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가락 절단되고 실명되면 느그아들됨.
20대의 황금같은 2년을 꼴아박아봤자 돌아오는건 군부대 주변바가지요금, 군인들 핸드폰뺏어야된다 시위하는 상인들, 대민복구지원 나가면 반말짓거리하며 노예부리듯하는 주민들, 군바리새끼들이라는 멸시ㅋ 매년 날라오는 동원훈련, 예비군훈련, 민방위훈련. 다 해봤자 한남소리나 듣지ㅋ 니들이 한국병역비리 방산비리를 알까? Usb하나에 20만원이란걸. 무슨 테니스병이니 골프병이니 간부사병이니 하면서 지네 취미생활용 시다바리취급하고 심지어 지네집안일도 시킴ㅋㅋ 그동안 한국군대에서 스스로 삶을 포기하고 탈영한 젊은이들이 얼마나 많은지 니들이 알겠냐. 자기 아들이 왜 죽었는지도 모르는 부모도 있다.
님 친척중에 군대에서 훈련 받다 돌아가신 분계신가요? 우린 있습니다 한분도 아니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군이 점점 나아질 거라 믿고 있습니다 사람들 모이는 곳에 문제가 아주 없을 순 없습니다 점점 더 나아 진다면 지켜 보는게 맞다고 생각 됩니다 고통 받은 분들 생각하면 정말 피 눈물 나지만 그렇다고 당장 군대를 없앨 수도 없는 노릇이죠 그렇다면 더 나아지게 자꾸 국민들이 비난 뿐 아니라 충고와 응원도 아끼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 합니다
222 진짜 좀 그렇죠.국민의 의무니깐 당연히 해야하고 자랑스러워 하지만 군생활중 다친 귀 때문에 직업선택이 제한되고 귀에서 나는 소리 때문에 일부러 몸을 혹사해서 잠을 청할때는 본전 생각도 납니다.더구나 제대직후 보상신청 했을때는 된다고 하더니 일년정도 지나 신청할려고 하니깐 기준을 확 올려버려서 안된다고 하니 씁쓸하죠.
일단 개발 당시에 민간시장에서 사용되던 일반 제품들이 512MB정도인 시절에 4GB라는 고용량이 요구되었으며 영상 50~60도부터 영하 30도라는 온도를 버티도록 내부에 소형 히터와 온도센서를 넣는 등의 조치를 취하였고 진동, 충격,전자파에 대한 군용 규격을 충족하기 위해 케이스를 알류미늄으로 교체하였습니다.
또한 케이스와 내부 전자장비 사이를 메꾸는데 특수재질의 폼을 사용했습니다.
추가로 성능충족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국가에서 공인한 장소에서 실험을 하느라 시간과 예산이 추가로 들어가고
정작 우리의 주적이라 할 수 있는 북한은 뒤로 하고 중국과 일본, 러시아도 한국의 국방력 증대를 경계하고 있습니다.
최근에 증강한 한국의 기계화 부대의 전력이라든지 공군, 해군 전력도 장난 아니지만 그 전에 한국에서 파견나간
군대들이 보여준 압도적인 전과는 전세계에서도 강병으로 불리기에 부족함이 없죠.
특히 베트남전에서 보여준 한국 해병대가 베트콩의 야간 기습을 10분의 1밖에 안되는 병력으로
상대에게 15배 이상의 피해을 안겨준 짜빈동 전투는 지금도 전설처럼 내려오고 있습니다.
우리가 비록 근세 조선으로 오면서 수백년 평화와 학문과 글공부등 문치화로 군에 소홀해서 열도를 천여년 개척 지배 국가를 세우고 근세 조선까지 수천년 선진문화를 전해주던 입장에서
혹성탈출 종의 반란급마냥 쨉에 대한제국이 통수 맞아
수천년 우리의 도도하고 줄기찬 역사에 짧지만 35년의 국호가 사라지는 유례없던 역사를 겪어지만
고대부터 현대까지 이런 살벌한 체급과 전투력 만롑찍던 동북아의 수많은 종족과 나라속에서 이렇게 존재하는게 단순히 우연의 산물 같은지??
