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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0-12-04 04:26
세계 최초의 완전자동식 기관총 맥심기관총에 대하여 (스크롤 압박 주의)
 글쓴이 : 오카포
조회 : 7,073  

맥심 기관총.

초창기에도 기관총이란 물건은 존재합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스캐치에 나온 물건만 봐도 이미 오래전부터 짧은 시간안에
여러발을 발사할 수 있는 화기에 대한 필요가 느껴지죠.

그런데 이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기관총과 같은 물건들은 여러 개의 총열로 구성된
형태였습니다. (발사방식은 그 당시 총기와 동일한 화승식입니다. 여러자루의 화승총을
묶고 이걸 순차적으로 발사하게 만든 것이죠.)
딴거 다 떠나 정나미가 떨어질 정도로 무거우리란걸 예상할 수 있을 겁니다.

그래서 총열이 하나인 물건을 만들어보자는 생각을 한 사람들도 나오게 됩니다.
대표적인게 영국의 제임스 퍼클(James Puckle, 1667 ~ 1724)이었습니다.
법률가이자 작가였기도 한 퍼클은 1718년, 마치 리벌버를 부싯돌 격발식으로 만들고
이걸 뻥튀겨 놓은 것처럼 생겨먹은 연발 화기를 개발했고 이걸 배에서 방어용으로
쓸려고 생각했죠.
아시다시피 당시 해전이란게 대포로 상대방의 배를 절딴내서 격침시키는게 아니라
대포로 저항하지 못할 정도로 두들겨 놓고 갑판에 뛰어올라 패주자는 식이었죠.
그러다보니 당연히 상대방이 우리 배의 갑판에 뛰어올라오지 못하게할 방법은 나름
돈벌이가 될 여지가 있었죠.

여튼 퍼클 건은 1.25인치 구경에 3피트 길이의 총열을 가진 화기였고 그 뒤에 여러
개의 약실이 난 실린더와 실린더를 돌려줄 핸들로 구성됐습니다. (삼각대 포함)
핸들을 돌리면 총알과 화약이 장전된 실린더가 돌아가면서 격발 위치에서 부싯돌이
만든 불꽃에 의해 발사된다라는 식이었죠.

재미있는건 이 물건이 2가지 버젼이 존재했다는 걸겁니다.
선량한 기독교인들을 향해 둥근 총알을 발사하는 모델과 간악한 무슬림 터키인들을
향해 사각형 총알을 쏘는 모델로.
뭐 나름 고객 감동에 대한 세심한 배려와 새뮤얼 콜트보다 거의 100년정도 더 빨리
리벌버를 만든 셈이지만 그 당시의 다른 연발총들처럼 그냥 그렇게 사라져버립니다.

사실 이 시기까지 연발총을 만들기에는 거기 사용된 격발 방식이 덜떨여졌거든요.
좋건싫건 화약가루가 풀풀 날려대는 화승식이나 부싯돌 격발식이나 움직이는 부위에서
사용되기는 문제가 많았던거죠.

그러다 뇌홍이 나오고 뇌관이 나오면서 이야기는 달라지기 시작합니다.
격발 문제로 고민할 필요가 줄어들었고 발명이 큰 돈을 만질 수 있는 기회란게 확실히
인식되자 - 혹은 애국심에서 - 이런저런 연발화기들이 등장합니다.
당연히 좀 더 개선된 성능의 기관총(과 비슷한 물건들)이 나오게 됩니다.

그 중 하나가 1851년, 벨기에군 대위 Toussaint Henry Joseph Fafchamps(이거 불어로
깔끔하게 읽으실 수 있으신 분?)와 기술자 Joseph Montigny가 만든
미트라예즈(Mitrailleuse)였죠.
그리고 이에 경쟁하는 몇종의 다른 미트라예즈들도 등장합니다.
그러고보면 저 벨기에의 미트라예즈가 나온뒤로 100년쯤 후에 개틀링건도
등장하는군요.
중요한건 이들은 대부분 여러개의 총열을 뭉쳐놓고 이걸 순차적으로 발사한다는 사실상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했던 생각과 그리 틀리지도 않은 것이었고 사람이 작동시켜줘야
했습니다.
어쩌건 이런 미트라예즈들은 분당 100발에서 200발 정도의 발사속도를 가지고 있었고
나름 만족스러운 성능을 가지고 있었죠.

그러나 미트라예즈(Mitrailleuse)는 불어 단어속에 숨겨진 뜻 - 총알을 일시에
발사하는 물건, 아니 좀 더 다듬는다면 포도탄이니 캐니스터(canister)같은 것을 쏘는
물건정도의 의미대로 보병 지원화기보다는 마치 포병대의 장비처럼 인식되어져
버립니다.
보병과 함께 움직이는게 아니라 당시의 야포들처럼 포가에 탑재되어져 포병대와 함께
일종의 캐니스터 발사 전용 대포처럼 생각된 거죠.
포병의 대포로 쏘기에는 좀 가까운 1천미터 정도로 적보병이 들어오면 기존에는 대포에
캐니스터가 장전되어 발사됐지만 이제는 미트라예즈 포대들이 적보병을 향해 서로
교차하며 쉴새없이 불을 뿜는다 라고 생각했으니 말입니다.
이런 화망을 통과한 적은 새롭고 신뢰성이 압도적으로 올라간 보병의 라이플 사격에
녹아버릴 예정이었죠.

이렇게 포병 장비로 인식된 미트라예즈들은 1865년에 나폴레옹 3세 시절의
프랑스군에게 진짜 포병화기로서 도입됩니다.

프랑스군은 6문의 미트라예즈를 1개 포대로 구성하고 1문의 미트라예즈에 발사를
담당한 사수, 미트라예즈의 방향을 이리저리 움직일 부사수, 조수 겸 탄약수 4명해서
6명씩 총 36명을 배치합니다. (이 물건들은 방아쇠를 당기는게 아니라 핸들따위를
돌려서 발사했습니다. 그러니 돌리는 친구 따로 총, 아니 포를 이리저리 움직여
휘저어댈 친구해서 2명은 있어줘야 하고 다쓴 탄통을 빼내고 새 탄통을 꼽을
장전수들도 필요했던거죠.)
곧 벌어진 1870년의 보불전쟁에 투입된 미트라예즈는 가뜩이나 배치 숫자도 적었는데다
포병 장비처럼 활용된터라 뭔가 확실히 이거다라는 결과를 만들지는 못했습니다. (이
때 프랑스군은 소량의 미국제 개틀링 건도 가지고 있었다 하죠.)
단, 일부 프로이센 군들이 꽤 따가운 맛을 본 경우도 있긴 했습니다.
다만 그보다 프랑스군의 새로운 후장총 샤스포가 프로이센군에게 더 큰 아픔을 준게
탈이었지만. (반면 프로이센군은 불신과 의혹으로 점철됐던 새로운 후장포가 포함된
포병대로 프랑스군을 아프게 만들었죠. 대신 포병의 희생이 컸지만 말입니다.)

