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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D] 1402년 조선 왕조때 만들어진 한국의 첫 번째 세계 지도, 해외 반응
등록일 : 21-02-07 09:51  (조회 : 32,341) 글자확대/축소 확대 축소 | 프린트

1402년 조선에서 만들어진 지도에 대한 반응입니다. 현대에 보기에는 부정확한 지리정보등에 의해 
여러의견들이 나옵니다. 그 이유에 대해 서로 알고 있는 지식으로 설명들을 열심히 하네요.


<주제글>
Korea's first world map created during the Joseon dynasty in 1402.
1402년 조선 왕조때 만들어진 한국의 첫 번째 세계 지도.


사진 원본으로 크게보기







<댓글>


Apptubrutae
쪼매난 일본!


ㄴEnali
내 생각에는 사실 이상한 모양으로 그린 대만이나 오키나와를 의미하는 것 같아.
일본은 동쪽에 있지 않을까?


ㄴㄴApptubrutae
그들이 일본을 떠나서 일본의 일부 지역은 한국의 남쪽이나 남동쪽이라이 아니야. 게다가 그 모양은 막연하게 일본식으로 되어 있는데, 한국과 가장 가까울 부분(규슈)이 섬으로 올바르게 표시되어 있어.
대만일지도 모르지만, 이 지도에서는 너무 가까워. 그리고 오키나와는 아닌 것 같아. 하지만 누가 알겠어, 난 한국어를 할 줄 몰라!


ㄴㄴㄴdokina
한국어를 할 수 있어도 이 지도는 한자로 되어 있으니 걱정 마, 네 생각이 내 생각과 같아.


ㄴㄴㄴAlex09464367
한국에 교차 게시했어.
https://www.reddit.com/r/korea/comments/kqlqjc/koreas_first_world_map_created_during_the_joseon/
그래서 더 많은 답을 얻을 수 있을거야 .


ㄴㄴㄴmoe_and_joe
그리고 그들은 교토에 있는 빨간 점, 그리고 "일본"이라고 써 있네.


ㄴㄴㄴEnali
무슨 말인지 알겠어. 하지만 만약 한국에 살았고 지도를 만들고 있다면, 나는 네가 일본이 너희 해안과 비교해서 어떤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에 대한 더 일반적인 감각을 가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싶어. 반 비슷한 모양을 바탕으로 한 일본일 수도 있지만 다른 점에서는 너무 멀어 보이지? 하지만 아마 네 말이 맞을지도 몰라. 만약 일본의 크기와 근접성을 고려해 볼 때, 그들이 일본의 일부를 포함하지 않은거라면...,


ㄴㄴㄴㄴGo_Choose
일본의 위치와 규모는 전통적으로 한국인들이 한국과 관련하여 일본을 어떻게 여겼는지와 같아. 그리 큰 지리적 위치는 아니야.


ㄴㄴFonference_Cun
일본이야, 섬 중앙에 있는 빨간 동그라미에는 日本이라고 쓰여 있어.


ㄴㄴㄴEnali
확인해줘서 고마워! 우와, 난 아시아에 가본적도 없는데 일본을 내가 생각했던 곳에 두었던 것 같아. 어쩐지 그 지도 제작자들이 더 잘했을 것 같아서 그런가봐.


ㄴㄴㄴㄴgalumphingbanter
우리가 미국 지도에서 알래스카와 하와이를 아래쪽에 놔둔 것처럼, 일본을 그냥 거기에 둔건가? 그렇지 않으면, 지도를 훨씬 더 크게 만들어야 하기 때문인 거지.


ㄴㄴjon_nashiba
역사적으로 일본은 남쪽에 있는 것으로 여겨졌어. 부산->쓰시마->큐슈와 일본의 나머지 지역으로 가려면 한국에서 바로 남쪽으로 이동해야 했으니 그럴 만도 해.
일본은 또한 지도(12-13세기)가 그려질 당시에는 중요한 국가로 여겨지지 않았어. 그것들은 15세기 이후에나 한국 역사에서 중요한 부분이 되었지.


ㄴㄴㄴKungyab
일본은 또한 지도(12-13세기)가 그려질 당시에는 중요한 국가로 여겨지지 않았어. 그것들은 15세기 이후에나 한국 역사에서 중요한 부분이 되었지.

적어도 경제적인 관점에서 볼 때, 일본은 적어도 천 년 동안 한국보다 훨씬 더 큰 경제규모였을 것이라는 점을 항상 흥미롭게 여겼어. 참고로 700년대 통일신라+발해의 인구는 약 300만 명인 반면 일본의 인구는 600만 명이었어.
내 생각에는 이런 경우는 현실 vs 고대세계의 기대 같아. ㅋㅋㅋ


ㄴㄴㄴㄴjon_nashiba
내가 보기엔 그냥 일본은 다른 곳으로부터 크게 따로 떨어져 있는 경우라고 생각해. 한국에게 있어서 더 큰 문제는 북쪽(만주/ 거란 / 여진/ 몽골의 북방 야만인, 그리고 때때로 중국의 침략에 대한)이었어.
그 당시 일본 경제가 얼마나 컸는지도 잘 모르겠지만 그만큼 규모가 컸는지, 의미가 컸는지 모르겠네. 조선은 정기적으로 사신을 보냈는데, 그렇게 규모가 컸으면 분명히 알았겠지 .


ㄴㄴㄴㄴㄴKungyab
그 당시 일본 경제가 얼마나 컸는지도 잘 모르겠지만 그만큼 규모가 컸는지, 의미가 컸는지 모르겠네. 조선은 정기적으로 사신을 보냈는데, 그렇게 규모가 컸으면 분명히 알았겠지?
음, 산업화 이전의 세계에서는 대다수의 인구가 생계형 농업에 관여했을 것이라는 점에서 경제구조가 현저하게 유사하다는 것을 명심해. 내 기억이 정확하다면, 유럽 및 아시아는 1800년대에 약 10%의 동일한 도시화율을 보였어. 그러므로 경제규모는 한 나라의 농업생산량에 달려 있었지. 내가 이미 지적했듯이 일본은 적어도 700년대 이후 한국보다 두 배나 큰 규모의 인구를 가지고 있어서 농업 생산량이 상당히 많아졌고, 따라서 경제력도 더 커졌어. 증기 기관 이전의 GDP는 단지 인구 대비 비례할 뿐이었지. 산업혁명은 1800년대에 유럽이 전 세계를 지배할 수 있도록 완전히 판을 바꿨지.
또, 난 조선이 일본이 더 큰 나라라는 것을 알았는지는 장담할 수 없지만, 만약 그들이 그 사실을 제대로 알지 못했다면 놀라울거야. 결국 도요토미 침공 당시 일본군은 8만명 정도의 한국군보다 훨씬 많은 약 20만 명이었어.
나는 그것이 그냥 일본은 다른 곳으로부터 크게 따로 떨어져 있는 경우라고 생각해. 한국에게 있어서 더 큰 문제는 북쪽(만주/ 거란 / 여진/ 몽골의 북방 야만인, 그리고 때때로 중국의 침략에 대한)이었어.
그렇지, 역사적으로 북쪽 국경은 적어도 신라 시대부터 한국의 관심사였어. 이 중 일부는 고구려의 만주 영토를 되찾고자 했던 한국의 보복주의에서 비롯되었다고 생각해.