남북국시대 발해 이후 등장하는 북방의 패자 거란의 요나
이후 발해후예 부흥국 세력과 신라계 황제 결합의 대금등이
우리쪽 고구려나 신라등과 지속 언급 얽혀 있는 것도
(실위 후대 몽골등도 고구려 휘하 부용세력)
유럽으로 치면 천년 로마제국의 역사와 영향력에 바탕한 주변 봉신 부족 세력들이 이후 국가를 세워도(부족 개념이던 폴란드의 본격 왕국개념의 틀이 되는 피아스트 왕조도 10세기에서야 등장) 그 역사의 직간접적 그늘을 벗어날 수 없었던 것처럼
이들 동북방의 거란, 말갈(여진)등과 열도의 왜 역시
수천년 동방문명권을 구축 군림해온
우리 고조선 고구려문명권의 영향력 때문임을
우리 역사에 대해 스스로 자각할 필요가 새삼 있을 것임.
고구려의 토대가 되는 초기 토착재지 5부는 이후 신성한 태왕을 중심으로 동서남북 사방을 점하며 천하를 지배하는 5부 행정 대도시 문명으로 발전 이후
발해 5경과 신라 5소경에 이런 발해의 5경 체계는 다시 북방의 패자가 되는 요의 5경 체계로 금 역시 고구려계 국무총리가 송을 멸망시키고 북경에 중도 건설을 총지휘. 이후 쿠빌라이는 이런 요,금이 닦아놓은 강북을 기반으로 몽골 내부 분열시기에 물자를 통제하면서 대칸에 오를 수 있는 실질적 힘이 됨.(이를 바탕으로 남송 정벌)
우리 대한족은
신대륙의 발견으로 20세기 본격 등장한 미국이라는 신생제국이 생겨나기 전
세계사적으로 원탑급 물량 체급의 서토문명사과 맞대응
수천년 독자적 동방문명권을 구축하고 그 휘하 부용세력들이 도리어 서토 하한족을 노예로 털어먹는등
수천년 문명의 리더이자 전파자의 위치에 있던 역사였고
수천년 미개하던 쨉이 근현대 번쩍하던 시절도 있었지만
이건 아나로그 방식에서 카피캣에 여전히 머물던 왜구 방식이였지 그들 쨉 스스로 새로운 패러다임을 창조 리드한 역사는 전무(이러니 21세기 디지털 시대에 전형적 아나로그 사회 정치 시민의식에 매몰된 쨉은 이미 한계에 봉착)
USA 캘리포니아 대학. 제러드 다이아몬드 교수“discover誌“1998년 6월호「일본인의 뿌리」
”고대 한국인의 선조가 일본의 원주민인 조몬인.아이누족을 정복하므로서 일본이라는 나라를 탄생시켰다.”
하니하라 가주로(埴原和郞) ... 나라시대(奈良時代- 제50대 칸무(桓武) 왕이 784년 헤이안(平安)으로 천도하기 이전)까지도 한복을 입고 한국음식을 먹었으며 심지어는 한국말까지 사용했는데 고사기(古事記), 일본서기, 만엽집(万葉集) 등에 아직 조작되지 않은 부분은 한국어의 한국식 한자용어가 남아있다”고 말해 전체적으로 일본고사기들이 조작되었음을 밝혔다.
장문휴는 732년(인안 13) 무왕의 명령을 받아 수군을 이끌고 산둥 반도에 있는 당의 국제무역항 등주를 공격해, 당의 동방정책에 큰 타격을 주었다.
발해 무왕의 대외팽창에 위협을 느낀 동북만주의 흑수말갈이 발해와 우호관계를 단절하고 당과의 연결을 꾀하여 발해를 위협한 것에서 비롯되었다. 무왕은 흑수말갈의 정벌을 결정했으나 무왕의 동생 대문예가 발해와 당 사이에 전면전이 일어날 것을 우려해 흑수말갈의 정벌을 중지시키려다가 실패하고 당으로 망명했다.당에 대한 강경책으로 돌아선 발해는 수군을 동원하여 등주를 공격 초토화시켜버리고 육지로는 요서로 밀어버림.
흑수의 땅은 모두 발해에 복속되었다.
-발해고 무왕-
발해가 점차 강성함에 따라 흑수 역시 그 소속이 되었다.
-당회요 말갈-
금나라 황릉의 모델은 고려 황릉(왕릉)이었다.’ 12세기 북중국을 장악했던 여진족이 세운 금나라(1115∼1234) 황릉이 고려 황릉과 형제처럼 꼭 닮았다는 비교 연구가 국내에서 처음 나왔다. 금 태조 완안아골타(1068∼1123)가 10세기에 건국한 고려를 ‘부모의 나라’라고 불렀던 것을 감안하면, 당대 사회적 문화적 역량을 총집결시켰던 국책사업인 황릉 조성을 한반도에서 벤치마킹했던 것이다
장경희 한서대 문화재보존학과 교수는 최근 학술지 ‘동방학’에 게재한 논문 ‘12세기 고려·북송·금 황제릉의 비교 연구’에서 “고려와 금 황릉은 양식적으로 매우 유사하며 같은 시기 북송 황릉과 뚜렷이 구별된다”고 주장했다.
