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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D] 해외네티즌 "일본왕실의 백제기원설에 일본 부정이유는?" 해외반응
등록일 : 19-05-04 10:27  (조회 : 33,226) 글자확대/축소 확대 축소 | 프린트

새로운 일본왕이 즉위되면서 일본의 연호도 바뀌었는대요.
이 즈음 해외 포럼에는 재미있는 주제가 올라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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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글>
" 최근에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왕묘가 발굴이 되었는데, 고대 일본왕실 혈통이 원래 한국에서 기원 되었다는 설에 대해 일본 정부에서 이 무덤에 대해 더이상 연구 하지 않을 것을 발표 했는데.. 그 이유가 무엇 떄문일까?"  

이 출처는  베네딕트 앤더슨 < 상상의 고대국가 > 에서 나온것이고, 어떤 한 개인 논문이 아닌, " 일본의 역사 학자들"로 부터 나온 공통적인 지적 인데.. 이 정보가 믿을만 한것이고, 향후 이런 연구를 계속할 계획이 있는 건지? 
니들 생각은 어때?



<댓글>


SteveGladstone
나는 천황이 자신의 혈통이 백제혈통 임을 밝혔기 때문에 더이상 논쟁거리가 아니라는 " ted5298" 견해에 동의 하지 않아. 천황이 백제혈통이라고 말했다고 해서 , 분명한 일본특색을 보인 왕조와 노선을 보이고 있는 것을 보면 백제 기원으로 말하는 것은 잘못 된것이야
 

짧게 요약 하면 :

일본 왕조에서 백제계 는 여러 일본왕 계보들 중에 하나에 불과해. 백제계는 카무천왕 어머니 부터 일수 있겠지만 일본왕 계보에서만 보여진다는 게지. 이말은 , 마치 내 혈통이 슬라브 출신이지만 내 선조들중에 한 할아버지가 프랑스 여인과 결혼을 했고, 그외 다른 프랑스 인이 우리혈통에 합류하지 않았어도, 우리는 프랑스인 이라고 불러지는 것과 같은거야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논쟁이 자꾸 일어나는 것은 정치적 이유 때문이야.나는 아키도 천황의 고백은 좀 외교적 수사적 관점에서 바라봐야 한다는 생각이야.



자세하게 거론 하자면,

우리는 먼저, 고대왕조 연대기 부터 정해 놓고 시작해야 한다는 거야. 일본의 왕권과 국가형성(일본제국을 포함하여) 기원은 기원전 1세기, 아요이 시대 부터 이지. 그 이전은 히미코 시대 이고, 역사적 기록이 있지만 역사학자들은 그냥 "부족동맹"과 "초기국가"정도로 한정 시켰지. 그러나 최근 큐슈 사가현 요시소 가리에서 발견된 이번 고고학적 발굴은 그냥 작은 마을 형태로 이뤄어 졌고, 그 근처에서 큰 무덤이 발굴이 되었고 그 무덤지 보다 두배 정도의 정착지가 발굴이 된것이야. 여기에서 한국 무덤지에서 발굴되는 것과 같은 청동검과 중국남부지역에 나타나는 유리세공 구슬 , 바구니 ,도자기 및 기타 유물들이 출토 되었지. 이것이 중요한 발굴이란 점은 이 주변지역에서 그시대 것으로 보여지는 금속도구가 발굴 되었기 때문이지. 이것은 요시노가리-쿠니(쿠니국 또는 쿠니 지역/마을로 불려졌다)에서 사용했던 것이지


이 발견은 야마타이 와 본토 사이에 물물교역이 BC 1세기부터 있었다는 중요한 증거 이야. 이것으로 인접한 섬국가들 사이에서 교류가 있었고 사회계급들이 존재했음을 보여주고 있다는 거지. 이러한 것은 강력한 통치력을 가진 지도자가 출현했고, 이들은 통치하기 위한 "제도적인 법"을 만들 필요성이 대두 되었다는 뜻이기도 해. 그리고 자연스럽게 하나의 족장으로 통합하여 국가형태로 발전시켜서, 다른 혈족들을 통제하고자 하는 '큐니족' 들 목적이었지. 


요시노 가리 발굴은 화살촉 및 기타 전쟁무기( 군사 목적의 타워)들 발굴로 세력의 확장은 평화적이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쿠니족들은 힘과 권위에 대한 생각들이 서로 달랐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지. 이것은 친족기반 공동체의 지도자는 종교적 기능까지 요구 되었다는 걸 말하고 있어


두번째로 중요한것은 '통치력' 에 대한것이였어. 밑에있는 사람들을 통치하기 위해, 자원을 확보하고 보호해야 하는, 종교적 지도력이 필요해 졌기 때문이지. 이것은 위로 부터 아래까지 공물을 수거 하는 작업과 사람들을 관리해야 하는 목적으로 계층적구조 의 사회구성이 필요 해졌고, 하나의 추장을 중심으로 권력을 집중한 공동체로서  " 의식행위의 중심지" 형성 했던 것이지. 그런 것을 통해 자신들 집단속에 그런것을 포함 시켰고, 그것을 통해 자신들 부족과 족장을 위해서 농업부터 , 군사력 까지 동원 할수 있게 된것이지. 


이제 '히미코 여왕' 시대로 돌아보면,  한반도로 부터 문물을 받아들여 제일 먼저 한 행위는 중국 위나라 황제에게 공물을 보낸 거였어. 위나라  황제는 그녀에게 " 왜국 여왕" 또 "위나라 수교국( * 일본인 관점에서 동등한 의미로서 친구로 적었지만 사실상 조공을 바치는 신하 국가 임)"이라는 칭호와 예복을 비롯한 화려한 선물을 하사했다. 이것은 극동에서 가장 진보된 문명국가로서 승인을 받은것이고..이것은 동북아 국가 와 교역허가증 으로서 ,기술과 문물교역 권리보장을 받은 것이었지.


히미코 여왕이 처음부터 중국에 사자를 보낸것은 아니였다. 후한서 와 기타 고고학적 증거에 의하면, 57세 나이로 "나"땅 에서 아요이 사자를 만났으며( 이시대 일본은 "왜"로 불려졌습니다). 그런 교역의 결과로.. 철기류를 획득할수 있었으며, 언급했던 요시노가리에서 그런 철기류를 가지고 있었던 겁니다. 나중에 혼슈까지 넓히게 되었지만, 당시에는 철기는 가장 중요한 물자중에 하나였습니다.  철기는 힘의 원천 이었는데 , 수입된 철기는 군사력을 강화 시켰고, 중국과 한국와 교류 덕분에 2세기 말엽에, 쿠니 통치자들은 혼슈 북동부까지 진출 할수 있게 되었지. 


그 당시, 고조선과 다른 한반도 국가들이 일본정복의 고고학적 증거로 내세우고 있는 ,일본 왕족혈통들이 한국혈통 이란 것만으로 전체 일본을 통치했다는 증거가 될수 없다. 이는 야요이 시대와 조몬시대에서 한국기원을 증명할 그어떤 유물도 일본에서 발굴 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는거지.


야요이 시대로 집중하면, 히미코 통치 이전이거나 그후 시대에서 ,후에 일본에 야마타 족장을 세운  백제에 파견하여 한반도와 접촉해서 무역 관계를 유지했다. 백제는 신라와 고구려와 인접하고 있었고, 4세기 중반까지 고구려를 빈번하게 군사적으로 공격을 했던 국가였다. 백제는 신라와 고구려 에게 여러차례 공격을 당했다. 야마타는 백제와 긴밀한 교류를 했는데 , 철광석 수입때문이었고, 그 무역항구(* 영산강 유역을 뜻한 듯.. 영산강을 가야로 보는 일본관점 )가 가야에 있었기 때문이었어.  군대까지 주둔 시켰다.


 이는 5세기 초반까지 유지 되었다. 왜는 신라와 백제와 동등한 국가로 간주 되었다. 장기 교류의 목적으로 왜와 백제는 서로의 왕자들을 교환 했어.


이 지역은 한반도와 일본에서 분리된 하나의 부족국가 로 생각 해봐야 한다고 봐

유라아쿠 는 중국에서 받은 서신을 고려 해본다면, '최초의 왜왕' 이었다. 실제 송 왕조가 5세기에 외교적 접촉을 한 5명의 집정관 중에 하나였다. 70년대 학자들은 이 시대를 중앙 통치자와 제후국 을 통치하는 국가로 보았다. 유라쿠 는 다른 지역 통치자들과 결혼관계로 교류하고자 했던 통치자 였고, 많은 갈등을 겪었다. 


ㄴSteveGladstone
유라아쿠가 사망한 후,권력공백이 되었고, 이변화가 일본에서 진정한 국가형성을 가져왔지. 이것은 일본왕조 기원이 된다는 걸 뜻하는 거야. 니혼쇼키 와 후도키(평판이 더좋은)에 대한 여러가지 얘기도 있지만,  케이타이가 군사력으로 궁전을 짓고 이와이 의 집정권을 강화 했음을 알수있지. 케이타이는 후궁과 왕실 장남을 이용해서 후계자 진출을 모색 했지. 

이것은 나중에 케이타이 아들이 첫번째 위대한 왕, 킴메이 가 등극하게 만들었어. 킴메이는 나중에 토지개혁과 법을 정리해서 강력한 왕국을 재건했던 왕이었어 


첫번쨰의 진짜 '텐노' : 일본 천왕 은 슈이코 이지. 그녀가 이 용어를 사용하지 않았다면,논쟁의 여지가 있을 것이지만 어쩄던 텐노를 최초로 사용한 여왕이었어. 그녀는 유메야도 왕자, 일명 쇼토쿠 카이시 와 통합 했고, 그녀의 통치아래 국가로서 일본이란 명칭이 최초로 나오게 했고, 17개 조항을 만들고 법제정을 해서.. 불교를 도입했어.  난 슈이코가 일본제국 의 기초를 형성한 최초의 여왕으로 생각해


아키히토 의 의견( 자신의 혈통은 백제혈통 이다 주장한)은 백제의 몰락과 일본으로 유입한 백제계 엘리트 정착과 관련이 있어. 이론 논란은 코친 황제가 ,백제 무령왕 후손이라는, 타카노 와 아오모 나이가사 와 결혼 하고 나서 몇세대가 지난 이후 의 이야기 란 거지. 현시점에서 천왕의 백제 기원설은 코닌에 이르기 까지 수세기 동안 일어났던 모두를 무시한것 이어서 , 좀 뜬금이 없어. 이러면 연관이 없는것이 없는게지.


출처:
피고,조안 ---  일본 왕 출현
반네스 , 기나 -- 차이나 , 한국과 일본 : 동아시아 문명부상
프랭크포트,앙리 - 왕과 신들
코헨 , 호날드  - 계급적 계층 발전
나이지라아 비루족 사례연구
와다 아츰 - 이세 신궁의 기원
킬리 CJ- 고고학 야마토 국가의 왕조
조나단 - 6세기 초 백제의 불교와 정치
요시다 카즈히코 - 고대 일본의 종교개혁



최종 결론 :

근원이 어디 있어? 나는 한국인이 항상 일본인 ,만주족(일부 몽골인)이 거의 같은 사람들이란 것을 배워 왔습니다. 더 알고싶어?

음... 나는 왕묘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잘모른다.  그러나 일본왕실의 외국기원에 대한 것은  여러 논쟁이 있어 왔지.

참고로,  2001년 12월 23일 아키히토 황제가 발언에 근거로 두고, 이 발언은  20년 동안 봉인이  되었던 것이였어. 보다 자세한 내용은 아키히토가 말한 내용을 알아야 해, 

어쩄던, 역사적 관점에서 일본은 내 분야가 아니지만, 이 논쟁에 보다 전문가가 나오면 좋겠지만 없어도 상관은 없어. 짧게 답한다면, 일본왕족은 백제계 라는 것은 맞아. 아키히토가 2001년에 68년 생일에 다음을 말했지.

" (한국)은 일본의 발전에 크게 기여을 했다. 나는 카누천황의 어머니가 "일본의 역사에 기록한 " 사실을 감안하면 한국과 일본은 혈연적 관계가 있다고 생각한다. 백제 무령왕 을 언급한, "일본연대기"는 동아시아 학자들 사이에 잘 알려진 역사서 이다. 8세기에 만들어진 작품으로, 일본국가와 역사와 혈통과 민요와 창조신들에 대한것 까지 포함하고 있는...일본역사와 문화에 아주 중요한 겁니다.


두번째 작품은 - "일본서기" 입니다. 이것은 720년에 완성이 되었고, 이 책에서 백제 무령왕이 505년에 일본에 공물과 둘째아들 인 '순다'를 보낸 내용이 있다. 백제는 일본와 중국과 광범위한 무역을 하는 일본에게 아주 중요한 국가였으며, 군사적으로 매우 가까운 나라였다. 무령왕은 이미 일본왕조와 혈족관계를 가지고 있었다.그의 삼촌은 유랴쿠 황제의 신하였고 무령은 일본의 한섬에서 태어났다고 기록 되 있습니다. 513년에 그의 아들을 데리고 한국으로 떠났다고 되어 있어.



------ 이하 축약한 내용( * 내용이 너무 길어서 다음으로 축약함) -------


일본 황실은 부분적으로 한국 벡제계 란 사실은 분명 하지만 이 발언을 한 아키히토 왕은 현재 페위가 된 상황임을 알아야 한다 는 말로 마무리 함.




