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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7-02-28 14:54
[기타] 현리전투~용문산전투(상)
 글쓴이 : 관심병자
조회 : 2,160  

전쟁의 분수령

강원도 깊은 산골의 현리라는 곳에서 1951년 5월 벌어진 전투는 하나의 커다란 분수령(分水嶺) 그 자체였다. 물의 흐름이 갈라지는 그런 분수령이라는 의미다. 이를 테면, 1950년 6월 25일 김일성이 기습적으로 벌인 전쟁의 흐름이 이 현리 전투라는 대목에 이르러 크게 방향을 튼다는 뜻이다.

한반도의 전쟁에 은밀하게 뛰어들었던 중공군은 1~3차 공세를 벌이면서 전선을 평양~원산 이북으로부터 전쟁 발발 전의 대치 접점이었던 38선 이남까지 밀고 내려오는 데 성공했으나 4차 공세에 접어들면서 무겁고 강한 미군의 힘에 부딪힌다. 조금씩 균열을 보이던 중공군의 공세는 5차 공세 2단계에 접어들면서 바닥을 드러내고 만다. 중공군의 최고 지도부가 ‘이 전쟁에서 우리가 이기기는 힘들다’고 판단한 시점이 있다면 아무래도 현리 전투가 벌어진 1951년 5월 말일 것이다. 스스로 그런 판단을 내렸다면 한반도의 싸움에 뛰어들어 사실 상 모든 전투를 이끌고 있던 중공군으로서는 새로운 전기(轉機)를 마련해 그에 올라탈 수밖에 없었다.

현리 전투는 흔히 대한민국 군대가 6.25전쟁 중에 맞이한 최악의 참패로 말해진다. 그 점은 사실이다. 3년 여 동안 벌어진 그 전쟁에서 한국 군대가 벌였던 현리 전투는 매우 기록적인 패배에 해당한다. 앞에서도 적었듯이, 공격 선두에 나섰던 중공군 1개 중대 병력에 의해 후방의 유일한 퇴로였던 오마치 고개를 빼앗긴 뒤 9사단과 3사단 등 한국군 3군단은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한 채 그대로 무너지고 말았기 때문이다.

그 싸움에서 무너진 3군단장 유재흥 장군을 역시 최악의 패장(敗將)으로 거론하는 사람도 많다. 군단 책임자로서 유재흥 장군이 져야 할 몫의 책임은 아주 무겁고 크다. 그 점을 부인할 수는 없으나 그 한 사람에게 모든 책임을 물을 수는 없다. 미군과의 소통이 부족해 작전상의 엄중한 의미에도 불구하고 기계적으로 그은 작전구역이라는 이유 때문에 결국 유일한 퇴로를 미 10군단에게 내줬고, 미 10군단은 알몬드 군단장의 허술한 판단에 따라 그곳을 빈 채로 그냥 두고 말았다. 이 점을 따지면 유재흥 장군의 책임이 가장 무겁다.

그러나 전사 기록을 보면 유재흥 군단장은 이 고개의 중요성 때문에 당시 상황을 육군참모총장이었던 정일권 장군에게 몇 차례에 걸쳐 언급했다고 한다. 군단 차원에서 옆에 함께 늘어선 미군과의 소통과 협력을 제대로 이루지 못한 유재흥 장군의 실책은 크지만, 그를 보완해주지 못한 육군본부의 책임 또한 가볍지 않다. 3사단과 9사단의 사단장 또한 현리 전투의 기록적인 참패에서 비켜갈 수 없다. 퇴로가 막혔다고 해서 그대로 싸움 없이 물러서는 군대는 있을 수 없다. 현리의 지형은 앞서 소개한대로 사주방어(四周防禦) 진지를 만들어 적과 싸울 경우 미군의 유력한 공중 보급을 받을 수 있는 모양새였다.
중공군은 초반의 맹렬한 공세에도 불구하고 시간이 흐를수록 보급이 바닥나면서 아군의 반격에 큰 피해를 입었다. 북한지역 철로에 미 공군기가 투하한 네이팜탄이 터지는 모습이다.
중공군은 초반의 맹렬한 공세에도 불구하고 시간이 흐를수록 보급이 바닥나면서 아군의 반격에 큰 피해를 입었다. 북한지역 철로에 미 공군기가 투하한 네이팜탄이 터지는 모습이다.
한 사람의 잘못이 아니었다

따라서 퇴로가 막혔다고 해서 무작정 뿔뿔이 흩어져 물러날 게 아니라 죽기를 각오하고 적과 싸움을 벌여야 하는 게 우선이었다. 그런 각오만이라도 있었다면 현리 전투의 기록적인 참패는 없었을지도 모른다. 아니, 오히려 미군의 강력한 공중보급을 바탕으로 오마치를 점령한 중공군을 후방에서 압박하며 전방에서 다가오는 중공군의 공세에 맞설 수 있었을 것이라는 얘기다. 그런 여러 가지 가능성을 헤아리지 못한 채 중공군의 공세에 허무하게 물러서 부대전체를 급기야 거대한 혼란의 상태인 분산(分散)으로 몰고 가 참패를 맞았던 두 사단장의 책임 또한 막중하다. 그런 여러 가지 요인이 겹쳐 나타난 기록적인 참패가 바로 현리 전투라고 할 수 있다.

전체적으로 보자면 이는 당시 전선에 섰던 한국군의 수준이 반영된 결과였다. 건국과 함께 겨우 제대로 무장하기 시작한 한국군으로서는 실전 경험이 턱없이 부족했을 뿐만 아니라, 화력과 장비 또한 보잘 것이 없었다. 아울러 부대 전체를 끈끈하게 묶는 조직력도 크게 부족한 상태였다. 그런 한국군의 약점을 전선에 마주섰던 중공군은 정확하게 간파했다. 그에 따라 중공군은 참전 이래 줄곧 한국군을 골라 공격을 펼쳤다

중공군은 국공(國共) 내전과 항일(抗日) 전쟁의 경험이 높이 쌓인 부대였다. 따라서 다양하고 복잡한 전술을 구사할 줄 알았던 군대였다. 그들은 우회와 침투, 매복과 기습, 종심(縱深) 기동과 포위 등의 다양한 전법을 사용하며 한국군을 집요하게 공격했다. 그런 중공군의 공세에 자주 무너지고 말았던 국군은 결국 현리에서 기록적인 패배를 당하면서 씻을 수 없는 회한(悔恨)을 남겨야 했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국군 장병이 그들에게 포로로 붙잡혔고 3군단이 지녔던 적지 않은 양의 장비와 화력도 빼앗기고 말았다.

그러나 이 전투는 중공군에게도 심각한 결과를 불러왔다. 중공군은 현리 전투를 포함한 5차 2단계 공세에서 스스로 커다란 문제를 드러내고 말았다. 공세 지속의 기간이 매우 짧다는 점이었다. 우선 미군의 강력한 반격으로 밀어붙이던 전선은 줄곧 막혔고, 보급력이 떨어져 미군의 반격이 펼쳐질 경우 병력의 희생이 막심했다.
화려한 전술을 선보였던 중공군은 공세 뒤 5일 이상이 흐르면서 아군의 반격에 쉽게 갇혔다. 1951년 3월 횡성에서 미군에게 붙잡히는 중공군 포로를 촬영한 사진이다.
화려한 전술을 선보였던 중공군은 공세 뒤 5일 이상이 흐르면서 아군의 반격에 쉽게 갇혔다. 1951년 3월 횡성에서 미군에게 붙잡히는 중공군 포로를 촬영한 사진이다.
바닥 보인 중공군 체력

그들이 참전 이래 줄곧 보이던 패턴은 반복적으로 나타났다. 공세 시작 뒤 4~5일이 지날 경우 체력이 급격하게 떨어진다는 점이었다. 처음에는 기만적이면서 은밀하며 다양한 전법으로 아군에게 커다란 위협으로 다가오지만 그를 지속적으로 이끌어갈 우직한 힘이 부족했던 것이다. 거리로 따지자면 공격 동선(動線)이 보통 50㎞를 넘을 시점이었다. 이 정도의 거리를 이동하며 화려하게 공세를 펼치다가 중공군은 그 이상을 넘어설 경우 체력이 뚝 떨어지고는 했다. 보급선이 길어지면서 그를 위한 수송능력에 문제가 생겼기 때문이었다. 미군의 막강한 공군기들은 그런 중공군을 집요하게 다뤘다.

