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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2-04-07 14:15
6.25때 중공군 전술..
 글쓴이 : Centurion
조회 : 8,582  




*38 선 돌파 이후 유엔군과 국군의 진격.


.


*중공군 1차 공세








*중공군 2차 공세.


1950년 10월 이후 중공군 수에대해 많은 이론이 있지만 대체적으로 최대 30만명이 1950년 10월에서 12월사이에 투입되었다고 보는 경향이 많습니다.

당시 UN군은 크게 함경도 일대와 평안도 일대로 나뉘었는데 중간엔 고산지대가 있어서 상호간 연결이 잘 되지 못했습니다.통신도 두절되기 일수였죠.

게다가 맥아더장군은 중공군의 참전에대해 믿지 못했습니다.

 

10월  유엔군 정보부서는 압록강변에 중공군 병력의 집결을 확인하였으나 총사령관 맥아더는 중공군의 개입가능성을 거의 없는 것으로 보았고 유엔군 하급제대는 중공군개입에대한 정보없이 계속 진격하여 10월말경엔 국경지역인 압록강까지 진출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미 중공군 참전의 징후가 여기저기 나타나고 있었으며 미제8군 및 한국군의 각 단위부대가 중공군과 조우하기시작하였고 10월25일 국군 제1사단은 최초로 운산 부근에서 중공군 포로를 생포,유엔군 사령부에 보고하였고 다른 지역에서도 중공군 포로에 관한 보고가 속속들어오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엔군 사령부는 애써 이를 축소하고 중공군 개입을 인정하지 않으려 했습니다.

하지만 이미 10월 중순부터 중공군 제4야전군 소속 제13병단은 약20만의 병력으로 압록강을 도하하기 시작하였으며 제13병단은 3개보병사단으로 구성된 6개군,각 군의 병력수는 약 3만명이며 이외 2개의 포병사단,독립포병대,기병연대, 2개의 트럭연대로 구성되어 10월 25일 부터 서부전선과 동부전선에서 제1단계 공세를 취하기 시작하여습니다.

 

이후 제3야전군의 일부인 제9병단이 11월초 3개군을 이끌고 만포진과 린창이란 곳을 통하여 압록강을 도하하여 진입하였습니다.
결국 11월23일까지 압록강을 도하, 유엔군에게 공세를 취하게 되는 중공군의 병력은 약30만에 이르게 되었고 유엔군의 정보부는 이러한 중공군의 상황에 대해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이는 중공군의 철저한 기도비닉에 의한 야간행군 및 야영규율,산악지대에 난 보조도로를 통한 이동등에 기인한 것이었습니다.

 

이 당시 유엔군은 영국제 모스키토 항공기 외엔 육안 정찰을 위한 항공기를 이용하지 않았고 또한 이용가능한 항공정찰기들은 모두 압록강변 교량공격 지원에 투입되어 중공군 제13병단의 도하를 놓쳤고 이어 제9병단의 도하마저 놓치게 됩니다.
압록강변의 만포진과 린창의 교량은 미 극동공군사령부의 폭격목표에서 밀려나 있어 이 곳을 통해 중공군은 손쉽게 침투할 수 있었으며 유엔군은 정찰대에 의한 지상정찰에서도 차량을 이용해 산악지대에 난 정규도로에서만 순찰을 함으로써 산악 깊숙이 매복한 중공군의 실체를 파악하기 더욱 어려웠습니다.

 

압록강을 도하한 중공군은 인민해방군중에서도 최상의 부대였는 제4야전군은 린 피아오(임표)가 사령관인 최상의 야전부대였으며 그 휘하 제13병단은 '철의부대'라고 호칭되는 국공내전에서 혁혁한 전과를 올린 부대이며 첸이가 지휘하는 제3야전군 휘하 제9병단은 '분쇄부대'라고 불리울 정도의 정예부대였다.
이들은 포병의 열세.공중지원은 전무한 대량의 보병사단이고 무기의 수준도 떨어지나 국공내전을 통한 풍부한 전투경험(2차대전 당시 일본군과의 전투경험이 있는 고급장교가 상당수였다고 함)과 높은 사기등이 중공군으로 하여금 최상의 전투력을 유지할 수있게 하는 원동력이었습니다.