이런 부정적인 상황에도 불구하고 발명가들과 이들의 발명품으로 한몫보려는 죽음의
상인들은 새로운 기관총들을 개발하고 판매하기 위해 노력합니다.
그러나 당시 기관총들이 가진 제한점과 기관총에 대한 군의 탐탁찮은 시선은 어쩔 수가
없었죠.
아직까지 이전 시대의 영향이 남아있던 상황에서 기관총은 어쩌면 비열한 병기에
속했을테니 말입니다.
병기라기보다는 기계 뭉치처럼 보였는데다 그 결과가 병사의 힘과 노력으로 얻어지는
무훈과는 거리가 멀게 보이니 이건 병기가 아냐! 라고 생각하는 고질병이 도졌다고
할까요?
마치 초기의 화포와 포병들이 군인이 아니라 물건과 그걸 다루는 기술자 대접을 받은
것처럼 말입니다.

'그들이 전장에서 우리 전사들을 대적할 수 없게되자 유럽의 기독교인들이 고안한
 무기를 들여왔다.
 이 무기는 여인이라해도 쏘기만하면 전사를 죽일 수 있다.
 저주 받으리라. 어떻게 총을 쏠 수 있단 말인가?'
--맘루크(mamluk, 마믈루크) 이븐 자블

아니 그 당시 비약적으로 발전한 화포와 후장식 라이플에 비해 시원찮게 보였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이런 상황에도 불구하고 기관총이 눈에 띌만한 효과를 거둔 경우가 생겼으니 바로
유럽보다 '덜 문명화된' 지역에서의 전투에서 입니다.
아마도 야만인에게는 고결과는 거리가 먼 흉기를 아낌없이 쓰는 것은 해서 마땅한
일이라고 생각한 덕분이겠죠.
1873년, 아샨티(Ashanti) 침공 당시나 1879년 줄루 전쟁, 1882년의 이집트를 침공한
영국군들같은 제국주의 군대에게 개틀링 건과 같은 기관총들은 새로운 라이플들과
조합될 경우 몰려오는 용맹한 원주민 전사들을 손쉽게 쓰러트릴 수 있는 신병기로
자리잡게 됩니다.
만약 커스터와 250여명의 미군들이 4문의 개틀링 건을 가지고 싯팅 불과 크레이지
호스의 인디언 전사들과 싸웠다면 어떻게 됐을까요?

1840년 2월 5일, 미국 메인주에서 하이럼 스티븐스 맥심(Hiram Stevens Maxim)이
태어납니다.
그는 14세까지 교육받고 그의 삼촌에서 기계에 대해 배운 후, 젊은 기계공으로 사회에
첫발을 내딛게 되며 일생 꽤많은 발명을 하게 됩니다.
쥐덫에서 시작해 기관지염을 앎던 관계로 박하향이 나는 휴대형 홉입기에서 뉴욕을
전기 조명으로 밝힌 최초의 사람이자 전구의 발명특허를 두고 에디슨과 싸우기도
해봤던 사람이죠.
심지어 나중에는 동력 비행(비행기)을 시도해보기도 하며 사람들에게 비행의 즐거움을
느끼게하려 유원지에서 빙빙 돌아가는 비행기 모양의 놀이기구 - Maxim's captive
flying machine도 만들어내죠.
만약 그가 그의 이름을 딴 무기만 만들지 않았다면 그는 그냥 어딘가의 역사에 한줄을
넣는 발명가로 끝났을 겁니다.

1882년, 영국에 적을 두고 있던 맥심은 유럽인들에게서 발명으로 돈을 벌려면 서로
죽이는데 효과적인 물건을 만들면 된다는 충고 아닌 충고하에 사람이 직접 움직여
발사하는 것이 아닌 총이 발사되면 나오는 반동이나 가스의 힘으로 작동되는 자동
총기들을 고안하게 됩니다.

'1882년, 나는 빈에 있에서 알고 있던 미국 친구를 만났다.
 그는 내게 화학이니 전기니 목메달아 버리게나! 돈더미위에 올라 앉고 싶으면
 유럽놈들이 서로를 작살낼 수 있는 그런 물건을 만들라구. 라고 말했다.'
--- 맥심

그리고 1883년 6월, 기관총에 대한 특허를 얻게되며 1884년 켄트주의
크레이포드(Crayford)에 Maxim Gun Company를 창립합니다.

초기형 기관총과 함께.

요 사진은 좀 더 이후에 촬영된, 이 영감님도 말년에 자신의 무기가 사람을 죽인 것에
대해 변호한다고 머리 꽤나 아팠더랬죠.


그 해 10월에 시제품의 시연회를 하게 되며 영국 해군등에 프로팰러나 샤프트축,
철제류등을 팔아 돈을 벌던 알버트 빅커스(Albert Vickers)의 빅커스사(Vickers, Sons
& Company)가 맥심의 총포회사에 돈을 대게 됩니다.
사업은 진행되나 유럽 각국의 군대에서 반응이 썩 좋았던건 아니었습니다.
게다가 운수나쁘게도 경쟁자가 꽤나 독한 친구였다죠.

1873년, 스웨덴에서는 헬게 팔크란츠(Helge Palmcrantz)라는 기술자가 다총신 기관총을
발명합니다.
이 총은 레버를 앞뒤로 움직이면 작동되는 식이었죠.

척 봐도 그닥 편해보이지 않는 물건, 노덴펠트

팔크란츠는 그의 발명품에 대한 제조와 판매 권리를 스웨덴에서 강철사업하던 토스텐
노덴펠트(Thorsten Nordenfelt)에 매각합니다.
곧 팔크란츠의 기관총은 노덴펠트 건으로 불리며 개틀링 건이나 가드너 건(Gardner
gun)과 영국 해군등에 판매되게 되죠. (당시 이들 기관총을 해군에서 꽤 사갑니다.
갑판에 뛰어올라올 적이나 소형 선박등을 상대하기 위해서. 이거 어디서 많이 듣던
소리같은데... 미해군의 Cole호가 생각나는 이유는?)

노덴펠트는 3명이 반드시 필요한 무기였고 분명 맥심에 비해 구세대였죠.


자, 이런 상황에서 빅커스가 뒷돈 대준 듣보잡 맥심사가 업계의 고수들이 경쟁하는데
끼어들었습니다.
가뜩이나 고객들의 반응이 시큰둥해서 장사 안되는 판에 경쟁자가 늘다니 것도 전혀
새로운 것을 들고 말이죠.
특히나 노덴펠드를 위해 일하던 무기 상인 바실 자하로프(Basil Zaharoff)에게 찍혀
버립니다. (자하로프는 악명높은 무기 상인으로 알려졌죠. 무기 팔려고 터키와 그리스
간에 전쟁도 일으키고 보자는 식의.)

