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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K] 英 언론, "왜 한국에는 김씨 성이 많을까?"
등록일 : 14-09-18 13:31  (조회 : 40,834) 글자확대/축소 확대 축소 | 프린트

영국 경제 전문지 이코노미스트에 "왜 한국에는 김씨가 많을까?"라는 제목의 기사가 올라와 많은 관심을 나타내고 있었습니다.
 
 
 
 
001.jpg

 
 
 

<기사 내용 요약>
한국인의 다섯명 중 한 명은 김씨다. 한국의 대통령인 박근혜와 래퍼 싸이(박재상)도 박씨로 10명중 한 명이 박씨라고 한다. 이웃한 중국의 경우 100개의 성씨가 일반적이며, 일본의 경우 280,000개까지 간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왜 한국의 성씨는 다양성이 적은걸까?

이는 한국의 오랜 유교적 전통에서 답을 찾을 수 있다. 성씨는 왕실과 일부 귀족(양반)들만 가질 수 있었으며, 백정, 기생, 장인, 무역상과 같은 하층민들은 성씨를 가질 수 없었다.(중략) 이후 엄청난 부를 축적하고 성공한 상인층들은 성씨를 가질 수 있었는데, 족보를 아마도 몰락한 양반들로부터 돈으로 구입해 받을 수 있었다. (중략) 그로인해 오래전 왕가의 성씨이던 김과 이씨의 성씨가 많아지게 되었다.
 
 
 
 
<댓글>
 
 
 
 
guest-snjsion
나 한국인인데.....이런 사실은 여기 기사를 읽고 처음 알게된거야.
난 이씨인데.....그럼.....우리 조상님들이 알고보면....
내가 들었던 사실과 달리........어쩌면....?
 
 
 
guest-snjiaji
위에 사진만 저게 아니었다면 충분히 공유하고 싶은 기사일텐데.......
왜 굳이 관련없는 사진을 올린건지? 얼굴을 올리던가
(기사에 올라온 사진이 여성의 뒷모습을 좀..음...네...)
 
 
 
ㄴguest-snjiism
글쓴이가 저 사진을 올린건 옷에 적힌 이름을 보라고 올린것 같은데...
 
 
 
ㄴguest-snjiaji
남자 축구 선수들 사진이었다면 이렇지 않았을듯
 
 
 
guest-soelwls
한국인의 약 90프로 정도는 양반을 제외하곤 거의 성씨를 받지 못했었지.
그게 과거 한국 사회의 룰이었고 신분이었어.
이런 개혁이 일본으로부터 식민지배를 당하며 바뀌게 된거지.
 
 
 
guest-sonsaon
확실히 중국이 아시아 여러국에 많은 영향을 끼쳤구나.
거의 수천년간.......모든 한국인 성씨가 중국에서 온건 아니라지만.
예로 박씨가 그렇지.
 
 
 

OnTheContrary
다들 거짓말하지말고 말하길. 기사내용이 궁금한게 아니고 사진보고 들어온거지?
 
 
 
ㄴLanny Yeh
처음에는 언뜻보고 전혀 다른걸로 생각했지만.
맞아. 사실 사진보니까 나도 그랬음 ㅋㅋ
 
 
 
Didier_Lejeune
그럼 북한도 남한이라 같은거야?
저쪽도 동성동본인 사람들하곤 결혼 못해? 이런게 참 신기하네
 
 
 
ㄴjlp277
사실 남한이나 북한이나 같은 나라잖아. 한국 전쟁으로 1953년에 분단되서 그렇지.
같은 조선 왕조 시기를 보냈었고 같은 방식으로 그런건 이어질꺼야.
북한의 지도자가 김씨인걸 생각해봐!
 
 
 

Damn Dirty Ape
나도 이거 항상 궁금했었는데 물어볼데가 없었어. 좋은 기사와 정보 고마워요!
 
 
 
Hector Lebron
우와..완전 신기하고 재밌다.
 
 
 
bampbs
이런 기사들이 진짜 읽을만한 것들이지. 흥미롭고도 정보가 많은 유익한 기사잖아.
그리고 이에 대해선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이 몰랐던 새로운 사실들일꺼야.
 
 
 

Hamakko
이 기사보니까 한국에 있었을때가 생각나네....
서울에서 90년대 중반쯤 살았었는데 와이프랑 자주가는 식당에
직원이 영어로 쓰여진 이름표를 달고있었어. 이름이 No B.S라고 되어있었지.
 
 
 
ㄴW.R.C.
그거 진짜 웃기다! 근데 그 식당 이름이 뭐야? 이미 한참 지난일이지만 가보고싶네!
 
 
 

ㄴHamakko
그치! 용산에있어. 거기 베이컨앤 에그가 진짜 맛있었지!
한국은 진짜 즐거운 곳이었어! 내가 좋아하던 음식도 많았고!
 
 
 
silent night
중국인들 중에서도 김씨가 제법 많더라고. 그쪽도 한 15가지 있었던것 같아.
 
 
 
Vanbrugh
그럼 이름쪽은 상관없는거야? 성씨만 그런거지?
 
 
 
objectivityisthehighestgoal
난 내 성씨를 그닥 신경쓰지 않을듯
 
 
 
guest-ssamlow
이래서 내가 나만의 새로운 성씨로 시작하고 싶어하는거야.
그것만으로도 진짜 멋지지 않아? 박근혜 대통령의 "창조경제"에도 맞잖아.
한국 정부에서도 새로운 가족 성씨를 장려해야해.
 
 
 
chinacat
안녕! 김씨 군단들!
저쪽 북쪽에도 김씨들이 있었지 ㅋㅋ
 
 

Kim77
누가 내 이름 불렀어?
 
 
 
wldnjs0205
Wang Geon이 아니라 Wang Gyeon입니다. 그리고 bon gwan이 아니라 bongwon이구요.
 
 
 

ㄴS.C.S.
알려줘서 고마워요! 수정했어요!
 
 
 

Kim77
장난아니고 이 기사는 정말 자세하고 정확하게 잘 써졌네요.
하지만 사소한것 몇 가지 더 덧붙여봅니다. 단지 "봉건적 헤리티지" 때문에
한국의 성씨 다양성이 적은건 알맞지 않아요.
 
 
 
ㄴsikko6
여길 보니 역시 김씨가 많다는걸 다시 알게되는군!
 
 
 
Ars Longa
정말로 좋은 기사군. 나도 이게 궁금했던참이었어.
 
 
 
KWBL
이 기사가 사실이군....약간은 부정확한것도 있는것 같지만
 
 
 
TolyK
이거 그럼 북한에도 적용되는 이야기야? 다들 그게 궁금할듯
 
 
 
Tropicana312
왜 많은 무슬림들이 모하매드란 이름인지.
슬프게도 앞으로는 김씨와 모하매드가 롤 모델로 세워질수도 있으니 각성하고 조심해야해!
 
 
 
ㄴMPG1973
김, 박, 이는 다 성씨야. 선택할 수 있는게 아니야. 핏줄에 따라 받는거지.
하지만 모하매드는 이름에 속해. 선택가능한거야.
무슬림들은 그 이름을 아들에게 종교적인 영광으로 여기며 부여하지.
마치 라틴 아메리카에서 자신의 아들을 'Jesus'라고 부르거나
유럽 카톨릭에서 딸을 'Mary'라고 부르는것과 유사해.
 
 
 
chlmarti
정말 많은 노력을 가한 기사라는게 보여지는군요.
근데 한국에도 정말 많은 성씨가 있습니다.
다만 250-300개 정도의 성씨에 많이 집중되어 있을뿐.
이건 한국과 북한 모두 같아요. 좀 더 자세히 알아보자면
중국, 대만, 싱가폴 외 다른 중국어권 나라에서는 약 4000개 정도의 성씨가 사용된다고 하네요.
일본은 엄청나게 많구요.
한국이 김씨는 "금", "쇠"를 뜻하는 성씨로 6개의 다른 기원을 가지고 있습니다.
다들 다른 핏줄이란거죠. 마찬가지로 박, 이씨도 다른 조상, 다른 기원인 경우입니다.
 
 
 
KWBL
중국성씨와 한국성씨는 발음상 유사할뿐 또 다를것 같은데


번역기자:그린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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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등록이 금지된 게시물입니다.
아우름 14-09-18 13:32
   
잘봤습니다.
미쳤미쳤어 14-09-18 13:33
   
흠...
HWI 14-09-18 13:33
   
광산김씨도 노예들한테 성씨 많이 팔았으려나...ㅠㅜ
     
엇쮸구리 14-09-18 18:16
   
광산김가들이 유별나게 족보에 대한 집착이 심한걸 보면 김해 등 다른 성씨보단 양호했을지도요. 계파와 본을 통합해서 통합 종친회를 운영하는건 대형 성씨중엔 광산김이 유일할 듯.
근데 종가가 안동에도 있고 전라도에도 있고 그렇지 않나요 광산김가가 아니라 모르겠지만
          
아미 14-09-18 21:23
   
남의 성을 말할 때는 높여야 합니다.
예를들어, 광산김가가 아니라 광산김씨로.
그러나 자기 성을 윗사람에게 이야기 할 때는 반대로 낮추지요.
광산김씨가 아니라 광산김가로.
     
벌레잡는닭 14-09-18 18:20
   
근데 노예가 뭡니까?

노비 보다는 상민들이 성씨를 많이 샀을텐데 경제적 부도 축적하지 못했던 노비들을 왜 거론하시는지
          
타샤 14-09-19 04:12
   
노비가 더 많이 샀을거에요.
상민은 신분적으로 노비보다 우월하긴 해도...
노비는 양반의 소유라 의무가 없어요.
상민은 의무가 다 있죠.

세월호로 비유하면 선장및 선원들은 노비, 학생들은 말 잘듣는 상민.
          
성가심 14-09-19 20:53
   
사실 가장 많은 인구 비율을 차지하던 노비들은 족보를 산 게 아니고
다 자기 주인의 성씨로 편입 되었습니다
크라바트 14-09-18 13:36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드네요.
조선시대에 양반이 된 사람들 말고, 그 이전 삼국시대나 고려시대나 그 때 성을 가졌고 계통을 이어왔던 사람들은 조선시대에 와서도 계속 그 계보를 잇고 있었을까.. 만약 잇고 있었다면 그 성은 양반이 아님에도 계속 유지되고 있었을 텐데, 그런 사람들 중 노비로 전락하거나 한 사람들도 있지 않았을까.. 있었다면 그 사람들은 과연 옛날의 자신들 성을 되찾았을까 아니면 김씨 성으로 바꾸었을까 같은...
     
페퍼 14-09-18 13:48
   
일단 삼국시대때는 성이 없엇어요..
통일 신라시대때 성씨가 들어오기시작햇구요
신라시대땓도 귀족중에도 태반이 성씨가없어서
나당연합당시 당나라사신이 놀랏다고 하죠..
조선시대때 이르러서는 약2%가 성씨를 가지고있었고
조선말에는 70%정도가 성씨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지금까지 종친회를하는 몇몇 종가집 집안아니고서는
대부분 이때 김이박같은성씨에 편입한거죠..
          
크라바트 14-09-18 14:12
   
아..그럼 우리가 알고 있는 김유신, 을지문덕, 양만춘, 장보고 같은 분들은 후세 사람들이 임의로 성을 붙여준 거에요?
               
네오7 14-09-18 15:02
   
그런 사람들이 귀족급이라 성씨가 있었던 사람들입니다.
                    
크라바트 14-09-18 16:31
   
통일신라 때 성씨가 들어오기 시작했다고 하니 하는 말인데요.
그리고, 제가 언뜻 듣기로는 장보고는 평민 출신이라고 들었어요. 그럼 님 말대로라면 성이 없어야 하는데 어떻게 장씨 성을 가지게 된 걸까요?
                         
mymiky 14-09-18 19:55
   
장보고는 통일신라때 사람임. 게다가 평민출신이나, 나중엔 귀족화 되었고,,
장보고 어릴때는 다른 아명이 있었겠죠.. 장보고라고 쓰여진건, 나중에 성공하고 나서 역사에 등장하고 기록되어 진거고..
사실, 우리가 정사에서 확인할수 있는 사람들은, 뭔가 특별한 삶을 살았거나, 공을 세웠거나, 업적을 남겨야 우리같은 후손들도 알수 있죠. 그외에 많은 평범한 사람들은 걍.. 그냥저냥 살다가 죽어서 역사속에 뭍혀지는거고,,
                    
벌레잡는닭 14-09-18 18:23
   
뭔 소리합니까?

신라가 태동하던 시대 6부족에 각기 성씨가 부여되고 체계를 갖추고 있었는데요

6부족이 모두 귀족이었다는 소리입니까?
                         
김쫄깃 14-09-19 10:14
   
네 모두 귀족입니다
          
SRK1059 14-09-18 14:13
   
고려 시대까지는 일반 백성의 성씨가 보편적이지는 않았지만
조선 시대 초기에는 대부분의 백성들도 성씨를 가졌다던데요?
일반 백성들 중에서 노비와 천민은 성씨를 가지지 못했지만
그 외의 백성들은 성씨를 가졌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1909년에 민적법이 시행되면서 신분 불문하고 모든 사람들에게 성씨가 부여됐는데
호적을 담당한 만단 관리나 경찰이 마음대로 성씨를 지어줬다고 함.
조선 시대 말기까지 대부분의 사람이 성씨를 가지지 못했다는 말은
민적법 시행 당시에 성씨를 부여한 것을 과대포장한 것이아닐까 생각함.
          
북창 14-09-18 14:40
   
삼국시대 때 성씨가 없었다는건...대체 무슨 근거죠?
삼국시대 역사 인물중...성씨 없는 인물이 몇이나 된다고...
노비들 성씨가 없단 말씀이신가...
               
김쫄깃 14-09-19 10:16
   
역사적 인물들은 대개 귀족들이죠. 왕족과 일부 귀족을 제외하곤 성씨가 없었습니다.
신라후기 유력한 지방호족이었던 왕건도 처음에는 성씨가 없었습니다.
          
서울맨 14-09-18 17:18
   
삼국시대 성이 없다는 페퍼씨 말은 일반 백성을 말하는 걸까요.

박혁거세 김알지 석탈해로 알려진

신라 건국 설화에 나오는 신라 왕의 성씨가 박 김 석 입니다.
          
벌레잡는닭 14-09-18 18:18
   
통일신라시대는 어느 지역에 존재하던 나라이죠?

대한민국엔 통일신라라는 시대는 없었습니다

다카키마사오상의 역사 왜곡을 그만 버리세요
               
김쫄깃 14-09-19 10:17
   
고구려의 멸망이후 발해의 건국까지 약 2~30년정도 신라만 남아있는 시기는 확실히 존재합니다만
          
RedOranG 14-09-19 09:34
   
흠.. 일단 제 시조는 신라시대 경덕왕때 사람인데.. 성이 있군요;;
렌보우 14-09-18 13:37
   
그냥... 알타이어족이라서 그런건데;;; 알타이가 金이라는 뜻
이 논리라면 한국은 왕씨 천지여야 함~
고려초 하층민까지 성씨가 많이 정착되었는데 칭제건원한 고려황제의 왕씨는 소수~
아마... 이거 일본 역사 같은데요.
     
