대부는 52년 자유당 정권 총리이던 장면(張勉)이다.

장면이 주미대사 때 이홍규의 형 이태규와 친하게 지낸 게 인연이 됐다. 장면은 이홍규 구속 때도 귀국해 "이홍규는 절대 빨갱이가 아니다"며 구명운동을 했다.

53년 이회창은 서울대 법대에 들어간다. 입학동기 운영위원 네명 가운데 한명으로 뽑힌다. 배도는 "경기고 출신이 30명쯤 되니까 운영위원 한명은 경기고 몫이었다.

이회창은 신망이 있었고, 자연스럽게 운영위원이 됐다"고 말한다. 운영위원이 된 이회창은 법대 선배들과 함께 당시 야당 지도자인 해공 신익희(申翼熙.민국당)를 불러 강연을 듣는 '거사'를 벌인다.

배도는 "서울대에서 야당 당수가 강연회를 갖는 게 처음이라 파문이 컸다. 다들 동대문경찰서 정보과에 불려가 조사를 받았다"고 말했다.

이회창은 대학시절 유학가기 위해 영어공부를 했다. 이회정은 "동생이 열심히 공부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책상에 오래 앉아 있지도 않았다.

그러나 하루는 헤밍웨이의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원서를 가져가 일주일 만엔가 '재밌네'라며 돌려줘 깜짝 놀랐다"고 말했다.

이회창은 미국의 한두개 대학으로부터 합격통지를 받았으나 재정형편 때문에 포기했다.

아버지 이홍규는 변호사 개업 후 형편이 풀리자 이회창의 동생 둘(會晟.會京)은 모두 유학을 보냈다.

이회창은 대신 고시 준비에 들어간다. 동기인 변호사 오성환(吳成煥)은 "나는 2학년 때부터 공부를 시작했다. 이회창은 3학년 때부터 시작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3학년 말께 시험이 있었으니 벼락치기였다. 이회창은 월간지 인터뷰에서 자신의 공부 방법에 대해 "짧은 시간에 집중적으로 몰입했다. 흔히 당일치기라고 하는데 고시 공부도 시험 한두달 전 밥먹는 것도 잊어버렸을 정도로 몰아서 했다"고 소개했다.

이회창은 합격을 자신하지 못한 모양이다. 이회정은 "회창이는 시험을 보는 날 돼지고기를 먹고 배탈이 나 고생을 했다. 고시 사법과와 행정과 둘을 다 보려다 사법과만 간신히 봤다. 합격자 명단도 안 보려고 해 내가 대신 중앙청에 가서 확인했다"고 말했다.

<정치부 기회취재팀>
김교준 차장<kjoon@joongang.co.kr>
나현철 기자
고정애 기자
김정하 기자

기사 입력시간 : 2002.05.10 07:02

 
[집중 탐구 이회창] 中. 사법적극주의를 주장한 판사
5·16 혁명재판부 차출… 판결 갈등 사표
박봉탓 개업 서둘다 부친에 크게 혼나
이회창이 붙은 고시 사법과 8회(1957년)는 합격생이 많았다. 모두 1백8명이다. 그 전에는 30여명 안팎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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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원이 없었고 평균 60점 이상이면 모두 합격이었다. 8회생은 법조계에 큰 인맥을 형성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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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격 후 이회창은 대학을 졸업, 공군에 입대한다. 법무관으로 근무한 뒤 4.19 직전인 60년 3월 서울지법 인천지원으로 발령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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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차로 출퇴근했다. 25세의 청년판사인 그를 두고 인천 지역신문에 '홍안(紅顔)의 미판사'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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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회창은 이후 대법관을 마칠 때까지 한번의 지방근무 없이 엘리트 법관 코스를 밟았다. 또 형사부가 아닌 민사부에서 대부분 근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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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조계에선 이를 두고 법원 수뇌부의 배려라고 했다. 시국사건을 처리하는 형사재판부는 군사정권의 눈치를 봐야 해 법원 수뇌부가 그를 아껴 민사 쪽만 맡겼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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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회창은 61년 5.16 발발 직후 혁명재판부에 차출됐다. 연소자 순이었다고 한다. 혁명재판부는 재판장과 주심이 군 법무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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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간인 판사 한명이 포함되는데 이회창은 1심 배석판사였다. 그는 이때 진보적 일간지 민족일보 조용수 사장에게 사형 판결을 내린 재판에 관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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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인옥 사진 보고 마음 바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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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일 민주당은 그에게 "역사상 최대 언론말살인 민족일보 사건의 담당판사로 반민주 악법의 칼을 휘둘러 조용수 사장을 반국가단체 동조 혐의로 사형 판결했다"고 공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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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회창은 86년 언론 인터뷰에서 "(민족일보 사건에서)증거가 불충분하다는 뜻을 밝혔다가 고위 간부에게서 '너같은 사람 때문에 혁명을 해야 돼'란 말을 듣고 사퇴서를 냈었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 간부는 혁명검찰부장이었던 박창암(朴蒼岩.당시 대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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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 이회정의 회고다. "원주 야전의무시험소 병리과장(대위)으로 있는데 회창이 찾아와 '법조문을 들어 다른 의견을 낼 때마다 박창암이 총을 들이대며 간나새끼 죽여버리겠다고 해 도저히 안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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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원해야겠다'고 하소연했다. 동생은 서울 계동으로 전성완 의대 교수도 찾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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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등 끝에 이회창은 사표를 낸다. 이에 아버지 이홍규는 "잘 했다. 남자가 배짱이 있어야지"라고 말했다고 한다. 파문은 박창암이 사과하고 사표가 반려돼 일단락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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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회창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당시 혁명재판부 차출을 끝까지 거부해 감옥에 간 사람도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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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회창은 61년 초가을 한성수(韓聖壽)서울고등법원장의 둘째딸 한인옥(韓仁玉)과 만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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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성수가 이회창을 눈여겨보고 김정규(金政圭)부장판사에게 중매를 부탁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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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회창은 상사의 딸이란 점을 거북해했으나 한인옥의 사진을 보고 맞선을 보기로 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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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속을 하니 저쪽에서 내 사진을 보고 싶다고 했다. 