이렇게 되자 맥심으로서는 상황이 꽤나 피곤하게 되버립니다.
성능은 그 당시 다른 기관총보다 자신있을 정도로 나았으나 시연회때 장난 친다든지
하는 지저분한 짓도 눈하나 깜짝하지않고 저지를 상대와 싸워야할 판이었으니
말입니다.
뭐 그렇다고 꼭 해결법이 없는건 아닙니다.
1888년, 맥심사와 노덴펠트사는 싸우지 말고 같이 장사하자라는 취지에서 서로 합병,
Maxim - Nordenfelt Guns & Ammunition Company을 설립합니다.

곧 맥심 기관총은 시장에 팔려나갈 본격적인 상태가 됐고 여러 곳에서 시연을 벌이게
됩니다.
1887년 영국에서 시연되고 같은 해에 오스트리아-헝가리 이중제국, 이탈리아, 독일,
러시아와 스위스에서 시연됩니다.
그 다음해에는 미국에서도 시연되게 되죠.
시연에 대한 평은 꽤 좋은 편이 었습니다.
적어도 그 당시의 수동식 기관총들보다 가볍고 작으면서 작동도 비교적 안정적이었죠.

단, 아직까지 군에서 기관총에 대해 확실히 좋은 인상을 가지고 있던건 아닙니다.
이 때쯤이면 어느정도 기관총에 대해서도 관대해지기 마련일건데 여전히 부정적이었죠.
아닌게 아니라 이 때부터 1차대전때 바다로의 레이스가 끝장나고 참호파기
전까지만해도 각국 군대들은 기동과 그 기동을 뒷받침할 능력에 몰두하던 때였고
보병이 들고 다니기에는 둔중하며 방어전에 어울릴 법한데다 그렇다고 포병
장비로보기에는 확실히 아닌터라 그닥 마음에 든건 아니었죠.

이 시기의 맥심은 마티니 헨리 라이플의 45구경 탄약을 사용했으며 반짝이는 인청동제
수냉 재킷에 때에 따라서는 대포들처럼 높다랗고 큰 바퀴가 달린 포가에 얹여져
사용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런 포가는 실전에서 불편하고 위험하다는 것이 알려지며 곧 작은 안장 - 마치
자전거 안장처럼 생긴 - 이 달린 삼각대위에 올려지게 됩니다.

1888년 11월, 시에라 리온에서 처음으로 맥심이 사람을 향해 발사됩니다.
프랜시스 드 윈튼경(Sir Francis de Winton)은 자비로 맥심을 구매해서 가지고 있었고
원주민과의 전투에서 총알의 비를 퍼부어 그들을 굴복시킵니다.

그리고 1893년 11월, 짐바브웨의 2대 부족이자 로디지아로 불릴 바로 그 지역에서
마타벨족(matabele)의 저항이 벌어집니다.
이에 세실 로즈(Cecel Rhodes)는 5정의 맥심과 2문의 경포를 장비한 군대라고 하긴
뭐하고 경비대 정도의 식민지 군을 파견합니다.
이들은 그곳에서 맥심 기관총의 효과를 톡톡히 봤고 특히 개활지에서 몰려오는
집단에게 맥심 기관총이 어떤 일을 할 수 있는지 보여줍니다.
한 접전에서는 4천여명 정도의 원주민 병사들에 대해 4정의 맥심을 가진 50여명의
병사로 맞서 원주민 전사들은 완전히 쓰러트려버렸으니.

Blood thought he knew the native mind
He said you must be firm, but kind.
A mutiny resulted.
I shall never forget the way
That Blood stood upon this awful day
Preserved us all from death.
He stood upon a little mound
Cast his lethargic eyes around,
And said beneath his breath:
'Whatever happens, we have got
 The Maxim Gun, and they have not.'
--- Hilaire Belloc, The Modern Traveller

어찌되었든지 간에 '우리는 맥심 기관총을 가지고 있고 그들은 그렇지 못하다' 는
이야기는 1898년 9월 2일의 옴두르만(Omdurman) 전투(라고 쓰고 학살이라 보면
되는)에서 다시 증명됩니다.
이 때 영국군은 슬슬 맥심 기관총을 구매하여 비록 중대 단위였지만 보병들에게 지급을
하고 있던 때였죠.

그 날 아침 6시경, 160여명의 영국군들은 1만2천여명의 이슬람 전사들과 수많은 기치,
부족장을 태운 군마들이 집결하는걸 지켜봅니다.
한시간 뒤, 10열 종대로 집결한 전사들은 영국군들에게 돌격을 시작했고 영국군 앞
3000야드에 들어서자 영국 포병과 나일강에 있던 포함에서 날아온 포탄이 전사들을
날려버리고 찢어 발겨버립니다.
포격을 뚫고 영국군앞 1천 야드에 들어선 전사들에게 이제 좌우로 선회하며 서로
겹쳐지게 살상지대(killing zone)를 구성한 44정의 맥심이 불을 뿜습니다.
결국 1시간 남짓한 전투에서 4천여명의 전사들이 사상당했고 영국군앞 300야드를
돌파한 전사들은 한명도 없었습니다.

'기관총이 발사되며 총열을 식힐 물이 마를 지경이었다.
 적군의 시체 더미가 수북이 쌓였다.
 총알이 적의 살과 그들의 뼈를 찢고 부수어놓았다.'
--- 중위 윈스턴 처칠, 21창기병대 소속

'사격 중지, 이 얼마나 끔찍한 탄약 낭비인가'
--- 키치너 중장, 1시간 동안의 전투가 끝난 후.

새로운 보병 화기, 탄창장전식 볼트액션 연발총과 기관총


1890년에는 1파운드짜리 포탄을 쏘는 맥심 기관총의 거대화 버젼도 등장합니다.
영국군으로부터 QF Mk.I으로 불린 바로 그 물건으로 60파운드 정도의 무게를 가진
맥심에 비해 410파운드로 거의 7배가량 더 무거웠고 구경도 37mm였죠.
이 거대한 물건은 37x94mm R탄을 사용하며 포탄 내부에 270그래인 정도의 흑색화약이
들어갑니다.

노획된 1파운더 폼폼, 보어전쟁 당시.


오늘날 기준으로는 성능이나 포탄의 능력이 시원찮은 편이지만 등장 당시에는 꽤
괜찮은 수준의 기관포였고 2차 보어전쟁 당시 그 발사음 덕분에 폼폼포(Pom-Pom)라는
별명이 붙게 되죠. (후일 이 폼폼이란 별명은 영국군의 기관포, 특히 고사 기관포에
붙여지는 별명이 됩니다. 2파운드 QF 폼폼처럼 말이죠.)