고구려 북쪽에 접경하여 철을 고구려에 의지했다는 기록등에 황두실위의 경우에는 고구려가 도독을 두어 통제한 정황.(李玟洙, 「高句麗 遺民 李他仁의 族源과 柵城 褥薩 授與 배경에 대한 고찰」『大丘史學』,2017) 북부여의 후신인 두막루가 실위와 흑수말갈 근처, 혹은 사이에 위치한 세력
(북위)세종이 이르기를,“고구려가 대대로 상장(上將)의 직함을 가지고 있으면서 해외(海外)를 모두 제압하여 사나운 오랑캐인 구이(九夷)를 모두 정벌하였다
ㅡ《후위서》
그리고 보니 역시나 동북아 북방 유목등 세력에 대한 기초 이해 자체가 부족하니 쉰잡설만 주절주절 쯧
소수의 흑수말갈에 신라계 함보가 들어가 부족을 통합 이후 대다수의 발해 후예세력을 흡수해서 세력을 키워 여진족으로 변칭 범칭되면서 금나라를 세우고
17세기에는 여진족이 몽골 일부 조선 요동인을 아우러면서 만주족이라는 족명에 청을 세우듯 북방은 이리 저리 이동에 일부 주도 부족에서 걸출한 지도자가 나오면 주변 여러 종족을 흡수 규합해서 세력이 급격히 커지는 방식은 다반사.
매번 본말전도에 아는척 조작 선동 어그로짓을 쳐하는 인간에게는 그에 대한 반박 근거는 더 늘수밖에.
먼저 여진과 발해인은 종족 및 지역적으로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예컨대 금사에는 完顏部가 고려와는 “본래 같은 곳에서 나왔다” 라고 기록되어 있고, 금 태조 아골타가 “여진과 발해는 본래 한 집안이다”라고 말했던 것도 여진의 발해인에 대한 인식을 추론할 수 있는 대목이다.
발해와 고려는 고구려 계통의 유민이 건국한 나라이며 고구려를 계승하는 의식이 뚜렷했다. 그리고 금 왕실의 시조 역시 고려인 函普15)였으므로 완안부와 발해인 사이에는 혈연적으로 친밀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더욱이 여진족은 발해의 구성원이었으므로 발해인과 지역적으로도 밀접했다. 따라서 금의 통치자는 양족 간의 이러한 친연성을 매우 중시했고, 발해인을 동맹자로 회유하는데 자연스런 기회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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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진 황실과 혼인을 맺은 자는 주로 요양 大氏, 李氏, 張氏 등 세 가문의 발해 우성이다.
그들은 태조에서 세종 때까지 황실과 대대로
통혼하였기 때문에 금조 9명의 황제 중에 4명이 모두 발해인 소생으로 바로 해릉왕, 세종, 위소왕, 선왕이었다.
발해 세가와 여진 황실의 정치적 혼인은 두 민족 간의 관계를 밀접하게 하였고, 그로 인해 발해인이 금대 향유한 우월적 지위를 장기간 보유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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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종 초에 삼성을 설치할 때 宰執은 거의 여진 종실 일색이었다. 그러나 해릉왕이 희종을 시해하고 즉위한 후에 종실 귀족의 강열한 반대에 직면하자 자신의 황위를 공고히 하기 위해 종실을 배척하고 일반 여진인 및 한인ㆍ발해인ㆍ거란인 등 가운데 재주가 있는 사람을 발탁하여 재집에 임명하였다.
그 중에 가장 전형적인 사람이 장호였다. 그는 貞元3年(1155)에서 正隆6年(1161) 혼자서 수상을 7년간 맡았는데 금대 극히 드문 경우로서 이것은 해릉왕의 용인정책
과 떼어 놓을 수 없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어머니와 원비가 모두 발해인이었던 해릉왕은 그들에 대해 친근감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발해인 관료를 중용하였다. 그래서 그의 재위시기에 궁중의 근시조차도 대부분 발해인 내지는 발해인과 특수한 관계를 가진 자들이었다.