나는 작고 못생긴 사진을 보냈다. 그래야 실물을 보고 실망하는 일이 없을테니까.… 맞선 장소는 퇴계로 태극당 본점이었다. 나와 김부장은 미도파 백화점 쪽 태극당 분점에서 기다리다 50분을 지각했다.… 나중에 아내는 땀을 흘리며 헐레벌떡 뛰어오는 내가 얼굴이 하얗고 맑아 좋았지만 키가 조금 더 컸으면 하는 아쉬움도 느꼈다고 했다."('아름다운 원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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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은 몇개월의 연애기간을 거쳤다. 하루는 만나기로 한 한인옥이 안 나타났다. 이회창은 누구든 15분 이상은 안 기다려 '15분맨'이란 별명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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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분을 기다린 끝에 일어선 이회창은 명륜동 집으로 향하다 '혹시 무슨 일이 생겼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해 커피숍으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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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속시간보다 1시간50분이 지났는데 한인옥이 눈물이 가득한 채 앉아있다 이회창을 보고 왈칵 눈물을 쏟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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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인옥이 시간을 원래 약속했던 것보다 1시간 뒤인 것으로 잘못알아 생긴 해프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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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은 고교친구인 오성환.서병국 등이 졌다. 한성수의 엄한 성격을 겁낸 이들은 시.발택시 문을 안에서 걸어잠그고 함값을 흥정했지만 한성수가 "들어와"하고 소리지르는 바람에 바로 끌려들어갔다고 한다. 결혼식은 62년 3월 2일 명동성당에서 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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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인 한성수는 경남 산청 출신. 경성사범을 나와 42년 일본 고등문관시험 사법과에 합격했다. 59~61년, 64~68년 두 차례 대법관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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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의성 출신으로 경성사범을 나온 장모 김분남(金粉南)은 교사 경력이 있다. 김분남은 살림에 보태기 위해 담배가게를 하고 시.발택시 두대를 구입, 운전기사를 두고 운영한 일도 있다고 한인옥은 자전에세이 '내 어머니'(공저.2001년)에서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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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회창.한인옥은 신혼 초 부부싸움을 꽤 했다고 한다. 당시 젊은 판사들은 영장 당직 판사를 위로한다는 구실로 바로 퇴근을 않고 저녁을 함께 먹고 수시로 포커판을 벌였다. 이회창도 여기에 끼어 매일 귀가시간이 자정 무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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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인옥은 "이러려면 하숙집 아줌마랑 결혼하지 그랬느냐"며 따졌고 부부가 한동안 말을 하지 않기도 했다고 한다. 포커판이 가열되면 이회창의 집에서 '심야 연장전'도 벌였다는 게 한인옥의 설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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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회창은 "한번은 크게 잃어 월급봉투가 얇아졌고, 아내에게 다른 핑계를 둘러대느라 진땀을 빼기도 했다"고 사석에서 말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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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커 멤버엔 당시 서울지법 판사였던 이한동(李漢東.국무총리)도 있다. 훗날 이한동이 "이회창은 잃으면 만회할 때까지 끈질기게 쳤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지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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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인옥이 친정어머니의 보조로 호마이카 찬장을 사자 이회창은 다음날 고등법원으로 장인 한성수를 찾아가 "제가 세대주로 살림을 꾸려가는데 장모님이 이래라 저래라 하시면 가권(家權)침해"라고 항의한 일도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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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인옥은 97년 여성지와의 인터뷰에서 "남편은 어딘가 틀어지면 목욕탕에 들어가서 한동안 안 나온다. 그럴 땐 내가 먼저 잘못했다고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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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집 직접 계약했다 원망 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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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이야기도 있다. 이회창이 변호사 개업을 했을 때니 50대 초반 시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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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배 변호사가 우연히 이회창의 사무실에서 부부싸움하는 소리를 엿듣게 됐다. 처음엔 이회창이 고함을 치더니만 한인옥이 조용히 조목조목 따지자 나중엔 꼼짝도 못하더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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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회창은 불광동에다 신혼살림을 차렸다. 당시 주택영단(현 주공)에서 분양한 집 셋방이었다. 이회창은 집주인이 할부금을 갚을 길이 없어 집을 내놓자 약간의 웃돈에 연체된 할부금을 떠안는 조건으로 집을 인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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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되겠지'했지만 법관 월급으로 할부금을 갚기엔 무리였다. 연체가 쌓여 '점유이전금지 가처분'조치를 당했다. 이회창은 성북동으로 집을 줄여 이사를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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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인옥이 둘째를 임신 중이라 이회창 혼자 계약했는데 북향에다 초가집을 지붕만 기와로 개조한 구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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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이런 집을 샀어요?'. 만삭인 아내의 첫마디였다. 나는 열심히 집의 네모 반듯한 마당을 설명했지만 아내는 한숨만 내쉬었다.… 재래식 화장실을 퍼내야 하는데 골목이 좁아 사람이 오려 하지 않았다. 겨울이면 수도관이 얼어터졌다…('아름다운 원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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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북동.