1899년 6월경, 영국에서 나온 맥심 탑재 차량, (엔진달려있습니다)
웃기지만 얼마 안가 나올 기관총 탑재 차량의 조상쯤은 되겠죠.
하여튼 나쁜건 잘 생각해냅니다.


1895년, 영국군의 신형 탄약인 303구경탄에 맞춰진 맥심 기관총 - Gun, Maxim 303in
Mk.I - 이 영국군앞에서 시연되며 그 다음해인 1896년, 빅커스사가 맥심-노덴펠트사를
인수하게 됩니다.
영국군이 채용한 맥심은 전체 길이 42인치에 5조 우선 강선이 사용된 28인치의 총열,
총 전체가 60파운드의 무게를 가진 물건이었습니다.
250발의 천으로된 탄띠로 급탄되며 분당 400발 이상을 퍼부을 수 있었죠.

빅커스에 만들게된 맥심은 몇몇 나라에 판매되며 여기에는 외국에서 총기를 사오는데
꽤 익숙했던 제정 러시아도 들어있었죠.
이렇게 러시아에 판매된 기관총은 러일 전쟁에서 10여년후 벌어질 악몽과 같은 일의
전조를 보여주게 됩니다.
1904년 8월 1일부터 1905년 1월 2일까지 벌어진 여순 공방전에서 러시아군의 토치카로
돌격한 일본군 병사들이 겪어야 했던 일들이었죠.

8월 7일 여순항으로 들어온 일본군은 청일전쟁때처럼 상황이 쉽게 돌아갈거라 낙관하며
맛뵈기로 외곽에 있던 해발 180m의 2개 고지에 대한 공격을 시작합니다.
이 2개의 고지는 거의 고립되다 시피했고 잘 엄폐된 진지를 가지지는 못했지만 앞에
있는 강때문에 접근이 쉽지 않았고 경사도 급해 올라가기 공격하기 만만한 곳은
아니었습니다.
새벽 4시 반경부터 시작된 공격은 그날 오후 7시까지 진행됐고 일본군은 기관총과
야포의 십자포화에 걸려 예상외로 지지부진한 결과와 많은 사상자를 내게되죠.
다음날, 포병에 의한 사격 - 주로 120mm포 - 가 있은 가운데 보병의 공격이 이뤄지나
이 날도 결과는 시원찮았습니다.
그러나 의지의 노기 마레스케, 병력을 더 밀어넣더니 결국 밤 8시에 고지 하나를
점령하고 다음날 아침에 다른 쪽도 마저 점령합니다.
대신 그에 대한 댓가로 1280명의 일본군이 황천길로 떠납니다.

그나마 이 2개의 고지 점령은 양호했습니다.
8월 13일에 있었던 174 고지에 대한 공격에서 1800여명이 죽은 것도 참을만 한
일이었죠.
비싼 돈이 들어간 크루프사제 11인치 포를 18문 더 가져와서 1천발 이상의 500파운드
포탄을 때려넣은 일도 참을만 했습니다.
원래 공격목표도 아니었는데 하다보니 공식적으로 4천여명 전사, 사상자로 8천,
쏟아넣은 포탄만 만단위를 찍은 203고지 점령에 비한다면 말입니다. (소모된 많은
포탄중 꽤많은 수가 경야포에서 발사된 유산탄이었던 것도 문제긴 합니다. 이건 엄폐물
파괴에는 좀 아니었거든요. 그리고 이건 저 아래에서 괴멸적인 결과로 드러나기도
합니다.)
이 고지에서 일본군은 러시아군의 기관총과 야포의 십자포화로 도배된 살상지역에서
죽어갔고 노기 장군의 아들도 전사하게 되죠.

이 러일전쟁의 교훈은 각국 군대에 나름대로 충격을 주게 됩니다.
그 이전, 발달한 화기앞에 노출된 보병이 얼마나 무력한지 보여줬던 남북전쟁때처럼
잊혀진건 아니었으니까요.
기관총이 쓸만하고 특히 방어전에서는 잘 준비된 상황에서 공격자에게 쓴 맛을 보여줄
수 있다는 점을 각인시킵니다.
곧 기관총들은 이전과 달리 무시당하는 병기에서 가질만한 병기로 자리잡게 됐죠.

그러나 이런 영향이 완전히 옳은 방향으로 간 것은 아니었고 여전히 포병이 적을
쓸어낼 수 있을 것이다라는 믿음도 기관총만큼 강하게 작용합니다.
한마디로 보병의 전진중 걸리적대는 것을 포병이 쓸어버릴 수 있으리라 본 겁니다.
(무전기부터 각종 장비와 기술로 도배한 지금의 군대도 만만하게 생각하지 못할 일을
낙관적으로 바라봤으니 탈이 안나면 이상한 일이겠죠.)
물론 보병들 자체도 어느 한 곳에 정체되기보다는 끊임없이 기동하며 적의 약한 곳을
찔러대야 했기 때문에 들고 다닌다와는 거리가 있던 기관총을 많이 보유할 필요도
없었던거죠.
덕분에 기관총보다 화포쪽이 더욱 더 중요하게 보여졌고 특히 독일군과 같은 경우는
적의 방어거점을 확실히 날려버릴 중포의 준비에 꽤나 공을 들이게 되죠. (이건
1차대전초에 독일군이 가진 화력 우위와 특히 공성 화력의 우위로 그 결실을 보게
됩니다만 그렇다고 베르덩등에서 죽어간 병사들이 살아 돌아올리는 없겠죠.)

이런 와중에 맥심에 대한 권리를 인수한 빅커스사는 19세기의 맥심에 개량을 가해
20세기에 걸맞는 형태로 만듭니다.
이제 포가는 절대로 사용될 일이 없었고 그 동안 여기저기 붙었던 군살을 때냄과
동시에 더 좋은 강철과 알루미늄을 사용함으로 무게를 줄인데다 총구앞에 소염기 겸
부스터를 붙이게 되죠. (맥심은 반동 이용식 총기이며 발사시 총열이 전후로 움직이게
됩니다. 총구 앞에 가스가 반사되는 구조를 붙여두면 총열의 후퇴가 더 빨리 일어나며
그 결과 발사속도가 좀 더 증가되게 되죠.)
이렇게 개선된 맥심은 빅커스 건으로 불리게되며 1912년 11월 26일, 영국군에 제식으로
채용됩니다. (그러나 모든 전투 부대에 빅커스 건이 지급된건 아니었습니다. 항상
그렇지만 돈문제로 인해 여전히 맥심을 가진 곳도 있었고 이건 1914년 BEF의
부대들에서도 마찬가지였죠. 덕분에 1920년대까지 맥심은 빅커스 건이 많이
지급됐음에도 영국군 장비 목록에 자리를 차지합니다.)
동시에 빅커스 기관총은 네델란드, 이탈리아, 스위스, 스페인이나 중남미, 프랑스등에
수출되거나 제안되기도 하죠.