 

10월말에서 11월초까지의 제1단계 전초공세에서 중공군은 제13병단만의 단독 공격을 중지하고 제9병단이 이동완료하기까지 기다리게 됩니다.이 1차 공격과정에서 중공군 사령부는 UN군이 중공군과의 확전을 바라지 않고 있으며 또한 UN군과의 교전에서 얻은 전투평가에 대단히 만족하고 약30만의 2개병단 병력으로 작전을 수행할 수있다는 결론을 내립니다.


이 당시 중공군의 부대배치는 강력한 상대방과 대면하였을 때 사용되어온 전통적인 중공군의 기동방어 작전개념에 입각한 것으로 거점을 고수하지 않고 짧은기간내에 신속한 전투로 적을 격파하는 것으로 공격전략은 적과 조우하여 적의 대규모 공격을 유발하고 지연작전을 펴는 동안 자신들의 공격부대를 적진 깊숙이  돌파시키고 미리 선정된 목표지점과 시기에 갑작스러운 반격으로 적을 무력화시키는 전술입니다.


이에 따른 중공군의 부대운용으로 유엔군은 10월말부터 11월까지 중공군의 전초부대만 접촉하게 되어 주요부대는 파악치 못하였으며 중공군 제13병단이 11월6일 작전을 멈추고 산악지대로 사라지자 이을 중공군이 약세임을 인정하고 후퇴하는 것이라 단정,중공군이 매복하고 있는 산악지대로 공격을 재개하게 됩니다.연말까지는 전쟁이 끝나고 크리스마스에는 집에 갈 수있다는 낙관론에 휩싸인 채로 이른바 크리스마스 공세를 개시합니다.

1950년 11월 24일 제8군사령관 워커 장군은 공격개시 명령을 내리고 미8군휘하의 각 부대들은 전진을 개시합니다.미제1군단장 밀번 소장은 정주와 태천을 향하여 휘하 2개 사단을 전진시키고 미9군단은 킨 소장이 지휘하는 25사단2개연대와 기갑부대인 dolvin특공대를 중심으로 한 부대를 운산방면으로 전진시시킵니다.카이저 소장의 미 제2사단은 9군단 우측에서 전진하였으며 한국군 제 2군단(유재흥소장) 휘하 제 7, 8사단도 진군하였고 공격개시 당일에는 별다른 적의 저항없이 순조롭게 공세가 진행되고 있었으며 워커장군은 동부전선의 미제10군단과 보조를 맞추기 위해 중앙의 한국군 제2군단에게 진격속도를 늦출것을 지시하고 26일에 계획대로 본격적인 진격을 개시할 예정이었습니다.

11월 25일 유엔군의 공격에 전초부대만으로 산발적인 접촉을 하던 중공군은 드디어 매복하고 있던 산악지대에서 튀어나와 유엔군을 공격하기 시작합니다.

제13병단은 청천강의 미 1, 9군단과 한국군 2군단을 목표로,

제9병단은 동부전선의 미 제10군단을 목표로 해 장진호 방향으로 진출합니다.

11월25일 밤 군우리 북방 청천계곡 중심부까지 진출한 

제9군단 휘하 미 제2사단의 제9연대와 제23연대는 중공군의 공격을 받기 시작하고 

25사단과 구룡쪽의 돌빈특공대에도 공격을 가해 미군은 최전방의 2개의 산악진지중 하나를 잃어 버립니다.

중공군제38군 및 제42군은 11월25일 미 제8군의 우측을 담당하던 한국군 제2군단을 공격합니다.

징과 꽹과리,괴성등으로 방어중인 국군에게 공포심을 일으키며 좁은 아군 방어진지에 대한 

집중적 병력운용(* 보통 인해전술이라고 비하하는데 순간적인 정보판단에 의해 아군 약점을 집중공격하는    중공군 지휘관이 구사할수있는 고도의 전술입니다.)으로 쇄도하여 국군제2군단이 진출해 있던 

덕천을 덮쳤고 국군제7사단과 6사단,8사단도 중공군에게 포위되어 국군 제2군단은 혼란속에서 붕괴되기 시작하였습니다.

