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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4-09-19 05:28
[밀리역사] 임진왜란 초기 참패 이유
 글쓴이 : Ostmeer
조회 : 6,891  

마지막 대목, 매우 씁쓸하군요.


임란 전 조총의 존재도 이미 알고도 있었고, 그것도 왜구가 바친 조총마저도 개무시하는 등...


지피지기면 백전백승이라 했건만, 조선 정부가 함부로 적을 무시한 행위가 정말 기가 막힙니다.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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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안무치 14-09-19 08:20
   
그렇죠 참 씁쓸하죠.... 임진왜란 전까지만해도 경제적으로 문화적으로 황금기를 달리고 있던 시대였는데
전쟁은 이겼지만 조선은 폭망하고 왜는 약탈과 노예무역,도자기로 엄청난 경제적 부흥을 이루었으니
왜는 이전쟁으로 메이지유신으로까지 이어지는데 단초를 제공했다고 까지 할 정도로
엄청난 이득을 보게된다고 하니 진심 열받죠
     
Ostmeer 14-09-19 21:42
   
어익후야...

동영상 제목을 그대로 퍼올렸는데 이렇게 댓글 달릴 줄 몰랐습니다.
          
박애주의 14-09-20 01:02
   
동영상을 다 안봐서 모르지만 동영상보기도 전에 화면 떡! 하니 삼단사법이라고 나오네요. 대충보니 역사스페셜 같은데...너무 옛날거라 그런 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삼단사법은 일단 요즘 학자들 대부분이 당시 존재했는지에 대해 의문을 품고 있습니다.

삼단사법 이야기가 처음 나오는 건 에도막부 시대의 소설인 '노부나가기' 에서 처음 나오며 우리나라에 그 이야기가 들어오게 된 것 역시 학자들이나 학문적인 연구결과에 의해서가 아니라 당시 대망이라는 소설등에 의해서 등장한 것을 보고 전해졌습니다.(한마디로 전혀 근거가 없다는 소리)

추가로 나선정벌을 할 당시 조선측 기록에 의하면 조선 포수는 조총으로 4발중 1발을 맞출 정도로 사격 실력이 굉장히 뛰어나다고 했습니다.

이게 잘쏜거야? 라고 생각하실 수 있는데 당시 청나라군은 이런 조선군 포수의 실력을 보며 부러워했고 나선정벌 당시 러시아군은 조선군을 두려워했을 정도였습니다. 이것만 봐도 당시 조총이란 게 얼마나 후진 무기인지 알 수 있죠.

생각해보면 조총이 쏜다고 다 맞는다는 신립의 말도 틀린 건 아닙니다. 다만 조총을 어떻게 전술적으로 운용하느냐 이런 걸 생각하지 않았던 게 큰 실수겠죠.

아 그리고 게시물에 올리신 영상은 꾀 오래전 방영분 같은데 지금 다시 같은 주제로 내보낸다고 하면 많이 수정해서 내보내야 할 것 같습니다. 신립은 지형이나 전술적인 문제가 가장 컸죠. 조총의 위력이 아니라..
오리발톱 14-09-19 08:40
   
그런데 사실 조선에서 일본의 침공을 완전히 예측못했던 건 아니라고 합니다. 성을 수리하기도 하고 지휘관들을 교체하기도 했죠. 이순신 장군이 고속승진 하면서 전라좌수사로 부임할 수 있었던 것도 그런 노력의 일환이었습니다. 문제는 그 침공의 강도를 이전에 있었던 왜구의 난동인 삼포왜란이나 을묘왜변 수준으로 생각했다는 거였고, 16만 폭탄드랍이 떨어질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죠.
참치 14-09-19 09:30
   
당시 조총은 강선이 없는 총이라 명중률이 형편없었습니다, 당연히 활을 잘 사용하던 조선에서는 무시하던 물건임..

그런데, 조총은 원거리가 아니라 근거리에서 무시무시한 힘을 발휘했죠.  시대착오적인 전술과 전략이 나라꼬라지를 어떻게 만들어놓는 지 보여주는 예임.

국방력 안 키우고, 누군가 도와주겠지 라는 생각에 멍때리고 있으면, 역사는 반복할 뿐이죠.
     
디노 14-09-19 09:58
   
조총이 명중률이 형편없다니 무시하는 건 저 당시나 님이나 똑 같네요...
위 동영상에서 50미터 거리의 목각인형을 정확히 맞추는 것 안 보이나요...
조총은 단점이 많은 총이기는 했지만 어느 정도 숙련되느냐에 따라 위력이 상당히 달라지는 무기였어요.
임진왜란 후, 우리가 조총부대로 무장하고 만주족과 싸웠을 때, 만주족 기병한테 패했어요...
신립 장군이 진 것은 뻘 밭에서 싸우는 바람에 말들이 제대로 움직여주지 못한 때문이었어요.
조총은 한 번 쏘고 나면 연기가 자욱하게 되는데, 시야가 가려져 근접전에 유리한 것만도 아니었어요. 많은 연기때문에 말들의 움직임이 잘 안 보여 기병에 약하기도 하고요...
          
참치 14-09-19 21:20
   
ㅎㅎㅎㅎ 이건 기본 상식입니다. 대꾸하기가 미안하네요.

예전에도 이와 비슷한 주장을 했던 분이 있었는데...  음...

아무튼, 아무리 연습을 해도 50미터가 한계입니다. 실제론 이보다 나빠요. 명중률이 들쑥날쑥 합니다. 강선총이 아니니 어쩔 수 없는 겁니다.

조총 명중률이 좋다고 무시하지 말라고 하시더니, 밑에가서는 조총때문에 전투에 졌다고 말하시네요.

당시 조총은 분명 완벽한 무기는 아닙니다. 단점을 보안하고 강점을 살리는 전술이 필연적인데 이것을 제대로 연구하고 적용하지 않아 패한 것이죠.
               
디노 14-09-20 00:46
   
글도 제대로 못읽으니 나 또한 대꾸하기가 귀찮을 정도네요...

무사하지 말라고 하고, 우리가 패했다고 한 건 숙련도의 차이를 말한 거잖아요...

그리고 자꾸 강선이야기를 하는데, 그거야 19세기 중반에 만들어진 것이니 당연히
저 당시에는 없죠...저 당시 혹은 조선의 조종 수준만 가지고 얘기 하세요...
                    
참치 14-09-20 02:38
   
기마대에 패한 것은 숙련도 차이가아니라. 전술과 운용문제가 크고요. 조총이 근접전에서만 유리한 것은 변함이 없습니다. 숙련도를 높인다고 해서 조총에 강선이 생겨나는 것은 아닙니다. 50미터 밖에서는 큰 의가 없어요.

더이상 대꾸하지 않겠습니다. 귀찮습니다. 콩이든 죽이든 마음대로 하세요.
                         
디노 14-09-20 02:59
   
50미터 바깥에서는 효력이 없는 거 누가 모르나요...
님 이야기는 50미터 이내, 강선 두가지 뿐이네요...
총의 성능이 그거 두가지면 설명 끝인가 보네....
제대로 아는 것은 없는데 말 참 재수없게 하네요...
 