별명없음 14-09-18 13:48
   
조선건국 후에
이방원이 왕씨들을 싸그리 잡아다가 섬으로 보내준다고 해놓고 수장시켰죠...

당시에 눈치채고
왕(王)씨 성에서 옥(玉)씨 주(主)씨 등으로 점 하나 찍어서 성을 바꿔서 살아남은사람들도 있구요...

고려 시대에 많이 하사된 성이 왕씨인데...
호족들하고 엄청나게 많은 정략결혼 + 건국 공신들 중에 성이없던 사람들에게 성을 하사함...
대충 비슷한 개념으로 1등 공신뻘에겐왕씨 성을..
2등 공신들에겐 최씨 성을 하사하는 식이었음...

제 시조도 고려 초기에 성을 하사 받음...
          
렌보우 14-09-18 16:04
   
네~ 확실히 왕씨는 따라하기 힘들었겠네요.
이 댓글로 왕씨 역사가 기억납니다.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연아는전설 14-09-18 21:40
   
ㅎㅎ 맞습니다 지금이야 김 이 박 최 등의 성이 대다수지만 실제 조선 건국 초기에는

왕씨가 가장 많은...번성한 성이라고 봐야합니다  하지만 전세계 어디에서도 볼수없는

씨족 말살정책으로 대부분 수장당하죠

그리고 겨우 살아남은 왕씨들은 성씨를 바꾸게 됩니다 물론 그대로 사용한 사람도 있지만

王 , 玉 , 主 , 龍 , 全 씨등은 지금도 한집안이라 생각하고 있는 가문들이 꽤 있습니다

배우 전지현의 본명은 왕지현이죠 바꾼이름이 전지현 ㅎㅎ 같은 집안 성씨입니다
               
mymiky 14-09-18 22:40
   
수장당해 많은 죽은건 사실이지만, 왕씨가 가장 번성했다? 글쎄요?

왜냐면, 고려왕실 사람들은 어머니쪽이나 할머니쪽 성씨도 많이 사용했거든요.
조선과 달리 근친혼도 있어서, 공주들은 아버지 왕씨 성 안쓰고, 다른 성씨 사용했던 예가 비일비지 했습니다. 고려의 왕씨는 국성이였으나, 생각외로 당시에도 숫자가 많진 않았을 겁니다.

왕씨들이 성씨를 바꾸더라도, 흔히 알려진 것처럼, 옥씨니, 전씨로 아예 다른 성으로 바꿨다기 보단 어머니쪽 외가쪽 성씨로 바꿨으며, 조선 문종때쯤 옛 고려후손인 왕씨들은
왕씨 성 다시 환원해도 된다고 허락이 떨어진게 조선실록에 나와있습니다. 아마, 그때쯤에는 이제 조선의 기반도 다져졌고,  고려 복위의 반란의 위험도 없어졌으니 허락했을듯.

전지현씨는, 본명이 왕지현이지만, 자기 조상이 왕씨성을 사성받은거고(난 그리 알고 있음) 사성은 사성일뿐.. 왕족으로 편입되는 것과는 별개의 것입니다.

전지현은 예명이구요. 왕씨가 전씨로 낑겼을 가능성 전 낮게 보지만..
소수가 낑겼다고 해도, 과연 그게 몇이나 될 것이며, 그로써 전씨혈통이 왕씨와 한집안이라고 생각할만큼 가까워졌다? 택도 없죠-.- 엄연히 왕씨와 전씨는 다른 집안입니다.

제가 전씨라서 잘알죠. 집안 어른들 이런 소리 들을때마다 실없는 소리일뿐이라고 일축하심..
                    
연아는전설 14-09-19 21:49
   
ㅎㅎ 전씨라서 잘안다가 아니라 전가라서 잘안다고 글쓰세요

그리고 나도 전가입니다 본은 전주이며 51대손입니다 그쪽은 어떻게 되나요

田이 全가 흉내 내는건가? 全가가 조낸 많을거 같아도 80년대 초에 전국에

파악된 숫자가 겨우 3만이 넘고 4만이 안되는 숫자였는데...집안어른들이 일축한다라...

내 어릴적 국민학교(현재 초등학교) 다닐적에 시사에 나가면 갓쓴 어른들이 경어를 써주

더군요  돌림자도 궁금해 지는군요 댁이 전가라구 하니 참 궁금합니다
잡덕만세 14-09-18 13:38
   
김씨라고 다같은 김씨가 아닌데 조상이 완전히 다른 김씨까 태반
     
악당 14-09-18 13:54
   
김씨는 크게 2가지 계열입니다. 김해김씨계열과 경주,광산김씨계열이요.
각각 100여개씩 있고요,
경주김씨에서 광산김씨가 나온경우도있고, 김해김씨에서 김해허씨가 나온경우도 있습니다.
인수라 14-09-18 13:43
   
guest-soelwls
한국인의 약 90프로 정도는 양반을 제외하곤 거의 성씨를 받지 못했었지.
그게 과거 한국 사회의 룰이었고 신분이었어.
이런 개혁이 일본으로부터 식민지배를 당하며 바뀌게 된거지.


왜놈들 조작의 영향이 여기까지...
     
엑샤크 14-09-18 13:44
   
ㅇㅇㅇ
     
무난힝 14-09-18 14:04
   
구름우동님 //조선전기에는 인구의 90%가 중기에는 40%가 갑오경장 전후해서는 인구의 20%정도가 성이 없는 무성층이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일제강점기에 민적법이 시행되면서 호적 및 호구정리를 위해 의무적으로 성을 가지게 했다고 하네요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아래 댓글의 구름 우동님 말씀을 보면 꼭 틀린 말은 아닌 것같은데요..?

물론, 인구의 90프로가 모두 일본 덕에 성씨를 받았다는걸로 착각할 수도 있겠지만

사실 관계에 비추어보자면 틀린 말은 아니네요;

한국에 거북한 역사라고 해서 별다른 생각없이 무작정 조작이라고 하는건

대단히 방만적인 태도라고 생각합니다.
          
굿잡스 14-09-18 14:26
   
동서양 어느 나라고 왕조시대에 신분제는 일종의 필요악과 같습니다.(자꾸
 
현대 시선으로 마냥 보니 이런 에러가 발생. 물론 현대에도 독재사회에서는
 
이런 신분제 아닌 신분제가 존재하지만)
 
미개했던 모계 씨족사회에서 인간사회가 점차 정치화 도시문명이 생겨나고
 
소국에서 왕국으로 혹은 제국화되면서 누군가 사회를 이끌고 변화를 주도할
 
리드들은 존재했고 이런 가운데 몰락과 저항세력은 하층민으로 전락했던 역
 
사였음. 도리어 조선은 고려시대보다 이런 사농공상 체재를 확립하면서
 
중세시절에 머물려 있든(왜국처럼 쇼군과 일부 사무라이 계층에 대다수 농
 
노같은 건 하부가 매우 빈약한 후진적 문화 정치 사회상임) 신분사회에서 신
 
라시대의 천민부락마을같은 향소부곡등이 조선시대에 폐지 양인화되고 이
 
들 다양한 신분계층을 통해 좀더 상층과 하층사이의 중간 계층의 두께와 삶의 질
 
,문화 수준의 깊이와 넓이가 증대된 시기입니다. 무엇보다 조선 후기로 가면
 
이미 조선의 신분제는 신분제라는 이름뿐인 이미 와해가 급격히 진행되고
 
있었단 말이죠.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986214&cid=47322&categoryId=47322
 
우선 윗 링크 타고(사진이 깨지군요) 대구지방의 한 경우를
 
예로 조선 후기의 급격한 신분제 이동 양상을 함 보시길 바랍니다.
 
17세기 숙종시기 양반 9.2 퍼센트에 상민 53.7프로, 노비 37.1프로에서
 
19세기  중기 철종시기에 가면 이미 양반이 70프로 상민이 28, 노비는 고작
 
1.5프로에 불과해집니다.
 
(여기서 노비도 노예적 개념도 아니고 천인 즉 천한 신분의 머슴같은 경우가
 
많아서 전란등으로 먹고 살기 힘들거나 세금,군역을 의도적으로 면제받기
 
위해 이런식으로 일종의 위장,신분세탁이나 양반도 이짓을 하는 경우도
 
존재해서 단순히 단어로 판단 어쩌고 해서는 곤란.)
 
이는 임진 이후 납속책같은 신분상승의 제도뿐 아니라 대동법의 시행으로
 
상공업의 촉진 및 농법의 발달로 부를 축적한 농민이나 상공업인들이 증대
 
되면서 이들이 급격히 양반신분제로 변화, 다시말하면
 
대다수가 양반입네하는 더이상 누구도 양반이라고 권위를 내세우기 민망한
 
시대적 흐름으로 가고 있었다는 말이죠. 이에 따른 시대적 급격한 변화속에
 
서 이후 우리의 대한제국이 들어선 것임.
 
 
 
그리고 조선 전기의 대표적 장영실이나 17세기 마의의 실존 인물인 백광현
 
같은 인물등은 다 비천한 신분이죠.(조선시대 장애인들에 대한 사회제도적
 
배려나 시선도 보면 도리어 서구보다 더 발전한 상당히 근현대적 개념까지
 
보였던 나라가 조선이였음)
 
그외 회회인이라고 이슬람인들도 들어와서 국제적 결혼도 하고 태국

사신이 바친 토인들도 조선 성문을 지키는 수문장질을 하거나 왜인이고 여
 
진족등을 지속적으로 받아 들이는 등 일반분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조선이
 
꽉막힌 사회는 전혀 아니였음.

윗 내용에도 있지만 말기 고종 23년(1886)에 노비의 신분 세습법

이 폐지, 1894년 갑오개혁으로 사노비까지 법제적으로 해방되면서 본격적
 
급격한 광무개혁으로 근대 국가인 우리의 대한제국이 들어서기 전,


<순조(재위 1800~1834)는 원년 1월에, "임금이 백성을 볼 때는 귀천이 없
 
고, 내외가 없으며 하나같이 적자(赤子)이다, 노(奴) 이다, 비(婢)이다 하여
 
구분하는 것은 어찌 백성을 똑같이 보는 일이겠느냐. 왕실 노비 36,974명과
 
중앙 관청 노비 29,093명을 양인이 되도록 허락하고, 승정원에 명을 내려 노
 
비안(奴婢案)을 모아 돈화문 밖에서 불태우도록 하라.">는 명을 내리면서
 
조선의 신분제 사회는 급격히 힘을 잃어 버리고 있었습니다.


잽극우나 잽빠돌이들이 21세기에도 지들 열도에
 
4600개의 천민부락쿠의 인도의 카스트제도같은 부락 마을들이 여전히 존재
 
전근대적 차별사회가 존재하는 나라가( 메이지 유신 이후에도 왜국에선 기
 
차안 좌석에도 자국 왜인들의 신분에 따라 1,2,3등석이 존재했던 기막힌 나
 
라였음. 영국의 식민지 시절 인도인 차별같은 정책이 지들 내부에서도 메이
 
지 유신 이후에도 여전했던.얼마나 메이지 유신이 이름뿐인지 우리처럼 이
 
미 내부적으로 신분제가 오랜시간을 두고 점차 혹은 후기에 와서 급격히 와
 
해되었던 상황과는 달리 매우 형식적인지 알수 있는 대목이죠) 우리
 
대한제국을 신분사회에서 해방시켰니,근대화 해줬니는 전형적 캐소리임을
 
다시금 상기하길 바랍니다.
               
무난힝 14-09-18 14:54
   
굿잡스님 논지를 전혀 이해 못하시고 횡설수설하시는 모양인데,

제가 하는 말은 밑에 분의 이야기

(과거에 무성씨의 층은 꽤 많았고,

일제 시절 때 민적법 등을 통해 몇몇 무성층에게 성씨가 새로이 생겼다)
 
를 보니 저 이야기의 사실 관계에 있어서는 그렇게 틀린 적은 없다라는 말을 쓰고 있는겁니다.

무슨 상대를 신분제 해방이니 근대화니 상대를 식민 사관에 쩌든 친일파처럼 몰아가며

 멍멍소리를 하고 앉았나요?

뭐 장황하게 써놨길래 읽어봤더니 혼자서 횡설수설하고 앉아계시네?

다시한번말하지만 대한제국을 신분사회에서 해방이고 뭐고 일제가

한국을 근대화고 뭐고 그딴건 언급한적이 없습니다 ^^

상대의 의견을 마음껏 주물럭거리면서 망상하는건 님 일기장이나 습작 노트에서나 하시길.
                    
굿잡스 14-09-18 16:20
   
물론, 인구의 90프로가 모두 일본 덕에 성씨를 받았다는걸로 착각할 수도 있겠지만

사실 관계에 비추어보자면 틀린 말은 아니네요>??

이거 당신이 올린 글 아님?? 어디서 헛소리 작렬 하면서 누가 누구보고

횡설수설 쉰소리 쳐하시남요? ㅋ

한글 모르시남?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986214&cid=47322&categoryId=47322
 
우선 윗 링크 타고(사진이 깨지군요) 대구지방의 한 경우를
 
예로 조선 후기의 급격한 신분제 이동 양상을 함 보시길 바랍니다.
 
17세기 숙종시기 양반 9.2 퍼센트에 상민 53.7프로, 노비 37.1프로에서
 
19세기  중기 철종시기에 가면 이미 양반이 70프로 상민이 28, 노비는 고작
 
1.5프로에 불과해집니다.
 
(여기서 노비도 노예적 개념도 아니고 천인 즉 천한 신분의 머슴같은 경우가
 
많아서 전란등으로 먹고 살기 힘들거나 세금,군역을 의도적으로 면제받기
 
위해 이런식으로 일종의 위장,신분세탁이나 양반도 이짓을 하는 경우도
 
존재해서 단순히 단어로 판단 어쩌고 해서는 곤란.) >

이거 안보이심?


나는 근거 가져 왔으니 일제 시대 어쩌고 헛소리쳐하는 님의 근거 들고

오길 바람(뭔 잽놈들이 지들 잽어로 성씨 만들어라고 강요해서 울나라사람들이

웃기지도 않아서 뭐뭐 어쩌고 갈겨 놓은 걸로 잽이 울나라에 성씨 만들어

줬다고 날조 짓 쳐할려고? 웃긴)

여기서 어설픈 허접소리 쳐한다고 씨가 먹히는 곳인줄 아심? ㅋ 참나.
          
인수라 14-09-18 17:02
   
일부만 진실이면 그건 진실인가요 거짓인가요. 님은 진실에 가깝다고 생각하시나 봅니다. 제 생각은 다릅니다. 더 나쁜 거짓이죠.