예컨대
해릉왕이 양주에서 시해를 당했을 때 그 신변에 유일한 보위자가 바로 大慶山이었으며 또한 변고를 들은 후에 정병을 이끌고 구원하러 온 자도 발해인 大磐이었으므로 해릉왕과 발해인의 관계가 일반적이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한편 해릉왕이 시해당하기 직전에 동경유수 烏祿은 주변으로부터 추대되어 황제에 즉위하였다. 세종도 그의 어머니 및 다수의 후궁이 발해인이었다.
그가 요양에서 칭제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발해인의 도움에 의지하였기 때문이다. 그 중에 대표적인 사람이 세종 어머니의 동생이었던 李石이다. 그는 이전에 동경부유수 高存福 등이 해릉왕의 뜻에 따라 세종을 감시하며 격구를 빙자하여 그를 살해하고자 했다는 정보를 입수하자 세종에게 기선을 잡아 거사를 실행하도록 권했다.
김육불의 발해국지장편 「유예열전」에 이석이 빠져있으나 外山軍治에 의해 그가 발해인으로 고증된바 있다.27) 또한 三朝北盟會編 권245에서 「族帐部曲錄」을 인용하여 “李受는 발해인이다. 葛王(세종)이 즉위하자 외삼촌을 참지정사로 삼은 적이 있다”28)라고 기록되어 있다.
세종의 외삼촌이면서 참지정사를 맡았던 자는 오직 이석뿐인데 여기에서는 이수라고 기록되어 있어 아마도 이석의 誤記라고 추정된다. 그리고 금사 권86 「李石傳」에 의하면, 이석의 자는 子堅이고 요양인인데 貞懿皇后의 동생이다. 선대가 요에 출사하여 재상이 되었다. 고조는 仙壽이고 …… 부친은 雛訛只이다. 이석은 인정이 많고 말 수가 적었다. 그리고 도량과 식견이 뛰어났다. 천회2년(1124)에 세습모극을 받았다. … 여러 관직을 거쳐 景州刺史에 이르렀다.29)라고 기록되어 있어 정의황후의 동생인 이석이 요양의 호족이었고 금조에 관리가 되어 그에 상응하는 지위까지 나아간 것을 알 수 있다.
금사에는 세종 추대에 힘을 다한 사람으로서 이석만을 들고 있으나 세종의 원비 장씨의 생가에서도 그녀의 오빠와 숙부인 張汝弼, 張
玄素가 세종의 즉위를 기회삼아 달려왔다.
이러한 일은 금사 권83 「장현소전」에 소략하게 기록되어 있지만 그 裏面에 이석을 중심으로 발해인의 지원이 있었고, 또한 장씨 일가와도 사전의 묵계가 있었을 것으로 본다. 발해인은 거란의 반군으로부터 요양을 보호해준 세종을 신뢰하고 숭경했으며 재차 이석의 암약으로 그들을 단결시켜 세종 추대의 분위기를 숙성시켰다고 볼 수 있다.30)
따라서 세종은 즉위하기 전후에 발해인과 밀접한 관계를 가질 수밖에 없었다. 더욱이 해릉왕이 즉위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세종도 종실로부터 유력한 지지를 얻지 못했고 많은 종실이 관망하던 상태였기 때문에 그들을 충분히 신임하고 의지하지 못했다. 그래서 세종이 가장 신임할 만한 집단은 외척이었다. 당시에 재직했던 재집 가운데 외척 신분의 재집이 6명이었는데 바로 이석, 장여필 등 두 사람이 발해인 외척이었다. 외척의 절대 수는 비록 종실보다 많지 않았으나 직무를 맡은 연인원, 시간과 직위는 모두 종실보다 확실히 높았다.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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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할 만한 것은 발해 상층인물과 여진 통치 집단의 갈등으로 인해 이들 양 민족이 서로 미워하지 않았으며 금조 치하에서 발해인은 줄곧 협조적이었다. 요대에서와는 달리 줄곧 어떠한 정치투쟁도 없었으므로 그 민족지위는 비교적 안정적이었다고 볼 수 있다.
凡漢人、渤海人不得充猛安謀克戶。猛安謀克之奴婢免為良者,止隸本部為正戶。
무릇 한인(漢人)과 발해인(渤海人)은 맹안모극(猛安謀克)의 호(戶)에 충원(充員)하지
못하게 하였다.
맹안모극(猛安謀克)은 노비(奴婢)를 면해주고 양자(良者/양민)로 삼고,
종을 금하고 본부(本部)의 정호(正戶)로 삼았다.