나도 님 같은 사람과는 더이상 말 섞기가 싫네요...
토막 14-09-19 09:39
   
조총때문에 졌다는건.
그저 전투에 패한 장수의 변명일 뿐이라는 말은 본적이 있는데요.

조총과 활의 싸움에서 활이 절대 꿀리는 무기가 아닙니다.
조총은 근접거리에서 위력과 명중률이 좋지만.
활은 사거리와 연사가 월등하죠.

일본이 조총을 중요시 한건 일본활이 워낙 구리기 때문입니다.
딱보면 아실겁니다. 크기만 디립다큰 대나무활이요. 크기는 큰데 사거리도 짧고 위력도 형편없죠.

이에 반해 조선은 세계최고급 활을 보유하고 있는 나라죠.
특별히 조총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개인화기는 활을 쓰고 대신 화포를 발달 시켰죠.
     
참치 14-09-19 09:51
   
위에도 말했지만, 원거리싸움에서 진것이 아닙니다. 조총때문에 근거리싸움에서 밀렸어요.

조총상대로 백병전은 불리하죠. 덕분에 조선은  활만 쏴대며, 후퇴만 반복... 수성전 하다가 골로갔음요.

게다가 조총은 3일만 배워도 얼추 쏘지만, 활은 훈련시간도 길고 개인역량에 따라 성능이 좌우되어서, 숙달된 사수가 죽으면, 전력이 크게 위축됩니다.

...여담입니다만, 당시 조선의 활은 확실히 세계최강이었습니다.  그러나, 동시대에 다른 나라들은 활을 버리고 신무기로 갈아탄지 오래죠. 가장 비슷한 무기로 석궁을 쓰기도 했는데, ㅎㅎ 철을 덧대서 만든 석궁이 활보다 더 효율적이고 위력도 강했습니다.

석궁은 활과 비교대상이 아니니 조선의 활이 최강이었다는 것이지, 당시 원거리 무기중에 최강이라는 것은 아님요.ㅋㅋ 이것도 시대착오적인 무기라는 거죠.
          
디노 14-09-19 10:08
   
조총이 3일만 배워도 얼추 쏜다고요?
조총만큼 숙련도를 요하는 무기가 없어요....
그래서 조선 후기에는 조총을 발사하는 14단계 과정을 노래로 만들어 부르면서 반복훈련을 했을 정도에요...
조선시대의 능숙한 사냥꾼들 조차도 총구를 밑으로 숙여서 탄환이 흘러내린다든지,
화약통이 잘못 오작동해 손목이 날아간다든지 하는 사고들이 숱했어요...
3일만 해서 전쟁에서 절대 못 써 먹습니다.
               
푸른하늘3 14-09-19 15:12
   
분명한건  조총의 숙련도보다 활의 숙련도가 훨씬 어렵단 겁니다. 그리고 일본의 활은 쓰레기 수준이었죠. 그래서 더더욱 장거리 무기로 그들에겐 조총이 필요했겠고  전국시대 겪으면서  검술뿐 아니라 조총 전술이나 기술이 더 발전한거지요.

사실 칼보다 총이 배우긴 쉬워요.  군대 가보시면 아시겠지만  훈련소 때부터 몇일이면 영점 잡고 총구위에 바둑알 올려두고 총 쏴도 바둑알 안 떨어지고 표적도 명중시킵니다 ^^  몇번만 다루면 원거리 장거리 표적 사격훈련도 잘 맞히게 되구요..

아 물론 조총과 요즘의 k2 같은 총과 비교하긴 어렵고 조총이 후진 고대의 총이니 배우는게 요즘 총보다 까다로운건 맞지만 활은 훨씬 배우기 어렵죠.

칼도 마찬가지.  아무리 예리한 칼이라도  대나무 베는거 숙련안되면 어렵죠. 총보다 배우기 다루기 더 어려워요

아 물론 저때 사람들은 기본지식이 부족하고 조총이 생소한 신무기라  관리나 부품결함등 사고도 많았고 힘들긴했겠지만요
               
참치 14-09-19 21:03
   
ㅎㅎ 푸른님이 K2와 비교하셨지만, 조총이란 건 불만 땡기면 나가는 겁니다.

50미터 과녁이 총으로 조준하면 얼마나 가까운 거린지 아십니까? 조준사격 훈련은 명중률을 높이는 것일뿐 기능작동 훈련은 몇시간이면 배웁니다.

장약넣고 탄환넣고 심지꽂고 불붙이고.. 고도의 집중과 연습으로 실패를 좌우하는 기술이 아니라, 단순히 숙달되지 않으면 장전속도만 늦을 뿐 기능에는 문제 없는 기술이죠.

숙지와 숙달의 개념을 혼동하신 것 같습니다. 탄환 흘러내리는 것에 유의하는 것은 생각하는 것으로 방지됩니다. 기본적은 발사기능과 단거리 사격능력은 3일이면 차고 넘쳐요.

그렇기 때문에 조총의 훈련은 사격보다 장전속도 높이는 것에 치중되어 있었습니다.
                    
디노 14-09-20 00:41
   
정말 말도 안되는 소리 하고 있네요..
조총이 그렇게 배우기 쉬우면 왜 병인양요 때 병사들한테 급히 총쏘는 법 가르쳐서 데려가지 왜 숙련된 사냥꾼들을 동원했겠어요?
총이란 건 쏘는 건 누구나 쉽게 배워서 할 수 있을지 몰라도
제대로 활약할 정도의 포수는 몇 년을 훈련해도 양성되기 힘들었어요...
                         
참치 14-09-20 01:48
   
님 답답한 말씀은 역대 최대급 등극이네요.

숙련된 사냥꾼 있으면 먼저 써먹는 것이죠.  조총사격이 어렵다라는 근거가 될 수는 없습니다. ㅡㅡ;;  그리고 3일이면 얼추 쏠수 있을 정도로 기능을 익히는 것이 쉽다는 말이지 3일이면 완숙한 군대를 만든다는 말이 아니잖아요.

활과 비교를 하면서 나온 말입니다. 더이상 여기 꼬릿글은 달지 않겠습니다. 혼자 맘대로 생각하십쇼. 님은 백날 얘기해도 엉뚱한 포인트에 물고늘어지실 분이라..
                         
디노 14-09-20 02:57
   
참나, 아무리 숙련된 사냥꾼이 있어도 외적과 싸우는 건 군인이 먼저죠...
왜 사냥꾼을 불러요...병사들한테 문제가 있으니 편법을 쓴 거지...

제대로 아는 것도 없으면서 함부로 떠들지 마세요...
                         
일경 14-09-20 03:47
   
이분 완전 말이 안통하는군요 -_-;;

총의 등장 배경부터 아셔야 할 듯 하군요.

동서양을 막론하고 총이 왜 발전을 하셨는지 먼저 아세요.

활은 보통 150m이상 멀리 날아가는건 400m까지 갑니다. 거기에 연사 속도도 분당 10발 가량을 쏘죠.

