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뮤니티
스포츠
토론장


HOME > 커뮤니티 > 밀리터리 게시판
 
작성일 : 17-02-28 15:49
[기타] 용문산전투(하)
 글쓴이 : 관심병자
조회 : 1,570  

1951년 중공군 공세에 맞서 야포로 사격을 하고 있는 미 해병대원들.
1951년 중공군 공세에 맞서 야포로 사격을 하고 있는 미 해병대원들.

그러나 수적으로 월등했던 중공군은 막심한 인명 피해는 아랑곳 하지 않은 채 계속 몰려들었다. 숨을 돌릴 틈도 없이 밀어붙이는 중공군에 의해 10중대가 흔들렸고, 급기야 중대장 또한 ‘이젠 더 막기 힘들다’는 판단을 했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엉겁결에 고지 후방으로 후퇴하고 말았다. 그는 퇴각하다가 정신을 차렸다고 했다. ‘이래서는 안 된다’는 자각(自覺)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는 무거운 발걸음을 돌려 다시 물러났던 고지로 다가가 발을 들였다. 그의 눈앞에는 후퇴해 고지를 내려간 중대장의 모습이 사라지자 우왕좌왕하고 있던 부대원들이 우선 보였다. 그의 뇌리에는 절망감이 찾아들었을 장면이었다.

그러나 그 때 ‘기적’이 벌어졌다고 한다. 대대장의 지시로 뽑은 정훈병이 다시 나타난 중대장을 보고서는 대원들을 향해 소리를 쳤다고 한다. “중대장이 다시 나타났다. 다시 싸우자. 이대로 물러나면 우리는 모두 죽는다”는 내용이었다. 그와 함께 중대 나팔수가 나팔을 들어 힘껏 불었다고 한다. 기적은 그 다음에 벌어졌다. 우왕좌왕하며 중공군 공격에 마지막을 내줬을지도 모를 중대원들이 다시 정신을 차리고 총을 들어 중공군에 맞서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거의 무너질 것처럼 보였던 상대가 다시 눈을 반짝이며 총을 들 때 공격을 벌였던 쪽은 크게 당황하게 마련이다. 그런 일이 353고지에서 벌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 기록은 틀림이 없을 것으로 나는 생각한다. 당시 정훈병을 맡았던 서기종 일병은 그런 공로 때문에 사병으로서는 좀체 받기 힘든 미국의 은성훈장을 받았기 때문이다. 서 일병은 전투에서 드러나는 우연의 요소였다. 그러나 우연의 요소만으로는 기적과도 같은 승리가 벌어지지 않는 법이다.

다시 몰려든 중공군

앞 회에서 적은 이야기가 심금을 울린다. 정훈병의 커다란 외침은 기적적인 승리로 이어졌다. 다 쓰러뜨렸다고 본 상대가 다시 일어설 때 사람은 겁을 집어 먹는다. 다시 일어서는 사람의 투혼을 보면서 그는 사기가 꺾이고 만다. 아마 그런 공훈 때문에 서기종이라는 정훈병은 미국의 은성훈장을 받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서기종 일병은 그냥 우연의 요소에 불과하다. 그가 당긴 ‘불씨’는 죽어서라도 진지를 지키려고 했던 3대대 모든 장병의 튼튼하고 굳센 투지의 ‘기름’이 없었다면 그냥 사그러들 수도 있었다. 결국 그 싸움에서 중공군을 물리친 데에는 죽을 때까지 싸우려는 의지를 다졌던 6사단 장병들의 몫이 가장 컸고, 서 일병은 그를 촉발하는 좋은 요소로 작용했을 뿐이다. 그렇게 353고지의 혈투는 끝을 맺었다. 중공군은 의지를 되살린 3대대 10중대의 투혼에 꺾여 고지에서 퇴각했다고 한다.
참전 초반의 중공군들이 대열을 지어 행진하는 모습의 사진이다. 중공군은 참전 초반에 막대한 병력의 우위를 앞세워 유엔군을 집요하게 몰아붙였다.
참전 초반의 중공군들이 대열을 지어 행진하는 모습의 사진이다. 중공군은 참전 초반에 막대한 병력의 우위를 앞세워 유엔군을 집요하게 몰아붙였다.
중공군은 5월 20일 새벽 1시 무렵에 고지에서 물러섰다. 백병전을 감행하며 총이 아니면 칼로도 맞서 싸우는 6사단 2연대 3대대 장병들을 넘어설 수 없었던 것이다. 전사는 중공군이 6사단 2연대 3대대 353고지에서 한국군의 강렬한 저항에 맞닥뜨려 물러선 뒤 3대대의 그 고지와 우측의 1대대가 늘어선 나산, 좌측으로 427고지에 선 2대대의 전선을 6사단의 주저항선으로 착각했을 수도 있다고 적었다.