ㄴㄴㄴㄴ[deleted]
바로 그거야. 성리학은 시장경제를 외면했기 때문에 국가의 중요성은 그 나라의 국내총생산이나 경제생산보다는 얼마나 시를 잘 쓰거나 철학에 관한 책을 쓸 수 있느냐에 달려 있었어. 임진왜란 때 이것이 큰 실수 라는걸 무례한 방법으로 각성 한거지. 침입자들때문에 한국이 식량 생산을 못했기 때문에 만주와 북부 국경에 긴급 교역소가 설치되어 만주에서 곡물을 거래했어. 그것에 대해 생각해 봐. 전쟁 전에는, 14세기 후반의 성리학 혁명 이후, 국제 무역은 한국에서 불법이었어. 그 논리는 자본주의가 부익부 빈익빈으로 이어져 탐욕과 부패를 초래한다는 것이었어. 이상적인 성리학 교리에 따르면, 모든 시민들은 그들만의 땅에서 자급자족을 해야했어. 물론 이론이 실제에선 적용이 어렵지. (공산주의 혁명 참고)
성리학 혁명 이전에는 무역이 매우 활발했고, 고려 상인들은 처음으로 부기를 발명하기도 했지. 저 때 한국이 세계 최초로 대 함정용 해군포를 개발해 현대 전함의 대형 함대의 시초가 되었고, 선원들이 아라비아로 항해해 무역을 한 때였어. 한국 선박과 무역에 관해 더 많은 것. 유학자가 지배한 후, 해안의 모든 활동은 금지되었고, 해안선에서의 활동이 해적과 공모한 것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에 심지어 섬까지도 비우게 되었지. 이순신 장군은 실제로 성공을 거두기 위해 조선의 많은 규칙들을 어겼어. 그는 곡물을 재배하기 위해 이 섬에 전쟁 난민들을 정착시켰고, 필요한 전쟁 물자를 얻기 위해 일본인도 포함하여 번창하는 해상 무역망을 유지했어. 아이러니하게도 한국의 실제 경제는 한국이 일본에게 육지의 대부분을 침략 당했을 때 아마 해상 무역이 일시적으로 활발해졌기 때문에 더 커졌을 거야.


ㄴmoe_and_joe
나는 일본 넷우익의 애국자들이 이 중세의 지도에서 일본을 작게 만들었기 때문에 크게 흥분하는 것을 봤지.


ㄴnrith
아프리카도 한 마디 하고 싶을 것 같은데.


ㄴㄴApptubrutae
내 생각엔 아프리카 호수 말하는 거 같은데.


ㄴㄴㄴnrith
그게 지중해지, 그 안에?


Fonference_Cun
동아시아인들은 적어도 16세기까지는 세계지리에 대한 이해가 많이 없었지. 한국인/중국인/일본인들에게 세계는 기본적으로 중국이었고, 그리고 그들의 조국은 단연 두 번째로 크다고 생각했고, 나머지 세계는 그저 지엽적인 존재로 여겼지.
예를 들어 분단과 갈등 끝에 나라를 하나로 묶은 일본의 군벌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비록 한국이 실제로는 대한해협 중앙에 있는 대략 한국 면적의 300분의 1 정도의 작은 섬이지만 대마도주에게 종속되어있다고 생각했어. 그는 1592년에 한국을 침공했기 때문에 더 잘 알고 있었어야 했어. 그의 왜곡 된 지리관은 의심 할 여지없이 중국과 인도를 모두 정복하려는 그의 망상적인 야망의 이유였을 거야.
그리고 이 지도에서 알 수 있듯이, 일본에 대한 한국의 견해도 그리 높지 않았어.
그렇지 않고서야 그렇게 높은 문명 속에서 이렇게 부족한 지리에 대한 이해를 정확히 지적하기는 어렵지. 그 이유중 일부는 유교와 불교의 중상주의에 대한 경멸과 관련이 있을 수 있는데, 이것은 외국에 대한 지식을 가진 무역업자들이 정부에 실제로 자리잡고 일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했어. 외교는 또한 보통 작은 나라가 (분명히 중국처럼 더 큰 나라가 있지 않는 이상) 더 큰 나라에 조공을 바치는 형태로 이루어졌고, 이는 자아를 부풀리게 했을 수도 있어.
또한 이 지도가 만들어질 때쯤에는 중국, 한국, 일본이 공식적인 수준에서 서로에 관여하지 않고 수 세기를 보냈다는 점도 주목할 필요가 있어. 민간 무역과 해적의 침략은 계속됐고, 공식 외교사절까지 수시로 보내기도 했지만, 세 나라 중 어느 나라도 서로를 그렇게 궁금해 하는 나라는 없었지. 중국은 이 지도가 만들어지기 30~40년 전에야 북방 유목민들에 의한 수세기 동안의 괴롭힘과 지배에서 막 벗어나고 있었는데, 이는 몽골인들의 잔혹한 정복과 그 뒤 한족 주도의 명나라에 의한 추방으로 절정에 이르렀어. 이 기간 동안 한국은 중국에서 벗어나 홀로 설 수 있는 것을 기뻐하며 몽골 인들과 맞설 기회를 갖게 되었고, 그 후 새로운 왕조를 설 수 있었지. 앞서 언급했듯이, 일본은 긴 기간의 혼란과 갈등을 겪고 있었고, 이는 16세기가 돼서야 끝나.


ㄴtester25386
도요토미에 대한 이야기는 재밌는 건 전쟁이 시작되기 몇 년 전에 조선 대표들이 실제로 그에게 자국지도를 선물로 주었다는 점이지.
이 기간 동안 조선에 대한 정보를 더하자면 조선은 그때 황금시대로 접어들고 있었어. 그 후 50년 동안 그들은 무기, 과학, 수학을 발전시켰고 현대에 만들어진 과정을 알 수 있는 유일한 문자인 한글을 한 사람이 발명 했지. 이 시대의 조선에서 화차, 판옥선 등과 대포와 같은 무기의 발전이 없었다면 조선은 임진왜란 때 이순신 같은 영웅을 볼 수 없었을 거야. 태종 대왕은 고려로부터 물려받은 조선의 부패한 통치를 대대적으로 개혁했고, 1592-1597년 동안 궁극적으로 나라를 추진하고 구하는 것과 세종대왕이 이끄는 문화적 진보를 가능하게 한 것이 바로 이 개혁이었어 그 후 조선은 일본에게 병합될 때 까지 내리막길을 걸었지.


ㄴㄴdrwarrengphd
현대에 만들어진 과정을 알 수 있는 유일한 문자인 한글
이건 사실이 아니야. 세종은 한글을 발명하지 않았어. 그는 당시까지 한국어를 쓰는 데 사용되었던 한자를 대체하기 위해 사용되었던 현대 한국어 시스템과 스크립트 인 한글을 발명했어.
일부 학자들은 그가 혼자서 한글을 발명했다고는 것에 의구심을 가지고 학자나 다른 전문가 집단의 도움을 받았을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하지.


ㄴㄴㄴRedChancellor
그래, 사람들은 언어 와 알파벳 문제에 많이 혼동하지. 그러나 세종은 학자들과 다른 왕족들의 도움을 확실히 받았지만, 그래도 여전히 프로젝트의 주요 원동력이자 영감이었어.


ㄴㄴㄴcafef
세종
역사 기록에 따르면, 그의 학자들은 여러 가지 이유로 그가 새로운 문자 체계를 만드는 것을 반대했어. 그의 조언자 중 한 명은 "왕께서 이 문자를 발명한 것은 매우 훌륭한 일이지만, 그것은 사회 질서를 악화시키고 중국과의 관계를 긴장시킬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다른 학자들은 한글 사용 설명서의 작성을 도왔고. 현대에 이론은 믿기 어렵겠지만 사실 왕이 혼자서 한글을 만들었다는 거야.