2. 금사 세종(世宗) 본기中
丙戌,制漢人、渤海兄弟之妻,服闋歸宗,以禮續婚者,聽。
병술일(丙戌日)에, 한인(漢人)과 발해(渤海)인의 형제의 처(妻)를 (혼임함을) 금하고,
복결(服闋/삼년상을 맞치고 상복을 벗음)하고 귀종(歸宗/양자를 본가로 돌려보냄)하여,
계속 혼인하는 자는 예법에 의해, 판결하게 하였다.
불과 300명의 전력이 2400명의 기습을 맞이해 오히려 아군 사상자 15명으로 상대를 300명 이상 추살했다고 기록되는 전투입니다.
현대전 역사상 있을 수가 없는 일이 벌어졌다는 평가를 받는 전투죠.
현대전 특징상 똑같은 총기를 보유했기에 화력은 동등합니다. 하지만 상대군은 2400명이 넘어 우리군 장교 포함 300명이 채 안되는 규모에 비해 8배가 넘습니다. 또한 상대가 기습을 한 전투입니다. 그것도 밤 11시 경에 간을 보고 이후 5시간 뒤인 새벽 4시경 모두 잠들 때 한 기습인데 이런 결과를 낳았죠. 그 무대도 베트콩들에게 익숙한 베트남에서 정글에서 일어난 일이고요.
현대전 역사상 이렇게 일방적인 차이를 뒤집은 전투는 없습니다. 그로 인해 밀리터리 마니아들 사이에서는 신화로 남는 전투죠. 그 흔한 일반적인 전투나 재래식 무기를 이용한 고대 전쟁하고는 그 성격이 다릅니다. 이로 인해 한국 해병대는 세계 10대 전투부대에 꾸준히 이름을 올리고 있습니다.
현대 전술 및 전략 기지의 중요성을 명백하게 알려주는 짜빈동 전투에 대해 모른다면
밀리터리를 아예 모르는 사람이라 생각해도 과언이 아니죠.
왜 전세계 사람들이 한국 밀리터리를 높게 생각할까요? 한국이 이름난 전쟁에 많이 참가하고 많은 성과를 거둬서??
한국은 생각보다 많은 전쟁에 참여하지는 않았습니다. 늘 이기기만 했던 것도 아니죠. 하지만 한국군이 1명이 희생당하면 상대는 10명이상이 희생당했습니다. 그건 고대무기가 아닌 현대화기 중심의 전투에서도 마찬가지.. 그런 작지만 압도적인 전투에 관한 기록들을 한국은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한국 군대를 두려워하지 않는 외국인들은 거의 없습니다.
짜빈동 전투의 의의는 중대전술기지의 필요성과 그 성과를 나타내는 지표로서 밀리터리 매니아 사이들 속에서도 유명하지만 세계 각국의 군대에서 중대전술기지 구성의 교본으로 쓰이는 단골 교재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냥 흔한 베트남 전쟁으로 치부하는 당신의 무식함은 정말.. 박수가 절로 나오네요. 당신은 밀리터리에 관해서는 벌레보다도 빈약한 지식을 가진 사람이 맞는 것 같습니다.
[[한국군이 1명이 희생당하면 상대는 10명이상이 희생당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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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전 몇몇 전투 제외하고 그런 사례가 더 있으면 소개해 주세요!
(물론 한국전에서도 수많은 전투를 치렀으니 몇몇 전투는 그런 사례가 있었겠지만....)
물론 베트남전에서의 한국군 : 베트콩-월맹군의 전사자 숫자를 대비하면
1:10에 달한다는 건 익히 배워서 알고 있지만.....
그조차도 전과의 상당수는 일반민간인들을 베트콩으로 둔갑시킨 전과 아닌가요?
한국군 몇 명 희생당하면 희생당한 포인트 주변 마을을 쑥대밭으로 만들어놓았다는
사례는 저 또한 고딩시절에 베트남전 참전경험이 있는 나이지긋한 교련선생에게
직접 들은 부분이고....
(민간인들이 대다수인 마을을 쑥대밭으로 만든 걸 무슨 무용담처럼 자랑스럽듯이
학생들에게 말하는 부분에서는 정말이지.....^^)
그리고 짜빈동전투를 미국육사 이외에 군대 전술교본으로 배우고 있는 나라는
구체적으로 어느나라들인지도 부탁드립니다.~~~
이 사람 빠가인가?
베트남 전쟁 때 1명이 희생당하면 10배로 돌려준다는 상황을 만들었다는 건데
베트남 전투 빼고 그런 사례?
이건 뭔 개소리죠?