그랬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 공격을 펼칠 때 상대의 주저항선이 어디인가는 파악하기 쉽지 않다. 지키는 쪽에서도 주저항선은 가장 큰 화력과 병력이 몰려 있는 곳이어서 방어의 중점에 해당한다. 중공군으로서는 정신없이 날아드는 미군의 공군기와 머리 위로 쉴 새 없이 퍼부어지는 아군의 후방 포병화력 때문에 차분하게 6사단의 주저항선을 파악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중공군은 결국 군의 예비사단이었던 189사단을 동원해 공격에 나섰지만 효과를 거둘 수 없었다고 한다. 중공군의 기세는 그로써 꺾이기 시작했다. 6사단 2연대 장병의 놀라운 투혼이 그에 커다란 몫으로 작용을 했지만, 다른 요소를 또한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

앞에서 적었듯, 사단장이 2연대를 전방의 경계부대로 내세운 뒤 진지의 사수를 명령한 것도 당시 전투에서 거둔 승리의 큰 요소다. 중공군이 2연대 저지선을 넘을 경우 아군의 공습과 후방 포병화력에 의한 공격은 제대로 효과를 거두기가 힘들었다. 지형적 특성 때문이라는 점을 앞에서도 언급했다. 아울러 6사단은 미 9군단의 지원을 이끌어내 2연대 방어 구간에 적절한 화력망을 형성했다. 1~3대대 사이에 놓인 구간, 특히 1대대와 3대대 사이에 치밀한 화력 집중 지역을 미리 설정해 적을 대거 살상하도록 만들었다. 육군본부의 전사는 그렇게 설정한 살상지대가 적에게 심각한 피해를 안겼다고 소개하고 있다.

2대대 427고지 혈전

353고지에서의 전투는 그렇게 단락을 맺었다. 그러나 2대대가 진지를 편성해 적을 기다리고 있던 427고지에서도 싸움이 불붙었다. 2대대의 427고지 또한 중공군이 용문산을 점령하기 위해 진격할 때 거쳐야 했던 중요한 지점에 해당한다. 비록 353고지에 비해서는 중요도가 다소 떨어진다고 해도 중공군이 그곳을 뚫는다면 용문산 진출에 한 발짝 크게 다가설 수 있는 곳이었다. 2대대의 투혼 역시 다른 2연대 장병들에 못지않았다. 임무는 막중했지만 몸은 거듭 이어지는 격전에 시달려야 했다. 2대대는 앞서 적은대로 1대대와 함께 홍천강 남안 쪽으로 전진 배치했던 부대였다. 강을 넘은 중공군의 1차 공격을 막은 뒤 미리 설정한 후방 축차진지로 급히 이동해 다시 적과 싸워야 했던 상황이었다.

5월 19일 전방 지지에서 철수해 급히 427고지로 이동한 2대대는 북쪽에 5중대, 북서쪽에 6중대, 남쪽에 7중대를 배치한 뒤 적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울러 427고지 중앙에 81㎜ 박격포 진지를 구성했고, 중공군을 정면으로 맞이해야 했던 북쪽 진지의 중대에는 기관총 1개 소대를 추가 배치했다. 예비는 따로 둘 형편이 아니었다. 대대 전원이 나서서 적과 싸워야 했기 때문이었다. 전방 진지에서 급히 이동해 다시 427고지로 올라서 진지를 편성한 2대대의 사정은 사실 후방에서 적을 맞았던 3대대에 비해 나빴다.