ㄴㄴGionni_Feri
나는 조선 사절단이 히데요시에게 복종의 의미로 일본에게 조선의 지도를 줬다는 게 의심스러워. 그 나라 지도를 다른 나라에 준 것은 항복의 표시였어. 이 정보는 출처가 어디야? 나는 한국의 문헌에서 그런 것을 발견한 적이 없어.
어쨌든 임진왜란 이후 조선이 내리막길을 걸었다는 것은 아주 잘못된 말이야. 그것은 식민주의 역사학의 유산이지. 조선의 몰락은 19세기 초에 시작되었어. 고려 말년 정부의 부패는 전체 기간이 아니었어.(이성계 자신이 권력을 잡기 위해 동지들과 함께 작전을 벌였기 때문에 이 부패의 주된 주범 중 하나였음)


ㄴㄴㄴedwardjhahm
조선은 임진왜란(우리가 또 기억해야 할 것으로 청의 조선 침략도 있어) 이후 한순간 내리막길을 걷기는 했지만, 그 후 부흥기를 맞았고, 정조 시대때는 실제로 세종 때처럼 번창했어. 정조가 죽은 후 상황은 악화되었지. 그렇더라도 몽골의 교란으로 재건이 불가능했던 고려와는 달리 조금만 더 빨리 근대화했더라면 모두 높은 지위를 차지하고 있던 매국노가 적어져 대한제국은 살아남고 번성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ㄴㄴㄴㄴGionni_Feri
맞아. 안동김씨가 권력을 장악하고 자신들에게만 유리하게 다스리기 시작한 이후 상황은 더 악화되기 시작했지. 대원군이 개혁을 시작했을 때 제국주의 열강들 때문에 국가가 모든 힘을 국가의 회복하는데 쓰기에는 너무 늦었었지 (또 그의 개혁은 지주들에 의해 방해 받았어). 집권중에 제국주의 세력과 배신자가 없었다면 중국과는 달리 단인민족인 국민과 너무 크지 않은 영토로 자본주의로의 변화에서 살아남아 번영 할 수 있는 많은 가능성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이런 일이 일어난 건 안타까운 일이야. 그러나 공민왕 시절의 통치는 몽골 통치 이후의 르네상스로 간주 될 수 있어. 나는 그가 고려 50년을 버텨낸 것도 그 당시 동아시아 전체가 엉망진창인 상태였기 때문이라고 생각해
.

ㄴㄴㄴㄴㄴedwardjhahm
당연하지. 공민왕이 장수하고 후계자인 우왕이 그런 바보가 아니었다면 고려가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지. 만약 우왕이 전쟁의 귀재였다면 몰라도..


ㄴㄴㄴㄴㄴㄴGionni_Feri
정몽주 같은 저명한 학자들이 왕조를 지지했기 때문에 사실상 왕조를 계속 집권시킬 수 있었을 거야. 하지만 이것은 권력이 없는 왕권을 의미했겠지. 또 고려에서 조선으로의 전환을 완전히 붕괴로 생각할 필요도 없어. 왜냐하면 고려시절 마지막에도 정치 이념으로 인해 시험 제도의 개혁이 일어났거든.


ㄴㄴㄴㄴㄴㄴㄴedwardjhahm
맞아, 나는 정몽주가 어떻게 고려를 온전하게 유지하려고 노력했는지 잘 알고 있어. 그는 실제로 조선 왕조의 많은 개혁과 문화를 지지했지.
그러나 조선은 왕씨 일가를 권력에서 몰아내고 명나라에 대한 완전한 자발적 속국이 되었기 때문에 난 여전히 두 나라를 다른 나라로 생각할 거야. 고려는 때때로 송나라의 속국 이였지만, 때때로 스스로를 왕국이 아닌 제국이라 칭하고 고구려와 동일시하는 군국주의 국가였어. 그들은 요동을 되찾기를 원했고, 유교 조선보다 더 많은 야망을 가지고 있었지. 문화도 매우 사치스러운 상태에서 좀 더 보수적인 상태로 바뀌었어.


ㄴㄴㄴㄴㄴㄴㄴㄴㄴGionni_Feri
나는 네가 고려와 정치 체제에 대해 너무 보수적인 견해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해. 여기서는 이 주제에 대해 폭넓게 이야기할 수 없지만, 난 너희에게 다음과 같은 기사를 읽어보라고 추천하고 싶어: "진실이 어디에나 있을 때: 중세 한국에서의 다원주의적 정체성의 형성, 918-1170"과 "고려"의 독립적 영역: 황제의 의상?" 렘코 E 브뢰커.


ㄴleksofmi
와, 역사적 전후사정에 대해 알려줘서 고마워. 이건 정말로 각각의 동아시아 국가들로부터 사물을 관찰하는데 도움을 주네!


ㄴStronkManDude
이 문제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이라면 흥미로울 거야. 그리고 이 세 나라 사이의 이러한 태도가 얼마나 많이 변했는지에 대해서 말이지.


ㄴGionni_Feri
1402년에 한국의 세계지리에 대한 이해가 나쁘다고? 유럽 지도들이 한국을 표시도 못하던 시기에 이 지도에는 시칠리아를 포함한 이탈리아도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 또한 ‘강리도’는 이전 세기에 수집된 정보를 기반으로 하기 때문에 그 시대에 맞게 매우 잘 만들어졌으며 세계 지도 과학의 걸작임이 분명해.


ㄴGionni_Feri
히데요시는 아마 쓰고 읽는 법을 배운 적이 없을 거야. 히데요시는 진구 원정이 진짜라고 믿었고 고대부터 한국을 일본의 종속국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한국을 정복하고 싶어 했어. 다른 나라를 작은 야만국이나 속국이라고 부르는 것은 동아시아에서 외국에 대한 무시를 보여주는 관행이었어. 이 지도는 다른 지도를 기반으로 한 거야 (분명 한국인들은 지도에 있는 모든 국가를 직접 여행하지 않았어.) 일본의 크기는 일본지도를 보지 않았기 때문에 그렇게 만들어진거고. (국가지도는 쉽게 볼 수 없음). 왜냐하면 그들은 합리적인 정보들을 바탕으로 하고 있었고 일본도 몽골 제국의 일부가 아니었기 때문에 이전 세기에도 일본 지도를 볼 기회가 없었지.


ScootsMcDootson
오, 노력도 안하는 한국으로 오라고.


ㄴberejser
만약 노력하지 않는 걸 보고 싶다면 마파 문디를 봐야지.


Vinsonia
저게 아프리카야 인도야?


ㄴ100G1
긴 것은 전적으로 아프리카야. 왜냐하면 남아프리카의 오렌지 강에 대한 정보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지.


ㄴTrudzilllla
내 생각에 가장 서쪽의 덩어리는 아프리카+아라비아 같아.


treemoustache
위키백과 지도의 기사야.


Proxima55
황하는 즉시 알아볼 수 있네.


RedChancellor
몇 가지 재미있는 사실:
알렉산드리아의 항구와 등대는 이집트에서 원본으로 표기.
이 지도는 동아시아에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지도.
유럽식 이름은 아랍어 발음으로 표기.
그들이 지중해에서 색칠하는 것을 잊었다는 설이 있음. 왜냐하면 이상하게 굽이치는 강은 해안선에 해당하기 때문. (완전히 받아들여지는 이론이 아님.)
그리고 이것이 매우 부정확하다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15세기 초반의 유럽 지도를 보도록. 빈센트 버가의 카토그래피아의 설명을 인용하자면, "이 1402년 한국 지도에는 현재와 같은 유럽 지도가 없다." 그리고 이것은 그 시대의 철학적 관념을 반영하는 것이지 순수하게 학문적이나 상업용이 아니다.


eunwolkr
그래서 독도는 어딨어?


ㄴpenpaper20192020
지도에는 독도가 포함되어 있지 않은 것 같지만 울릉도(독도가 보이는 인근 섬)가 있어.
그래. 이 지도는 어떤 이유로 독도를 포함하지 않는 하나의 지도 일 수 있어. 아마도 이 지도가 세계지도라서 작은 무인도를 포함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일거야.


Kh4L
나는 그 댓글을 찾고 있었어.