(유재흥소장은 이듬해 3군단장으로 부임해서도 동일한 포위공격으로 군단(예하 3,9사단)이 전멸당하는 비운을 맛보게되죠)


미 제2사단장 카이저 소장은 26일 저녁, 

우측의 한국군 제2군단의 붕괴로 청천강지역에 전개한 미제8군의 우축면이 

완전히 와해된 것을 알고 후방의 군우리로 철수하기 작하였고 

국군 제2군단의 붕괴로 우측측면이 와해되자 


미 제9군단은 터키여단을 덕천 방향으로 진출시키나 

오히려 중공군의 매복으로 극심한 손실만 입고 터키여단은 겨우 빠져 나옵니다.

11월28일 맥아더 원수는 크리스마스 공세의 종결을 선언하고 전부대에 철수 명령을 내립니다.

미 제8군의 철수는 제군단의 엄호하에 제1군단이 먼저 철수하고 후속해서 미 제9군단도 철수하기 시작하나 


최우익에 있던 미 제2사단은 군우리에서 순천으로 난 도로로 철수하는 도중 

조통강 계곡에서 도로 양축에 매복해있던 중공군의 소총과 박격포 공격에 극심한 손싱을 입게 됩니다.


중공군은 우선 좁은 도로에 진입한 미군의 선두 전차와 차량대열을 로켓포와 박격포로 공격하여 

진로를 막은 뒤 선두의 상황을 모른 채 계속 진입하던 후속부대들의 차량들이 병목현상으로 정체하자 마음껏 포화를 퍼부었으며 결국 미 제2사단은 3천명의 병력손실을 입게 됩니다.
결국 12월초 유엔군은 38선으로 총퇴각을 하게 되고 38선에서 방어선을 치게 됩니다.

 

 

-전투교훈-

이 50년 말 전투의 교훈은 적을 너무  과소평가했고, 

대집단 부대들이 두개(미8군, 미10군단)로 나뉘어 전진하면서도 

중간에 막힌 산악지대로인해 연결을 소홀히 했고 

적은 이 빈틈으로 30만이란 대병력이 침투해서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공중정찰에 실패해 적의 규모를 판단하지도 못하는 우를 범한것입니다.


중간에 거대한 빔틈으로 침투한 적은 장녀스레 아군 측후방을 노리게 되었고 

아군은 측후방이 공격당하면서 압도적인 화력의 장점도 살리지 못하고 전멸하거나 후퇴하게 된거죠.


출처: 네이버 지식인 답변 ekhoon 


http://kin.naver.com/qna/detail.nhn?d1id=6&dirId=603&docId=61094204&qb=7KSR6rO16rWwIDHssKgg6rO17IS4&enc=utf8&section=kin&rank=3&search_sort=0&spq=0&pid=g3%2BWWc5Y7u8ssZfUgE8ssc--388545&sid=T3@tqEx2f08AAGRq-Hs



중공군 참전 이후의 시간 별 흐름..



지도출처: http://www.google.co.kr/imgres?q=%EC%A4%91%EA%B3%B5%EA%B5%B0+2%EC%B0%A8+%EA%B3%B5%EC%84%B8&num=10&hl=ko&newwindow=1&biw=1536&bih=753&tbm=isch&tbnid=8hkKAkGmi98zYM:&imgrefurl=http://www.army.mil.kr/history/%25C1%25DF%25B0%25F812/2process.html&docid=463ELh1NCtkxFM&imgurl=http://www.army.mil.kr/history/%2525C1%2525DF%2525B0%2525F812/nk.jpg&w=540&h=450&ei=8LJ_T9KpEOOfmQXdm5WECA&zoom=1&iact=hc&vpx=1092&vpy=87&dur=1735&hovh=205&hovw=246&tx=106&ty=106&sig=106087582703834191940&sqi=2&page=1&tbnh=127&tbnw=152&start=0&ndsp=30&ved=1t:429,r:5,s:0,i:71


미 8군 소속 사단들을 

중국군 13병단의 6개 집단군 18개 사단병력이 공격..