이 시기의 빅커스 기관총은 총자체 무게만 30파운드였고 10 ~ 20파운드 정도 나가던
삼가개나 다른 거치대가 포함됩니다.
급탄은 여전히 250발 탄띠로 이뤄지며 탄띠 1개의 무게가 22파운드정도가 나갔다 하죠.
(상자에 포장되면 25파운드)
다 쓴 탄띠는 야전에서 쉽게 재활용될 수 있었고 - 그저 소총탄을 클립에서 때내 다시
꼽으면 되니 - 반대로 탄띠가 탄대처럼 활용되기도 합니다. (람보처럼...)
탄띠 하나 이상을 연속 사격하게되면 냉각 재킷에 든 7.5핀트(약 4.3리터)의 물이
끓게되며 발생한 수증기는 총앞에 달린 고무관을 통해 물통속으로 떨어집니다.

발사속도는 분당 450발 이상 600발 정도였고 만약 1만발 정도를 쐈다면 총열을
교환하게 됩니다.
총열 교환은 2분에서 3분정도 걸렸다 하죠.

한편 1887년 맥심을 맛본 독일은 1890년부터 4년동안 야전 평가를 거쳐 1895년 육군이,
그 다음해에는 해군이 소량을 사갑니다.
그러다 육군에서는 1898년부터 시범 운용을 위해 부대 투입을 시작하며 1901년
이후부터 배치가 확대되면서 마침내 면허 생산에 대한 권리를 얻게되죠.
그리고 이건 스판다우의 공장 - DWM AG의 Koeniglich - 에서 만들어지게 되죠.
덕분에 MG08이란 정식명칭외에 나중에 영국군등에서 스판다우 건이란 별칭으로도
알려지게 됩니다.

1차대전이 터지고 곧 쌍방은 기관총의 효과를 몸으로 체험하게 됩니다.
아니, 기관총만 아니라 새로운 라이플과 기관총, 포병의 화력이 살상지역에 들어온
보병에게 어떤 일을 하는지 처절하게 경험하게 되죠.
이에 대한 첫 암울한 전조는 벨기에로 들어간 독일군이 경험하게 됩니다.
덜 준비됐고 우왕자왕하던 벨기에군의 방어선에서 잘 준비됐고 그나마 유럽 군대에서는
충실한 공성포를 준비했던 독일군마저도 막상 보병의 손실과 공세의 둔화를 어쩌지는
못합니다.
특히 리에쥬 요새의 전투는 독일군 보병에게는 그리 유쾌한 경험을 제공하지는
못합니다.
다행스럽게도 벨기에는 독일군의 전체 계획내에서 비교적 성공적인 결과를 내놨고
골치아픈 나머지 요새들도 비교적 쉽게 무너졌죠.

그리고 전투가 프랑스와의 국경지역으로 옮겨지며 양측은 새롭게 갱신된 전쟁의
물리력을 몸으로 때워야할 처지에 이르게 되죠.
한편 영국 원정군 역시도 몽스 전투에서 독일군 보병들에게 정확한 소총과 기관총으로
구성된 보병 화력을 선물했고 독일군은 이에 대한 답례로 포격을 선물하게 되죠.

이 때까지 결과에서 지휘관들이 뭔가를 얻어냈으면 좋았겠지만 불행하게도 아직은
여전히 낙관적이었습니다.
지금 상황이 비록 개판이지만 언젠가는 포병의 엄호하에 공격 정신으로 무장하고
포화를 무릅쓰며 전진하여 보병 전투의 꽃인 총검 돌격까지 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본것이죠.

그러나 1914년 9월 마른강에서의 전투와 그 후 벌어진 슈맹 데 담 부근에서의 교착
상태가 벌어지면서 참호전의 전주곡은 시작됩니다.
독일군은 영국군을 엔강 너머로 쫒아낼 수 없었고 영국군도 독일군을 몰아내지 못했죠.
서로가 서로의 화력에 돈좌되어 참호속에 - 그나마 독일군은 물이라도 덜나왔지만 -
갖혀 무익한 공방만을 계속하게 된 것이죠.

물론 이 기간중 바다로의 경주라 불리는 서로의 틈을 치는 기동전이 전개되게 되지만
이것도 참호선이 확장되면서 끝장나버립니다.
이제 참호와 참호 사이의 무인지대에 누가 얼마만한 병력을 집어넣어 최악의 결과를
만들 것이냐만 결정하면 될 상황이 된거죠.

이제 기관총은 중요한 화기로 자리 잡게 됩니다.
전선에서는 보통 6명 또는 8명으로 구성된 기관총반이 살인마로 떠올랐죠. (사수 1명 +
급탄과 운반을 책임질 부사수 1명, 관측등을 담당하는 반장, 나머지는 탄약수 겸
소총수)
덕분에 기관총을 빨리 도입하고 써먹어도 봤지만 기관총 확보에는 늦었던터라 전쟁직전
보병 대대당 2정의 기관총을 장비한 영국군마저도 서둘러 기관총을 확보할 지경에
이릅니다.
아예 1914년 11월에는 기관총으로 무장되며 여기에 모터사이클로 기동성을 확보하려한
Motor Machine Gun Service (MMGS)가 만들어지기도 하죠. (그런데 이게 보병이 아니라
Royal Artillery의 감독을 받았다는게 좀 뭐합니다.)
그리고 다음 해에는 포병이 아닌 보병에 직접 지원되는 기관총부대(Machine Gun Corp,
MGM)도 만들어지며 아예 이들을 위한 기관총 학교까지 프랑스에 만들어집니다.

한편 이 시기, 연합군측에서는 그 동안 경험했던 것과 이론을 살려 포병의 지원 방식을
더욱 세심하게 배분하게 됩니다.
포격은 크게 3개로 나눠지게 되어 적의 참호선과 철조망을 파괴할 사격과 적의 증원을
막을 차단 사격, 아군의 전진에 맞춰 적이 참호밖으로 고개를 내밀지 못하게할 탄막
사격으로 나눠지게 되죠.
특히 아군의 전진에 맞춘 탄막의 이동 사격은 꽤 강하게 기대됩니다.