일제시대때 근대적인 호구조사를 해서 주민등록을 시작하는 과정에서 새로 성씨를 만든 사람들이 의미 있을정도로 많다는 근거라도 좀 제시하고 방만하느니 마느니 하는 말씀을 하시죠.

조선말에 이미 신분질서가 붕괴되고 인구의 70%가 (가짜 족보가 있는) 양반 행세 했다는 건 국사시간에 졸지 않았다면 알고 있을텐데... 이런 사실관계에 비추어 저 외국인의 발언은 틀린말이 아닌건가요. 틀린말인가요.
          
딪이 14-09-19 15:21
   
무난힝 // 님딴에는 이 무식한 국뽕들을 좀 개화시켜 주자!!

는 마음으로 쓴걸지도 모르지만,

대한민국의 성씨 유래를 따지는 기사에서 일제 때 성씨를 부여해줬느니 어쩌니 하는, 사실여부를 떠나 의도가 뻔히 뵈는 댓글을

'머 틀린말도 아닌데?' 하고 뒤에 사족을 붙이는건 골자에 따라 식민지 수혜론 옹호론자로 보이기 딱 좋습니다...
     
굿잡스 14-09-18 14:25
   
일본 성씨의 유래?

일본의 성씨가 세계에서 제일 많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성씨가 약 300여개에 이르고 있지만 일본은 10만개의 성씨가 있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일본은 언제나 내전이 많았던 시대가 있었습니다.
막부시대를 거치는 동안 많은 남자들이 전쟁터로 나가서 목숨을 잃어버렸지요.

국내에 남자들이 숫자도 숫자이지만 사람이 너무 없어서 왕국의 기초가 되는 인구가 너무 줄어드는 이유로 일본의 왕은 열도내의 모든 여자들에게 외출할때에는 반드시 담요를 등에 맬 것이며 외출복 내에 속옷은 입지말고 길을 가다가 어떤 사내든 만나면 조건없이 몸을 주라는 칙령을 내립니다.

이때부터 일본 여인의 전통의상인 기모노가 유래되었다고 전해지며 오늘날에도 기모노를 입을때에는 속옷인 사리마다를 입지않는 풍습이 성행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전쟁터에 나갔다가 온 병사들은 살아온 것만 해도 행운이었습니다.

지나가는 모든 여자들을 붙들고 가림없이 다 품을 수 있는 권한이 주어졌으니까요.

그러다보니 아이의 아버지가 누구인지 알 수가 없지요. 하루에도 이놈 저놈 막(?) 하다보니..ㅋㅋㅋ

그래서 대충 이 놈의 아비와 그짓거리를 할때의 장소를 기준으로 작명을 하였다고 합니다.

그것이 오래동안 내려와 일본 개개인의 성이 되었다고 합니다.

실례를 들어보면,

木下(기노시타) - 나무밑에서

山本(야마모토) - 산 속에서 만난 남자의 씨.

竹田(다케다) - 대나무 밭에서 작업을 한 아이.

大竹(오타케) - 큰 대나무 밑에서

太田(오타) -콩밭에서

村井(무라이) - 시골 동네 우물가에서

山野(야마노) - 산에서인지 들판에서 인지 알쏭달쏭

川邊(가와베) - 개천이 보이는 곳에서 만듬

森永(모리나가) - 숲속에서 오래 만난 남자의 애.

麥田(무기타) - 보리밭 에서

기타 등등...

대부분 밭이나 강가...우물옆에서 많이 그랬나봅니다.....^^
그 중에서도 특히 '', 밭 전(田)'''' 자가 많은 것은 아무래도 옷에 물이나 진흙 투성이를 뭍히는 곳을 피해서 하다보니 밭전자가 들어가는 성이 많다고 합니다....ㅋㅋ
          
무난힝 14-09-18 14:29
   
역사적인 유래에서 보니 흥미롭네요.

정확한건 아닌데 알래스카나 이런 추운 지방에서 사는 일부 원주민 부족들도

부족민의 숫자며 남자의 숫자가 부족하다보니 혹여나 드나드는 외지인에게

부족 여자들과 꼭 동침하게끔 했다고 하는걸 스치듯 본 것 같네요.
          
무난힝 14-09-18 14:41
   
http://bizworld.tistory.com/273

http://blog.naver.com/gang623/110072731318

굿잡스님.

기모노의 역사적인 유래와 성씨의 유래에 흥미가 생겨서

이래저래 검색해봤는데 이런 내용도 있던데 이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1.

의상이라는 것이 그렇게 단편적인 이유만으로 생겨나는 것이던가?
생활에 밀접한 관련이 있는 의복이란 자연조건이나 주변사항, 생활,사고방식등이 고루 가미되어
나타나는 것인데 말이다. 지배자가 갑자기 돈을 들여 옷을 고안하고 그걸 생산해 보급했다 치자,
그런데 그 덕분에 갑자기 그 옷을 즐겨 입게 될 사람들이 과연 몇이나 될 것 같으신가? 아니, 영지
안에서 입는 것도 모자라 일본 전체가 즐겨 입게된다음 주류 패션이 된다고? 정말?
 
 
쉽게 생각해도 금방 깨달을 수 있듯이, 앞에 언급한 저 루머는 일단 근본적으로
말이 되지 않는다.

2.

전국시대가 제 아무리 난세라 할지라도 설마 강간이 지배자들의 의해서 눈 감아지는 그런 저질스런
시대였을까? 물론 난세에 도덕적 가치관에 혼란이 오는 것을 완전히 막을수야 없었겠지만 서도, 그걸
권장하려고 옷의 디자인을 새로 고안해 보급하려는 천치들이 꼭대기에 올라 앉아 있던 막장 시대는
아니였을 것이다.
 
[출처] 일본 여성 기모노의 유래에 대한 왜곡 |작성자 Sirius
               
술담배여자 14-09-18 15:04
   
강간이아니라 화간쯤되면 윗사람들이 막을리도없고 막을방법도없었겠죠 ㅇ_ㅇ
지금도 그게뿌리깊어서 여전한데 그땐어땟을려고요?
딱히 목격자가 현장증거도없고하면 처벌도어렵고 그냥 당한여자만억울한건데
권장하라고만들었겠습니까? 뭐  만들어입어보니 그런 숨겨진(?) 효능이있어서
알음알음 널리퍼진거겠지
                    
무난힝 14-09-18 15:30
   
음.. 철저하게 정황상의 이야기만을 하시니 좀 납득이 잘 안되네요..

그게 강간이 아니라 "화간"이었을거라고 생각하시는 이유는..?

그리고 "화간"이라는게 일본 사회에서 지금도 뿌리 깊다라는 말씀을 하시는데... 어째서 그리 생각하시는지..?

만약 강간이었다면 당시 일본 사람들은 전근대적인 사고 방식의 피해자였을 뿐인거고 말이죠..
          
무난힝 14-09-18 14:42
   
3. 기모노의 유래(두산백과사전)

남방의 개방적 요소의 기초위에 일본 야마또 민족이 고온다습한 여름과 한랭한 겨울을 나기 위한 대비책과 작은 체격상의 결함을 감추고 보충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연구, 개발한 것이다.


★ 오비의 유래 ★

직선으로 구성된 기모노를,가로줄로 매듭을 지어 고아한 대조를 이루고,또한 몸의 중심인 허리 동체를 단단하게 지탱해 안정감을 느끼게 하는 오비.

단아한 일본의 미에 없어서는 안될 오비이지만, 기모노에 비해서 에도시대가 되기까지는 그다지 변화가 없었다
호화한 기모노가 유행하기 시작한 아즈찌모모야마(安土桃山時代)시대조차,오비는 아직 가늘고 긴 것을 앞으로 묶는 정도였다.

에도기(江戶期)에 상인의 힘이 증대해도,오비는 폭 2 촌 5 분,현재의 코시히모(腰紐-허리끈)를 조금 두껍게 한 것과 같은 것을 허리에 묶고 있었던 것이다.
묶는 법에는 정해진 규직이 없고,전후 좌우 매고 싶은 곳에 묶어 늘어뜨리는 방식이었다.
현대보다 스타일은 자유로왔지만,오늘날의 오비에 비해 오비라고 하기에 너무 간단한 느낌이 들 정도였다.

에도중기가 되어서야,가부키의 유행에 따라,
여자역의 남자배우가 여성다움을 강조하기위해 폭이 넓은 띠를 등에 묶는 방법을 고안하게 되었다.

그 우아한 모습이 순식간에 마을의 여성들에게 확대되어 인기를 얻어 무늬나 매듭의 변화가 고안되어 현재의 오비의 원형이 완성되기에 이른다.

유행의 근원은 카부키 배우에서 부터 시작했지만 부유한 상인이 보다 화려한 것을 요구해 에시(繪師-궁정 혹은 막부등에 직속되어 그림제작을 담당하는 직인)에게 호화로운 의장을 그리게 하고, 직인에게 정교하게 짜게 한 것이 점차 서민에게도 패션으로서의 기모노로 뿌리를 내려 갔다.

여성뿐만 아니라 남성도 다투어 유행을 추구하고, 에도와 위쪽에서부터 전국으로 유젠 ( 비단 등에 화려한 채색으로 인물,꽃,새, 산수 따위 무늬를 선명하게 염색한 것 )의 기법과 새로운 오비의 형태가 확산 되어갔다.
 
흠흠, 그렇구만.......
그랬댄다.
여성역을 해야했던 남성 연극배우들에게서 먼저 파생되었댄다.
 
 
 기본적으로 현대에서 볼수있는 그 여성 기모노는 일본이 오랜 전란을 끝내고 바쿠후에 의한 전적인 평세가
지속되던 에도시대에 탄생한 것이다.
간단히 생각해 봐도 새로운 문화양식이란 대부분 난세가 끝나고 평세가 시작되어야 등장치 않던가?  밥 먹고
살기도 힘든 난세에 무슨 패션이고 자시고 한단 말인가?
 
우리가 알고 있는 기모노도 똑같다.
평화롭게 일본열도 천하가 통일된 그 에도시대에, 수도인 에도를 중심으로 발달한 상업은 일본내에 상당한
잉여 자본을 축적시켰고, 이에 힘입어 마침내 고위층들은 문화, 그리고 또한 그의 한 부분인 패션에도 관심을
보이기 시작하면서 지금의 기모노의 형태가 확정된 것이었던 것이었던 것이었다.
 
 에도 시대에 패션이란 정말 중요한 것이라서, 1600년대에 이미, 당시로서는 파격적으로 "주문을 하면 앉은
자리에서 옷을 만들어 주는" 가게마저 있었다고 하니, 당시 일본 귀족들이 얼마나 의상에 많은 지출을 했는가
생각해볼 수 있는 사례일 것이다.
사람의 관심이 몰리고 돈이 모이니 문화가 꽃피워지는 것은 당연한 일, 그 때서야 일본은 비로서 중국의
영향을 받던 복식 문화를 버리고 새로운 스타일의 의상을 탄생시켰는데, 이것이 우리가 현재 볼 수 있는
형태의 기모노인 것이다.
[출처] 일본 여성 기모노의 유래에 대한 왜곡 |작성자 Sirius
          
무난힝 14-09-18 15:40
   
4. 기모노는 속옷을 입지 않는다..?

'기모노를 입을 때 속옷을 입지 않는다는 오해는 유카타[浴衣]에서 비롯된 것이다. 유카타는 헤이안시대 귀족들이 목욕 후 물기를 빨아들이기 위해 입은 옷이다. 목욕 가운인 셈이다. 에도시대에는 서민들도 목욕 후 유카타를 입었으며, 집에서 일상복으로 입기도 하였다. 19세기 이후에 여름 외출복으로 입기도 하는데, 목욕 가운 유카타와 구분해서 반드시 속옷을 입는다' [출처-두산세계대백과]

 유카타(목욕가운)은 에도시대를 거쳐 두가지 종류로 나뉘게 됩니다. 즉 목욕가운인 유카타와 평상복인 유카타입니다. 차이점은 속옷을 입느냐 아니냐에 따른 것이군요. 사실관계확인을 위해 다시 동생네에 전화를 걸어 보았습니다. 대답은 '요즘 일본인들은 명절이나 특별한 날에 '기모노'를 착용합니다만, 옛날과는 달리 기모노내에 속옷을 착용하는 것이 일반적'이라고 설명합니다.




기모노[着物]는 '입다'를 의미하는 기루[着る]와 모노[物]가 합성되어 생긴 말로 의복 전체를 가리키는 말이다. 그러나 서양 복식이 전해지면서 현재는 일본의 전통의상을 가리키는 말로 바뀌었다.

기모노는 고소데[小袖]라는 옷이 변화되면서 생겨 났다. 고소데는 헤이안[平安]시대에 오소데[大袖:소맷부리가 넓은 옛날의 예복] 밑에 입는 통소매[筒袖]의 속옷을 가리키는 말이었는데, 나중에 고소데를 겉옷으로 입기 시작하였고, 무로마치[室町]시대에는 그것을 길게 만들어 입기 시작한 것을 기모노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무로마치시대까지만 해도 기모노는 남녀구분이 없었으나 에도시대에 들어와서는 여성의 기모노가 화려해졌다. 여성들의 기모노는 유녀(遊女)들에 의해서 다양하고 화려한 형태로 변했다. 남자들의 기모노는 형태, 염색 등을 신분계급에 따라 엄격히 구분하여 입도록 하였다.

현대 기모노의 기본적인 형태는 소매가 길고 넓은 긴 길이의 옷을 오비[帶]를 둘러 묶은 형태이다. 기모노는 시대에 따라 변화되면서 아름답고 우아한 옷으로 손꼽힌다. 현대의 기모노는 우리의 한복과 마찬가지로 의식이나 행사 때 입는 옷으로 인식된다. 그러므로 때와 장소, 목적에 따라 옷감의 종류, 모양, 색깔, 입는 법이 다르며 종류 또한 매우 다양하다.  [출처 : 두산대세계백과]
               
굿잡스 14-09-18 16:27
   
ㅋㅋ


日 기모노연구가 "기모노의 원류는 백제"
 
서울=연합뉴스) 안인용 기자 = 일본의 대표적 기모노 연구가인 가와다 마치코(河田滿知子)씨는 2일 잠실 롯데호텔에서 열린 한일 문화축제 ''Pre-Festival FantasyFinale 2004''에서 "기모노의 원류는 백제문화"라고 밝혔다.

동북아시아 환경문화연합(대표 강운태)이 주최한 이 축제는 한일 국교정상화 40주년을 1년 앞두고 양국의 의상을 통해 역사를 재조명하고 문화교류를 활성화시키기위해 마련됐다. 축제는 한국의 한복 디자이너 이영희씨와 일본의 기모노 연구가 마치코씨의 전통의상쇼로 진행됐다.

전통의상쇼에 앞서 마치코씨는 "일본은 예로부터 한반도를 거쳐 대륙의 문화를받아들이고 모방하면서 문화를 형성해 나라시대(奈良時代)까지 궁중의상은 색깔과모양이 모두 한복과 많이 닮았다"며 "상의와 하의를 입는 백제의 의복형식이 헤이안시대(平安時代) 초기까지 계속됐다"고 말했다.