우선 1차 접전을 치른 뒤 급히 축차진지로 이동한 상태였고, 격전이 이어진 뒤여서 식량을 비롯한 보급이 문제였다. 특히 전방 진지로 나아갈 때 받았던 식량이 거의 떨어진 상황이었다. 따라서 수적으로 크게 우세한 중공군과의 싸움, 떨어져가는 식량으로 인해 발생하는 허기, 신속한 진지 이동 때문에 생긴 체력 저하의 어려움에 봉착해 있었다. 게다가 적은 재빠르게 이동해 진지에 다가서고 있었다. 중공군은 2대대 장병들이 진지 편성 뒤 개인호를 막 완성하고 잠시 몸을 뉘일 때 쳐들어왔던 모양이다. 더구나 상대의 허(虛)를 교묘하며 집요하게 파고드는 중공군의 방식이 또 선을 보였다. 당초 2대대 장병들은 중공군의 공격 지향점을 서쪽으로 예상했다.


427고지의 서쪽은 기동이 수월한 곳이었다. 길이 나 있어 사람의 통행이 편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공군은 북쪽으로 다가섰다. 전사 기록에 따르면 427고지의 북쪽은 암석과 급경사로 이어지는 능선을 몇 차례나 넘어야 했던 곳이다. 그럼에도 중공군은 그곳을 거쳐 고지에 다가섰다고 한다. 상대 의중의 허점을 잘 파고드는 중공군 특유의 전법이기도 했다. 기록에는 당시 2대대 장병들은 세 끼 정도를 굶은 상태였다고 나온다. 따라서 몸과 정신이 많이 지쳤을 법하다. 진지를 점령한 지 2시간도 지나지 않은 시각에 중공군은 공격을 벌이면서 고지를 향해 올라왔다.

미 포병장교의 맹활약

허기와 피로에 지쳤지만 2대대 장병들은 다가서는 중공군을 향해 맹렬한 사격을 가했다. 중공군 또한 쉽게 물러서지 않았다고 한다. 압도적인 병력의 우세는 늘 중공군의 제파(梯波)식 공격으로 나타난다. 계단의 각 단계가 이어지듯이 물결처럼 쉬지 않고 밀려드는 방식의 공격이다. 그럴 경우의 중공군에게 아군은 적지 않게 당한 경험이 있다. 중공군 참전 초반에 벌어진 평안북도 일대의 전투와 1950년 12월 크리스마스 공세 때의 싸움, 서울을 다시 내줬던 1.4후퇴 당시의 격전 등에서도 중공군은 예의 그런 방식의 공격으로 아군을 몰아붙였다.
1951년 춘계 공세에서 중공군은 대규모 기동전으로 국면을 뒤집으려고 했으나 낙후한 보급력과 전술상의 한계 등으로 많은 수가 포로로 잡히는 등 심각한 피해에 직면했다.
1951년 춘계 공세에서 중공군은 대규모 기동전으로 국면을 뒤집으려고 했으나 낙후한 보급력과 전술상의 한계 등으로 많은 수가 포로로 잡히는 등 심각한 피해에 직면했다.
6사단 2연대 2대대 427고지를 향한 중공군의 공세는 약 3시간 동안 이어졌다고 한다. 인해전술이라고 해도 좋을 제파 방식의 끊임없는 공격이었다. 이런 중공군의 공세에는 물러서지 않고 목숨을 걸고 끝까지 싸우려는 의지와 함께 화력의 집중적이면서 효율적인 운용이 필요했다. 초반에 막대한 수적 우세로 아군을 몰아붙였던 중공군의 전법에 우리가 밀렸던 것은 그를 잠재울 화력의 효과적인 운용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사정이 많이 달랐다. 전사가 소개하는 대목 중의 하나가 그렇다. 당시 주변을 감제(瞰制)하기 가장 좋은 용문산이 우리 수중에 있었다는 점이다.