Zero36
중국은 이 묘사에 매우 만족하겠네.


mnemonicxslayer
제주도가 없네.:(


ㄴKungyab
제주도는 또한 매우 재밌는 역사를 가지고 있어. 내 기억이 정확하다면, 몽골인들은 1200년대에 그곳에 그들의 말을 키우기 위해 거대한 전초기지를 세웠어. 그렇기 때문에 제주마(한국의 주요 말 품종)는 몽골 말과 밀접한 관련이 있지.


leuchebreu
물론이지. 일본은 매우 작거든...


ㄴConsistentAd2497
음, 일본은 한국보다 4배나 커..그리고 일본은 영국보다 1.5배 더 크고.



번역기자:좋은하루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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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기자 : 좋은하루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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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사능토끼 21-02-07 09:52
   
일본 ㅋㅋㅋ
하늘나비야 21-02-07 10:17
   
저 시대때만 해도  일본 그냥 미개한 야만인들의  섬나라로봤죠  한국이나 중국에  피해만 주는 왜구 즉 해적질 하고 노략질 하는 야만족들이었으니까요  기저귀 같은거 하나 달랑 입고 다녔으니 .. 더 그렇게 생각했을 겁니다 잘해야 위에 저고리 하나만 입고 다녔던데 아래는 기저귀 속옷
     
안알려줌 21-02-07 18:27
   
실제로 왜구 침범시에 많은 수의 인원이 넘어와서 도시들을 휩쓸었었고 갑옷도 장착한 걸로..

그래서 이성계와 이지란이 활로 말탄 왜구 적장 투구벗기고 눈쏘고 그런 일화가 있으니
     
ckseoul777 21-02-07 20:56
   
진짜 애네들은 왜 이리 우기는지
진짜로 이해가안되네요
아주 징글징글맞을정도의 일본열도!!!
ranteria 21-02-07 10:22
   
혼일강리역대국지도 에 대해 우리가 보통 오해 하는게 있는데
당대 사람들이 인도나 유럽이 저렇게 작다고 생각해서 저리 작게 표시한게 아닙니다.
권근이 쓴 지도 발문에 보면 세계는 엄청 넓어 알지 못해 아는것만 표기하게에 모르는 지역은 소략했다고 써 놓죠.
그리고 그것보다 더 안타까운건 저 지도 우리나라에 없어요 일본에 복사본만 있습니다.ㅠㅠㅠㅠㅠㅠㅠ
돼지콜레라 21-02-07 10:25
   
메르카토르 도법에 익숙해서 그렇지 시대적으로 정확하게 지도를 그린 거 같네요.
마치 오목렌즈로 세상을 보는 거처럼 가까이 있는 것은 실제보다 크게 그리고 멀리 있는 건 실제보다 작게 표현한 게 이상하지만 매우 현실적인 표현방식이고 일본을 실제보다 작게 그린 건 일본의 문화적 존재감을 표현한 거 같아요.
일빵빵 21-02-07 10:36
   
잘보고갑니다
새콤한농약 21-02-07 10:43
   
왜국은 짭이였을때니..
     
ckseoul777 21-02-12 00:56
   
애네들도 중국못지않게 짭이 너무너무많죠^^♡
굿잡스 21-02-07 10:46
   
ㄴㄴㄴKungyab


적어도 경제적인 관점에서 볼 때, 일본은 적어도 천 년 동안 한국보다 훨씬 더 큰 경제규모였을 것이라는 점을 항상 흥미롭게 여겼어. 참고로 700년대 통일신라+발해의 인구는 약 300만 명인 반면 일본의 인구는 600만 명이었어.

내 생각에는 이런 경우는 현실 vs 고대세계의 기대 같아. ㅋㅋㅋ

>>

??

이 인간 제대로 아는 것도 없는 어그로구만 ㅋ

(열도가 기원전 2~3세기 부터 우리 한국인 선조들이 천여년 직접 개척 지배하며 일본이라는 국호부터 가나문자등 모든 도시 문명을 심고 건설하면서

애초에 고대 열도가 신석기 수준의 미개 공백지대에 이후로도 얼마나 도시 규모나 인프라 기반이 빈약했는지 제대로된 기초가 없구만 쯧)

“고(구)려국은 예전에 다섯 부로 나뉘어져 1백 76성, 69만 7천호였는데.. "(고구려전)


   “(백제국은) 본래 5부로 나뉘어져 모두 37군, 2백성에 76만호였다"  (백제전)


삼국시대 이미 우리는

고구려 인구가 69만7000호ㅡ 구당서등 기록(이것도 당시 평양성등 일시 일부 함락으로 제대로  파악된 전체 인구수로 보지 않는 견해가 높음.

근대 이전 세계 최대급 대전인

동아시아 백년 대전인 고수 4차에서  수나라는 수백만 대군으로 4차례 대전을 치르다 결국 멸망. 이후 다시 시작된 고당 전쟁에서 우리 고구려는 3,40만 이상의 대군 운용)  즉 기본 고구려 인구수는 못해도 3,400 만 이상

백제 역시 비슷한 인구 규모


남북국시대

신라의 전성기 시절 수도 서라벌만

호수(戶數)가 17만 8천9백36호 기록 100여만에 육박(전체 4,500만)

발해

못해도 200만 이상


중세 고려(KOREA)는 5,60만의 수도인 거대 대도시인 개경을 중심으로 동격의 서경(평양)과 전통적 100만의 거대 서라벌을 동경으로 서울인 남경의 유럽 최대도시라는 로마 이상의 대도시들을 거닐고 있었고

이건 당시 중세 영국이나 프랑스 Jap같은 나라는 꿈도 못꾸던 도시규모였군요.(도시규모가 크다는 말은 그만큼 소비지향적 도시의 특성상 도시내 상업 규모나 활동 부동산 가격(GDP)등도 고대나 현대나 높다는 의미)


영국 론디니움(런던 고대도시명)과 신라 서라벌의 도시규모

http://www.gasengi.com/main/board.php?bo_table=commu05&wr_id=833564

유럽 최대 도시라는 로마보다 더 컸던 세계 4대 대도시 중 하나였던 100만의 거대 신라 서라벌.

서라벌은 바둑판 형태의 정렬된 계획도시 아래

일정 블럭의 방이라는 각구역내 공간에는 각 집안내 우물 옆에 배수로가 집밖 담장의 소배수로를 통해 다시 대배수로 연결되어 있는게 확인되군요(길도 마차가 단니는 도로와 사람이 단니는 인도가 구분)

천년의 신라 수도였던 서라벌은 남북국시대 전성기를 맞으며 지금의 수도 서울 광역시(거대 메트로 폴리탄)처럼 지속적으로 팽창.

https://m.blog.naver.com/PostView.nhn?blogId=eunayoon715&logNo=220882810189&proxyReferer=https:%2F%2F


서라벌 디지털 복원

http://www.gasengi.com/main/board.php?bo_table=commu07&wr_id=2096873

한국의 고대 건축물들

http://www.gasengi.com/m/bbs/board.php?bo_table=commu&wr_id=1991579&sca=&sfl=wr_subject%7C%7Cwr_


중세 고려를 보면 알겠지만 북방의 패자 거란 요를 상대로 2,30 만의 대군을 뽑아내거나(이 당시 요제국은 몽골을 철저히 피지배 종속시키고 서토 송은 이리 저리 따구리 당하던 시대.

이런 요제국을 상대로 고려는 크게 6번의 대전을 치르면서 귀주에서 회전으로 요나라 정예 10만을 대패시켜버리면서 폭주하던 호전적 거란을 쇠퇴시킴)

여진 정벌에 20여만의 대군 원정에(몽골같은 유목민족도 인구 대비 10프로 이상을 군사 동원 하는건  벅찬게 기본)

몽골과의 전쟁시 수도를 통채로 강화도에 단기간에 천도시켜버리거나 몽골의 요구에 수많은 배를 단기간에 만들어냈던 생산력을 보였군요(당시 이정도 도시규모와 군사동원력, 생산력을 보여주는 단일 왕조는 유럽등 세계사에서도 손꼽을 정도)


그 경계선의 서북쪽은 당나라 이래로 압록강을 경계로 하였고, 동북쪽은 선춘령을 경계로 하였다. 
대개 서북쪽은 고구려에 미치지 못하였으나 동북쪽은 고구려의 경계를 넘었다. 
 