그는 "백제에서 들어온 문화를 일본에서 소화하면서 일본 전통의 궁중의상이 완성됐다"며 "그로 인해 귀족시대인 헤이안시대를 꽃피울 수 있었고 그 궁중의상이 1천년을 내려왔다"고 밝혔다.

이번 전통의상쇼에서 마치코씨는 일본 황실의 여성정장이고 황족 여성만 착용하는 전통의상 ''주니히도에''(十二簞)를 선보였다. 주니히도에는 다섯 벌로 된 윗옷인''이쓰쓰기누''(五つ衣)와 짧은 비단옷인 ''가라기누''(唐衣)을 입고 허리 아래에 ''모''(裳)를 입는 옷이다. 마치코씨는 이번 축제를 위해 제작비만 약 1억원이 드는 주니히도에를 제작, 한국에 기증했다.


http://blog.daum.net/ksy3500/2056054
          
호밀빵 14-09-19 14:06
   
세계 어느나라 성씨든 태어난 곳을 칭합니다.

당신이 해석을 그곳에서 응응했다고 하는 것 뿐...

나무 밑에서 응응한게 아니라 나무 밑에서 태어난거죠.

노자가 오얏나무 아래에 태어 났습니다. 오늘날의 오얏은 자두고요.

그리하여 노자가 자신의 성씨를 오얏리(李) 라고 지으며 이씨의 시조가 됩니다.

알에서 태어났느냐, 산에서 태어났느냐, 모든 성씨가 그래요.

서양은 직업적으로 빵집에서 태어났느냐, 가방집에서 태어났느냐 그렇고요.

왜 그걸 응응으로 해석하나요... 기가 막혀서.. ㅉㅉ
     
Captain지성 14-09-18 15:03
   
저말은 사실입니다.
     
kuijin 14-09-18 18:33
   
열등감폭발의 방숭이들ㅉㅉㅉㅉ.......
자유생각 14-09-18 13:44
   
서양인들은 본관의 개념에 대해 이해하기 어려울 겁니다.
김씨의 본관 약 110여개, 이씨 100여개, 박씨 120여개가 있고 한국에서는 이들을 다른 성씨로 여긴다는 걸 알면 신기해 할 듯. (본관이나 성이 달라도 같은 뿌리인 경우가 있긴 합니다만)
Poseidon 14-09-18 13:48
   
천방지축마골피문어돌삼추 . . .
농가무테 14-09-18 13:48
   
저도 말하고 싶은게 있어서 로그인했더니 위에 자유생각님이 쓰셨네요..
거기에 파까지 합하면.. 더 다양해지죠^^
토막 14-09-18 13:49
   
양반들만 성씨를 가지고 있던건 아니죠.
게다가 족보를 사야만 성씨를 가지게 되는것도 아니였고요.
성씨가 없는 평민 천민들에게 양반들이 성을 지어주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특히 양반집 노비들을 양반 자신의 성을 따르도록 하는 경우도 있었죠.
그러니까 양반이 김씨면 그집 노비들도 모두 김씨.
그런데 그렇다고 양반족보에 넣어주는건 아니였고요.

노비들은 자신의 족보의 시조가 되는 거였죠.
그런데. 후기로 가면서 은근슬쩍 양반집 족보에 쓸쩍 끼워넣기를 하죠.
피곤한디 14-09-18 13:49
   
전 권씨인데 지식백과보니 고려 태조왕건때 김행이라는분이 권씨 성을 하사 받은게 시초라네요.
냄비우동 14-09-18 13:49
   
조선전기에는 인구의 90%가 중기에는 40%가 갑오개혁 전후해서는 인구의 20%정도가 성이 없는 무성층이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일제강점기에 민적법이 시행되면서 호적 및 호구정리를 위해 의무적으로 성을 가지게 했다고 하네요
loose 14-09-18 13:55
   
무슨 헛소리를. 본관이 있기 때문에 같은 성이라도 다 다른데. 인터넷 자료보고 긇어와서 기사를 썼나.
열매달 14-09-18 13:58
   
난 창원황씨 좌윤공파.. 몇대손이더라??
     
토막 14-09-18 14:01
   
좌윤이면 종2품이군요.
상당히 높은 직책 이네요.
더블떠블 14-09-18 14:00
   
한국인 90%가 가짜 성씨인 거 모르는 사람도 있나?
님들 족보 확인 해보시면 금방 드러나구요.
왠만하면 성씨 정도는 만들 수 있게 합시다.
누구게효 14-09-18 14:03
   
양반 계층은 불과 3프로 밖에 않된다죠. 97프로가 그이하 신분이였는대, 다들 집에 족보 있잖아요 ㅋㅋㅋㅋ
     
mymiky 14-09-18 20:07
   
족보는 양반들의 전유물이 아닙니다. 법적으로 양인이면 누구나 가질수 있었고, 조선의 출판인쇄 기술의 발달로, 개나소나 조선후기엔 천것들마저 족보위조와 족보사기가 암암리에 성행해서 영조가 이같은 사회문제를 어찌 하느냐고 개탄하며 아주 골머리를 앓았습니다.
드르렁 14-09-18 14:04
   
족보 위조나 판매에 대해 역사학자들이 너무 쉽게 생각하는데,

이를테면 지존김씨 벙쩌파 43대손이 있다치고 그 부분을 위조해서 끼어들려면
지존김씨 벙쩌파의 모든 집안에 보관되고 있는 모든 족보책을 훔쳐내서
43대손 부분을 동시에 위조하고 아무일도 없었던 것처럼 제자리에 돌려놔야 하는데,

천사소녀 네티가 수십명 동원돼도 못할거다 그런 짓은

성씨의 판매는,
위의 설명처럼 위험하고 골치아플게 뻔한 족보 위조보다는,
돈내고 양자 입적이 대부분이었을 거라고 봐야 하지 않을까.
     
술담배여자 14-09-18 14:57
   
양자입적이 아무래도 가장 편하고 쉽겠죠
어느가문이나 종중쯤되면 이게 돈만으로어찌되기힘든단체이고
자기성씨들의 후원을등에업는 단체인데 돈이그렇게 궁할리도없고
선대의 족보를 위조해내거나 변경하려면  종중을 통째로 돈을먹여야한다는건데 어렵죠
아무래도 그냥 방계인물에 양자입적하는것이......
     
스코티쉬 14-09-18 16:07
   
그래서 가짜족보는 지금도 종친회등을 통해서 확인이 가능하죠.
위로 3대정도의 돌림자만 확인해도 구분가능한경우가 많구요.

돈을 겁나 벌어서 양자입적식으로 편입된 경우를 제외하곤 가짜 족보만으로 유지하긴 어려웠을겁니다.
     
mymiky 14-09-18 20:17
   
그래서, 진짜 오리지널 양반들은 집성촌 만들어, 지네들끼리 옹기종기 모여 살죠 ㅋㅋㅋ 조선후기 문화예요. 그게.. 족보만 가지고선, 별 메리트가 없어져서, 그뒤엔 집성촌이나 또는 향교의 명부, 지역사회 유명인사들의 모임명부 같은것으로, 자기들만의 룰을 만들면서 살았습니다.

자기가 낑낀 족보 들고, 그 집안 행사나 모임엔 아마 못 갔을 겁니다.
같은 부류로 취급도 안해줬을껄요?
걍.. 본인의 정신적인 만족감이지..
 
가짜족보 연구하는 사람들은 지금도 좀 있을꺼예요..의뢰인의 자기 집안하고, 종가집 족보하고 비교해서 교차검증해서, 이게 진짜인지? 가짜인지? 알아봐주시는 분을 신문에서 봤었거든요.
근데, 보수적이였던 과거엔 이걸로 파혼되는 경우도 종종 있어서 미안했다고-.-;;
굿잡스 14-09-18 14:06
   
guest-soelwls
한국인의 약 90프로 정도는 양반을 제외하곤 거의 성씨를 받지 못했었지.
그게 과거 한국 사회의 룰이었고 신분이었어.
이런 개혁이 일본으로부터 식민지배를 당하며 바뀌게 된거지.>???

알지도 못하면서 헛소리 쳐하는 ㅋ

(잽은 21세기에도 전국에 천민부락쿠 마을이 4600여개가 넘음)


사람들이 조선사회를 무슨 신분제에 꽉막힌 어쩌고 이런식으로 단순히 보는
 
이유를 모르겠군요.(제대로 모르기 때문일 것임)
 
동서양 어느 나라고 왕조시대에 신분제는 일종의 필요악과 같습니다.(자꾸
 
현대 시선으로 마냥 보니 이런 에러가 발생. 물론 현대에도 독재사회에서는
 
이런 신분제 아닌 신분제가 존재하지만)
 
미개했던 모계 씨족사회에서 인간사회가 점차 정치화 도시문명이 생겨나고
 
소국에서 왕국으로 혹은 제국화되면서 누군가 사회를 이끌고 변화를 주도할
 
리드들은 존재했고 이런 가운데 몰락과 저항세력은 하층민으로 전락했던 역
 
사였음. 도리어 조선은 고려시대보다 이런 사농공상 체재를 확립하면서
 
중세시절에 머물려 있든(왜국처럼 쇼군과 일부 사무라이 계층에 대다수 농
 
노같은 건 하부가 매우 빈약한 후진적 문화 정치 사회상임) 신분사회에서 신
 
라시대의 천민부락마을같은 향소부곡등이 조선시대에 폐지 양인화되고 이
 
들 다양한 신분계층을 통해 좀더 상층과 하층사이의 중간 계층의 두께와 삶의 질
 
,문화 수준의 깊이와 넓이가 증대된 시기입니다. 무엇보다 조선 후기로 가면
 
이미 조선의 신분제는 신분제라는 이름뿐인 이미 와해가 급격히 진행되고
 
있었단 말이죠.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986214&cid=47322&categoryId=47322
 
우선 윗 링크 타고(사진이 깨지군요) 대구지방의 한 경우를
 
예로 조선 후기의 급격한 신분제 이동 양상을 함 보시길 바랍니다.
 
17세기 숙종시기 양반 9.2 퍼센트에 상민 53.7프로, 노비 37.1프로에서
 
19세기  중기 철종시기에 가면 이미 양반이 70프로 상민이 28, 노비는 고작
 
1.5프로에 불과해집니다.
 
(여기서 노비도 노예적 개념도 아니고 천인 즉 천한 신분의 머슴같은 경우가
 
많아서 전란등으로 먹고 살기 힘들거나 세금,군역을 의도적으로 면제받기
 
위해 이런식으로 일종의 위장,신분세탁이나 양반도 이짓을 하는 경우도
 
존재해서 단순히 단어로 판단 어쩌고 해서는 곤란.)
 
이는 임진 이후 납속책같은 신분상승의 제도뿐 아니라 대동법의 시행으로
 
상공업의 촉진 및 농법의 발달로 부를 축적한 농민이나 상공업인들이 증대
 
되면서 이들이 급격히 양반신분제로 변화, 다시말하면
 
대다수가 양반입네하는 더이상 누구도 양반이라고 권위를 내세우기 민망한
 
시대적 흐름으로 가고 있었다는 말이죠. 이에 따른 시대적 급격한 변화속에
 
서 이후 우리의 대한제국이 들어선 것임.
 
 
 
그리고 조선 전기의 대표적 장영실이나 17세기 마의의 실존 인물인 백광현
 
같은 인물등은 다 비천한 신분이죠.(조선시대 장애인들에 대한 사회제도적
 
배려나 시선도 보면 도리어 서구보다 더 발전한 상당히 근현대적 개념까지
 
보였던 나라가 조선이였음)
 
그외 회회인이라고 이슬람인들도 들어와서 국제적 결혼도 하고 태국

사신이 바친 토인들도 조선 성문을 지키는 수문장질을 하거나 왜인이고 여
 
진족등을 지속적으로 받아 들이는 등 일반분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조선이
 
꽉막힌 사회는 전혀 아니였음.

윗 내용에도 있지만 말기 고종 23년(1886)에 노비의 신분 세습법

이 폐지, 1894년 갑오개혁으로 사노비까지 법제적으로 해방되면서 본격적
 
급격한 광무개혁으로 근대 국가인 우리의 대한제국이 들어서기 전,


<순조(재위 1800~1834)는 원년 1월에, "임금이 백성을 볼 때는 귀천이 없
 
고, 내외가 없으며 하나같이 적자(赤子)이다, 노(奴) 이다, 비(婢)이다 하여
 
구분하는 것은 어찌 백성을 똑같이 보는 일이겠느냐. 왕실 노비 36,974명과
 
중앙 관청 노비 29,093명을 양인이 되도록 허락하고, 승정원에 명을 내려 노
 
비안(奴婢案)을 모아 돈화문 밖에서 불태우도록 하라.">는 명을 내리면서
 
조선의 신분제 사회는 급격히 힘을 잃어 버리고 있었습니다.


잽극우나 잽빠돌이들이 21세기에도 지들 열도에
 
4600개의 천민부락쿠의 인도의 카스트제도같은 부락 마을들이 여전히 존재
 
전근대적 차별사회가 존재하는 나라가( 메이지 유신 이후에도 왜국에선 기
 
차안 좌석에도 자국 왜인들의 신분에 따라 1,2,3등석이 존재했던 기막힌 나
 
라였음. 영국의 식민지 시절 인도인 차별같은 정책이 지들 내부에서도 메이
 
지 유신 이후에도 여전했던.얼마나 메이지 유신이 이름뿐인지 우리처럼 이
 
미 내부적으로 신분제가 오랜시간을 두고 점차 혹은 후기에 와서 급격히 와
 
해되었던 상황과는 달리 매우 형식적인지 알수 있는 대목이죠) 우리
 
대한제국을 신분사회에서 해방시켰니,근대화 해줬니는 전형적 캐소리임을
 
다시금 상기하길 바랍니다.
500원 14-09-18 14:06
   
이런 기사의 소스를 제공하는 곳이 어딜까요?
답은 뻔하죠.
     
무난힝 14-09-18 14:25
   
그다지 나쁜 내용의 기사도 아닌 것같은데

의심부터 하고 들어가시네..

외국 사람들이라면 한번쯤 가져볼법한 의문이라고 생각하는데 말이죠.
굿잡스 14-09-18 14:13
   
그리고 노비 정학수라는 사람이 있는데 이 사람은 노비가 양반들을 가르쳤음.  성균관에

잡일하든 수복(守僕)이라는 신분인데 글동냥 배운 실력으로 이후 수백명의 양반이고 대규모

서당을 세워서 가르쳤다는 말이죠.  위에도 말했지만 조선의 노비는 천인 신분의 경우들이지 그 수준도

상당한 사람들이 실제 존재했던게 조선 사회였습니다.