ㄴ0ttr
아주 읽기 좋았고 유익했어


ㄴXenophanesMagnet
아주 유익한 정보를 줘서 고마워, 니가 주장한 내용의 출처에서 보면,  'Imagined Communities'에서 주장한 내용 보다 훨씬 많은 증거를 제시 했어. 앤더슨 입장은 일본왕실은 아예 한국인들이란 것을 주장했고.... 원즈가 독창적으로, 마치 영국왕관이 옮겨진 것 처럼 일본으로 이주했다는 것을 인용한 반면에, 니혼 쇼키는 일본 한왕조 혈통만  한국계로 주장하고 있는게 다른 부분이야 



ted5298
이건 더이상 논쟁거리도 아니야. 뒷받침 하는 서적들이 모두 좀 고루한 것들이지..  베네딕트 앤더슨이 주장 한것은  '상상의 공동체' 와 함께 주로 민족주의 개념을 비판해야 한다는 관점을 가지고 있음을 알아야 해( 사실, 상상의 공동체에 대한  그의 논점은 민족주의 본질이 여전히 중요한 본질임을 보여주고 있지.) 민족주의 사고방식이 좋거나 나쁘거나 상관없이 앤더슨은 그들을 주 공격대상으로 삼고있기 때문에 각주로 일본 군주주의가 일본의 핵심 민족주의라는 것을 지적하고 있다는 게지. 특히, 일본군의 깃발아래 1890년대 와 1940년대 에서 저질러진 다양한 타민족들에게 보여진 공포를 비판하고 있는거야


내가 보유하고 있는 출간물은 1991년 두번째 에디션이기 때문에 니들이 가지고 있는것과 약간 차이가 날수있어.


그러나 흥미로운 것은 니들이 말하는 각주 또한 나에게 있다는 거야 
큐슈와 혼슈에서 사용되는 일본어가 차이가 있어서 이해하기 어렵지만 통일된 독해 시스템은 학교와 인쇄물에서 통일이 되었기에 문제가 없어. 두번재로 일본황실에서 일본의 특성(일본은 역사를 통해 독점권을 얻는 유일한 국가임)와 상징적인 일본와는 차이가 있다는것이지.특이하지만 일본은 착취적인 목적으로 황실을  이용해 왔다는 뜻이야. 세번째로, 이민족의 유입은 자신들 왕조를 유지 하는데 상당한 위협적이란 점이지.


각주 29를 보면 다음과 같이 기록되 있어.

...   그러나 일본학자들이 최근에 발굴한 왕실묘를 보고 충격과 공포에 쌓였다고 생각했어.  왜냐면, 일본왕실이 한국계임이 드러났으니까..그결과 일본 정부는 더이상 발굴을 하지않겠다고 선언하게 되었지만    .. 
 

그래서 개인적으로 확인까지 못해 봤지만, 첫판이 같은 구절에 대해 같은 해석을 가지고 있다는 생각을 할수 있다는 거지. 책을 처음 출판 했을 당시, 1983년 까지 대일 청구일 로 거슬러 올라가지.이것은 이 책이 쇼와시대 통치였던 쇼와시대에 쓰여졌다는 걸 의미하기에 아주 중요 한것이야. 히로히토는 2차세 계대전에서 일본을 대표한 것과 아주 비숫해. 


비록, 히로히토가 일본 군주주의에 적극적인 동의를 하지 않았지만, 한국은 일본과 중국 두나라 사이에 희생양이 된 상황이었고 그런 시대적 환경과 역사적 관점에서 적혀진 책이기에 우리가 알고있는 군주제 보다 휠씬 보수적이고 반동적 이었다는 거야( 이런것을 지적하는 것은 아키히토가 그의 아들에게 양위를 시점에서 거론할수 있다는 뜻이겠지)


히로히토 아들, 아키히토가 황제로 취임한 것은 1989년 이었다. 그는 일본 군구주의 와 한국의 유대관계 임을 아는 사람이었기에 저런말을  할수 있다는 거겠지

내 개인적 느낌이지만 ...나는 카무천왕 어머니가 무령왕가족 관계에 있었다는 것을 '일본연대기' 기록에서 봤을때 한국과 연관 되었음 을 느꼈다.

-- 아키히토 , 2001년 12월 뉴욕타임즈 와 회견에서 ---


그래서, 여기에서 시대에 뒤떨어진 정보를 가지고 판단하는 잘못된 사례 인거야. 앤더슨이 처음 책을 썼을 당시엔 일본의 역사에는 한국와 연관성도 용납하지 않았던 시절이었고 결점이 많았던 히로히토 보단 휠씬 개방적이고 뛰어난 아들인 아키히토가( 지금 , 앞으로 수십년 안에 성격이 보여질 손자을 위한 )작업일수도 있어


아키히토는 1990년에 노태우대통령에게 일제치하 시절에 대해 개인적인 입장뿐 아니라 일본인으로서 공식적 사과를 했으며, 자신 혈통이 백제계라는 것을 밝힘으로서 양국가간 악의를 누그뜨리는데 노력 했다. 


그래서 더이상 이런 연구할 필요가 없는거야. 일본황제는 한국인 혈통, 벡제계 란 사실이란 뜻이지.


ㄴhahaha01357
네 말은 다음을 뜻하는 건가?
한국은 큰나라인 일본과 중국간 권력행사와 경쟁에서 피해자가 되기 쉬웠다 는 뜻이야?


내가 이해 한 바로는 중국황제들은 일본을 19세기 와 20세기 이전엔  멀리 떨어진 섬나라 라는 생각을 바꾼적이 없다는 거야. 사실 일본이 청나라에서 한국을 병합 한것은 최초 중일전쟁에서 승리를 했기 때문이야


ㄴWMConey
솔직히 이 질문은 원래의 질문 방향에서 벗어난것 이야. 백제계에 기원을 둔 일본황실과 최근 발굴된 유적지 조사연구를 중단한 이유와 어떻게 연관이 되지?


백제공주가 일본황제를 낳았다는 것은 듣기좋지만,  최초 일본왕 묘지를 묻는 질문에 " 고대 일본황실은 백제계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 는 것으로 대답을 하는 것은 일본정부 입장에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일이란 거지 



ㄴㄴted5298
내가 문제를 회피 하는 이유는 앤더슨이 각주에서 밝힌 출토물 근거와 학자들을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기 때문이야. 원래는 각주 전체를 다 인용을 해야 하는것여서,  내키지 않았지. 일본왕족혈통에 대한 한국의 영향에 대한 우리의 지식으로 판단하는데 한계가 있고, 내 지식능력을 초과 하는것이라서 그랬던 것이야


ㄴmatts2
그래서, 고고학 조사결과 와 연관이 있다는거야? 지금 그 연구가 진행 중이야?


ㄴAleksanderpwnz
이런 것은 이제 더이상 논쟁거리가 못되
더이상 연구가 필요하지 않은거야. 네 의견을 바탕으로, (1시간동안 , 그 이전에 논의한) 아키히토 의 공개적 성명서에 기초로 한것으로 보여져. 이건 네 생각 결론이야? 아님 다른 사람들 의견도 포함되 있는거야? 


ㄴrkiga
난 결론이 내리는  방식에 혼란 스럽네. 원래의 질문에 정확하게 답한것으로 보여지지 않았어.다시말해서 , 가능한한 고대황실에 대한 발굴된 묘지에서 발견된 증거의 범위가 무엇인지? 앤더슨은 일본 군구주의 는 깨어지지 않은 왕조이며,  그 혈통은... 한국에서 기원 된것이다 ... 공포스러웠어.


그리고 너는 다음의 말로 정리를 해버렸지. 이 이상 논쟁은 의미가 없으며 인용한 책은 가치가 없는 것이라고... 
그리고 결론을 내리기를 연구는 불필요 한것이고.. 일본황실은 한국게 임을 인정해야 한다 라는거야 
뭐라고?
나는 더많은 연구가 필요하다 생각해.  아키히토 황제가 카무황제의 할머니가 백제계 라고 밝혔고 카무황제는 서기 78년부터 50대 황제 라는것을 주장 했고, 그져 "순수한 일본황실 혈통"보다는 관계개선이 더 중요하고, 그런 관점에서 한국혈통을 받아들이자 라는 소리잖아. .앤더슨과 아키히토 말은 정확한 대답이 못되 
앤더슨은 "일본 정부가 더많은 연구를 강력하게 방해 했다" 라고 기록 했을때, 일본황실은 1976년 약 900개 황실매장지에 대한 학술연구를 완전히 중단했으며, 뭔가를 감출려고 했다는 의미지?
학자들에게 개방된 가장 초기의 왕 무덤은 3세기 또는 그시대 보다 앞선것이였어.예를 들어 서기 201년에 통치하던 진고황후 와 관련된 고사시 무덤은 2008년에 연구원에 공개 되었지만 25시간 동안만 공개되었고 , 정부가 통제한  그런 유적지가 한둘이 아니란 거지.



ㄴㄴted5298
앤더슨이 주장한  굴착을 하자고 한 것을 거절 당했기 때문에 그것에 대해 말하는 것은 어려워. 나는 그가 생각하는 지난 10년간 이란것이 무슨말인지 또 역사학자들과  발굴장소를 잘 알지 못해. 그것은 그냥 비공식적인 발언 이었어.



ㄴㄴmeridiacreative
누구를  가르키고 있는 것이지? 그리고 왜? 이런 무덤을 발굴 해야 하는 것인지? 



ㄴㄴㄴrkiga
그 무덤지를 연구허가를 요청한 많은 연구자들에 의하면, 그들은 거부 당했다는 거고, 수백만명이 관심을 가졌고..그런 기사를 읽었다는 거지. 그런데 왜 연구를 해야 하지? 1600년 일본제국에 관련된 유적지로 한번도 연구된 적이 없는 것야. 연구 해볼만 하다고 생각들지 않아? 겉으로만 극히 적은 부분만 연구했고, 무덤을 덮고 있는 토양 밑에 무엇이 있는지 사진이나 보고서가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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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처 타카즈카 무덤에서 멋진벽화가 발견 되었어
https://en.wikipedia.org/wiki/Takamatsuzuka_Tomb

곰팡이 때문에 훼손이 많이 되었고 악화중에 있어.이때문에 정부에선 무덤전체를 아예 해체 할려고 하는 중이야. 그런걸 통해서 무덤을 보존하고 다른장소에서 재조립 할려고 하는듯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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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archaeology.jp/sites/2008/takamatsu.htm
고사시 무덤은 다카마쓰즈카  무덤에서 겨우21마일 떨어져 있어. 고사시 무덤이 공개 되었나? 곰팡이( 또는 다른원인으로)로인해  부식상태가 심한가?
고사지 무덤은 조사되지 않은 약 900개 황실 매장지중에 하나에 불과해

ㄴvanderZwan
이것은 논란중인 부분에 대해선 대답이 되는 것이지만  두번째 질문 " 한일 연관성에 대해 실제로 알려진것" 에 대한것은 무엇인가 하는거야 
니가 언급한 마지막 문장에 질문 한다. 자신의 혈통에 한국계가 있다는 고백을 한 아키히토는 역사적 사실관계를 밝힐만큼 지식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거지
아마 정치적 장벽이 없기에 역사학자와 고고학자 가 이 주제에 대한 연구를 계속할수 있었기에 우리들이 1980년 시절에 비해선 휠씬 많이 알게 되었다는 뜻이겠지. 그러나 너는 우리가 알고있는것을 언급하지 않았어.


ㄴㄴted5298
그 질문의 초기에 답한것은 아니지만 앤더슨에 대한 회상부분에서 발견한 부분에 대해서는 인정 해. 앤더슨이 말한 사건을 정확하게 말하는 것은 어려워
그리고, 일본 군주유산에 대한 전체 고고학 지식으로 연결 시키는 문제는 어떤 이점이 있을지 모르지만 ,  본래의 의문들에 대해서 집중하는게 낫다는 생각이야 


ㄴDieRunning
공유 해줘서 고마워
나는 카무천황의 어머니가 백제무령왕 계보에 연결 되 있다는 사실이 일본연대기에 기록되 있다는 사실에 한국에 대해 친밀감을 느꼈어


선조들에 대해 계속 팔러워를 했지만 내가 액세스 한 자료들을 전부다 이해는 못했어.
그녀는 타카노 아소미 니가사 였을까? 실제 한국인 이었을까? 아님 일본에 있는 한국계 였을까?
한 조상이 1200종족의 혈통으로 분화 될수있다는 그런 문화적 영향은 나로선 감당이 안되는 문제야 


ㄴㄴCenodoxus
내가 희망하는 것은 그녀가 육체적으로 한국출신이 아니지만, 505년에 특사로 일본에 온 한국왕자 후손이고... 그녀의 아들은 카무 황제라는 가정 이지... 


ㄴㄴted5298
솔직히 타카노 삶이나 기원에 대해 알지 못했지만 문화적 영향에 대해서는 놀랐습니다.  일본왕족은 문자 그대로 일본 여신으로 부터 이어 받은 것이지.. 비록, 히로히토는 2차대전 후 모든 신성에 대해 포기를  해야 했지만, 제국의 순수혈통은 이데올로기 적으론 변하지 않았어.  2001년 이전까지는 말야.



ㄴㄴㄴilovethosedogs
가족혈통 밖에서 결혼 하지 않음 어떻게 그 혈통을  유지 할수 있었을까? 황제의 어머니가 한국와  먼 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데 2000년이란 기간은 그다지 긴것 같지 않고, 가족혈통 보존에 기여 했다는 생각이 든다. 일본황실은 가족들끼리만  혼인 했을까?


ㄴmischiffmaker
일본황제는 한국계임을 인정했어
당신이 말했던 것 중에서 일본황제를 한국계로 연결시키는 역사적근거가 있지만 이것은 한국계만 있었던게 아니라 일본황실에겐 아이누 사람들도 포함 되었다고 생각하는데?


또다시 나는 수십년 전에 읽었던 것을 오해 했거나 잘못 기억 한 걸까?