-《고려사》

(윤 5월) 갑자일에 거란에서 오윤판관 야율골타를 파견하여 동북 여진으로 가는 길을 빌려달라 하였으나 이를 승인하지 않았다.


-고려사 5권, 현종 17년


중세 고려 역시 서토 송이 거란 요에 굴복한데 비해 6차례의 대전을 치르면서 마지막은 10만 정예 요를 대패시키면서 최근 관련 연구 논문들을 보면 기미주 형식으로 흑룡강 일대까지 발해 후신 동북방세력을 경영.

이후 요동의 오랜 지역 공동체였던 신라계 황제 (완안부)가 대거 문화적 행정 수준이 높던 후신 발해인들을 황실의 외척으로 받아들이고 연합한 대금이 반요의 요, 송을 멸망시키는 흐름이군요.


大金皇帝寄書于高麗國皇帝

"대금 황제가 고려국 황제에게 글을 보낸다" ㅡ帝王韻紀


“요양과 심양 일대는 본시 고려의 땅이요, 백성은 고려 백성이다 . 
이제 의로운 군대가 들어와 백성을 어루만져 편안케 하노니…” 

『고려사』권42 공민왕 경술 19년(1370) 12월
     
ckseoul777 21-02-07 21:03
   
종은자료 잘 봤습니다
감사합니다 (*´︶`*)♡Thanks☆.。.:*・
운드르 21-02-07 10:57
   
세계 지도사의 걸작임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잘 알려지지 않았죠.
제게 "세계 지도의 역사"라는 책이 있는데,
거기선 이 지도를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조선 후기의 '천하도'는 언급하더군요. 썩을 것들이...
버섹 21-02-07 11:17
   
일본이 한국 영토의 네 배라니...

무식한 놈이 아는 척을 하고 있네...
저 당시 남북한이 통일 국가였으니 합쳐서 22만 평방킬로미터, 일본은 37만평방킬로미터인데 홋카이도가 일본에 편입된 게 불과 150년 정도이니 저 당시엔 홋카이도를 뺀 27만 평방킬로미터, 거의 비슷한 크기인데...네 배라니...어설프게 아는 놈들이 무서운 법이다.
     
굿잡스 21-02-07 12:09
   
그러게요

홋카이도와 독립된 류큐 왕국인 오키나와는 메이지 시대 이후 병합에

에도 지금의 동경도 조선 후기 에도 시대에 가서 본격 개발 발전에 ㅋ(이때도 Jap의 농법이나 정치 사회상은 여전히 낙후)
          
ckseoul777 21-02-07 21:00
   
오키나와에서는 기미가요를 전혀부르지
않으니 아무로나이에가 왜 기미가요를
안부르냐고 기자가 질문을하니
어릴적부터 한번도 부른적이없다고
그렇게 대답을했죠
굿잡스 21-02-07 11:19
   
12세기 Jap 헤이안 시대 고증이 너무 잘되어
지들 내부에서 도리어 까였던 사극 ㅋ

https://m.cafe.daum.net/truepicture/Qt7/1143223?listURI=%2Ftruepicture%2FQt7

6세기 열도에서 가장 선진적이라는

미츠데라 유적의 엄청난 문명 수준. ㅋ

http://gasengi.com/m/bbs/board.php?bo_table=EastAsia&wr_id=88058


대화재와 전염병으로 신음하던 에도의 백성(닭장주거)

http://www.gasengi.com/m/bbs/board.php?bo_table=EastAsia&wr_id=82613


메이지 시대에도 일반인들은 여전히 수혈식(땅파고) 움집과 빈약한 판자집 주거 생활에서 못벗어났던 Jap 실상.

http://www.gasengi.com/m/bbs/board.php?bo_table=EastAsia&wr_id=94112


정종 1권, 1년(1399 기묘 / 명 건문(建文) 1년) 6월 1일(경자) 6번째기사

일본국 사신들에게 군기감으로 하여금 불꽃놀이를 베풀게 하여 구경시키다  

     일본국(日本國) 사신이 예궐(詣闕)하니 주식(酒食)을 하사하고, 날이 이미 저물게 되자, 군기감(軍器監)으로 하여금 불꽃 놀이[火戲]를 베풀게 하여 구경시켰다. 왜사(倭使)가 놀라서 말하였다.

​ “이것은 인력으로 하는 것이 아니고, 천신(天神)이 시켜서 그런 것이다.” 

http://www.gasengi.com/m/bbs/board.php?bo_table=commu06&wr_id=1136722


(조선)황제 폐하(皇帝陛下)의 수(壽)가 남산(南山)처럼 높고, 덕(德)은 동해(東海)에 젖으시어...

성종 28권, 4년(1473 계사 / 명 성화(成化) 9년) 3월 13일(계묘) 3번째기사
일본국 경극전 경조윤 좌좌목씨 등이 사람을 보내 와서 토의를 바치다.

http://www.gasengi.com/main/board.php?bo_table=commu07&wr_id=624145&page=



'고려비색 천하제일(高麗翡色 天下第一)'

ㅡ 송나라  태평노인의 <수중금>


" (조선의)이도다완 '천하제일'  "

ㅡ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다도 스승인 센 리큐(千利休)


“일본 도자는 조선 도공 이삼평으로부터 시작됐다.”

ㅡ독일 드레스든 박물관 안내문



15~16세기 전국 시대에

오사카 일대 최대 자치 상업 대도시라는 사카이를 Jap에서는 엄청 미화질 하는데

이게 주변 환호 시설로 둘러싸여 규모를 비교적 정확히 알 수 있는 도시규모로 끽해야 1만명 정도 이군요.

수도인 교토도 동북아 우리와 서토에 비해서 여전히 협소한 수준에 불과.

근세 조선에 와서 이전 같은 대도시 과밀 집중이 아닌 향촌 자치 분산의 정치 도시 성격으로 바뀌었다고 해도

조선에서 먼 국경일대의

의주 조차 1만 이상의 규모(조선에서 한양 개성 평양등  아래 8번째 도시 규모 후기 만상의 본거지)에

전국적 지방에는 행정 타운 중소도시가 기록과 유적 흔적으로 확인되는 읍성만 190여개여 이르던게 근세 조선의 도시 인프라.(괜히 근세 조선을  선진 중앙집권 체재로 말하는게 아님)

왜는 본인들 미화하는 그나마 일부 중요 도시 빼고는

지방 향촌으로 가면 더 열악 문명의 혜택을 거의 못받던 곳들이 수두룩.


 Jap은 제대로된 전국적 국가 면모와 중앙집권화는 19세기 중후반 메이지 시대 이후나 가능했지 열도는 그 이전에는 서로 따로 국밥으로 놀면서 막부시대로 가면 일반 백성들은 왜왕이 있는지도 몰랐던 시대상이군요.