중대전술진지의 중요성으로 짜빈동 전투가 모범 사례로 각국에서 배우고 있는 이유가..
중대전술진지의 개념을 도입한 사람이 6.25때 백골부대에서 경험을 쌓은 채명신장군입니다.
짜빈동 전투는 이를 교본으로 하는 모범 사례고요.
그런데 뭘 어떤 나라가 배우냐고 묻는다면.. 이게 무슨 개소리인지 .
현대 전쟁에 대한
대부분의 교육은 세계 그 어디든 부대가 있고 장교를 가르치는 나라에서는 실행하고 았습니다.
그리고 중대 전술진지의 개념은 한국 채명신 장군이 만들었고
성과도 보여줬습니다. 그런데 각 나라의 사관학교에서 그런 개념을 안배울까요?
아 당신네 나라 빼고 하는 말입니다..
워털루나 칸나에를 아는 세계인이 얼마없다고 그 중요성이 사라지는건 아니지..
짜빈동은 더군다나 월맹 정규군 2개 연대와 지역 베트콩 대대의 원래 목표도 아니었고 후방의 비행장과 포병부대를 습격하러가는길에 살짝 즈려밟고 지나갈 수준이었던것.. 그러나 결과는.. 축구하러 운동장가는 길에 길가에있는 돌멩이 걷어차려다 발 부러지고 넘어져 척추와 갈비뼈 금이간데다 뇌진탕으로 혼수상태로 응급실 실려간꼴..
뒤쪽에서 앞쪽 자신의 동료들이 싸우는 모습을 보며 공격하던 월맹군의 입장에서.. 적의 일선에서 싸우던 숫자도 얼마안되는 적군이 총알이 떨어지자 총검과 이빨로 물어뜯으며 싸우고 그것조차 불가해지자 양팔가득 자신의 동료들을 끌어안고 수류탄으로 폭사하는 모습을 보며 과연 투지가 끌어올랐을까?
더 이전의 강화도에서도 그런 투지가 한양까지 진격하려던 미군의 의지를 꺾고 오히려 후퇴하도록 만든것이고..
아직 우리 배고파유.
좌중궈 우왜구 북돼지.
형님들은 이런 잣같은 상황 별로 안 겪어봐서 그래유.
우리가 좋아서 그러는 거 아녀유.
저 문디들 때문에 잣되본 경험이 많기 때문에
대비하는 거에유.
자원도 없고 고만고만 작은 나라에서
피같은 세금들여 이런 군대를 유지하는 거
형님들은 므찌다고 부러워하지만
그렇게 단순한 일이 아니에유.
좌중궈 우왜구가 지구상에 존재하는 한
우리는 강해져야 할 운명이에유.
북돼지는 미워도 우리집 식구라
언젠가는 품어야 하구유.
한국군의 최대문제는 계속된 저출산으로 인해 징병제를 유지하기 어렵다는 점 + 열약한 군인 처우/보상으로 인해 군복무의 가치에 대한 국민 인식이 낮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군인 처우를 대폭 개선하는 모병제 전환이 필요하고, 정치권에서 모병제 전환해야 한다는 얘기가 나오는데, 인터넷에서는 "한국군 전력이 일본보다 세고 세계 6, 7위로 평가받는다"는 얘기만 하고, 정작 정치권에서 모병제 전환 얘기만 나오면 반대댓글만 잔뜩 달리니 큰 모순입니다.
최근 주성하 기자의 유튜브 방송에 따르면, 김정은이 한국에 도발 공격하라는 지시를 내렸다고 하는데, 웬만한 지역강국들은 북한이 한국 공격하는 정도의 공격을 받으면 전쟁합니다. 북한이 대통령 암살을 위해 미얀마에서 폭탄테러하고, 한국 항공기를 폭파하고, 연평도를 포격했어도 전쟁 안 하고 참고, 군복무자들은 전역 후에 취업, 결혼, 내집마련에 어려움 겪어서 한국 청년세대가 세계서 가장 애를 안 낳은지가 20년이 넘어가는데, 한국 군사력이 일본보다 세다는 것이 의미가 있나요.
군인처우의 획기적 개선 없이 무기만 사는 추세가 쭉 이어지면, 곧 군대 채울 한국 청년이 부족해져 외국인이 한국군을 채우게 될 겁니다. 한국정부예산은 최근 17년간 5배 증가했고, 최근엔 1년에 40조씩 늘고 있는데, 이렇게 급증하는 예산 중 모병제/군인처우개선 예산이 없다는 것은 말이 안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