이때문에 경기감영도등을 보면 서구에서도 근대 후기, 현대시기에 되어야 가능했던 의약분업의 보건지식과

사회상이 조선은 이미 후기에 가서 치료는 의원에, 약은 약방에 이런식으로 약방이 상당히 일반화 곳곳에

나타나는 양상이 나오는데 이는 서구보다 앞선 국가적 보건의료 장려인 허준의 동의보감이 편찬되고 학식

이 풍부한 일반 서민 즉 중인 계층의 성장으로 약방을 차리고 글을 읽고 제조할 능력이 되는 사람들의 두

께가 커지면서 나타나는 근대적 사회상이라는 말이죠. 그외에 아녀자도 책읽고 댓글도 적던 세책점같은 오

늘날 책 대여점도 성행할 정도였던게 조선이라는 나라임.이는 당시 왜국에서 에도시대에 무슨 고려시대에

보이든 극소수 위정자나 대상인들이 부와 권력을 독점하고 어리한 저택에서 살면서 일부가 보였던 문화 향

유 폭이나 깊이와는 차원이 다른 것임을 주지하길 바랍니다.



참고로 <조선후기 사회상을 이야기하면서 왜 근대적 면모들이 싹트기 시작했는지의 근거와 전후

상황을 이야기 해보자면> 조선은 공납제의 폐단으로 백성의 부담이 가중되고 임진왜란으로

인해 백성들의 생활상이 더욱 힘들어지자 정치권에서 자신의 기득권을 내려놓는 파격적인

대동법이 17세기에 본격적으로 실시됩니다. 이를 통해 공물폐단에서 점차 벗어나면서

쌀 외에 베·무명·돈[大同錢]으로 대납할 수 있게 했고 집마다하든  호(戶)단위 징수가

결(結)당 징수로 됨으로써 오늘날로 치면 <부자 누진세>같은 상당히 근현대적 조세 정책을 통해 부

호의 부담은 늘리고 가난한 일반 백성들의 부담을 줄이는 효과를 가져오면서 부족한 국가 재정을 메

우게 됩니다.

(그기에 소작농도 기존 반수제 즉 반을 내야하는데에 도조법으로 3분1만 내도록 유리하게

더욱 경감시킴)

이런 획기적 근현대적 개념의 조세정책의 대동법은 단순히 여기에 그치지 않고

대동법 실시 이후 이런 공물을 대행할 집단이 필요해짐으로써 공인(貢人)은 산업자본가로 성장하여

수공업과 상업발달을 촉진시키고  화폐의 유통 촉진과 더불어 수로를 통한 대규모 물류,

인적  운송활동의 증대를 가져와 교환경제체제로 전환되기 시작. 그와 더불어 임진왜란 이후 재정을

메우기 위한 일정 금액을 내면 양반이 되는 납속책이라는 제도까지 만들어지면서 가속화된

상업 화폐경제속에서 성장한 일반 상공인들과 부유해진 농민등에 의해서 신분제가 급격히

와해되는 즉 <조선은 자체내에서 전근대적 신분제 사회에서 근대적인 신분제가 와해되는

사회로 이미 이행되고 있던 나라였음.>(1801년 순종은 이미 공노비 해방등 본격화)
     
무난힝 14-09-18 15:20
   
노비 정학수가 서당을 세워서 양반 자제들을 가르친 일화라던지

당시 조선 신분제 붕괴의 정황이라던지

이래저래 정보는 감사합니다만, 이 내용들은 어떤 맥락에서 쓰신거에요?

좀 뜬금없는 내용들이네요.

그리고 일부 사실을 통해 전체를 호도시키고 계시는데,

조선 시대에 정학수며 장영실이고가 있다고해서 그런 기술자들이며 능력있는 사람들이

신분이 천하다고해서 기본적으로 천대받던 사회라는 사실이 변하는건 아니죠.

그리고 천민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데 중인의 두께를 이야기하면서 갑자기 일본과의 비교로 넘어가네요.

전혀 관계없는 내용에서도 앵무새처럼 한국한국거리는 넷우익과 차이가 뭔지 궁금할 정도.

또 ,전근대적인 신분제 붕괴 기로를 걷고 있었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천민에 대한 멸시는 여전했고,

님이 말씀하시는 신분제 붕괴는 평등 사상과 같은 근대적인 맥락에서 비롯되는게 아니라

 신분제 이동의 욕구에서 비롯되는 거였기 때문에 양반 비율만 높아지는 괴이한 형태였죠.
          
렌보우 14-09-18 15:28
   
다른 댓글들 검색해보세요
무난힝님은 일뽕입니다
잘 알려줘도 모른체 조작질입니다
아니면 처음부터 왜곡된 사관을 갖고 있거나
               
무난힝 14-09-18 15:41
   
렌보우님은 외골수입니다.

다른 댓글 보세요 .

대화와 토론이란걸 모릅니다.

렌보우님은 이성적인 사고란게 없습니다.

자신과 의견이 다르면 일뽕이라고 합니다.

편을 가르려고만 합니다.

조작질은 무슨 조작질..?

뭘 조작했는지 말하지도 않고

뭐가 조작인지는 말하지도 못하고

뭘 말하는지도 눈가리고 아웅하시는 분은 뭡니까?

그저 다른 댓글 검색하면 그만인거죠?

저는 정도를 넘는 댓글이나 사실 관계에서 어긋나는 사실들에 대해서는

주의를 주려고만 노력하는겁니다.

상대가 일본이 엮였다고 해서 무조건 아무 말이나 해도되는건 아니지 않습니까?

그럼 넷우익이랑 차이가 뭔가요? 말씀해보세요.

애초에 님같은 분은 그냥 일본까는 것만 같으면 좋아요! 누르시는 분 아닙니까?
                    
렌보우 14-09-18 15:53
   
야구게시판, 축구게시판에서 이 분 검색하거나 물어보시면 다 압니다. 일뽕이에요. . .

제가 쓴 댓글은 의견도 없고 대화/토론도 아니고,

그저 일뽕이 누구라고만 알린 댓글입니다. 정곡이 찔리셨나 봅니다.
                         
굿잡스 14-09-18 16:29
   
글의 문맥을 이해 못하는 건 당신 같은데

어디서 잽강점기에 성씨 9할 쉰소리 하시남요 ㅋ

어이없는. 딱 보니 날조짓 하는 어설픈 꼴통 잽극우들 패턴

소리 그대로 하구만.
                         
입안애 14-09-18 21:26
   
근데 3자의 입장에서 솔직히 말씀드리면, 예전에 몇번 다른 토론에서도 봐왔지만 굿잡스님의 주제는 너무 튀어요 다른쪽으로. 그런느낌을 여러차례 받네요. 위에도 같은 소리를 하는 다른분도 있구요.
                         
Lurve 14-09-20 06:38
   
전체적인 흐름으로 볼 때, 굿잡스 님의 글은 본 번역물과의
연관성이 없다고 볼 정도는 아닌 것 같습니다. 
오히려 그 판을 확장하고, 삼천포행 뻘짓을 한 자는
"무난힝"이라고 보여지는군요. 이 자의 근본 정서와 사고방식은
그 전의 여러 댓글들을 보아도 정상적이고 보편적인 한국인은
아닐 거라는 짐작까지 낳고 있습니다.

앞으로 좀 더 두고 보겠지만
현재까진 대략 한심한 부류에 지나지 않음!!!
코코스 14-09-18 14:19
   
일본사람들 성이 많은건, 두개의 한자를 조합해서 성을 만들기 때문이지요.
굿잡스 14-09-18 14:23
   
21세기 인도의 카스트 제도 VS 21세기 일본의 천민부라쿠

에타무라라고 써놓았습니다.(에타는 부락민의 멸칭 부락마을이란 뜻)
 

가츠시카(도쿄의 구)의 넝마주이녀석들은 전부 에타히닌 이하의 버러지들.
쓰레기가 쓰레기 모아서 어쩔? ㅄ들(웃음)
*에타,히닌은 부락민 비하용어

 
 
http://bbs2.ruliweb.daum.net/gaia/do/ruliweb/default/325/read?bbsId=G005&articleId=17695799&itemId=143(러 관련 사진)
 
 
 잽에서는 인도의 카스트 제도에 보이는 불가촉 천민계층마냥 전근대적 지
 
독한 차별적 사회상으로 천민 계급으로 히닌(非人), 에타( 도살업자등), 소
 
노호카(そのほか)라 하고 이들만의 주거지역을 부라쿠(부락마을)이라고 부
 
르는데 골때리는 건 이게 잽 자체 총무청의 1993년 조사를 보면 전국에 사천개 이상이
 
여전히 남아 있다는 사실임
 
(해방령 발표 당시 30여 만 명이었던 부락민이 지금은 공식집계로 130여 만 명에 이르고 있다. 이는 일본 전체인구의 1퍼센트에 해당한다. 그러나 부락해방동맹은 부락을 떠나 신분을 숨기고 타지에 살고 있는 부락민을 모두 포함시키면 그 수는 300만명 선에 이른다고 주장하고 있다. 현재 부락민만 살고 있는 부락만도 4,600개를 넘어서고 있다
 
blog.daum.net/4445464748495051/15854108  )
 
 
인도야  넓은 영토에 엄청난 인구수로 그기에 영국 식민지 강점까지 당했다
 
는 역사적 핸디캡까지 있어도 지금까지 존속하는게 참 황당한 상황인데
 
자칭  아시아에서 최초의 근대화??? 어쩌고 선도 어쩌고 잽이 스스로 만들어낸 한자식
 
인 개발된(developed )의 영문 표기를 무슨 유토피아마냥 선진국 어쩌고 쳐
 
만들어 주입시켜 놓곤 자칭 선진국하는 나라가 19세기에도 지들 내부적으로
 
제대로 정리 못하고 21세기까지 이런 전근대적 어처구니없는 사회상이 계속되는 것일
 
까요?ㅋ
 
진짜 웃기지 않습니까??
 
 
이게 뭔 소리냐하면  울 나라로 치면 향,소,부곡 같은 신라 시대 천민 집단구역인
 
데 이것도 울 나라는 조선시대가면 폐지되고 다 양인 신분이 되거든요 .
 
더 골때리는 건 이런 부락민들이 현대에 와서 자신들의 차별에 대한 항의 운
 
동을 하고 평등권을 주장하자 잽 일반인들이 저런 놈들을 우리와 동등한 입
 
장으로 해서는 안되다고 도리어 반대운동 쳐했다는 ㅋㅋ
 
그리고 지금도 이런 부락마을이 여전하고 부락민들을 조롱하고 멸시하는
 
용어로 에타 ,히닌등 낙서가 심심찮게 발견되는 사회임.
 
절라 골때리는 전근대적 사회. 왜 방숭국 잽이 이지메의 원조에
 
시민의식이나 정신 세계가 아스탈한지 보여주는..
 
(애들은 애초에 메이지 유신 어쩌고 근대 시대에 서구빠돌이하면서
 
형식은 그럴싸게 따라가고 남의 나라 식민 수탈하면서 공업화가 어느
 
정도 진척되었지만
 
뭐해도 기본 사상 문화 사회상 자체가 워낙 전근대적 봉건제 관념이
 
여전히 강하다 보니 이런 신분제 자체를 존속시키고 이후 폭주하는 군국주의와 대외 침탈로
 
사회 자체도 대단히 인명경시에 경직된 사회에서 물질만 공업화 어쩌고 하다가
 
패망하고 겨우  미군정으로 다시  현대 물질 문명과 의회 제도는 어느 정도
 
받아 들였는데  이전부터 위에서 강제적으로 주입 내리 끌고 온 것 뿐이지
 
정신 세계 자체는 아직도 전근대적이고 윗대가리도 전범들은 여전
 
히 전근대적 제국주의 향수와 사고로 국제사회를 보고 있는.)

http://www.gasengi.com/main/board.php?bo_table=EastAsia&wr_id=79044&sca=&sfl=mb_id%2C1&stx=eogkseo&sst=&sod=&spt=0&page=0
마이크로 14-09-18 14:27
   
성으로만 구분하면 상당히 적어보이지..

하지만 같은 마이클도 뉴욕 마이클, LA마이클, 뉴저지마이클 오클랜드 마이클 이런게 전부 각각 따로 족보의 형태로 존재하고 있는지 알게되면 한국이 위대해 보일것..
말티즈 14-09-18 14:30
   
김이박정최가 많은건 일제강점기때 상민들이 너도나도 양반성씨로 개명했다더군요...
그래도 아직 소수 천방지추마골피가 남아있는건 조상섬김을 유지함으로 남아있지요
     
mymiky 14-09-18 20:25
   
오해하시는 분들이 많은데 천방지추마골피는 노비성이 아닙니다.

노비성인 천방지추마골피 쓰는 사람들이, 양반성씨로 갈아타지도 않고,
용케 자기 성씨를 간직하고 있으니
기특하고 대단하다고 여긴다면, 그건 잘못된겁니다.

김이박정최가 양반성씨다? 그렇진 않습니다. 김씨라도 다 같은 김씨가 아닐뿐더러,
김씨성 가진 사람들 중에, 양반도 있고, 양민도 있고, 천민도 있습니다.
세발이 14-09-18 14:33
   
우 씨! 는 박명수가 시조이려나..
하데스 14-09-18 14:40
   
잘 봤습니다. 수고 감사합니다.
굿잡스 14-09-18 14:42
   
고대의 성씨라는건

동서양 어느 곳이고 다 귀합니다.

서양의 중세 농노들이 무슨 성씨가 있던가요??

우리 조선은 경국대전에 법제화된 선진 사회시스템을

이미 구축하고 공노비(노예 개념이 아니라 천한 일을 하는 일종의

머슴) 에게 알아서 출산 휴가까지 주고 함부로 매질했다가는 사대부들도 도리어 처벌받는

그런 사회가 조선이였습니다. 그에 비해

중세 유럽의 농노들은 어떻했나요.(글자 그대로 영주에 예속된 물건이였음)

조선사회는  왕과 사대부(과거제라는 능력을 통한 일시적 귀족제)에 양인이라고

농공상이라고 각종 직업을 가진 이들 역시도 과거제를 볼 수 있게 열린 신분제

사회였고 그기에 천인같은 노비등이 존재 했던 것이죠.(그에 비해 유럽은

왕과 영주 그리고 아래 바로 대다수 농노 계층임. 귀족 역시도 세습제 신분이고

이러니 세습 귀족에 의해 대다수 농노들은 철저히 예속된 상황에 상당한 수탈을

일방적으로 당하거나 영주의 재량에 의해 좌지되면서  살았든게

유럽 농노들의 일반적 모습이였음.  그리고 이런 잔재는 근대화의

박차를 가하던 산업화 시기에도 공장주의 착취등으로 기계화된 생산방식의

근대적 물질 모습은 탈바꿈을 해도 상당기간의 사회적 후유증을 이어가게 되죠.)

