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 그렇듯 은퇴 후 이 곳에서 장기체류하는 유럽출신 아재들과 할배들로
오늘도 호텔 식당 안은 왁자지껄하다.
이 유럽에서 온 아재들과 할배들은 매일 점심 이 곳에 모여서
식사도 하고 커피고 마시고 수다도 떨면서 2~3시간을 보내는게 일상이다.
난 호텔 풀장 옆에서 맥주 한 병을 홀짝이면서
오늘은 비키니 입고 수영하는 언냐들 안 오나...
이런 쓰잘데기 없는 생각을 하며 빈둥거리고 있었다.
그 때 호텔 식당에서 서빙보는 친구 하나가 나한테 오더니
식당 앞에 이상한 할배 한 명이 계속 얼쩡거린다고 한다.
그래서..왜?
왜 또 나한테 그려? 엉? 어쩌라구?
내가 보안요원이야? 경비야? 기도야?
나도 호텔손님이야! 이거 왜 이래?
내가 마..너거 총지배인이랑 밥도 묵고 마..엉!
와인도 마시고 마, 엉!
사우나.......아..사우나는 안했구나.
우이씨~
이렇게 투덜거리면서 어쨋든 현장에 가봤다.
60대로 보이는 남루한 차림의 서양 할배 한 명이
호텔 식당 손님들 식사하는 곳 근처에 서서 안절부절하며
얼빠진 사람처럼 혼잣말로 뭔가 중얼중얼 하는 모습이 보였다.
왜 저러고 있을까?
순간 불쌍한 마음도 들고 궁금하기도 해서
다가가서 무슨 일이냐고 영어로 물어보았다.
뭐라고 대답을 하는데 무슨 말인지 통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자세히 들어보니 독일어 같았다.
기억나는 유일한 독일어인 ich liebe dich라고 말할 수도 없공...
어쩌지?
오...마침 호텔식당에 스위스에서 온 할배들이 모여서 식사 후
열심히 수다를 떨고 있는게 보였다.
저 양반들도 독일어로 대화를 하니 말이 통하겄지.
스위스 할배들이 모여 식사하는 테이블로 갔다.
저 앞에 할배 한 명이 무슨 사정이 있는거 같은데
독일어를 해서 무슨 말인지 모르겠으니 무슨 사정인지
대신 좀 알아봐 달라고 부탁을 했다.
내 부탁을 받고 스위스 할배 2명이 가서 자초지종을 물어봤다.
스위스 할배 2명이 돌아와서 내게 하는 말이...
저 할배가 지갑도 여행가방도 여권도 다 잃어버리고
돈 한푼도 없는데 집에 가고 싶다고 말했다고 한다.
내게 이 말을 전해주고 스위스 할배들은 태연히 테이블에 다시 앉아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수다를 떨기 시작했다.
식당 앞에 서 있는 할배를 다시 한 번 보니
씻지도 못한거 같고
옷도 지저분해 보이는 것이
몇 일 노숙한거 같은 느낌도 들고
밥도 못 먹었는지 바들바들 대는 것이 제대로 서 있을 힘도 없어 보였다.
음...안되겠다...
말은 안 통하니 서 있던 할배 팔을 잡고
호텔 식당 안으로 데려와서 우선 빈 테이블에 앉혔다.
식당 메뉴 중에 소화 잘되고 유럽인 입맛에 부담없을 만한 메뉴를
두어개 고른 후 식당 종업원애들한테 돈은 내가 낼테니
이 양반한테 좀 갖다 주라고 했다. 커피랑 음료수와 함께.
할배가 식사를 하는 동안 무슨 일인지 좀 자세하게 물어보고 싶었으나
말이 안 통하는 관계로다 허겁지겁 먹는 모습만 지켜볼 수 밖에 없었다.
할배가 식사를 하는 동안 가만히 생각해 보니...
만약 내가 외국에서 돈도 여권도 다 잃어버렸는데
도와주는 사람도 아무도 없다면....?
정말 아찔한 생각이 들었다.
다시 스위스 할배들이 모여있는 테이블로 가서
내가 말하는 걸 쪽지에 독일어로 적어달라고 부탁을 했다.
노숙자 할배가 식사를 마쳤을 때
쪽지와 함께 교통비와 이틀 정도 숙식을 할 수 있는
약간의 돈을 쥐어 주었다.
쪽지에는 "여기는 당신을 고향으로 보내 줄 영사관이나 대사관이
없으니 수도인 OO시로 간 후 영사관이나 대사관을 찾아가서
도움을 요청하세요"라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호텔 앞에 상시 대기하고 있는 오토바이 택시 중 하나를 불러서
이 할배를 OO시로 가는 버스터미널에 데려다 주라고 했다.
그렇게 그 할배를 떠나 보냈다.
그리고 일주일쯤 후
식당 종업원 하나가 내게 와서 말하길
어제 밤 로컬TV 뉴스에서 봤는데
그 노숙자 할배가 근처 바닷가 모래사장에서 죽은채로
발견되었다는 것이다.
순간 멍~해지는 것이 아무 생각도 나질 않았다.
느낌상 한 30분은 그 자리에 멍하니 앉아 있었던거 같다.
30분쯤 지나니 정신이 좀 들면서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걸까? 궁금증과 함께
죄책감과 자책감이 마구 밀려 들었다.
당시 그렇게 보냈던게 최선이었을까?
차라리 그렇게 보내지 말고 경찰서에 데리고 갔더라면
적어도 이런 일까진 생기지 않았을지도 모르는데...
집에 가고 싶다던 할배는 왜 OO시로 가지 않았을까?
짐작가는 것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이 곳은 불나방처럼 전 세계에서 별의별 관광객이 다 몰려들고
매일매일 온갖 천태만상이 펼쳐지는 곳이기 때문이다.
온갖 생각과 감정으로 복잡해진 심정을 달래려
밖에 나가 담배 한 대를 피워 물었다.
태양이 뜨겁다!
여기저기 화려한 옷차림에
즐거운 웃음을 흘리며 걷고 있는 관광객들을 보니
괜시리 인생의 허무함과 씁쓸함이 느껴졌다.
기분 탓이겠지?
아니면...
알베르 까뮈의 소설 '이방인'에서 뫼르소가 한 말처럼
이 모든건 태양 탓이고
정녕 인생엔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일까?
- 끝 -