휘경동.이문동 집을 거친 이회창은 대법관을 그만두고 86년부터 2년 동안 변호사를 하며 굵직한 사건들을 맡아 본격적으로 돈을 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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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구기동의 풍림빌라를 사 입주하고 골프실력도 크게 는다. 싱글에 근접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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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회창은 풍림빌라를 97년 7억원에 팔아 그 중 5억원을 대통령 선거자금으로 당에 납부하고 전셋집을 돌다 사돈 최기선 소유로 돼있는 경남빌라에 입주한다. 이 경남빌라가 호화빌라 파문을 일으킨 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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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회창은 70년대 서울지법 부장판사 시절 변호사 개업을 고려한 적이 있다. 유신의 암울했던 상황과 박봉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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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렁탕 한그릇이 5백원이던 때 이회창은 한인옥에게 매일 5백원씩 용돈을 타 썼다고 한다. 이회창은 고시 동기로 비슷한 고민을 하던 박우동(朴禹東).오성환과 사표를 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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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를 들은 부친 이홍규는 대로(大怒)했다. 이홍규는 "한번 세운 뜻을 월급 때문에 바꾸느냐. 유신정권에서 너만 어렵냐. 어려운 시기엔 모두 다 어려움을 겪는 법이다"라며 꾸짖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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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홍규는 며느리 한인옥에게도 "도대체 남편에게 무슨 소릴 했기에 돈 벌겠다고 저러느냐"며 야단을 쳤다. 변호사 개업은 없었던 얘기가 됐다. 이들 3인은 후에 모두 대법관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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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년 영등포지원장 시절 이회창은 매달 '재판연구발표회'를 열었다. 후배 법관들을 공부시키기 위해서였다. 발표가 끝나면 이회창이 직접 질문을 해 참석자들은 준비에 잔뜩 신경썼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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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책과 TV로 소개된 '하버드 대학의 공부벌레들'에 나오는 킹스필드 교수를 연상시켜 영등포지원 판사들은 이회창에게 '이스필드'란 별명을 붙여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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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원행정처 기획조정실장이던 이회창은 81년 4월 17일 유태흥(兪泰興)대법원장 체제 출범과 함께 대법관(당시엔 대법원 판사)이 됐다. 만 46세. 동기 중 선두였고 3공화국 이래 가장 젊은 대법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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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인선을 주도한 사람이 당시 전두환(全斗煥)대통령 법률비서관이었던 박철언(朴哲彦)이다. 박철언은 96년 "당시 이회창은 법조계 소장층에서 인기가 높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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全대통령이 '깐깐한 사람을 대법관 시키면 신경쓰이는 일이 생기지 않겠나'라고 했지만 내가 '대법원은 소신있는 인물이 들어가는 게 모양이 좋다'고 설득했다"고 회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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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후배법관들 판례 공부 시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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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신군부의 통치구상과 이회창의 법철학은 아귀가 맞지 않았다. 이회창은 대법관으로서 주목받는 소수의견들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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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법원의 판결은 대법관의 표결로 내려진다. 다수의견이 바로 판결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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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판결문엔 소수의견도 기록한다. 비록 재판결과엔 영향을 미치지 못해도 소수의견이 새로운 법해석을 유발하고 법관 개개인의 소신과 양심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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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회창이 대법관으로 참여한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은 40건. 이회창은 다수의견을 27회, 소수의견을 13회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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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인이 꼽은 가장 기억에 남는 판결은 '계엄해제하에서 군사재판권 연기 규정은 위헌'이란 소수의견(85년)이다. 이른바 '박세경(朴世俓)변호사 사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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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세경은 계엄하인 80년 5월 1일 동교동 김대중(金大中) 자택에서 집회를 가졌다가 계엄포고령 위반으로 구속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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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법회의(1심)판결은 징역 2년.집행유예 3년. 계엄은 고등군법회의 항소심이 진행 중이던 81년 1월 해제됐다. 민간인인 박세경은 재판이 일반법원으로 넘겨질 것으로 믿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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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고등군법회의는 박세경에게 계엄법의 '필요할 경우 군법회의의 재판권을 1개월 연기할 수 있다'는 조항을 적용, 계엄해제 열흘 만인 2월 3일 항소기각 판결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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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세경이 대법원에 상고한 이 사건은 이회창이 주심을 맡았다. 전원합의체 판결은 9대 4로 상고 기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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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수의견 요지는 "계엄 후 일반 법원이 기능을 회복하지 못한 경우엔 일시적으로 군법회의가 재판권을 계속 행사하더라도 기본권의 본질적 내용을 침해한 게 아니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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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회창은 "계엄령 해제 후 민간인을 군법회의가 재판하는 것은 기본권 침해다. 1개월 이내라고 본질적 침해가 아니라면 2개월은 어떠하며 6개월 이내는 어떻게 볼 것인가. 