전선에 선 중공군의 보급력이 미 공군의 정밀한 폭격으로 크게 떨어지면서 중공군은 공세를 이어가기 어려웠고, 그로부터는 아군의 공격 그물에 갇혀 막대한 인명의 희생을 감수해야 했다. 그를 상징적으로 드러냈던 게 바로 중공군의 5단계 2차 공세 때의 이른바 현리 전투였다.

중공군은 현리에서만 한국군을 제압하는 것으로 당시의 공세를 마무리해야 했다. 미 2사단의 서쪽 견부(肩部)는 강했고, 동쪽 또한 대관령에서 한국군 1군단에 막혀 공세를 접어야 했다. 미 3사단의 신속한 기동으로 인해 운두령에서는 오히려 퇴로가 막혀 상당수의 중공군이 사상하거나 포로로 붙잡혔다. 중공군 수뇌부가 계획한 내용은 거의 현실로 이뤄진 게 없었다. 한국군 3군단을 무너뜨리고 전선을 일부 뚫었지만 현격한 체력의 차이로 오히려 아군의 포위망에 상당수의 병력이 갇히면서 피해는 아주 컸다. 한국군 3군단의 2개 사단과 미 10군단 지휘를 받았던 한국군 5, 7사단을 먼저 소멸한 뒤 미군의 역량도 크게 무너뜨리겠다는 당초의 구상은 물거품처럼 사라지고 없었다.

중공군은 아마 그 시점 어디에선가 ‘이 전쟁에서 우리가 승리를 거두기는 불가능하다’는 생각을 했을 것이다. 일정한 패턴에 따라 다소의 우세를 차지하는 데 성공했지만 그런 양상에 따라 전투를 이어갈 경우 더 큰 희생을 감수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그 점에서 현리 전투는 분명한 분수령이었다. 앞쪽의 흐름과 뒤쪽의 전쟁 흐름이 크게 갈라지는 그런 분수령 말이다. 정확한 통계는 어떤지 잘은 모르겠으나, 중공군은 당시 5차 2단계 공세에서 피해가 매우 컸던 것으로 알고 있다. 중공군이 참전한 이래 가장 큰 피해를 당한 전투를 꼽는다면 아무래도 이 전투일 것이다.

결과적으로 보면 이 전투를 기점으로 전쟁의 양상은 크게 바뀐다. 대규모 병력이 한꺼번에 움직이며 펼치는 기동전의 패턴은 거의 사라지고, 전술적 차원에 멈추는 소모적인 고지전(高地戰)이 그 자리를 대체한다는 점이다. 중공군은 전략적인 판단을 그 무렵에 내렸을 것이다. 그때까지의 방식으로는 더는 이어가기 힘든 전쟁이라는 판단을 내린 중공군 수뇌부는 결국 약 한 달 뒤인 1951년 6월 소련의 제안에 따라 휴전협상에 나서기로 결심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전선에 불쑥 솟아있는 고지에서는 늘 싸움이 붙었다. 소모적인 진지전이 잇따라 벌어질 조짐이 나타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그 무렵 담배를 많이도 태웠다. 하루에 거의 3갑 정도를 물었다. 눈을 뜨고 움직이는 동안은 거의 담배 개비를 입에 물고서 보냈다고 해도 좋을 정도였다. 타들어가는 담배와 함께 내 마음도 그렇게 태워졌을 것이다. 전쟁은 그렇게 일선에 선 군인에게 감당하기 힘든 스트레스로 다가온다. 그런 스트레스에 저항하기 위해 담배는 줄곧 내 손가락 사이에 감겼다.

전쟁에서 공격과 방어는 거치지 않을 수 없는 과정이다. 공격을 할 때도 있고, 방어에 나서 적을 맞아야 할 때도 있다. 큰 흐름으로 보자면 신생 대한민국의 군대로 막 걸음마를 배운 상태에 불과했던 국군은 형편없는 장비와 화력만으로도 잘 버텼다. 김일성 군대가 벌인 기습 남침에 눈물겹다고 해도 좋을 정도의 분투를 거듭했다.

그럼에도 하나의 양상을 지적하자면 국군은 공격에는 능했으나, 방어에 있어서는 치명적인 약점을 드러냈다. 싸우려는 의지는 약하지 않았고, 기개 또한 만만치 않았다. 그러나 전쟁은 싸우려는 뜻과 상대에 대한 깊은 적개심 등의 감정적인 요소로만 벌일 수 없다. 다양한 국면에 예상치 못한 변수가 늘 등장하기 때문이다.
공산군의 침략으로부터 대한민국을 지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미군 고위 장성. 왼쪽부터 콜린스 당시 미 육군참모총장, 리지웨이 도쿄 유엔군 총사령관, 밴 플리트 미 8군 사령관, 한 사람 건너 백선엽 1군단장.
공산군의 침략으로부터 대한민국을 지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미군 고위 장성. 왼쪽부터 콜린스 당시 미 육군참모총장, 리지웨이 도쿄 유엔군 총사령관, 밴 플리트 미 8군 사령관, 한 사람 건너 백선엽 1군단장.
전쟁 초반의 기습적인 남침에 대응하지 못해 낙동강 전선에 밀렸다가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작전으로 적이 급히 쫓기기 시작할 때 아군의 진격은 매우 눈부셨다. 그러나 압록강을 넘어 은밀하게 참전한 중공군에게 역습을 당하면서 방어라고 할 수 없는 무질서한 후퇴와 분산으로 비참한 경우에 놓인 적이 대부분이었다. 그 이후 벌어진 중공군과의 전투에서 국군은 과감한 공격을 펼치다가도 면밀한 전략을 세우고 들이닥치는 중공군에게 잇따라 참패를 당하고 말았다. 앞에서도 잠시 소개했지만, 중공군은 그런 한국군의 상황을 ‘부동(浮動)’이라고 표현했다. 물에 떠서 이리 저리 떠다니는 상태를 일컫는 말이다.

적을 소멸하려는 공격과 함께 방어는 전투의 수행에서 결코 가볍게 볼 수 없는 행위다. 어느 군대의 역량을 살필 때 오히려 방어력이 공격력에 비해서 높은 점수를 차지한다. 공격이 방어에 비해 오히려 조금은 더 수월하다는 얘기다. 방어는 적의 일격으로 전선이 허물어졌을 때 다음의 후퇴지역으로 이동하면서 접적(接敵)을 유지하며 침착하게 싸워야 하는 일이다. 고도의 훈련과 아주 높은 조직력, 혼란의 상황을 관리하는 능력 등이 모두 필요하다. 그런 방어에 침착하게 임할 수 있을 만큼의 훈련은 당시 국군에게 절대 부족했다. 지휘관의 연령과 경험이 모두 일천했고, 장비와 화력도 매우 뒤떨어진 상태였다. 장병에 대한 교육도 체계적으로 이뤄진 적이 거의 없었다.

현리 전투는 아마도 그런 국군의 약점이 집중적으로 드러난 싸움에 해당할 것이다. 싸우려는 의지가 적지 않았던 국군을 좀 더 집중적으로 교육시키고 훈련시킬 시간과 물리적인 여유가 없었던 점이 당시 전투에서 벌어진 한국군 참패의 진정한 원인이라는 생각이다.