ㄴㄴted5298
내가 한 대답은 주로 원 질의에 영향을 준  책의 각주를 언급했던 것이고...  아이누 와 일본황실 사이에 잠재적 연결고리가 상당히 많다고 확신하고 있지만, 내가 말할수 있는것은 일본황실에서 족보는 전설이 아닌 확인된 부분에서 봤을때..아이누 와 일본인 사이에 오랜 접촉을 보면 아이누족이 일본 지배계급의 조상이 될 가능성은 거의 없다는 겁니다.
그러나 내가 확신 하는것에 대해 보다 더 봐야 하겠다는 거지요


ㄴㄴㄴLuguaedos
아이누 역사와 인류학에 대해 알아보란 거야? 


ㄴCarionis
훌륭한 답변이네. 난 진짜 그걸 읽어보는 것을 즐겼어. 앤더슨이 함스부르그 와 부르봉 왕족들을 언급을 했지만, 그건 함스부르크 가계가 독일 과 혹은 스페인 의  최소한 오스트리아 밖에서 '국가적 왕조'로서 분명하지 않는 이유가 뭔지 그이유에 대해서는 명확하지만 부르봉 왕조는  어뗐을까요? 민족주의적 혁명이 꽤 국가주의적 이었다는 건 민주주의 에 바탕을 둬서 그런겁니까?



번역기자:떠도는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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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극 19-05-04 10:29
   
오호라~
이해한다 19-05-04 10:37
   
본질에 접근하지 않고 다른 변명만 늘어놓고 있는 거 같군요. 왜 가장 오래된 백제왕릉에 대해 더이상 연구를 하지 않는지 물었는데. 고서가 아닌 날조가 빈번하게 일어났던 시기에 쓰여진 책을 근거로 검증되지 않는 사실을 사실인양 주장하는 군요. 음.... 그냥 일본 답군요.
     
ckseoul777 19-05-06 01:52
   
아니 지네 왕이 애길한것을 가지고도 부정을하려고하네요?
꿀순딩 19-05-04 10:44
   
잘 봤습니다
우디 19-05-04 10:48
   
잘 봤습니다
트레져sn 19-05-04 10:48
   
기원까지는 무리지만 그댱시 미개했던 일본에게는 확실히 백제의 영향력이 절대적이어서 오늘의 일본을 만들었다
제대로된 인간들이어서 그때부터 관계를 돈독히 이어왔다면 오늘날 얼마나 서로 의지하며 발전했겠는가... 환경과 경제는 발전했지만 미개한 머리는 발전하지못해서 그 수많은 악행과 죄업을 쌓으면서도 오늘에도 인정하지않는 그 미개한 수준은 발전가능성이 없어보인다
월출 19-05-04 10:49
   
본문의 다카마쓰즈카 고분 벽화가 고구려 수산리 고분벽화와 비슷한걸로 아는데
일본 고분에서 고구려 양식의 벽화가 나오는 것처럼 무덤을 파면 팔수록 한반도와 관련이 있다는게 드러나니 일본 고대 무덤들을 공개 안하고 쉬쉬하는거겠지
호롤룰루 19-05-04 10:54
   
1. 왜왕은 백제계가 맞는가?
확실하다와, 신빙성이 부족한 자료를 통해 확실치 않다로 갈리어 싸우는 중. 특히 혈통에 일부 백제계가 있다 하더라도 그건 여러 일본왕 계보 중에 극히 일부라고 축소중. 전 일왕인 아키히토가 자기가문이 백제계란 발언에 대해서는 역사학자가 아닌 비전문가의 발언이라 신빙성이 떨어진다는 헛소리중.

2. 최근 발견된 가장 오래된 왜왕 무덤이 왕실혈통 백제계를 입증할 중요한 자료가 될 지도 모르는데 일본정부는 왜 발굴을 중단하였는가?
 아 그런거 모르겠고 일본은 독자문화로 발전 어쩌구 저쩌구~

3. 일본의 문화는 과연 한반도로부터 기원되었는가?
 여러 역사자료를 보면 확실하다와 중국과의 관계발전과, 독자적인 문화발전을 근거로 애써 한반도의 문화전파 영향을 축소하는 중...
역적모의 19-05-04 10:57
   
흥미로운 제목이라 일단 선댓글 ㅎ
냉혹한현실 19-05-04 11:02
   
일부?

웃고말자!

왜구는 그저 왜구일뿐.
해충퇴치 19-05-04 11:06
   
조작된 역사서 일본서기를 믿는건 아니겠지?
Attender 19-05-04 11:07
   
그것보다도 백제와 일본의 관계를 숨기기 위해서 일제시대떄 백제고분 유물 싹---다 도굴해 간 일본 도둑꾼 클라스...

http://www.gasengi.com/main/board.php?bo_table=EastAsia&wr_id=180359
     
ckseoul777 19-05-05 05:32
   
남의나라 고분을 도굴해가서 보물로 지정하는 왜구클라스!!!
테스크포스 19-05-04 11:09
   
어차피 일본내에서도 정통학계에서는 다 인정하고 있어요 어느 나라나 비주류 학계에서 이상한 주장들은 하는법이죠 상큼하게 무시하면 될듯합니다 에시당초 일본왕이 기자회견에서 '나는 백제혈통입니다'라고 말해버렸는데요 뭘
야요이 19-05-04 11:16
   
생모만 백제계 혼혈이기 때문에

일본 황실은 백제계 후손이 될수가 없습니다
     
예랑 19-05-04 13:03
   
닉값
     
Tarot 19-05-04 13:08
   
그 자료를 가져와보세요 일본거 말고
     
ckseoul777 19-05-06 01:54
   
아니 뭐라고하는건가요??
야요이 19-05-04 11:20
   
반대로 이야기 해봅시다.

고려왕 궁예 아버지도 당나라 출신 입니다

그럼 고려는 중국 혈통??

왜 일본이 전체 백제 후손이 라고 생각하는지?

일본 생모만 백제 혼혈인뎁쇼;;
     
Attender 19-05-04 11:25
   
하플로그룹 왔냐????
그리고 입이 비뚫어져도 말은 똑바로 해야지, 궁예 아버지가 왜 당나라 사람이냐? 신라 경문왕의 후궁이 낳은 정치투쟁에서 희생된 희생자 출신이지

괜히 분탕치면서 역사왜곡으로 대중들 선동하지 말아라
그리고 니네나라 좆본으로 꺼져라
     
굿잡스 19-05-04 11:55
   
고려왕 궁예 아버지도 당나라 출신 입니다 >??ㅋ

잡게고 어그로가 헛소리하군. ㅋ(까이는 일부 낭설을 정설마냥 ㅋ  애잔)
     
aosldkr 19-05-04 12:06
   
궁예는 신라출신인데 뭔 월월소리하냐? ㅋㅋㅋ

애초에 일본 자체가 한반도 집단 이주민들이 토착민들 지배한 역사로 이루어져 있는데 ㅋㅋㅋ

백제뿐 아니라 고구려 신라 포함해서 말야

느그 일왕도 인정한 이야기인데 왜 인정을 못하니? 응?? ㅋㅋ
          
야요이 19-05-04 12:19
   
야마토 황실 이야기하는데

거기서 이주민 야기가 왜냐와요?

그렇게 따지면 한반도에도 중국 이민자들이 상당히 많이 들어왔는뎁쇼

한나라 유민

연나라 유민

진나라 유민

당나라 유민

위나라 유민

명나라 유민

등등

신라 역사에 등장하는 호공도 일본 출신인뎁쇼

가야에도 인도인들오 건너왔고

고려때 베트남인들도 건너왔고요
               
aosldkr 19-05-04 12:49
   
ㅇㅇ 한반도에 중국인 유민 많이 들어온 거 사실.

근데 애초에 일본은 나라 성립 자체가 한반도계 유민에 의해 이루어진 게 정설이라고 ㅋㅋ

중국인이 한국에서 나라 세웠다? 이런 개소리 주장할 건 아니겠지? ㅋㅋㅋㅋ

당장 천황 발언에서 그게 검증되고 있고 말야 ㅋㅋ


좀 적당히 해라 어휴 ㄷㄷ
                    
야요이 19-05-04 14:41
   
신라가 중국 신나라에서 옴.
신나라 유민들이 진한에와서 신라를 건구했다라고 나옵니다
박혁거세가 아마도 신나라 출신일수도
박혁거세가 이주민인 이유는 아마도 다들 아시디시피
천손 신화와 알에서태어난 신화는 이주민을 뜻합니다.
선진 기술을 가져온 이주민 집단을 의미하죠
그렇기 때문에 박혁거세는 중국쪽에서 건너온 이주민계
중국 신나라 시대와 진한 후기 시대랑 맞아 떨어집니다.
그러무료 진나라인들이 진한에 건너와 신라를 설립했다고 볼수있습니다.
이미 유튜뷰에도 이런 논리고 이미 올라외 있습니다
                         
aosldkr 19-05-04 15:50
   
ㅋㅋㅋㅋㅋ

신나라 출신일 "수도" 라니 장난하는 것도 아니고 ㅋㅋㅋㅋㅋ

유튜브 동영상이요?

어디서 약을 파세요 이젠 들이대다 쳐발리니 뭣도 없는 유튜브 동영상 들고와서  근거랍시고 ㅋㅋㅋㅋㅋ


그게 요새 왜구 수준인가봐요? 자기네들이 골라맞춘 근거 내뱉으며 자위하는게?

제발 수준 좀 맞춰요 무식쟁이씨 ㅜㅜ
                         
굿잡스 19-05-04 16:48
   
(삼국사기 신라본기 제 1 시조혁거세거서간) 

"(고)조선의 유민이 신라를 건국하였다" 


(고구려 본기 제 5 동천왕 21년) 

"평양이라는 곳은 본시 선인 왕검의 택지였다. 


누군가는 왕의 도읍을 왕검이라 한다." 
  
  
삼국사기 박혁거세 신화 


사기 혁거세전기에 『始祖 姓朴氏 諱赫居世 前漢孝宣帝 五鳳元年 甲子 四月丙辰[一曰正月十五日] 卽位 號居西干 時年十三 國號徐那伐 先是 朝鮮遺民 分居山谷之間 爲六村 一曰閼川楊山村 二曰突山高墟村 三曰觜山珍支村[或云干珍村] 四曰茂山大樹村 五曰金山加利村{加里村} 六曰明活山高耶村 是爲辰韓六部 高墟村長蘇伐公望楊山麓 蘿井傍林間 有馬跪而嘶 則往觀之 忽不見馬 只有大卵 剖之 有嬰兒出焉 則收而養之 及年十餘歲 岐嶷然夙成 六部人以其生神異 推尊之 至是立爲君焉 辰人謂瓠爲朴 以初大卵如瓠 故以朴爲姓 居西干 辰言王[或云呼貴人之稱] 〉 
  
  
시조의 성은 박씨, 휘는 혁거세다. 전한 효선제 오봉원년 갑자, 4월 병진[혹은 정월 15일]에 즉위하여 왕호를 거서간이라 하였다. 그때 나이 13세였고 국호를 서나벌이라 하였다. 이에 앞서 <조선유민>이 산곡간에 나누어 살며 여섯 촌을 이루었다. 첫째가 알천 양산촌, 둘째가 돌산 고허촌, 셋째가 취산 진지촌[혹은 간진촌], 넷째가 무산 대수촌, 다섯째가 금산 가리촌, 여섯째가 명활산 고야촌이다. 이들이 진한육부가 되었다. 고허촌장 소벌공이 (어느 날) 양산기슭 나정 옆의 숲 사이를 바라보니 말이 무릎을 꿇고 울고 있어 가서 보니 홀연 말은 보이지 않고 큰 알만 있었다. 알을 깨니 어린아이 하나가 나왔다. 거두어 길렀더니 나이 십여 세가 되자 빼어나게 숙성하였다. 六部사람들은 그 출생이 신이하여 떠받들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세워서 임금으로 삼았다. 진한인들은 ‘호(瓠)’를 일러 ‘박(朴)’이라 했는데 처음에 (났을 때의) 큰 알이 박[瓠] 같다 하여 ‘朴’을 성으로 삼았다. 거서간은 진한어로 왕을 이른다[혹은 귀인의 칭호라 한다]』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 

  

<주몽의 나이 22세였으며, 한 나라 효원제 건소 2년, 신라 시조 혁거세 21년 갑신년이었다. 사방에서 소문을 듣고 와서 이곳에 살고자 하는 자가 많았다. 그곳이 말갈부락과 인접하여 있었으므로, 그들이 침범할까 염려하여 물리쳐 버리니, 말갈이 두려워 하여 감히 침범하지 못하였다. 왕은 비류수에 채소가 떠내려 오는 것을 보고, 상류에 사람이 산다는 것을 알았다. 이에 따라 왕은 사냥을 하며 그곳을 찾아 올라가 비류국에 이르렀다. 그 나라 임금 송양이 나와 왕을 보고 말했다. "과인이 바닷가 한 구석에 외따로 살아와서 군자를 만난 적이 없는데, 오늘 우연히 만나게 되었으니 또한 다행스런 일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그대가 어디로부터 왔는지 모르겠다." 주몽은 "나는 천제의 아들로서, 모처에 와서 도읍을 정하였다"라고 대답하였다. 송양이 말했다. "우리 집안은 누대에 걸쳐 왕 노릇을 하였고, 또한 땅이 비좁아 두 임금을 세울 수 없는데, 그대는 도읍을 정한 지가 얼마 되지 않았으니, 나의 속국이 되는 것이 어떤가?" 왕이 그의 말에 분노하여 그와 논쟁을 벌이다가 다시 활 쏘기로 재주를 비교하게 되었는데, 송양은 대항할 수 없었다. 