초기 조총과 같은 화승총은 사거리가 고작 50m내외 길어야 100m가 안됐죠.
거기에 분당 발사 속도도 숙련도가 높아야 3-5발 이것도 후기에 화약을 종이에 쌓아 장전하던시대고 임란때는 화약 주머니에서 화약가루를 넣어 쏘던 시대.. 분당 빨라봐야 3발....

이걸 보면 왜 조총을 무시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활에 비해 형편 없어요.

그런데 왜 총이 발전 했을까요? 초반에 이렇게 구렸는데..

이유는 총은 병사를 생산하기 매우 좋기 때문이죠.

기본적으로 활이란 "활 좀 쏜다" 말하려면 못해도 5-7년은 쏴봐야 합니다.

단기간에 능숙한 궁병을 생산 할 수가 없죠. 그냥 일제사격이라면 모를까.. 전장에서 움직이는 적을 활로 쏘아 맞추는 정도의 실력을 갖추려면.. 수년간의 훈련을 통해 숙달 되야 하니까요.
(활은 조준점이 없어요. 바람의 영향도 많이 받고 탄속이 느려 움직이는 적은 예측해서 쏴야 하죠. 그래서 숙련도가 매우 중요함.)

하지만 총은 다릅니다.

일반인에게 총을 주고 고작 2-3개월정도 연습시키면 총의 사거리인 50m 표적을 맞추는데 문제가 없습니다. 기본적으로 현대에 들어 우리가 군대를 갈때 군사 훈련을 몇일 받는지를 생각하면 쉽습니다. 총은 단기간만 교육해도 누구나 사용가능하죠.

간단하게 총과 활 모두 사용해본적 없는 사람에게 무기를 주고 교육 시켰을때 어느쪽이 먼저 숙달이 되는지를 생각해보면 됩니다.

그럼 답 나오죠.

군사를 유지하는 왕들 입장에선 정규군이 많으면 많을 수록 재정적 부담을 줍니다.
거기에 대규모 전쟁의 경우 빠르게 병사를 생산 할 방법도 적도.(원거리가 아닌 근거리 경우.. 더 많은 훈련이 필요 합니다. 근거린 진형을 짜서 싸우기 때문이죠.)

그러나 활은 궁병을 생산하는 시간과 자원이 너무 많이 듭니다. 당장 전쟁이 터저 병력을 보충해야 하는데.. 궁병은 좀 쓰려면 년단위로 잡아본자가 아니라면 병사로 써먹을 수가 없으니까요.

하지만 총은 그때 징집해서 교육해도 전쟁에 사용 할 수 있습니다.

그냥 무기만 비축해도 충분히 화력을 보장 받죠.

그래서 동양보단 서양에서 총이 더 많이 발전했다는 말도 있습니다.
(물론, 동양은 중장 보병이 적은 이유도 중요합니다. 서양은 병사가 적은대신 대부분 중장보병이였고 이를 쉽게 관통하는 화약 무기에 더 열을 올린것도 사실이죠. 하지만 이는 극히 초기때 이며 후기로 갈 수록 화약 무기의 이런 숙련도의 이유로 인해 더 널리 사용됩니다. [당장 서양은 총의 발전 이전엔 모두 정규군 위주로 전쟁을 했지만 총이 발전한 후에는 징집병을 많이 사용하게 됩니다.])

동양은 (동북아시아부터 인도까지 이르기에..) 일반적으로 커다란 국가가 넓은 영토를 지배해 왔습니다.

그래서 국가는 인구도 많고 물자도 상당히 충분한 편이였죠. 때문에 정규군 자체가 꾀 많고 충분히 국경을 지킬 정도의 세력을 갖추었습니다.

하지만 서양은 중세시대 서양을 보면 정말 춘추전국시대 부럽지안게 조그만 왕국들이 무수히 많이 있었지요. 때문에 인구적으로도 경제적으로 커다란 군대를 보유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대규모 전쟁이 아닌 일반 왕국끼리 전쟁이 일반적으로 몇천명씩 싸우는걸 보면 확실히 동양하곤 판도가 다르죠.

그래서 언제든지 징병해 병사를 만들 수 있는 총에 관심을 많이 가지게 됩니다.

동양은 총보단 대포에 관심을 많이 가지죠. 이유는 대규모 전쟁에선 총보다 대포가 위력적이기 때문이죠.

중국이나 조선이 총을 정말 무시했던 이유는 보병 무기로는 활이 있고 부대 무기로는 대포가 있는데 총을 왜 쓰는가 였죠.

당장 임란때만 봐도 대포는 조선이 일본보다 월등히 발전했었습니다.

즉, 총은 활에 비해 숙련도 운운안해도 되어 좋았기 때문입니다.

병인양요를 예로 들으셨는데,

우선 병인양요는 대규모 전쟁이 아니였습니다. 그런 곧에 파견할 병력은 일단 숙련자가 좋겠죠. 안 쏴본 사람보단... 임란 정도로 큰 전쟁이라면 일반 국민도 징집 되겠죠.

그리고 강선이 나오기 전에 총은...-_- 숙련도라 함은 모름지기 연사 속도.. 분당 몇발 쏘냐와
얼마나 깡다구가 좋으냐 입니다.

그건 총의 사거리가 짧아 적이 지근거리에 올때까지 참고 쏠 정도의 담력이 필요했고 졸라 숙련이 됐든 안됐든 강선없는 총 시절엔.. 정조준해서 적이 맞는다는건.. 일반적으로 운이 좀 따라 줘야 하는겁니다. 말 그대로 쏜대로 안나가는데.. 숙련이 된넘이나 안된넘이나 -_- 정확도 차이가 얼마나 있겠나요...(참고로 강선이 없을 뿐만 아니라 당시 총알이 완전한 구형도 아니였습니다. 즉 공기 저항을 지 멋대로 받기 때문에 정말이지 탄 궤도를 예측하는거 자체가 불가능에 가까웠습니다.)
                         
디노 14-09-20 05:47
   
참나, 또 강선 타령을 해 놓은 것을 보니 글을 안 적는다해 놓고 이름을 바꿔서 올렸군...

님이 적어 놓은 거, 총에 대해 좀 아는 사람치고 모르는 사람 있나요?
강선이 없으면 당연히 탄환이 제대로 곧장 뻗어가지도 않고 멀리 나가지도 않죠...
강선 이야긴 그만 하시고,

조총 훈련은 연사 능력만 키우는 게 아닙니다.
사료에 의하면 조선시대 조총병들이 흔하게 하는 실수가

적이 달려오는데 하늘을 향해 총을 쏘는 군사, 앞을 향해 총을 쏘기는 하나 머리는 이미 뒤를 돌아보며 달아날 길을 찾는 군사, 화약은 넣었는데 정신이 혼미해져 총알을 넣지 않은 군사, 조준 시 총구를 낮게 기울여 총알이 흘러나오는 군사라고 사료에 적혀 있어요...

군사들이 이럴진데, 3일 만에 조총병을 양성해요?
적어도 2년은 걸리는 일입니다.