밴 플리트의 신념

따라서 당시의 현리 전투의 책임을 어느 몇 사람에게 집중적으로 돌리는 일은 마땅치 않다. 그럼에도 미 8군 사령관 밴 플리트 장군은 한국군의 작전 지휘권을 모두 회수했고, 3군단을 해체했다. 모욕적인 조치이기는 했으나 지휘 상에서 드러낸 한국군 수뇌부의 치명적인 결함을 생각하면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일이기도 했다. 그러나 밴 플리트라는 인물은 그런 조치 뒤에 한국군을 위해 획기적인 작업에 착수한다. 그 전까지 드러났던 한국군의 약점을 보완하기 위한 교육과 훈련이었다. 이 점에서 밴 플리트는 한국군대에게 매우 고마운 존재였다.

그에 앞서 전선에 부임했던 미 8군 사령관이 전혀 생각지 않았던 일을 그가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로서도 현리 전투에서 드러난 한국군 지휘능력의 결정적인 약점은 매우 충격적이었다. 이 상태로 군대를 유지한다는 일이 앞으로 벌어질 전투에서 얼마나 위험한가를 깨달았던 것이다. 그로 인해 한국군은 전혀 새로운 차원의 군대로 거듭 나는 기회를 잡는다.

강릉의 비행장에서 1군단장이었던 나와 강릉 전방지휘소로 나와 있던 정일권 참모총장에게 3군단의 해체를 언급했던 밴 플리트는 이어 우리에게 “한국군은 이제 체계적인 훈련이 필요하다”고 했다. 그의 결심은 곧 현실로 이어졌다. 현리 전투가 끝난 뒤 한 달여의 시간이 흐른 1951년 7월 미 8군은 한국군을 위한 체계적인 훈련계획을 수립해 실행에 옮긴다. 당시 세워진 것은 야전훈련사령부였다. 영어로는 FTC(Field Training Command)로 일컫는 부대였다. 밴 플리트 사령관의 특별 명령에 따라 세워진 사령부는 한국군의 새로운 훈련체계를 실행에 옮기는 기구였다.

미 9군단에서 토마스 크로스(Thomas Cross) 부군단장이 사령관을 맡았다. 이어 그 예하에 제2차 세계대전을 야전에서 지내 경험이 풍부하고 자질이 뛰어난 미군 장교와 하사관 150여 명이 각 미군부대에서 뽑혀 왔다. 사령부가 세워진 곳은 내가 이끄는 한국군 1군단 지역의 양양이었다. 이곳에서 한국의 군대는 전혀 새로운 모습으로 태어날 참이었다.

먼저 훈련을 받아야 했던 대상은 국군 3사단이었다. 현리 전투에서 기록적인 패배를 당한 뒤 밴 플리트의 명령에 따라 해체한 3군단에서 내가 이끄는 1군단 예하로 새로 배속한 부대였다. 밴 플리트는 내게 “시험 삼아 먼저 새로 배속한 한국군 3사단을 그곳에서 훈련시켜라”는 명령을 내렸다. 훈련의 강도는 매우 셌다. 일반 장병은 물론이고 사단장까지 교육과 훈련을 받아야 할 정도였다. 기간은 모두 9주였다. 부대의 훈련으로 따질 때는 제법 긴 시간이었다. 일선에서의 모든 부담을 떨치고 훈련을 받는 부대는 그 교육과정에 전력을 기울여야 했다.

미군은 한국군 훈련과 교육을 위해 매우 치밀한 프로그램을 마련했다. 장병들은 먼저 개인화기를 다루는 법부터 다시 배웠다. 전술 훈련과 장비를 다루는 방법 등도 교육했다. 분대와 소대, 중대, 다시 대대 차원의 전술 훈련은 아주 엄격했다. 일정한 수준을 설정한 뒤 그에 미치지 못하는 부대가 나오면 처음부터 훈련을 다시 받았다.
현리 전투를 계기로 밴 플리트 미 8군 사령관은 한국군에게 체계적인 훈련을 받도록 했다. 재무장한 한국군을 사열하고 있는 밴 플리트 사령관(가운데 서 있는 사람들 왼쪽)의 모습이다.
현리 전투를 계기로 밴 플리트 미 8군 사령관은 한국군에게 체계적인 훈련을 받도록 했다. 재무장한 한국군을 사열하고 있는 밴 플리트 사령관(가운데 서 있는 사람들 왼쪽)의 모습이다.
거듭 태어나는 국군

당시 3사단장은 백남권 준장이었다. 그 역시 훈련에 훈련을 거쳐야 했다. 사단장 이하 모든 부대원이 함께 훈련을 받고, 대대 테스트에 이르러 전술 훈련의 합격점에 미치지 못하면 과정을 다시 이수해 테스트를 또 치러야 했다. 그런 엄격한 훈련과 교육을 거친 뒤 사단은 다시 일선으로 나갈 수 있었다. 미군은 엄격한 훈련을 거친 한국군 사단에게 전투 중에 상실하거나 망가진 장비와 무기를 새 것으로 바꿔줬다. 혹독한 훈련 뒤에 미군의 새 장비와 무기로 사단을 보충할 수 있다는 점 때문에 한국군 사단들은 매우 열심히 훈련에 임했다. 3사단을 시작으로 이듬해까지 한국군 10개 사단이 모두 이 훈련을 받았다. 따라서 한국군 거의 전부가 새로 태어날 수 있었다. 그런 점 때문에 우리가 훈련을 거쳤던 양양은 사실 현재 한국 육군의 요람(搖籃)이라고도 부를 수 있었다. 그러나 그에서 그치지 않았다.

밴 플리트는 1951년 12월 한국군 보병장교 250명을 선발해 포트 배닝의 미국 보병학교에 보냈다. 100명의 포병장교는 별도로 포트 실의 미군 포병학교에 파견했다. 초급 지휘관의 능력에 따라 전투의 승패가 갈린다는 그의 신념 때문이었다. 그에 앞서 미국을 유학 차 다녀온 고급 장교들은 있었으나 대규모로 한국군 각급 장교가 미국에 가서 체계적인 교육을 받는 일은 처음이었다. 밴 플리트는 그런 한국군 교육을 위해 열과 성을 다 했다. 1951년 12월에는 대구에 참모학교를 만들었고, 이듬해 1월에는 4년제 정식 육군사관학교를 진해에 열었다. 1950년대 내내 펼쳐진 이런 미국 유학 교육과정을 거친 한국군 장교는 어림잡아 1500명 정도에 이른다.

밴 플리트의 신념이 한국군을 새로운 군대로 태어나도록 한 셈이다. 이로써 세계 최강 미군의 ‘체계’가 한국군에게 옮겨지고 있었다. 그 의미는 단지 군사적인 측면에서만 머물지 않았다. 미군이 지닌 미국의 문명적 바탕이 우리 사회로 신속하게 이식(移植)하는 계기로도 볼 수 있었다. 현리 전투는 우리 입장에서는 입에 다시 담기 싫은 참패였다. 그럼에도 현리 전투를 계기로 한국군이 새로 무장하면서 거듭 태어날 수 있었다는 점은 아주 다행이었다. 그 전기(轉機)를 몰고 온 주인공은 밴 플리트 장군이었다. 그로써 우리가 전화위복(轉禍爲福)의 국면을 이끌어낸다면 그것은 커다란 축복이었다.

싸우려는 의지

현리에서 한국군 3군단이 중공군의 대병력에 의해 처참하게 무너지던 그 무렵이었다. 한 쪽은 제가 지닌 병력을 크게 허물었고, 다른 한 쪽은 정신을 차려 적에게 용감하게 대항함으로써 상대에게 커다란 피해를 입혔다. 모두 한국군이었다. 그럼에도 싸움의 결과에서 이토록 커다란 격차를 이룬 이유는 무엇일까.