이 때, 중공군은 청천강 상류지역에 해당하는 덕천에서 

유재흥이 이끌던 한국군 2군단을 주로 공격해 

미 8군과 미 10군단 사이의 틈(전투지경선)을 비집고 들어와 포위함..


한국군 2군단의 붕괴 이후, 

우측면이 노출된 미 2사단도 궤멸적 타격을 입음.

우익이 붕괴되어 포위될 상황에 놓이자 맥아더는 38선 이남으로 철수 결정.


한편, 중국 9병단은 4개 집단군 12개 사단은 

미 해병대 1사단이 주축이 된 미 10군단을 공격.. 

7개 사단의 중공군이 미 해병대를 산악으로 침투해 후방을 겹겹히 포위..




그러나 미 해병대 1사단 전멸당할 위기에서 

사단장 스미스 소장이 "우리는 새로운 방향으로 진격한다"는 역발상으로, 

중국의 포위망을 뚫고 흥남부두로 철수. 


결과적으로 요렇게까지 밀림..



아래는 중공군의 전술을 다시 한번 살펴보기 위해 올려봄..





중국군은 장비나 훈련도, 지휘관의 자질 등이 떨어졌던 국군을 구멍이라 여기고,

미군이 주로 배치된 수도권 대신 국군이 주로 배치된 강원도쪽에 병력을 집중함..


중공군 12, 20, 27군 등 3개 군단급 병력이 

미 10군단 예하 국군 5사단, 7사단을 공격했고, 

북한군 5군단이 국군 3군단의 정면을 공격함.. 


3군단이 정면의 북한군 1개 군단에게 매여있을 때, 

중공군 3개군단에게 배후가 돌파당하니 그대로 무너짐.. 

후방의 방태산으로 패주..


뭐, 유재흥이 졸장이긴 하다만.. 

중공군 전술이 대충 뭔지 감이 올겁니다.


이놈들이 약점을 노리고, 

약한 부분에 병력을 집중해서 일거에 무너뜨리는 

그런 포위섬멸전을 좋아했죠. 


주로 산악지역이나, 

병력밀도가 낮은 곳으로 병력을 집중투입합니다.


압록강변에서 유엔군이 털린 까닭도.. 

사실, 미 8군과 미 10군단 사이의 중앙 산악지대에 병력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죠.


압록강에 이승만에게 바칠 수통 물뜨러간 6사단 1개연대 병력은 중공군 3개군단 병력에게 걸려서 녹아버림..


어쨌든 짱개놈들이 본래 이런 잔머리나 얍실함이 장난이 아닙니다. 

가생이닷컴 안에서도 참 조선족, 짱개 화교들이 신분을 숨기고 별에 별 분탕질을 다 치죠. ㅋㅋ


참, 한국 법률의 헛점을 기가 막히게 잘 파고든다고나 할까요. 

제가 좀 거친 사이트면 이렇게 점잖게 말하지 않는데, 가

생이가 욕설금지라 참 인내심갖고 조심하고 있습니다. 

다른 사이트였으면 눈물찔금 흘릴만큼 갈궈줬을텐데.. 허허참..


어쨌든 자나깨나 짱개 조심합시다. ㅋㅋ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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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저소제 12-04-07 15:21
   