그러나 이 기대는 무참하게 박살납니다.
대전중 기관총과 소총으로 구성된 보병 화력이 최대의 결과를 만들어내는 전투들이
1915년 춘계 공세 당시에 벌어졌으니까요.
뇌브 샤펠, 이프르, 오베르나 루스같은 이름은 영국군에게 대대 전멸, 전투 한번에
5천명 이상 사망과 같은 결과를 선물하죠.
그것도 전투 개시 몇시간안에 말입니다.
더 나쁜건 이 짓거리가 일치감치 포기됐으면 좋았겠지만 더욱 발전된 형태로 1916년
솜에서까지 고대로 이어졌다는 점일 겁니다.
게다가 작전의 주체인 영국군은 프랑스군처럼 소부대를 분할하고 부대간에 서로 엄호를
해주며 돌격하는 방식이 아니라 연대나 대대를 횡대로 늘어선 대열로 내보낸다는
생각을 했던거죠.

1916년 전반기 내내, 영국군은 솜 전선 배후에 대량의 보급품과 운송로, 철도선과
주둔지, 병원등을 준비합니다.
준비의 압권은 290만발 이상이 축척된 포탄이었죠.
이 포탄들은 1주동안 독일군 지역에 맹포격을 가해 참호선과 철조망, 이동로와 병력
집결지따위를 걷어내며 차단하며 공격 당일 보병이 걸어갈 수 있게 보병과 같이
이동하는 탄막 사격에 동원될 예정이었습니다.
적의 방어선은 무너지고 적은 그 속에 파묻힐 것이며 철모장 따위는 포화에 모조리
날아가 보병은 그저 걸어가서 적이 있었던 참호에 들어서서 방어를 굳히면 된다라고
본거죠.
포병은 정복하고 보병은 공격한다 라는 말을 이번에는 진짜로 실현해보일 것이다라고
본겁니다.

그러나 이 계획 자체가 애초에 지나친 낙관이었다는건 공격이 진행된 7월 1일에 바로
나타나게 됩니다.
그 엄청난 포격에도 불구하고 독일군의 참호선을 완전히 사라지게 만들만한 중포탄들은
많이 사용되지도 못했고 효과가 과장됐던 유산탄은 철조망을 없에는데 큰 역활을
하지도 못합니다.
효과를 떨어트린 것중에는 신관 문제도 결합되어져 있었죠.
당시에는 괜찮은 성능의 순발신관이 없던터라 포탄중에는 그저 진창투성이의 땅에
쳐박힌 채 불발되고 끝난 경우도 있었다하니. (덕분에 이런 전적지에서는 요
최근까지도 불발탄이 발굴되는 상황입니다.)
상황을 더욱 나쁘게 만든건 보병과 이동할 탄막은 보병을 잃어버리기 십상이었다는
겁니다.
보병이 사전에 지시된 곳을 지나간다면 몰라도 포탄이 터지는걸 볼 수 없는
포병으로서는 제대로 포격이 효과를 발휘하는지 알 수 없었고 보병 역시도 포병의
포화가 어딘가를 때린다는 계획은 들었지만 어느정도 효과적인 포격이 이뤄지는지는
알지 못했죠.
게다가 그 당시에는 단위 면적단 하루종일 엄청난 양이 퍼부어졌다고 생각된 포탄이 그
후의 전쟁에서는 시간 단위로 소모됐다는 점을 본다면 낙관이 컸던 겁니다.
아니 차라리 몰라서 그랬다고 해두는게 더 나으려나요.

결국 그날, 역시나 병사들은 분단위로 수백명이 죽어나갑니다.
대대 하나가 거덜나고 500여명이 죽는데 1시간도 안걸린데다 막상 겨우겨우 살아남은
자들이 목표를 점령해도 독일군의 역습에 당하거나 겨우 간신히 끊어진 보급하에서
전투를 치뤄야만 했죠.

독일군 기관총팀, 보통 여기에 소총수 2명 정도가 더 붙게 됩니다.
탄약수는 많을수록 더좋으니.


이런 참상은 그 후로도 더 진행됐고 양측은 사이좋게 삽집을 해대며 병사들은
무인지대의 시체더미로 만들어버렸죠.

'1916년 8월, 100th MGC 소속 중대는 그들이 가진 10정의 빅커스 기관총을 12시간동안
 쏴댔다.
 그 날 백만발이 발사됐고 100개의 총열이 사용됐으며 그 중 부숴진건 1개도 없었다.'
-- Ian V. Hogg, 포클랜드 구스그린에서 2정의 L7이 수천발을 쏴대기 전에 있었던
   전설과 같은 일.

전쟁중 빅커스 기관총은 곧잘 보병의 등뒤에 올려져 전선으로 이동됩니다.
이전보다 가벼워졌다곤 하지만 6명에서 8명으로 구성된 기관총팀은 자신의 군장외에
기관총과 삼각대, 예비탄통, 여분의 냉각수와 마대자루를 휴대한 채, 널판지가
아슬아슬하게 걸쳐진 진창속을 걸어가야 했으며 이건 꽤 고역이었답니다. (마대 자루는
총좌를 만들고 기관총을 고정할 모래 주머니를 만들기위한 필수품이었죠.)
그나마 모터 사이클등의 지원을 받는 경우는 다행이지만 가공할 진창은 이마저도 더
힘겹게 만들기도 했다하죠.

전투에서 사수들은 이른바 2인치 탭이란 사격법을 만들게 됩니다.
방아쇠를 계속 잡아 당긴 채로 총을 좌우로 휘두르는게 아니라 2인치정도 좌나 우로
움직일 동안 쏘고 끊고 다시 2인치 움직이며 쏘고 끊고를 반복하는 식의 사격법이었죠.
(이렇게 하면 사람이 질주할 때만큼의 공간을 총알로 도배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 더해 이들은 사거리표도 사용하게 됩니다.
주변의 지형 지물중 눈에 띄는 것을 기준으로 삼아 사격 구역과 주사격 방향, 사격시
비교사항등을 적어둔 표 혹은 원판을 기관총 진지에 두고 이걸 참고삼아 그 부근에
뭔가 얼쩡대면 쏴버리는 것이었죠. (이 방법은 지금도 군에서 여전히 아주 잘
사용중입니다. 각종 공용화기의 사거리표와 사계 잡는 것이 바로 이 시대에 자리잡은
방식이니 말입니다.)
게다가 이런 식의 사격은 소총으로는 쏘기 힘든 먼거리의 적을 상대하는데 곧잘
사용되기도 합니다.
마치 포병처럼 간접적인 사격 방식까지 쓰게된거죠. (영국군만 쓴 것처럼 했지만 다른
군대에서도 이런 방법을 곧 고안해 써먹습니다. 원래 나쁜건 빨리 배우죠.)

더하여 적의 대열에 대해 앞과 뒤를 먼저 조지고 나머지를 소탕하듯이 쏴버리거나
2정의 기관총을 상황에 따라 다르게 교차시키는 각종 기법들이 등장합니다.
요즘 기관총 사수들이 배우는 것중 꽤많은 것들이 이미 이 시대에 얻어진 셈이죠.