이제부터는 용문산 전투를 소개할 작정이다. 적에게 터무니없이 무너진 한국군은 3군단, 중공군에게 씻을 수 없는 아픈 상처를 남겨준 군대는 6사단이었다. 둘은 전력상으로 드러나는 차이가 있을 수 없었다. 대한민국 건국 뒤 군문을 세우고 불과 2년도 지나지 않아 김일성 군대가 일으킨 6.25전쟁의 소용돌이로 깊숙이 휘말려 들어간 점이 다르지 않았다. 또한 당시 한국군 모두가 그러했듯이 변변찮은 무기와 장비로 무장했을 뿐이고, 전쟁이 벌어진 뒤 급히 부산과 인천 등을 통해 들어온 미군에게 곁눈질과 어깨 너머로 현대식 군대의 싸움 방식을 배워가며 전투에 임하던 상황이었다. 미군은 끊임없이 물자를 부산으로 실어 올려 한국군과 유엔군 모두에게 후방을 받쳐주고는 있었지만 한국군 자체로서는 면모를 크게 일신할 시간적인 여유가 없었다.
휴전 직전인 1953년 중공군과 막바지 전투에 나선 국군들이 휴식을 취하고 있다. /라이프 제공
휴전 직전인 1953년 중공군과 막바지 전투에 나선 국군들이 휴식을 취하고 있다. /라이프 제공
따라서 국군 3군단과 미 9군단에 배속한 상태에서 싸움을 수행해야 했던 6사단은 물리적인 측면에서 차이를 드러낼 수는 없었다. 그럼에도 3군단은 허무하게 중공군의 공세에 무너지면서 6.25전쟁 중의 한국군이 맞았던 최대의 참패를 기록했고, 6사단은 보기 좋게 중공군에게 회심의 일격을 안겼다. 그 차이를 빚은 것은 다름 아닌 ‘싸우려는 의지’였다. 3군단은 일선을 뚫은 중공군 소수 병력에 의해 후방의 전략적 지형을 내준 뒤 싸우려는 의지를 모두 상실하고 말았다. 지휘와 통제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누가 지휘관인지, 누가 일선에서 소총을 들고 적을 맞아 싸워야 하는 병사인지를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커다란 혼란에 휩싸여 제 살 길만을 찾아 물러서기에 바빴다.

그러나 6사단은 달랐다. 그들은 앞에서 다가오는 중공군의 대병력을 침착하게 지켜봤으며, 그들의 공격이 몰릴 곳에 미리 두터운 벽을 쌓았다. 그리고 적이 다가서자 죽기를 무릅쓰고 싸우고 또 싸웠다. 결과는 대규모의 승리였다. 줄곧 한국군을 얕보며 전선을 오갔던 중공군은 이로써 싸우려는 마음으로 뭉친 한국군에게 호되게 당하고 말았다. 이 또한 중공군이 마음을 크게 다잡은 뒤 추진했던 5차 2단계 공세의 흐름 속에서 벌어진 전투였다. 서부전선에서 대규모 병력으로 서울을 공략하던 중공군은 5차 2단계 공세가 임박하면서 주력을 중동부 전선으로 돌렸다. 은밀하게 중동부 전선으로 병력을 이동시킨 중공군 수뇌부는 5월 16일 강원도 인제의 현리 일대와 경기도 북부 지역으로 강습(强襲)을 벌이고 나왔다.

용문산 전투는 그런 중공군의 대공세 흐름 속에서 5월 18일부터 이틀 동안 벌어진 싸움이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중공군은 이 싸움에서 참패를 당하고 말았다. 아주 많은 수의 병력을 잃었고, 한국군과 미군이 벌인 강력한 반격의 덫에 갇힘으로써 전략적 의도의 좌절은 물론 전선 전체의 지휘 상에서 적지 않은 손실을 입고 말았다.

경기도 양평 용문산

당시의 천후(天候)는 싸움의 양쪽에게 핑계를 댈 만한 기회를 주지 않았다. 날씨는 대개 맑았으며 아침부터 오전 한 동안까지는 안개가 끼어 오히려 공습(空襲) 능력이 강한 아군 측에 다소 불리하다고 해도 좋을 정도였다. 강원도 산간에 비해 기온은 높아서 적과 맞서 싸우기에는 무리가 전혀 없었다. 싸움이 벌어졌던 용문산이라는 곳은 경기도 양평에서 남한강과 북한강이 합류하는 지점의 삼각주 지형에 있는 산이다. 큰 싸움이 벌어지는 곳은 대개 옛 전장(戰場)이기 십상이다. 지형의 생김새가 우선 그렇고, 사람과 물자가 다른 지역에 비해 수월하게 이동하는 주요 길목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남한강과 북한강이 만나는 지역이어서 교통으로 볼 때 사람의 왕래가 매우 잦을 수밖에 없는 곳이 용문산 일대였다. 전사 기록을 보면 이곳은 원래 국가의 운명이 위태로워지는 전쟁을 맞았을 때 나라를 지키려고 했던 의병(義兵)들이 집결했던 곳이라고 한다. 고구려와 백제, 신라가 한반도에서 힘겨루기를 한창 벌이고 있을 무렵 삼국통일의 야망을 가슴에 지니고 있던 신라의 진흥왕이 이곳에 군대를 주둔시켰다는 기록도 전해지고 있다. 아울러 고려시대에도 고려의 군대가 이곳에 산성(山城)을 쌓고 침략한 몽고군과 일전을 벌이기 위해 머물렀다는 설명도 있다. 일본군이 침략한 임진왜란 때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고 한다. 승병과 의병들이 나서서 이곳에 머물면서 북상하는 왜군을 맞아 전의(戰意)를 다졌던 곳이라는 설명도 따른다. 이와 같은 역사적 기록을 보더라도 이곳이 전술적으로 꽤 중요한 지역이라는 점을 충분히 알 수 있을 것이다.

6사단은 이에 앞서 사창리라는 곳에서 전투를 벌였다. 이 전투는 앞에서 소개한 적이 있다. 아울러 6사단은 이미 여러 번 언급한 부대였다. 1950년 6월 25일 전쟁이 벌어지면서 6사단은 매우 유명해졌다. 강원도 춘천의 전면을 방어하던 사단으로서 한국군 중에는 거의 유일하게 기습 남침한 북한군의 전술적 의도를 차단한 부대였기 때문이다. 아울러 기동력이 매우 탁월했다. 영월 일대에 있던 광물(鑛物) 회사들의 트럭을 징발해서 사용할 수 있었던 까닭에 다른 국군 사단에 비해 월등하다고 해도 좋을 기동력을 확보하고 있었다. 따라서 부대의 형편은 전반적으로 다른 한국군보다 나은 편이었다.

하지만 낙동강 전선에서 맥아더 장군이 이끌었던 인천상륙작전으로 전세가 반전(反轉)의 국면을 맞았을 때 너무 빨리 북진한 점이 아쉬웠다. 이들은 압록강을 향해 거침없는 질주를 거듭해 압록강 초입의 초산진에 먼저 당도했다. 당시 모든 국군 부대가 흉내를 낼 수 없을 정도의 기동이었다.
전투 중 국군에 의해 붙잡힌 중공군 포로의 모습이다. 중공군은 참전 뒤 전투가 잇따르면서 급격한 체력 저하 현상을 보여 막대한 인명 손실을 입었다.
전투 중 국군에 의해 붙잡힌 중공군 포로의 모습이다. 중공군은 참전 뒤 전투가 잇따르면서 급격한 체력 저하 현상을 보여 막대한 인명 손실을 입었다.
6사단장의 선택

그러나 그 점이 화근(禍根)이었다. 그들은 적유령 산맥의 깊은 그늘에 몸을 숨긴 채 매복해 있던 중공군의 덫에 걸려들고 말았다. 당시에 국군 2군단의 6사단과 7사단, 8사단이 모두 비슷한 형편에 놓였지만 중공군 참전 직후의 전투로 인해 한국군 2군단이 해체의 길을 걷는 순간에서 6사단의 발 빠른 기동은 결정적인 계기로 작용했다.

그 뒤 6사단은 어려운 전투를 수행했다. 그러다가 중공군 5차 4월 공세에 결정적인 패배를 당하고 말았다. 위에 적은 사창리 전투였다. 경기도 가평의 사창리라는 곳에서 벌어진 전투는 6사단과 중공군 20군 예하의 58사단, 59사단, 60사단이 벌인 싸움이었다. 약 3일 동안 벌어진 사창리 전투에서 6사단은 퇴로(退路)에 관한 숙고(熟考)가 부족해 결국 지휘 상의 커다란 혼란을 야기했으며, 마침내 중공군 거대 병력에 의해 공격을 받아 장비와 화력은 물론이고 절반에 가까운 병력을 손실하고 말았다. 이 싸움은 6.25전쟁 중 아군이 꼽는 결정적인 패배의 하나에 해당한다.