뭔가 크게 착각하고 계신데, 전쟁은 군인이 하는 거지 사냥꾼이 하는 게 아니에요...
병인양요 때 군사들 훈련이 안되었는지 사냥꾼을 데리고 했다가...
4년 후에 일어난
신미양요땐 병사들이 싸웁니다. 왜 그랬을까요?
님의 말대로라면 그 때도 사냥꾼을 데려와서 싸우게 했어야죠...

님의 말도 안되는 어거지에 더 답글 달고 싶지 않으니 유치한 장난 그만해요.
          
카오카오 14-09-19 10:09
   
근거리 전투에서 털린건 사실이지만 조총때문에 근거리 전투에서 털린거 아닙니다.
               
참치 14-09-19 21:08
   
카타나의 길이에도 문제가 있었지만, 기마병이 우월한 조선이 근접전에서 불리할 이유가 없습니다.

애초에 휴대용 화약무기가 발전한 것은 갑옷과 같은 중장갑에 유리했기 때문입니다. 당시 조총은 화살을 대체하는 원거리 무기의 대용이 아닙니다.
               
모래곰 14-09-20 15:50
   
조총으로 특기인 원거리 전투능력의 이점이 사라져서 근접전에서 밀린거죠.
그리고 이때부터 군마의 숫자와 궁마병의 질이 하락하기도 했고
초기에는 중시했던 기창술을 이때는 중요시하지 않아서 근접전에서 유리하지도
않았고 마상편곤은 아직 나오질 않았죠.
오리발톱 14-09-19 10:18
   
조총이 단점이 많긴 하지만 강점이라고 한다면 일단 살상력에서 화살 보다는 위였습니다. 제대로 맞으면 갑옷 입은 사람을 아예 관통해버릴 지경이었죠(동래성 전투에서는 나름 조총에 대비한다고 나무판자로 방패를 만들어 세웠는데 별 소용이 없었음).
그리고 3일만 배워서 얼추 쏠 수준은 아닙니다만, 어쨌거나 양성하기에는 아주 용이한 편이었습니다. 대략 한 달이면 쓸만한 병사를 만들수 있지만 제대로 된 궁병을 양성하려면 2년 정도가 걸렸다고 합니다. 가늠쇠를 겨눠서 직사로 쏘는 무기와 곡사를 그리는 무기의 차이였죠. 게다가 활은 쏘다 보면 팔 힘이 빠지고 활 시위도 풀려서 일정한 탄도를 유지하기도 힘들었고요.
또한 활도 활 나름이라 제대로 성능을 내는 건 각궁인데, 각궁의 재료인 물소뿔을 구하기도 힘들었죠. 그래서 그 좋은 활을 가지고 있던 조선도 18세기말 경의 지방군 병적기록부를 보면 병력의 70퍼센트가 조총병으로 채워질 정도로 조총 위주의 편제를 가지게 됩니다.
     
디노 14-09-19 10:23
   
19세기 중엽엔, 경기도와 함경도에만 조총이 20만정 약간 넘게 있었을 정도이니 대부분의 병사들이 포수로 채워졌죠...안타까운 건 서양애들은 총을 계속 발전시켜, 강선도 넣고, 탄환을 앞이 아닌 뒤에서 넣는 후장식으로, 화약과 탄환을 일채화시킨 총알 등으로 발전시켜 나갔는데, 우린 전혀 개량할 생각도 없이 임진왜란 때 거 그대로 사용하고 있었다는 점이죠...
뫼사 14-09-19 10:29
   
왜구따위가 뭘하겠냐고 무시한게 큰이유 겠죠.

당시 조선사람은 자신들과 일본사이에 넘사벽하나 라도 있다. 생각했으니
무적칼바람 14-09-19 10:59
   
임진왜란에서,  조총은  전쟁승패에  큰  관련없음,    일본은  선봉부대 16만,  예비부대 10만,  그리고 100년 내전으로    잘 훈련된  군대였고,  조선은  200년  평화시기때문에,  군인 대부분이  농사짓던  농민이었음,  전쟁발발  부산에  십수만  왜군이  침공했다는  소식에도,  조선정부가  파견한  최정예부대는  신립장군을  지휘관으로  한  급조된 8천명이  전부였음..
원전이 14-09-19 11:47
   
단순히 조총때문에 졌다라기 보다.. 왜군은 조총의 장점을 최고조로하는 전술에 조선군이 당했다고 보는게 정답
그리고 왜군은 전투에 단련될대로 된 배테랑들이고 조선군은??  평화상태가 지속된 허접군.. 뭐 이런저런 상황이 맞물려 .. 연전연패 하게 된거죠..
허각기동대 14-09-19 12:34
   
우리가 화포 총통이 없었던것도 아니고 일본의 철포 성능이 우리것보다 우수하긴 했으나 초기참패의 이유를 거기서 찾는것은 무리가 있죠. 일종의 정신적 자위행위입니다. 조총땜에 진거야 하는.. 그러나 애초에 그냥 삼포왜변당시처럼 왜구식의 무장만으로 들어왔어도 문약하고 무비한 우리가 일본에 상대가 되지도 않는 상황이었음은 불문가지였지요.
단병접전에서의 전투방식은 도외시하고 농성과 방어전을 위한 원거리무기와 기마에 대한 소양정도로 무관을 뽑는 형편이었는데 어디 전투가 서로 벌어져서 소리지르다 활쏘고 장애물에 의지해 원시적 거부행동을 한다고 해서 끝나는게 아니니까요. 달려들고 돌진하고 준비가 부족한 방어선을 몇몇의 희생으로 뚫고 나가면 다음부터는 도륙의 순서만 남아있는것이 당시 상황이라고 보는게 사실에 가깝다고 생각합니다.

그 이전에 이미 왜의 전투능력은 정평이 나있었고 일례로 무장한 왜구 500이 명나라 동남해안에 상륙하여 약탈의 행진을 시작하는데 중국내륙 천리지경을 돌파하는동안 명나라 군대가 전혀 저지를 못했다는 놀라운 기록이 있다는 사실을 언론인의 블로그에서 읽은적이 있습니다. 천리라면 조선에선 부산포에서 한양까지의 거리이니 임란당시와 비교해 보면 초기 참패라는것은 굳이 이유를 찾을 필요도 없는거죠.

호전적이고 잔인하며 칼을 몹시 잘다루는 이 작은 인종들을 십만이나 땅에 들여놓은 시점에서 이미 초토화는 예정되어 있는것이나 마찬가지였다고 봅니다. 조총은 단지 거들뿐. 물론 해를 끼치고 바로 빠지는 해적방식이 아닌 명나라 정복을 꿈꾸며 달려든 정식 장기전이었으므로 풍토와 보급이라는 큰 방벽에 걸려 실패하고 말지만.
Orphan 14-09-19 12:36
   
초기 패배의 원인이야 어떤관점에서 보느냐에따라 여러가지가 있을수 있죠.

가장큰 부분중하나는 왜는 침략을 하기위해 오랬동안 전쟁으로 단련된 군사를 동원한것이고
조선은 설마 또는 오더라도 그냥 숫자가 조금 많은 도적때 정도일것이라고 생각한것이죠.