  

2년 여름 6월, 송양이 나라를 바치며 항복했다. 그곳을 다물도로 개칭하고, 송양을 그곳의 군주로 봉했다. <고구려 말로 옛 땅을 회복한 것을 '다물'이라 하기 때문에 그곳의 명칭으로 삼은 것이다.> 

고구려 백제 신라의 대(삼)한은 다 고조선의 후예.

현대에도 일부 외국인들 유입되었다고 한민족이 외래민족으로 둔갑?? ㅋ

울 민족의 주거지가 기본 요하 연해주 한반도 일대인데

한반도만해도 상원의 검은모루 동굴이나 단양의 금굴등 70만년을 이미 상회하는 전기 구석기  유적등이 90여개  이상  발굴 토착민들이 존재했고

대한해협을 사이에 두고 고조선 말기 남부 삼한인들이 대한해협을 건너 열도로 해양 개척사를 괜히 연줄 아는지?ㅋ(이미 이런 오랜  구석기시대부터 신석기 청동기 시대가 되면서 남부에 인구가 폭발적으로 늘어나면서 가능)
                         
ckseoul777 19-05-06 01:59
   
살다 살다 이런식으로 어그로 끄는사람 처음보네요
               
CowBoy 19-05-04 13:21
   
머꼬......................
               
아리온 19-05-04 13:55
   
보고 싶은거만 보니 이주민족이 그 사회에서 지배적역할을 한건지 피지배적역할을 한건지는 거들떠도 안 보고 있지.
인도인,베트남인? 저 멀리 중동에서도 왔었다.
그 이주민 혹은 난파민이 지배적인 역할과 문화적,발전적 역할을 했느냐는 거들떠도 안 보고 있지?
               
ckseoul777 19-05-06 01:58
   
우와 진짜 어이가없는게  대박이네요( p′︵‵。)(๑´̥̥̥>ω<̥̥̥`๑)☆‪O̤̮K̤̮‬
          
야요이 19-05-04 12:37
   
좀 적당히 하셈;;;
     
위스퍼 19-05-04 12:07
   
궁예는 고려 왕이 아니라 마진, 태봉의 왕입니다.
     
aosldkr 19-05-04 12:07
   
칠지도만 봐도 왜 백제 관계는 바로 드러나지?

후왕 취급받았던 느그 일본~ㅋㅋㅋ
          
야요이 19-05-04 12:22
   
칠지도는 백제가 일본에게 하사한 것이고요

칠지도는 양나라 기원이거요

사서에 보면 애매한데

양나라가 칠지도를 백제에기 줬는데

그걸 일본에게 하사한것? 암튼

백제는 일본의 속국이 였습니다.
               
Attender 19-05-04 12:23
   
* 비밀글 입니다.
                    
야요이 19-05-04 12:28
   
칠지도는 중국 동진 왕조에서 만들어진 것이고 그걸 백제가 가져다가 일본에게 하사한것
                         
Attender 19-05-04 12:30
   
* 비밀글 입니다.
                         
야요이 19-05-04 12:32
   
칠치도 논란은 몇십년 전부터 있었던것

첫째, 백제왕이 왜왕에게 내려준 것이라는 설,

둘째, 백제왕이 왜왕에게 바친 것이라는 설,

셋째, 동진의 왕이 백제를 통해 왜왕에게 전해주었다는 설,

넷째, 백제왕이 왜왕에게 대등한 관계에서 전해주었다는 설 등이 있습니다.
                         
야요이 19-05-04 12:34
   
검색 좀하고 역사 공부좀하셈

돌아다니는 남의 말 죄다 믿지 말고요

역사베이스에서 검색해셔 읽어보심이ㅉㅉ

저는 칠지도가 동진에서 왔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태화에서 태 자는  중국에서만 쓸수있습니다

백제에서는 태 자를 쓸수없습니다.

삼국시대에서 신라-백제 태 자를 쓸수없습니다.
                         
aosldkr 19-05-04 12:44
   
역사공부 운운 ㅋㅋㅋㅋ

지금 당장 운운한 썰들만 해도 다 논파당한 것들인데 공부해야할 건 너 아니냐? ㅋㅋ

동진에서 쓰는 태자하고 아예 글자가 다른데 뭔 ㅋㅋㅋ
느그 고향에서는 둘을 같은 글자로 인식하나봄?

어딜 억지를 부려도 뭔 ㅋ

제발 공부좀 해라 ㅋㅋㅋㅋ
                         
magnifique 19-05-04 13:54
   
이런 신박한 돌아이는 첨보네 진짜 ㅋㅋㅋㅋ

야 넷우익마냥 인터넷에서 끄적거린게 역사의 진실인거같냐 ㅋㅋㅋ

니가 참고하는 자료 출처 다 밝혀라 어디서 이상한거 읽고와서 난리야
                    
야요이 19-05-04 12:30
   
국뽕도 적당히
                         
Attender 19-05-04 12:31
   
왜구야, 애잔하다
                         
Attender 19-05-04 12:33
   
* 비밀글 입니다.
                         
aosldkr 19-05-04 12:47
   
너 스스로도 "백제가 하사했다"고 했네? 하사는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내려주는 걸 말하는 거 알지?

ㅋㅋㅋ 그래 하사한 거지 ㅋㅋㅋ
                         
너굴맨 19-05-04 23:41
   
백제가 왜의 속국? 어디 5CH에서 역사공부했냐 본진으로 꺼져
               
야요이 19-05-04 12:26
   
칠지도는 74.9센티의 칼인데 누가 만든 것인지 누구에게 준것인지를 두고 한일역사학게의 가장 첨예한 대립으로 주장이 상반된다.

칠지도는 부여 궁남지에서 발굴되었다고 하는데 실물이 없어졌는데 1874년 일본 나라현 천리시의 이소노가미신궁의 보물창고에서 대궁사 스가 마시모도가 발견하여 1892년 동경대 하시지교수가 칠지도에 대해 발표하여 세상에 알려진다.

칠지도는 앞면에 34자 후면에 27자의 명문이 있고 7개의 가지가 있는데 세월이 많이 흘러 녹이 쓸고 마모되어 해석상의 이견이 큰 것이다.

대략의 내용은 동진의 연호인 태화4년에 백제왕자인 기생성음이 왜왕에 하사하였다고 하고 249년  야마토가 임나7국을 정벌한후 탐마다례를 하사하고 백제가 칠지도와 칠자경을 바쳤다고 합니다
                    
굿잡스 19-05-04 12:35
   
?? ㅋㅋ 부들 부들

칠지도 명문

앞>泰和四年 五月十六日 丙午正陽 造百鍊[銅] 七支刀 生辟百兵 宜供供侯王○○○○作     
    

<뒤> 先世以來 未有此刀 百濟王世子 奇生聖音 故爲倭王旨造 傳示後世     


侯王 그렇게 이게 몬 뜻인지 모르남? ㅋ(애잔)
                    
ckseoul777 19-05-06 02:01
   
우와~~~~진짜  당신이 걍  짱 먹어요!!!
     
Tarot 19-05-04 13:08
   
그 자료를 가져와 보세요 일본거 말고
     
ultrakiki 19-05-04 13:39
   
날조를 서슴없이 하네...

궁예가 언제 고려왕이였음 ????

그리고 언제 당나라 출신이였음 ????
     
ckseoul777 19-05-06 01:55
   
아니 뭘 반대로 얘기를해요?
이해한다 19-05-04 11:24
   
일본 생모만 백제 혼혈이었다는 근거는? 그 검증되었다는 사유는요?
그리고 일본 생모만 백제혼혈이면 왜 백제 양식에 따라 왕릉과 여러 유산이 있는지요?
또한 백제 혼혈이라고 치면 도대체 왜왕은 어떤 민족이었으며 어떠한 유물이 있으며 이를 증명한 근거는 어디에 있습니까? 단 하나라도 검증된 근거라라도, 아니 그 민족이 있었다라는 정식 명칭과 고서에 언급이라도 된 것이라도 있습니까?
     
Attender 19-05-04 11:30
   
2222222222222222
     
야요이 19-05-04 12:23
   
한반도에도 중국 유물이 상당히 많이 출시게 되죠
가야에도 나오고 백제에도 나오고 교류흔적이라고 보면되겠죠
일본에도 나오니깐 교류 흔적인데 ㅋㅋ
열등감 때문에 일본에 나오는건 죄다 건너가서 세웠다고 주장하는건
정치적 이유임    그저 열등감임
          
Attender 19-05-04 12:30
   
* 비밀글 입니다.
               
야요이 19-05-04 12:34
   
그건 본인 생각이지
BTS 만세 ㅋㅋㅋㅋㅋㅋㅋㅋ 외치셈
                    
Attender 19-05-04 12:37
   
* 비밀글 입니다.
                    
쿤신햄돌 19-05-04 14:00
   
BTS에서
열등감 가득한 왜구라는거 인정하네
니 정체를 이렇게 쉽게 까발리냐
          
이해한다 19-05-04 12:34
   
위에 본문의 해명글과 매우 흡사하네요. 제가 묻는 것에 말하지 않고 다른 것만 말하는 군요. 다시 묻겠습니다. 왜왕이 백제인이 아니라면 어떤 민족이었으며, 다른 민족이라는 근거가 되는 유물이 무엇이 있습니까?
               
다같은생수 19-05-04 13:32
   
근거가 없으니 왜왕이 사실관계 정리해서 말한것을
왜구 아니랄까봐, 왜곡하네요 ㅋㅋ;  정신승리를 이렇게 하는게 애잔합니다..
          
ultrakiki 19-05-04 13:40
   
왜죠 ?
     
ckseoul777 19-05-06 02:02
   
적극적으로 공감하는글입니다  진짜로 알고싶네요~ 우기는데는 약도없다는데
람다제트 19-05-04 11:25
   
저도 그냥 백제와 일본 왕실은 인연이 있는 정도라고 생각해요.
비이콘 19-05-04 11:31
   
번역 고생하셨습니다.. 잘보고 갑니다.
떠나자 19-05-04 11:33
   
다 쓸데 없는소리고 전방후원분 하고 일본왕실 보물창고 정창원 두가지만 까보면
다나오는데 왜안하냐?
굿잡스 19-05-04 11:53
   
우선 쨉  8세기 무렵 편찬된 여러 고대 역사서는 본국 백제가 열도를 담로로 다스리다 한반도의 백제가 망하자 일부가 열도에 눌러 앉으면서 지배하게 되고 이때부터 본격적 일본이라는 국호가 사용.

또한 이때부터 도성 체재가 급격히 나타나면서 우리나라 할때 나라헤이안 극소수귀족시대가 열리군요(극소수귀족시대라 하는건 우리 일부 도래인들을 빼고는 섬나라는 제대로 도시문명이나 학문을 소화할 수준이 못되던 미개  환경이였기에  극소수의 우리쪽 도래인의 문화 향유층. 이때부터  본격 신정정치)

이때문에 눌러앉은 도래인들은  고립된 섬지형에도 본격적 자체 정치체 성립의 정당성 부여를 위해 사서 조작을 감행했고 이렇게 탄생한게 만세일가 즉 왜왕(천황)은 만세로 끊임이 없었다는 조작론을 결정론으로해서 대표적 4세기 신공왕후는 3세기 히미코를 모방한 가공인물임이  일반적  견해(전범 쨉 극우들의 임나일본부설 자체가 이래서 황당 해괴에 이미 한잽 학계에서도 공식 인정. 다만 지금같은 쨉 극우들에 의해 미련을 못버리고 집착, 지속적 해괴한 주장 교육. 섬나라의 고분시대는 도시문명은 희박. 우리쪽 일부 군벌집단이 서열도를 중심으로 개척하기 위한 일종의 산적 원두막같은 시설들이 난립하던 시대상)

그리고 저 본문 사람이 우리나라 가야사를 제대로 모르고 있군요.

울나라는 고조선 말기가 되면 독점적 청동시대가 깨지고 더 강하고 흔한 철기시대가 도래하면서 위만조선뿐 아니라 만주의 강자 부여부터 동예, 옥저, 삼한등 열국시대가  본격 도래

이후 북부를 고구려가 통합하고 남부는 백제 신라뿐 아니라 가야도 존재. 이 가야는 강력한 철기를 바탕으로 초기는 신라를 위협할 정도로 강했지만 고구려의 중장기병에 박살나면서 본격 열도 섬나라로 백제보다 더 먼저 진출.

즉 일본서기등  고대 일본의 사서들은 백제가 열도에 우리 선조인 고조선시대 대한해협을 사이에둔 대마도 이끼섬을 징금다리로한 삼한인들이 서열도 큐슈의 청동 농경을 연 야요이 시대 이후 백제가 가야보다 후발 주자로 있다보니 상당한 변조로  어디서는 황당서기로 불릴 정도로 일본 학계뿐 아니라 국내학계는 이미 이런 서기에 대한 변조는 정론으로 보는 상황. 

대표적 예로 왜왕의 뿌리를 늘리기 위해 실직적 15대  응신왜왕 이전 즉 1대 신무왜왕부터 14대 중애왜왕 및 신공왕후등은 다 가공된 변조에 한반도 본국 중앙조정의 정치상황이 열도로 공간 이동의 정황묘사등 수많은 변조가 확인. 달리보면 이런 한반도 백제 중앙정부의 어라하와 정치변동이 당시  후왕이던 열도 백제 친왕에게도 매우 중요한 현안들이였음을 역설적으로 반증. 