당시 패배는 충격적이었던 듯하다. 싸움을 지휘하고 있던 미 9군단장의 입장에서는 분명히 그랬다고 보인다. 사창리 전투에서 6사단이 커다란 혼란을 보이면서 기록적인 패배를 맞이한 뒤 미 9군단장인 윌리엄 호그(William M. Hoge) 중장은 사단을 찾아갔다. 앞에서도 잠시 적은 내용이다. 그는 6사단장인 장도영 준장에게 “당신이 군인이냐?”라고 일갈할 정도로 화가 났던 모양이다. 장도영 사단장은 그런 호그의 호통에 한 마디도 대꾸할 수 없었다고 한다. 기록적인 패배를 당한 사단장이 그런 상황에서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그런 과정을 겪었던 6사단이었다. 신속하게 후방의 병력으로 병력을 재편해 다시 싸움터에 나선 입장이었다. 그러나 싸움에서의 패배는 쉽게 잊을 수 없는 법이다. 초산진에서 중공군의 매복에 걸려 당한 쓰라린 패배 이후 사창리에 이르는 동안 6사단 장병들의 마음속에는 중공군에 대한 두려움이 한껏 커졌던 상태였다. 장도영 사단장은 그 점에 깊이 주목했던 듯하다. 여러 번의 패전을 거치는 동안 두껍게 가라앉았던 상대에 대한 두려움을 불식하지 못한다면 다시 싸움에 나서도 승산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그는 그런 점에서 싸움의 요체를 잘 잡아낸 사단장에 해당한다. 무기와 장비가 제아무리 뛰어나도 마음 복판에 자리를 잡은 두려움이 없어지지 않는다면 싸움다운 싸움을 해나가기 어려운 법이기 때문이다.

용문산 일대의 전투 환경은 중공군에게 유리했다. 이곳의 지형적 특징은 물이 많다는 점이다. 남한강과 북한강이 만나는 곳이라서 그랬다. 아울러 북쪽으로는 홍천강도 흐르고 있다. 모두 수량이 풍부한 강이다. 그곳에는 또 울창한 삼림이 이어져 있다. 강이 흐르는 곳이라서 그곳으로 자락을 내리는 산의 경사면도 퍽 큰 편이다.

중공군은 도로를 따라 기동하는 법이 드물었다. 당시까지는 그랬다는 얘기다. 도로로 기동하기에는 사정이 어려웠다. 탁월한 미 공군의 공격력 때문이었다. 도로로 기동할 경우 미 공군의 파괴력 강한 공격에 속수무책으로 놓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어서 그랬다. 따라서 중공군은 1950년 10월 말 참전 이래 늘 산악으로 기동을 펼쳤다. 그를 감안하면 용문산 전투가 벌어지던 당시 지역적 특성으로 볼 때 중공군은 특유의 산악 기동을 활발하게 펼칠 수 있는 상황이었다. 단지 6사단에게 유리한 점이 있었다면 주변을 모두 감제(瞰制)할 수 있는 가장 높은 고지인 용문산을 선점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미 9군단의 배치 상황은 서쪽이 한국군 2사단, 중앙이 한국군 6사단, 동쪽이 미 7사단이 늘어서는 모양새였다. 중공군은 5월 16일 강원도 현리 일대로 병력을 몰아 강공을 펼친 뒤 다른 병력을 이동시켜 미 9군단 전면을 압박했다. 이번에 중공군이 싸움 상대로 고른 쪽은 한국군 6사단이었다.
한국군 포병 병력의 105㎜ 야포 발사현장을 시찰하고 있는 밴 플리트 미 8군 사령관(오른쪽).
한국군 포병 병력의 105㎜ 야포 발사현장을 시찰하고 있는 밴 플리트 미 8군 사령관(오른쪽).
장도영 사단장은 설욕(雪辱)을 다짐하고 있었다. 6사단장으로 부임한 뒤 맞은 사창리 전투에서의 패배를 일거에 만회하면서 중공군에게 뼈아픈 일격을 가하려는 마음이 강했다. 그는 따라서 어느 경우에도 물러서지 않고 다가오는 적을 맞받아칠 각오였다. 그는 주(主)저항선 전방으로 경계부대를 보내기로 했다. 적이 어떻게 움직일 것인가를 미리 파악해보고자 앞으로 내세우는 부대가 경계부대다. 적이 어떤 규모로, 어떤 경로를 거쳐, 어떤 방식으로 공격하느냐 등을 두루 살피기 위해 전진시켜 배치하는 부대다.

경계부대로 선택한 부대는 2연대였다. 장도영 사단장은 좌측에 19연대, 우측에 7연대를 배치한 뒤 2연대를 전방으로 보냈다. 아울러 사단장은 전방으로 나아가는 2연대장을 불러 “어떠한 경우에도 철수하지 말고 진지를 사수하라”고 명령했다. 이런 사단장의 강력한 지시에 따라 2연대장은 예하 3개 대대를 전방에 포진시킨 뒤 사주방어(四周防禦)형 진지를 구축하고 적을 기다렸다. 마침 전방의 경계부대로 나아간 2연대는 사창리 전투에서 먼저 적에게 등을 보임으로써 사단 전체의 와해 국면을 초래했던 부대이기도 했다. 전사 기록에 따르면 당시 사창리 전투에서의 치욕을 씻기 위해 2연대는 철모에 붉은색 페인트로 ‘결사(決死)’라는 글자를 쓴 뒤 전투에 나섰다고 한다.

죽을 각오로 임하다

육군본부가 펴낸 <1129일 간의 전쟁 6.25>에는 당시의 상황이 자세하게 드러난다. 그에 따르면 장도영 사단장은 2연대를 전방의 경계부대로 내보내기 전 군장(軍裝) 검사를 벌였다. 그는 2연대 장병들을 앞에 두고 “지금까지 우리 부대는 전투에서 한 번도 패한 일이 없는데 사창리 전투에서 망쳐 놓았다. 이 오명을 씻기 위해 너희는 죽음을 각오하고 싸워야 한다. 한 발짝도 물러설 생각하지 말고 전초(前哨) 진지를 사수하라. 진지를 끝까지 지키고 있는 한 사단장은 모든 것을 지원하겠다”고 말했다.

철모에 붉은색 페인트로 ‘결사’라는 글자를 써놓은 것은 2연대 장병들이 사단장의 훈시를 들은 뒤였다고 한다. 사단장은 장병들에게 한 가지를 분명히 약속했다. 목숨을 걸고 전초 진지에서 싸우는 한 사단장은 모든 것을 지원하겠다는 내용이었다. 싸움은 마음으로만 이뤄지지 않는다. 나를 죽이려는 적이 다가오는 싸움에서는 말이다. 그런 싸움에서는 모든 사람이 마음을 한 데 뭉치는 일이 중요하다. 그러나 마음의 결의만이 존재한다면 그런 이야기는 설득력이 떨어진다. 장도영 사단장은 그 점을 분명히 했던 것이다.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 전초의 진지를 지원하겠다는 점 말이다.

결론을 먼저 이야기하자면, 용문산 전투는 사단장 이하 모든 장병의 굳은 의지가 뭉쳐졌고, 그 뒤 장병들의 분투(奮鬪)를 지원하는 사단장의 실행(實行)이 효력을 발휘한 싸움이었다. 이 점은 나중에 상술하겠지만 용문산 승리의 골간(骨幹)을 이룬 매우 훌륭한 요소에 해당한다.