요동(KOREA)에서 헛되이 죽지 않으리(无向辽东浪死歌)'

http://gasengi.com/main/board.php?bo_table=commu&wr_id=190581


근대 독소전쟁 이전 고대 세계 최대 대전

고(구)려 VS 수나라

http://www.gasengi.com/m/bbs/board.php?bo_table=commu&wr_id=1553119&sca=&sfl=wr_subject%7C%7Cwr��


USA 캘리포니아 대학. 제러드 다이아몬드 교수“discover誌“1998년 6월호「일본인의 뿌리」         

”고대 한국인의 선조가 일본의 원주민인 조몬인.아이누족을 정복하므로서 일본이라는 나라를 탄생시켰다.”
버섹 21-02-07 11:21
   
중국놈들은 없는 것도 지들 것이라 우기고, 새로 만들고, 조그마한 꼬투리만 있어도 지들 역사라고  난리를 치는데,
우린 백제가 중국을 점령하고 태수까지 둔 역사를 외면하고 있으니...
그것도 중국의 역사서인 양서, 송서, 진서, 남제서, 자치통감, 통사 등에 백제가 중국 곳곳을 점령하고 태수를 둔 역사를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아직도 논쟁을 하고 있으니 이게 일본, 중국한테 돈받아 처먹었는지 모르는 매국노들이지 대한민국의 학자냐...
굿잡스 21-02-07 11:32
   
세계사적으로 보면 조선의 조세나 부역등은 동시대 주변국이나 서구등과 비교해도 나쁘지는(가혹) 않았군요.

(무엇보다 백성들이 기근등 힘든 시기에 지원하는 환곡제도는 세계적 수준)


조선왕조는 세계 최대 곡물저장 국가


조선전기에는 태종 후반기부터 저장한 곡물의 규모가 증가하기 시작해 세종대부터 세조 전반기까지 가장 큰 규모를 유지하였다. 세종 5년(1423)에는 매년 대부하고 환수할 수 있는 의창(義倉)의 곡물이 100만석이 넘었으며 세종 27년(1445)에는 270만여석이 분배됐다. 세조 후반기부터 16세기에는 환곡이 감소해 임진왜란으로 바닥에 이르렀지만 17세기 후반인 숙종 대부터 다시 늘어나기 시작하여 18세기 초에는 500만석, 18세기 후반에는 최고 수준인 1000만석에 이르게 되었다.


https://www.google.co.kr/amp/s/www.hankyung.com/news/amp/2014071128611

황태연 교수     
동국대학교 정치외교학과     

1800년까지 중국 또는 동아시아의 1인당 국민 소득은 영국과 유럽을 앞질렀다. 그렇다면 조선은?     

◇ 숙련노동자의 실질임금 비교     


- 조선(1780~1809): 쌀 8.2kg     
- 밀라노(1750~1759): 빵 6.3kg     
- 런던(1750~1959): 빵 8.13kg     

◇ 경작면적기준 총요소생산성 비교(1800년)     


잉글랜드 100, 조선 134, 중국(강소성, 절강성) 191.     
중국전체의 평균 총요소생산성은 191 이하일 것이나 이 역시 잉글랜드보다 高.     

◇ 1인당 GDP 비교(조선 vs. 중국)     


1820년 1인당 GDP - 중국: 600달러, 조선: 600달러     
┃중국의 1인당 GDP 추이     
- 인구의 비약적 증가로 인해 1500년부터 320년간 600달러 수준.     
- 1870년 530달러로 추락.     
- 1920~30년대 550달러대에서 등락을 반복.     
┃조선의 1인당 GDP 추이     
- 1870년 604달러로 반등     
- 1911년 777달러(아시아 2위)     
  
조선의 생활수준은 16세기말부터 상승하여 18세기 영·정조시대(1724~1800)에 정점을 기록한 후 하락.     
- 16~17세기에는 중국보다 낮을 수 있으나 18세기 중국을 추월.     
- 19세기(1820년)에는 다시 중국과 비슷한 수준.     

◇ 조선의 교육복지     


┃세종치세(재위 1418~50) 이후 18세기까지 지방향교, 사학(四學), 성균관 등 모든 유생들에게 무상교육, 무상숙식, 학비지급, 학전(學田)지급, 면세 및 요역면제.     
 - "가르침에는 차별이 없다"는 「논어」의 유교무류(有敎無類)의 원칙에 따른 것.
굿잡스 21-02-07 11:38
   
왜의 만병통치약, 조선의 쇠고기 환약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brandkim&logNo=221077160291


한민족, 소고기 120개 부위로 분류··· 세계에서 가장 세밀하게 먹어 

널리 알려진 사실이지만 한국인은 전 세계에서 소고기를 가장 세밀하게 나눠 먹는 민족이다. 미국 인류학자 마가렛 미드(Mead)는 한국인은 120개 소 부위를 식용한다고 밝혔다. 35개 부위를 활용하는 영국인과 프랑스인의 4배, 51개 부위를 먹는 아프리카 보디족의 2배나 된다. 1994년판 ‘동아 새국어사전’에는 소의 내장과 살코기에 관한 단어가 136개나 등장한다.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8/10/19/2018101900617.html


엄청났던 조선시대 소고기 섭취량. 

http://www.gasengi.com/main/board.php?bo_table=commu07&wr_id=3419515



일본 음식 문화에 영향을 준 조선통신사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선을 침략하다 패전하면서 도쿠가와의 에도막부시대가 열리고 그동안 제대로된 내치 경험이 없다보니 조선통신사를 통해 선진관료체재 도입과 함께 에도막부 정권의 대외적 정당성 확보를 위해 조선통신사를 대접하게 되는데 초기 왜의 음식문화가 형편 없다보니 조선통신사의 항의가 커지자 인접 대마도 도주를 통해 조선의 다양한 음식들을 미리 파악 준비하면서 오늘날 한류문화처럼  왜국에서의 음식문화를 발전시키는데도 상당한 기여를 하게 되군요 

https://blog.naver.com/blisskim47/220824413445


오늘날 반도체에 비견되는 금,은보다 비쌌던 조선의 바이오 의약품-인삼(및 홍삼)

http://www.gasengi.com/m/bbs/board.php?bo_table=commu07&wr_id=3593845&sca=&sfl=wr_subject%7C%7Cwr_
바람노래방 21-02-07 11:42
   
일본의 역사 수정주의 관념이 뿌리깊게 박혀있네요
아비요 21-02-07 12:19
   
웃겨도 저 지도가 실제 일본에서 받아온 지도를 삽입한거죠..ㅋㅋ 축척과 위치가 잘못됐을뿐...
칼까마귀 21-02-07 12:19
   
잘보고갑니다
바람따라0 21-02-07 12:21
   
혼일강리역대국지도가 만들어진 1402년 당시 일본의 경지면적은 조선의 1/4 수준이었습니다. 당시 영토의 개념이 농지의 넓이였다는 걸 생각하면, 합리적인 표현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일본의 경지면적은 임진왜란 이후 늪과 뻘이었던 간토평야를 개간하면서 한국에 70%까지 따라오고, 홋카이도를  점령한 뒤 한국과 비슷하게 됩니다.

일본의 경제력이 1,000년간 한국을 앞선다는 건 일본과 친일파들이 만들어낸 개소리에 불과합니다.
메로나 21-02-07 12:34
   
아니 상세한건 좀 틀렷다 하더라도 우리나라 역사를 왜케 잘 아는거야 다들????
     
ckseoul777 21-02-07 21:05
   
정확히 잘 알아야 날조와 조작도 할수있죠^^♡
지해 21-02-07 12:37
   
독도 찾는 놈은 지네 집이 어디 있냐고 할 기세네
수염차 21-02-07 12:51
   
일단 바다를 매립해서 영토를 키우자.....
     
ckseoul777 21-02-07 21:05
   
대마도를 찾아아야죠^^
꽤빙 21-02-07 13:11
   
근데 쟤넨 뭐하는 애들이죠 ㅋㅋ 한국에 왜케 상세하게 당연한 것처럼 토론하고 있지
인왕 21-02-07 13:30
   
잘봤어요
ashuie 21-02-07 13:55
   
아니 일본인구가 신라시대에 이미 2배가 넘었다는게 무슨말이여?
내가 아는바로는 일본의 엄청난 인구폭증은 히데요시사후
모든전쟁이 종결된 200년 평화의시대에 도쿠가와막부에서 토지개혁와 농업혁명으로인해
일어난걸로 아는데.
ssak 21-02-07 14:30
   
유럽에서는 최신 지도를 제작해 '지도 선진국'이 되어 세계를 제패했고.
포르투갈은 일본까지 와서 무역 거래 했고.  일본은 조총까지 사들였지.