연기 기간의 길고 짧음에 따라 권리의 본질적 침해 여부를 가릴 수는 없다"고 반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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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이같은 기본권 침해에 눈 감고 개입을 주저하면 도대체 어떤 경우에 사법이 개입하나"라고 공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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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대 교수 양건(梁建.헌법학)은 "80년대 권위주의 지배하에서 일부 대법관들이 대법원의 본래 기능을 다하기 위하여 애쓴 일례"라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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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 모독 사건' 판결도 있다. 한국기독교청년협의회 상임총무였던 김철기(金喆基)는 82년 7월 종로구 연지동 협의회 사무실에서 내외신 기자 10여명에게 '컨트롤 데이터 사태에 대한 우리의 입장'이란 정부 비방 유인물을 배포했다고 구속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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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용된 형법 국가 모독죄 규정은 75년 공화당과 유정회가 반정부 투쟁을 봉쇄하기 위해 날치기 통과시킨 것이었다. 1심은 김철기에게 징역 1년6월을 선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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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2심은 "국가 모독 의사가 있어도 미수범이어서 처벌 규정이 없다"며 무죄를 선고했다. 83년 6월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11대2로 2심 판결을 뒤집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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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수의견은 "외국에서뿐 아니라 국내에서도 외국인을 상대로 국가 모독행위를 하면 처벌할 수 있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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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회창은 "외국인에게 유인물을 배포한 것만으로는 외국인의 행위를 이용해 국가 모독행위를 한 것으로 볼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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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수의견은 입법 취지를 벗어난 확장 해석이며 국내에서의 국가 모독행위의 규제는 자칫 헌법이 보장한 표현.비판의 자유를 부당하게 제한할 수 있다"고 소수의견을 통해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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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호사 박원순(朴元淳)은 89년 시사저널 기고문에서 "우리가 주목하는 점은 이회창이 소수의견을 많이 냈다는 것보다 그 의견이 언제나 국민의 인권과 사회적 약자편에 서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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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같은 소수의견은 법관 이회창의 성가를 높였다. 그러나 "자신만 알고 조직은 외면하는 사람"이라든가, '독선적'이라는 비판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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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회창은 다수의견으로 84년 '과외금지법 위반사건'에서 "법에서 금지한 과외교습은 계속 또는 반복하여 교습하는 행위만을 가리키고 우연히 일시적으로 하는 행위는 포함되지 않는다"고 판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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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로 인해 친구 조카에게 과외를 한 혐의로 기소된 대학생이 무죄가 됐다. 이는 과외 금지를 역점사업으로 추진하던 전두환 정권의 반발을 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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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회창은 후에 "나도 과외엔 부정적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를 무조건 처벌하는 것은 헌법의 이념에 어긋나는 공권력의 간섭이다"고 판결이유를 설명했지만 그는 86년 대법관 재임명에서 탈락한다. 법조계에선 "과외 판결 때문"이란 얘기가 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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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회창의 법 철학은 '사법(司法)적극주의'다. 87년 3월 서울대 초청 강연에서의 발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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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을 해석하고 적용하는 법관은 형식적이고 개념적인 자구(字句)해석에 얽매이지 말고 그 법이 담보하는 정의가 무언지 헤아려 정의 실현의 방향으로 의미를 부여해야 한다. 이를 위해 필요한 한도 내에서 법 규정의 의미를 과감하게 확대 해석하거나 축소.제한 해석해 법 창조 기능을 발휘해야 한다. 어느 대법원장이 물러나면서 '회한과 오욕의 나날'이라고 자탄했는데, 나는 강한 반발을 느낀다.… 회한과 오욕의 자리로 만드느냐, 아니면 명예와 존경의 자리로 만드느냐는 바로 법관 자신에게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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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회창은 88년 7월 이일규(李一珪)대법원장 체제 출범 때 대법관에 재발탁됐다. 대법관으로 퇴임했던 변호사가 다시 대법관이 된 경우는 전례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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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절에도 그는 주목할 만한 소수의견을 냈다. 92년 3월 국가보안법 위반사건에서 이회창은 "북한의 선전을 찬양하는 내용이라도 그것이 대한민국의 존립을 파괴할 위험이 있다고 보기 어려울 때는 불법이 아니다"고 주장했다. 이 때는 소수의견이었지만 이는 나중의 보안법 재판 판결에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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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91년 12월 '토지 소유권 이전 등기에 관한 판결'에서 "거래 허가를 관청에서 받기 전까지는 계약이 무효지만 일단 허가를 받으면 계약일로 소급해 효력이 발생한다"며 '유동적 무효'라는 새로운 법 개념을 정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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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원은 이 판결의 의미를 크게 평가해 94년 서울시로부터 정도(定都)6백주년 기념 타임캡슐(4백년 후 개봉)에 담을 판결문을 골라달라는 의뢰를 받고 이 판결을 추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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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회창은 2차 대법관 시절 중앙선관위원장을 겸임한다. 