아울러 당시 6사단이 운용하고 있던 27포병대대에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유럽전선에서 활약했던 미 고문관이 한 사람 와 있었다. 그는 카스트로 소령이었다. 육군본부의 전사는 카스트로 소령이 풍부했던 야전 경험을 바탕으로 용문산에 포진한 27포병대대에서 큰 역할을 했다고 소개하고 있다. 카스트로는 용문산의 높은 곳에서 2연대의 싸움을 지켜보면서 각 대대의 전면 방어진지 외곽을 향해 27포병대대의 화력이 정확하게 투사될 수 있도록 도왔다는 것이다.
전사의 소개에 따르면 특히 5월 19일 밤에는 사격지휘본부에서 밤을 새워가며 화력지원을 요구하는 각 일선 대대 전면의 적군을 향해 정확하게 포탄을 퍼붓는 데 큰 기여를 했다. 카스트로 소령 역시 3대대의 서기훈 일병처럼 당시의 공로 때문에 미 은성훈장을 받았다. 중공군은 2연대의 각 대대 진지를 돌파하기 위해 군의 예비였던 사단까지 투입해 전선을 뚫어보려 나섰지만 결국 작전에서 실패했다. 진지를 사수하려는 6사단 장도영 사단장 이하 모든 장병들의 투지가 우선 크게 작용했다.

그와 함께 적의 동향을 미리 파악하기 위해 정보에 매우 민감했고, 적이 다가설 곳곳에 강력한 화망(火網)을 구성하는 치밀함이 크게 작용했다. 지형적인 이점을 제대로 고려해 적이 발을 들이게 해서는 안 될 곳을 정확하게 가려 그곳을 철저하게 막아낸 전술적인 안목도 매우 돋보였다.


방어에 취약했던 국군

나는 60여 년 전의 전쟁을 몸소 겪으면서 우리가 싸움에 능하지 못한 민족이라고 생각한 적은 거의 없다. 단지, 그 때의 싸움에서 우리가 일정한 패턴을 드러내는 면은 있었다. 앞에서도 잠시 언급했던 내용이다. 흥이 우선 빨리 도지고 일찍 시든다. 공격의 리듬에 올라탈 때에는 아주 눈부신 면이 있다. 기개도 좋고 활력이 넘친다. 따라서 일정한 공세(攻勢)가 만들어지면 그 위에 올라타고 나아감이 빠르고 거세다. 누구도 막을 수 없을 정도의 기세가 자연스레 이뤄진다. 아울러 위기에는 잘 뭉친다. 생사(生死)와 존망(存亡)이 걸린 위기의 극점에서는 의기가 한 데 잘 어울린다.

그러나 전쟁은 공격만 있을 수 없다. 그에 반드시 따르는 일이 방어다. 당시의 전쟁에서 방어에 취약한 국군의 면모는 자주 드러났다. 북진의 대열을 경쟁하듯 펼치다가 느닷없이 나타난 중공군에게 뼈아플 정도로 자주 당하고 말았다. 공격에 나서는 동작이 빨랐다가도 방어에는 매우 취약해 후퇴가 분산(分散)과 극심한 혼효(混淆)로 이어지면서 막심한 피해를 입었다.

위기에는 강했지만 그 요소가 풀어질 때면 늘 정신의 자세도 함께 풀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따라서 평온한 상태가 오면 전비(戰備)를 충실히 채우는 일이 적었다. 이런 몇 가지 면모가 어디에서 비롯하는지는 잘 모르겠다. 전투를 수행하는 군인의 눈으로 보면 아무래도 부단한 훈련과 치밀한 조직능력이 뒤를 따르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생각을 한다.
용문산을 공격하려다가 실패한 중공군은 아군의 반격에 밀려 도망치다 큰 희생을 감수했다. 당시 작전에서 포로로 붙잡히고 있는 중공군들.
용문산을 공격하려다가 실패한 중공군은 아군의 반격에 밀려 도망치다 큰 희생을 감수했다. 당시 작전에서 포로로 붙잡히고 있는 중공군들.
그를 이룰 만한 시간적, 물리적 여유가 우리에게는 없었던 점이 클 것이다. 해방의 격변기에 겨우 몸을 추스르고 일어선 대한민국과 그 군대였기 때문이다. 그런 맥락에서 볼 때 용문산 전투는 특기할 만하다. 후방의 미군 포병화력과 미 공군의 공습능력이라는 점을 제외하면 용문산 전투는 한국군 1개 사단이 전쟁의 중요한 흐름 속에서 거의 단독으로 중공군을 맞아 승리를 거둔 싸움이다. 나는 용문산에서 6사단이 중공군에게 맞서 싸워 큰 승리를 거뒀다는 소식을 조금 늦게야 알았다. 내가 주둔하고 있던 강릉의 1군단에서다. 당시 나는 밴 플리트 미 8군 사령관의 지시에 따라 현리 일대를 뚫은 중공군을 대관령에서 저지하기 위해 나름대로 분주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래도 나는 6사단의 분투가 자랑스러웠다. 중공군에게 가장 약한 군대로 여겨져 그 예봉(銳鋒)의 우선 접전(接戰) 대상으로 꼽혔던 한국군이었다. 따라서 6사단이 거의 단독으로 그들에 맞서 싸움을 벌인 뒤 심각한 피해를 안겼다는 점이 마음속의 커다란 위안이 아닐 수 없었다.