이슈 픽 쌤과 함께
지도 속에 생존의 길이 있다

https://www.lecturer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60293


http://vod.kbs.co.kr/index.html?source=episode&sname=vod&stype=vod&program_code=T2020-0372&program_id=PS-2021004718-01-000&broadcast_complete_yn=N&local_station_code=00§ion_code=05§ion_sub_code=08





교과서에서는 가르쳐주지 않는 일본사, 에도시대
https://youtu.be/RyfNVmSkcS0


교과서에서는 가르쳐주지 않는 일본사, 메이지 유신
https://youtu.be/THE4RWjgB5k



메이지유신 1부(요시다 쇼인)
https://youtu.be/cWTIXpEyfuQ


메이지유신 2부(사카모토 료마)
https://youtu.be/5gYBS5_Kf6E
     
굿잡스 21-02-07 15:01
   
서유럽이 동방쪽 무역이 막히다보니 서쪽으로 눈길을 돌릴 수 밖에 없게 되면서

대항해 시대를 맞으면서 주변 허약한 지역들을 수탈 점차 발전해가는건 맞지만

이런 서구도 식민지 약탈과 1,2차 산업 혁명을 통해 포텐이 터지면서 가능했지(19세기도 여전히 GDP규모는 만주족의 청제국이 세계의 3할 차지)  15,16세기 서구에 비해

여전히 동아시아가 도시규모, 이른 선진 중앙집권체재와 관료 시스템, 공무역 국제 거래,  경제규모등이 훨씬 컸던 시대군요.

조선만 봐도

이미 중세 고려시대에 세계 최초의 함포 함대사(진포대첩)부터 중세 암흑기를 깬 종교 지식 혁명의 도화선이 된 세계 최초의 고려 금속 활자 발명등(몽골제국 시기 이런 화약 활자 기술등이 서구로 전파)을 기반

이후 조선은 15세기 경국대전의 법치주의 하에 선진관료 체재를 구축

세계 최초 장거리 2단 로켓 신기전, 개인 화기부터 한글 창제 측우기  자동 물시계 세계 최초 시한 폭탄인 비격진천뢰

및 중세 고려시대 이미 구현 발전한 철갑선인 거북선등을 통해 임진왜란시기 이순신 제독는 전쟁 시작부터 말까지 원거리 근대 함포사 구현등

그리고 전국시대 왜는 이런 조총 수입을 위해 아프리카 콩고마냥 지들끼리 약탈하면서 지들끼리 인신매매 수출해서 무기를 수입질하던 미개 막장 시대였군요(이런 미개 습성을 메이지 시대에도 버리지 못했던게 Jap)

http://www.gasengi.com/m/bbs/board.php?bo_table=commu&wr_id=968297&page=
트레져sn 21-02-07 14:55
   
그 시대나 현 시대나 버러지들의 콩고물을 얻어 처먹으려고 갖다 바치는 인간들이 항상 존재하지
그 댓가로 국민은 엄청난 고통과 피로써 역사를 감내해야 했지..
역사를 잊으면 또 다시 되풀이된다
황룡 21-02-07 15:35
   
잘봤습니당~!@@!
김원장 21-02-07 15:48
   
잘봤습니다
비알레띠 21-02-07 15:50
   
잘봤습니다
굵은다리 21-02-07 15:59
   
잘봤습니다
오늘비와 21-02-07 16:04
   
잘봤습니당 ^^7
블랙코피 21-02-07 16:11
   
이런게 있는지도 몰랐네요
잘봤습니다.
이추수 21-02-07 17:57
   
잘봤습니다
우루사5 21-02-07 18:02
   
잘봤습니다
줄리엣 21-02-07 18:24
   
대단하네여. 순전히 걸어가면서 만든 지도 인듯..
가까운 곳은 주로 평지고 멀면 경사진 산지가 많고 해류로 인해 가깝고 멀고 이런식 이지 않을까 싶은데
저 시대에 저  정도면 대단한듯... 개방과 무역을 좀 더 일찍했더라면 하는 아쉬움
     
사이다11 21-02-07 20:04
   
원나라 시대때 만든 세계 지도 참고해서 거기다 조선지도 첨부한겁니다 일일이 직접 조사하여 만든지도는 아니에요
          
신서로77 21-02-07 21:54
   
알지도 못하면서 아는척 하시네...여러지도를 참조한건 맞으나...유럽 아프리카까지 포함된 당대최고의 걸작임...
DarkAngel 21-02-07 20:04
   
잘봤습니당
바두기 21-02-07 20:05
   
잘봤습니다.
가출한술래 21-02-07 20:22
   
잘 보고 갑니다.
북창 21-02-07 20:57
   
난 왜 외국인들이 저리 역사를 잘못 알고 지럴일때... 왜 피가 거꾸로 쏠리는지....
Tobi 21-02-07 21:24
   
잘 봤습니다.
whoami 21-02-07 21:57
   
e당시의 조선이 바라보는 세계관이 담겨진 지도인건데 뭘 지금이랑 다르니 뭐니 하고 있는게 웃기네.
자기자신 21-02-07 22:49
   
잘 보았어요
골드에그 21-02-07 23:30
   
잘봤습니다.
구르미그린 21-02-07 23:48
   
http://yellow.kr/blog/?p=1400
9세기 이전부터 일본 인구가 한국보다 많았다고 추산하는 학자들도 있습니다만 (McEvedy & Jones 1978)
학자들은 대체로 고려시대에 일본 인구가 한국을 앞질렀다고 추산합니다.
https://blog.naver.com/alsn76/220498364492
일본 경작지가 많지 않아도, 연중 강수량이 고른 편이고 논농사가 많이 이뤄져 이모작, 삼모작을 했기 때문입니다......
수백년전 한중일 경제력 비교하는 얘기 나올 때 자주 언급되는 학자인 Angus Maddison는 16세기 일본 GDP가 한국보다 앞섰고, 메이지유신 무렵에는 3배 차이였다고 추산합니다.
     
굿잡스 21-02-08 00:21
   
??ㅋ

평소 역사관이고 매번 씨도 안먹히는 반복성

어그로짓을 왜 하는지 심히 궁금.


한심한 쨉빠 만쥬리 글을 보라고 링크 올려 놓은건가?

쨉 가마쿠라시대에 이미 고려 인구 2배??ㅋ

(메이지 시대 이후에나 강제 병합된 홋가이도를 가지고 시대 구분 없는 상식 미달 소리에)

장난치는건지??

중세 고려가 북방의 패자 거란 요제국과 6차의 대전을 치르면서  2,30만 대군 운용에 금 완성 직전의 여진 정벌에도

20여만의 대군을 보냈는데

지금같은 도시화된 현대도 인구 10프로의 장정을 군병으로 차출하는게 상당히 부담스러운게 현실인데

농경 시대에 어설픈 만쥬리같은 무식한 수준에서 이정도 대군 운용이 그런 인구수로 상식적으로 가능할거라 보는건지?? 쯧


즉, 통일신라시기를 전후한 660년경의 우리나라의 인구를 675만 명으로 가정하고, 여기에 앞서 설정한 연평균인구증가율 0.0518%를 대입하면 고려 초기 937년 경의 우리나라 인구는 약 780만 명이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https://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46845




12세기 Jap 헤이안 시대 고증이 너무 잘되어
지들 내부에서 도리어 까였던 사극 ㅋ(재확인)

https://m.cafe.daum.net/truepicture/Qt7/1143223?listURI=%2Ftruepicture%2FQt7


마비키 まびき [間引き]   

1930년대 홋카이도에서는   

아이가 태어나자마자 부모가 아이의 목을 눌러 살해하는 '마비키'가 드문 일이 아니었다.   