그 때까지 선관위는 정치권에 휘둘리는 일이 다반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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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회창은 선관위원장 취임사에서 "선관위를 헌법기관으로 만든 것은 중립성을 지키라는 이유에서다. 앞으로 특정 정당의 영향을 받는다는 소리는 듣지 않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는 불법.탈법이 극심했던 89년 4월 동해 재선거에서 민정.평민.민주.공화당의 네 당 후보와 사무장을 모두 검찰에 고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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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당시 대통령이면서 민정당 총재였던 노태우(盧泰愚)와 김대중(金大中).김영삼(金泳三).김종필(金鍾泌) 등 야 3당 총재에게 서한을 보내 "사마귀가 수레바퀴를 막는 격이 되더라도 법을 지키는 노력을 계속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이회창은 넉달 후 영등포을 재선거에서도 후보 전원을 고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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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회창의 의지에도 불구하고 수십년 굳어진 선거풍토는 바뀌지 않았다. 이회창은 영등포을 재선거가 끝난 두달 뒤인 89년 10월 선관위원장 사표를 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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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사퇴 이유서에서 "재선거를 공명선거 풍토 정착의 계기로 삼으려 했으나 역부족으로 타락선거라는 비난을 받았다"고 토로한다. 이같은 과정이 언론을 통해 알려지면서 이회창은 일약 전국적 인물로 부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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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부 기회취재팀>
김교준 차장<kjoon@joongang.co.kr>
나현철 기자
고정애 기자
김정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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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입력시간 : 2002.05.10 18:06
 
[집중 탐구 이회창] 下. 정치판 한가운데 선 대쪽
YS와 잦은 충돌… 127일만에 총리 사임
감사원장때 청와대·안기부까지'법대로'
후배가 대법원장 되자 폭음하며 탄식
이회창의 꿈은 대통령이 아니었다. 그는 대법원장이 되길 원했다. 적어도 1990년대 초반까지는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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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대법원장이 되고 싶다"고 희망하는 것을 들은 사람은 적지 않다. 주변에서도 대법원장으로 적임자라고 봤고, 그렇게 될 것으로 믿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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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정기승(鄭起勝)대법원장 국회 인준 불발 파동(88년) 때와 이일규(李一珪)대법원장 정년 퇴임(90년)때, 그리고 공직자 재산 공개 파동으로 인한 김덕주(金德柱)대법원장 퇴임(93년)때 대법원장 후보로 거명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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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년 1월 그가 14대 대통령당선자 김영삼(金泳三.YS)에게서 감사원장직 제의를 받아들인 직후의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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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와대 공보수석 내정자 이경재(李敬在)는 "당선자(YS)는 李대법관이 계속 법원에 있으면 대법원장이 되실 분인데 기꺼이 감사원장직을 수락해 고맙게 생각한다"고 발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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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감사원장을 하면서도 이회창은 대법원장의 꿈을 접지 않았다. 그는 계속 사석에서 법원 개혁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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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친구로 대법관을 지낸 박우동(朴禹東.변호사)은 "YS가 이회창에게 대법원장을 할 준비를 하라고 언질을 줬던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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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청 노이로제 시달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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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YS는 93년 9월 23일 청와대로 이회창을 불러 아침식사를 함께 하며 대법원장에 윤관(고시 10회)을 내정했음을 알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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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회창은 크게 실망했다. "내가 되는 줄 알았는데…"라며 서운해 했다고 한다. 이회창은 그 직후 감사원 출입기자들과의 저녁식사 자리에서 폭음을 하면서 "대법원 개혁은 물 건너갔다"고 탄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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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임기 6년의 대법원장을 했을 경우 정계에 발을 들여놓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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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든 법복을 벗고 감사원장이 된 이회창의 행보는 중앙선관위원장 시절 못지 않게 주목을 받았다. 그는 삼청동의 감사원장 공관 입주를 거부했다. 공관은 대지 9백33평에 건평 1백50평짜리 2층 벽돌 건물. 정원수와 자연석으로 꾸며져 있고 간이 골프연습시설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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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근 구기동 풍림빌라에 살던 이회창은 "공관이 세 식구가 살기엔 너무 크고 이사도 번거로우며 구기동에서 출퇴근하는 데도 문제가 없다"며 사저에 그대로 머물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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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원장 취임사에선 "감사원은 직무상 대통령으로부터도 독립한 지위에 있다"고 천명했다. 출입기자들과의 첫 대면에서 "내 방침은 '법대로'다"라고 선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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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책상에 두꺼운 법전을 놓고 일이 막힐 때마다 펴보았다. 당시 이회창의 자문에 응했던 변호사 서정우(徐廷友)는 "李원장이 전화해 '법적으로 맞느냐, 안 맞느냐'고 물어보곤 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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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해 3월 감사원은 청와대 비서실과 경호실에 대해 현장 감사를 실시했다. 유신 후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 결과 청와대 직원들의 정보비.