승리 기념해 지은 ‘파로호’

용문산 전투는 당시 싸움에 이승만 대통령이 ‘파로호(破虜湖)’라는 이름을 지으면서 더 유명해졌다. 용문산 전투에서 거둔 6사단의 전과(戰果)가 화천 저수지 일대로 확산하면서 얻은 일이다. 이승만 대통령은 과거 우리의 왕조시대 때 ‘오랑캐’라고 불렀던 북방의 침략자라는 의미에서 중공군을 로(虜)라고 명시했고, 이어 그를 깨뜨렸다는 점에서 파(破)라는 글자를 적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대한민국으로서는 당시의 승전보가 오랜 가뭄 끝에 내리는 단비와 같았을 것이다. 나도 화천 저수지 일대를 ‘파로호’라고 새로 이름 짓는 경사를 지켜보면서 많은 생각에 젖었다. 아래위로 크게 흔들리면서, 중공군에게는 물에 떠다니는 그 무엇을 지칭하는 ‘부동(浮動)’이라는 형용까지 받으며 지리멸렬한 싸움 방식을 선보이던 우리 군대의 틀을 벗어나는 방법은 무엇일까라는 점이었다.

아무튼 당시 6사단이 거둔 승리의 끝은 화려했다. 6사단의 2연대는 정말 눈부신 투혼을 발휘했다. 초전에서 함부로 무너지지 않았으며, 이어 벌어진 고지의 방어에서도 막대한 병력의 중공군 공세를 침착하게 꺾었다. 중공군은 참전 이래 늘 보여 오던 전술로 나섰지만, 한국군은 용감하게 그를 맞받아쳤다. 후방의 화력과 치밀한 방어막 형성은 중공군의 커다란 희생으로 이어졌다.

중공군의 기세는 완연하게 꺾이고 있었다. 6사단 2연대가 홍천강 남안에서 용문산으로 이어지는 길목을 강인한 투지로 막아내고 있던 시점이었다. 그러니까 중공군이 2연대 3대대와 2대대의 353고지와 427고지를 공격하다가 차츰 좌절로 접어들던 무렵이었다.
당시 6사단을 지휘하던 미 9군단은 5월 19일 밤 전격적으로 예하 모든 부대에 공격명령을 내렸다. 용문산을 지키면서 중공군 공세를 막았던 흐름을 공격으로 전환한 것이다. 우선은 두 단계 진격 작전을 통보했다. 1단계와 2단계 공격 진출선을 상정해 정해진 시점까지 그곳으로 공세를 펼치라는 내용이었다.

우선은 청평과 홍천강을 연결하는 선으로 진출하고, 나아가 가평과 북한강 및 의암을 잇는 선까지 나아가는 일이었다. 공격 시점은 5월 20일 새벽 5시였다. 이 공격 명령을 받은 6사단장 장도영 장군은 19연대를 좌측, 7연대를 우측에 포진한 뒤 전방에서 중공군 공세를 꺾은 2연대에게 전방의 적이 물러나는 퇴로를 막으라고 지시했다.

중공군은 이미 등을 보였고, 그것을 되돌릴 의지와 힘도 없어 보였다. 산발적인 소규모의 교전이 벌어졌지만 큰 흐름에서 중공군은 패주(敗走)의 상황에 휩싸인 뒤였다. 아군의 진격은 신속했다. 중공군은 산발적으로 반격을 펼쳤지만 큰 흐름을 막을 수는 없었다.