이런 농노들의 해방 역시도 영,프는 17,18세기 가서야 그나먀 시민혁명 어쩌고 점차 변화되기

시작했고 그럼에도 귀족들의 지위와 특권은 여전히 유지되었죠. 러시아의 경우는 19세기 말이 지나도

이런 농노가 계속해서 유지되고 있었고 (산업혁명의 선두 국가라는 영국의 실상은 노동자들은

전형적 공장주의 착취 거의 하루 먹고 사는 노예나 다름 없이 하루 16시간을 일하면서도 불결한

생활과 저급한 교육, 의료 환경에 노출되어 살고 있었고 대항해를 주름 잡던 일반 선원은

돈 몇푼에 총알 받이 신세로 살았던 시대였음. 이런 비극적 생활상을 젊은 날 마르크스가 보면서

마르크스주의가 태동하게 된 시대적 배경입니다. 레미제라블도 그런 지독한 시대배경에서

나온 역작이고)


도리어 우리나라는 17세기 오늘날 부자 증세(누진세)에 해당하는  파격적이고 상당히

근현대적인 대동법 시행과 조세 정책으로

기존의 공납을 쌀이나 면포, 돈으로 대신하면서 국가에 공납을 대신할

상공인들의 산업 자본이 형성되고

임진 이후 국가 재정을 메우기 위해 납속책을 통해서 부유해진 상공인과 농민들에 의해

글자 그대로 국가에서 이런 귀족(양반)지위의 신분 상승을 합법화 이행되고 있던 나라였습니다.

그에 따라 1801년에는 아예  순종이 왕 스스로가 이런 공노비 해방을 시키며

조선의 신분제사회는 이미 급격히 힘을 잃어갔고 고종에 의해 사노비까지

자체적으로 해방 법제화 함으로써 근대국가인 대한제국을 수립하게 됩니다.
Captain지성 14-09-18 15:06
   
우리나라 성의 90%이상은 가짜 성씨라는 글을 읽은적이 있네요
원래 성이 다 없었다고합니다. 밑에 링크 읽어보세요

http://blog.naver.com/alsn76/40203382130
     
Captain지성 14-09-18 15:21
   
16세기 후반까지만 해도 조선의 전체 인구 중
성씨를 가진 이들은 10% 남짓한 수준이었다.

10% 미만이라는 수치는
당시 왕족과 관리들, 족보를 가진 양반들의 수를 모두 합한 것이다.

▲ 조선 전기의 신분사회

왕이 하사를 했든 어떻든 우선 관직이 있는 사람들은 성을 붙였지만
그 숫자는 기본적으로 미미했다.

17세기 초 병자호란 직후 왕이 내린 유공자 전지를 봐도
장군의 이름이 '막둥이'로 되어 있는 등
성이 없는 사람이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17세 이후로 갑자기 성씨를 가진 이들이 증가하기 시작한다.
이유는 바로 공명첩 때문이다.
------------------------

아무튼 역사적 기록을 봐도 딱히
우리나라에 김, 이씨가 유달리 많았던 적은 없었고
그런 근거도 부족하다.

혹시 김씨, 이씨들만 유독 번식력이 왕성했던 것일까?
라고 생각하면 넌센스다.

김씨, 이씨가 많아진 진짜 원인은,
그만큼 가짜 성씨로 인기가 높았기 때문이다.

[출처] 우리나라 성씨 : 현재 한국인 중 90%는 가짜 성씨|작성자 만쭈리
http://blog.naver.com/alsn76/40203382130
     
굿잡스 14-09-18 15:50
   
뭐 가짜 성씨일지 모르지만 ㅋ <그만큼 조선 사회는 자체내애서

빠르게 전근대적 신분제 사회에서 근대적 신분제 사회로 자연스럽게

이행되고 있었다는 반증입니다.> 이걸 제대로 아셔야.


윗글에도 언급했지만 유럽의 신분제는 로마제국이 망하고 이후 천여년간 지속된

중세시대에서 왕과 영주와 대다수 농노라는 대단히 빈약한 사회 계층 구조

와 문화 경제상을 보여줍니다. 그럼으로써 한국가간의 크기 안에서도 각 영주간의 물

류, 인적이동의 자유는 극제한적이고 귀족은 철저한 세습제에 농노는 일방적 귀족의

재량과 철저히 예속된 상황에서 수탈이나 차별을 감내할 수 밖에 없었음.

이때문에 제대로된 도시도 형성되지 못하다 후기에 가서 점차 변화합니다.

이헤 비해 조선은 이미 건국 초기부터 경국대전을 만들어 법제화하고

왕과 위정자인 사대부 역시도 세습제가 아니라 능력 위주의 과거제를 통한

임시 귀족층이였고 대다수는 농공상 즉 양인들로 이들은 각종 직업부터 과거제로

양반이 될 수 있었고 그 아래 천한 신분의 노비가 존재(이들은 노예도

전혀 아니였고 도리어 세금, 군역이 면제되어 양반도 노비 어쩌고 신분 세탁을 할

정도 였음)

하여튼 이런 가운데 임진 이후 납속책에 따라 국가 재정을 메우기 위해

합법적 귀족 작위를 받을 수 있는 제도가 생겨나고 17세기 대동법이 시행되면서

공납을 대신할 공인등 상공인들과 농민들이 자본을 축적하면서 상공업이 발달해지고

부유해지자 너도 나도 이런 납속책을 통해 양반의 직위를 사면서 뼈대 있는 가문의 성

씨 즉 대표적 김, 이, 박씨등이 늘어나게 된 것이죠.

<따지고 보면 가짜 족보를 산 것이지만 한편으로는 그만큼 신분제의 이동이 자유롭고

느슨해지면서 이미 신분제 질서가 와해되는 근대적 사회상들이 18세기에 가면

자연스럽게 나타나고 있다는 말입니다. 이에 따라 조선은 왕조국가이면서도 왕이

알아서 신분제 철폐를 본격화 하는 개혁적 선견 지명의 정책을 폈던 것이고(1801년

순종 공노비 해방)>
          
Captain지성 14-09-18 15:57
   
전 역사는 잘 모릅니다. 하지만 님이 쓴 글은 이 번역글과, 제가 쓴 댓글과는 다른 주제의 이야기를 하고계신것같습니다.
               
굿잡스 14-09-18 16:03
   
전혀 다르지 않습니다만 ㅋ 제말은 단지 해석의 차이라는 말이죠.

유럽은 도리어 대다수가 농노로 우리같은 중간 계층 즉

농공상이 없다보니 성이 더 귀했지만 울나라도

왕조시대에 성은 귀했지만 일반 양인신분의 농업과 상공인들 중에는 성씨들이

존재했습니다.(개성의 경우는 대표적 조선 이전 고려의 수도로 정치계가 막히자

상업화 된 도시이고 왕족이나 귀족등 지식인도 상업으로 활로를 열면서 부를

축적한 도시답게 상인들이고 부를 쌓은 일반 백성도 일찍히 성씨들이 존재했습

니다.)


그리고 실제 역사상 500여개의 성씨가 존재하지만 이왕 성씨 가질거

근대화되는 사회상속에 사람들이 김, 이,박 같은 이전 유력 왕가의 성씨를

선호하면서 늘어났다는 것이고 이는 바로 전근대적 신분제사회에서 이미

조선은 자체내에서 유럽같은 농노들의 반란이나 해방 어쩌고 혁명 어쩌고

하기 전에 자연스럽게 신분제가 와해되고 왕이 스스로 신분제를 와해시키는

길로 가고 있었다는 말이죠.(조선의 왕들은 어릴때부터

철저한 교육과 강습등을 통해서 키워진 상당한 석학에 대체로 인본적

사상가이며 개혁가들이였음)
디노 14-09-18 15:08
   
이런 엉터리 내용을 기사라고 적어 놓다니...영국 기자놈들 정말 형편없구나...
조선에 양반 뿐만아니라 평민들도 성씨가 다 있었어. 천민들만 없었지. 그리고 비율로 보면 그 천민은 얼마되지 않았고,
귀족만 성씨를 가졌던 건 오히려 일본이야...
일본은 메이지유신 때 호적 정리를 하려고 백성들에게 무조건 성씨를 갖게 했고, 그 때문에 20십만개나 되는 성씨가 생겨난 거야...
한국은 성씨가 270개 정도고 중국의 성씨는 8000개 정도이지.
중국에 박씨는 조선족을 제외하곤 없고, 김씨는 제법 있긴 한데, 청나라를 세운 만주족, 그러니까 청나라 왕족들이 김씨였어. 완안 혹은 진이라고 읽지만, 왕족의 후손들은 지금 김씨를 써고 있던군. 만주족과 조선족을 제외하곤 중국에 김씨는 거의 없지.
기자야...기사를 쓰려면 뭘 좀 알고 제대로 써...
     
Captain지성 14-09-18 15:29
   
제가 아는 사실로는 정확하게 쓴 기사인것같은데요?
     
우깡씨 14-09-18 15:45
   
통일신라때부터 성이 생기고.  조선초기까지 성 없는 사람 80퍼 넘었어요.. 성은 거의 왕이 하사하는 거였어요.

일본은 막장이고 ㅋㅋ
          
서울맨 14-09-18 17:31
   
신라 건국 탄생설화에 나오는 박혁거세 석탈해 김알지 이 세 명의 이름이나 검색해보길...
우깡씨 14-09-18 15:43
   
난 평산신씨 한성윤공파 ㅋㅋ 신숭겸이 조상 ㅋ
     
우깡씨 14-09-18 15:47
   
평산신씨 18대손의 딸이 신사임당 이였고 난 40대손 ㅋ
          
호르깽이 14-09-19 16:34
   
전 평산신가 재정공파 36대손입니다.
스리즈 14-09-18 15:48
   
우리나라의 성씨의 획일화를 별로 좋게 바라보지 않는 1인입니다
성은 자신과 다른사람들 구별하고 자신의뿌리,심볼그자체라고도 할수있는데;;
자신만의성을 가지고인는 외국씨들이 정말부러움 ㅠ
어떻게 전통를 해치지않는 범위내에서 성을 개명시킬수있었음 좋겠음 ㅜㅜ
     
굿잡스 14-09-18 15:53
   
알고 보면 울나라도 성씨가 많습니다. ㅋ 뼈대 있는 성씨 어쩌고 김,이,박을

위와 같은 역사적 사연속에서 근대화되는 신분제 와해 조선 후기상에서

점차 많아진 거죠

(같은 성씨라도 이안에 파별로 보면 또 가지가 무수히 많고.)

역사적으로  500여 가지 성씨가 존재했고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 센서스에 의하면, 사

용 성수는 총 274개이며 이 가운데 단성은 263개, 복성은 11개라고 합니다.


전 도리어 국제화 시대에 뭔 외국처럼 긴 성씨나 이름보다는 울나라의

오랜 기마문화권 특유의 3수리 홀수 세계관과 천지인 사상을 분명히 이어

받은 성함도 멋지고 인식하기에 괜찮아 보이네요 ㅋ(도리어 외국인에게 성함의 뜻을

풀이해서 영어로 가르쳐 주면 이쁘고 신기하다고 하던데요 ㅋ). 언제 어디서든

당당해질 필요가 있습니다.
     
양앵민이 14-09-18 18:25
   
외국 애들이 자신만의 성을 가지고 있다고요 ? 외국 애들이야 말로 한국보다 더 가문에 대한 실질(?) 적인 애착을 보이는 문화인데 많이 착각하시고 있으시네요.
토담토담 14-09-18 15:57
   
밑에달린 댓글은 몰라도 기사내용은 한국에서도 정설 아닙니까?
어쨌든 일반인도 성을 가질 수 있었을 때 왜 새로운 음의 성을 만드는게 아니라
기존에 있는 성에 들어간후 파벌등으로 구분했냐는 거죠ㅋ
     
Captain지성 14-09-18 15:59
   
저도 기사내용은 크게 틀린건 없다고 생각합니다.
스리즈 14-09-18 16:03
   
글쎄요?
성을 완전히 바꾼다는의미가 아님 ㅎ
조상의지역,가문의이름등의 따서 새롭게 성을 개명할수도 있지않을까요?
우리가 한국에 있어서 그렇지 일반적 인구중 절반이 3성에 한해있다는게 정상이 아님;;
그런건 전통도 뭣도 아니고 단지 개화직전에 뿌려진 잘못일뿐이라고 생각해요
     
굿잡스 14-09-18 16:13
   
그런 경우도 있긴 합니다. 계속해서 성씨 안에 자손이 분파되거나 다른 성씨로 나가는

경우도 실제 존재해요. (대표적 안동권씨의 시조는 김행(金幸)임)
1theK 14-09-18 16:18
   
김해 김씨, 경주 김씨, 전주 이씨가 많긴 하지만 저 설명으로 부족하고 한국 성은 사실 본관이 다르면 다른 성씨임, 본관까지 얘기해야 자기 성을 밝히는거임..하나의 본관에서 분파한 경우는 같은 성씨로 여겨서 혼인도 안하구요.. 그래서 따지고 보면 성 종류가 무지 많죠.
     
에구머니 14-09-18 17:02
   
맞습니다.

그러고보니 문득 요즘 애들 중에 자기 본관까지 아는 애들이 얼마나 될지 궁금하네요.

족보는 본 적이나 있는지, 돌림자는 어떻게 쓰는지...
꺼져쉐꺄 14-09-18 16:42
   
그런데 왜?

서양인들이  성씨가 너무 지나치게 치우쳐 있다던지

김씨가 많다던지  박씨가 많다던지 하면...

왜 이걸 물고 늘어지는 우리나라? 사람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왜 서양인들의 입맛에 불편하니까  우리나라 성씨에 태클 거는지 모르겠네요

서양인들이 우리나라 성씨가  1개가 많다면  또 이걸 복수 혹은  3자리 숫자 이상의 성씨를 만들어 사용해야하나요?

왜 이렇게 서양인들의 눈치 보기에만 급급해서  비난만 하려는지 도무지 모르겠네요

그렇게 비난하고 싶은분은  본인의 성을  2개 이상 3개 이상으로 짓고  아버지한테서 호적 파달라고 하세요
피노누아 14-09-18 16:51
   
누가 쓴 글인진 모르곘는데
일제가 제국주의 근대화론식의 식민지역사관이 있네?

유럽도그럼
독일이 프랑스와 유럽을 근대화 해주었다...전쟁을 통해서 독일의 지식인들이 세계로 퍼졌고
미국에서 달착륙까지 시켜줘 인류에 번영의 초석을 다졌다...