꼬고마 왜인들이 와봐야 뭘 하겠냐는 안이한 생각이 화를 부른거~
소리없이 14-09-19 14:11
   
미지적인 이유야 있겠지만, 그냥 일본이 무지 강했다고 합니다.  당시 왜구들이 배 몇척 끌고 가서 중국 해안가가 털고 뿐만 아니라 그 소수 부대로 약간 내륙까지 다 털고 가도 명도 못 막았다고 할 정도 였으니요.  딱히 조총이 당시 활보다 성능이 뛰어난 무기였냐는 점도 의견이 부분하죠.  활과 조총의 훈련량이야 이미 다 아는 사실이지만, 당시 조선의 궁병들은 매우 숙련된 상태였다는 걸 감암하면 생각해 볼 문제이죠.

 일본은 그냥 당시 인구나 전투력이 동북아시아 최고 였다는 사실이 정설인것 같습니다.  이순신 장군 없었으면 중국도 좀 털렸을꺼라고 보는 사람들도 많더군요.  ㅄ 같은 명군대도 일본군대 앞에선 쪽도 못 쓸 정도 였고요
갈나개비 14-09-19 14:25
   
임진왜란에서의 가장 큰 문제는 전쟁으로 단련된 왜군과 준비상태가 모자란 조선군의 준비 태세의 차이였다고 생각합니다.

 조총은 왜군 평균 20프로 수준만 보유했었습니다.
유효 사거리가 30~50미터 수준이구요.
조총 쏘기야 쉽죠.
그런데 장전은 쉽지 않습니다.
숙련된 병사가 분당 3발 수준입니다.

다만 활은 쏘다보면 인간인지라 몇백발씩 못쏩니다.
백병전이 되면 왜군이 강했구요.

조총은 초기 화력집중에 위력을 발휘한 것이지
넘사벽 결전병기 수준으로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푸른하늘3 14-09-19 15:18
   
신립 같은 경우 조총땜에 당한게 맞고.  비온느 날 진흙이 되버린 땅 말들이 잘 달리질 못하니  기마부대의 기동력 상실.  그러나 그 외에도 한가지 간과한거.. 말이 소리에 민감한건 아시는지들?  조총 한두대로 검사할때야  장전 길고  사거리 떨어진다고 왜란전부터 조선에서 좀 무시한게 있었는지 몰겠는데  조총이 수백수천개가 동시에 터지면 그 소리는 천둥을 울리고  그정도 조총의 경험이 없는 당시 대부분 조선군인들은 이미 그 소리에 쫄아서 전욕을 상실했을거빈다. 그리고 특히 말들.. 소리에 민감한 말들이  달려오다 저 소리에 놀라 자빠지고  이리 저리 치이고..  안봐도 비디오죠?

긜고 오다 노부나가가 만든 삼단사법인가?  3열로 늘어서 교대로 총쏘면서  장전시간 단점을 최소화 시킨.. 이런거도 간과할 정도로 당시 태평시대 조선군은  전략전술이 떨어져있었음. 

그리고 당시 군 체계도 저런 대규모 적군이 몰려오는 큰 전쟁에 맞지 않았다고 알고있음.
하늘2 14-09-19 15:21
   
장담하는데, 왜군이 칼, 창, 활로만 무장하고 조선군은 활 대신 조총을 들고 있었다고 해도 초반엔 개털렸을거라는데 1표 던집니다.

조총의 총신 내부엔 녹이 시뻘겋게 슬어 있고 화약은 일단 숫자는 맞춰놨는데 실제론 습기 먹어 발사가 안되고, 병사들은 병적부에만 존재하는 유령병사들인데 소집해보니 반의 반도 안 모였고 그나마 모인 숫자의 태반은 노인이나 애들이 숫자 채우러 끌려나왔더라..... 이런 오합지졸 5천 명-1만 명 정도를 지휘해서 수백 년 전쟁으로 전쟁 노하우가 쌓이고 궁병, 장창병, 검병으로 구성된 정예부대 20만을 이길 있는 분, 손 들어보세요.
     
밥주세요 14-09-19 15:48
   
일본은 내전하고 곧바로 왔으니까 총이 녹슬지 않았겠지 지들도 평화시대에 살고 기습으로 침략 당하는 입장이면 똑같겠지
푸른하늘3 14-09-19 15:21
   
그리고 왜구들이 조총뿐 아니라  이미  백년 전국시대로 단련된  검술 달인 무사들이란 소리고,  우리는 평화와 당파, 가뭄 등으로 찌들어  농사짓고 훈련도 제대로 안하고 지원도 형편없고 한마디로 당나라부대였던 시절이란 거죠.  당연히 전투력이 높을리도 없었고.. 이순신도 전라도 가서 애들 훈련시킨다고 좀 고생했습니까? 군인만들어보겠다고..  저땐 그나마 실력있는 장수, 군사들은 거진  북 여진족 막는다고 가있었을때니..  그리고 부산성부터 해서 형편없는 지휘관들, 연락체계 문제 이런거도 있고 여러가지로 이미 초반 패할수밖에 없는 구조.

싸움이란건 이미 이길준비를 하고 그것을 확인하는 과정일뿐이라 했지요. 일본은 이미 준비가 다 되어있었죠.  이순신의 보급선 끊기랑 명나라부대 원조 평양성 승리 이런거 없었으면  조선은 먹혔음
기타별명 14-09-19 16:05
   
조선도 준비를 안한건 아니죠 실제로 나름 성벽을 수리하고 병역의 폐단을 줄이는데 노력했다고들 하네요. 다만 설마 몇 만도 아니고 십 만이 넘는 대 병력으로 원정올줄은 상상도 못했겠죠.
게다가 당시 일본은 백년 넘게 지속되던 내전이 끝난 직후라 미칠듯하게 전투 경험을 쌓은 베테랑 병력 수십만을 보유하고 있었고 조선은 200년 가까이 평화에 찌들어 있었으니...
배신자 14-09-19 17:53
   
개인적으로 생각하는 조선 최악의 왕 선조.
전략설계 14-09-19 19:21
   
조선은 전쟁할 아무것도 준비가 안된 나라였죠.
정치체계와 관련이 있는게..
반란을 일으킨 장군이 세운 나라라.. 반란에 대해서는 치밀해서..
중앙에 군대를 두지 않고.. (고려는 전성기때 개경에 직업군인만 4만5천을 두었음. 응양군. 용호군하던 무인시대 알죠, 북계에 또 따로 병력을 두었죠)
조선은 별 군대가 없습니다.
첨에는 왜구가 내려오면 읍 단위로 각자 싸워라 하다가, 왜구 규모가 커지니까,
중앙에서 장수를 내려보낸다 읍들은 모여라.. 이런 개념이라.. 한 장수한테 힘이 실릴까봐
이게 반란막기위한 군사체계지, 큰 적과 대결할 체계가 아니었죠.)
임란후에 장수한테 힘 실어줘서 그런지 바로 이괄 난 있었죠..
조선 왕조를 위해서는 현명한 판단인지는 모르지만..
15만 왜군하고 싸울 체계가 아니었죠.