중공군은 현리 전투에 이어 미 9군단의 정면을 곧 압박하기 시작했다. 그럴 경우 전투의 조짐은 여러 곳에서 모습을 드러낸다. 전방에서 중공군의 이동이 활발해지고, 적의 척후(斥候) 행위도 자주 보인다. 그러면서 부대가 지니는 긴장감이 높아진다. 전선 너머의 중공군 활동이 잦아지면서 미 9군단도 채비에 들어갔다. 서쪽의 국군 2사단, 동쪽의 미 7사단은 전초에 나가있던 부대들을 불러들여 주저항선에 세웠다. 그에 따라 6사단의 경계부대로 나가있던 2연대만이 남은 상태였다. 2연대가 지닌 전투 식량은 1주일 치였다. 그럼에도 2연대 장병들을 죽을 각오로 진지를 지키며 적을 기다렸다.

당시 전방의 전초 진지로 갔던 2연대 장병의 각오는 어땠을까. <1129일 간의 전쟁 6.25>가 채록한 증언이 하나 있어 여기에 소개한다. 책은 증언자의 신분을 당시 6사단 2연대 1대대 참전용사라고만 적었다. 그 내용이다.

후방 지원 준비 완료

“그 당시 우리 대대는 대대장이 없어 부대대장 진명섭 대위가 대리근무를 하고 있었다. 사창리에서 패배하고 실의에 빠져 있던 어느 날 우리 대대는 연대장으로부터 ‘홍천강 남안의 미사리 일대에서 중공군의 공격을 저지하라’는 임무를 부여받았다. 우리 대대가 용문산 서쪽의 몰래재를 넘을 때 부대대장은 ‘드디어 우리 모두에게 마지막 기회가 왔다. 우리가 죽을 각오하고 싸운다면 반드시 큰 공을 세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손톱과 머리카락을 잘라 유서와 함께 고향에 보내고 훗날 국립묘지에서 만나자’라고 하자 전 대대원이 결의에 찬 모습으로 손톱과 머리카락을 잘라 봉투에 넣었다.”
동굴 진지에서 공격 명령을 대기하고 있는 중공군 병사들 모습. 손에 쥔 방망이 형 수류탄이 눈에 띈다.
동굴 진지에서 공격 명령을 대기하고 있는 중공군 병사들 모습. 손에 쥔 방망이 형 수류탄이 눈에 띈다.
중공군은 늘 많았다. 풍부한 인구를 지닌 국가라서 그랬을 것이고, 사력(死力)을 다 해 당시의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기 위해 제가 지닌 총력을 퍼부었기 때문에 그랬을 것이다. 2연대는 당초 많아야 1만 여 명의 중공군을 대적(對敵)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러나 중공군은 63군 예하 3개 사단으로 한국군 6사단을 겨냥하고 나왔다. 병력의 수만으로 볼 때 5만 명을 넘는 규모였다. 그런 적을 맞아 싸우는 쪽은 6사단이었고, 그 앞을 막고 전방을 사수하려는 부대는 6사단의 2연대뿐이었다. 죽어서도 지키겠다는 의지가 없고서는 결코 이뤄지기 힘든 싸움이었다.

6사단의 결의는 만만치 않았다. 우선 사단 27포병대대를 동원해 전방을 지원하기로 했다. 아울러 미 9군단 소속의 92, 987 자주 포병대도 동원했다. 또 그 나머지 군단의 포병부대들도 용문산 후방에 포진지를 구축하고 지원준비를 마쳤다. 가장 든든한 대상이었던 미 공군도 미 9군단의 요청에 대비해 막강한 공군력을 6사단의 전방에 투사(投射)할 준비를 끝냈다. 중공군의 실력도 상당한 수준이었다. 용문산 일대를 공격키로 하고 나선 63군은 다른 중공군 부대처럼 국공(國共)내전과 항일(抗日)전투에 참가했던 전투 경험이 풍부한 부대였다. 예하 187, 188, 189 사단은 1951년 2월에 압록강을 건넌 뒤 임진강 북쪽에 도달한 데 이어 중공군 5차 1단계 4월 공세에서 임진강 설마리 전투에 참가했다.

전사 기록에 따르면 그 중 188사단은 설마리 전투에서 큰 공을 세워 ‘영웅’ 칭호를 받은 연대장이 2명에 이르렀다. ‘강한 지휘관 아래에 약한 졸병은 없다’는 말도 있듯이, 그런 중공군 부대의 병사들 또한 사기가 아주 높은 편이었다고 한다. 중공군은 용문산을 넘어 아군의 서부전선 후방을 공략할 의도였다. 강원도 현리에서 한국군을 먼저 소멸시킨 뒤 여세를 몰아 미군의 유생역량을 없애면서 전선을 휘청거리게 만든 뒤 용문산에서 틈을 뚫어 서부전선의 미군 주력을 궁지에 몰아넣겠다는 계산이었다.

중공군이 공격을 벌이기 시작한 정확한 시점은 1951년 5월 17일이었다고 한다. 중서부 전선 일대에서 강력한 공세를 벌인 뒤 중공군 예봉(銳鋒)이 곧 모습을 드러냈다고 한다. 용문산 일대의 한국군 6사단 2연대 앞이었다. 이튿날인 5월 18일 중공군 본대가 출몰하기 시작했고, 곧 용문산 일대는 뜨거운 격전장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얼씬거리는 중공군 그림자

본격적으로 전투가 벌어지기 전에도 중공군은 6사단 전면에 가끔씩 모습을 드러냈다고 한다. 전투가 벌어지기 3일 전인 1951년 5월 15일에는 한국인 민간복으로 변장한 중공군이 가평 남쪽의 도로에서 아군의 수색대 눈에 띄었고, 10여 명의 중공군이 강변을 따라 내려오는 장면도 나타났다. 그러나 결정적인 내용이 없었다. 포로를 잡아 중공군의 동태를 구체적으로 파악해야 했는데도 사정은 그렇지 못했다. 따라서 장도영 사단장은 각 연대에 중공군 포로를 반드시 잡아야 한다는 주문을 했다. 사단장의 지시에 따라 각 연대는 전면의 수색과 정찰을 강화하면서 중공군 포로를 잡아들이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5월 16일에는 적지 않은 중공군 병력이 가평 읍내에 집결했다는 정보가 들어왔다. 그에 따라 정밀한 정찰을 강화한 결과 최소 연대 규모의 중공군 병력이 남쪽으로 이동하고 있다는 사실도 파악했다. 전방의 경계부대로 나섰던 2연대 또한 중공군 포로를 잡아들이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다가 2연대에서 결국 중공군과의 교전 끝에 포로 한 명을 붙잡았다. 6중대 병력이 수색 도중 중공군과 조우해 격렬한 전투를 벌인 끝에 잡은 포로였다. 이 포로를 통해 중공군 대규모 병력이 곧 용문산 일대를 향해 공격을 벌일 것이라는 사실을 파악했다. 중공군 공격은 5월 18일 시작했다. 전사의 기록에 따르면 전투가 벌어지던 5월 18일의 일기는 좋지 않았다. 가랑비가 내리고 있었으며 하늘은 퍽 흐린 상태였다. 대규모의 적은 이미 5월 17일 밤의 야음을 틈타 홍천강 북안에 당도했으리라 보였다.
중공군 포병 화력이 전투에 나서기 전 사열을 받고 있다.
중공군 포병 화력이 전투에 나서기 전 사열을 받고 있다.
장도영 사단장은 상당히 치밀하고 과감한 계획을 세운 상태였다. 특히 2연대를 전방의 경계부대로 내세우면서 끝까지 진지를 사수하라고 지시한 점은 눈에 띄는 내용이었다. 2연대가 지키는 진지는 지형적으로 뚜렷한 특징을 하나 지니고 있었다. 전방에서 내려오는 중공군이 이곳 2연대의 진지를 돌파할 경우와, 그렇지 못한 경우가 그 때문에 크게 갈린다.

전방 경계부대라고는 했지만 사실 2연대는 단순한 경계 근무를 벌이는 임무가 아니었다. 그곳을 목숨으로 지켜야 하는 책임이 있었다. 따라서 어떻게 보면 주저항선에 올라선 핵심 전투부대였다고 해도 좋았다. 2연대로 하여금 중공군을 그곳에서 목숨을 걸고 저지하라는 지시를 내린 장도영 사단장은 나름대로 지형적인 이점을 정확하게 노렸다.