이러하기에 일본 고대사는 왜 사서의 변조로 상당한 주의와 여러 사서교차검증에 특히나 당대 고고학적 발굴과 금석문등이 더 실체적 직접적 비중이 큰게 현실


"8세기 역사학자들의 첫 번째 임무는 이러한 부여족의 일본 정복을 은폐하고 부여족이 이룩한 중앙집권 국가를 당대 일왕네 조상들이 만든 것처럼 바꿔치기 하는 것이었다. 글을 아는 사람이 거의 없던 시대였으면 이런 작업이 그다지 어려운 것은 아니었다."   
'나는 한국의 가야사가 분명하게 확립되는 것을 볼 때까지 오래 살고 싶다.  

- Jon Carter Covell(존 카터 코벨)   

하야시 세이고(林靑梧)는 그의 저서 <일본서기의 암호>에서 “일본 왕통 혈족의 만세일계(萬世一系) 세습제부터가 날조이며, 일본 개국왕은 김수로왕 후손임은 상식인데도 이를 부정, 징구왕후라는 유령을 내세웠다”고 밝혔다. 또 “임나일본부 설치를 날조했을 뿐 아니라 오오진(應神)왕이 백제계 부여(夫餘) 후왕인 의라(依羅)이며, 기토라 고분의 40대 텐무(天武)왕은 신라 김다수(金多遂)임에도 일본인으로 변조했다”
50드론러쉬 19-05-04 12:01
   
일본이 기록에만 집착하고 고고학을 최대한 배제하려고 하는건 다 이유가 있음
굿잡스 19-05-04 12:01
   
일본 속 가야문화 (5) 일본 속 가야 유적지

◆가야계 지명= 일본 규슈에서 오사카로 가려면 세토 내해(세토나이카이)를 통과해야 한다. 세토 내해에 접해 있는 오카야마의 옛 이름은 ‘기비’인데 5세기 전후에는 ‘가야’라고 불렸다. 기비에는 기노성이 있는데 성의 낮은 언덕에는 무덤이 자리하고 있고 그 뒤로 산성이 배치돼 있다. 이 구조는 아라가야, 대가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으로 한반도 도래인 집단이 외부 침략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고향의 군사 방어시설을 축조했음을 유추해 볼 수 있다. 특히 가야계 집단으로 추정되는 이유로 지명을 들 수 있다. 하토리 마을은 기비 가야국의 정치 중심지로 가야촌으로 불렸다. 여기에는 ‘나가라’라는 마을이 있었는데 ‘아나가라(아라가야)’를 줄인 말이라고 전해진다.

http://m.knnews.co.kr/mView.php?idxno=1265855&gubun=#_enliple


USA 캘리포니아 대학. 제러드 다이아몬드 교수“discover誌“1998년 6월호「일본인의 뿌리」  
”고대 한국인의 선조가 일본의 원주민인 조몬인.아이누족을 정복하므로서 일본이라는 나라를 탄생 시켰다.”  

하니하라 가주로(埴原和郞) ... 나라시대(奈良時代- 제50대 칸무(桓武) 왕이 784년 헤이안(平安)으로 천도하기 이전)까지도 한복을 입고 한국음식을 먹었으며 심지어는 한국말까지 사용했는데 고사기(古事記), 일본서기, 만엽집(万葉集) 등에 아직 조작되지 않은 부분은 한국어의 한국식 한자용어가 남아있다”고 말해 전체적으로 일본고사기들이 조작되었음을 밝혔다.  


카큐슈우인대 오오노 스즈무(大野 晋, 1919∼) 교수  

”한국인은 일본열도에 금속 제조및 사용법 야금·금공 기술 염색·피혁제조·베틀 직조·기와 제조·  
의학·역법·천문학·조불(造佛)·사찰 건축·조탑 조경술등 모든것을 가져왔다(‘日本語の 世界’, 1980  

고바야시 야스코(小林惠子) 교수, “26대 게이타이 천황,백제 무령왕 친동생”   

   
가토 에이코(加藤瑛子)교수 “26대 게이타이 천황,백제무령왕 친동생”   

 우에다 마사아키(上田正昭 1927∼ ) 교토대학 사학과 명예교수는 일본에서 두 번째로 오래된 국보급인 고대 ‘신찬성씨록’을 자택 서재에 보관하고 있다. 우에다 교수는 “비다쓰 천황은 백제 왕족입니다”라고 확언했다(2004년 7월11일).  

"제30대 민달(비타쓰)천황(敏達·572~585 재위)은 나라(奈良)에 ‘백제대정궁(구다라오이궁 :百濟大井宮)’을 지었다”     

비타쓰왕의 친손자인 제34대 서명(조메이)왕(舒明·629∼641 재위)도     

"(우리나라 할때)나라의 ‘백제천(구다라강:百濟川) 옆에 백제궁(구다라궁; 百濟宮)과 백제사(百濟寺)라는 큰 가람을 지었다. 조메이왕이 구다라궁에서 살다가 서거했을 때 ‘ 백제대빈(百濟大殯 : 백제의 3년상 장례의식; 百濟大殯)’로 장례를 치렀다’"     
      
-일본 서기
보미왔니 19-05-04 12:06
   
혓바닥이 길구나~ 주절주절 늘어놔바야 백제후손 끝~~
굿잡스 19-05-04 12:09
   
칠지도(Chiljido(Seven-Branched Sword ): 백제(Baekje) 어라하(Eolaha)=Emperor가 왜왕에 하사[(下賜 ; Grant)한 보검)    

<앞> 泰○四年 ○月十六日 丙午正陽 造百鍊[銅] 七支刀 生辟百兵 宜供供侯王○○○○作    
태○사년 ○월십육일 병오정양 조백련[동] 칠지도 생벽백병 의공공후왕○○○○작    

<뒤> 先世以來 未有此刀 百濟王世○ 奇生聖音 故爲倭王旨造 傳示後世    
선세이래 미유차도 백제왕세○ 기생성음 고위왜왕지련 전시후세    

칠지도 명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국립부여박물관 전시 내용)    

<앞> 泰和四年 五月十六日 丙午正陽 造百鍊[銅] 七支刀 生辟百兵 宜供供侯王○○○○作    
태화사년 오월십육일 병오정양 조백련[동] 칠지도 생벽백병 의공공후왕○○○○작    

<뒤> 先世以來 未有此刀 百濟王世子 奇生聖音 故爲倭王旨造 傳示後世    
선세이래 미유차도 백제왕세자 기생성음 고위왜왕지련 전시후세    

태화 4년 5월 16일 병오일의 한낮에 백 번이나 단련한 철로 된 칠지도를 ○○○○가 만들었다. 온갖 적병을 물리칠 수 있으니 제후국의 왕(侯王)에게 주기에 알맞다. 지금까지 이런 칼이 없었는데 백제 왕세자 기생성음이 일부러 왜왕을 위하여 정교하게 만들었으니 후세에 전하여 보이라.  



*금동관모의 소유자, 백제의 중앙 조정에서 왕(王)·후(侯)·장군등의 작호를 수여.  

* 지금까지 발굴된 백제의 금동관모 출토지.  
 공주 수촌리 고분군 등 중서부지역에서 5점, 전남지역에서 1점, 옥전 M23호분 등 가야지역에서도 2점이 출토. 일본 규슈의 에다후나야마(江田船山) 고분.  
  
사진  

http://cafe.daum.net/alhc/3Cdg/675?q=%EC%97%90%EB%8B%A4%ED%9B%84%EB%82%98%EC%95%BC%EB%A7%88(%E6%B1%9F%E7%94%B0%E8%88%B9%E5%B1%B1)%20%EB%B0%B1%EC%A0%9C%20%EA%B8%88%EB%8F%99%EA%B4%80%EB%AA%A8
굿잡스 19-05-04 12:12
   
이런 예는 비단 칠지도에 국한된게 아니라 앞서 규슈일대에서 발굴된 강전선산고분에서도 백제가  담로로 다스리던 지역에서 발견되는 금동관모,신발, 칼 명문 사서 기록등 외에도 

칠지도같은 하사품에 백제 어라하와 열도내 백제 친왕이자 어라하의 후왕이며  왜왕에게 준 일본 와카야마현(和歌山県) 스다하치만(隅田八幡) 신사에 소장된 신사 인물화상경(人物画像鏡) 명문(銘文)에도 지위의 상하 차이와 백제 본국 어라하와 열도 백제 왜왕 관계를 알 수 있는 유물. 

원문(原文) 

 癸未年八月日十大王年寽弟王在意柴沙加宮時斯麻念長奉遣開中費直 

穢人今州利二人荨取白上同二百旱作此竟 

계미년 8월 10일 대왕의 시대에 율제왕이 의시사가궁(意柴沙加宮)에 있을 때 

사마(斯麻)를 영원히 받들어 모시기를 염원하며 보낸다. 

개중[오사카]의 비직과 예인 금주리 두 사람 등이 깨끗하고 질 좋은 구리 200한을 골라서 이 거울을 만들었다. 


기존 대왕으로 지칭된 사마가 누구를 말하는지 일본학자도 몰랐다가 우리쪽 백제 무령의 무덤이 발굴 지석 명문의 사마가 백제 어라하를 지칭함이 밝혀짐. 

즉 이는 백제 본국 무령 어라하(황제)가 열도 백제 친왕인 남동생 계체왜왕 즉 게이타이왜왕에게 준 칠지도와 같은 성격의 하사품.
동키일일일 19-05-04 12:13
   
뭐 중요한 사실도 아닌데...
천년전에 영향을 받았든, 혈통이든 무슨 상관 있나요?
우리도 기자조선이 중국계든, 고유혈통이든 무슨 상관이 있나요?
일본황실도 그렇고, 우리 국민의 혈통에도 많은 피가 섞였는데...
     
쿤신햄돌 19-05-04 14:01
   
우리 국민의 혈통에도 많은 피가 섞였는데...

팩트는 현재 한국인 유전자랑 비슷한 동네는 기껏해야 일본밖에 없음
     
magnifique 19-05-04 14:01
   
쟤들 명분에서 크게 문제가 생김

한반도 침략도 정한론에서 비롯됐고 그 정한론에 의하면 한반도의 원래 주인은 왜구들임
식민지화 후에 드디어 상고의 질서를 회복했다며 정당화까지 했었죠

지금 극우들도 본질적으로 그런 개념을 가진 놈들이고 이게 논파되면 지지기반 다 잃는거임

사실 논파된지 오래지만 언제나 그랬듯이 날조로 버티는 중이죠
저어기 위에 야요이란놈도 거기에 낚인 개돼지임
RaSin 19-05-04 12:15
   
구라치는 ㅅㄲ들 특징이 혓바닥이 길다는 거.
주저리 주저리 이거 저거 다 끌고와서 이야기의 본질을 덮어버림.
고대 일본문화라는게 사실상 한반도 도래인들이 건너가 씨를 뿌려서 파생된게 팩트인데 일본이라는 섬에서 문화가 기원해서 대륙으로 전파되었다는 해양문화기원설을 주장하려다 보니 자꾸 앞뒤가 안 맞아서 궤변을 맞추기 위해 이 소리 저 소리 끌어다 헛소리만 늘어남.


일본이 해양문화기원설이 그토록 자랑스러운 과거였다면 진작 다 파서 세계적으로 홍보했지
굿잡스 19-05-04 12:26
   
"일본 가타카나 기원은 신라 향찰·이두"  

히로시마대 교수 

http://cafe.daum.net/nhpaolo/CZFL/1280?q=%BD%C5%B6%F3%20%C0%CC%B5%CE%20%C0%CF%BA%BB%20%B9%AE%C0%DA


일본에는 8세기 초에 간행된 4가지 고전이 있다.  

고대사 책인 일본서기(日本書紀), 고사기(古事記), 풍토기(風土記), 만엽집(萬葉集)이 있다.  

8세기에 편찬된 이들 책들은 7세기 요동치는 한국의 정세판도에 따라  

가야계, 백제계, 신라계, 고구려계의 황족, 귀족 등  

엘리트 집단들이 대거 신천지 열도로 건너가  

서로 정권을 다투는 우리 한국인들끼리의 피 튀기는 정권 각축전을 담은 역사책이다.  

http://cafe.daum.net/sisa-1/f8lD/714?q=%B8%B8%BF%B1%C1%FD��

魏略曰:其國殷富,自先世以來,未嘗破壞。   

위략 왈 그 나라는 매우 부유하며, 선대로부터 오늘날까지 한번도 파괴당한 적이 없다.   

-삼국지 위지 동이전 부여조   


고구려와 백제는 전성시에 강병이 100만이고 남으로는 오(吳), 월(越)의 나라를   

침입하였고, 북으로는 유주,연,제,노나라를 휘어잡아 중국의 커다란 위협이 되었다.   

수(隨) 왕조의 멸망도 요동 정벌에 의한 것입니다."   

高麗百濟 全盛之時 强兵百萬 南侵吳越 北撓幽燕齊魯 爲中國巨 隋皇失馭 由於征遼   

-삼국사기 <최치원전>
     
Attender 19-05-04 12:27
   
굿잡스님, 여기다가 댓글을 남겨봅니다, 유튜버인 "전우용의 역습" 이라는 사람이 찍은 동영상들 중에서 전우용이라는 사람이 일본의 문화를 관동지방과 관서지방으로 이분법하여, 관동지방을 남성적, 무사적이라고 하고 관서지방을 여성적,온화적이라고 선긋기를하면서, 일본왕이 여성적인 성격을 가진 인물이였다고 하는데, 이게 도대체 무슨말인지 모르겠습니다,

이걸 어떻게 해석해야 하나요....?