임란 초기만 헤맨 것은 아니죠.
수군과 의병이 잘한 것이지.. 수군도 이순신장군의 전라좌수영만 똑별났지..

조총이 문제가 아니라.. 뼈아픈 것은..
신립이 힘들게 힘들게 1만을 모았다는 점하고..
정유재란때 칠전량 승리후 파죽지세를 올라오는 왜군을 천안에서 맞선게..
신립같은 급조한 조선군도 아니고 명군이었다는 점이죠..
대단히 부끄러운 일입니다.
의병과 수군을 빼고, 조선의 육군이라는 것이 존재했나 싶습니다.
과거 역사스페셜에 방영됐습니다만..
유성룡 시무차자 1594년에, 조선군은 군적상 15만인데..
보급병들 다 빼고, 전투병이 8천이고.. 이것도 봄, 여름, 가을, 겨울.. 4교대를 하다보니..
2천명이라고 나옵니다.
이 병력은 국가에서 입히고 무장을 시키는 정규군이라고 볼 수 있죠.
물론 각 지역에서 관리가 농민들 데리고 무기 지급하면 관군이겠고,
한동안 싸울 수 있겠지만..
24시간 배치, 이동, 전투를 할 수 있는 정규군이라고 하기엔 좀 부족하죠.
정규군이 2천명이라고 역사스페셜에서 지적한 부분이 안타깝네요.
조선이 조총땜에 졌다.. 그건 아니라고 봅니다.
로마보병도 대열이 잘 짜질 때 위력이 있지 독일 숲속에서는 깨지지 않습니까..
대열이 필요한 것은 조총도 마찬가지인데.. 우리나라는 사방이 산이죠..
꼭 기병이 아니라도 조총부대를 기습할 여지는 얼마든지 있었다고 봐집니다.
육전에서 조총의 약점을 이용해 싸워줄 체계가 잡힌 정규부대의 존재와 규모가 작았던 점이 원인이지
않나 싶네요..
신립이 소서행장 부대와 싸웠지만..
15만 대군 앞에 서울서 한달 모아서 보낸게 딸랑 1만이라면 아무리 명장이라도 질 수밖에 없는 싸움이죠.
전성기 고려처럼 평시 4만의 상비군이도 조선이 있었다라면,
전선을 형성하고 지형을 통해 작전을 펴볼 수 있는 여지라도 있을텐데..

딸랑 잡병들 1만 주고 싸우라니.. 기습으로 치고 빠지고 하는데 써야 할 기병을,
배수진치고 물러날 곳 없는 곳에 좁은 자리에다 적이 다 보는 길목으로 정면돌진시키다
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수순이었죠.
기병 말고는 신립이 기대할게 없잖아요..
"조총이라고 다 맞는답니까" 신립의 말을 꼬투리 삼기보다는..
(장수는 남들 앞에서 우는 소리 하면 안되잖아요. 몰려서 다들 불안해할 때 장수가 한번
  허풍 떨 수 있다고 봅니다)

15만 적을 향해 잡병 1만을 쥐어줄 수밖에 없었던 조선의 형편이 문제였던 것이죠.
전선을 형성하든, 작전을 하든, 멀 좀 해볼 수 잇는
육전의 정규 병력 규모에 문제가 있었다고 봐집니다.
     
호부 14-09-19 22:14
   
군사를 줄인 이유가 세조가 왕위를 참탈해서 왕가의 정통성이 흔들려서 그래요. 정통성이 흔들리니 반란일어날까봐 계속 군대를 과도하게 줄였죠. 지휘권도 철저히 중앙에서 관리했고요. 그리고 조선의 제승방위전략이 당시에는 딱히 나쁜건 아닙니다. 오히려 우수한면도 있습니다. 다만 일본이 그 약점을 알고 제대로 찌른거죠. 이를봐도 당시 일본이 얼마나 철저하게 준비했는지 알수있습니다. 철저하게 준비해서 약점을 알고 공략해오는데 당해낼수가 없는거죠. 지피지기면 백전불태인데 지피도 지기도 안된 조선군대가 지피지기 모두된 일본군을 이긴다면 이상한 거겠죠.
     
하늘2 14-09-20 09:59
   
전라감사 이광의 15만 근왕군을 무시하시는군요.
이 부대의 주력 중 하나가 권율이 지휘하는 부대고 용인전투의 패배로 조선군이 흩어졌을 때도 권율 부대는 전투력을 보존하고 후퇴해서 행주대첩과 웅치, 이치 전투를 승리로 이끕니다.
          
모래곰 14-09-20 15:47
   
5만 아닌가요?
참치 14-09-19 21:23
   
왜란 이후 조선군의 칼길이는 늘어나고, 조총의 보유량이 높아집니다. 이것만 보더라도, 당시 조선이 왜란에서 고전한 요소로 분석했는지 알 수 있죠. ㅎㅎ

물론, 이런 몇가지 요소로 전쟁의 승패가 좌우되는 거라 할 수 없지만, 지금은 조총에 대한 이야기니...ㅋ
나와나 14-09-19 22:21
   
그 후에는 조선도 조총을 애용했죠

전국에 약 20만 정의 조총을 보유했었고, 나선 정벌 때도 크게 활약해서 청나라도 탐내던 게 조선 조총병들..

그리고 왜란 당시 일본 조총 부대의 기본 전술이 3단 사법이었는데, 무예도보통지를 보면 그 후 조선은 5단 사법이 기본이었죠
모래곰 14-09-19 22:35
   
일단 칼은 중요도가 떨어집니다.
그리고 왜구들이 사용해 유명한 것은 노타치로 지금의 일본도보다 훨씬 길죠.
어쨌든 원거리 공격이 가능하고 백발백중과 긴 사거리, 강한 관통력이 있는 각궁이 있으니
자연스럽게 칼의 중요도가 떨어졌던거죠.(근접전이 불필요) 조총이 나와서 원거리 전투가 무의미됐는데 여기에 조총이 큰 변수로 왔죠.
조총 때문에 졌다고 할 만큼 성능이 대단한 물건은 절대 아니고 조준사격이 거의 불가능한 명중률로
일부에서는 소리만 요란하다는 평도 있었을 정도였지만
각궁과 비교할 때 익히기 쉽고 은폐해서 공격하기 좋다는, 관통력이 강하다는 장점이 있어
우위에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대신 수군처럼 배 위에서 싸울 경우는 각궁이 유리했다고 하더군요)
그리고 일본은 막 내전이 끝나서 경험이 풍부하고 군사도 많았습니다.
아즈치 모모야마 시절에 일본은 엄청 발전을 했고
조선이 아니라도 어느 나라든지 평화기가 찾아오면 군사를 줄입니다.
조선도 세조 시절에는 35만명이 가깝게 군사력이 있었어요.(이때 건주여진의 이만주도 죽였죠)
그리고 7년 전쟁 중 휴전 빼면 몇년 안되는데 그 중 밀린 것은 초반 러쉬인 1년 정도입니다.
평양탈환을 할 때는 조선군도 잘 싸우고 임진왜란 때 동원된 조선군이 17만에서 많으면 30만까지도 봅니다.
농민병이라고 깔지 모르지만 일본군도 사실 농민군인데 다만 경험이 많아서 강한거죠.
조선수군은 성종을 마지막으로 쇠퇴하는데 그 전에는 수군만 5만명이였고 이들은 대우도 좋고
숙련병이였습니다.(선조 때는 평화기로 인해 수군이 약화된거고 그렇지만 가락은 남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고려 2군6위를 말하는 사람이 있는데 이들 중 실제 전투병은 3만이 좀 넘는데, 물론 대단합니다만
조선과 고려는 사정이 좀 다릅니다. 그리고 2군 6위가 제대로 돌아간 것은 전성기에나 해당되는 말이고 몽고의 침입에서는 유명무실했죠. 어땠든 2군 6위는 요나라와 전투를 거치면서 계속 개선이 된겁니다.
이 중 2군인 응양군, 용호군은 최정예군인데 이게 만들어진 이유도 현종이 몽진을 떠났다가
지방귀족에게 죽을 위기를 모면하면서 자신의 호위를 위해 만든 특수군이죠.
그리고 요나라와의 전투는 초기부터 대규모 전투였고 고려군은 여기에 맞춰서 만든겁니다.
고려도 귀주대첩이 있기 전까지는 솔직히 피해가 엄청났었고요.