같은말도 아 다르고 어 다르다고
그걸 모르면
뉴스봐도 맨날 휘둘리는거지.
찌짐이 14-09-18 16:58
   
김해 김씨 가야 신라시대엔 왕족 귀족이었지만

조선시대에선 상민 천민 노비성이었지

왕조가 달라지면 왕족성이 천민성이 되기도 한다는 사실을 모르면

저런 일부 추측만이 진실인 줄 아는 기사가 나오는 거
서리서라 14-09-18 17:15
   
전 100% 네욤. 저희 아버지때만해도 집에 머슴도 있고 종가가있는 동성마을안에 계셨거든요 ㅋㅋ 주위에 돈주고 우리가문의 성을 산 사람둘은 마을사람들이 누구누군지 다 알고 나쁜거지만 마을에서 배척하셨다더라구요.지금도 대소문중에 가주와 온갖 먼친척의 어르신이나 따라온ㅇ아아이들과 잔치도하고 시조할아버지의 이야기거 얽힌 아무도 모르는 전설도 입에서 입으로 전해 들어요 ㅋㅋ 굉장히 큰 성씨문이라 걍 성만말하면 짜가아니냐고 물음당하지만.. ㅋㅋ 전 그 성의 시바 ㄹ점에서 태어나자랐고 나라에 기증된 족보안에도 들어있음 ㅋㅋ
지해 14-09-18 17:21
   
언문소설의 시초인 홍길동전을 봐도 그렇고
금오신화를 읽어봐도 그렇고
판소리 여섯마당을 다 봐도  흥부도 연씨요
강쇠도 변씨고 심봉사도 심학규이고
하다못해 상놈중에서도 유명한 꺽정이도 임씨이건만
어데 성씨없는 인물이 있었다는 것인지...
제 조상을 욕뵈도  이런욕은 없을듯 ...ㅉㅉㅉㅉㅉㅉㅉㅉㅉㅉ
양반말고라도  상놈도 다 성이 있었거늘
어째서 없다고 하는 것인지...
배불러지금 14-09-18 17:24
   
저희본가도 경북 어떤시골에서 종갓집과 같은마을에서 살거든요 족보도있고 신사도모시고있고 성이 흔한성은 아니지만 ㅋㅋㅋ 신사라고해야하나 뭔가좀 다른듯
     
mymiky 14-09-18 20:31
   
신사를 모신다?
집안에 사당을 모신다는 표현이 맞을듯..
서울맨 14-09-18 17:32
   
댓글중에 우리나라 성씨가 통일신라 이후에 들어왔다는 말을 당연한 듯 쓴 사람이 보이네요.

지식이 부족한 사람들이네요.

박혁거세 김알지 석탈해 부터 검색이나 해봤으면 합니다.
     
mymiky 14-09-18 20:38
   
통일신라 이후에 최초로 들어왔다기 보단,
그때쯤이 현재 한국인에게 일반적인 이런 성씨 체제가 잡혔습니다.
어차피, 삼국시대 기록은 적습니다. 현존하는 제일 오래된 역사서가 고려 김부식의 삼국사기죠.
박혁거세, 김알지, 석탈해, 한자로 기록된거니, 그렇게 아는거지만..
당시엔 이 사람들을 어떤 식으로 고대음으로 불렀는지 알수는 없습니다.
음차표기였을 확률이 높다고 볼뿐..
애초에 우리에게 단성(單姓)이 일반화 된게 삼국후기의 당풍의 영향때문이거든요..
NASRI 14-09-18 17:45
   
이건 일제강점기 지나서 본격적으로 나온 얘기죠.

한마디로 식민사관의 영향이 큽니다.

지식이 부족한 사람들이 너무 제멋대로 떠드는군요.

무슨 전국민의 70%를 쌍놈으로 만드는 억측입니까?
뫼사 14-09-18 17:45
   
동사무소 가서 본관책 읽으면 이해되실 거에요.
기다리다 심심해서 읽어보았더니
신화서도 나오는 김알지는 물론
임진때 일본인 사야가인 김충선도 있고 심지어
고조선때 위만과 함께 온 사람이 선조인 성씨도 나오더라구요.
한번 보시면 신세계를 만나실 것입니다.
     
z레미니안z 14-09-18 17:52
   
본관중에 중국인이 시조일경우는 대부분 조작일 가능성이 큽니다.

중국에 대한 숭조사상때문이죠

순한국 성씨라도 본을 보면 지금은 잘 모르지만 예전에 공명첩을 만들때는 족보에 넣더라도 중시조나 공파에 대해 족보를 산사람은 모르지만 족보에 편입하는 가문에서는 이 사람이 편입되었다는 것을 알게 표시를 해두었다고 합니다.
z레미니안z 14-09-18 17:49
   
원래 성씨들이 대부분 순우리말성을 한자로 음차하거나 중국 숭조현상을 따라 성씨를 삼은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삼국시대부터 남북국시대 까지는 대부분 귀족들만이 성씨를 가지고 있었구요.

고려시대에 들어와 호족을에게 성씨를 하사하던지 아니면 고려시기 평민들에게 까지 성씨를 자유화 시키면서
고려말기때는 천민을 제외한 평민들에게 까지 성이 생겼습니다.

그러다가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평민들이 족보를 사게 되면서 성뿐만 아니라 본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1895년 갑오개혁과 1909년 민적법 시행으로 나머지 천민들까지 성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일본은 메이지 유신 이전까지는 귀족층만이 성을 가지고 있었구요

귀족층의 성씨 대부분은 왕가의 방계이거나 왕에게서 하사받은 성이 대부분 이었습니다.

그러다 메이지 유신이후에 국민 전체에 성을 만들면서 평민들도 성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일본성씨는 대부분 귀족성을 따라가거나 자기의 직업 또는 살던 장소를 따라 만들게 되었습니다.
삼한통일국 14-09-18 18:22
   
Kim이 아니라
Gim으로 전환해야하지 않을런지..
대당 14-09-18 18:24
   
그야 김씨가 많으니까
오드리될뻔 14-09-18 18:31
   
연일정씨 지주사공파의 8분파
정몽주(鄭夢周)의 후손이 포은공파(圃隱公派),
정문예(鄭文裔)의 후손이 생원공파(生員公派),
정문계(鄭文繼)의 후손이 문계공파(文繼公派),
정문손(鄭文孫)의 후손이 문손공파(文孫公派),
정문비(鄭文備)의 후손이 사정공파(司正公派),
정문욱(鄭文彧)의 후손이 정랑공파(正郞公派),
정형지(鄭亨之)의 후손이 만호공파(萬戶公派),
정희손(鄭希孫)의 후손이 도사공파(都事公派).

전 제1파인 포은공파 32대손
     
햄돌 14-09-18 19:14
   
저도 영일 정씨 입니다.

안녕하세요 ㅋ
조이독 14-09-18 18:34
   
김, 이, 박 같은 성씨는 중국에서 들어온 겁니다.. 원래 우리나라 성씨는 마루치, 아라치 뭐 이런 식 이었을 겁니다.. 한자를 쓰다보니 그음을 따와야 하는데, 복잡해 진데다 그 당시 선진문물인 중국에 비해서 싸게 보이므로 중국식 성을 쓰게 되는 건 당연한 흐름이었겠죠,, 거기에다가 옛날의 국제관계는 사실상 사대외교였으므로 주변국 인정을 받으려면 왕의 성씨를 올려서 승인을 받아야 했는데, 중국에다가 마루치, 아라치 뭐 이런 성을 올릴 수는 없었을 겁니다. 

그리고,, 우리나라 성씨가 적은 것은 이미 통일왕조로 1500년을 산 때문이죠..
성이란 것은 한 사람의 후손이란 뜻 보다 산재되어 있던 부족들이 유력한 부족으로 통합되면서 한 부족이 되면서 그 부족집단을 가르키는 것이 성이 된 것으로 봐야 합니다..

그러므로, 김, 이, 박 뭐 이런 것은 김씨 지도자를 가진 한 집단들,, 이씨 성을 내세운 집단.. 뭐 이런식인 거죠..  그래서, 식솔이라고 하는 겁니다. 식솔이란 부모, 자식만이 아니고 이들을 중심으로 뭉친 집단인 거죠.. 부하들, 그리고 노예들 모두 같은 식솔이므로 성을 부여하게 되면 같은 성이 되는 겁니다..
고려시대 왕들이 자신의 성인 왕씨를 하사하듯이 하는 거죠..

그리고, 우리나라의 유력지도자들 상당수는 중국을 거쳐 왔기 때문에 원래부터 중국성을 가지고 있었다고 보면 됩니다..

성씨에 김이박이 많은 것은 우리나라가 신라계와 조선왕조계가 오랜 기간 국가를 통치했기 때문에 성씨로 거대한 집단을 이룬 겁니다..

그리고, 내가 무슨 노비의 자식이네 뭐네 그런 거 생각할 필요 없습니다..
옛날에는 어머니의 신분을 따라갔기 때문에 노비가 많은 겁니다..
즉, 아버지 신분을 따라갔으면 우리나라 국민 모두 99% 왕가와 귀족, 양반의 후손이란 거죠..

이해들 하시겠나요???
     
양앵민이 14-09-18 18:40
   
아.. 아뇨
          
Lurve 14-09-19 07:43
   
빵 터짐ㅎㅎ
     
조이독 14-09-18 18:49
   
역사를 2천년만 잡아도 자신의 직계할아버지가 백명이 넘는데, 그중에 왕이나 귀족, 양반이 없을 수가 없다는 거죠..할머니가 양인, 노비 출신이라서 양인, 노비일 수 있는 겁니다.
그러면, 난 아버지, 할아버지, 어머니, 할머니 모두 양반이고 그래서 난 진짜 양반이다라고 할 사람이 있다면 그것도 어리석은 것니다.. 자기위의 백명의 직계할아버지와 할머니 모두가 왕이나 귀족, 양반일 가능성도 마찬가지로 없습니다.. 즉, 100% 왕가, 귀족, 양반후손도 없는겁니다.. 신라의 성골이 그래서 없어진 거죠... 없어질 수밖에 없는 겁니다..
     
굿잡스 14-09-18 19:03
   
ㅋㅋ. 뭔 울나라 지도자들은 쭝국에서 왔니 김 이 박이
짱국에서 왔다???


 조이독 이 사람은 뭔 진짜 알고 이런 웃긴 소릴
하심??  서토에 김이박 같은 성씨가 있음?  조선족?ㅋ
짱국에서 온 지도자가 누가 있는데요??
     
햄돌 14-09-18 19:16
   
'우리나라의 유력지도자들 상당수는 중국을 거쳐 왔기 때문에 원래부터 중국성을 가지고 있었다고 보면 됩니다.. '

= 이건 또 뭔 개소린지 . . 아이고 . .
     
mymiky 14-09-18 19:18
   
김, 이, 박이 중국에서 왔다?
한자성의 개념이 들어온 것과, 시조가 중국인이라는 소리는 별개의 것입니다만?-.-;;
조이독 14-09-18 18:58
   
어느 다큐에서 보니.. 중국에 징기스칸 유전자를 가진 사람이 수천만명이라고 하더군요... 그건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신라 욕하는 사람 간혹 보는데 자기 할아버지 욕하는 겁니다.., 우리나라에서 최근들어 해외에서 귀화한 사람을 제외한 모든 국민은 유전자의 한파편이 김유신과 김춘추에게서 받은 겁니다. 자기 친할아버지나 혹은 외할아버지를 옥하는 거죠..
     
굿잡스 14-09-18 19:08
   
ㅋ 징기즈칸 유전자 수천만 드립은 또 뭔 소리임 ㅋㅋ

에구 이건뭔 조족들 짱국은 울 인구보다 부자 많니

쉰소리보다 더 웃기구만 ㅋㅋ
     
햄돌 14-09-18 19:17
   
제대로 된 팩트는 있나요?

아니면 본인 입맛대로 지껄이는 거임?
     
김시누크 14-09-22 21:04
   
징키스칸 유전자는 부계유전자에서 non-c3e이고 이 하플로유형은 한국에서는 드문 유형입니다ㅡㅡ
mymiky 14-09-18 19:14
   
우리나라 성씨는 거의 신라말-고려초기에 정립되었습니다.
삼국시대는 일단 자료가 적고, 또 성씨에 대한 개념도 낮았습니다.
소수의 귀족들만이 누리던 특권이였죠.
 
특히 중국문화가 들어오면서 흔히보는 성1+이름2자 붙이는건 전형적인 당풍의 영향입니다.

원래, 삼국시대 성씨는 좀 더 복잡했습니다. 예를 들면, 몽골 칭기즈칸 가문의 성 보르지긴(보르지기트)
, 만주족 아이신교로(지금은 걍, 간단히 金이라고 쓰지만..) 이처럼,  자기 원음과 발음이 있었습니다. 
흔히 고구려 연개소문이 연씨라고 알고 있는데, 사실 고구려어로는 [이리]氏입니다. 뜻은 물을 의미한다는데, 그래서 한자로 기록하면서 淵 못 연자를 쓴거죠.

어쨎든, 전 국민이 1개의 한자성을 평범하게 가지게 된 것은 나말여초 쯤이고,
이때도, 성을 가지되, 가문을 기록하는 족보학에 대한 개념은 낮았습니다.

전 국민에게 족보 열풍을 일어난건 역시 유교가 국교이던 조선시대 특히, 조선중후기입니다.
족보는 양반층부터 시작했으나, 양반들의 전유물은 아니였고, 법적으로 양인이면 누구나 가능했습니다.
(나중에, 족보있는 한국인들이 자기 조상이 모두 양반이라고 드립치는 원인이 되기도 함;;;)

보학의 열풍으로, 족보위조, 신분변천, 우리 가문이 오래되었다는걸 내세우기 위해 중국조상을 내세우기도 하는등..노비들마저 시대상황이 이러니까 성 하나쯤 자칭해 붙이는건 일도 아님..(의외로, 조선시대 노비들이 성이 없다고 착각하는 분들이 많은데, 현재 발굴되고 연구되는 노비문서 중에는 노비에 성 붙은 예가 많습니다. 노비의 주인성을 붙인거 아니냐고 물어보셔도, 어쨎든, 노비에게 성 붙어있는 자료가 많다는건 의미심장한 일임.)
 
갑오개혁으로 신분제가 폐지되고, 그뒤 일제와 625를 겪으면서 모든 신분체제는 리셋된 것으로 봐야함.
슈퍼무대뽀 14-09-18 19:18
   
남미 애들 실바도 김씨만큼 많던데
     
mymiky 14-09-18 19:29
   
사실, 북미 인디언들도 지금 대부분 스미스, 브라운 이런 성씨 쓰고 있지요 ㅋㅋ 원래 인디언에겐 성이 따로 없었거든요. 걍.. 어느 부족의 누구누구..발목잡고 일어서. 뭐 이런 이름..

남미 인디오들도 그렇고,, 스페인식 성과 이름쓰죠.

제가 위에도 말했지만,, 만주족들도 지금은 자기 원래 성씨 대신, 걍 평범하게 한족애들처럼, 김씨, 곽씨.. 뭐 이런 성씨 쓰죠. 근대에 차별 받고, 만주족이라 들키면 죽었으니깐..
만주족 뿐만이 아니죠.. 중국의 소수민족들은 자기 원래 성씨 버리고, 한화하면서 한족성씨를 받아들였습니다. 선비족들이 탁발씨. 이런거 버리고, 원씨나 이씨를 많이 자칭했죠.

성이 같다고 해도, 중국인 이씨와 한국인 이씨는 조상이 다를 확률이 매우 높습니다.
중국인 중에서도 한족 왕씨와, 어디 회족, 장족 왕씨는 조상이 각기 다를 확률이 매우 높구요.
한자는 걍. 그림인 표의 문자일뿐// 같은 모양의 한자쓴다고 같은 집안인건 아닙니다.
 