접대비 유용을 적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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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에는 F-16 전투기 등 주요 무기 도입을 골자로 하는 국방부의 '율곡사업'에 손을 댔다. 안보상 기밀이란 이유로 역시 성역이었던 부분이다.'평화의 댐' 건립 경위도 파헤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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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과정에서 전두환(全斗煥).노태우(盧泰愚)두 전직 대통령을 서면 조사했다. 최고 정보기관인 안전기획부(현 국가정보원)를 찾아가 감사를 벌였으며, 감사관들이 "안기부에서 문을 열어주지 않는다"고 전화로 보고하자 이회창은 "그대로 들어가라"고 지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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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정보기관 고위 책임자가 전하는 일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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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정보부 이래 감사원이 안기부에 들어와 감사한 것은 처음이다. 안기부가 발칵 뒤집혔다. 격분한 직원들은 고위 간부의 지시로 감사원 사람들 뒤를 캐기 시작했다. 이를 알게 된 이회창이 안기부장 김덕(金悳)에게 '이럴 수 있느냐'고 항의했다. 金부장은 '나는 모르는 일'이라고 했다. 우여곡절 끝에 이회창은 감사 결과 발표에서 안기부 부분을 자세히 밝히지 않았다. 안기부도 더 이상 감사원을 건드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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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무렵 이회창은 승용차 안에서 클래식 음악을 즐겨 들었다. 때로는 집무실에 음악을 틀어놓았다. 감사원 내에서는 '클래식을 좋아한다'와 '도청을 막기 위해서'라는 두가지 해석이 팽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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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청과 관련한 이회창의 일화는 또 있다.총리실에 근무했던 정두언(鄭斗彦.한나라당 서울 서대문을 위원장)의 회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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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회창 총리가 '내가 사적인 자리에서 나눈 대화가 어떻게 여권 인사들 입에서 나올 수 있느냐'며 도청 실태를 파악하라고 지시했다. 실무진이 며칠 동안 작업한 끝에 보고하자 李총리는 '도청은 명백한 위법이니 실무 집행을 담당하는 기관을 폐쇄하라'고 지시했다. 총리실 직원들이 난감해 하며 '총리 지시문'을 기안했다. 이렇게 진행되던 상황은 이회창이 돌연 총리직에서 물러나면서 흐지부지됐다."('최고의 총리 최악의 총리',200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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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관은 광화문에 있던 우정연구소였다. 사실상 정보기관의 지휘를 받던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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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당 시절 이회창의 도청 경계심은 더했다. 월간지와의 인터뷰에서도 "집의 전화는 가끔 도청되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외부선과 접속된 것 같은 잡음이 나고 이쪽 소리가 갑자기 작아지기도 한다. 통화가 도중에 끊어지는 경우도 있다. 그래서 중요한 얘기에는 일반전화를 사용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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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감사원 시절이다. 감사원장 이회창은 오전 8시40분에 출근해 오후 6시5분에 퇴근했다. 외부 사람과는 약속을 하지 않았다. 점심은 구내식당에서 해결했다. 이발도 구내이발소에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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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근할 땐 감사보고서를 한보따리씩 집으로 가져갔다. 감사원 직원들은 "감사반장 같은 원장"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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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취임 직후 "직원들의 의견을 자유롭게 듣겠다"며 집무실 문을 개방했고,"찾아오기 어려우면 글로 써내라"고 했다. 4각 탁자를 원탁으로 바꾸고 직원식당과 간부식당의 메뉴와 식기를 동일한 것으로 통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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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때 비서실장을 지낸 신덕현(申德鉉)은 "부부동반 청와대 만찬 때도 차를 집으로 보내 부인을 데려오지 않았다. 부인을 감사원 문앞까지 오게 해 함께 차를 타고 출발했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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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R협상 사과 놓고 갈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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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년 11월 직원 체육대회 때의 일이다. 간부와 여직원이 2인1조로 고무풍선을 굴리며 달리는 경기가 있었다. 대부분 간부들은 웃으면서 대충 뛰었다. 이회창은 고개를 숙인 채 열심히 달려 함께 뛴 여직원이 힘들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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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같은 이회창의 감사원에 대해 '독주한다'며 여권 내부에서 견제가 시작됐다. 여기엔 청와대도 포함됐다. 그는 5급 이상 감사원 직원의 징계권을 총무처 대신 감사원이 행사하고, 모든 공직자의 계좌를 감사원이 추적할 수 있도록 하는 내용의 감사원법 개정을 추진했지만 "기능상의 독립이 아닌 정부 조직으로부터의 이탈을 추구한다"는 타 부처의 반발에 부닥쳐 무산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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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S는 12월 이회창을 국무총리로 지명한다. 국면 전환용이었다. YS는 대선 공약으로 '쌀시장 개방을 않겠다'고 내걸었다. 그러나 우루과이 라운드(UR)협상 타결로 개방이 불가피해졌고, 여론은 급격히 나빠졌다. 이를 만회하기 위해 그를 국무총리에 앉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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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둘의 관계는 보완적이지 못했다.여권에선 이회창의 총리 취임 후 대통령과 총리가 충돌하는, 전에 없던 일이 수시로 벌어졌다. 결국 이회창은 1백27일 만에 물러났다. 허정(許政.2개월3일)에 이어 두번째로 짧은 재임기간을 기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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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이회창은 UR협상에 대한 대국민 사과를 놓고 청와대와 갈등했다. 당시 비서실장이던 이흥주(李興柱)의 기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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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와대와 협의해 사과 담화문을 작성한 뒤 담당자들이 오후 11시쯤 총리 공관으로 찾아가 보고했는데 고개를 저었다. '공무원들이 부족하긴 했지만 잘못했다고 보기 어렵다.