조선같은 경우는 일단 대규모 침입이 없고(있을 턱이 없고)
북방의 여진족이 주적인데 이들은 소규모 기병으로 약탈전을 펼치므로 거기에 맞춰 구성된겁니다.
그만큼 조선은 기병을 중시해서 임진왜란 전에는 여진족을 기병으로 눌렀죠.
그리고 고려는 당시 일본이 쇄국정책으로 외부로 나오지 않음으로 후방에 위험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전방과 중앙에만 병력을 몰빵을 한겁니다. 그리고 지방장악력은 고려가 훨씬 약했고 그 영향으로 반란이 무서워 중앙에 몰빵을 했다는 말도 있습니다.
대신 조선시대는 일본의 왜구가 침탈이 대단해서 요소마다 군사를 배치할 필요가 있었고
중앙에 집중할 여력도, 특히 필요가 없었던거죠.
군사적인 면에서 고려가 조선보다 엄청나게 우위에 있다는 말은 맞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건 확실치 않지만 일본이 3단사법을 사용한게 노부나가 조총병 3천이
다케다군을 상대할 때 썼다고 나오는데 허구일 가능성이 높다고 합니다.
일본에서도 그런 주장이 많다더군요.
     
전략설계 14-09-20 10:18
   
고려의 중앙군 2군 6위의 병력을 전투병 4만5천, 비전투병 2만7천 합쳐 7만2천으로 보는
의견이 대체적으로 많네요.
(고려사 제81권 병지 문종원년조에 2군6위 45령에 1령당 전투병 1천, 비전투병 6백)
          
모래곰 14-09-20 14:31
   
2군6위가  합쳐서 4만5천인 것은 맞는데 8개의 부대 중 잡역에
많이 동원된 부대도 있고 이걸 모두 합쳐서 4만5천이 맞습니다.
순수 전투병이라면 3만이 좀 넘는게 맞고 이것도 정원이 늘 채웠는지
의문이고 의종 이후로는 엉망이죠.
그리고 상식적으로 고려가 중앙에 7만2천을 모아놓기는 어럽습니다.
전성기 예종 때 여진정벌에 온 힘을 기울여 모두 끌어모은게 17만 8천입니다.
k리그 14-09-20 10:09
   
임진왜란 초기 망한 이유가 경상우수사 원규새키가  왜구 전함의 쪽수보고 쫄아서  도망가고 배 태운게 젤 크지  만일 원균새키가 바다에서  요격했으면 왜구들  반정도는 수장됐을것임  시간도 벌었을거고. 그리고 석궁이 파괴력크고 좋다고 하는데  임진왜란때  쇠뇌나 연노 같은거 썼다고 함 근데 이 쇠뇌의 단점이 활 3방 쓸때 한방 밖에 못 쓴다는거;; 연사력이 똥이엿다고 함 그래서  쓴다고 쳐도  저격용으로만 쓰고  대부분 활을 썼다고 함  임진왜란중에서  왜구들이 젤 무서워했던 활 무기는 편전이지 쇠뇌가 아님;;
k리그 14-09-20 10:14
   
그리고  의병얘기 하는데 그 의병들도 대부분  싸우다  떨어져 나온 병사들이 의병이 되고 그런 상황이라  의병들도 어떻게 보면 조선군이라고 봐야합니다. 오히려  그 의병들 지위했던 사람들이  어떤 고을의 양반이거나 아니면 평민이거나 이랬져;;
k리그 14-09-20 10:40
   
그리고 신립의 1만가량의 병사중에서 3000여명은  북쪽의 여진족과 싸운 최정예였습니다.  문제는 싸운 장소가 안좋았지  왜 탄금대에서 싸웠는지 모르겠습니다 .차라리 조령에서 싸웠으면 어떻게 됐을까 이런 생각도 드는데 너무 기병에 대한 자신감이 강해서 그랬는지도 모르져 뭐 기병의 무서움은  오히려 병자호란때 알수 있는데  청나라 기병 300에 4만의  조선 조총병들이 쌍령에서 싸우다 아작났는데 이때는 오히려  조선군이  유리했는데도 괴멸당했져;; 그만큼 기병들이  잘만 싸우면  무서운데;;
     
모래곰 14-09-20 15:44
   
제가 알기로는 압록강에 주둔했고 경험이 풍부했던 기병은
다른 전투에서 한응인이 데려왔고
신립의 군대가 1만에서 1만8천까지 보던데
여기에는 없었다고 압니다.
이들도 오합지졸은 아니지만 원래 사용하던 기병의 수준은 아니죠.
그래서 병력운용이 어려웠을지도.
한응인이 데려 온 3천기병은 잘 싸웠습니다.

탄금대를 선택한 것은 적들이 많고 진격로도 다양해서
서울진격을 막기위한 고육지책이라는 주장도 있더군요.
     
전략설계 14-09-22 08:01
   
길목이 조령뿐이면 거기만 막으면 되는데, 들어오는 길목이 조령 말고도 여러 곳이 있다고
그러네요.
조령에 죽치고 있다간 다른 곳으로 우회한 적에게 포위될 수도 있고..
200백년에 한양을 뺏기는 것은 처음이라 신립에게 능력에 안 맞는 역할을 지워서 그렇지..
만일 이순신장군에게 그 3천 기병을 줬다면,
왕명을 어겨서라도 신립처럼 좁은 곳에 기병을 몰아넣어 맞다이하는 것이 아니라,
피해를 덜 입고도 수군때처럼 적 위치 정보를 잘 활용해서,
게릴라식으로 기동성으로 적절한 타임에 적 대열을 기습했지 않을까 싶네요..
그러고 파면됐겠죠.. ^^
모래곰 14-09-20 16:23
   
너무 조선을 깔 수 없는게하데요시 사후 일본을 통일한 도쿠가와 막부도
도쿄일대에 친위군 8만이 존재한다고 자랑했지만 막부 말을 보면 이들은
전투력도 형편없어졌고 거의 모이지도 않았습니다.
그에 비해 조선은 조정을 구하려고 사방에서 모였고 잘 싸웠죠.
그게 조선의 저력이라고 봅니다.
그리고 임진왜란 때 끌려가 일본 유학자들의 스승이였던
강항의 분석에 따르면 일본은 영주들이 의식주를 독점해
죽지 않으려면 싸우다 죽을 수 밖에 없다고 썼죠.
사회적 매장은 온 가족의 죽음을 뜻하니.
게다가 병사들은 집에서 끌려와서 죽을 때까지 부려지니
가정을 이룰 수 없고
농민들에게 가혹한 세금을 부과해 거의 다 뺐기니
조선에 와서 그들이 겪었던 생활이 지옥이였음을 알았다고
강항에게 말했다죠.