아군끼리의 오인에 의한 총격전이 벌어질 정도로 중공군의 저항은 미미했다. 이튿날 오후에 접어들면서 6사단 좌측의 19연대, 우측의 7연대는 전방에 돌출한 진지에서 중공군과 격전을 벌였던 2연대와 연계할 수 있었다. 용문산에 다가서고자 했던 중공군 전체는 5월 21일 새벽 3시를 기점으로 전면 철수에 들어섰다. 1차 진출선까지의 진격은 순조로웠다. 2연대 전방 2개 대대가 진출했던 홍천강 남안까지 6사단 각 연대의 연계와 진출이 이뤄지면서 중공군이 의도했던 용문산 전투는 정식으로 막을 내린 셈이었다. 육군본부 전사 기록에 따르면 당시까지의 아군 손실은 전사 26명, 부상 294명, 실종 74명이었다.

중공군의 참패

그에 비해 중공군은 사망 4944명, 부상 1만 여명, 포로 15명이었다. 강력한 아군의 화력에 의해 중공군은 사망자가 아군에 비해 훨씬 많이 발생했던 것으로 보인다. 6사단은 5월 24일부터 미 9군단 예하 각 사단과 함께 북상하면서 추가적인 작전을 벌인다. 화천 저수지까지 60㎞를 진군하는 과정이었다. 특히 6사단 좌측을 맡았던 19연대는 미군 등 유엔군과 함께 지암리에서 중공군 180사단을 크게 꺾는다. 아울러 2연대와 7연대는 화천 일대로 계속 적을 추격하면서 북상해 5월 28일 화천발전소를 탈환하는 데 공을 세웠다고 한다.
1951년 중공군의 대규모 춘계 공세에 맞서고 있는 미군 해병 포병들이 적진을 향해 사격준비를 하고 있다.
1951년 중공군의 대규모 춘계 공세에 맞서고 있는 미군 해병 포병들이 적진을 향해 사격준비를 하고 있다.
파로호라는 새 이름이 등장하는 것은 그 무렵의 작전 성과 때문이다. 신속하게 북상하며 적을 추격한 6사단은 5월 29일 화천발전소와 구만리 고개라는 곳을 점령해 적의 퇴로를 차단했다. 중공군 2만 명 정도가 6사단이 차단한 구역에 갇혔다고 한다. 중공군 패잔병은 결국 6사단의 차단 지점을 우회하기 위해 화천저수지를 헤엄쳐 건너려다 적지 않은 수가 익사했다고 한다.

미군의 공습도 불을 뿜었다. 당시에는 밴 플리트 미 8군 사령관의 의지에 따라 전선에서 사용하는 탄약량에 거의 제한이 없었다. 따라서 도주하는 중공군에게 미 공군과 아군의 포병은 막대한 화력을 쏟아 부었다. 미군의 네이팜탄 공격이 더 이어지면서 무수한 중공군의 사체가 화천저수지 일대에 나뒹굴기도 했다.

중공군은 그런 도주 과정에서 2만 4천여 명이 사망한 것으로 전사는 기록하고 있다. 아울러 8000여 명의 포로도 잡혔다. 6사단이 강인한 의지로 용문산 일대를 막아 중공군의 예기를 꺾은 결과였다. 중공군의 피해가 막심하다는 결과가 알려지면서 이승만 대통령은 마침내 화천 저수지에 ‘파로호’라는 이름을 지었던 것이다. 싸움의 방식, 커다란 지향은 전투를 이루는 중요한 요소다. 그러나 이 역시 싸우려는 뜻을 지닌 사람만이 쌓고 이룰 수 있는 법이다.

용문산 전투는 그런 점에서 우리에게 많은 것을 일깨운다. 허약한 대상으로만 비쳤던 한국군은 어느덧 싸우고 물러서는 과정에서 뭔가를 배워 일어나고 있었던 것이다. 용문산 전투의 주역 6사단은 그런 점을 자신 있게 보여줬던 셈이다.



[출처] 본 기사는 프리미엄조선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

http://premium.chosun.com/svc/news/nlist.html?opt=none&catid=247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가생이닷컴 운영원칙
알림:공격적인 댓글이나 욕설, 인종차별적인 글, 무분별한 특정국가 비난글등 절대 삼가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