또 정부가 잘못을 인정하면서 국회에 비준해달라고 요청한다는 게 말이 되느냐'는 얘기였다. 다음날 오전 10시에 이미 담화를 발표하기로 잡혀 있었는데 큰일이었다. 할 수 없이 다시 조율을 했다. 이 얘기를 들은 청와대 L수석이 '혼자만 진흙탕에 안빠지겠다는 거냐'고 불만을 표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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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동강 페놀 오염사건이 터지자 이회창은 현장으로 가느라 보사부의 대통령 업무보고에 배석하지 않았다. 청와대 대변인 주돈식(朱燉植)은 "대통령이 총리에게 '지금은 물 대책이 급하다'며 업무보고에 배석하지 말라고 돌려보냈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이회창은 공보비서관을 시켜 "대통령이 돌려보낸 게 아니라 내가 먼저 그런 의향을 밝혔다"고 반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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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아시안 게임 부산유치 계획을 보고하던 총리실 담당국장은 이회창에게 "청와대에서도 괜찮다고 합니다"라고 말했다가 혼이 났다. "총리에게도 보고 안된 일을 사전에 어디와 상의했느냐"고 한 것. 이회창은 이후 "법에 정해진 일이 아니면 청와대와 협의하지 말라"고 지시했다. 직원들은 곤혹스러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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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무렵 이회창은 총리로서 역할에 한계를 느낀 모양이다."총리는 일하는 게 아니라 정부의 인기를 올려주는 직업이더구먼. 이래선 안되는데…"라고 말했다고 한다. 총리에서 물러난 결정적 계기는 '통일안보정책조정회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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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YS는 통일.안보관련 주요 정책을 논의하기 위해 외무.통일.국방부 장관으로 구성된 회의체를 구성했다. 이회창은 이에 대해 "내각 구성원들이 참여하는 데 총리가 배제된 것은 잘못"이라고 항의했다. 청와대는 고민 끝에 총리비서실장을 배석자에 포함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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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자신이 모르는 사이에 북한벌목공 수용 대책 등의 정책이 흘러나오자 이회창은 간부회의에서 "통일안보정책조정회의 논의사항도 총리의 승인을 받으라"고 지시했다. 통일 부총리 이영덕(李榮德)과 외무부 장관 한승주(韓昇洲)를 집무실로 불러 따로 다짐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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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총리 없는 안보회의'에 항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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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S는 회고록(2001년)에서 이렇게 술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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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리 발탁 때 반대가 많았다.'일체의 공직에 어울리지 않는 인물'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내가 외국을 방문하는 동안 안기부장에게 업무보고를 요구하는가 하면 나와 독대한 장관들에게 무슨 얘기를 나눴는지 자신에게 보고하라고 했다.…총리의 법적 권한을 주장하며 대통령의 지휘를 받기를 꺼리더니 급기야 북핵 및 외교 문제 등 대통령의 업무를 자신이 지휘하겠다며 언론에 공개해 버렸다.…나는 이회창 총리를 청와대로 불러 호되게 질책했다. 그는 '한번만 더 기회를 주십시오'라고 했지만 나는 '지금 당장 사표를 내지 않으면 해임조치하겠다'고 호통을 쳤다. 고성이 밖에서도 들렸다. 그는 내 집무실을 나가면서 출입문을 찾지 못해 허둥대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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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관련, 이회창은 사석에서 "어른들이 고성은 무슨 고성…"이라고 말을 흐리면서도 "이런 식의 개혁은 곤란하다. 다만 정상적인 형태의 개혁으로 돌아오면 밖에서나마 도와드리겠다고 말했다"고 소개했다. 이회창은 측근들이 YS의 회고록에 대한 법적 대응을 주장하자 "고발했다가는 정말 배은망덕하다는 소리를 듣는다"며 그냥 넘겼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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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 김영삼과 총리 이회창의 대결은 이회창의 완패로 끝났다. 그러나 이는 외형상의 손익 계산일 뿐이었다. 해임된 이회창의 인기는 급등한다. 정두언은 이회창이 물러난 날 총리실에 격려전화가 폭주했다며 "총리실 역사상 하루에 전화가 그렇게 많이 오긴 처음"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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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와대 정무.공보수석을 지낸 주돈식은 "김영삼 대통령의 인기가 50% 이하로 떨어진 것은 이회창 국무총리 해임 사건이 계기가 됐다. 반면 이회창씨는 인기도 조사의 대상에도 끼지 못했던 위치에서 무려 35%선으로 뛰어올랐다('문민정부 1천2백일', 97년)"고 말했다. 최근 정치권의 화제가 노풍(盧風.노무현 바람)이라면, 당시엔 이풍(李風.이회창 바람)이 있었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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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때문에 이회창은 정치권의 영입 대상 1호가 됐다. 95년 지방선거 때 여야 모두로부터 구애를 받는다. 국민회의 총재 김대중(金大中.DJ)의 최측근 권노갑(權魯甲)이 접촉에 나섰다. 정대철(鄭大哲)도 자주 구기동 풍림빌라에 들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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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회창은 96년 1월 YS의 요청을 받아들여 신한국당 입당을 결정한다. 96년 1월 신한국당 15대 총선 선거대책위원장에 지명된다. 물론 진통이 있었다. 부인 한인옥은 한 때 다른 사람이 보는 앞에서 "이혼하고 가면 몰라도 그런 소리 말라"고 할 정도로 반대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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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가세에 힘입어 신한국당은 15대 총선에서 괜찮은 성적을 거둔다. 그러나 이같은 순조로운 출발에도 불구하고 법관이 천직이었던 이회창이 정치에 적응하는 것은 쉽지 않았던 것 같다. 무엇보다 정치에 대한 부정적 시각에서 오는 내적 갈등이 심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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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에선 옳고 그른 일과,해야 할 것과 안해야 할 것의 구분이 때로는 선명치 않다.정치인으로서의 행동 양식은 법조인과 다를 수밖에 없고 또 달라야 하는 부분도 많지만 원칙과 상식을 지켜야 한다는 밑바탕은 같아야 한다고 믿고 있다."(자전 에세이 '아름다운 원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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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인지 그의 정치 현실에 관한 발언에는 '고민'이 배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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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나무가 토양이 안맞아 말라죽으면 죽었지 전나무나 갈대가 되지는 않는다."(96년 1월 30일),"더러운 정쟁이라고 할 수 있는 구태의연한 낡은 정치판의 경험을 거쳐야 정치적 검증을 받았다고 얘기하는 것은 도착적 심리상태다."