이런 와중에 맥심외에 다른 기관총들도 더 등장합니다.
이중 주목할만한 것은 좀 더 가벼워지고 보병에게 친숙해져서 방어만 아니라
공격중에도 휴대되어져 동료 보병들을 지원하는 역활을 하는 경기관총(light machine
gun)의 등장이었죠.

특히 루이스 기관총(Lewis Gun)을 가진 연합군, 특히 영국군에서 이 경기관총에 대한
의존은 상당히 커집니다.
단적으로 1916년쯤되면 빅커스 기관총은 그냥 기관총이 아니라 중기관총(heavy machine
gun)으로 구분되며 보병의 소부대에서 제외되며 그 자리를 루이스 기관총이 자리잡게
됩니다.
이렇게 보병에게서 빠져나온 빅커스 기관총은 기관총부대에 배속되어 거기서
중기관총(medium machine gun)으로 구분되며 사용되게 되죠.

한편 맥심을 사가서 MG08을 만들었던 독일군은 1914년 8월 기준으로 다른 나라들보다 2
~ 3배이상이던 1만2천정 정도의 MG08을 준비한 상태였고 이건 참호전이 시작되면서 꽤
괜찮은 결과를 보게 됩니다.
무엇보다 돌격하는 수백명의 카키색 대열이 위치를 잘잡은 MG08 팀에 의해 짧은
시간안에 거덜나는걸 봤으니 어련하겠냐만은 말입니다. (청회색 대열은 나름 그런
경험을 해본터라 1915년 넘어서면 좀 더 약은 방법으로 응수하죠.)
그러나 그들 역시도 상대방이 지키고 있는 참호로 갈 때는 기관총의 눈을 피해갈 수
없다는 것을 몸으로 체험하게 되죠.

독일이 쓴 MG08도 1915년에 빅커스 기관총처럼 총구앞에 부스터를 달게 됩니다.
덕분에 발사속도가 40%이상 더 증가했죠. (분당 450발에서 600발 선으로)

그러나 처음 지급될 때부터 달려있던 썰매모양의 거치대 겸 운반가 - Schlitten 08 -
는 고역의 상징이 되버립니다.

보기에는 그럴듯한데 끌고 다니려면 고역,
그렇다고 가벼우면 것도 탈. 이놈의 거치대란...


이건 빅커스의 총구 부분, 부스터가 들어가며 독특한 형태가 잡히게 되죠.


총 자체만 26.5kg이었고 여기에 4리터의 냉각수가 들어가면 거의 30kg이 됐는데 저
놈의 운반가는 지 혼자만으로 32kg이었으니 말입니다.
여기에 2개의 예비 총열과 2개의 예비 노리쇠 뭉치를 휴대하고 예비탄통을 휴대하면
독일군 기관총팀 역시나 피곤하긴 마찬가지였던거죠.

그래서 독일군은 MG08을 더 가볍게 만들기위한 작업에 착수합니다.
1915년, 메르카츠 대령(Friedrich von Merkatz)이 이끄는 개발팀은 양각대와 개머리판,
피스톨 그립이 달린 MG08의 개량형을 내놨고 이건 곧 MG08/15로 채택됩니다.

무게가 18kg으로 가벼워졌고 4명의 보병만 있으면 충분히 써먹을 수 있었죠. (사수 1 +
부사수 1 + 탄약 수 겸 소총수 2)
단, MG08처럼 긴 지속 사격은 하기 어려웠고 무겁지만 튼실한 거치대 덕분에 반동
영향을 거의 안받고 2천미터 이상의 목표에 대해서도 간접 사격식으로 쏴대던 MG08에
대해 사거리가 확실히 짧아져버리죠.

어쩌건 MG08/15는 본격적으로 생산이 시작되어되며 1917년 4월의 프랑스군 공세에 대해
본격적으로 사용됩니다.
그리고 여기서 꽤 좋은 결과를 얻어내자 곧 MG08/15는 더 많인 만들어져 경기관총
역활까지 겸하게 됩니다. (단, 독일군이 경기관총이란 면에서 아주 만족스러워한건
아니었습니다.)
이런 이유로 1918년 독일군 보병 중대에는 6정의 MG08/15가 지급되어져 있었죠.

한편 MG08도 썰매 모양의 거치대 대신에 1916년부터는 좀 더 가벼운 삼각대(Dreifuss
16)에 올려지기도 합니다.
재미있는건 벨기에나 러시아군에서 노획된 맥심들도 약간의 개조를 거쳐 이 삼각대위에
올려졌다고 하죠.

1918년, 전쟁끝 판에 2개의 MG08 변형이 등장합니다.
하나는 공냉식화된 MG08/15로 MG08/18이라 불립니다.

그런데 이건 MG08/15보다 겨우 1kg정도 더 가벼웠고 묵직한 총열을 교환하는 것도
불편했다 하죠.

다른 하나는 13mm 탕크 게베어(Tank Gewehr)의 탄을 쓰는 대형화 버젼으로
대전차-대공용으로 쓸 생각을 하죠.
바로 TuF(Tank und Flieger)입니다.

그런데 이 TuF는 소수만 만들어지고 전쟁 끝나버립니다.
대신 이 TuF 와 그 탄약을 본 미군이 브라우닝 설계를 바탕으로 50구경 중기관총과 그
탄약을 개발할 때 참고하게 되죠.
그 결과는 지금도 사용중인 걸작 M2 중기관총입니다.

한편 맥심 패밀리들은 이제 공중으로도 날아오릅니다.
정찰기 수준이던 항공기가 공중전에서 권총, 소총, 수류탄이나 벽돌, 빈병 따위를 주고
받더니 기관총을 장비하고 더욱 본격적인 전투기로 거듭나면서 이미 성능을 입증한
맥심 패밀리들이 항공기의 무장이 되는건 자연스러운 일일 겁니다. (그러나 고장이
나는 경우가 꽤 있었고 그래서 이 때 조종사들은 기관총 수리를 위한 특별한 공구 -
나무망치 - 따위를 준비합니다. 총이 막히면 두들겨 패기위해서.)

빅커스 기관총은 1916년에 비록 루이스보다는 무겁지만 탄띠 급탄이란 점을 높이
평가받으며 연합군의 항공기에 장착됩니다.

항공기용 빅커스,
저 모자 마킹은 저 사람이 에디 리켄베커임을 알려주죠.


또한 루이스 기관총보다 프로팰러와 동기화시키기도 좋아 캐멀(Sopwith Camel)이나
스패드(SPAD XIII)같은 유명한 전투기에 2정씩 탑재되게 되죠. (그리고 이 빅커스건의
항공기 탑재는 1930년대초까지도 이뤄지게 됩니다. 그러다 더 발사속도가 빠른
브라우닝으로 변경되죠. 참고로 2차대전중 영국 폭격기등에 사용된 Vickers K는 빅커스
기관총과는 거의 다른 총기입니다.)
단, 공중에서 무겁고 관리가 힘든 물을 수냉재킷에서 말끔히 비워집니다.
그저 빈 통으로 놔둬도 비행중 불어오는 바람 덕분에 충분히 식혀졌으니까요.