조선의 약점은 여러개가 있겠지만 어쩌면 일본보다
백성들의 고혈을 짜지 않은 것일 수도.
그랬으면 후손들에게 전투민족이라고 찬양을 받았을텐데.
     
허각기동대 14-09-20 19:50
   
주상이 몽진가던 시점에 한양에서 근왕군 300명도 못모아서 궁녀들을 남장까지 시키던 상황인데요. 정신승리가 왜곡으로 이어져선 안됩니다. 거짓말로 안심해봐야 같은일이 벌어지면 똑같이 대책이 없는거에요.
          
모래곰 14-09-20 20:45
   
정신승리라고요?
말했듯이 임진왜란 때 조선이 제대로 대응을 못한 것도
사실이라는 것을 글 중에 많이 포함시킨 것은 보지 못하셨나보군요.
제가 이제까지 역사관련해서 쓴 글을 보시면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건
아실 수 있을텐데, 나름 저는 객관적으로 쓰려고 노력합니다.
징비록, 강항록 등 당시 사람들이 쓴 서적을 참고로 쓰는데
어디에 정신승리가 있는지 그것도 써주셨으면 좋았을 것을.
나름 사실을 근거해서 썼는데 왜곡이라니 불쾌하군요.
          
모래곰 14-09-20 20:59
   
말 그대로 임금이 도성을 비우고 피했는데
임금에게 위해를 가하는 인물도 없고
각지에서 스스로 군사를 모아서 싸우고 그런게
히데요시가 다스렸던 당시 일본이 가능했을까요?
그의 주군인 노부나가는 빈틈이 보이자 부하에게
살해당했죠.
히데요시가 오사카 성을 얼마나 비울 수 있었을지
궁금하군요.
당시 의병도 와해된 관군과 지방양반을 중심으로
백성들이 일어난거고 그런 강력한 체제가 조선이
모와왔던 저력입니다.
당시 일본이 약하면 백년을 싸운 경험이 우스운거고
그 어떤, 침략자인 일본조차 이백년 태평세월에 그렇게
됏다는 말인데 뭐가 정신승리라는건지...
단어선택을 잘못한 것 아닙니까?
내 의견과 다른 상대를 뜻하는게 정신승리?
그렇다면 옳게 썼고요.
          
모래곰 14-09-20 21:29
   
위에 쓰신 글을 봤는데 어떤 기자분의 블로그를
보셨는지 알겠습니다.
저도 재밌게 봤고 남경 지역 약탈 그거 읽으신 것 같은데
당시 명군이 맥을 못춘 것은 치고 빠지기와 매일 약탈을 통한
경험을 무시할 수 없는 점과 노타치같은 긴 칼에 당하내지 못했죠.
그래서 결국 절강병법과 척가군 수천, 노타치에 못지않은 언월도로
해결이 됐죠.
뭐든지 상성이 있어 거기에 맞춰 군을 꾸리는겁니다.
조선이 무과에 기병중심의 과목으로 궁마, 마창으로 뽑은 것은
다른 댓글에서 썼듯이 여진족과 그들의 침략 스타일에 맞춘겁니다.
우리가 북한에 맞추듯이.
그것을 가지고 깔게 아니라는거죠.
그리고 조총이 없다면 칼을 가진 보병을 기르기보단
여력만 된다면 기동성과 원거리 무기인 궁마병을 기르겠죠.
당시 팽배수가 없어진 것은 좀 문제가 있긴 합니다만.

공격을 초반에 막지 못했고 왕이 왕답지 몸했던 것은잘못이지만
당시 기준으로 정보력이, 침입규모를 1~2만으로 예상한 것도
그럴 여지가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시간여행 14-09-21 12:48
   
저당시 전세계 조총의 1/3은 일본에 있었고 ..날만새면 싸우느라 백병전등에 숙달된상태엿죠..
조총에 관련된 진법도 사용하고..이런 전력에 대응한다는게 거의 불가능합니다...
무방비상태에서 큰 손실이 나는건 어쩔수 없었죠..
굿잡스 14-09-21 14:31
   
초기 밀린건 어찌보면 지극히 자연스러운.

2차대전때도 압도적 전력의 미국조차도 잽의 만반의

대규모 기습전에 진주만 공습을 당할 수밖에 없었고

그보다 훨씬 이전인 16세기에 기존의 왜구들은 해안가에서

치고 빠지는 소수 약탈만 보다, 총동원하에 작정하고

전쟁준비를 해서 대규모 기습전을 강행한 상황에선

어느나라도 초반부터 제대로 선멸시키기는 어렵죠. 그리고 그동안

조선의 정예 주력은 북방쪽에 있던 양상에 수백년간은 큰전쟁도 없든 시기였고.

오늘날처럼 정보화시대에 조기경보기나 첩보위성으로

사전 전쟁억제력이나 실시간 군의 이동감시를 알수없던 당시의 바다건너

왜의 대규모 기습전 양상은 이전부터 이정도 규모의 전쟁을 빈번하게 해오면서

적대적 대치국이 아닌 이상은 후방에서 대규모 침공에

그나마 조선이 1달여 이후 점차 전황을 역전시킬수 있었던

배경도 민관의 일치단결과 조선의 앞선 선진문명력

즉 발달한 조선술과 다양한 화약무기, 화포제작 기술력등

세계최초의 다연발 2단 로켓인 신기전, 세계 최초의

시한폭탄인 비격진천뢰,박격포인 완구.산탄격인 수백발의 조란탄,

철갑탄 개념의 대장군전, 개인의 다양한 소형 화기에 철갑거북선 등

근현대 화약무기개념은

이미 웬만한건 조선은 다 기술력을 가지고 자체에서

발명해서 실전에서 사용.  무슨 조선을 단순한

활 어쩌고가 아니라 도리어 왜군은 그나마 내세울

화약무기는 서구에서 가져온 조총 정도외에는 없었다고 보는게

정확.

그리고 임진왜란시기에는 세계최초의 무동력으로

하늘까지 나는 비차까지 등장한 기록도 나옵니다.

정평구라는 이가 진주성이 왜에 포위되자 이 비차를 통해 사람을 빼오거나 연락을 취

하는 등 30리(12km)라는 제법 먼거리를 비행했다는 기록도 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