미국은 중공군이 아무리 많아야 5만 정도 ..
체면치레 할 정도의 병력만 보낼꺼란 오판이 화를 부름.
동서 양군으로 진군하다 보니 무려 30만의 병력이나 그 사이 매복해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음.
정찰에도 실패.. 소수 부대 매복으로 보고..
매복한 30만 대군에 기습맞은거 치곤 큰 병력 손실도 없던 미군이 선방한거..
이승만이 길길이 날뛰는 가운데 맥아더가 고의로 방어선을 뒤로 많이 물렸다는 설도 강함..
실제로 중공군의 최대 약점..... 열악한 보급사정, 미약한 월동 준비..
일주일분 미숫가루, 얇은 솜옷 하나 입고 온 부대도 많음
제공권을 미군이 독점한 상황에서 가뜩이나 힘든 보급선이 길어지면서
실제 중공군 부대 중엔 전사자 보다 동사자, 아사자가 더 많은 부대도 많음..
트럭들이 폭격에 다 나가떨어지다 보니 얘들 추위에 강하고 체력좋은
몽골마까지 수만마리 동원, 죄없는 몽골말들도 한반도에서 부지기수로 죽어 나감..
이렇게 전쟁지속 능력이 없다보니 중공군도 한방에 춘계공세 같은 대공세..
한반도에 중공군 깊이 몰아넣고, 만주, 중국 동부연안 폭격해 후방 차단후 병력 증파해 섬멸할려다
결정적으로 호전성향의 맥아더 짤림..
미군 정부도 중국이 무서워 일을 크게 못 벌린게 아니라
정작 눈치본건 소련임..
거기다 트루먼 맥아더 간의 정치적으로 불편한 관계, 국내 반전 여론 등등으로
결국 결정타를 못날리고 지지부진한 상태로 전쟁 덮자.. 하다 보니 중공군도 살고 휴전
족발차기 12-04-07 15:36
   
ㅎ 한국전쟁이란 말이 정확한 용어가 아닐까요?
     
Centurion 12-04-07 15:42
   
6.25가 입에 착착 붙어서요. 글 쓰기도 편하고.
뭐 일부 정파의 시각에선 북한의 남침을 강조한다고 해서 보기 불편할 수 있겠네요.

족발차기님은 딱히 그 쪽 계열에 계시는 분 같진 않다만 ㅋㅋ
toriny97 12-04-07 16:32
   
아...저때 국토완전통일을 이뤘어야했는데,,,참 천추의 한이네요...
국토완전통일은 못했어도, 평양-원산간 한반도에서 가장짧은 축선 ( 동한만 - 서한만)으로 전선을 이뤄서 휴전되었더라면,,, 개성, 평강, 사리원, 남포, 해주, 금강산은 물론이고 핵심지역은 다 차지하는거였는데...흑..!!!
Centurion 12-04-07 16:52
   
압록강쪽으로 진격하던 미 8군과
두만강, 백두산 방면으로 진격하던 미 10군단 사이에 거대한 빈틈이 생긴게 천추의 한이죠.

이승만이 그 중앙을 담당하는 7사단을 북진러쉬에 참가시키는 바람에,
무절제한 진격으로 인해.. 그 빈틈이 커졌다고 하더군요..

결과적으로 봤을 때...
미군이 2차대전 때 수백만 대군에 탱크, 항공기 수만대 단위로 뽑아, 무장시켰던 적도 있는데,
솔까 중공군한테 대가릿수나 보급, 장비 딸려서 진 전쟁은 아니죠.

단지 확전하기 싫어서 적당한 수준에서 마무리한거고,
 미국만은 못해도 만만찮은 호적수인 소련이랑 붙어서..제 3차대전 터질까봐 빠진거죠..

중국이야 대가릿수 자랑하다 100만 국민당군대가 일본군 4만명한테 개털리기도 했는데..
중공군이 그나마 낫다쳐도 실상 오합지졸 투성이라 미군이 큰 맘먹으면 금방 털릴 신세지만..
중국을 국민당이라는 파트너가 민심을 잃어서 확보할 여건이 안되니 그냥 물러선거였죠.
fuckengel 12-04-07 17:23
   
UN군들은 어차피 남의나라 전쟁이기에 그렇게 목숨걸정도로 싸우진 않습니다. 우리도 그럴거구요
이승만은 우리입장에서 당연한 선택을 한거구, 미국도 바로 위와같은 이유에서 자기들 선택을 한겁
니다.  누가 잘잘못이 아니라 서로입장이 다르기에 각기다른 선택을 하는겁니다.

당시 UN군방식만 따랐다면 우리휴전선은 지금 임진강쪽까지 내려왔을가능성이 높아요.
휴전회담중인데 남에나라에서 별가치도없는(자기들시각) 고지점령하려구 하루 여러번뺑이칠
외국군대가 어딨겠어요..
반면 이승만방식대로 했으면 통일로 전쟁끝났을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러나 그만큼UN군
희생자는 훨 많아졌겠죠..(국군은 말할것도 엄꾸..)