일용할 양식을 축내는 새 식구가 부담스러웠기 때문이다.   

'자장, 자장, 잘자거라 자지 않으면 강에  버린다 자장, 자장, 잘자거라 자지 않으면 묻어 버린다'   

이 자장가 중「강에 버린다」,「묻어 버린다」는 마비키의 은어라고 한다.   

http://www.gasengi.com/m/bbs/board.php?bo_table=EastAsia&wr_id=106486���


'出羽奥州와 奥州(현재의 동북지방)에서 
매년 1만 6, 7천명, 上総(현재의 지바현)에서는 
3~4만명의 갓난아기가 솎아냄(마비키) 되고 있다' 


ㅡ에도시대 농학자 사토 노부히로


에도시대ㅡ 성장점 최저점시대.


(Jap)농민의 의복에 관해서는, 삼・무명으로 한정되어 노동에 적절한 염색되지 않은 筒袖・잠방이가 사용. 농민의 주거에 관해서는, 더 비참해서, 가건물기둥에, 토방을 강제. 마루는 불경제로 여겨져 토방 위에 멍석이나 짚을 깔고 잤습니다. 땀으로 부드러워진 멍석이나 짚은, 논의 비료로 사용. <농민의 식사에 관해서는, 엄격하게 규제되어 보리나 조가 주식이었습니다. 작은 새의 먹이입니다. 부식이나 간식도 금지.> 오락도, 연중 행사 이외는 금지         

http://blog.naver.com/marich77/40201615696����

100여년 전의 사진에서 보는 일본의 서민의 생활은 참혹했습니다만 일본인들은 에도시대의 서민은 염색된 화려한 옷을 입고 풍요로운 삶을 살았다고 자랑하고 있습니다.
에도시대의 서민의 삶 중에서 무엇을 입고 무엇을 덮고 살았을까요?

https://m.blog.naver.com/marich77/40200630476


에도시대 농노제 하에서의 쌀생산

https://m.blog.naver.com/marich77/40200001447


《수십만 여성들에게 성노예 착취가 이미 당연시 되었던 Jap의 뿌리 깊은 미개 정치 사회상》     

조총과 화약 무기를 수입하기 위해 자국 백성을 노예로 팔아 치우던 막장 Jap      

https://m.blog.naver.com/PostView.nhn?blogId=ddg00010&logNo=221300104544&proxyReferer=https%3A%2F%2Fm.search.daum.net%2Fsearch%3Fnil_profile%3Dbtn%26w%3Dtot%26DA%3DSBC%26q%3D%25EC%259D%25BC%25EB%25B3%25B8%2B%25EC%259E%2590%25EA%25B5%25AD%25EB%25AF%25BC%2B%25EC%259D%25B8%25EC%258B%25A0%25EB%25A7%25A4%25EB%25A7%25A4%2B%25EC%2588%2598%25EC%25B6%259C����������������������

このように??時代も明治大正時代も大勢の日本女性が?春婦として?り飛ばされたのですが、現代の日本人としては認めたくない事?なのだろう(「明治から大正にかけて、30万人もの日本の若い女性が海外に?られていった」)           

이와 같이 전국시대도 메이지 타이쇼 시대도 많은 일본 여성이 매춘부로서 팔아 치워졌습니다만, 현대의 일본인으로서는 인정하고 싶지 않은 사실일 것이다. (「메이지부터 타이쇼에 들이고, 30만명의 일본의 젊은 여성이 해외에 팔리고 갔다」)           

러일 청일 전쟁을 위해 30만명의 여성을 매춘부로 수출         

露日戦争と 日清戦争 ために 30万名の女性を売春婦で輸出           

http://m.blog.daum.net/_blog/_m/articleView.do?blogid=0t4NB&articleno=1466


"일본 정부는 인신매매와 노예제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마리아 루즈 호가 쿨리들과 맺은 계약을 인정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일본 내에서 행해지고 있는 창녀의 인신매매는 무엇입니까? 그녀들은 어릴 때 돈으로 팔려서 가혹한 조건 아래 홍등가에 매여 있지 않습니까? 일본인 창녀의 매매가 합법이라면, 페루인 선장의 행위도 합법적인 것이 되지 않습니까."   

디킨스의 표적은 일본에서 합법적으로 시행되고 있는 <예·창기약정(芸·娼妓約定)>도 노예계약이라는 거였죠. 디킨스는 이런 자기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서 실제 유녀의 연한계약증서 사본과 요코하마 병원의 치유보고서를 제출했습니다. 실제 일본 내에서 인신매매가 행해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었으므로, 이러한 변론을 받자 오오에로서도 당장 논리가 궁해질 수밖에 없었죠. 급거 휴정에 들어간 재판정은 한참 후에야 재개장되었고, 고심 끝에 내려진 최종판결은 이런 내용이었습니다.   

http://m.egloos.zum.com/nestofpnix/v/4214900



메이지 시대 근대화된 Jap 자화상.

http://www.gasengi.com/m/bbs/board.php?bo_table=EastAsia&wr_id=106111
구르미그린 21-02-07 23:57
   
인구, 국력 상황을 정확히 판단해야 앞으로 어떻게 더 키울지 궁리할 수 있는데, 한국사를 돌아보면, 이에 진심으로 관심을 가진 권력자는 거의 없었습니다....
그러니 수백년간 발해 유민의 나라가 만주에 있었어도 그들과 통일할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역사적으로 일본에게 계속 당한 가장 근본원인은 인구고, 21세기 한국은 인간의 가장 원초적 본능을 포기하는 비율이 높아 연간신생아수가 세계역사상 가장 빨리 줄고 있는데, "대체 저출산이 뭐가 문제인가?"의 답을 본인 아파트 가격만큼 현실적으로 고민하는 한국인은 드뭅니다.
"통일하면 한국 국력이 일본 넘는다"란 주장이 인터넷에 많은 것에 비해 지금 한국 정책방향대로 쭉 가면 다민족국가화로 통일의 원동력/대의명분이 사라진다는 점을 신경쓰는 한국인은 별로 없습니다.
"한국이 일본보다 잘 나간다"고 말하는 사람들의 주장만큼 한국 국력이 크지 못하는 가장 큰 원인은 진짜로 이에 관심 있는 한국인이 없고, 그저 한국 집값이 일본 넘어 본인 재산 늘어난 것에 만족하거나 각자도생으로 가는 한국인이 많은 데 있습니다.
     
굿잡스 21-02-08 00:28
   
국적불명인씨

평소 ㅂㄷㅂㄷ 쉰소리는

본인 나라 본인 일기장에만.


http://www.gasengi.com/m/bbs/board.php?bo_table=commu06&wr_id=1145558
프란치스 21-02-08 12:03
   
저지도가  대조선 땅이였기에  그릴수가 있던것으로  생각합니다
A한빙결1 21-02-08 14:18
   
선조들의 세계관이 생각보다 넓군요..ㅎㅎ
감명받았슴!

번역 수고하셨습니다
하늘나비야 21-02-09 16:12
   
지금 현제 제가 알기론 백제 궁이 재현 되고 있는 걸로 압니다 부여 가시면 백제 궁 한번 보세요 되도록이면 일찍가셔서 구석구석 보시길  생각보다 오래 걸립니다 전 한 시간 정도면 대충 둘러 볼줄 알았는데.. 서민 귀족들의 집과  백제궁을  보실수 있습니다  다 완성된건 아닌것 같고 부속 건물들은 아직 공사중인 듯합니다
기성용닷컴 21-02-16 17:03
   
번역 감사합니다~
redshark 21-09-01 19:48
   
잘봤습니다.
ㅇㄹㄴ 23-01-10 01:13
   
잘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