중공군이 2연대에 막혀 머무는 저지선의 북방은 개활지에 가까웠다. 높은 산간 지형과는 전혀 반대의 모습을 지닌 장소였다. 높아 봐야 기껏 구릉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의 나지막한 산지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강변과 평탄한 지면의 연속이었다. 따라서 홍천강을 도하해 남하하는 중공군은 2연대 저지선에 막혀 머무는 동안 2연대 후방의 강력한 아군 포격에 몸을 드러내야 하는 형국이었다.

후방에 배치한 막강한 포병

앞에서도 설명한 대목이지만 6사단의 전투를 위해 미 9군단과 사단본부는 상당한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특히 후방에 강력한 포병화력을 전개하고 적을 기다리는 상황이었다. 사단의 27포병대대는 물론이고, 미 9군단을 비롯한 각 예하부대의 포병화력이 6사단의 전투를 지원하기 위해 강력한 포를 늘어놓고 있었다. 따라서 중공군은 2연대 저지선을 신속하게 뚫지 못하면 후방으로부터 날아오는 아군의 강력한 포병 화력에 몸을 숨기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장도영 사단장은 이를 정확하게 간파했던 셈이다. 따라서 그는 2연대장 송대후 중령에게 반드시 저지선을 사수하도록 명령했던 것이다.

전투가 벌어지면서 드러나는 중공군의 동선(動線)도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었다. 바로 용문산 때문이었다. 해발 1157m의 용문산은 주변 모두를 감제(瞰制)하기에 안성맞춤인 고지에 해당했다. 인근 산간 지역의 어느 산에 비해 높은 곳이었기 때문이다. 이곳에 올라선 아군은 중공군이 대규모의 병력을 이동시킬 경우 정확하게 그 행로를 파악할 수 있었다. 따라서 6사단 2연대의 저지선에 걸려 신속하게 이동하지 못하는 중공군은 낮은 구릉과 평탄한 벌판 지형에서 몸을 감추기 힘들었다. 용문산의 높은 고지에서 정확한 관측을 통해 중공군 병력이 몰려 있는 장소를 실시간으로 파악했던 아군은 후방의 포병부대에 신속하면서 빈틈없이 포격 지점을 알려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울러 중공군이 2연대의 저지에 막혀 평탄하고 너른 지형에 머무는 동안 강력한 미 공군의 공습 능력도 극대화할 수 있었다. 따라서 2연대가 막대한 중공군의 병력을 얼마 동안 저지할 수 있느냐는 점은 용문산 전투의 승패를 가를 수 있는 결정적인 요소였다. 장도영 사단장은 그런 사정을 감안해 2연대의 진지 사수(死守)를 지시했던 것이다

홍천강 남쪽은 미사리라고 하는 곳이다. 강변을 끼고 있어 그 일대는 대부분 평탄한 지형이다. 이곳에는 2연대의 1대대가 늘어섰다. 5월 18일 오전 10시 경에 중공군 기마병들의 모습이 먼저 아군의 시야에 나타났다. 그 수는 점차 불어나고 있었다. 전사의 기록에 따르면 중공군은 오후 들어 상당수의 병력이 홍천강 너머에 집결한 상태였고, 어둠이 깔리기 시작한 오후 7시에 강을 넘기 시작했다고 한다. 수심은 1.5m 정도였으며, 중공군은 약 100명 정도씩 강에 뛰어들어 헤엄을 쳤다고 전사는 소개하고 있다.

전방에 추진했던 소대는 중공군의 본격적인 도하(渡河)와 함께 중대 진지로 돌아와 적을 맞았다고 했다. 그러나 2연대는 전방에 돌출(突出)한 형국이었다. 동쪽으로 인접했던 미 7사단 경계부대, 서쪽으로 늘어섰던 한국군 2사단의 경계부대가 모두 후방으로 철수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2연대는 좌우가 다 뚫려 고립(孤立)의 형태를 보이는 진지에 갇혀 있는 모습이었다. 게다가 중공군은 수적으로 매우 우세했다. 좌우에 늘어선 아군과의 연계 없이 다가오는 대규모의 중공군을 맞아 싸우는 일은 죽음을 무릅쓰지 않고서는 불가능했다.

고립된 고지의 힘겨운 싸움

이런 점 때문에 2연대의 전투는 고전(苦戰)의 연속이었다. 중공군은 대규모 기동전을 벌이기 전에 늘 펼치던 사전 포격은 생략한 상태였다. 그저 부지런히 강 북안에서 헤엄을 쳐 물을 건넌 뒤 기관총과 방망이 수류탄을 들고 끊임없이 고지에 다가서고 있었다. 중공군은 오직 전진(前進)만이 유일한 목적인 듯했다고 전사는 설명했다. 2연대 1대대의 방어선에 걸려 얼마나 많은 병력이 죽거나 다치느냐에는 관심이 없었다고 했다. 오로지 아군의 저지선을 뚫고 2연대 진지를 건너 뛰어 아군의 후방으로 진입하는 데에만 관심이 높았던 듯했다는 이야기다.
용문산 전투가 벌어지고 있던 무렵 미 해군은 막강한 화력을 앞세워 북한 전역을 공격했다. 1951년 함흥 지역을 강타하고 있는 전함 미주리 호의 함포.
용문산 전투가 벌어지고 있던 무렵 미 해군은 막강한 화력을 앞세워 북한 전역을 공격했다. 1951년 함흥 지역을 강타하고 있는 전함 미주리 호의 함포.
그런 중공군에게 아군의 주방어선이 어디인가를 알아내는 일은 중요했다. 최종적으로 6사단의 주저항선을 뚫어야 용문산 일대를 장악할 수 있다는 판단 때문이었을 것이다. 중공군은 시간이 갈수록 수가 크게 불어났다. 미 7사단 지역 전면을 저항 없이 통과한 중공군도 국군 6사단 2연대 정면으로 몰려들고 있었다. 이들은 2연대 전면에 좌우로 늘어선 2대대와 1대대를 과감하게 공격했다. 주로 방망이 수류탄을 던져 넣는 방식으로 접근했다. 아군은 먼저 박격포 공격을 벌였다. 그리고 다가서는 적에게 집중적인 사격을 가하면서 대응했다. 중공군의 희생은 컸다. 그러나 수적으로 우수한 그들은 인명의 희생을 염두에 두지 않고 계속 다가섰다.

후방에서 나중에 강을 건너 다가선 중공군 부대는 오직 전진을 재촉했다. 조금이라도 빨리 용문산 일대로 진입하기 위해서였다. 그런 의도가 성공할 경우 중공군은 2연대 저지선을 넘어 몸을 가리기 쉬운 용문산 일대의 산자락으로 들어설 수 있었다. 아군의 강력한 포격과 공습을 피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래야 했다. 아군의 후방 포병화력이 불을 뿜었고, 미군의 강력한 공군기들이 날아들었다. 잔뜩 구름이 낀 날씨 속에서도 미 공군기는 24회를 출격했다고 전사는 적고 있다. 아울러 후방으로부터 아군의 포탄이 날아들면서 홍천강 남안 일대 개활지는 섬광과 폭음, 그리고 그로부터 나오는 초연(硝煙)이 가득한 싸움터로 돌변했다.

그러나 중공군은 쓰러지고 또 쓰러지면서도 쉼 없이 다가섰다. 막대한 병력을 앞세운 중공군의 그런 인해전술(人海戰術)로 2연대의 전방 지지들이 휘청거리기 시작했다. ‘결사(決死)’라는 글씨를 전투모에 쓰고 분전을 거듭하는 2연대 1, 2대대의 장병들이 조금씩 밀리고 있었다.