링크 :  https://www.youtube.com/watch?v=1JyHwWbQLGU&lc=z23czhozfqb2ydyeuacdp43aizryyn4texj52oennu1w03c010c.1556936606354264&feature=em-comments
          
감방친구 19-05-04 12:44
   
어텐더님, 동영상을 제대로 안 보셨네요
전우용이 아니라 김운용 선생입니다

김운용 선생의 설명은

일본 천황이 실권을 잃고 상징적 존재, 제사장의 역할로 축소가 되고 원씨와 평씨의 대립을 기화로 무사계급 중심의 수백년 내전으로 치달으면서 천황과 천황이 머물던 교토 지역은 여성적 문화를 특색으로 가지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반면에 도쿄를 중심한 관동지역은 백제 멸망기에 백제계를 중심으로 열도의 정권이 수습되면서 신라계, 고구려계 등은 관동지역으로 몰려서 개척을 담당하게 되면서 상대적으로 남성적 성격을 띠게 됐다는 게 김운용 선생의 설명이자 견해입니다
               
Attender 19-05-04 12:47
   
하...이름 잘못썻네, 죄송합니다 감방친구님, 그보다 댓글에 웬 미친놈 하나가 헛소리하는데 어떻게 못하나요;;;;
ysoserious 19-05-04 12:29
   
역사 왜 연구하지?
이세계물이나 만들어...
진실을 마주할 용기도 없으면서
     
Attender 19-05-04 12:32
   
22222222222222 특히 야요이=하플로그룹 같은 토착왜구들
ysoserious 19-05-04 12:31
   
우리가 니들 기원이라해도 자랑스럽지도 않고
어디가서 자랑할 바도 못되는데...
그냥 왜곡하든 말든
이세계물로 만들어도 되니 우리만 엮지마라
khikhu 19-05-04 12:34
   
한국이 뿌리였을 뿐 아니라
사실상 자신들이 노예였다는게 드러나서 부랴부랴 숨긴 것이 아닐까?
하늘나비야 19-05-04 12:42
   
일본 왕이 백제계라고 자기 입으로 말했고 일왕 친척이 한국 부여와서 이미 제사도 지내고 갔는데 일본애들은 여전히 판타지속에서 일본 고유 왕 계보를 찾고 있네요 웃기지도 안네요  내가 내 조상이 누구다라고 이미 말했는데 알지도 못하는 남들이 아니다 당신 조상은 다른 사람이라고 우기고 있는 꼴이 무척 우숩네요 거기다 일왕이 백제계발언 했다고 폐위되었다? 헛소리도 참 작작 하길 나이 들어서 양위한거지 .. 장난 하나 지들 왕이 신이라며 지금도 떠 받들면서 백제계라고 말한 걸 걸고 넘어지면서 양위도 폐위로 둔갑시키는 일본 애들 보면 완전 왜곡 날조와  뒤통수의 나라 일본 답습니다  웃겨 진짷ㅎㅎㅎㅎ
     
ckseoul777 19-05-06 02:04
   
모르는척 인정하기가싫은거죠
하얀그림자 19-05-04 12:56
   
야요이 이 빙ㅅ ㅅ캬
백제가 일본의 속국이라면서
백제가  상국인 왜에 칠지도를 일본에 하사했다고?
하사는  윗사람이 아랫 사람에게 준걸 하사라고 그런단다
기본도 안되있는 놈아
궁예가  고려왕이고 중국인 아버지를 뒀다고?
뭔 개소리냐?
고구려나 고려 족보에 궁예가 왕이었다는 증거 가져온나
ㄱ 병ㅅ ㅅ끼
     
Attender 19-05-04 12:58
   
야요이 = 하플로그룹 = 강릉김씨 = 강원도인

이미 부흥카페에서 진짜 전문가한테 개 찌발리고 치욕당하고 쫒겨남
괜히 만만한 가생이에서 ㅈㄹㅂㄱ 중....
진짜 지속해서 분탕질 치는거 보면 질리지도 않는듯...
          
ckseoul777 19-05-05 05:38
   
헉~~부흥카페같은곳에서 쫓겨났나요? 대박이네요^^
크흐롬 19-05-04 13:04
   
더이상 연구 안한다고 발표하고 그 무덥에 대한 주작을 진행하겠지 완벽히 주작이 끝났다고 판단되면 다시 연구 진행한다고 발표할듯 쟤들 저러는거 한두번보나
테이로 19-05-04 13:04
   
원숭이라 당연한거죠 조상은 따로 있는데 자꾸 사람이 조상이라구하니 부정하는겁니다
감방친구 19-05-04 13:15
   
일본 천황이 말을 교모히 해서 사실을 숨기는데 사실 저것도 놀라운 진전이기는 합니다

일본의 역사는 한반도를 통해 짧게는 500여 년, 길게는 1천여 년 규슈로 이주한 고대 한국인인 야요이인들의 소위 야요인들에게서 시작됩니다

이들이 일본 최초의 금석병용기시대와 농경시대를 열었는데 이게 야요이문화입니다

이들은 한국인과 동일한 유전형질을 지니고 있으며 심지어 무덤의 머리방향이 일제히 한반도 쪽을 향하고 있을 정도로 고대 한반도 및 한국인과 밀접합니다

이들은 선주민인 조몬인을 몰아내고 일본열도에서 그 인구가 급속하게 느는데
1) 자연생식에 의한 인구증가를 초월하는 것으로 자체증가가 아니라 지속적이고도 대량의 이주(한반도에서 열도로)에 따른 것
2) 조몬인의 감소는 야요이인에 의한 살육보다는 야요인이 가지고 온 바이러스에 따른 것이라는 얘기도 있습니다

이 와중에
북큐슈, 서일본 해안가에 기원전후 시기에 정치적, 군사적인 세력이 자리잡는데 이들이 바로 '왜'입니다

이들은 변한과 진한인들이 요동과 만주에서 한반도로 이주할 때에 같이 이주한 동족으로 특히 신라가 진한을 평정할 때에 권력다툼에서 낙오하거나 반대한 세력이 이주하면서 신라를 적대시하고 약탈, 침략하는 성격을 띠게 되며 이들은 가야와 밀접한 관계를 지녔습니다

실질적으로 군사, 정치적인 면에서 일본열도에 최초로 진출한 세력은 가야세력으로 북큐슈와 서일본 일부에 근거지를 두었습니다

그런데 백제가 근초고왕 시대에 크게 성장하면서 본토의 가야가 백제의 속령이 되고

백제가 가야의 기반을 토대로 열도에 진출하게 됩니다

이에 북큐슈의 가야세력 일부는 남큐슈로 쫓겨가게 되고 그곤에 가라쿠니타케(한국악) 등의 지명을 남기게 됩니다

이 당시의 열도는 백제가 우위이나 기존의 가야, 신라계통과 연합한 성격을 띠었으나 점차 백제가 그 지배력을 강화하게 되었고

특히 광개토대왕과 장수왕대에 백제가 나라가 망할 수준으로 털리게 되면서 백제는 활로를 찾기위해 다음의 5가지 일을 합니다

1) 신라와 연합
2) 물길을 사주하여 부여 공격 ㅡ> 북위에 사신을 보내 백제ㅡ물길ㅡ북위'가 연합하여 고구려 고립 시도(북위의 소극적 태도와 고구려의 군사행동으로 실패)
3)남조 정권과의 연합(여기서 소위 북위vs백제의 대전투 기사가 나옵니다)
4)탐라(제주도) 속국화(제주도는 본래 고구려 속령이었는데 백제가 빼앗습니다)
5)열도 완전 장악

특히 5의 경우는 광개토태왕에게 털리기 전 가야를 속령지배하던 무사와 신하들을 열도에 파견(또는 열도로 도피 이주한 수장들에게 관직수여)하여 열도를 백제화하는 개척을 강화해

소위 좌현왕(나라, 또는 무사시노 중심), 우현왕(북큐슈)을 두어 백제의 분국으로 만듭니다

일본 초기에는 가야계와 신라계가 통치하였으나 5세기에 들어서 그 이후는 백제계가 완전장악합니다

즉 일본천황 자체가 백제인이 되는 것입니다

백제는 광개토ㅡ장수왕에 털리면서 왕자(황태자), 또는 임신한 황후를 열도로 보내어 살게 하는 백제왕의 동생, 또는 황태자가 왜왕을 겸직하게 하는 시스템을 만듭니다

즉 왜왕 = 백제 황태자, 백제왕의 동생, 또는 숙부, 또는 퇴임한 백제왕
굿잡스 19-05-04 13:28
   
남북국시대(해동성국 대발해와 동북아 해상 무역을 장악한 천년 신국(神國)의 신라) 이후 제대로 된 교류가 끊긴 신라와 왜국. 
『삼국사기』를 보면, 일본은 신라의 실정을 파악하기 위해 서기 698년, 사신을 파견한다. 

효소왕(孝昭王) 7년, 
3월에 일본국 사신이 이르렀으므로, 왕이 숭례전(崇禮殿)에 불러 접견하였다. (三月, 日本國使至, 王引見於崇禮殿.) 

- 방문 이후, 신라의 선진문화와 발전상에 경악한 일본은 이를 배우기 위하여 서기 703년 대규모 사절단 파견을 결심-실행에 옮기는데... 

성덕왕(聖德王) 2년, 
일본국 사신이 이르렀는데, 모두 204명이었다. (日本國使至, 摠二百四人) 

- 그러나… 통일신라의 수준을 견신라사(遣新羅使) 파견만으로 따라잡기에는 너무나 선진적임을 깨달은 일본. 결국 서기 731년 신라 침공을 통해 강제로 뺏으려고 하는데... 

성덕왕(聖德王) 30년, 
일본국 병선 300척이 바다를 건너 우리의 동쪽 변경을 습격하였는데, 왕이 장수를 시켜 군사를 내어 이를 크게 깨뜨렸다. (日本國兵船三百?, 越海襲我東邊, 王命將出兵, 大破之.) 

- 제대로 상륙도 하지 못하고 박살난 일본, 결국 용서를 빌기 위해 서기 742년에 사신을 파견하지만‥ 

경덕왕(景德王) 원년, 
겨울 10월에 일본국(日本國) 사신이 이르렀으나 받아 들이지 않았다. (元年冬十月, 日本國使至, 不納. ) 

- 완전히 무시당한 일본, 그러나 자존심은 있어서 허세를 부리면서 다시 사과하려고 하지만.. 

경덕왕(景德王) 12년, 
가을 8월에 일본국 사신이 이르렀는데, 오만하고 예의가 없었으므로 왕이 그들을 접견하지 않자 마침내 돌아갔다. (十二年秋八月, 日本國使至, 慢而無禮, 王不見之, 乃廻.) 

- 재차 무시당한 불쌍한 일본. 결국 서기 804년, 통일신라의 속국이 되기로 결심, 조공을 바친다. 

애장왕(哀莊王) 
5년 여름 5월에 일본국이 사신을 보내와 황금 300량을 바쳤다. (五年夏五月, 日本國遣使, 進黃金三百兩.) 

- 이를 기특하게 여긴 신라는 드디어 일본을 용서하고 속국으로서 인정한다. 서기 806년 속국에게 하교하는 신라. 

애장왕(哀莊王) 7년, 
봄 3월에 일본국 사신이 왔으므로 조원전(朝元殿)에 불러 접견하였다. 교서를 내려 말하였다. 『절을 새로 짓는 것을 금하되, 다만 수리하는 것은 허락한다. 또 수놓은 비단을 불교 행사에 사용하는 것과 금과 은으로 만든 그릇의 사용을 금한다. 마땅히 담당 관청으로 하여금 이를 널리 알려 시행하도록 하라.』(七年春三月, 日本國使至, 引見朝元殿. 下敎禁新創佛寺, 唯許修葺. 又禁以錦繡爲佛事, 金銀爲器用, 宜令所司, 普告施行.) 

- 사찰을 수리하는 것조차 '종주국' 신라의 허락이 없으면 감히 하지 못했던 일본. 이후 '속국' 일본에 대한 종주국 신라의 사랑은 계속되고… 신라의 어버이와 같은 사랑에 감동한 일본은 서기 882년, 보답한다. 

헌강왕(憲康王) 8년, 
여름 4월에 일본국 왕이 사신을 보내 황금 300량과 야광주[明珠] 10개를 바쳤다. (八年夏四月, 日本國王遣使, 進黃金三百兩·明珠一十箇.) 

  



倭國乃日本國也. 本名倭旣恥其名. 又自以在極東因號日本也. 今則臣屬高麗也 - 郭若虛.『圖畵見聞志』 卷6. 高麗國 
왜국은 일본국이다. 倭라는 원래 이름을 부끄러워했는데, 극동에 있다고 해서 스스로가 일본이라고 부른다. 고려의 속국이다 




(조선)황제 폐하(皇帝陛下)의 수(壽)가 남산(南山)처럼 높고, 덕(德)은 동해(東海)에 젖으시어... 