미국도 해줄만큼 아니 그이상으로 우리에게해준겁니다.. 이승만은 UN군예상보다 휴전선을
더북쪽으로 올린역활을 한거구요..
     
Centurion 12-04-07 17:29
   
님은 님 조국 입장에서나 생각하세요. 남의 나라 걱정마시고 ㅋㅋㅋ
          
fuckengel 12-04-07 17:41
   
혼자 아는척 넘하시네요 위에 핵무기도 CTRL-V만 할줄알았지 검증은 못하구
좀 생각이란걸 하세요
"과연 이수치를 적용했을때 현실적으로 맞는건지"  이런거..거의 안보이네요.

넷서치해서 갖다붙이는 능력이 지식이 아니죠..그걸 읽구 오류,또는 판단을이란
생각을하라구 인간은 있는겁니다.
               
Centurion 12-04-07 17:50
   
멍청한 소리 혼자서 열심히 지껄이시네요.
님이야말로 근거 제대로 달고 이야기하는 거 못봤습니다.
거의 내뇌망상으로 소리만 지르고 있더만.. ㅋㅋ

그렇게 계속 근거도 없이 헛소리하면 저학력 중국인로 오해받습니다.



참고로, 저런 수치는 원폭 파괴력을 알 수있는 데이터 위에,
핵물리학자들이 컴퓨터 시뮬레이션하지 않는 이상 민간인 대가리론 파악불가능입니다.
(그게 가능했으면 대가리 내뇌망상 범위 내에서 핵폭탄 만들지, 실험은 왜 했게?)

저런 핵무기 파괴력은 이런 저런 경로로
이미 영어권 등에서 공개된 자료기 때문에 알 수 있는 것이고..
                    
fuckengel 12-04-07 17:56
   
위키는 단위,숫자상 오류가 많다는거 그렇게 조아하는 영어권에서 알려져있는데
맹신 넘 하시네요...영어권에서 위키는 지식인들이 보는 사이트라고도 알고있겠죠?
머 그럴거 같군요..  위키는 사건기록은 잘되어있지만 그거에 언급되 수치들중에
오류가 많아요...

글구 민간이 대라기로 왜 파악이 안되요..그럼 적질 말든가.. 이해는 하구 날라야죠
KT, MT 뜻을 알면 대충계산해도 나오는걸
우라늄 1kg 100% 효율로 반응하면 몇MT인지 아세요?
이정도는 좀 알구 검증해볼수 있을텐데.. 수십%가 아니라 말도안되게차이가
나는거뚜 파악못하자나요,,참,,,
                         
Centurion 12-04-07 18:00
   
기가 차네. 여기서 우라늄 1kg 100% 반응시 효율 이딴게 왜 나오나?
논점일탈 제대로네.. ㅉㅉ

사람이 지적질은 둘째치고, 오류가 있는 부분은 따지려면 제대로 따지던가.
toriny97 12-04-07 17:43
   
인민군들이 머리를 잘 쓴게, 휴전회담장소를 개성으로 최초에 잡았던것도 큰 역활을 하죠.. 개성이 휴전회담장소가 되면서 그 이북으로 치고 못올라갔고, 게다가, 평양-원산간 다음으로 동서축선이 짧은 지금의 휴전선부근이 임진강을 기점으로 방어하기 좋았기에 UN군이 더 위로 못올라갔던 이유가 있었죠...(공산군 공세에 밀려 저리된게 아님..게다가 릿지웨이 장군은 옹진반도를 포기하라고 이승만한테 말했죠.. 왜냐하면 옹진이북까지 전선을 형성하면 동에서 서까지 방어전선이 너무 길어지기 때문이죠..) 이승만은 길길이 날뛰었고, 당시 참모였던 이형근중장에게 개성만은 꼭 탈환해야한다고 주장했지만,,, 우리는 옹진반도의 옹진, 해주, 연안을 포기하고 대신 38선이북지역이었던 철원, 김화, 인제, 속초, 양구, 양양등을 뺏었고 결론적으로 38선때보다 더 많은 면적을 얻었습니다. 암튼 이북지역은 반드시 수복해야할 우리땅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