3대대 353고지 혈투

6사단 2연대의 배치 상황은 원래 이랬다. 전방 좌측에 2대대, 우측은 1대대, 후방은 3대대였다. 전방 좌우에 있던 2대대와 1대대는 중공군과의 접전에서 밀릴 경우 다음 진지로 이동한다는 계획을 미리 세워둔 상태였다. 그럴 경우 당초 후방에 있던 3대대가 중공군 전면을 막아서고 다시 그 후방의 우측으로는 1대대, 좌측으로는 2대대가 늘어설 계획이었다. 막대한 수적인 우세로 전방의 1대대와 2대대를 공격하던 중공군은 결국 아군의 저지선을 넘어서고 말았다. 따라서 계획에 따라 1대대와 2대대는 다음의 축차(逐次)진지로 이동했다. 연대장 송대후 중령의 지시에 따라서였다. 그러나 그 무렵에 중공군은 이미 1대대와 2대대 저지선을 넘은 상태였다.
6.25전쟁 중에 박격포 훈련을 하고 있는 국군.
6.25전쟁 중에 박격포 훈련을 하고 있는 국군.
당시 상황을 자세히 적고 있는 육군본부의 <1129일 간의 전쟁 6.25>는 그 때의 모습이 저지선을 이미 넘어선 중공군의 후미를 아군이 따라가는 형국이었다고 소개한다. 그러나 마침 미 공군의 강력한 공중사격으로 아군의 전방 저지선을 넘은 중공군들이 산간의 숲 사이로 몸을 숨겼다고 했다. 1대대와 2대대는 그런 틈을 타서 신속하게 다음 축차진지로 무사히 이동했다. 다음으로 적을 전면에서 맞아야 했던 3대대의 위치는 지금의 청평호로부터 6㎞ 정도 떨어진 353고지였다. 이제는 3대대가 전면으로 나서서 중공군을 맞아 싸워야 할 차례였다. 그곳으로부터 우측으로 3㎞ 떨어진 나산에는 1대대가 전방 임무를 완수한 뒤 신속하게 이동해 자리를 잡았고, 좌측으로는 역시 전방의 저지선에서 철수한 2대대가 427고지에 진지를 편성하고 전투태세를 갖췄다. 따라서 중공군의 주공(主攻)은 가운데 진지에 자리를 잡은 3대대 정면으로 몰릴 형국이었다.

중공군의 핵심 목표는 용문산 점령이었다. 가장 높은 고지를 점령함으로써 세를 구축한 뒤 아군의 서쪽 후방을 치고 들어간다는 계획을 마련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중공군의 그런 전략적 의도를 관철하기 위해서는 한국군 6사단 2연대 3대대가 지키고 있는 353고지를 반드시 뚫어야 했다. 중공군의 대규모 병력이 신속하게 용문산으로 다가서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곳을 거쳐야 했던 까닭이다. 따라서 한국군 6사단 2연대의 1대대 및 2대대의 1차 저지선을 넘은 중공군은 3대대를 향해 공격을 벌일 게 분명해 보였다. 중공군 공격이 벌어진 뒤 하루가 지난 5월 19일 저녁에는 그런 중공군 동향을 알리는 첩보들이 속속 들어오고 있었다.

나팔수와 정훈병

전사 기록을 보면 흥미를 끄는 장면이 하나 눈에 띈다. 당시 3대대의 진지 사수(死守) 결의 또한 대단했다고 한다. 대대장은 김두일 대위였다. 그는 진지를 견고하게 다져 적을 맞을 채비에 나서는 한편 행정병과 노무자들도 소총을 잡고 전투에 나서도록 했다고 한다.

부대에 남아 있는 인력 중에 소총을 들고 적에 맞설 수 있는 사람은 모두 나서서 싸우자는 전원 결사 의지의 표현이랄 수 있겠다. 아울러 김두일 대위는 아이디어 하나를 냈다. 전투에 나서는 아군 병력의 사기를 드높이기 위해 중대마다 한 명씩 나팔수를 뽑기로 했다는 것이다. 싸움에서 소리의 역할도 적지 않은 법이다. 옛 전쟁에서 공격에 나서는 신호를 북, 후퇴를 알리는 소리로는 징 등 금속소리를 냈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중공군은 참전 이래 줄곧 피리와 꽹과리 소리를 사용해 공격을 펼쳐왔다. 그에 대응하기 위한 방편으로 김두일 대위는 나팔을 생각했던 모양이다. 전사가 소개하는 또 하나 흥미로운 대목은 3대대장이 정훈병을 배치했다는 점이다. 지휘관의 의지와 전투 방식을 효율적으로 부대원들에게 전달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그런 방식으로 싸움을 끝까지 펼쳐 죽음으로써 진지를 지키겠다는 의지가 엿보이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아무튼 전선에 선 6사단 2연대 병력은 싸우려는 의지로 단단히 뭉쳐 있었던 셈이다

중공군의 공격은 밤을 타고 벌어졌다. 5월 19일 오후 7시 무렵이었다고 했다. 중공군은 소대 규모의 부대를 보내 기습을 펼쳤다. 저녁 식사를 마친 3대대 취사장이 먼저 공격을 받았다. 뒷정리를 하던 소대원과 노무자들이 쓰러졌다. 그들은 반격을 받고 곧 사라졌다. 대규모 공격을 앞에 둔 탐색전 성격의 교전이었다. 그로부터 1시간이 지난 뒤에는 고지를 향해 중공군이 대거 올라오고 있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본격적인 중공군의 공격이었다. 접전이 벌어지기 시작한 시점은 밤 10시 무렵이었다. 중공군은 따발총 사격에 앞서 방망이 수류탄을 대거 진지에 던지면서 몰려들었다.

3대대 각 중대는 박격포로 우선 적의 예봉을 꺾으면서 부지런히 사격으로 대응했다. 중공군의 시체가 진지 앞에 쌓이기 시작했다. 그런 정도의 중공군 공격으로 무너질 3대대 장병들의 각오는 아니었다. 결국 1차 접전은 중공군이 퇴각하면서 마무리 지어졌다. 그러나 중공군은 곧 다시 몰려왔다. 중공군의 공격은 줄곧 한 지점을 향해 집중하는 모양으로 나타났다. 한 지점을 돌파해 종심으로 기동을 펼친 뒤 후방으로 진입해 아군을 포위하려는 의도에서였다. 2차 공격을 펼치는 중공군 또한 한 지점만을 선택해 공격력을 집중했다. 3대대 전체가 위기에 휩싸였다.

위기에서 벌어진 기적

육군본부의 <1129일 간의 전쟁 6.25>가 적고 있는 흥미로운 장면이 하나 있다. 당시 전투에 참가했던 장병들의 증언을 채록했던 내용이라고 보인다. 전투는 계획한 여러 요소에 의해 틀이 만들어지지만, 때로는 전혀 의도하지 않은 우연의 요소가 개입해 승패를 가르는 경우가 적지 않다. 책자가 소개하고 있는 내용 또한 그런 우연의 요소에 해당한다. 그만큼 전투는 예측할 수 없는 변수가 많이 따르는 법이다. 책에 따르면 3대대장 김두일 대위는 지휘관의 의지와 심정을 부대원에게 충분히 전달코자 중공군 공격에 앞서 정훈병을 각 중대에 배치했다고 위에 적었다.

정훈병은 대대장이 자신의 뚜렷한 목적을 지닌 채 선발한 사람이다. 그러나 그 정훈병이 이상한 기적을 만들어내고 말았다. 대대장이 의도한 것과는 전혀 동떨어진 결과였다. 중공군의 거듭 이어진 공격에 대응하던 과정에서 그런 일이 벌어졌다. 중공군은 5월 19일 밤 10시 무렵에 2차 공격을 벌인 뒤 40분이 지났을 때 다시 3차 공격에 나선다. 당시 중공군이 집중적으로 노린 곳은 3대대 10중대 방어지역이었다고 한다. 쉴 새 없이 벌어지는 중공군의 공격에 부대원들은 소대장을 중심으로 강력하게 맞서 싸웠다고 한다.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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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adRunner 17-02-28 15:05
   
중국놈 나쁜놈들.. 지금이나 예전이나 죽일놈들이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