일본에 눌러앉게된 조선인들이 가네모토니, 아키야마니,, 이런 성쓰는 경우도 있고.. 이런걸 통성명/ 또는 빌릴 대자를 써서 대성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뭐,, 유럽에도 비슷한 문화가 있는데, 유럽인들 중에는 자기 조상이 로마의 누구누구.. 로마시대의 장군, 정치가를 내세우는 사람들이 꽤 있어요.
사대주의 사상 극심할때, 우리가 중국 조상들 빌려온 사람들이 제법 있듯 ㅋㅋ 사람 사는덴 다 비슷비슷한가 봅니다.
르프리 14-09-18 19:34
   
저는 경주최씨 관가정공파 청 30세손!! 여기 같은 파가 있을까요...
어릴때 할아버지께서 달력 뒤에 항렬표를 무려 그려주신 적이 있었는데....
남자애들은 관심도 없고 저혼자 봤다죠 ...
근데 좀 헷갈려서 잊고있다가 궁금하면 가끔 찾아봅니다
오늘도 남자친척들 돌림자로 다시 찾아봤네요 ㅎㅎ
 알고있는 6촌들 돌림자도 참고하니 찾기 쉬워요 ㅋㅋ
가출한술래 14-09-18 19:53
   
잘 보고 갑니다..
전쟁망치 14-09-18 20:15
   
전 밀약 박씨지만 과연 나의 조상을 멀리 멀리 걸어서 올라 가면  과연 박혁거세 할아버지가 나의 시조가 맞는지 궁금...
미헌 14-09-18 20:36
   
정답을 말하는 사람이 거의 없군요.
오래전부터 이 문제에 관심을 가져온 제 생각을 말하자면..^^

1. 성은 19세기 이전부터 양반부터 평민, 노비까지 골고루 사용됐습니다.
실제로 조선의 공노비 명단을 보면 성이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죠.
또한 족보가 있다고 해서 무조건 양반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족보가 있어도 벼슬을 3대 이상 못하면
대개 양반 취급을 받지 못하기도 했거니와, 설령 서얼이라도 선조가 명망이 높으면 양반 취급을 해줬습니다.
성의 유무 및 족보가 양반을 보증해주는 건 아니었습니다.

2. 실제 양반 비율은 1910년 기준 전국 평균 1.9%이었습니다.
양반비율이 80~90%니 하는 것은 일본 학자 사카타 히로시의 통계의 오류였습니다.(유학을 양반으로 집계)
우리가 잘못 된 정보로 교육을 받고 있는 것이지요. 참고로 충남지방의 양반 비율이 10.3%로 가장 높았습니다. 충남양반이라는 말이 괜히 나온 것이 아니지요.

3. 김,이,박이 왜 많냐고 하면 그건 원래 그랬다고 밖에 말 할 길이 없습니다. 적어도 족보위조나 판매 때문이라고 볼 순 없습니다. 김,이,박이라고 해서 다 양반도 아니었거니와, 오히려 인구 상위의 성씨들은 평민성씨에 가까웠거든요. 실제로 신분의 영향을 적게 받던 무과급제자를 보면, 현재 인구구성과 거의 흡사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김해김씨 같은 경우 문과 급제자는 127명 정도로 순위로 따지면 20위를 넘어가지만, 무과 급제자는 1000명을 넘게 배출하며 압도적인 1위입니다.

4. 다만, 같은 성씨라고 해서 같은 유전자를 갖고 있진 않습니다. 한 가지 성씨의 유전자를 조사해보면 대략 10가지 이상의 부계혈통(Y하플로)이 통계에 잡힙니다. 이는 아주 오래전, 족보가 제대로 형성되기 전(16세기 이전)부터 전국 방방곳곳에서 전혀 관계 없는 사람들이 같은 성씨를 사용해왔다고 밖에 볼 수 없습니다.

5. 너무 족보매매와 같은 정확하지 않은 정보로 우리의 성씨와 조상들을 매도하지 맙시다.
저는 그것도 역사왜곡이라고 생각합니다.
     
mymiky 14-09-18 21:00
   
2.번의 경우엔 향교같은데 등록되면, 나라에서 유생들에게 군역이였나? 하여든 감면해주고, 뭐라고 해야하나? 좀 편하게.. 이득을 얻을수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법적으로 조선은 양천제의 나라이고, 양반들만 공부를 할수 있었던건 아님.. 양민이라면 누구나 과거할수 있고, 공부가능함(단, 조선후기 올수록 과거에 붙느냐? 안붙느냐?는 오늘날처럼 개천에서 용나기 어렵게 되어버린것과 비슷한 양상을 띄지만..)

그러다보니, 일단 명부에 올리고 보는 것이였음. 공부하러 진짜 가든, 안가든 차후의 문제고..

나중에, [조선양반=사대부=유학자들].. 이런식으로 통계잡으면서, 각 향교안에 등록된 것을 모두 양반이라고 치부해서 계산했더니 나온 숫자가 조선후기 양반 80% 90% 이렇게 나온 것임..

실제, 양반이란 3대이내로 관직이 없으면 걍 상민들과 다를바없음.
조선총독부에서 직접적으로,고종-순종때 조선조정에 출사한 사람들과 식솔 가족, 친지들과
많이 잡아도, 철,현종때 출사한 사람들을, 지방에 진사이상 급제자만 양반으로 잡고 통계내었더니 , 양반이라고 할수 있었던 사람들은 조선인구의 3-5% 정도였다고 알고 있습니다.
입안애 14-09-18 21:20
   
왕족의 후손이라 자처하는 김이박 성씨가 전국에 2100만명이 넘습니다. 애초에 말도 안되는 숫자지요. 세계사에서 성을 가진 귀족의 퍼센테이지는 3퍼센트 정도로, 조선전기의 인구 비율을 보면 이와 부합합니다. 하지만 조선 후기에 들어서는 피라미드가 역전되어 역피라미드 형태가 되었지요. 때문에 조선의 세수부족이 국가적인 문제가되어 철종때 공노비도 해방시키고 흥선대원군이 반발에도 불구하고 호포제를 실시하려 한거지요. 원인은 저기 기사에도 나오듯 족보를 산것도 많고, 심지어는 족보가 활자판에 의해 대량 양산되어 뿌려지기도 했고 양반가에서도 별보라하여 그야말로 갑자기 튀어나온 외지인을 받아들여 족보에 올리기도 했습니다. 그러다 구한말이 되어 너도나도 성씨를 갖는시대가 도래하자 '유명한 성씨'인 김이박에 자신들의 이름을 전부 올린거죠. 일본같은 경우엔 모두가 성씨를 가지는 시대에 서로다른 다양한 성씨를 새로 만든것에 반해 당시 조선인들은 유명한 성씨에 이름을 올리길 원했었죠. 그래서 일본은 28000개가 넘고 한국은 김이박이 2000만이 될수 밖에요.
입안애 14-09-18 21:24
   
증산도를 개창했던 강일순의 말에서 구한말의 어지러운 '성씨 같기'의 일면이 그대로 들어나죠. 당시 강일순은 이런말을 했습니다. "지금은 근본으로 다시 돌아가는 시대이니 혈통 줄을 바르게 하라. 아버지와 할아버지를 바꾸어서 계보를 위조하는 자는 다 죽으리라.” 이런 저주에 가까운 말을 했는데 이 말대로하면 대한민국의 대부분의 사람은 죽죠. 조선왕조 실록 기록을 뒤져보면 족보의 위조나 공장제 대량생산에 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조선후기에 집중되죠.
Camel 14-09-18 22:27
   
잘 봤어요 수고하셨어요
retinadisplay 14-09-18 23:11
   
휴..다행이게도 저는 양반집 인간이 맞군요.
이우포뤼아 14-09-19 00:24
   
무슨 오랜 역사의 영향인가.. 단순히 근대 세도정치의 영향아닝가- -a
아기건달둘 14-09-19 00:26
   
잘보고갑니다///
Captain지성 14-09-19 00:58
   
현재 지나가는 아무사람 붙잡고 본관 물어보면 조상이 양반 아닌사람 없습니다.
그냥 보통 양반도아니고 왕족아니면 엄청난 위인들이 줄줄나와요

이게 자연스러운것 같지는 않습니다.

대충 생각해봐도 다 위조된거라는건 누구나 다 짐작하는거죠. 저 기사에 틀린말이 어디있나요?
멍삼이 14-09-19 01:06
   
잘 봤쓰요!!!  컹컹!!
자기자신 14-09-19 02:28
   
잘 봤네요
몽실 14-09-19 07:00
   
요약이라 정확히 알수는 없지만 본관에 대한 언급은 없었나보네요
김 이 박 최씨는 한자를 하나만 쓰지만 김씨 이씨는 본관이 엄청나게 많고
다른 한자를 쓰는 경우도 많죠
제가 신씨인데 납신쓰는 신씨가 셋있고 매울신이랑 마음신변에 참진붙는 신을 쓰는 신씨, 최소 5성이 있습니다
세슘원숭이 14-09-19 10:18
   
잘보고갑니다
타샤 14-09-19 11:54
   
본관이 다른데...
영어나 불어 독어 식으로 하자면..

KIM de kangsan(광산 김씨)
,Lee von jeonju(전주 이씨)
식으로 바뀌는데...

그래도 일본이 성씨가 더 많음.
물론 인구도 더 많지만, 인구 비례로 따져도 일본이 압도적으로 많은게..
걔네들은 차남 이하는 취급을 안해서, 좀 잘난 차남, 차차남 등등이 독립하는 경우가 많음.
그리고 14-09-19 13:40
   
개소리를 기사로 썼네요.
그 수많은 분파는 국으로 말아 처먹었나 보네요. 김씨면 다 같은 김인 줄 아는 멍청한 기자예요.
Kimbo 14-09-19 17:55
   
guest-soelwls
한국인의 약 90프로 정도는 양반을 제외하곤 거의 성씨를 받지 못했었지.
그게 과거 한국 사회의 룰이었고 신분이었어.
이런 개혁이 일본으로부터 식민지배를 당하며 바뀌게 된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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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 말이여? 기사에도 나와있듯이 성씨가 없었던 사람들이 족보에 편입하기도 했다는게 기사에도 나오는데 뜬금없이 일본은 왜?? 그리고 윗분 말처럼 분파가 나뉘어지는데 너무 일반화시킨 듯....
조이독 14-09-19 18:29
   
중국내 징기스칸 후손이 수천만은 된다는 말에 fact가 있느냐 없느냐? 묻는 사람이 있는데,, 물론, 그냥 수천만으로 얘기한 것은 전문연구자가 아니고 어느 다큐에서 듣고 상당히 놀란 기억의 파문으로 남은 것이어서 fact니 마니 하면 순간 당황스러웟습니다.. 내가 다큐를 잘못 봤나?  그래서 찾아보니,, 잘못 들은게 아니더군요?  유전자 연구 결과 아시아 남성의 8%가 몽골 정복자들의 후손이라고 하고, 그중에서도 세계에서 1600만명이 징기스칸 유전자를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우리가 배우는 역사는 그냥 사람들이 자기입맛대로 좋은 면만 골라서 보여주는 겁니다.
진실은 해부실이나 현미경속의 징그러운 세균같은 겁니다.. 알면 으시시하고 오싹한 것에 가깝죠...

성씨도 마찬가지죠.. 수천년 동안 내부에는 말하기 곤란한 일들, 우리가 도저히 알수 없는 일들이 있습니다..
고려시대때 까지는 아들만 성을 받는게 아니고 사위도 장인의 성을 따라 후계자가 되던 시대입니다..
신분을 철폐했던 1세기전까지 사람의 신분은 아버지를 따라가는게 아니고 어머니를 따라갔었고요...

자기 3대, 4대 할아버지가 누구집 종생활했다고 부끄러워할 것 없습니다..
왕의 직계후손일 수도 있습니다..

반대로 자기 무슨 내노라 하는 성과 본관의 직계자손이라고 으시댈 수도 없습니다..
고려시대전에 심지어 조선시대에도 침략자나 사람발발이 유전자 일 수도 있는 겁니다.
경주 고분에서 나온 왕의 유골을 유전자 검사해서 지금 경주김씨하고 비교해 보면 도대체 몇명이나 일치할지.. 장담못합니다..
과학적으로 유전자 검사하면 진실은 밝혀지겟지만, 굳이.. 그럴 필요는 없겠죠...

우리가 성씨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그냥 우리가 눈에 보이는 곳에서 스스로의 자부심갖으며 살자는 거지 성씨가 자신의 신분과 능력을 보여주는 것은 아닙니다..
속, 즉, 마음과 능력이 중요한 거죠..
그러면, 그것에 따라 자신의 성씨에 대한 가치는 올라가는 겁니다..
조상덕 볼 생각하지 말고 자기성씨를 가진 후손들에게 가치있는 사람이 되어야 겠습니다..
     
김시누크 14-09-22 21:11
   
하플로그룹의 도입으로 그 동안의 역사적 사실들이 다시 재조명 받고 있는거 아십니까?? 하플로분석결과 몽골은 의외로 한국과는 멀게 나타났습니다. 게다가 징키스칸의 부계유전자는 non-c3e에서도 C3e1a(M407)로 알려져있는데 이 유형은 한국에서 극히 드문 유형입니다
깡통의전설 14-09-19 20:33
   
참 답답들 하십니다. 성씨에 따른 체계가 중국에서 들어온거고
성씨 말고 조상에 대해서는 이미 다 기록되어져 옵니다. 조상이 성씨가 없다고 족보에 없는거 아니지않습니까.
단지 성씨 체계가 중국에서 들어온것이지요.
그런데 김,이,박 중 김씨 박씨가 중국에서 들어 왔다는 얘기는 첨 듣네요. 중국 김씨는 금나라 왕족 정도만 가지고 있습니다.
♡레이나♡ 14-09-20 12:17
   
잘보고갑니당!
욱성질 14-09-20 16:09
   
잘봤어요
『Hazz』 14-09-21 00:03
   
우리나라가 성씨가 좀 적긴 하죠
호로로로로 14-09-22 20:15
   
고등학교 근현대사 교과서에도 나오는 내용인데
별것도 아닌걸로 열내네
하르트만 14-09-23 10:32
   
무난힝 저거 뭐하는 놈이야?
농곰 14-09-26 11:08
   
옛날엔 서양에서도 성씨라는 건 보편적이지 않았어요.
1000년대 정도 중세 초기엔 성 안 쓰고 출신 지역명으로 "어디어디의 누구누구"라고 지칭되는 인물이 매우 많습니다.
그리고 한국 같은 경우엔 일반 상민이 성을 만들땐 기존에 있는 성씨를 따 만들었지만 일본 같은 경우 상민들이 성을 만들 땐 매우 창의적이고 시적인 성씨를 만드는 것이 유행이었다고 하더군요. "코토리아소비", 즉 작은 새가 뛰논다고 한자로 쓰고 매가 없다는 "타카나시"라고 읽는다거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