  
  
성종 28권, 4년(1473 계사 / 명 성화(成化) 9년) 3월 13일(계묘) 3번째기사 
일본국 경극전 경조윤 좌좌목씨 등이 사람을 보내 와서 토의를 바치다 

일본국(日本國) 경극전(京極殿) 경조윤(京兆尹) 좌좌목씨(佐佐木氏)와 강기운 삼주 태수(江岐雲三州太守) 태선 대부(太膳大夫) 입도(入道)2907) 생관(生觀)이 사람을 보내 와서 토의(土宜)를 바쳤다. 그 서계(書契)에 이르기를, 
“황제 폐하(皇帝陛下)의 수(壽)가 남산(南山)처럼 높고, 덕(德)은 동해(東海)에 젖으시어, 부상(扶桑)의 물이 조회하고 계림(雞林)의 들[野]이 성대하기를 빌고 빕니다. 신(臣)은 선조 이래로 대대로 일역(日役)에서 사사(士師)2908) 가 되니, 마치 진(晉)나라의 범자(范子)와 같은 자2909) 이므로, 오로지 궁마(弓馬)를 맡아 부조(父祖)의 업(業)을 실추시키지 않았습니다. 본조(本朝)에서는 정해년2910) 이래로 중원(中原)에 난리[風塵]2911) 가 나서 전쟁이 사방에서 일어나매, 신의 고을도 함께 싸움터 안에 들어가서 적을 많이 대하게 되니, 요역(徭役)에 나가느라 농상(農桑)을 폐기하여 피륙이 가장 부족합니다. 그러므로 사졸(士卒)들이 타지(墮指)2912) 의 재앙에 많이 곤고(困苦)하여 마치 백등(白登)의 포위2913) 를 당한 것과 같습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귀국의 명주와 무명의 은혜를 내려 주시면, 삼군(三軍)에서 얼어 죽는 것을 구제하고 황제의 은혜를 만세토록 우러를 것입니다. 변변치 않은 토산물 몇 가지를 별폭(別幅)에 갖추어 적으니, 살펴주시면 다행으로 여기겠습니다.” 
하였다. 

http://www.gasengi.com/main/board.php?bo_table=commu07&wr_id=624145&sca=&sfl=wr_subject%7C%7Cwr_content&stx=%EC%A1%B0%EC%84%A0+%ED%99%A9%EC%A0%9C&sop=and


에도막부, 조선통신사 일행에 극빈 대접 

“한해 쌀 수확량 12% 접대비로 사용” 

옥스퍼드大 루이스 교수 논문 

“일본이 조선통신사의 한 차례 방문에 쓴 접대비용은 (일본의) 한 해 쌀 수확량의 12%를 넘었다.” 


http://news.donga.com/3/all/20090202/8690797/1
     
Attender 19-05-04 13:32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낄낄낄낄낄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하플로그룹 = 야요이 ㅂㄷㅂㄷ 개꿀잼 ㅋㅋㅋㅋㅋ
골드에그 19-05-04 13:31
   
잘봤습니다.
가생퍽 19-05-04 13:43
   
나중에 정복하고 우리가 파는걸로

그리고, 우리가 쎄지면 신경쓰지 않아도 지들이 알아서 한국의 후손이라고 나설꺼임
구경꾼 19-05-04 13:46
   
고구려 백제 신라가 망하고 나서도 왜국 열도에서 삼국의 후손들이 박터지게 싸웠는데 그게 전국시대
반도에서 신라가 망하고 지배계층이  만주로 넘어가 금나라를 세워 대륙을 통일
핫핫 19-05-04 13:50
   
본인이 후손이 라는데
왜 지들이 아니라고 바락바락 우기나? 니들은 원숭이고 일왕은 백제계라잖아.

(일왕) 한국에 못 오게 막고
(무덤) 연구도 못하게 막고
니들 변명대로면 당당할 텐데
뭐가 그리 쫄려서...

왜 예전부터 내려온 니들 신(천황)이... 사원도 짓고 참배하던 그 신이... 한국에서 왔다는 게 충격적이냐?
니들 거짓 논리의 시작이나
역사적으로 벌였던 짓거리(천황 만세! 하면서 총알이 빗발치는 곳으로 자/살/하라고 내몰았던 멍청이들..)가 그 근본부터 무너지기 때문에 겁이 나냐?
     
명불허전 19-05-17 18:59
   
힌트 : 열등감
유베알레 19-05-04 13:53
   
잘봤습니다.
굿잡스 19-05-04 13:53
   
도표로 한눈에 보는 천년 사직 고(구)려의 위엄.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ch1002&logNo=30152299778


동북아 최강대국 고구려의 역대 전적. 

http://www.gasengi.com/main/board.php?bo_table=EastAsia&wr_id=58906&sca=&sfl=wr_subject%7C%7Cwr_content&stx=%EA%B3%A0%EA%B5%AC%EB%A0%A4+%EC%A0%84%EC%A0%81&sop=and&spt=-5409&page=1


근현대 독소전쟁 이전 

고대사 세계 최대 대전인 2차 고수전쟁 수나라의 300만 대군은 얼척의 과장인가? 

http://www.gasengi.com/main/board.php?bo_table=EastAsia&wr_id=78013&sca=&sfl=wr_subject%7C%7Cwr_content&stx=%EC%88%98%EB%82%98%EB%9D%BC+400%EB%A7%8C&sop=and




其地後漢時方二千里。至魏南北漸狹,纔千餘里。至隋漸大,東西六千里。 
  

그 땅은 후한때에 사방 2천리였다. 위나라 때 남북이 점점 좁아져서 겨우 1천여 리였으며, 
  
수나라 때 점점 커져서 동서가 6천리가 되었다. -통전 


고구려와 백제는 전성시에 강병이 100만이고 남으로는 오(吳), 월(越)의 나라를 

침입하였고, 북으로는 유주,연,제,노나라를 휘어잡아 중국의 커다란 위협이 되었다. 

수(隨) 왕조의 멸망도 요동 정벌에 의한 것입니다." 

高麗百濟 全盛之時 强兵百萬 南侵吳越 北撓幽燕齊魯 爲中國巨 隋皇失馭 由於征遼 

-삼국사기 


북위의 권력을 쥔 고구려인    

http://blog.naver.com/csred7/80130397982����


고구려 초기 2대 유리왕시절 축조되기 시작한 환도성 

앞 궁궐 건물지 무려 90미터. 

http://mnews.joins.com/news/article/article.aspx?Total_Id=343393



고구려  5세기 
  
<안학궁 남삼문(南三門) 중 남중문(南中門) 38m 앞면 7칸 

안학궁 남궁 1궁전(정전) 62m 앞면 11칸 

안학궁 중궁 1궁전(편전) 87m.  앞면 19칸 > 
  
  
7세기에 세워지고 확장된 당나라의 최대궁전인 대명궁의 정전인 함원전 정면 길이가 67.33m 
  
북경  자금성에서 가장 큰 건물 태화전 정면 64m 


동대사 크기는 높이 48m, 가로 57m, 세로 50m라오. 안의 대불은 15미터  =>우리 백제인에 의해 건립. 



세계 7대 불가사의라는 인도의 타지마할의 기단 크기 94m, 건물 크기 57m 

남북국 시대 발해의 상경용천부 제2궁전 기단 크기 120m, 건물 크기 93.5m 

http://www.gasengi.com/main/board.php?bo_table=EastAsia&wr_id=56234&sca=&sfl=wr_subject%7C%7Cwr_content&stx=%ED%83%80%EC%A7%80%EB%A7%88%ED%95%A0&sop=and
  

  
고구려는 안학궁으로부터 750m 떨어져 있는 유사시를 대비한 배후 산성이 
  
대성산성으로 전체 9km가 넘고 둘레는 7km가 넘으며 남문이 있는 골 안에서는 2 
  
중으로,주작봉과 국사봉 골 안에서는 3중의 겹성에 내부에는 연못이 자그만 
  
치 170여개가 존재. 
  
http://blog.naver.com/bestchoi21/20018007630-> 대성산성 사진 

겨울 12월, 임금이 돌아가셨다. 그때 그의 나이는 98세였다. 임금의 호를 장수왕(長壽王)이라 하였다. 위나라의 효문(孝文)이 이 소식을 듣고, 흰색의 위모관(委貌冠)과 베로 만든 심의(深衣)를 지어 입고 동쪽 교외에서 애도의 의식을 거행하였다. 
  
七十九年 夏五月 遣使入魏朝貢 秋九月 遣使入魏朝貢 冬十二月 王薨 年九十八歲 號長壽王 魏孝文聞之 制素委貌布深衣 擧哀於東郊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 장수왕 79년(서기 491) 


28년(서기 519), 임금이 돌아가셨다. 호를 문자명왕(文咨明王)이라 하였다. 위나라의 영태후(靈太后)가 동당(東堂)에서 애도의 의식을 거행했다. 
  
二十八年 王薨 號爲文咨明王 魏靈太后擧哀於東堂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문자명왕 28년(서기 519) 


세계 최초의 평민교육기관-고구려의 경당 
  
http://cafe.daum.net/hankookhistory/47AT/27?q=%BC%BC%B0%E8%20%C3%D6%C3%CA%C0%C7%20%BC%AD%B9%CE%20%B1%B3%C0%B0%B1%E2%B0%FC%20%B0%E6%B4%E7


동아시아에서 독보적 경지에 올랐던 고구려 고분벽화. 

http://www.gasengi.com/main/board.php?bo_table=EastAsia&wr_id=158308&sca=&sfl=wr_subject%7C%7Cwr_content&stx=%EA%B3%A0%EA%B5%AC%EB%A0%A4+%EB%B2%BD%ED%99%94&sop=and
  

우리나라의 고대 도시 축조 역량과 위엄. 

http://www.gasengi.com/main/board.php?bo_table=EastAsia&wr_id=111385&sca=&sfl=wr_subject%7C%7Cwr_content&stx=%ED%83%80%EC%A7%80%EB%A7%88%ED%95%A0+%EB%B0%9C%ED%95%B4&sop=and



  

유럽의 최대 도시라는 로마를 상회하는 세계 4대 대도시인 신라 서라벌의 위엄.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jurassicgump&logNo=220915736774
  

중국의 동쪽에 신라라는 나라가 있는데, 
그곳에 들어간 사람은 공기가 맑고 부가 많으며 땅이 기름지고 물이 좋을 뿐만 아니라, 주민의 성격 또한 양순하기 때문에 떠나려 하지 않는다 

-창세와 역사서<마크디시(al-Maqdi shi> 


그곳(신라)을 방문한 사람은 누구나 정착하여 나오고 싶어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그곳이 매우 풍족하고 이로운 것이 많은 데 있다. 

그 가운데서도 금은 너무나 흔해 그곳 주민들은 개의 사슬이나 원숭이의 목테도 금으로 만든다. 

-이드리시(이슬람 지리학자)-1154년에 신라가 포함된 지도를 만듬 




우리나라는 문물과 예악이 흥행한 지가 이미 오래되었으며 장삿배가 연이어 내왕하여서 값진 보배가 날마다 들어오니, 중국과 교통하여도 실제로 소득이 없을 것입니다. 거란과 영구히 절교하지 않을 터이면 송 나라와 교통함은 마땅하지 않습니다." 하니 따랐다.  

 <고려사절요 문종 12년>


세계 도시와 비교한 고려의 도시규모 포스!!  

http://www.gasengi.com/main/board.php?bo_table=EastAsia&wr_id=137014����


왜구 500여척을 몰살시킨 세계 최초의 고려 화포함대해전-진포대첩  

http://gunsan.grandculture.net/Contents?local=gunsan&dataType=01&contents_id=GC05700012


왜 여직(진)발해본동일가(女直渤海本同一家)라고 했을까?    

http://www.gasengi.com/main/board.php?bo_table=EastAsia&wr_id=88992&sca=&sfl=wr_subject%7C%7Cwr_content&stx=%ED%95%9C%EA%B7%9C%EC%B2%A0&sop=and����


금나라 황실 조정내의 고구려계(발해인) 파워  

http://blog.naver.com/knightblack/10106493129����

금나라 황릉의 모델은 고려 황릉(왕릉)이었다.’ 12세기 북중국을 장악했던 여진족이 세운 금나라(1115∼1234) 황릉이 고려 황릉과 형제처럼 꼭 닮았다는 비교 연구가 국내에서 처음 나왔다. 금 태조 완안아골타(1068∼1123)가 10세기에 건국한 고려를 ‘부모의 나라’라고 불렀던 것을 감안하면, 당대 사회적 문화적 역량을 총집결시켰던 국책사업인 황릉 조성을 한반도에서 벤치마킹했던 것이다    
      
장경희 한서대 문화재보존학과 교수는 최근 학술지 ‘동방학’에 게재한 논문 ‘12세기 고려·북송·금 황제릉의 비교 연구’에서 “고려와 금 황릉은 양식적으로 매우 유사하며 같은 시기 북송 황릉과 뚜렷이 구별된다”고 주장했다.    
      
http://news.donga.com/3/all/20140313/61666261/1


조선 도시의 포스와 에도시대  

http://www.gasengi.com/main/board.php?bo_table=EastAsia&wr_id=136980����
쿤신햄돌 19-05-04 14:04
   
한반도계 인물들을 신으로 모시는 왜나라 클라스

당당하면 당장 인덕왕릉이라도 파서 연구하던가

쫄려서 그것도 못 하고 있는게 팩트
내추럴 19-05-04 14:07
   
천년의 왕국이 아니라  천년이 넘는 세월동안  감추고 싶었던  한반도에대한 문화적 열등의식이  아무리 왜곡하고 조작해도 백제만큼은  도저히 손댈 수가 없는 증거와 한계가 존재하는 것이  일본의 현실임..  차라리 중국이면 좋았을 것을..ㅋ  결국 이래도안되고 저래도 안되면  유일한 방법은 백제가 한반도와 전혀 관계없는 국가라고 우기는 것 밖에는 없음..  그래서 신라타령하는 것임..
바두기 19-05-04 14:21
   
잘봤습니다.
다크메터 19-05-04 14:24
   
한 원숭이가 아주 발광을 하네.
구석기시대 짱돌마저 땅파서 묻어놓고 주작하다 걸린 ㅅㄲ들이 말은...
우리는 웬만한 유물은 땅파면 그냥 나오기 때문에 어지간한건 취급도 안해. 그거 다 유물처리 하려면 토목공사를 아예 못할 정도거든. 증거가 허벌나게 많으니 손도 못대고 감추는 ㅅㄲ들이 말도 많다. 나중에 지진나서 일부빼고 다 가라앉은 다음에 말바꿔서 노예자처하며 빌지나 마라.
glasis 19-05-04 14:28
   