(96년 11월 2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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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회창의 친구로 대법관을 지낸 오성환(吳成煥.변호사)은 "개인적으로 볼 때 이회창은 끝까지 대법원장의 길로 갈 수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안타깝다. 정치인들은 순간적인 인기를 얻기 위해 나중에 어떻게 되더라도 지금은 입에 발린 소리를 하지만, 판사들은 직업 윤리상 그런 것을 못한다. 그게 몸에 배어 있을 테니 정치하는 데 어려움도 많을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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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회창은 정치에 몸담은 지 6년이 됐지만 여전히 기성정치인과 정치권에 대해 부정적인 인식을 갖고 있는 것 같다. 한나라당이 원내 제1당이 된 후인 2001년 5월 월간조선과의 인터뷰에서 이회창은 "분장하고 화장하는 게 정치 같다"고 말했다. 같은 시기 신동아와의 인터뷰에서는 법관시절과 비교해서 본 자신의 처지에 대해 "지금이야 법관 쪽에서 보면 완전히 타락한 거지 뭐"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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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그는 정치의 중심에 서 있음에도 불구하고 동화됐다는 인상을 주지 못한다는 얘기를 듣는다."정치감각이 떨어진다"는 지적이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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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다 이회창은 2000년 16대 국회의원 후보 공천에서 김윤환(金潤煥).이기택(李基澤).신상우(辛相佑) 등 당내 중진들을 대거 탈락시켰다. 그는 이같은 공천으로 정치쇄신 의지를 보여줘 '이회창식 리더십'을 구축했다는 평가와 함께 "이회창은 무섭다"는 세간의 비평을 더욱 굳게 만들었다. 97년 신한국당 대통령 후보를 놓고 그와 경합했던 이인제(李仁濟).이한동(李漢東).이수성(李壽成) 등이 결국 당을 떠났다. 한나라당 초대 총재 조순(趙淳)이나 박근혜(朴槿惠)와도 결별했다. 이로 인해 '포용력 부족'이란 지적이 계속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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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회창은 현 정부 들어 세풍(稅風.국세청을 동원한 대선자금 조달 혐의).총풍(銃風.휴전선 긴장조성을 위해 북한 측에 무력도발을 요청한 혐의).안풍(安風.15대 총선에서 안기부 자금의 신한국당 유입 혐의)으로 정치적 곤경에 처했다. 그 스스로 "살아 남기 위해 전력을 다했다"는 과정을 거쳐 그는 '반(反)DJ세력의 구심점'으로서의 위치를 굳혔다. 16대 총선에서 한나라당이 원내 제1당을 차지한 이래 노풍이 일어날 때까지 2년 동안 그는 지지율 1위, 당선 가능성 1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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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J는 자유형 나는 개헤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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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같은 대여투쟁 과정에서 한나라당은 "모든 혐의들이 '이회창 죽이기'를 위한 여권의 음해"라고 반박했다. 하지만 국민의 시각에선 명쾌하지 않은 부분이 남아 있는 것도 사실이다. 총풍.안풍 등의 재판 과정에서 그가 직접 관련되지 않았다고 밝혀진 부분도 있지만, 세풍의 경우 그가 해명해야 할 부분이 아직 남았다는 주장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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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회창이 해결해야 할 또 하나의 과제는 주변정리다. 민주당은 대선에서 호화빌라 파문과 아들의 병역문제, 측근 정치와 친인척의 정치개입을 공세대상으로 삼을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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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때문에도 이회창은 최근 자신 및 가족과 관련한 루머를 적극 차단하고 있다. 스스로 "내 가족도 공인"이라며 대통령에 당선될 경우 친인척 감찰기구를 두겠다고 다짐했다. 이에 앞서 4월 5일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서는 부인 한인옥이 점을 보러 다녔다거나, 아들 이정연이 사조직을 운영하고 있다거나, 아버지 이홍규가 신사참배를 하는 사진이 있다거나, 린다 김이 보내준 넥타이를 매고 있다는 등의 각종 소문을 일축했다. 부인 한인옥이 16대 공천에 간여했다는 주장에 대해서도 "단 한 번도, 그리고 한 사람도 없었다"고 잘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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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회창이 '가족의 조언'에 상당한 무게를 두고 있다는 관측이 남아 있는 한 '한국적 정치현실'에선 친인척의 주변에 사람이 꼬이게 된다. 따라서 그의 측근들조차 이회창의 가족문제가 대선 과정에서 운신에 부담을 주지 않을까 걱정한다. 이회창은 자신의 거취 문제 등 중대한 결정을 내려야 할 때면 가족회의를 연다고 한다. 15대 대선 낙선 후 8개월이 지난 98년 8월 야당총재로서 정치 일선에 복귀할 때도 가족회의를 열어 "내 꿈을 실현하게 해달라. 대통령 자리가 목표가 아니다. 제대로 된 나라를 만들고 싶다"고 했고 가족들도 동의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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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회창은 97년 대선에서 39만표차로 김대중에게 패배한 다음날 펑펑 울었다. 후보 경호를 위해 파견됐던 경찰들이 복귀인사를 하는 자리에서 한 경호요원이 눈물을 터뜨리자 참았던 감정이 터져버린 때문이다. 10여분 동안 눈물을 흘렸고 당사의 후보사무실은 눈물바다가 됐다. 차를 나르던 여직원들도 엉엉 소리를 내어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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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회창은 그 후 "강을 헤엄쳐 건너는 게 대선이라면 상대는 자유형을 하는데 나는 개헤엄을 쳤으니…"라고 자신의 미숙함에 대해 말했다고 친구 서병국은 전했다. 그는 또 사석에서 "(당시)TV토론 녹화를 봤다.'저러니 떨어졌지'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나는 서툴렀다"고 말한 일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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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회창은 스스로의 표현대로 '두번째이자 마지막 도전'에 나섰다. 머리를 검게 물들이고,10일 잠실체육관에서 한나라당 대통령후보 수락연설을 마치고는 단상에서 넙죽 업드려 큰 절을 했다. 이 장면을 보고 법관 출신 후배는 "'내가 알던 그 이회창이 맞나?'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그가 '자유형 영법(泳法)'을 유연하게 구사해내는 노련한 정치인이 될지, 흉내만 내다가 자신의 표현처럼 '타락'만 하고 말지는 지켜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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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부 기회취재팀> 김교준 차장<kjoon@joongang.co.kr> 나현철 기자 고정애 기자 김정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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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잡습니다> ◇5월 13일자 12면 '이회창 연표'에서 생일 '1월 2일'은 '6월 2일'의 오기이므로 바로잡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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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입력시간 : 2002.05.12 17:37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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