독일 항공기들 역시도 MG08/15가 나오던 1915년에 개발된 공냉식 LMG08/15를 사용하게
됩니다. (LMG의 L은 Luftgekuehlt로 air cooled와 같은 의미입니다.)
이건 특징적인 구멍이 난 빈 냉각 재킷이 사용됩니다.

1916년부터 전선에 등장한 LMG08/15는 맥심에서 출발한 파라벨룸 기관총(Parabellum
MG14)과 함께 독일 항공기의 주력 무장으로 사용되죠.

전쟁이 끝나고 영국군은 빅커스 기관총을 기관총 부대에서 다시 보병부대로 돌려
줍니다.
그러면서 이걸 대신할 새로운 기관총을 찾게되죠.
유력한 후보로는 체코에서 만들어진 베사(Besa)였고 마침 이건 전차 부대에서 채용을
하고 있었죠.
그러나 막상 2차대전이 벌어지자 영국은 빅커스 기관총을 그냥 그대로 계속 사용하게
되고 전쟁이 끝난후 채택된 신형 다목적 기관총 L7(FN MAG)이 들어온 이후인 1960년대
말까지도 써먹게 되죠.
아덴 사태(Aden Emergency)때 빅커스가 사용된 적이 있었으니 말입니다.

한편 독일의 경우 대전중 보여준 MG08과 기관총의 위력에 만족감을 표시합니다.
그러나 대전중 경기관총을 가지는데 실패했던 일이 내심 걸렸고 결국 그들은 2차대전이
벌어지기 전, 필요에 따라 중기관총과 경기관총을 넘나들 수 있는
다목적기관총(GPMG)를 만들게 됩니다.
훌륭한 MG34와 걸출한 MG42를 말입니다.
그러나 이들조차도 늘어나는 기관총 수요를 완전히 감당하진 못했고 덕분에 창고속에
보관됐던 예비무기인 MG08이 다시 꺼내지기도 하죠. (Asch 시리즈로 알려진 한스
키르스트의 소설 제목이기도 한 NullAchtFunfzehn, 08/15 는 독일군에서는 고참병
내지는 노병에 대한 별명이기도 했죠. 나쁜 뜻으로 지루하고 고루한 영감탱이같은 일에
대한 속어였기도 했다곤 하죠.)


빅커스와 MG08외에 또 하나 중요한 맥심 패밀리가 있죠.
바로 러시아-소련의 PM1910입니다.

1890년대 들어서 영국에서 맥심을 좀 사온 러시아군은 러일전쟁에서 그정도 양으로도
꽤 만족스러운 결과를 맛봅니다. (물론 전쟁에서는 졌지만요)
덕분에 전쟁이 끝나던 1905년에 툴라에서 자신들에 맞춘 맥심 - Pulemyot Maxima 1905
- 을 생산하게 되죠.
이 때만해도 러시아의 맥심은 청동제 수냉식 재킷을 가진, 한마디로 영국제 맥심과
크게 틀릴게 없던 그런 물건이었죠.

그러다 1910년, 청동제이던 수냉 재킷을 강철제로 바꿨는데다 급탄기구가 좀 더 개선된
PM1910이 등장합니다.
이 PM1910은 좀 더 시간이 지나자 냉각 재킷에 주름이 생기더니 다른 곳의 맥심보다 더
큰 냉각수 투입구가 달리게 됩니다.
겨울에 물이 얼음이 되던 러시아에선 눈이라도 퍼넣어야할 판이니 냉각수 투입구를
크게 키울 수 밖에요.
여기에 바퀴가 달린 소콜로프(Sokolov) 총가가 사용됩니다. (필요하면 여기에 방패도
추가되죠.)

그 후, PM1910은 1차대전과 적백 내전 내내 사용되고 1920년대에도 살아남아 소련군의
주력 기관총으로 자리를 차지하게 됩니다.
그러나 맥심의 크고 무거운건 덩치가 그리 마음에 들지 않았던지 중간에 맥심을
베이스로한 2종의 경량화 버젼이 등장하게 되죠.
하나는 토카레프가 설계한 MT이고 다른 하나는 콜레스니코프(Kolesnikov)가 설계한
MK입니다.
그런데 둘다 사실상 그리 성공적이진 못합니다.
MT가 그나마 살아남아 스페인 내전등에 보내지긴 하지만 소련군은 다른 경기관총 DP 에
눈을 돌려버리죠.

퍼레이드중인 맥심 기관총의 대공형 버젼. 트럭은 GAZ AAA


그러다 2차대전이 터지면 M1910은 소련군에서 계속 사용되게 됩니다.

소련 해군의 대공용 맥심, 해군 보병이 끌고다니는 사진을 못구해서... 대신.


고류노프 SG43이 나왔어도 살아남아 전쟁 끝을 본 물건들이 있었으니 말입니다.
그리고 전쟁이 끝난후 M1910은 소련이 지원한 다른 국가들에도 보내지며 중국과 북한도
여기에 속하죠.
덕분에 전쟁후 맥심 패밀리를 꽤 오랫동안 쓴 곳으로 남게 됩니다.


p.s:
하이람 맥심의 아들인 Hiram Percy Maxim도 발명가였죠.
그는 1908년에는 총성을 줄여주는 소음기(silencer, supplessor란 단어도 쓰죠.)를
만들었기도 하고 이 소음기를 엔진의 배기구에 꼽아 자동차를 조용하게 만들었기도
합니다.
그외 자동차에 관한 발명이나 무엇보다 ARRL(American Radio Relay League)의 설립에
큰 역활을 하기도 했죠.


p.s:
프로팰러와 연동된 기관총(synchronized gun)의 원리를 간단하게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총의 진짜 방아쇠에는 2개의 연결부가 붙여집니다.
   하나는 조종석의 사격 레버고 다른 하나는 프로팰러 축에 나있는 톱니바퀴쪽이죠.
   그리고 이 2개의 연결부가 동시에 방아쇠를 당겨야 발사됩니다.

2. 조종석에서 사격을 위해 레버를 잡아당기면 총의 방아쇠가 당겨지긴 합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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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더롤링어… 10-12-04 09:05
   
개틀링을 첨만든 사람은 이게 있으면 전쟁이 없어질꺼다 라고 생각하고 만들었다죠..
     
아스트라페 10-12-05 14:23
   
더 심각해졌죠 ㅇㅅㅇ
아브니르 10-12-04 17:35
   
오~ 잘보고 갑니다~
싸대기 10-12-07 17:26
   
워 지식글 잘 배우고 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