아 그냥 아니라고해 그냥 방숭이들이랑 엮이지 말자
LIII 19-05-04 15:12
   
우리나라 역사자료 보면 중국쪽 영향받은것과 비슷한건 인정하고 받아들이는데 이상한 시비거는 한분 계시네요, 일본이 이상한거에요. 백제쪽 영향받은거 인정하면 그만인걸 저렇게 "응 유적연구 안해",  "응 조작질 할거야" 이것보다는 훨씬 좋아보이는데 말이죠 그리고 섬나라와 반도의 유적 자체가 비슷하다는건 둘중 하나가 그 문화의 영향을 받았다는 거겠죠 뇌가 있으면 당연한 생각이겠죠. 눈가리고 못본척하는건 좀 유치한 행동같음
소린 19-05-04 15:21
   
가루베지온이 털어간 6호분이 처녀분과 동시에 무령왕의 아버지 동성왕릉일 가능성이 높고 유물자체도 무령왕릉보다도 훨씬 많을거라 추측....
qufaud 19-05-04 15:22
   
개쌍놈의 것들 고대의 연관성은 어떻게든 부인하면서 한반도 땅은 어떻게든 차지할라는 거지 왜구들
역사적으로 한반도에서 왜구들에게 베풀기만 했었지 왜국이 한반도에 도움된건 하나도 없다시피하지
삼국시대부터 시작된 임진왜란 때까지의 끓임없는 해적질과 왜란, 일제강점기 두번의 침략 등등

2차 세계대전 말기에 쪽본국이 미국에게 항복을 하겠다는 조건에
쪽본이 한반도 땅을 포기 못한다는 걸 인정해달라 했었지 쳐죽일 놈들 그러면서 뭐라 고대에 연관된건 싫다? 개놈들
쪽본 때문에 한반도는 지금 분단된 아픔을 겪고있다 마음 같아서는 쪽본에 핵 5000방을 터트려야 속이 풀릴 일인데
황룡 19-05-04 16:00
   
잘봤습니다~!@@!
대구인 19-05-04 16:16
   
뻔한건데.. 일본열도는 그 시절에 백제의 식민지 같은거임
당연히 백제왕이 총독같은걸 친지위주로 임명햇을거고 그게 쟤들이 말하는 황실임 ㅋㅋ
moots 19-05-04 17:12
   
토착왜구들 때문에 댓글 대박이네요 ㄷ ㄷ ㄷ
할게없음 19-05-04 17:14
   
과거가 그렇다고해서 누가 한국 속국하라는것도 아니고 혈통까지 부인할 필요가 있나 뭐 왕이랑 백성들 혈통이 꼭 같은거도 아니고
KYUS 19-05-04 17:27
   
현재 일본을 지배하는 인종은 일본 스스로가 인정한 원주민인 아이누가 아님.
그러므로 미국이 원주민인 인디안을 학살했던 것처럼, 일본도 원주민인 아이누가 외지인에게 학살당했다고 추론할 수 있음.
일본 본토에는 일본인이 없다?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100661
얼토당토않을 것 같은 이 같은 말이 적어도 인류학적인 면에서는 사실에 가까운 것으로 밝혀졌다. 일본 본토에 순순 본토인의 DNA를 가지고 있는 비율이 4.8%에 불과한 것으로 일본 국립유전자협회가 밝혔기 때문이다.
아니야 19-05-04 17:56
   
백제 방계라는 사실을 인정하는게 그렇게 부끄럽나?
지들이 본가가 아니라는 사실에 뭐 엄청난 열등감이라도 있는듯.

직계면 어떻고 아니면 어떠냐. 오히려 뿌리없는게 더 쪽팔린거 아니냐?
니들이 그렇게 떠받드는 일왕이 청동기도 만들 줄 몰랐던 근본도 없는 원시 야만부족 출신이었으면 좋겠냐? 
걍 인정하면 편해진다.
Sulpen 19-05-04 18:26
   
본문의 번역글은 영어일텐데

논리가 너무 일본스러운데요...

본질을 교묘하게 회피해서 이상한 말만 늘어놓고는 대답을 했다는 식의 논리네요 ㅎㅎ
가출한술래 19-05-04 18:26
   
잘 보고 갑니다
전쟁망치 19-05-04 19:07
   
일단 일본 역사서의 가장큰 단점은 뭐니뭐니 해도 공식 기록이 없다는 겁니다.
개개인으로써 전례 되거나 기록 된거라서 공신력이 많이 낮다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지요.
왕이 권력을 잡고 행정을 휘두른 적도 없거니와...
나만바라바 19-05-04 19:11
   
숨기고 왜곡하는건 일류지 암 그렇고 말고 그래서 왜놈이지.
Silli 19-05-04 19:13
   
애초에 일본의 기원신인 스사노오가 한국 출신인건 외외로 모르는 분들이 많던...신라 우두산에서 거주하던 스사노오를 일본에 데려다 모신것 https://www.youtube.com/watch?v=ECb27v1C1RA&t=1121s 초반부분에 나옵니다. 55초 부근부터 스사노오의 기원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새콤한농약 19-05-05 00:01
   
잘 보고 갑니다
자기자신 19-05-05 03:04
   
일본놈들 고대사에 대한 콤플렉스가 아주 심하죠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대표적인예가 구석기유물 유적 날조.조작 ㅋㅋㅋㅋㅋㅋㅋㅋㅋ 한반도 고대국가들은 정복전쟁하고있을시기에 일본은?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상식4 19-05-05 21:50
   
애휴~
그냥 일본서기에서 백제 멸망하고 더이상 조상의 땅에 갈 수 없었다는 기록만으로 그냥 일본이란 국가자체가 백제의 문자 그대로 신민지였음.

그리고 권력의 핵심 귀족이라할 왕비가문이 죄다 고구려 백제 신라계라고 하는데...
귀족들 자체가 죄다 한반도계라는데 왕족만 다른 계열이라?

아예 기초적인 문명 자체가 죄다 한국의 고대 국가에서 이어받았다는데 헛소리 지리구요.

아주 기본적인 상식으로 봐도... 문명 수준차가 천지 차이고 철기문명차이 하나만 봐도 고대 한국인이 일본으로 건너가서 점령하는 것 따위야 주머니 속 물건 꺼내는 것 보다 쉬운 일이고...

굳이 일본의 왕실이 고구려, 백제, 신라계가 아니라면 가야계 것네, 중간에 백제계로 바뀌었다는 설도 학계에서 있기도 하고...
ckseoul777 19-05-06 02:07
   
참~재미있게 잘보고갑니다  번역 수고하셨어요
바니러브 19-05-08 14:51
   
저 옛날이야기를 100%알수도 없지만 확실한거는 비율이 어떻든간에 일본은 백제계의 피가 흐른다는거고
중국이 더 많던 한국이 더많던간에 문화가 전파된것도 맞지.
문화는 항상 높은곳에서 낮은곳으로 흐르는 것이니까.
90년대만해도 일본의 드라마영화 애니만화 등에 잠식되서 한국이 망할것처럼 묘사하지만 정작 드라마영화 케이팝등등 결국 우리나라에서 일본으로 전파되고 있고 심지어 만화조차 웹툰이 일본으로 들어가고 있는중 일본은 만화와 애니만 겨우 명맥을 유지하는듯.
현기증 19-05-09 12:53
   
정말 바보들이 너무많다  일본왕실이 백제계라는건 부정할수없는 사실이고  일왕도 인정한거야  그래서 머 어쩌라고  밝혀지지않은 사실 숨기는 사실이 있을지 모르지만  일본왕실에  백제공주의 피가 섞여있으니 일본은 백제인이 세운 나라라는게  최소 2가지 문제에서 우리한테 불리하다는건 알고나 하는거냐  첫번째로  고려왕실에  몽고피가 섞였으니 고려는 몽고계가 지배한 나라냐  두번째 숨겨진 사실이 있고 실질적으로 백제 왕가가 일본을  지배했다라는게 사실이면 백제의 정통성은  일왕가에게 있는거야 이 돌대가리들아  일왕가는 1천년동안 이어져온 나라고 우리는 백제의 시민일뿐이니까 왕가가 의미 없다라는 의식을 가지고 대하면  일본왕실이 백제게 이든 머든 무슨상관이야
     
굿잡스 19-05-10 22:29
   
일본왕실에  백제공주의 피가 섞여있으니 일본은 백제인이 세운 나라라는게  최소 2가지 문제에서 우리한테 불리하다는건 알고나 하는거냐  >


???ㅋ

쨉 어그로들 하는 쉰소리 하군(위에 사료와 고고학적 증거를 그리 올렸는데로 이해를 못하는 수준
인지? 아니면 애써 부정하기 바쁜 건지? 쯧 )

USA 캘리포니아 대학. 제러드 다이아몬드 교수“discover誌“1998년 6월호「일본인의 뿌리」 
”고대 한국인의 선조가 일본의 원주민인 조몬인.아이누족을 정복하므로서 일본이라는 나라를 탄생 시켰다.” 

”한국인은 일본열도에 금속 제조및 사용법 야금·금공 기술 염색·피혁제조·베틀 직조·기와 제조· 
의학·역법·천문학·조불(造佛)·사찰 건축·조탑 조경술등 모든것을 가져왔다(‘日本語の 世界’, 1980 

고바야시 야스코(小林惠子) 교수, “26대 게이타이 천황,백제 무령왕 친동생” 

일본에는 8세기 초에 간행된 4가지 고전이 있다. 

고대사 책인 일본서기(日本書紀), 고사기(古事記), 풍토기(風土記), 만엽집(萬葉集)이 있다. 

8세기에 편찬된 이들 책들은 7세기 요동치는 한국의 정세판도에 따라 

가야계, 백제계, 신라계, 고구려계의 황족, 귀족 등 

엘리트 집단들이 대거 신천지 열도로 건너가 

서로 정권을 다투는 우리 한국인들끼리의 피 튀기는 정권 각축전을 담은 역사책이다. 

http://cafe.daum.net/sisa-1/f8lD/714?q=%B8%B8%BF%B1%C1%FD����


“일본은 원래 백제땅 일컫는 말이었다”

http://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536435.html#csidx8ee1e7a2f5e985cb1826db4787c666a


위에 친절하게 올려준 내용들이나 관련 쨉서기와 고고학적 여러 명문 내용이 이해 안되는지??

고대 일본이라는 나라가 단순히 공주 어쩌고 드립임?? 뭔 뜬금포로 고몽간의 강화로
고려가 몽골의 부마국으로 국가 대 국가의 혼인 관계를 어쩌고 비교를 하는지??ㅋ

애초에 쨉의 원주 조몬인들은 근대 이전 에도시대까지도 수렵 생활을 할 정도로 미개했고
고고학적으로 열도에 문명이라는게 싹트는 곳이 다름 아닌 부산과 지척의 대한해협을 사이에 둔
큐슈 즉 서열도에서 시작. 이곳에서 고조선시대 삼한이 건너가서 야요이 청동 농경 문명을

이후 삼국시대 본격 가야와 백제에 의해 고분시대를 열고 아스카 문명부터 해양대국  백제 어라하(황제)가 열도를 담로로  지배하면서 어라하에 의해 후왕인 왜왕을 두어 다스리게 하고 그런 하사품으로 발견되는 게 칠지도나 인물화상경등.

고대 일본의 탄생 자체가 이런 우리 한국인 선조들에 의해 도시문명부터 정치체 이후 본국 한반도의 백제가 망하자 일부가 눌러앉아 나라헤이안 시대를 열면서 왕성등이 그때서야 등장하고 일본이라는 국호를 써게 되는데 이걸 몬 고몽간의 정략 결혼으로 어쩌고 함??

몽골이 고려라는 국가의 도시문명부터 정치체를 낳은 나라임??? ㅋㅋ(천년 사직 고구려 태왕 시절
후대 몽골이 되는 실위는 우리 태왕에게 대가리도 제대로 못들고 살았음요. 이런 실위는 거란에도 밟혀 살다(거란 후대 요, 실위 후대 몽골,  말갈 후대 금, 청등 다 고구려에 굴복된 휘하 부용세력이나 일부는 백성화)이후

고수 고당 세계대전급으로 동방문명권이 분열되면서 거란이 본격 성장 이들이 요나라 유목 제국을 세우고 짱국 송나라를 관광시키고 중세 고려까지 치려다 3차에서 요나라 정예 십만이 고려에 궤멸되면서 고,요,송 3강 체재를 이루다 이후 신라계 황제와 발해인 연합으로 나온 금나라에 의해 요,송까지 박살나버리고 이후  징기즈칸이라는 영웅이 등장 몽골 부족을 통합하고 남송과 샌드위치로 금을 치고는 이후 그런 금이 다진 강북 기반위에서 쿠빌라이가 편법으로 대칸에 오르면서 몽골 유목 전통을 지키려는 몽골 내부 세력간의 정치 투쟁이 가속화되는 가운데 고려황제도 무신집권기로 이미 허수아비로 전락. 몽골을 통해 이런 무신집권기를 끝내려는 서로의 정치적 이해관계가 맞아지고 그기에 만주일대 동방명가의 반란을 견제할 다중적 목적으로 고려와 몽골간에 부마국으로 혈족간 동맹 체결이 성립.(이런 몽골도 13세기에 흥했다 1세기정도 패권을 쥐다 분열)

그리고 두번째. 로마제국이 미개한 잉글랜드까지 제국으로 뻗어나가 도시문명을 세운다고 영국이
로마제국의 주역이 됨?? 영국의 일부가 호주에 정착했다고 호주가 영국의 주역 역사인지??
유럽의 여러 민족이 북아메리카에 정착해서 미국을 세웠다고 미국이 영국이나 유럽사를 자기 역사 드립?? ㅋ

어이없은 황당하고 무식한 쉰소리하군. 쯧.